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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출신 염재 송태회 선생의 삶과 예술 조명 (브레이크뉴스 2010/09/28 [10:44]

화순 출신 염재 송태회 선생의 삶과 예술 조명

박종석 화백 ‘세한을 기약하고’ 출간, 10월 11~16일 화순서 전시회

 


화순 출신 염재(念齋) 송태회(宋泰會·1872-1941)의 삶과 예술을 조망해 보는 전시회가 10월 11~16일까지 그의 고향 화순읍 농협 하나로 마트 문화센터에서에서 열린다.

한말 교육자이자 서화가로 근대 ‘호남화단의 마지막 시(詩)·서(書)·화(畵) 삼절(三絶)’로 불리는 염재 송태회는 호남 화단만이 아닌 우리나라 근대회화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출생지(화순)와 활동했던 지역(고창)이 다른 때문인지 당시 화단의 비주류인 양 지금까지는 그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이나 심도 있는 조명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을 타파하고 염재의 삶과 예술을 종합적으로 재조명하는 역작이 최근에 출간됐다.

광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화가 박종석(53) 화백은 최근 조선시대 말기에 태어나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교육자이자 서화가인 염재 송태회 선생의 일대기를 종합한 저서 「세한(歲寒)을 기약하고」(굿디 커뮤니케이션스 출판사)를 출간했다.

‘염재 송태회의 삶과 예술’이라는 부제를 붙인 이 책에서 박 화백은 송태회의 일대기는 물론 호남 회화사의 흐름과 호남의 예인들을 일목요연하게 풀어놔 학술적 가치를 더했다.

특히 이 책은 저자가 7년 동안 전국을 돌며 자료를 수집, 그의 일대기를 집대성한 것이어서 학문적·사료적 가치가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염재는 위창 오세창과 매천 황현, 근촌 백관수 등 일제식민지 시절 우국지사들과 민족정신을 고취시킨 인물이다. 또한 투풍불굴의 예술정신으로 일관한 고암 이응로의 최초 스승이기도 하다. 고암의 민중적 저항을 상징한 작품 ‘군상’이 묵죽화의 정신으로부터 연유했다는 것도 결코 우연만은 아니다.

그는 또한 화순과 고창 등 이 지역에서 대한제국기와 일본강점기라는 격변기를 거치면서도 민족교육과 서화가로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박종석 화백은 "전남 화순 출신으로 1519년 기묘사화때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선생의 시신을 염했던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선생의 논문을 대학원때 쓰면서 호남화단의 뿌리에 관심을 느껴 화순 출신 재야 예술인들을 조명하게 됐다"며 "한국 근대화단의 큰 인물이지만 제대로 된 논문 하나 없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서화가로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국권을 상실했을 때 민족교육과 예술로서 나라의 정기를 세우려는 불굴의 의지를 뒤늦게나마 조명할 수 있어 의미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염재 송태회는 누구?

송태회는 화순군 남면 사평(조선시대 전라도 동복현 외남면 사평리)에서 송긍면(1839-1922)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숙부인 사호(沙湖) 송수면(1847-1916)으로부터 서화의 이론과 실기를 교육받았다. 머리가 명석해 16세 때 과거에서 매천 황현과 함께 진사시에 급제했다. 시와 문장에 능해 시작(詩作) 경연대회서 장원을 함으로써 일찍부터 남다른 천재성을 발휘했다.

송태회는 학문에 통달하고 사리가 밝아 여러 사람들의 사표가 됐다. 22세에는 성균관 경학과 유생으로 뽑혀 유학했다.

그러나 대한제국기의 부정부패와 외세의 침략으로 사회가 어지러워지자 출사(出仕)의 뜻을 뒤로하고 붓과 벼루를 벗 삼아 마음을 달래며 시·서·화에 몰두하며 끊임없는 탐구정신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 뒤 고향으로 내려와 교육자로서의 길을 걸으며 1920년에 고창으로 이거, 고창고보에서 후진양성을 통해 오랜 세월 민족정신을 가르치는 사도의 역할을 하면서 교육에 헌신했다.

또한 그는 불교와 인연도 깊어 스님들과도 각별히 지내면서 호남에 소재한 여러 사찰에 편액 등 많은 글씨를 남겼다.

그의 행적과 학문, 사상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염재문집’ 7권 3책(미간행 필사본)이 남아있다. 또한 그의 글씨는 다양한 금석문과 순천 송광사의 도성당(道成堂), 영광루(靈光樓), 향수원(香樹院), 순천 선암사의 장경각(藏經閣), 장성 백양사의 청운당(靑雲堂), 구례 천은사 설선당(說禪堂), 수홍루(垂虹樓) 편액, 고흥 보현사와 운남산 수도암 등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다.

 

송태회[ 宋泰會 ]

출생-사망:1872 ~ 1940

:염재

출생지:전남 화순

자 평숙(平叔). 호 염재(念齋). 전라남도 화순(和順) 출생. 1888년 진사, 1900년 박사시(博士試)를 거쳐 성균관에서 수업하였다. 1901∼1907년 중국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귀국, 1908∼1910년 《대한매일신보》 기자로 활약하였으며, 국권피탈 이후는 육영에 뜻을 품고 낙향하여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1918년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에 오산고보(吾山高普)를 설립,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하였는데, 이 학교는 고창고보로 개칭된 후에도 민족교육적 학풍 때문에 타지방의 뜻있는 학도들이 많이 전입해 와 학생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 서예와 그림에도 뛰어났는데, 전라남도 순천의 송광사(松廣寺) 등 곳곳에 글씨 및 그림이 남아 있다.

 

염재 송태회의 봉명재 판액


봉명재(鳳鳴齋)는 화순군 도곡면 죽청리에 있는 죽산사(竹山祠) 강당으로, 1884년 건립되었으며,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죽산사(竹山祠)는 광산이씨 필문 이선재(畢門 李先齋):1389∼1454)을 주벽(主壁)으로 성심당 이형원, 호산 이달선 증례조판서 이공인, 수해재 이백호를 배향한 곳이다.

염재 송태회(念齋 宋泰會, 1872~1940) 화순(和順)출신으로 본관(本貫)은 여산(礪山)이며, 자(字)는 평숙(平叔)이고, 호(號)는 염재(念齋)요 말년에는 염재거사(念齋居士) 또는 염재옹(念齋翁)이라 하였다.
숙부인 사호 송수면(沙湖 宋修勉)에게 서화를 배워 그 서화의 맥을 이었는데, 시서화(詩書畫)두루 뛰어났다. 진사와 박사시(博士試)를 거쳐 성균관에서 수업하였다. 1901∼1907년 중국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귀국, 1908∼년 《대한매일신보》 기자로 활약하였으며, 국권피탈 이후는 육영에 뜻을 품고 낙향하여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송태회(宋泰會)


1872년(고종 9)∼1941년. 일제강점기 기자·학교 설립자·항일운동가·서예가. 자 평숙(平叔). 호 염재(念齋)이다. 본관은 여산(礪山)이고, 전라남도 화순(和順) 출생이다. 1888년(고종 25) 진사시에 합격하고, 1900년(광무 4) 박사시(博士試)를 거쳐 성균관에서 수업하였다. 1901년(광무 5)부터 중국에서 유학하였고, 1908년(융희 2)에는 《대한매일신보》 기자로 재직하였으며, 국권피탈 이후는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918년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에 오산고보(吾山高普)를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시켰다. 사호(沙湖) 송수면(宋修勉)에게 사사 받았고, 사군자와 서예를 잘하였다. 그의 그림첩인 《염재송태회서첩(念齋宋泰會書帖)》이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