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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 | 정희대비가 조장한 조두대의 ‘내알(內謁)’ (중앙일보 2015.01.24 00:01)

[월간중앙] 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 | 정희대비가 조장한 조두대의 ‘내알(內謁)’

조선사 최고권력 여종의 국정농단 파노라마

 

2007년 개봉된 영화 <궁녀>의 한 장면. 보통 궁녀는 “아는 것을 말하지 말고, 들은 것을 기억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던 약자였지만 여종에서 궁녀가 된 성종조 조두대는 당대의 권력실세로 군림했다.


신년호부터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가 ‘조선왕조 스캔들’을 연재한다. 절대권력자 국왕의 주변에서 일어난 각종 스캔들을 통해 역사를 읽는 재미와 교훈을 추구하자는 기획이다. 환관·술사·무당·군인·궁녀가 등장하는 흥미로운 무대이며 술과 취미, 약과 음식, 유흥과 잡기가춤추는 난장이기도 하다. 스캔들은 강아지의 장난처럼 시작되지만 결국 거대한 고래 몸뚱이가 되어 국정을 농락한다. 권력은 스캔들을 조심해야 무병장수한다.<편집자>

조선 제8대왕 예종 승하 후, 성종이 왕위에 올랐다. 13세의 성종은 후계교육도 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예종의 큰아들이 아니라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신숙주를 비롯한 조정의 중신들은 왕실의 최고 어른 정희대비에게 수렴청정을 요청했다. 대비는 처음에는 “나는 문자를 몰라 국정을 결단하기 어렵지만, 주상의 생모인 수빈(粹嬪)은 문자도 알고 사리도 알아 감당할 만하다”며 사양했지만 강청 끝에 수락했다.

이렇게 시작된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은 심각한 문제를 불러왔다. 국정은 근본적으로 행정문서를 통해 운영되기에 발생하는 문제였다. 게다가 조선시대 행정문서는 한문으로 작성 되었고 그 한문을 아는 사람들은 거의 남성이었기에 문제는 더 심각했다.

기왕의 행정 관행으로 한다면 문자를 모르는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은 이렇게 시행되어야 했다. 우선 승정원에 모이는 문서를 승지들이 한글로 번역한다. 그 다음 번역 문서를 승전색 환관에게 줘서 정희대비에게 전달한다. 정희대비가 결재하거나 명령하는 한글 문서는 승전색을 통해 다시 승지들에게 전달한다. 승지들은 이 문서를 한문으로 번역해 해당 관청에 발송한다.

그런데 이렇게 하려면 정희대비는 수시로 승전색 환관과 승지들을 만나야 했다. 여성인 정희대비는 이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대안으로 한문에 능숙한 측근 여성을 내세웠다. 당시 정희대비의 측근 여성 중 한문에 능숙한 여성이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성종의 생모이자 정희대비의 큰며느리인 수빈 한씨였고, 다른 한 명은 조두대(曹豆大)라는 여종이었다. 큰며느리 수빈은 한문을 잘 안다는 이유로 수렴청정 적격자로 추천되기까지 됐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정희대비가 믿고 쓸 수 있는 측근은 조두대라는 여종일 수밖에 없었다.

조두대는 승전색 환관과 승지를 대신해 정희대비의 결제문과 명령문을 작성했다. 그 과정에서 정희대비에게 가는 행정문서는 조두대를 거쳤고, 결제문이나 명령문 역시 조두대를 거쳤다. 정희대비와 조두대의 역할에 따라 승정원을 비롯한 궁중기구는 물론 의정부와 6조 등 중앙정부조직이 유명무실화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여종의 신분은 천민이었다. 그런 조두대가 정희대비와 함께 권력구조의 정점에 자리했다는 사실 자체가 역사적이었다. 나아가 조두대가 정희대비의 측근이 된 사연 역시 역사적이었다.

영순군의 몸종이었던 조두대의 입신

경기도 진접읍 부평리에 있는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광릉. 궁녀 조두대는 정희왕후 윤씨를 내알해 거대한 재물을 축적했다.


