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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중 국

(11) 장량(張良)‥천하경영 도운 `유방의 그림자`(한국경제 2010/07/23 18:35)

[중국 고전 인물열전] (11) 장량(張良)‥난세에 겸허·배려로 천하경영 도운 '유방의 그림자'


권모술수가 판치는 천하쟁패의 소용돌이 속에서 타인을 배려하면서도 확고한 위상을 구축한 인물은 매우 드문데,그중 장량과 소하가 있다. 우리에겐 장자방(張子方)으로 더 알려진 장량처럼 신비스런 존재감을 드러내는 인물도 없을 것이다. 사마천이 장량을 말하면서 야전에 나서지 않고 군영의 장막에서 꾀로 승리를 도맡아 했다고 평가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모든 전략은 천하쟁패에 승패를 가름할 만한 것이었다.

《사기》의 <유후세가(留侯世家)>에 의하면 곱상한 외모에 잔병치레를 많이 한 장량은 한(韓)나라 사람이다. 조부 개지(開地)는 한나라의 소후(昭侯),선혜왕(宣惠王),양애왕(襄哀王)의 상국을 지냈고,아버지 장평(張平)은 희왕(釐王)과 도혜왕(悼惠王)의 상국을 지냈다.

진나라에 의해 한나라가 멸망할 당시 그의 집에는 노복(奴僕)이 300명이나 되었는데,동생이 죽었을 때 장례도 치르지 않고 모든 가산을 털어 진시황을 죽일 자객을 구해 한나라의 원수를 갚으려 했을 정도로 의협심이 강했다. 장량은 또 무게가 120근이나 되는 철퇴를 만들어 동쪽을 순시하는 진시황을 박랑사(博浪沙)에서 쳐 죽이려 했으나 실패해 성과 이름을 바꾸고 은둔했다.

그가 병법을 터득해 모사의 길에 들어선 계기는 다소 황당하다. <유후세가>에 의하면 이렇다. 그가 은둔하던 중 어느 다리 위를 지나는데 한 노인이 자기 신발을 다리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주워오라고 해 가져다 주니,신겨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수 없이 신겨 주니 노인이 "젊은이가 가르칠 만하군,닷새 뒤 새벽에 나와 여기서 만나지"라는 뜬금없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닷새 뒤에 약속 장소로 나가보니 이미 노인이 나와 있었다. 다시 닷새 뒤에 만나자고 하여 좀 더 일찍 갔으나 여전히 노인이 먼저 와 있었다. 다시 닷새 뒤에는 아주 한밤중에 가 기다리니 얼마 후 노인이 오더니 "마땅히 이렇게 해야지"하면서 《태공병법(太公兵法)》이란 책을 내놓았다. 노인은 "이 책을 읽으면 왕 노릇하려는 자의 스승이 되고,10년 후에 그 효과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결국 장량은 노인의 말대로 유방이 가장 신뢰하는 모사가 됐다. 겸허함과 배려가 인물의 성장에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 알 수 있는 명장면이다.

그는 은둔하는 동안 항우의 숙부인 항백(項伯)과 함께 지내기도 하다가 결국 하늘에서 재능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한 유방을 주군으로 섬기기로 하고 그의 핵심 모사가 된다. 장량의 조언에 대한 유방의 신뢰는 절대적이어서 천하를 통일했을 때 소하와 함께 3만호의 식읍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1만호만 받고 유후(留侯)란 작위를 받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천하통일 후 유방이 1년 동안이나 논공행상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으니,저마다 공이 있다고 논의가 분분한 가운데 줄 식읍은 정해져 있고 공신들은 많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자 불만을 토로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불안한 유방이 장량에게 해결책을 묻자,고조 유방과 사이가 가장 좋지 않은 자를 물어보는 것이 아닌가. 고조가 옹치(雍齒)란 자를 지목하면서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자라고 말하니 장량은 대뜸 그를 최우선적으로 봉하라고 조언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고조가 옹치를 위해 친히 술자리를 마련하고 십방후(什方侯)로 봉하고,급히 승상과 어사(御史)를 재촉해 그의 공을 정하고 봉상을 진행하니 불만을 토로하던 신하들은 "옹치가 오히려 후(侯)가 되었으니 우리들도 근심할 게 없다"(<유후세가>)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물론 그 나머지 공신들은 논공행상에서 제외됐다.

