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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중 국

줄서기 세상 절대 권력을 좇았더니… (한국경제 2010/05/17 20:19)

중국 고전 인물열전] 줄서기 세상 절대 권력을 좇았더니…

(1) 이사(李斯)

선거철은 이합집산의 계절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마찬가지이므로 소신이 있느니 없느니 탓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장수선무(長袖善舞)라는 말대로 소매가 긴 사람이 춤을 잘 춘다. 조건이 좋으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고,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출세하는 데 분명 유리하다. 만나는 사람에 따라 운명이 바뀐 사례로 이사(李斯)만한 사람이 없다.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이사는 초나라 상채(上蔡) 사람으로 젊어서 군에서 낮은 벼슬아치 노릇을 했다. 어느 날 그는 쥐 두 마리를 보고 처세의 원리를 깨쳤다. 변소에 있는 쥐는 사람이나 개가 나타나자 깜짝 놀라 도망을 갔다. 그런데 창고 안에 있는 쥐는 쌓아놓은 곡식을 먹으면서 '여유있게' 지내며 사람이 나타나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이사는 두 쥐를 보고 "사람이 어질다거나 못났다고 하는 것은,비유하자면 이런 쥐와 같아서 자신이 처해 있는 곳에 달렸을 뿐이다(人之賢不肖譬如鼠矣,在所自處耳)"라며 출세를 위해 새로운 모험을 하기로 다짐한다. 곧바로 진나라로 향한 그는 당시 승상인 여불위(呂不韋)를 찾아가 그의 사인(舍人),즉 집사가 됐다. 이후는 출세가도였다. 진시황의 생부이기도 했던 여불위가 추천해 진시황을 만난 그는 막강한 진나라에 눌려 바짝 엎드려 있는 다른 6개국이 힘을 합쳐 합종하기 전에 그들의 의도를 분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시황은 그를 궁궐의 모든 일을 총괄하는
관리의 우두머리인 장사(長史)로 삼는다.

절대 권력자의 신임을 얻은 이사는 제후국을 돌아다니며 뇌물도 주고, 협박도 하며, 이간책도 쓰는 등 갖은 계략을 동원하여 결국 객경(客卿)이 된다. 그 사이에 자신을 찾아온 한비자(韓非子)도 제거하는 무자비함을 서슴없이 드러낸다. 한비자는 그와 함께 순자(荀子) 문하에서 유학을
공부한 동문이었다.

그를 제거하려는 시도도 많았다. 이사는 기존 세력들이 자신을 내쫓으려 진시황을 설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유명한 간축객서(諫逐客書)를 진시황에게 올렸다. 진 목공이 다섯명의 인재를 타국에서 데려와 서융의 우두머리가 된 것은 '태산불양토양 하해불택세류(泰山不讓土壤 河海不擇細流:태산은 흙을 사양하지 않고 큰 강과 바다는 물줄기를 가리지 않는다)'란 열린 마인드를 지녔던 덕분이라며 비유적으로 진시황을 추켜세우고 개방인재론을 설파했다. 이 한마디로 그는 오히려 권력의 주류로 급부상했다.

이후 그는 '분서갱유'로 대표되는 가혹한 조치로 사상과 문화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등 각 방면에 일대 개혁을 단행하면서 진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자로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세상일이 어찌 그런가. 제비나 참새가 지붕이나 처마 밑을 떠나게 되면 매나 송골매에게 잡혀갈 것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 세상 이치다. 나보다 강한 자는 어디든 존재하는 법이다. 이사 못지 않은 권력욕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 잔뜩 몸을 움츠리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환관 조고(趙高)였다. 50세에 객사한 진시황을 이어 영원히 재상 자리를 유지하려는 이사의 야심을 알았던 조고는 회유와 협박이라는 전략적 카드를 쓰며 이사를 흔들었다. 결국 이사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유서위조 사건에 연루되면서 허리가 베이는 참혹한 죽음을 맞는다.

이사보다 강한 자는 그가 그토록 경계했던 몽염(蒙恬)장군이 아니었다. 만리장성을 짓는 공을 세워 진시황의 총애를 받은 몽염이 이사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결국 그는 엉뚱하게도 평소 "궁궐에서 잡일이나 한다"던 환관 조고에게 당하고 말았다. 이사는 죽음 앞에서 세상의 이치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 탄식했지만 결국 그 비극도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었던 셈이다.

좋은 자리,높은 자리에 있을 때 자신의 몰락을 예견하는 자는 드물다. 권세를 가지고 있다 보면 아무래도 거기에 탐닉되어 오만방자해지게 돼 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겸손의 미덕을 쌓는 것은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이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다. 미래를 낙관적으로만 보지 말고 벼랑 끝에 선 것처럼 살아가는 자기관리가 필요한 것이다. 당선되는 그 날로 이런 다짐부터들 하시길.

김원중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김원중 교수는 충남대 중문과와 대학원을 거쳐 성균관대 중문과에서 중국 고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문화사>등을 썼다.

[중국 고전 인물열전] (2) 관중(管仲) "풍족해야 명예와 치욕을 안다" (한국경제 2010/05/21 18:32)
친구덕에 재상되어 30년 경제정치

제(齊)나라 환공(桓公)을 돕는 재상이 되어 그를 춘추오패로 만든 관중(管仲:?~BC 645)만큼 운도 따르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사람도 많지 않다. 그는 관포지교(管鮑之交)란 고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관중은 몰락한 귀족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빈곤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삶에 강한 의지를 갖게 됐다. 장사에 관심이 있어 어려서부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고 각 나라의 지형과 경제 상황에 대해서도 남다른 경험과 안목을 쌓았다.

