賢人에게 길을 묻다 / ① 다산 정약용 ‥ 정치판에 `空理空論` 넘치고…
복지부동 관료 입으로만 혁신 … 200년전 악습 지금도 되풀이
"200년 전과 달라진 게 어찌 하나도 없는가. 이해가 같으면 제 편이고,다르면 내치는 당동벌이(黨同伐異)의 시대라니…."
국회가 아수라장이 됐던 지난 3일. 다산 정약용 선생은 이렇게 운을 뗐다. 예나 지금이나 불신투성이인 정치에 대한 쓴소리다. 형과 조카를 형장의 이슬로 보내고 스스로도 18년간 유배객으로 살아야 했던 다산.절망을 학문으로 승화시키며 530여권의 책을 남긴 다산의 이승에 대한 평가는 서릿발처럼 날카로웠다. "현실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공리공론(空理空論)만 난무한다"는 것.
정치만이 아니었다. 국가운영 시스템에 대해서도 따끔한 일침을 놓았다. 공직자들의 농가보조금 부당 수령에 대해 "탐욕을 없앨 수는 없다"며 "국가가 먼저 시스템을 갖춘 후 의리를 물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백가쟁명(百家爭鳴)에 대해선 "아고라니 미네르바니 헛된 논쟁으로 나라가 들썩이는 걸 봤다"며 "무릇 토론이란 남김이 없어야 하지만 글을 쓸 때는 수백년 동안 전해져 조롱을 받지 않을지를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경제 위기로 실의에 빠진 후세들을 위한 격려와 경계의 말도 잊지 않았다. "시련의 때에 그 사람의 진면목이 나타나는 법이다. 요즘 같은 때일수록 배워선 안 될 말 가운데 으뜸인 것이 아무 의미 없이 하루를 사는 '소일(消日)'이다. "
"내가 살던 시대는 주류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이는 불의의 시대였네.복사뼈에 세 번 구멍이 나고,이와 터럭이 모두 빠지도록 학문에 열중했으나 설 자리가 없었지.그러기에 아들들에게 내 책 모두를 불구덩이에 처넣어도 괜찮다고 했네.내 시대엔 이루지 못한 꿈을 후손들은 누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기에 안타깝기 짝이 없다네."
▶새해 덕담도 없이 타박부터 하시니 당혹스럽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탐탁지 않으신지요.
"정치일세.내가 '금정찰방'이란 말단 지방직에 있던 1795년(당시 33세),어린아이에게까지 부과된 가혹한 세금을 견디지 못해 생식기를 자른(絶陽) 남자가 있었지.그런데도 정치인들은 파당으로 무리짓는 데만 여념이 없었네.
정치가 퇴폐해 나라가 가난해지고 민심이 떠나고 있었는데도 말일세.200년이 더 지난 지금도 어찌 그리 똑같은가. 경제가 어려워 민생이 파탄날 지경인데 당파들은 그저 당쟁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국가의 녹을 먹는 관리들도 문제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특히 정3품 이상의 당상관(고위 공무원)들이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네들의 임금(이명박 대통령)이 공직자에게 뒷일은 걱정 말고 과감히 정책을 내라고 명했다고 들었네.참 딱하네 그려.명철보신(明哲保身)과 복지부동(伏地不動)의 차이를 알면 공직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일세.본래 명철보신은 '선악을 분별하고,시비를 판별하며 내 부족한 점을 붙들어 세워 나라를 위해 일하라'라는 뜻일세.당시에도 이를 복지부동으로 해석해 나라의 곳간만 축내는 관리들이 많았지.무릇 공직자는 처신에 능할 게 아니라 위민(爲民)에 능해야 하네."
▶국가를 경영하는 데 시스템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는데요.