원래 조두대는 광평대군의 여종이었다. 8대군으로 알려진 세종의 아들 중에서 광평대군은 다섯째였다. 세종 7년(1425)에 태어난 광평대군은 12세 되던 해에 신자수의 딸과 혼인해 출궁했다. 그 직후 세종은 광평대군을 무안군 이방번의 후사로 삼아 제사를 받들게 했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부왕 태종에게 살해당한 무안군의 혼령을 위로하고, 나아가 그의 미망인 왕씨를 봉양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부인 신씨와 함께 양모 왕씨를 모시고 살던 광평대군은 20세 되던 해 7월에 첫째 아들을 보았지만 그해 12월 창진(瘡疹)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젊은 나이에 갑자기 저승으로 간 광평대군도 불쌍한 인생이지만 태어난 지 5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은 아이 역시 불쌍한 팔자라 하겠다. 그러나 제3자의 이 같은 동정이 어찌 부인 신씨의 슬픔과 같으랴? 충격을 받은 부인 신씨는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핏덩이를 남기고 저승으로 떠난 아들, 그리고 핏덩이를 남기고 출가해버린 며느리를 보면서 세종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 마음을 가늠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세종은 손자를 살려야 했다. 기록에 의하면, 핏덩이 손자를 불쌍히 여긴 세종은 유모에게 명하여 안고 앞으로 나오게 한 후 친히 수복(壽福)이라는 자(字)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 손자가 훗날의 영순군(永順君)이었다. 핏덩이 때부터 영순군을 돌보며 키운 사람은 사실상 유모와 몸종이었다. 영순군의 유모는 홍씨라는 여성이었고 조두대는 바로 몸종이었다. 조두대는 세종 때 영순군을 시중들기 위해 처음 입궁했다. 이후 영순군은 출궁했지만 조두대는 궁중에 남아 궁녀가 되었다. 한문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영리했기 때문이었다. 문종, 단종, 세조, 예종 대에 걸쳐 궁녀 조두대는 영순군과 궁중을 이어주는 끈이기도 했다.

세조는 그 어느 국왕보다도 조두대를 신임하고 중용했다. 부왕 세종의 유언 때문이었다. 세조는 조카 영순군을 친아들처럼 애지중지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핏덩이 영순군을 길러준 조두대를 신임하고 중용했던 것이다. 이런 인연을 중시한 정희대비는 세조 사후에 조두대를 더더욱 신임하고 중용해 국가 권력구조의 정점에 올려놓기까지 했다. 한문을 모르기에 어쩔 수 없이 중용했다는 면에서 보면 실용적인 마음의 발로라 할 수 있지만, 기왕의 인연을 중시했다는 면에서 보면 자비로운 마음의 발로라 할 수 있다.

정희대비의 수렴청정 기간 중 조두대의 공식 직함은 ‘전언(典言)’이었다. ‘정희대비의 말씀을 관장하는 궁녀’라는 뜻으로서 환관으로 치면 승전색(承傳色)에 해당했다. 전언 조대두는 한문뿐만 아니라 정치 감각도 뛰어났다. 실록에 의하면 조두대는 재상 이철견의 수양녀였다. 이철견은 정희대비의 조카 즉 정희대비의 여동생 아들이었다. 이런 이철견의 수양녀인 조두대는 정희대비에게 손녀나 마찬가지 존재였다.

조두대는 정희대비는 물론 인수대비와도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예컨대 인수대비의 대표작인 <내훈(內訓)>의 발문을 조두대가 썼다. “(…) 신(臣)이 가만히 살펴보니 역대의 어진 왕비는 시부모를 부지런히 섬겨 인효(仁孝)의 덕을 다했고, 자식을 엄히 키워 국가의 경사를 이룬 자가 많았지만, 직접 교훈서를 지어 훈계한 자는 거의 없었습니다.(…)”는 내용으로 볼 때, 조두대는 분명 역사와 고사에 두루 능통했다. 당시 궁중에서 여성의 몸으로 이 정도의 식견과 한문 실력을 가진 인물은 인수대비와 조두대 두 명뿐이었다.