이렇듯 약소국 출신임에도 장량이 중용된 것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빼어난 지략을 갖고 그것을 최고 권력자에게 신중하게 조언해 천하
경영을 해 나가도록 하는 그림자형 조언자이기에 가능했다. 말년에 태자 책봉 문제로 유방과 틈이 벌어지자,세치 혀에 의지해 그만한 지위에 오른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면서 과감히 모든 것을 내던졌다. 오곡을 먹지 않고 양생술을 배우며 은둔의 길을 택하다가 삶을 마감한 그가 아들에게 후의 작위를 대신하게 만든 것은 오늘날 참모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기에 충분하다.

[중국 고전 인물열전] (12) 진섭(陳涉)‥머슴에서 왕으로…사람을 믿지 못해 6개월만에 망하다
(한국경제 | 기사전송 2010/07/30 18:30)


중국의 제후 왕 가운데 후손을 두지 못한 자가 있다. 바로 진섭이다. 그를 위해 고조 유방은 그의 무덤을 지키는 사람을 두게 하고 틈이 나면 제사도 지내 주는 등 자신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한 진섭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이뿐이랴. 사마천도 반란을 통해 왕이 된 진섭을 제후 왕의 영역인 '세가'에 편입,역사관의 객관성과 서술의 편파성 문제에 대한 오해와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니 말이다.

《진섭세가》에 의하면 그의 이름은 진승(陳勝)이며, 양성(陽城) 사람이고, 자(字)는 섭(涉)이다. 진섭이 젊었을 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밭갈이하는 머슴살이를 한 적이 있는데,밭갈이를 멈추고 밭두렁에서 쉬며 자신의 신분을 한참 동안 한탄하다 다른 머슴들에게 말했다. "부귀하게 된다면 서로 잊지 말기로 하지." 그러자 머슴들은 비웃으면서 "너는
고용 당해 밭갈이를 하는데 무슨 부귀란 말인가?"라고 놀렸다.

이 말을 들은 진섭은 "아! 제비와 참새가 어찌 큰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알리오!"라고 한탄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는 결국 진시황의 뒤를 이은 진 2세가 정권을 잡으면서 도탄에 빠진 민중들을 빌미로 반란을 일으켜 초나라를 넓힌다는 뜻의 장초(張楚)를 국호로 삼아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진섭이 왕이 되고 난 뒤 어느 날, 그와 함께 머슴일을 하던 옛 친구가 찾아왔다. 친구가 막무가내로 궁궐 문을 두드리며 "나는 진섭을 만나려 한다"고 말하자 영문을 모르는 궁궐 문지기가 그를 포박하려고 했다. 그가 여러 차례 자신이 진섭의 친구라고 해명하자 풀어주고 보고는 하지 않았다. 진섭이 호화스런 행차를 하며 궁문을 나섰을 때 그가 길을 막고 큰 소리로 진섭의 이름을 불러댔다.

진섭은 반가운 마음에 그와 함께 수레를 타고 궁궐로 돌아오게 됐다. 궁궐 문에 들어서는데 궁전에 드리운 휘장을 보자 그 친구가 "대단히 화려하구나! 진섭이 왕이 되니 궁전이 높고 깊구나!"고 말하면서 방자하고 거침없는 태도로 떠드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옛날 날품팔이 시절의 일도 떠들어댔다. 그 친구는 이미 왕이 되어 주위에 신하들이 진섭과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진섭은 아무 것도 모르는 듯이 떠들어대는 친구가 내심 야속했다. 자신은 이미 왕이 됐는데 그 친구는 옛날로 돌아가 있었으니 말이다.