"향리론에서였네.당시 향리는 일정한 급여가 없는 데다 5,6년씩 뽑지 않기도 했지.그러다보니 한 번 뽑히면 마치 주린 범이 돼지를 얻고,배고픈 매가 꿩을 만난 것처럼 잔혹하고 매서웠지.나라가 시스템을 갖춰놓지 않았으니 공직자의 부정부패와 복지부동을 덮어놓고 나무랄 일이 아니라는 얘기일세."
▶요즘 시대엔 모두 부자를 꿈꾸고 있습니다. 부자가 되기 위한 비법이 있으면 말씀해주시지요.
"옛글에 '엽전 열 꿰미(관.貫과 같은 의미.1관은 10냥,1냥은 100문임) 이상은 손쉽게 사용해야 하고,엽전 1문(文.엽전을 세는 최소단위)이나 2문은 무겁게 지니고 내놓지 말아야 한다'고 했지.작은 것을 손쉽게 여기는 사람은 헛된 낭비를 줄이지 못한다는 얘기네."
▶이명박 정부 들어 실용이 화두로 등장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생전에 실용을 강조하셨는데요.
"30세 때 왕께서 수원성을 설계하라는 명을 내리셨네.당시 두 가지 변화를 꾀했네.강제노동 대신 역부를 모집(성과급 방식의 임금 노동 적용)한 게 첫 번째였고,문헌을 뒤져 기중가(起重架.기중기) 등 새로운 기계를 만들어 사용한 게 두 번째였네.
역부를 모집한 까닭은 나랏일이 고역이 아니라 돈벌이가 되도록 하자는 것이었지.발상의 전환이었던 셈이네.또 기중가를 적용한 덕분에 4만냥의 비용을 절약했네.내 말뜻을 알겠는가. 인순고식(因循姑息.인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눈앞의 편안함만 추구한다)을 벗고 변례창신(變例創新.옛것을 참조해 새것을 만들어 낸다)의 길로 가는 것이 실용이란 얘기일세."
▶경제가 어렵다보니 민심도 피폐해지는 것 같습니다. 경제 정책이 실효를 거두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둘째형인 손암 선생(정약전.자산어보를 쓴 인물)의 글을 빌려야겠구먼.선생은 흑산도 유배 시절 소나무 벌목을 엄격히 규제한 나라 정책이 얼마나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지에 대해 짚으셨네.모든 산을 봉산(封山.나라에서 사용하기 위해 벌채를 금한 산)처럼 규제하고 조금이라도 어기면 엄벌했지.
금지하는 법조항이 세밀해질수록 백성들의 고통은 더욱 심해지니 누가 나무 심고 키우기를 즐겨 하겠는가. 오히려 소나무만 없다면 핍박이 줄어들 것이라 생각해 몰래 베어 없애는 지경에 이르렀네.200년 넘는 세월이 흘렀으니 똑같이 적용하긴 어렵겠으나 나라의 경제 정책이 따라야 할 이치가 여기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일세."
▶글로벌 경제위기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요.
"나는 막내형과 조카를 형장의 이슬로 잃었네.평생을 함께한 지기들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했고.친가 및 외가 일족 중엔 노비로 전락한 이들도 숱하다네.나 스스로도 18년을 유배지에서 보낸 건 물론이고.절망을 이겨내는 것에 왕도가 있을 리 없으나 나는 학문에서 길을 찾았다네.때론 불행이란 밤톨 한 알을 잃어버린 어린아이의 울음과 같은 것일세."
▶후대의 직장인들은 새해 사자성어로 은인자중(隱忍自重)을 꼽았습니다만.
"천하에 배워서는 안 될 두 글자의 못된 말이 있네.'소일(消日)'이 그것일세.힘들수록 자신을 갈고 닦는 데 힘써야 한다는 얘기네.무조건 숨죽이고 있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지.시련의 때에 그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법이니 사람의 가슴 속에는 한 마리 가을 매가 하늘을 박차고 오르는 기상이 있어야 하네.무엇이든 전문가가 되려는 자세도 필요하네.나는 아들들에게 닭 한 마리를 기르더라도 책을 쓰라고 가르쳤네."