절친한 친구 포숙아(鮑淑牙)와 함께 장사하다 실패하고,관직에서 세 번이나 쫓겨나고,전쟁에 나섰다가 패주하는 등 일이 꼬이기만 하는 상황에서도 포숙아가 늘 곁에서 버팀목 역할을 해주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관중과 포숙은 제나라 희공(僖公)의 눈에 들어 벼슬길이 열리게 된다.

두 사람은 두 명의 공자에게 각각 줄을 대기로 약속한다. 관중은 희공이 좋아하는 공자 규(糾)의 스승이 되고,포숙아에게는 희공이 별로 아끼지 않는 공자 소백(小白)의 스승이 되라고 권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 관중을 이해해주던 포숙아도 힘 없는 소백의 스승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관중은 집요한 설득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그런데 희공의 뒤를 이은 형편없는 군주 양공(襄公)이 살해당하면서 왕위 쟁탈전이 일어나게 되자 관중과 포숙아는 자신들의 예비 주군을 위해 서로 싸우게 된다. 관중은 소백을 활로 죽이려고까지 했으나 오히려 소백이 왕위를 차지해 환공이 됐다. 관중의 운도 끝나는 듯했다.

관중은 노(魯)나라로 망명했다가 잡혀 제나라로 끌려왔다. 제나라로 압송될 때의 일화는 그의 인물됨을 잘 보여준다. 한 지방을 지날 때 배고프고 목말라하던 그에게 그곳을 지키는 벼슬아치가 다가왔다. 먹을 것을 들고 온 그는 관중에게 은밀히 물었다. "만일 제나라에 가서 죽지 않고 임용되면 무엇으로 저에게 보답하겠습니까?" 관중의 답은 의외였다. "나는 현명한 자를 쓰고,능력 있는 자를 등용하며,공이 있는 자를 평가할 것이오.내가 무엇으로 그대에게 보답하겠소?"

관중은 이렇게 능력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자신의 처지가 비참해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강한 승부사 기질도 갖고 있었다. 죽을 운명이던 그는 포숙아의 천거로 살아난다. 포숙아는 "백성들의 부모처럼 인자하고
관대한 관중이야말로 환공이 천하를 제패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관중은 마흔에 재상에 올라 무려 30년간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재상이 된 그는 "창고에 물자가 풍부해야 예절을 알고,먹고 입는 것이 풍족해야 명예와 치욕을 안다"며 남다른 안목으로 경제를 중시하는 정치를 펼쳤다. 임금이 정책을 시행하고 형제간의 우애와 아버지와 아들 모두가 화해롭게 지내려면 일단 경제력을 갖춘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냉철한 현실 감각과 균형 감각이 있는 그에게 인의도덕이니 뭐니 하는 명분의 문제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기》 <관안열전(管晏列傳)>에 따르면 그는 재상이 되자 해안을 끼고 있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산물을 교역하고 축적해 부국강병에 힘썼으며 백성과 고락을 함께했다. 또 일의 경중을 잘 헤아려 득실을 저울질하는 데 신중했다.

결국 제나라 환공은 춘추오패가 됐다. 관중 역시 제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 시황제에게 멸망당하기 전까지 동방의 전통 강국으로 성장시켰다. 그도 재산 불리기에 열중해 제나라 왕실만큼이나 재산이 많았지만 제나라 사람들은 그가 결코 사치스럽다고 여기지 않았을 정도로 신임을 얻었다.

가인박명(佳人薄命),재승박덕(才勝薄德) 등의 고사성어는 재능과 인품을 모두 겸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말해주는 예다. 가끔은 사소한 것쯤은 털어버리고 그 사람의 역량을 보고 인물을 뽑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포용력의 소유자 포숙과 융통적이고 현실적인 관중을 두루 갖춘 재상이 나온다면 금상첨화겠지만 말이다.
(3) 안회(顔回)‥위선을 벗어던지고 정도를 걸으니…공자가 가장 아꼈던 애제자 (한국경제 2010/05/28 18:33)
강요된 시선과 사회의 편견,제도의 틀 속에 갇힌 채 하루하루 살다보면 명예나 권력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깨닫는다. 한번쯤 눈을 지그시 감고 자신의 내면을 비춰보라.삶의 행복과 이것을 지탱해 주는 힘이 사소한 데서 나온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안회(顔回 · 기원전 521~490)는 약소국인 노(魯)나라 출신이다. 공자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수제자이자 학문과 덕행의 대명사다. 장자에게도 군자로 높이 평가받았던 안회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스승 공자의 말에 어김이 없고 우직하게 행동해 겉으로 보면 아둔할 정도인 안회는 공자가 자신의 말에 한번도 이의를 달지 않는 것을 못마땅해 할 정도로 무비판적이었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에도 늘 자신의 뜻을 헤아리면서 하나하나 실천해 보였던 제자였다. 안회의 어리석음은 겉으로 드러난 문제이지 내면은 어느 제자보다도 가득 차 있었다.

《논어》에 수없이 등장하는 안회를 보면 공자가 지독하게 아꼈던 제자임을 실감할 수 있다. 3000명의 제자 가운데 핵심 인물은 77명.그중에서도 안회를 대하는 공자의 모습은 때로 평정심을 잃었다 할 만큼 칭송 일관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밥 한 소쿠리와 마실 것 한 표주박을 마시며 누추한 마을에 살게 되면 보통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뎌내지 못하는데,안회야말로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구나 안회여!(賢哉,回也! 一簞食,一瓢飮,在陋巷,人不堪其憂,回也不改其樂.賢哉,回也)"<옹야(雍也)>

공자는 서른 살이나 어린 제자 안회를 '현자(賢者)'라고 일컬으며 총애했다. 스승이 자식뻘 되는 제자를 그토록 아낀 것은 안회의 안빈낙도(安貧樂道) 정신 때문이었다. 안회는 가난이 뼛속에 스며들 정도의 힘든 역경 속에서도 여유롭게 본분에 충실했다. 공자는 수제자로 칭송하던 안회를 두고 "어기지 않는 게 어리석은 것 같다(不違如愚)"며 다소 모자란 듯한 '불급(不及)'의 처세를 평가했다.