결국 최측근들이 진왕에게 다가와 "친구 분이 우매하고 무식하며,멋대로 망언을 일삼으니 왕의 위엄을 깎아내리게 됩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진섭은 자신의 과거가 친구에 의해 낱낱이 까발려지게 되면 위엄을 세우기도 어렵다고 판단해 그 친구의 목을 베어 버렸다.

이런 소문은 빨리 퍼져나가게 마련이다. 진섭의 다른 친구들도 하나둘씩 떠나 그의 주위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게 됐다. 외로움에 빠진 진섭은 판단력이 흐려지게 됐고,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진섭은 주방(朱房)을 중정관(中正官)으로 삼아 인사를 관장하게 했고,호무(胡武)를 신하들의 과실을 감찰하는 사과관(司過官)으로 삼아 감시하게 했다. 여러 장수들이 적을
공략
하고 돌아와 복명(復命)할 때 주방과 호무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붙잡아 죄를 묻기도 하고,가혹하게 감찰하면서 진섭에게 잘 보이려 애썼다. 이 두 사람과 좋지 않은 사이거나 아래에서 집행하는 관리들에게 자료를 주지 않으면 모두 이들이 엄히 다스렸다. 진섭은 이 두 사람만 신임했다. 여러 장수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왕에게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으며, 저마다 불평과 불만을 마음 속에 담아두게 됐다. 6개월 뒤에는 진섭이 봉하고 파견한 자들이 결국 모반을 일으켰고 결국 그는 망하고 말았다.

권력자라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 속에 이미 움터 있을 오만의 싹이다.
[중국 고전 인물열전] (13) 외적 막으려 만리장성 쌓았지만…아들 胡亥가 나라를 망쳤다 (한국경제 2010/08/06 18:35)
진시황(秦始皇)

베이징에서 북쪽으로 40㎞ 올라가면 거대한 만리장성이 구불구불 산등성이를 타고 펼쳐진다. 입구에 크게 쓰인 한자와 한글 글씨는 이곳을 찾는 상당수의 관광객이 한국인임을 보여주는 단서다. 13억 중국인들은 죽은 진시황이 산 중국인을 먹여 살린다고 믿고 있다. 하루에도 수천 대씩 돌아다니는 관광버스가 이를 입증한다.

우리에게 알려진 진시황은 무자비한 정복욕으로 죄 없는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린 폭군이며,분서갱유를 단행한 문화말살자다. 또 신선에 빠지고 불로초에 눈이 팔려 어린 남녀 수천명을 배에 태워 무작정 바다로 보낸 황당무계한 자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러나 이런 반론도 있다. 불분명한 출신 성분을 딛고 척박한 서쪽 진나라를 떨치고 일어나 천하를 통일하고,병합한 6국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하기 위해 도량형과 화폐,문자를 통일했으며,통치 근간이던 봉건제를 군현제로 바꾼 혁신적인 인물이란 것이다.

《사기》'진시황본기'는 진나라가 집정한 40여년의 역정을 사실대로 그려내고 있다. 사마천은 첫머리에서 아버지 장양왕이 조나라에 볼모로 가 있을 때 여불위의 첩을 취해 낳았다고 적고 있고,《사기》'여불위열전'에는 한층 더 나아가 그 첩이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배고 있었는데 장양왕이 그것을 모르고 자기 아들로 생각하고 있다고 보충했다.

13세에 아버지의 뒤를 이은 진시황은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아채게 되고,그토록 의지했던 여불위가 지나치게 강성해진 데다 모반에 연루되자 그를 가차 없이 제거하고 집정 26년 만인 39세에 천하를 손에 넣게 된다. 두 번의 결정적인 암살 위험을 견뎌낸 그는 자신을 황제라고 이름 짓고,농업을 숭상하고 상업을 억제하며,모든 것은 법에 따라 엄정히 처리했다. 이름에 걸맞게 그는 통일제국을 거미줄처럼 잇는 도로를 동(銅)마차를 타고 누비며 자신의 업적을 금석에 새겨 기념하기도 했다.