수렴청정을 하는 정희대비의 손녀 같은 딸이자 대비의 말씀까지 관장하는 궁녀일 뿐만 아니라 국왕 성종의 생모인 인수대비와도 밀접한 전언 조두대의 영향력은 상상하고도 남을 만했다. 당연히 조두대의 영향력에 빌붙으려는 자들이 줄을 섰다. 이처럼 비공식적인 줄을 이용해 절대 권력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내알(內謁)이었다. 말 그대로 안에서 은밀하게 자행되는 알현과 청탁이 내알이다.

면포사업 독점으로 ‘재벌’이 되다

조두대는 자신의 내알, 나아가 그 내알에 빌붙으려는 자들을 이용해 거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물론 자신은 궁중에 있었으므로 직접 나서지 않고 대신 조카 조복중(曹福重)을 내세웠다. 천민 신분의 조복중은 고모 조두대를 배경으로 국내외의 각종 이권에 개입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실록에는 조복중에 대하여 “본래 부상대고(富商大賈)로서 면포(綿布) 바치는 일을 업으로 하고 있음은 나라 사람이 아는 바 입니다”라는 언급이 있다. 부상대고는 요샛말로 재벌이다. 면포를 바치는 사업을 독점적으로 하여 재벌이 되었던 것이다.

조두대는 큰돈을 시주해 영감암(靈鑑庵)을 중창하기도 했다. 영감암은 오대산 상원사 주변에 있는 암자로 고려 말에 나옹대사가 수도하기도 했지만 조선 건국 후 퇴락했다. 세조 12년(1466) 국왕의 상원사 행차에 동행했던 조두대는 영감암의 사연을 듣고 중창하기로 결심했다. 본인의 입신양명을 위해 또 부모의 극락왕생과 세조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서였다. 중창공사는 세조 13년 봄부터 예종 1년 가을까지 2년 반이나 걸린 대공사였다. 성종 5년(1474)에는 암자에서 수도하는 스님들의 생활을 위해 논 10섬지기를 시주했는데, 대략 1만 6천 평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이렇게 정희대비의 수렴청정과 더불어 조두대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영향력이 격증하면서 온갖 구설도 격증했다. 궁중비화에는 거의 빠짐없이 조두대가 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성종 6년(1475) 11월 익명서 사건이 발생했다. 조정중신들이 작당하여 역모를 도모한다는 내용의 괴문서가 승정원 문에 붙었던 것이다. 익명서는 묻지 않고 바로 소각하는 것이 당시 관행이었지만, 이미 소문이 널리 퍼졌고 이름이 거론된 조정중신들은 사퇴의사를 밝혔다. 성종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큰 상을 내걸어 주모자를 색출하려 했다. 만약 주모자가 자수하면 면죄해주고, 모의에 참여한 자가 고발하면 천인은 면천하며 양인은 3품 관직을 내리고, 주모자를 체포 또는 고발하는 자도 같은 상을 내린다는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12월 10일, 승정원에 친군위 권즙의 고발장이 접수되었다. 최개지라는 사람이 누군가와 노비 소송을 벌였는데, 그 누군가가 정희대비의 친정식구와 조두대에게 뇌물을 써서 이겼고 분개한 최개지가 괴문서를 붙였다는 내용이었다. 권즙은 이런 내용을 친척인 박윤형으로부터 들었는데 박윤형은 최개지에게서 직접 들었다고 했다.

이 고발장은 익명서 사건을 궁중 문제로 비화시켰다. 성종은 익명서에 거론된 조정중신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주모자를 색출하려 한 것인데 고발장의 내용은 엉뚱하게도 정희대비를 겨냥하였다. 정희대비의 친정과 측근 조두대가 뇌물을 받고 노비 소송을 왜곡 했다면 그것은 곧 그들이 내알을 통해 국정을 농단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따라 익명서 사건은 주모자 색출에서 정희대비와 관련된 언급을 최초로 발설한 자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사건으로 비화했다.

