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바로알기

정조(正祖)의 두 얼굴 (조선일보 2009.02.10)

세종과 함께 조선의 대표적 명군(名君)으로 꼽히는 정조의 젊은 인재 사랑은 유별났다. 조선 후기 개혁과 문예중흥의 산실이 된 규장각을 설치, 정약용 이덕무 유득공 등 준재들을 불러모으고 '객래불기'(客來不起·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말아라)라는 현판을 직접 써주었다. 아무리 권세 있는 신하라도 함부로 와 간섭할 수 없도록 보호하고 힘을 실어준 것이었다.

▶이런 정조가 젊은 학자들에게 불같이 화를 낸 적이 있다. 그들의 문장이 순정(純正)한 격식에서 벗어나 시정잡배의 글을 닮아간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덕무 박제가 따위는 그 문체가 완전히 패관(稗官) 소품에서 나왔다. 이들은 처지가 남과 달라(서얼 출신) 이런 문장으로 존재를 드러내고자 한다." 정조는 박제가에겐 반성문까지 쓰게 했다. 표암 강세황의 손자 강이천에 대해선 "재능이 좀 있을 뿐 그 문체는 빠르고 들뜨며 경박한 소품"이라고 타박했다.

▶정조는 스스로 호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했다. '온 냇가를 비추는 밝은 달과 같은 존재'라는 뜻이다. 국왕을 넘어 군사(君師·임금이자 스승)로서 스스로 모범을 보여 신하와 백성을 교화해가겠다는 의지와 자신감이 담겨있다. 실제로 그는 저서(홍재전서) 100책을 남긴 호학(好學) 군주였다. 그의 파초 그림은 문인화의 높은 경지를 보여준다.

▶정조가 신하 심환지에게 보낸 299통의 사신(私信)이 그제 공개됐다. 그 편지들에서 정조의 또 다른 얼굴을 읽는다. '입에 젖비린내 나는 놈' '호로자식(胡種子)' '욕을 한 사발(一鉢辱說)이나 먹게 만들었으니' '꽁무니를 빼고(拔尻)'…. 어느 모로 보나 "고문(古文)으로 돌아가라"며 젊은 학자들을 매섭게 나무라던 임금이 쓸 격조 있는 문투는 아니다. 정조가 편지를 통해 심환지를 움직여 자기 구상대로 정국을 만들어나가려는 노회한 정치기술의 흔적도 있다.

▶이런 편지를 놓고 "우리가 알고 있던 정조의 얼굴이 아니다"라는 당혹의 목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정조는 정조일 따름, 후대인들이 정조의 온전한 모습을 보지 않고 입맛대로 그림을 그렸을 뿐이다. 고문과 현대문(소품문), 이상과 현실정치 사이에서 방황·모순·충돌하는 정조의 모습에서 18세기 계몽군주의 고민과 시대 분위기를 읽는다. 우리는 성군(聖君) 정조를 잃은 게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한 또 하나의 정조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