6년 후 진시황은 북방을 다스리고 오는 길에 연나라 사람 노생이 바친 귀신이야기 책 《녹도서(錄圖書)》를 얻게 됐다. 거기에는 '진을 망하게 할 자는 호(胡)이다'란 섬뜩한 말이 있었다. 진시황은 즉시 장군 몽염(蒙恬)에게 군사 30만명을 이끌고 북방의 호인(胡人)들을 치도록 하고,20여만명의 죄수를 동원해 만리장성을 쌓게 했다. 그러고는 2년 후 자신의 개혁에 반대하는 제나라 박사 순우월(淳于越)의 전통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의약,점술,식목 관련 서적을 제외한 모든 책을 없애고 철저히 법으로 다스릴 것을 천명한다. 도로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1만명이 앉을 수 있는 아방궁도 짓는다. 물론 여기에도 70여만명의 죄수가 동원됐다고 사마천은 '진시황본기'에서 적고 있다.

어디 이뿐인가. 영지(靈芝) 및 선약(仙藥)과 신선을 찾게 하고 자신도 짐(朕)이란 말 대신 신선을 의미하는 진인(眞人)으로 부르라고 명했다. 수도 함양의 궁전 270곳을 연결해 휘장을 두르고 악기와 여인들을 가득 채웠다. 자신의 거처를 입에 올리면 사형에 처했다.

그런 그가 나이 50세에 동방 순행에 나섰다가 사구(沙丘)라는 곳에서 객사하고 만다. 죽기 전에 그가 맏아들 부소에게 제위를 계승하라고 남긴 유서는 이미 밀봉된 채로 환관 조고의 손에 있었다. 여름에 썩어가는 그의 시신 곁에는 총애하던 막내 아들 호해(胡亥)와 승상 이사,환관 대여섯명이 있을 뿐 맏아들 부소는 변방에 쫓겨나 있었다. 결국 그의 유서는 부소를 제외한 이들에게 위조돼 부소와 몽염은 자결하라는 거짓 유서로 바뀌었고 이로써 진제국은 호해에게 넘어가게 된다.

21세에 제위에 오른 호해는 갖은 폭정을 일삼다가 반란군의 압박에 못 이겨 자살하고 말았다. 뒤를 이은 자영도 46일 만에 유방에게 투항했다. 결국 진나라를 멸망하게 만든 자는 호인이 아닌 아들 호해였으니 그토록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건설한 만리장성은 오히려 진나라와 북방의 소통을 방해하고 화이(華夷)로 대변되는 충돌과 단절,반목과 질시의 상징이 돼버렸다.

최고
경영자의 섣부른 판단착오와 자기 과신은 구성원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심지어 조직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다. 판단은 리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늘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중국 고전 인물열전] (14) 인재에 투자한 巨商…황제의 아버지 됐지만 아들 손에 죽다 (한국경제 2010/08/20 18:44)
(14) 여불위(呂不韋)

가장 흥미진진한 편명으로 손꼽히는 ≪사기≫의 '여불위열전'에 따르면 여불위는 한(韓)나라 출신의 상인으로 여러 곳을 오가면서 물건을 싸게 사들여 비싸게 되팔아 천금이나 되는 돈을 모은 상인이다. 유달리 사람을 좋아한 그는 인재에 대한 투자야말로 영원하다고 믿었다.

여불위가 활동한 시기에 진나라의 후계구도는 이랬다. 진나라 소왕(昭王)의 태자가 죽고 안국군(安國君)이라는 둘째 아들이 자리를 이어받아 효문왕이 된다. 안국군에게도 아들이 20여명이나 있었는데 정부인인 화양부인(華陽夫人)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총애받지 못한 하희(夏姬)란 첩실에게서 태어난 자초(子楚)가진 나라를 위해 조나라에 볼모로 가 있었다. 자초는 재물도 없었고 이렇다 할 인맥도 없어 실의에 빠진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여불위가 조나라 수도 한단에 물건을 사러갔다가 자초를 보더니 "이 진귀한 재물은 사둘만하다(奇貨可居)"며 그에게 가문을 크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자초는 웃으면서 "먼저 당신 가문을 크게 만든 뒤에 내 가문을 크게 만들어 주시오"라고 비꼬았다. 여불위는 "당신이 모르는 모양인데, 제 가문은 당신 가문에 기대어 커질 것입니다”라고 응수했다.

