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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국제분야

아르헨 대통령이 생선가게로 달려간 이유 (오마이뉴스 10.04.03 13:53)

아르헨 대통령이 생선가게로 달려간 이유

[해외리포트] 폭등하는 소고기 가격에 전전긍긍하는 정부
크리스티나 치르키네르 아르헨티나 대통령(오른쪽)이 '트럭'에서 생선을 사고 있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 아르헨티나 대통령 홍보부
크리스티나

"국민 여러분, 오늘 저녁 생선구이 어떨까요?"

지난 3월 18일, 크리스티나 치르키네르 대통령이 생선을 사는 모습이아르헨티나 주요 일간지 1면을 장식했다. 대통령은 "모두를 위한 생선(Pescado para todos)"이라며 소고기 대신 생선을 많이 먹을 것을 당부하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곳은 정확히 말하면 생선 '가게'는 아니었다. 정부 마크가 찍힌 생선 홍보 '트럭'이었다. 정부의 생선트럭은 부활절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 소도시를 방문해서 생선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대부분 국민이 가톨릭 신자인 까닭에 아르헨티나에는 부활주간이 되면 소고기나 돼지고기 같은 붉은색 육류를 먹지 않는 전통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한 부활절을 앞두고 정부는 생선트럭으로 캠페인을 벌여가며 생선 소비 촉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어차피 생선 수요는 당분간 늘어날 것인데도 말이다.

생선뿐 아니다. 닭고기와 돼지고기도 홍보한다. 목적은 소고기 소비를 줄이는데 있다. 대통령이 '주부 이미지'까지 동원해가며 국민들에게 소고기 대신에 생선을 먹자고 하는 이유는? 바로 소고기 가격이 말도 안되게 치솟고 있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가정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소고기 요리 '아사도'를 굽고 있다.
아사도

아르헨티나 사람들, 소고기 없으면 무슨 맛으로 살까

아르헨티나인들에게 소고기는 주식과도 같다. 국민 한 사람이 1년 동안 먹는 소고기의 양 평균이 70~75kg(INDEC, 2000~2005년 평균 통계)라고 하니, 성인만 따지자면 1인당 연간 100kg 이상의 소고기를 먹어 치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소고기에 대한 아르헨티나인들의 애정은 실생활에서 더욱 진하게 다가온다. 이들은 소고기 자체의 맛을 음미한다. 도톰한 소고기를 숯불에 두 세시간 동안 구운 '아사도(Asado)'의 담백한 맛은 양념에 길들여진 외국인들의 입맛까지 바꿔 놓을 정도다. 주말마다 가족끼리 모여 아사도를 해 먹는 풍경이 일상적일 만큼 서민적인 음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주말 아사도 파티가 이제는 쉽지 않다. 소고기 가격의 오름세를 감당하기에 서민들의 주머니는 그리 넉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난 2007년, 1kg에 9페소 정도였던 소고기 가격이 꾸준히 상승세를 보이더니 지금은 30페소를 넘을 정도다. 이쯤 되니 치솟은 소고기 가격은 피부에 와 닿는 정도를 넘어 절실한 문제로 여겨지게 되었다.

소고기 뿐만 아니라 다른 먹거리와 생필품의 가격도 쉼 없이 오르고 있는 상황이다. 3년 전 뉴질랜드에서 온 에드워드(29)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생활비가 비교적 적게 들고 고기 값이 싸서 살기 좋았다. 그런데 지금은 물가 수준이 뉴욕, 런던 같은 대도시와 비슷하다고 느낀다"며 부에노스아이레스도 더 이상 생활비용이 낮은 도시가 아니라고 말했다.

아르헨티나 전통 카우보이 '가우쵸'가 소떼를 몰고 있다.
ⓒ 이주영
가우쵸

가뭄, 농약, 콩 : 행복했던 소들에게 무슨 일이

얼마 전 한국의인기 아나운서였던 손미나씨는 아르헨티나를 여행하고 쓴 책에서 "아르헨티나의 소들은 행복하거든, 그래서 맛이 좋은 거야"라는 현지인의 설명을 전했다고 한다. 실로 넓은 들판에서 뛰며 한적하게 풀을 뜯는 이곳의 소들은 겉으로 보기에도 털에 윤기가 반들반들하고 힘이 넘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의 천국'이었던 아르헨티나는 소들이 점점 줄어들고 소가 먹을 풀이 부족한 나라로 변해가고 있다.

첫째 원인은 가뭄이다. 소를 키우는 농장들이 집중되어 있는 중북부 지역에 가뭄이 계속되다 보니 풀과 초목이 점차 감소하면서 소의 숫자도 함께 줄어들고 있다. 신선한 풀을 먹으며 행복하게 살아왔던 이곳의 소들은 이제 도축 몇 달 전부터 가축사료를 먹고 억지로 체중을 늘려야 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소들이 먹을 풀이 부족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유전자변형 농작물(GMO) 재배에 사용되는 농약 때문이다. 농촌지역반영모임(Grupo de Reflexión Rural)의 대표 호르헤 룰리씨는 인터뷰에서 "아르헨티나는 농약으로 목욕을 하고 있는 나라다. 이것은 시간이 지나서 끔찍한 결과로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이라고 상황의 심각성을 알려 주었다.