수렴청정 끝낸 후에도 조두대 비호

의금부에서는 처음에 박윤형과 최개지를 체포하여 사실여부를 조사하였다. 하지만 박윤형은 그런 말을 권즙에게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고, 최개지 역시 그런 말을 박윤형에게 한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도리어 최개지는 그런 말을 한 사람은 박윤형이었다고 주장했다. 최개지와 박윤형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희대비와 관련된 언급을 최초로 발설한 자는 권즙이었고, 그 말을 들은 박윤형이 최개지에게 전달 했다는 추정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권즙은 자신의 죄를 박윤형과 최개지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먼저 고발장을 제출했다는 추정도 가능했다. 이렇게 되자 의금부는 다시 권즙을 체포해 조사했지만 그는 물론 사실무근이라 주장했다. 결국 정희대비와 관련된 언급을 최초로 한 자가 누군지는 오리무중에 빠져들었고, 도리어 그 발언의 진위여부가 논란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논란은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따지는 논란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사가 진행되고 논란이 거세질수록 곤란해진 사람은 오히려 정희대비였다. 궁지에 몰린 정희대비는 12월 13일 승정원에 다음과 같은 명령서를 내렸다.

“처음에 주상이 어리고 대신들이 나의 수렴청정을 요청하기에 나는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 후 나는 매사에 조심하고 노력했는데, 지금 최개지의 말에 ‘전언 조두대가 정희대비에게 아뢰지도 않고 제멋대로 판단하여 소송판결을 내렸다’는 내용까지 있다. 이것은 내가 수렴청정을 하기에 나타난 결과다. 정치는 부인의 일이 아니고 또 이제 주상이 총명하니 만기가 비록 번거롭다고 해도 어찌 결단하기 어렵겠는가?”(<성종실록> 권62, 6년 12월 13일)

정희대비 스스로 모든 책임을 지고 수렴청정을 그만두겠다는 내용이었다. 성종과 조정중신들은 만류했지만 정희대비의 강경한 고집으로 결국 철렴이 결정되었다. 성종 7년(1476) 1월 13일이었다. 이렇게 정희대비의 수렴청정 7년은 불명예스럽게 막을 내렸다.

돌이켜보면 정희대비의 불명예 퇴진은 사소하다면 사소한 익명서 사건이 발단이었다. 그리고 익명서의 발단은 정희대비의 친정과 측근 조두대의 국정농단으로 최개지가 억울하게 패소했다고 하는 소송사건이었다. 그런데 실제 최개지의 패소가 국정농단 때문인지 아니면 최개지 본인의 잘못 때문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정희대비가 철렴하면서 최개지 사건은 흐지부지되었고 정희대비의 친정과 조두대에 대한 조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최개지 사건에서 국정농단이 있었을 수도 있고 없었을 수도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최개지 사건에 등장하는 최개지 본인을 위시하여 권즙, 박윤형 모두가 국정농단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비록 그런 말을 최초로 발설한 자가 누구인지를 놓고 서로 다른 주장을 펼쳤지만 국정농단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이들의 인식은 바로 당시 백성의 여론이었다.

물론 이런 여론은 문자를 모르는 정희대비를 대신하는 조두대를 곡해해서 나타난 것일 수도 있고 실제 조두대의 국정농단이 있었기에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 진실이 무엇이든 정희대비가 수렴청정을 시행하면서 조두대를 측근으로 두는 한 이런 여론은 사라질 수 없었다. 그런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조두대를 물리치든가 아니면 수렴청정을 그만두든가 둘 중 하나였다. 정희대비는 조두대를 내치는 대신 자신의 수렴청정을 포기했다.

권력의 속성상 그 맛을 본 사람이 자발적으로 권력을 내려놓기가 거의 불가능함을 동서고금의 역사는 웅변한다. 그런데 정희대비는 자발적으로 불명예 퇴진을 택했다. 성종에 대한 믿음도 믿음이지만 조두대를 희생시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런 면에서 조두대와 영순군에 대한 정희대비의 자비심은 가히 바다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성종 14년(1483) 정희대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조두대의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비록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은 끝났지만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의 영향력은 여전했고 조두대에 대한 신임 역시 여전했기 때문이다. 정희대비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조두대는 인수대비의 강력한 신임을 확보함으로써 정치적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이른바 변처녕(邊處寧) 사건이었다.