▶옳은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범인들이 실행하기는 쉽지 않아 보이는데요. 상황이 어려울수록 경계해야 할 것으로 무엇을 꼽을 수 있겠습니까.
"천하엔 두 개의 큰 기준이 있으니 하나는 옳고 그름이고,다른 하나는 이롭고 해로움이네.여기에서 네 단계의 큰 등급이 나온다네.먼저 옳은 것을 지키면서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높은 등급이지만 세상에 이런 일은 흔치 않네.옳지만 내게 해가 되는 일을 하는 게 차선(次善)이나 대개 하기 싫어하지.이런 이유로 범인들은 옳지 않음을 알면서도 결국엔 옳지 않은 이익을 추종해서 해를 입고 마는 경우가 많네.어려울수록 이를 명심했으면 하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도움말 주신 분=박석무 한국고전번역원 원장,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김문식 단국대 역사학과 교수
◆참고문헌=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이덕일 저),정선 목민심서(다산연구회 역),다산선생 지식경영법(정민 저),다산어록청상(정민 저),다산 정약용(금장태 저)
---------------------------------------------
◆ 다산은 누구인가
다산 고향집의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다. '망설이면서(與),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같이 주저하면서(猶),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한다'는 의미다. 다산은 1800년 그의 나이 38세 때 정신적 지주이던 정조가 승하하자 세상과의 절연을 결심하며 이 당호를 지었다.
다산은 무엇을 두려워했던 걸까. 당시 상황은 주류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이는 불의(不義)의 시대였다. 주류는 노론 벽파였고,정약용은 그들의 정적인 남인의 핵이었다. 조선 후기 대표적 천주교 탄압 사건인 신유박해(1801년) 때 다산은 천주교도로 몰려 18년간을 유배지에서 살아야 했다.
다산이 살던 시대는 이랬다. 서학(西學)에 발을 디뎠다는 이유만으로,단지 남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가문이 절멸되는 시대였다. 서민들의 삶도 궁핍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다산은 "아침 점심 다 굶다가 밤에 와서 밥을 짓고,집안의 물건이라곤 다 뺏겨 검푸르고 해진 무명이불 한 채가 전부인 서민들이 천지에 가득하다"며 현실을 아파했다. 암행어사 시절에는 지방관의 비리를 적발하며 '나라가 백성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임금께 올리기도 했다.
다산은 '다산학'이란 사상 체계가 따로 있을 만큼 경학 예학 행정.법학 교육 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대학자이기도 하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분야에서 동시에,그것도 아주 탁월한 성취를 이룩한 것은 경이요,우리 학술사의 불가사의"라고 말할 정도다.
실용에 맞지 않으면 임금 앞에서도 승복하지 않았고,진리를 위해서라면 주자(朱子)와도 맞섰으며,처절한 불행 앞에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았던 다산에게서 다시금 혜안(慧眼)을 구하는 이유다.
-------------------------
◆다산 연보
△1762년,나주 정씨 재원과 어머니 해남 윤씨 사이에서 출생
△1792년,홍문관 수찬으로 수원성 축성
△1794년,경기 암행어사
△1795년,금정찰방으로 좌천
△1797년,사직 상소문 제출,곡산부사
△1801~1818년,전남 강진 등서 18년 유배생활.목민심서 등 530여권의 책 저술
△1830년,마재 자택서 서거
'역사 바로알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규태코너] 宿世歌 (조선일보 2003.07.21) (0) | 2009.06.07 |
---|---|
이두로 쓴 最古의 백제 詩歌 발견 (조선일보 2003.07.17) (0) | 2009.06.07 |
최악의 정치는 국민과 싸우는 것 (한국경제 2009.01.09) (0) | 2009.06.05 |
君子의 선물, 小人의 선물 (한국경제 2009.01.17) (0) | 2009.06.05 |
백제시대로 돌아가는 타임머신 (매일경제 2009.06.03) (0) | 2009.0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