안회의 이런 모습은 공자가 '구름 같은 존재'로 평가한 노자의 모습과도 공통분모를 형성한다. 공자는 그토록 갈망했던 관직을 얻지 못하고 14년 이상 북방 제후국을 떠돌아다닌 자기 처지에 회한이 서려 있었다. 다른 제자들 대부분이 공자의 그런 모습을 추종했지만,안회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면서 스승 공자에게 그런 길의 덧없음을 얘기하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안회는 겨우 서른한 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天亡我)"라고 통곡하며 제자의 이른 죽음을 애달파했다. 이런 생각은 사마천에게도 그대로 다가왔다. 그는 《사기》 <백이열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늘의 이치는 사사로움이 없어 언제나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 (중략) 또 공자는 제자 일흔 명 가운데서 안연이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안연은 늘 가난해서 술지게미와 쌀겨 같은 거친 음식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고 끝내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복을 내려 준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

사마천의 푸념처럼 세상에서 인과응보니 권선징악이니 하는 말들이 꼭 들어맞지 않는 경우도 많다. 청빈의 자세로 자신을 추스르면서 살다 요절한 안회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하늘의 도가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는 아직도 유효한 채 우리를 짓누르고 있기에 그렇다.

행복을 찾기 위해 너무 바쁘고 힘들게 뛰어다니지 말자. 이런 우스갯소리도 있다. 금(金)이 세 개 있으니 황금,소금,지금이 그것이다. 지금 이 순간,좀 더 여유를 가지고 안빈낙도의 정신을 음미해 보라. 풋풋했던 학창 시절의 스승을 찾아 가르침과 추억을 되새겨보며 그 시절로 돌아가 보자. 행복은 가까운 데에 있다.
[중국 고전 인물열전] (4) 상앙(商央)‥급진적 개혁으로 이룬 절대권력, 오만과 독선에 무너지고…
(한국경제 2010/06/04 18:33)
전체주의적 발상은 모든 구성원이 리더의 요구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단 한명의 반대파도 없어야 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특히 카리스마형 리더는 자신의 심리적 쾌감을 위해 수많은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하거나 조직원들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와 공포를 남기기도 한다. 상앙(商 )은 위(衛)나라 왕의 첩이 낳은 아들로,원래 성씨는 공손(公孫)이다. 젊은 시절 그는 위(魏)나라 재상 공숙좌(公叔座)를 잘 섬겨 대부의 집안일을 맡아보는 중서자(中庶子)란 자리에 오르게 된다. 공숙좌는 그의 인물됨을 알고 후임 자리로 점찍어 두었다.

어느 날 병에 걸린 공숙좌는 위문 온 위나라 혜왕(惠王)에게 자신을 대신해 나라의 큰일을 맡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혜왕이 귀담아 듣지 않자 만일 상앙을 등용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를 죽여 다른 나라로 가지 못하게 만들라는 섬뜩한 말을 남긴다. 그리고는 다시 상앙을 불러 똑같은 말을 전한다. 혜왕이 상앙을 등용하지 않으면 위험하니 멀리 떠나가라고.이 때 상앙은 자신을 등용하지 않았는데 어찌 제거하겠느냐며 유유히 자신의 자리에 있었다.

그러던 중 상앙은 널리 인재를 구한다는 진나라 효공(孝公)의 포고령을 보고 진나라에 가 어느 태감(太監)의 빈객으로 있으면서 효공을 네 번이나 만나게 된다. 두 번째 유세까지는 덕치를 얘기하는 어리석음을 범해 상대의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세 번째를 거쳐 마지막 유세에서는 효공이 상앙과 무릎이 닿는 것도 모를 정도로 혼이 쏙 빠져 그가 제시하는 변법의 천하쟁패론을 경청하게 된다.

그가 추진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이런 것이다. 군주의 절대권력 확립을 전제로 하면서 귀족의 세습적 특권을 박탈하고,지식인들의 자유로운 사상논의를 엄격히 금하는 강압과 전제주의적 통치술이었다. 결국 이런 방대한 사업을 구체적으로 추진,수도를 함양으로 옮기게 된다. 행정구역을 현단위로 개편하고 농업을 중흥시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했으며,개간사업을 진행하고 조세도 철저히 징수했다. 특히 군공(軍功)을 세우면 예우하되 사사로운 다툼은 법으로 금했고, 연좌제를 실시해 서로를 감시하게 했다.

법을 시행하던 첫 해부터 항의하러 온 자들이 1000여명이나 될 정도로 반대파들이 많았으니 그것을 감내해야 하는 효공의 부담도 컸다. 상앙은 이를 두고 효공에게 "의심스러워하면서 행동하면 공명이 따르지 않고,의심스러워하면서 사업을 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행동을 하는 자는 원래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마련이며,남들이 모르는 지혜를 가진 자는 사람들에게 오만하다는 비판을 듣게 마련입니다"라며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여론보다 자기 확신과 결단력에 의지한 리더를 요구했던 상앙은 강력한 법치를 내세운 전제주의적 리더의 전형이자 급진적 개혁가의 모습이다. 상앙의 저돌적인 개혁의지가 없었다면 진나라는 대국의 통치기반을 갖추고 대외 영토 확장 계획을 쉽게 수립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앙의 말은 틀림이 없으나 뜻대로만 굴러가지 않는 것이 세상이치다. 모든 일이 예외 없이 착착 진행되어 가던 상황은 효공이 죽으면서 평소 불만을 참아두었던 사방의 정적들이 그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형국으로 변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상앙은 위나라로 망명하기 위해 국경 근처 객사에 들렀다가 주인장이 요구한 신분증을 내놓지 못해 곧바로 신고되고 만다.