성종 22년(1491) 겨울, 명나라 황태자가 조만간 책봉되리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성종은 이를 축하하기 위해 진하사(進賀使)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성종 23년 봄에 진하 정사에 정괄, 부사에 변처녕이 임명되었다.

당시 조선의 부상대고는 북경 무역을 통해 큰 이익을 남겼다. 조선에서 북경으로 갈 때는 인삼을 가져다 팔아 이익을 남겼고, 올 때는 또 비단이나 고급 약재를 가져와서 이익을 남겼다. 하지만 북경 무역을 위해서는 사신 행렬에 합류해야만 가능했다. 이에 따라 명나라 사행이 결정되면 조선을 대표하는 부상대고 사이에 격렬한 경쟁이 벌어졌다.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부상대고는 고귀지(高貴枝)와 조복중이었다. 고귀지는 정희대비의 친정인 파평 윤씨에 줄을 댄 부상대고였고, 조복중은 조두대의 조카였다.

진하 부사에 임명된 변처녕은 처음에 고귀지의 아버지 고윤량(高允良)을 수행군관 명목으로 사신 행렬에 합류시켰다. 본래 수행군관은 사신을 호위하기 위한 무관이기에 장사꾼이 할 수 없는 임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귀지의 아버지는 돈과 인맥을 동원해 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가 갑자기 조복중으로 교체되었다. 당연히 고귀지는 의심했다. 조복중이 자신보다 더 많은 뇌물을 썼거나 아니면 조두대를 이용했을 것이라 짐작했던 것이다. 분개한 고귀지는 조복중을 찾아가 크게 따졌다. 싸움이 커져 결국 사헌부에 적발되었고 정치문제로 비화되었다.

사헌부를 비롯한 삼사에서는 변처녕은 물론 고귀지와 조복중도 엄히 조사해 처벌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의금부에서는 고귀지와 조복중을 체포해 조사했다. 그런데 당시 백성들 사이에는 “조복중은 분명 죄를 받지 않을 것이고 엉뚱한 나무들만 화를 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배후인 조두대를 처벌하지 않는 한 조복중 처벌이 불가능하다는 여론이었다. 이에 따라 삼사에서는 조두대도 엄히 조사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여론의 예상대로 조두대에 대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사 후, 진하부사 변처녕은 교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패가망신했다. 하지만 조복중은 멀쩡했다. 진하부사는 재상급인데 그런 변처녕도 패가망신하는 마당에 천민인 조복중이 멀쩡했다는 것은 결국 조두대의 영향력이 그 정도로 막강했다는 반증이었다. 이에 사관은 이런 논평을 남겼다.

위 사건이 일어난 성종 23년은 이미 정희대비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일이 발생한 이유는 조두대의 내알이 여전히 강력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두대의 내알을 받아준 사람은 인수대비였다.

정희대비와 비교할 때 인수대비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우선 정희대비는 문자를 몰랐지만 인수대비는 문자를 알았다. 또 정희대비는 수렴청정을 했지만 인수대비는 그러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대비 사이에는 같은 점도 많았다. 가장 현저하게 드러나는 같은 점은 내알을 조장했다는 사실이었다.

백씨의 내알에 빠진 인수대비

드라마 <인수대비>에서 인수대비 역을 맡았던 채시라. 성종의 생모였던 인수대비 역시 조두대의 내알을 막지 못했다.


정희대비의 경우 내알은 일면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문자를 모르기에 수렴청정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문자를 아는 조두대를 중용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인수대비는 문자를 잘 알았고 수렴청정을 하지도 않았다. 객관적인 면에서 볼 때 조두대를 측근으로 둘 이유는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인수대비는 왜 조두대를 측근에 두어 내알을 조장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시부모인 세조와 정희대비가 중용했기 때문이었다. 시부모가 쓰던 사람을 며느리 입장에서 매정하게 내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수대비는 정희대비와 마찬가지로 조두대에게 매우 자비로웠다.

