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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바로알기

`정조 독살설(說)` 사실 아닐 가능성 커져 (조선일보 2009.02.10)

심환지에 보낸 正祖 비밀편지 299통 공개


"뱃속 火氣 안내려간다" 편지 쓰고 13일뒤 숨져


편지정치로 막후 조정… 다른 파벌에도 보낸듯

이번에 발견된 '정조어찰첩(御札帖)'은 정조의 통치 스타일과 정조 시대 정치사는 물론 항간에 나돌던 '정조 독살설'의 진위를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과 한국고전번역원이 9일 주최한 〈새로 발굴한 정조 어찰의 종합적 검토〉학술회의 발표논문을 통해 새롭게 밝혀진 사실을 정리한다.

심환지에게만 어찰을 보냈을까

정조 어찰은 9일 공개된 것 이외에 지금까지 200여 통 정도 전해진다. 고문헌연구가 박철상씨는 정조가 외사촌 동생 홍취영(洪就榮)에게 보낸 어찰 39통(삼성미술관 리움), 남인 영수 채제공에게 보낸 어찰과 정조 호위부대인 장용대장을 지낸 측근 조심태에게 보낸 어찰 15통(이상 수원 화성박물관), 외가에 보낸 《정조간찰첩》(正祖簡札帖·국립중앙박물관) 등이 있다고 밝혔다. 정조 어찰의 수신자는 5명 안팎으로 대부분 측근에서 정조를 모시던 신하이거나 친인척이었다. 정조는 노론 벽파(僻派) 영수 심환지와 남인 영수 채제공에게 서찰을 보냈으므로, 노론 시파(時派)와 소론(少論) 등 다른 파벌에도 어찰을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 김문식 단국대 교수는 "(정조 측근인) 서용보나 이서구는 물론, 시파계 인물에게도 어찰이 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편지를 모은‘정조어찰첩’을 공개하고 있는 김문식₩안대회₩진재교 교수(왼쪽부터). 왼쪽 서한 이“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일이 모두 고생스럽다”고 쓴 1800년 6월 15일자 마지막 편지다. 정경렬 기자 krchung@chosun.com
막후 조정에 능한 정조의 통치술

정조는 심환지에게 시간을 가리지 않고 어찰을 보냈다. 1797년 1월17일에는 하루에 4통을 보냈고, 1799년 9월20일에는 아침에만 3통을 보냈다. 두 사람은 이렇게 편지를 주고받으며 당대 인사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주요 인사 문제를 협의하고, 정국 운영에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 정조는 1798년 심환지를 우의정에 임명했다. 정조는 그 해 8월10일 예조판서 심환지에게 "금강산 1만2000봉을 유람하는 일이 매우 통쾌한 일인데, 공명을 누린 사람이 산수의 즐거움까지 누린다니 어떨지 모르겠다"고 썼다.

다음 날에는 "1~2일 안에 휴가서류를 올리고 길을 떠나라"고 하면서 정승으로 발탁하겠다는 언질을 줬다. 정조는 8월28일 심환지를 우의정에 임명하고 조정에 올라오기를 독촉하는 글을 금강산에 보냈다. 정조는 비밀편지를 통해 심환지가 사직소를 올릴 시기와 문안(文案)까지 상의한 끝에 10월28일 심환지를 조정에 불러들였다. 이런 내용을 알 길 없는 정조 측근 서용보는 심환지가 느닷없이 여행을 떠나자 뒷말이 생길 것을 걱정했다. 정조의 막후 정치에 측근조차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것이다.

'정조 독살설'의 진위

"나는 뱃속의 화기(火氣)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는 않는다. 여름 들어서는 더욱 심해져 그동안 차가운 약제를 몇 첩이나 먹었는지 모르겠다."(1800년 6월15일)

정조는 이 편지를 쓴 13일 뒤인 6월28일 등에 난 종기가 덧나면서 갑작스레 죽음을 맞았다. 일부 학계는 물론 소설과 드라마·영화에서는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와 그 배후에 있던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대비를 '정조 독살설'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정조의 비밀 편지는 이런 음모설이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조는 심환지에게 자기 병세를 여러 차례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1800년 4월17일자 편지는 "나는 갑자기 눈곱이 불어나고 머리가 부어 오르며 목과 폐가 메마른다"고 썼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는 "정조가 마지막 편지에서까지 심환지에게 자기 병세를 알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심환지에게 독살당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