그는 결국 "아! 법을 만든 폐해가 결국 이 지경까지 이르렀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수레에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을 당해 죽게 된다. 이렇듯 상앙은 타인에 대한 지나친 엄격함 때문에 죽음이라는 부메랑을 맞은 비극적 인물이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자들의 말로가 비참한 것은 대부분 자신만은 예외일 것이라는 착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중국 고전 인물열전] (5) 형가(荊軻)‥무모하면서도 낭만적인 용기로 모든 것 날려버린 비운의 자객
(한국경제 2010/06/11 18:36)
널리 알려진 구절이다. 진시황을 죽이러 떠나며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구슬픈 노래를 불러 듣는 사람들의 눈을 부릅뜨게 하고 머리카락이 관을 찌를 듯 치솟게 만든 자객 형가(荊軻).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영웅'에서 명장면 중 하나를 꼽는다면 진시황과 형가(리롄제 분)가 마주한 장면이다. 진시황이 형가에게 자신의 칼을 던져주며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한다. 형가가 날아올라 진시황을 향해 겨눈 것은 칼끝이 아니라 칼등이었다. 결국 진시황만이 천하통일로 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진정한 영웅이란 의미다.

형가는 위(衛)나라 사람으로 책읽기와 격투기,검술을 좋아했다. 유세가가 되려 했지만 위나라 원군(元君)이 외면하자 연나라로 가 개나 잡는 이름 모를 백정과 축(筑) 타는 고점리(高漸離)와 술을 마시며 자유분방함을 즐겼다. 어디를 가도 현인이나 호걸,덕망가들과 사귀었고 그러면서도 원칙을 철저히 지키며 신중하게 처신했다. 그의 인물됨을 알아본 연나라의 선비 전광(田光)도 그런 부류였다.

때마침 연나라 태자 단(丹)이 진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연나라로 막 돌아온 후였다. 태자 단은 볼모로 있으면서 훗날 진시황이 된 정(政)과 죽마고우로 지냈다. 그런데 정이 진나라 왕이 되자 단에게 예우를 해주지 않았고 이를 원망하며 도망 온 것이다.

더구나 진나라가 산동지역으로 군대를 파견,영토 확장을 서두르면서 지리적으로 비교적 안전지대였던 연나라도 두려움에 떨기 시작하던 때였다. 결국 태자 단은 진시황 암살을 계획하고 전광에게 적임자를 묻는데,이때 형가를 추천한다. 전광은 비밀 유지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태자 단이 자신을 의심한 것을 형가에게 알린다.

의심이 몸에 밴 태자 단은 이리저리 재기만 할 뿐 속전속결로 처리하는 것이 요체인 암살 계획을 차일피일 미룬다. 결국 형가가 태자 단에게 제안하기를,당시 진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탈출해서 연나라로 도망쳐온 번오기(樊於期)의 목과 연나라의 기름진 땅 독항(督亢)의 지도를 바치는 방법으로 진시황을 만나 죽이겠다고 한다. 태자 단이 나서지 않자 형가는 번오기를 만나 연나라의 위급한 상황과 자신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말한다. 번오기는 주저 없이 스스로 자신의 목을 쳐 형가에게 던져 버린다.

번오기의 목을 상자에 담고 둘둘 만 독항의 지도 속에 날카로운 비수를 숨긴 형가는 진시황을 만나는 데 성공한다. 진시황이 번오기의 목에 만족해 하는 틈을 타 지도 속에 숨겨둔 비수를 꺼내들어 죽이려고 한다. 두 번이나 암살 시도를 겪은 진시황은 신하들이 궁전에서 어떤 무기도 몸에 지닐 수 없게 했다. 진시황은 다급한 나머지 전 아래에 있는 병사들을 부르지도 못하고 기둥을 빙빙 돌며 도망쳤고 신하들은 형가를 무기 없이 맨손으로 공격했다. 허둥지둥하는 진시황에게 어떤 신하가 "칼을 등에 지십시오!"라고 외쳤고,진시황은 그제야 칼을 뽑아 형가의 왼쪽 다리를 베고 다시 여덟 군데나 상처를 입혔다. 형가는 미소를 머금으며 "내가 일을 이루지 못한 까닭은 진나라 왕을 사로잡아 위협해 반드시 약속을 받아내 태자에게 보답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객열전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주위 신하들이 곧 몰려와서 형가를 잔인하게 죽였다. 이 일로 진시황은 연나라를 공격했고 태자 단은 연수(衍水)라는 곳의 섬에 숨어 있다가 아버지 연왕이 보낸 자에 의해 목이 베이고 만다. 태자의 복수극은 허망하게 끝났고 연나라도 5년 만에 멸망하게 된다.

형가의 무모하면서도 낭만적인 용기는 결국 자신의 목숨은 물론 연나라의 몰락을 앞당기고 말았으니 때론 무모한 시도가 모든 것을 한순간에 다 날아가게 하는 법이다.

[중국 고전 인물열전] (6) 제갈량(諸葛亮)‥군사전략과 행정의 귀재…그러나 자기 과신의 덫에 빠진 자
(한국경제 2010/06/18 18:37)
신상필벌에 엄격하고 관중과 소하에 버금가는 인물로 평가받는 제갈량은 늘 백성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의 편에 서서 법도를 정비했다. 그는 군량수송 문제로 자신을 속인 유비의 최측근 이엄을 일벌백계해 법치를 실행하고,군령을 어긴 마속을 베 공평무사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제갈량은 과연 완벽한 사람이었을까.

