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바로알기

이규태코너] 宿世歌 (조선일보 2003.07.21)

  • 이규태코너] 宿世歌

  • 명종 때 정승 상진(尙震)의 증조부 상영부(尙英孚)는 재물이 많아 이식을 놓고 살았는데 만년에 그 차용증서를 모두 모아 불 살랐다. 그 연기가 하늘 높이 이르는 것을 보고 반드시 감천하여 좋은 후손을 보리라고 둘레에서 말들 했다. 그러하고 태어난 것이 상정승이다.

  • 맞추지 않은 예언이 없었다는 소문난 점복가 홍계관(洪繼寬)으로부터 죽을 날을 예언받은 상정승은 사후를 정리하고 운명을 기다리는데 죽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홍계관이 찾아가 죽을 사람을 살려준 음덕(陰德)으로 연명하는 경우가 있는데 생각나는 게 없습니까 물었다. 젊었을 때 밤길에 붉은 보자기를 줍고 보니 대전 수라간에서만 쓰는 그릇인지라 이를 몰래 수소문하여 훔친 궁인(宮人)에게 돌려준 적이 있음을 상기했다. 궁의 물건을 훔치면 베어 죽이게 돼있었기에 죽을 사람 살려준 것이 된다. 상정승은 그후 자신의 사주팔자보다15년을 더 살았던 것이다.

  • 어릴 적 숲에 가 놀다가 벌에 쏘여 뽀빠이처럼 부어오른 팔을 들고 돌아오면 할머니는 된장을 환부에 발라주며 「남의 참외밭에 서리한 적 있지」하고 물었다. 아니라면「서리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하며 집요하게 벌에 쏘인 인과(因果)를 따졌던 생각이 난다.시집간 딸이 남편에게 얻어맞고 와서 울면 할머니는 몇 달 전 동냥온 걸승에게 시주를 미루고 보낸 일의 응보라면서 자신의 잘못으로 딸의 와이프 비팅을 합리화하던 할머니다.

  • 불교에서 전세 현세에 저지른 행위 곧 업(業)은 그것이 인(因)이 되어 현세 내세에 응분의 과(果)로 나타난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만큼 한국인을 사로잡았던 사상도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좋은 일이 생기거나 궂은 일이 생길 때마다 현세에 자신이 저지른 행위나 전생에 자신이 저질렀을 행위에 대한 당연한 업보(業報)로 합리화했으니 사람들이 선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유교의 도덕이 사람을 선하게 하기 이전의 한국사람과 사회를 바로잡은 것이 바로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사상이었던 것이다.

  • 능산리 백제고분에서 발굴된 목간에 새겨진 1500년 전의 숙세가(宿世歌)는 희귀한 고대가요의 문학사적 발견도 값지려니와 전생에서 맺은 인연으로 함께 태어났으니 갈등없이 잘 살아보자는 인과사상이 구현되어 한국정신사도 싱그럽게 하는 발견이 아닐 수 없다.

    (kyoutae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