여불위는 자초에게 500금이나 되는 거금을 사람 사귀는 비용으로 주고,자신은 500금으로 진기한 물건과 노리개를 사 서쪽 진나라의 화양부인을 만나러 떠난다. 화양부인에게 선물을 모두 바쳐 마음을 사로잡은 여불위는 자초를 추천한다. 또 화양부인의 언니를 부추겨 화양부인이 자초를 양자로 삼아 후사를 이어받게 했다. 화양부인 역시 손해볼 것이 없다고 여기고 안국군에게 한가한 틈을 타 자초를 후사 자리에 세워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니 안국군은 자초에게 많은 물품을 보내고,여불위에게는 잘 보살피도록 부탁까지 했다. 결국 진나라의 태자가 된 자초는 제후국에 이름을 떨치게 됐다.

여불위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서는 좀더 확실한 대비가 필요했다. 그는 한부호의 딸을 첩으로 삼았는데,어느 날 자초를 집으로 초대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자초가 그녀를 보더니 한 눈에 반해 달라고 했다. 마침 그녀는 여불위의 아이를 배고 있었다. 여불위는 속으로 치미는 화를 가라앉히고 자초에게 그녀를 바쳤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절대 임신한 사실을 입밖에 내지 말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낳은 아이가 정(政)이었다. 자초는 기쁜 마음에 그녀를 부인으로 세웠고,여불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던 중 진나라 소왕이 눈엣가시인 조나라를 공격했다. 조나라는 볼모로 와 있던 진나라 왕자 자초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다시 여불위가 금600근으로
관리를 매수, 자신의 부인과 아들 정은 남겨두고 자초와 함께 진나라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부호의 딸인 부인을 함부로 죽일 수도 없었다. 그로부터 6년 후 소왕이 죽고 안국군이 왕위에 올랐다. 자초가 태자가 되자 자초의 부인과 정도 함께 진나라로 돌아올 수 있게 됐다.

안국군이 1년 만에 죽고 자초가 왕이 됐으니 바로 장양왕이다. 그런데 장양왕도 3년만에 죽자 13세의 나이로

정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때부터 여불위는 상국(相國), 즉 재상이 되고 중보(仲父)라고 불리면서 아버지에 준하는 예우를 받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여불위가 나이 어린 진왕 정 몰래 사사로 이태후와 정을 통하게 됐다. 식객이 1만명이나 됐으나 누구도 감히 소문을 내지 않았다. 진왕이 성년이 돼도 둘의 애정행각은 그칠 줄 몰랐다. 발각될 것이 두려운 여불위는 음경이 큰 노애를 찾아 집안일 거드는 자리를 주고는 음탕한 음악을 연주하며 그의 음경에 오동나무 수레바퀴를 달아 걷게해 음란한 태후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작전은 성공이었다. 태후가 노애를 갖고 싶어하자 여불위는 노애를 그녀에게 바치면서 거짓으로 성기를 제거하는 부죄(腐罪)를 받게 해 환관으로 만들어 태후가 곁에 두고 마음껏 즐기도록 했다. 태후는 마다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아들을 둘이나 낳았다. 여불위는 다시 그녀와 모략을 꾸며 진왕이 죽으면 뒤를 잇게 하자고 했다.