진수(陳壽)의 정사 《삼국지》에 기록된 그는 낭야(琅邪) 사람으로 자가 공명(孔明)이며 한나라 사예교위 제갈풍의 후예다. 제갈량은 어려서 아버지 제갈규가 세상을 떠나자 작은 아버지인 제갈현의 보살핌 아래 원술과 유표 사이를 번갈아 가며 몸을 의탁했다.

제갈현이 죽자 제갈량은 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신을 관중(管仲)과 악의(樂毅)에 비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박릉(博陵)의 최주평(崔州平),영천(潁川)의 서서(徐庶)만이 제갈량과 친교를 맺고 인정해 주었다. 서서의 추천을 통해 삼고초려(三顧草廬)한 유비를 주군으로 삼아 27세의 나이로 세상에 나와 군총사령관격인 군사(軍師)가 되었다.

물고기와 물의 관계라는 유비의 말에서 입증되듯 그는 주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던 촉나라의 2인자였다. 유비가 황제가 되면서 승상에 올랐던 그는 장비가 죽은 뒤에는 사예교위라는 직책을 겸했으며,유비가 영안(永安)에서 임종할 때 촉나라의 앞날과 아둔한 아들 유선(劉禪)을 부탁한 '영안 탁고(託孤)'는 그의 위상을 말해주는 한 징표다.

정사 《삼국지》의 기록을 보자."만일 후계자(유선)가 보좌할 만한 사람이면 보좌하고,그가 재능이 없다면 당신이 스스로 취하시오."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은 온 힘을 다해 충정의 절개를 바치며 죽을 때까지 이어 가겠습니다. " 유비는 또 후주 유선에게 조서를 내려 말했다. "너는 승상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고 그를 아버지같이 섬겨라."

스스로 아들의 제위 자리를 대신해도 좋다는 유비의 단호한 어조는 제갈량에 대한 유비의 절대적 신임 그 이상을 의미한다. 제갈량은 오장원(五丈原)에서 사마의와 싸우다가 54세에 죽기까지,사마의로부터 "천하의 기재"란 극찬을 들을 만큼 병법에 뛰어나 팔진도(八陳圖)를 만들었다. 그는 연발식 쇠뇌를 만들었고,목우와 유마까지 만들어 전쟁에 나갈 정도로
기계에 대한 식견도 대단했다.

정사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몸소 마당을 쓸었으며,죽으면서 유언을 남겨 무덤은 관이 들어갈 정도로만 간소하게 꾸미고,평소 입던 옷으로 염을 하고,제사용품을 쓰지 못하게 했다. 실로 28년 동안 한 나라를 좌지우지했으나 그의 집 주변에는 뽕나무 800그루와 메마른 땅 열다섯 이랑 정도가 전부였다.

물론 아쉬운 점은 남는다. 무모한 북방정벌을 위해 기산(祈山)을 여섯 번이나 원정해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것이라든지,위나라의 오나라 공격에 화해 제스처를 보이는 손권을 부추겨 어부지리를 챙긴 적벽
대전을 제외하면 전쟁에서 이긴 것도 별로 없다. 의형제인 관우와 장비의 원수를 갚고자 일으킨 효정지전(이릉대전이라고도 함)에서도 유비가 완패하도록 내버려 둔 것 등은 신출귀몰한 병법가였는지에 대한 의구심마저 들게 만든다.

또 북벌을 감행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쓴 출사표(出師表)의 행간 곳곳에서 확인되듯,자신의 주군인 유선을 어린아이 취급하며 비의,동윤,곽유지 등 핵심 측근에게 매사를 물어보고 처리하라는 말은 주군에게 할 말은 아닌 것이다. 적어도 제갈량이 죽고 나서도 유선은 무려 31년 동안이나 촉나라를 별 어려움 없이 다스렸다. 그러니 무식한 제왕처럼 비친 유선이 기실 제갈량이 생각했던 것보다 뛰어난 소통적 제왕이었다는 말에 무슨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겠는가.

자기 과신이 오판을 불러일으키고 과대해석을 낳는 법이다.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이 다 진실이 아닐 수도 있기에 우리는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겸허를 배워야 한다.
[중국 고전 인물열전] (7) 순욱(荀彧), 천하의 흐름 정확히 읽어내…위나라 창업의 일등공신(한국경제 2010/06/25 18:33)
탁월한 안목과 인품 지녀
조조 "나의 장자방" 극찬…20여년간 절대적 신임


주군의 인물됨을 평가해 그 밑에 있을 자리가 아니면 과감히 버리고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결단의 소유자들 가운데 손꼽히는 인물이 순욱이다. 위나라 창업공신인 그는 곽가와 정욱을 조조에게 추천해 등용케 했으며 천하의 흐름을 정확히 읽어내는 안목을 갖췄다. 비록 말년에 주군의 역린(逆鱗)을 건드려 근심 속에 죽었지만 확고한 소신과 명분으로 거의 20여년간 조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진수의 정사 《삼국지》 '순욱전(荀彧傳)'에 의하면 그의 자는 문약(文若)이다. 영천(潁川) 영음(潁陰) 사람이다. 조부 순숙(荀淑)은 순제(順帝)와 환제(桓帝) 때 세상에 이름을 떨쳤고 팔룡(八龍)이라고 부를 만큼 뛰어난 자식들도 여덟이나 두고 있었다. 순욱의 부친도 제남국(濟南國) 재상을 지낸 명문가의 자손이다.