콩, 옥수수 등의 밭에 비행기로 뿌려지는 농약은 바람을 타고 주변 2킬로미터까지 날아간다. 이렇게 날아 온 농약은 실개천의 물고기만 죽이는 것은 아니다. 농약에 오염된 물을 마시거나 농약이 묻은 콩과 풀을 뜯어 먹은 소가 죽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한 때 사람 수보다 소가 두 배는 더 많았다는 아르헨티나. 현재 아르헨티나의 소의 수는 5천만 마리 정도로 인구수(약 4천만)보다 약간 더 많은 정도다. 대부분의 농장주들이 이윤이 높은 콩 농사로 업종을 바꾸면서 소를 키우는 농가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콩의 국제 가격이 오르고 수출이 활성화되면서 아르헨티나 정부는 콩 농작을 은근히 권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1920년대 아르헨티나는 유럽으로 소고기를 수출하며 경제성장을 이뤘다.
ⓒ www.kalipedia.com
아르헨티나

소고기와 흥망성쇠 함께 해온 아르헨티나 역사

아르헨티나의 역사는 소고기 수출로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1816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백여 년 동안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이끈 일등 공신은 소고기 수출이었고, 그것을 통해서 영국, 미국 등의 강대국과 관계를 맺어 왔기 때문이다.

산업 기반이 거의 없었던 시기에도 아르헨티나는 소고기와 곡물 수출로 호황기를 누릴 수 있었다. 그렇게 벌어들인 외화로 길도 닦고, 건물도 세웠을 것이다. 현재까지도 축산업은 아르헨티나 외화벌이를 담당하는 주요 산업 중의 하나다.

그러나 국내 산업기반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수출에 크게 의존하는 나라의 경제는 그만큼 주변 상황의 변동에 좌지우지되는 위험을 안고 있다. 소고기 주요 수입국인 영국과 미국의 경제 흥망과 그들의 영향력에 따라 휘청거리는 운명을 가지고 세워진 나라가 바로 아르헨티나인 것이다.

1929년 월 스트리트 주가 대폭락으로 시작된 세계 경제 공황은 아르헨티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세계 최초로 냉동 수출을 시작하며 신대륙의 선진국을 꿈꾸었던 아르헨티나는 1930년대에 이르자 경제적으로 이미 침체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곡물과 소고기 수출이 늘어나면서 잠깐의 호황기를 맞기도 했으나 그때는 이미 1930년대부터 부정부패로 권력을 얻은 정치인들이 나라를 휘어잡은 후였다.

'세계 경제 부국 5위 안에 들 정도로 번성했다가 페론 대통령의 포퓰리즘과 퍼주기 정책으로 인해 경제가 망한 나라'

혹시 이 정도로 아르헨티나를 평가하는 독자라면 이러한 역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태생부터 외국자본과 수출에 의존했던 아르헨티나의 경제 구조는 언제나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세계 경기가 미동만 해도 요동칠 수밖에 없는 아르헨티나의 경제 상황. 거기에 탐욕스런 이민자들이 정치인으로 둔갑해서 부정부패를 일삼았으니 지금의 상황은 어쩌면 예견된 미래였을지도 모른다. 달러 환율이 조금만 변동해도 식당 주인은 메뉴판의 가격을 고쳐 달기에 바쁘고, 국가는 그러한 상황을 흡수할 스펀지가 되어주지 못한다. 물가가 요동치면서 삶은 불안하기만 하고 국민들은 광활한 초원지대 팜파(Pampa)에서도 어지럽게 살아가고 있다.

군사정권 피해 관련 집회 참가자들이 정부를 비판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이주영

돼지고기가 정력에 좋다는 대통령, 눈 가리고 아웅하는 정책

소고기 공급량은 줄어들었지만, 사람들이 소비를 더 줄이는 것은 힘들어 보인다. 게다가 거침없이 오르는 가격에 대한 시민들의 항의와 불만이 키르치네르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3월 24일에 열린 군사정권 피해자 추모집회에 모인 인파 중에는 키르치네르 정부를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이보다 앞선 지난 1월 28일, 크리스티나 대통령은 "돼지고기를 먹으면 비아그라보다 더 정력에 좋다"라는 말로 돼지고기를 많이 먹자는 취지의 말을 했다. 곧이어 "지난 주말에 맛이 죽이는 돼지고기 구이를 먹었는데 키르치네르(대통령의 남편이자 전 대통령)와 좋았다"는 성적 농담까지 아끼지 않았지만 국민들을 웃겼을 뿐 효과는 없었다.

한편, 정부는 소고기 수출을 대대적으로 금지하고 나서기도 했다. 소고기 수출 금지의 요지는 "수출을 하려면 국내에도 낮은 가격으로 물량을 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과 미국으로 품질이 좋은 소고기를 높은 가격에 수출하고 있는 업체들이 더 큰 이윤을 포기할 리 만무하다.

소고기 가격을 낮추기 위해 수출을 제한한다는 정부에 맞서 수출업자들은 정부가 세금을 낮추면 되지 않느냐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한 냉동수출업체의 대표는 <끄리띠까(Crítica)>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세금을 낮추는 것이 더 유용한 방법이 될 수 있는데도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소비자들은 먹고 살기 힘들다며 하소연을 하고, 농장 일꾼들은 수출 제한으로 인해 일거리가 없다며 항의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시민들은 정부의 무능함을 비난하며 또 다른 종류의 시위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벌이는 '돼지고기, 닭고기, 생선 캠페인'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방편일 뿐 근본적인 대책이 되기 어렵다. 어획량의 5퍼센트 정도를 국내에서 소비하는 아르헨티나에서는 집 근처에서 생선을 구입하는 것도 쉽지 않을 뿐더러 주부들은 생선 조리법도 잘 모르는 현실이다.

최근 몇 달 동안 가격상승 때문에 소고기 소비량이 줄어들긴 했지만 결국,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소고기 대신 생선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주말마다 아사도를 구우며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던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할 뿐이다.

공원에 모여 아사도를 먹는 아르헨티나 가족의 일상적인 모습. 이제는 보기 드문 일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