결국 여불위는 모든 것을 알게 된 진왕 정에 의해 관직에서 쫓겨나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와 권력을 손

에 쥔 여불위의 집은 방문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불안감을 느낀 진왕이 보낸 편지를 받고 자신의 죄를 알고는 독주를 마시고 자살했다.
[중국 고전 인물열전] (15) 한비(韓非), '법치 리더십의 창시자' 그러나 자신은 역린의 희생양이 되고…
(한국경제 2010/08/27 18:36)
제갈량이 죽으면서 후주 유선에게 읽도록 한 책이 《한비자》라고 한다. 왜 그랬을까. 법치와 권세,아니 술(術)이란 방법론을 통해 군주가 실권을 가지고 신하들을 좌지우지하는 강력한 통치술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비란 인물은 유가와 도가 양대 사상을 축으로 하는 중국 사상계에서 논란의 중심에 서 있기도 하다. 흔히들 법과 원칙을 내세운 법가라고 말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는 군주의 권력을 유지하고,사람을 통제하며,심지어 신하에게 권력을 빼앗기지 않는 구체적인 사례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동양의 마키아벨리다.

한비(기원전 280~?)는 한나라의 서자 출신 공자로 비주류의 아픔을 겪었다. 그는 순자의 문하에서 이사와 더불어 유학을 배웠다. 사방이 적국으로 둘러싸인 조국 한나라가 약소국의 비애와 굴욕을 겪는 것을 본 그는 실용적인 법가로 무장하고 한나라 왕에게 법치를 건의했으나 자신을 알아주지 않자 울분에 차 《한비자》란 책을 남겼다.

말더듬이인 그는 조국에서 일이 풀리지 않자 적국 진나라 시황제를 찾아가 유세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이에 실패하고 동문수학한 친구 이사의 부추김 속에서 살해당하고 만다. 그는 죽으면서도 자신의 사상을 고스란히 남겨 진시황의 진나라 통일과 정치의 단초를 제공했다.

그가 지은 《한비자》에 소개된 일화 중 이런 것이 있다. 위(衛)나라 사람 부부가 기도를 드리는데,부인이 축원하며 이렇게 말했다. "공짜로 베 100필을 얻게 해주십시오." 남편이 물었다. "어째서 조금만 바라오?" 그녀는 대답했다. "이보다 많으면 당신이 첩을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

한 이불을 덮고 살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다는 말이다. 인간의 성품은 선하지 않고 모든 것이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비유가 허를 찌른다. 그러니 한 이불 속의 부부도 아니고 피를 나눈 형제도 아닌 군주와 신하,백성과 백성 사이는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심지어 풍년이 들어 나그네에게 곡식을 주는 선행도 식량이 많이 생겨 남아돌기 때문이라는 게 한비의 논리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는 한 나라의 백성을 책임진 군주는 늘 냉철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면서 이렇게 강조한다. "법에 따라 형벌을 집행하는데 군주가 이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인자함을 드러내는 것이지 다스리는 것은 아니다. 눈물을 흘리며 형을 집행하지 못하는 것은 인(仁)이고,형을 집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법(法)이다. 선왕이 법을 우선하고 눈물에 따르지 않은 것은 인만으로는 백성을 다스릴 수 없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

수주대토(守株待兎).즉 그루터기를 지키며 토끼를 기다리는 농부처럼 하지 말고,시대의 변화를 인정하고 오늘의 기준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라는 가르침을 제시한 한비는 감정적인 인간이야말로 가장 위험하고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강력한 권력을 지닌 군주도 마찬가지다. "그가 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지 않는다. 군주가 하고자 하는 바를 내보이면 신하는 그 의도에 따라 잘 보이려고 스스로를 꾸밀 것이다. "

그는 아랫사람에게 책잡힐 언행을 하지 말 것을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신하 역시 자신의 속내를 군주에게 드러내지 말고 군주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아야 목숨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자신은 희생됐다.

혼돈의 시대에는 자신의 속내를 숨기고 어둠 속에서 자신을 길러야 한다는 한비의 생존법은 오늘 이 시점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자세히 살펴보라.저마다 생존을 위해,퇴출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우리도 적절한 비굴과 자기 기만을 통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어차피 기업을 비롯한 조직사회에는 상하관계가 있게 마련이고,그것은 온정적인 인간관계보다는 객관적이고 냉정한 관계로 변해가고 있다. 서글프지만 이런 '악의 축'에서 자유로울 자는 누구이며,아니라고 단언할 자 누가 있겠는가. 드러내지 않는 자가 무서운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