그런 그가 당시 북방 원소의 모사로 있었으나,겪으면 겪을수록 의심이 많고 우유부단한 스타일에 실망해 스물아홉 살의 나이에 조조에게 귀의하기로 결단을 내린다. 환관 출신으로 조정 기반이 약한 조조는 순욱을 "나의 장자방(張子房)"이라고 극찬하며 위나라 창업의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된다.

순욱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조조와 원소의 일전인 관도대전에서 공융(孔融) 등 대다수의 모사들 뿐 아니라 조조마저 회의적으로 판단하는 상황을 일거에 잠재우고 넓은 영토와 강성한 군대,모사 전풍과 허유,충신 심배와 봉기,용장 안량과 문추 등 막강한 인재군을 거느린 원소를 무너뜨린 전략가였다.

당시 조조의 군사는 원소의 10분의 1 정도로 1만명이 채 못 됐다. 그중 부상을 입은 자가 2000~3000명에 달했고 군량미도 떨어져가고 있던 다급한 상황이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조조는 순욱에게 편지를 보내 수도인 허도로 돌아갈 방법을 상의했다. 이때 순욱은 이런 답장을 보냈다.

"상대를 제압하지 못하면 반드시 짓밟히게 되니,지금이야말로 천하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시기입니다. 더구나 원소는 평범한 일개 우두머리에 불과하므로 인재를 모아도 쓸 줄은 모릅니다. 공 '조조'의 뛰어난 무용(武勇)과 밝은 지혜에 의지하고 천자의 이름을 받들어 원소를 토벌한다면 어찌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순욱전)

그러면서 네 가지 승리의 당위성을 제시했으니 재능에 따라 적당한 자리를 주는
공정함,결단력과 임기응변의 전략,신상필벌의 엄격함,천하의 인재들을 몰리게 하는 인덕 등이 조조에게는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판단력에 조조는 결전을 마음먹고 천하쟁패를 위한 전쟁을 하게 된다.

결국 원소는 휘하의 많은 인재들을 등용하지 못하고 심지어 세 아들과도 불화하는 등 인화에 실패해 관도대전에서 대패,죽음을 맞이한다. 역으로 조조는 북방의 요충지를 거의 장악하게 된다.

모든 것이 잘 되어가던 건안 17년(212년)에 동소(董昭) 등은 조조의 작위를 국공(國公)으로 올리고 구석(九錫)의 예물을 갖추어 그의 뛰어난 공훈을 표창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은밀히 순욱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러나 순욱은 신하의 명분을 강조하면서 반대한다. 이런 일로 인해 조조는 순욱을 멀리하게 되었다고 정사는 적고 있다.

물론 조조가 막내인 조식을 후계자로 정하는 문제로 상의했을 때에도 순욱은 적장자론을 내세워 조비를 세워야 한다고 간언한 적이 있어 조조는 내심 불편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의도적인 내침을 당한 순욱은 나이 쉰에 근심 속에 죽음을 맞이한다. 소설 《삼국지》에서는 조조가 눈엣가시인 순욱에게 밥그릇이 빈 밥상을 하사해 순욱이 조조의 의중을 알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자살하는 장면으로 처리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는 나관중이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중국 고전 인물열전] (8) 주유(周瑜)‥손권의 오른팔, 유비 물리치고 '천하 三分' 깨려했지만…(한국경제2010/07/02 18:36)
소설 《삼국지》의 명장면인 적벽대전은 거의 1권 분량으로 그려질 만큼 흥미진진하다. 적벽대전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최근 개봉된 어우위썬(오우삼) 감독의 영화 '적벽대전2'에서는 분명 제갈량보다 주유가 주인공으로 부각되고 있다. 대체적인 스토리 전개가 소설보다는 정사에 입각한 설정으로 요약된다. 물론 적당한 소설적 요소도 가미돼 있어 제대로 된 전쟁 영화임을 보여주고 있다.

정사 《삼국지》에 의하면 주유는 건장하고 용모가 빼어난 미남형으로 어려서부터 음악에도 정통했다. 그는 자가 공근(公瑾)이며 여강(廬江) 사람이다. 종조부(從祖父)인 주경(周景)과 주경의 아들 주충(周忠)은 모두 한(漢)나라 태위를 지냈고,아버지 주이(周異)는 낙양현의 영(令)을 지냈으며 손견의 아들 손책과는 동갑으로 친구처럼 지냈다.

200년에 손책이 횡사하자 다시 손권의 오른팔이 되어 208년에 전부대독(前部大督)에 임명된다. 이 해 가을 조조가 형주를 손에 넣고 다시 수십만 대군으로 쳐들어 오니 모든 신하들이 투항하자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주유는 자신에게 정예 3만명만 주면 조조를 무찌를 수 있다고 호기를 부린다. 여기에 어부지리를 얻으려는 제갈량이 손권에게 전쟁을 부추겨 촉 · 오 동맹이 맺어지고 그 유명한 적벽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소설에 그려진 것과 달리 적벽대전의 주인공 주유는 부장 황개의 화공책 건의를 수용,정보(程普) 등 수군 수만명을 보내 촉나라와 힘을 합쳐 조조와 적벽에서 싸워 크게 깨뜨리고 군선을 불태워 조조에게 타격을 입히게 된다. 전략가인 주유는 이 전쟁에서 유비가 더 큰 이득을 볼 것으로 간파하고 유비를 경계대상 1호로 지목해 상소를 올리게 된다. 당시 제갈량의 치밀한 천하삼분 전략에 의해 손권은 자신의 여동생을 유비에게 주어 사돈을 막 맺은 상태였고,친유비파인 노숙이 형주를 유비에게 빌려주는 실책을 범했던 상황이었다.

