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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국제분야

이란, 시위대 7명 사살… 정국 극도 혼미 (조선일보 2009.06.17)

이란, 시위대 7명 사살… 정국 극도 혼미

재검표 명령 내려졌지만 부정선거 규탄시위 확산 세계 각국 "진실 밝혀야"

선거 부정 논란으로 얼룩진 이란 대선 정국이 유혈사태로 치달으면서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고 있다.
15일 오후 수도
테헤란 아자디 광장에서 수십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개최된 반정부 시위가 끝날 무렵, 일부 시위대가 친(親)정부 청년 민병대 바시즈의 초소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바시즈 대원들의 총격을 받아 최소 7명이 숨졌다고 이란 국영 프레스TV가 16일 보도했다. 실제로는 훨씬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다는 주장도 나온다. 부정 선거 의혹으로 이미 전국적인 대규모 폭력시위가 반복되는 가운데, 시위대 사살(射殺)이란 돌발 변수까지 더해져 혼돈에 빠진 이란 정국의 앞날을 예측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가장 난처해진 것은 이란에서 대통령보다 큰 권력을 가진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Khamenei)다. 그는 지난 13일 개표 조작 논란에도 불구하고 보수 강경파인 현 대통령 마무드 아마디네자드(Ahmadinejad)의 승리를 일사천리로 추인했지만, 15일 오전 돌연 입장을 바꿔 선거 관리를 총괄하는 헌법수호위원회에 재검표 명령을 내렸다.

"내 표를 돌려달라" 15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 거리를 가득 메운 미르 호세인 무사비 후보의 지지자들이 이번 대선은 부정 선거라며 행진하고 있다. 무사비 지지자인 한 남자는“내 표를 돌려달라”고 적은 종이를 들고 있다./신화 뉴시스
그 역시 개혁파 미르 호세인 무사비(Mousavi) 후보(전 총리) 지지자들이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최대 규모로 연일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그 '분노의 열기'가 지방으로 급속히 확산되는 상황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재검표 지시는 무사비 진영의 예봉을 꺾기 위한 차원에서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시늉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날 오후 시위대 사살이란 대형 악재가 터진 것이다. 하메네이는 또다시 난관에 봉착했다. 시위대가 희생자 문제를 이슈화해 정권을 압박할 경우, 하메네이는 재검표 결단보다 훨씬 과감한 대책을 내놔야 할지 모른다.

세계 각국도 이란의 유혈 사태를 염려했다. 15일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각국은 자국 주재 이란 대사를 불러 폭력사태에 대한 우려를 전달하고, 이란 선거 부정 논란의 진실 규명을 강력히 요구했다. 반면 버락 오바마(Obama) 미 대통령은 부정선거에 대한 언급은 회피한 채 "이란 지도자가 누가 될지에 대한 결정은 이란인들에게 달렸다"며 '말조심'을 했다.

대선에서 아마디네자드 현 대통령에게 패한 개혁파 무사비 전 총리(가운데)가 15일 이란 테헤란 거리로 쏟아져 나온 지지자들에게 연설하고 있다./AP연합뉴스

이제 공은 무사비 진영으로 넘어갔다. 13일부터 줄기차게 요구해온 재검표를 15일 하메네이가 전격 수용한 상황에서 무사비가 앞으로 활용할 수 있는 카드는 시위대 피살 문제다. 이 문제가 발포 책임자 처벌이나 대통령 사과를 요구하는 수준에 그칠지,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상황으로 발전할지는 아직 예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무사비도 시위 군중의 반응을 지켜보며 대응 수위를 결정해야 하는 입장이다. 이슬람 틀 안에서의 온건한 개혁을 꿈꿔온 무사비는 국가가 혼란에 빠지는 걸 원치 않는다. 무사비가 시위대에게 자제를 거듭 호소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주도적으로 희생자 문제를 정치 이슈화해 민중 봉기를 호소하거나 체제 붕괴를 꾀할 가능성은 낮다.

유달승 한국외국어대 이란어과 교수는 "헌법수호위원회가 재검표 결과를 발표하는 시점은 무사비 진영의 투쟁 수위에 맞춰 조정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바살리 카드호다이(Kadkhodai) 헌법수호위원회 대변인은 16일 "일부 후보들이 요구하는 투표 무효화 주장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해 재검표가 사실상 요식 행위임을 시사했다. 하메네이의 결정으로 잠시 수그러든 투표 무효화 요구가 재검표 결과가 발표되는 시점에서 이란 정국을 뒤흔드는
뇌관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