유비가 천하의 효웅(梟雄)임을 간파한 주유는 위나라와 오나라의 양강(兩强) 구도 구축을 위해 심지어 사돈관계인 유비를 경구라는 곳에 가두자고까지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유비는 영웅다운 자태를 갖추고 있으며,관우와 장비 등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를 끼고 있으므로 틀림없이 오랫동안 몸을 굽혀 다른 사람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 가장 좋은 방법은 유비를 오군으로 옮겨 그를 위해 궁전을 성대하게 짓고 아름다운 여자와 진귀한 것을 많이 주어서 그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관우와 장비 두 사람을 나누어 각기 한쪽에 배치하고 저 같은 사람이 그들을 지휘해 싸우게 한다면 대사가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국지 주유전》

그러나 오직 북방의 조조만을 경계한 손권은 영웅을 초빙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주유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주유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적벽대전 후 조조의 좌절을 틈타 촉나라를 공격,촉을 제거하고 나서 다시 양양을 점거하고 북방의 조조마저 도모해 버리겠다는 야심을 드러내 결국 손권의 승낙을 받게 된다. 그런데 주유는 행장을 꾸려 파구를 지나다가 병으로 죽었다. 손권은 소복을 입고 애도해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주유의 영구가 오나라로 돌아오자 손권은 또 무호(蕪湖)로 가서 맞이하고 모든 비용을 다 대주었다. 그런 다음 명을 내려 "고인이 된 장군 주유의 집안에 있는 모든 손님에게는 부세와 요역을 물리지 말라"고 명했다.

경우의 수는 늘 존재한다. 만일 주유가 36세라는 나이에 병사하지 않고 유비 공격에 성공했다면 천하삼분 전략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촉한 정통론에 의해 제갈량이 주유를 무시하고,주유가 제갈량을 질시하는 장면은 정사 그 어디에도 없다. 역사와 소설,소설과 역사의 경계는 명확하지만 적어도 《삼국지》는 소설로든 역사로든 재미있는 명저 중 명저가 아닐까. 그 중심축에 삼국의 핵심 참모인 주유와 제갈량,순욱이 있는 것이다.
[중국 고전 인물열전] (9)당태종 이세민‥열린 마음으로 당제국 반석에 올린 '소통 리더십의 제왕'(한국경제 2010/07/09 18:35)
구중궁궐에 갇혀 사는 군주는 사람의 장막에 가려 눈과 귀가 막히기 쉽다. 간신들이 판을 치고 올곧은 신하가 내쳐지는 이유는 의외로 자명하다.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칭찬보다 칭송과 아첨을 일삼는 것이 궁정의 속성이라고 하면 과언일까.

열린 마음과 소통 리더십의 제왕으로 평가받는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제왕적 리더십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먼 제왕이었다. 물론 창업과정도 순탄하지 못했으니,그는 대규모 토목공사와 고구려 원정 등 연이은 실정으로 민심을 잃은 수나라 양제(煬帝)를 타도하고자 태원(太原) 방면 군사령관으로 있던 아버지 고조(高祖) 이연(李淵)을 설득해 병사를 일으킨다.

그는 먼저 설거와 설인고 부자,유무주(劉武周)와 싸우고,다시 강적 왕세충(王世充) 두건덕(竇建德)을 제거해 스무살 때인 617년에 장안을 점령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듬해 당나라가 탄생했고,이연이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연은 이세민이 정권 창출에 큰 공을 세웠음에도 맏아들 건성(建成)을 황태자로 삼아 형제간 불화를 일으키는 발단을 제공했다. 건성은 동생 원길(元吉)과 함께 세민을 제거하려고 모의하지만 세민이 선수를 쳐 건성과 입조하는 원길을 현무문에서 죽이고는 곧바로 626년에 제위를 이어받아 즉위하니 나이 겨우 스물아홉이었다.

반란 과정과 피비린내 나는 형제의 난을 겪어 제위에 오른 이세민은 예악(禮樂)과 인의(仁義) 등 유학에 바탕을 둔 문치를 내세우면서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고,국학에는 학사(學舍)를 400여칸이나 증설하고,국자(國子) 태학(太學) 사문(四門) 광문(廣文)에서도 학생을 증원했다. 이와 동시에 도가의 무위(無爲)를 강조하고 도교를 국교로 정해 폭넓은 민심의 향방도 살폈다. 인재
경영에 몰입해 자신에게 300번 이상이나 간언한 위징(魏徵)과 같은 신하들을 내치지 않고 받아들였고,8대 명신이라 불리는 소신파 신하들을 곁에 두고 스스럼없이 소통하며 다음과 같이 자기검증을 했다. '덕행을 쌓은 군주는 귀를 거스르는 말을 듣고,얼굴을 살피지 않고 하는 간언을 좋아한다. 군주가 충신을 가까이 하려면 의견을 제시하는 인사를 후하게 대우하고,참언하기 좋아하는 자를 질책하며,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다. '(《정관정요》)

그가 제위에 오른 해부터 649년에 이르는 23년 동안 정치,경제,문화,예술,군사 등 다방면에 위대한 발전이 있었기 때문에 국가는 황금시대를 맞았다. 무엇이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었을까. 바로 '군주는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배를 뒤엎을 수도 있다. (君舟人水 水能載舟 亦能覆舟)'는 말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태종은 군주보다 백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겸손한 제왕이었다. 그가 '창업이 쉬운가,수성이 어려운가(創業易 守成難)'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초심을 잃지 않고 당 제국을 반석에 올려놓은 것이다. 후대 역사가들이 그의 치세를 '정관의 치세(貞觀之治)'라고 칭송한 것은 이 때문이다. 신하들의 의견을 들으려 하고,반대파를 포용한 태종은 군신관계란 신뢰로 맺어져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물론 아쉬움은 남는다. 통치 말년에 태종은 자기관리에 허점을 드러내면서 흔들리게 된다. 지나친 영토확장 정책과 고구려 침략 실패,후계자 선정의 난항 등을 한으로 남긴 채 그가 죽자 동요된 정권은 후궁이자 훗날 고종(高宗)의 황후가 된 측천무후(則天武后)에 의해 잠시 동안 거의 소멸상태를 맞이하게 된다.

초심을 유지하고 민심의 향방을 헤아리고 아첨하는 신하들을 멀리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곧은 나무는 그림자가 굽을까 걱정하지 않는다'(정관정요)고 하지만 나무는 바람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분명한 것은 현명한 신하를 곁에 두는 자도 군주요,내치는 자도 군주라는 사실이다. 모든 것을 제탓으로 돌리는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10)소하(蕭何)‥유방 보좌해 제국 창건…견제 속에서도 화를 피한 처신의 달인 (한국경제 2010-07-17 10:37)

소하(蕭何)는 고조 유방의 오랜 친구로 유방이 기병할 때부터 줄곧 그를 도와 한나라를 세운 다섯 공신 가운데 으뜸이었다. '성공해도 소하요,실패해도 소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창업에서 그의 위상은 절대적이었다. 불후의 공적을 세웠던 그였으나 조정 무관들의 견제와 함께 유방의 끊임없는 의심을 받아 전전긍긍하면서도 결국 무난히 난세를 살다갔다.

《사기》의 '소상국(蕭相國)세가'에 따르면 소하는 패현(沛縣) 풍읍(豊邑) 사람으로 법률에 통달해 일처리하는 것이 공평하고 유방이 벼슬하지 않고 있을 때 벼슬아치 신분으로 그를 보호해줬다. 고조가 작은
관리로 도적을 체포하는 일에 관여할 때도 소하는 늘 곁에 있었으며,고조가 벼슬하러 함양에 갔을 때도 소하만은 남들보다 더 많은 500전을 주었다고 한다.

고조가 군대를 일으켰을 때 여러 장수들이 재물창고로 달려가 그것들을 나누어 가졌으나,소하는 진나라 승상부(丞相府)와 어사부(御史府)의
법령도서들을 거두어서 감추었다. 유방이 한왕(漢王)에 오르자 소하는 승상이 되었다. 함양이 불타 모든 문서가 사라졌으나 소하가 확보한 자료를 통해 유방은 요새의 위치나 인구 등을 소상히 알 수 있었다. 유방이 군사를 이끌고 동쪽 삼진(三秦)을 평정할 때도 소하는 승상으로 남아 파촉(巴蜀)을 지키며 지역을 안정시키고 보좌했다. 그는 법령과 규약 등을 만들 때도 고조의 재가를 받고 나서 일을 처리해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한 제국이 세워지고 논공행상을 하는 자리에서 신하들은 저마다 공을 내세웠다. 소하의 공을 첫 번째로 두려는 유방에게 공신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자신들은 전장에서 100번이나 수십번씩 싸워 땅을 빼앗았는데 소하는 겨우 글이나 읽고 의논이나 했으니 그에게 최상위
등급을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유방은
사냥개와 사냥의 차이를 비유로 들어 이렇게 말했다. "사냥에서 들짐승과 토끼를 쫓아가 죽이는 것은 사냥개지만,개 줄을 풀어 짐승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것은 사람이오.지금 여러분들은 한갓 들짐승에게만 달려갈 수 있는 자들뿐이니,공로는 마치 사냥개와 같소.소하로 말하면 개의 줄을 놓아 방향을 알려주니 공로는 사냥꾼과 같소."

여러 신하들은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공신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자 고조는 소하에게 많은 봉읍을 내렸다. 그런데 작위를 첫 번째에 두려고 하니 일등공신 자리를 놓고 다투는 조참이 마음에 걸렸다. 마침 관내후(關內侯) 작위 이름으로 스무 등급 중 열아홉 번째인 악군(鄂君)이 "소하가 첫 번째이고,조참이 두 번째"라고 진언했다. 결국 유방은 소하를 첫 번째로 하고,소하가 칼을 차고 신을 신고 궁전에 오를 수 있도록 할 정도로 예우했다. 그러고 나서 6년 후에 진희가 모반하고 회음후(淮陰侯 · 한신)가 모반했다가 주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유방은 모반 평정에 공을 세운 소하에게 식읍 5000호를 더하고 군사 500명과 도위(都尉) 1명을 보내 상국의 호위병으로 삼도록 했다.

모두들 소하에게 축하하는 상황에서 소평(召平)이란 자는 유방이 당신을 떠보기 위한 것이니 봉읍을 받지도 말고 오히려 당신의 재산을 군비에 보태라고 조언하자 소하는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유방은 소하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면서 그의 동태를 살폈다. 소하는 정권과 거리를 두면서 자신에게 다가올 화살을 피해갔다. 그러나 결국 유방은 백성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그를 일시나마 족쇄를 채웠다가 풀어주는 우를 범한다. 물론 겉으로는 관계가 회복된 듯했으나 그것은 미봉에 불과했을 것이다.

소하는 자신의 후임으로 관계가 좋지 않았던 조참을 추천하고 밭과 집을 살 때 반드시 외딴 곳에 마련했고,집을 지을 때에도 담장을 치지 않았을 정도로 검소했다.

정권이 탄생하고 그 정권의 일등공신이 돼 합당한 대우를 받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늘 그것을 시기하는 무리들은 존재한다. 게다가 절대 권력자의 불신과 감시마저 받는 경우 처신은 더욱 힘들 수 있다. 만일 소하처럼 버려야 할 곳과 버릴 것을 알고 청렴하고 소신있게 일한다면 화는 피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