인수대비는 아들인 성종이나 월산대군 그리고 손자인 연산군에게는 매정한 어머니 또는 할머니로 알려져 있지만 측근에게는 매우 자비로웠다. 특히 조두대와 백어리니(白於里尼)라는 두 여성에게 그러했다. 원래 백어리니는 문종이 세자이던 시절 세자빈 권씨의 여종이었다. 그녀는 강선(姜善)의 부인이었으며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총명했다. 세자빈 권씨는 훗날의 경혜공주를 출산한 후 총명한 백씨를 유모로 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계유정난 이후 경혜공주의 남편 영양위 정종이 역모로 몰려 죽은 후 백씨는 수양대군에게로 넘어갔다. 수양대군은 총명한 백씨를 큰아들에게 주었고, 그 인연으로 백씨는 훗날 성종이 되는 자산군의 유모가 되었다. 자산군은 백씨를 마치 생모처럼 존중했으며, 훗날 인수대비가 되는 수빈 한씨 역시 백씨를 극진히 신임했다. 이 같은 인연으로 백씨는 성종이 즉위한 후 봉보부인(奉保夫人)의 자격으로 입궁했다. 이처럼 인수대비와 백씨의 인연은 정희대비와 조두대의 인연 못지 않게 구구절절하다. 뿐만 아니라 정희대비가 조두대를 측근으로 중용했듯이 인수대비 역시 백씨를 측근으로 중용했다. 나아가 정희대비 사후에는 조두대 역시 측근으로 중용했다.

결과적으로 정희대비 사후에는 궁중 내알이 기왕의 조두대 한 명에서 백씨까지 더하여 두 명으로 늘었다. 당연히 궁중 내알에 빌붙으려는 자들은 조두대와 백씨 두 명에게 줄을 섰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앞에 나왔던 변처녕과 더불어 이공(李拱)이라는 인물이었다. 이공은 세종대의 유명한 역법학자 이순지의 아들인데, 실록에는 가혹하다 싶을 정도의 사론이 여러 차례 실려 있다. 예컨대 이런 사론이 대표적이다.

“처음에 이공이 봉보부인 백씨의 조카딸을 첩으로 삼고 백씨 부부를 부모처럼 섬겼다. 순천부사가 되어서는 몰래 뇌물을 들여 백씨와 깊이 사귀었다. 임기가 만료되어 곧 승지가 되었다가 일 때문에 파직되었는데 또 얼마 안 되어 특별히 가선대부에 올라 호조판서가 되었다. 백씨가 아들을 장가들이던 날 이공이 백씨의 집안일을 마치 늙은 종처럼 맡아 보았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다 비루하게 여겼다. 하지만 이공은 권세와 이익을 달게 여겨 스스로 좋은 계책이라고 생각하였다. 안주목사가 되어서는 더욱 부지런히 섬겨 뇌물을 땅으로 나르고 바다로 날라 바쳤다.” [<성종실록> 207, 18년(1487) 9월 28일]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면 정희대비나 인수대비는 조두대와 백씨에게 바다처럼 자비로웠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볼 때 그 자비심이 공식적인 행정조직을 무력화하고 내알을 조장했으며, 성종의 치세를 불명예스럽게 만들었다. 이런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유교지식인들이 제시한 대표적인 처방이 <대학연의>의 ‘엄내치(嚴內治)’였다. 궁중의 여성이나 환관이 정치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엄히 하는 것, 즉 내알을 방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엄내치’였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니, 엄내치에 소홀하여 비극에 빠진 권력자들이 헤아릴 수 없다. 일면 역사가 허망하기도 하고 일면 두렵기도 하다.


필자 인터뷰ㅣ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 “스캔들의 역사는 수신제가의 귀중한 반면교사”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는 조선 왕실을 “유교국가 조선의 꽃이기도 하지만 스캔들의 보물창고”라고 규정한다. 국왕, 왕비, 세자, 세자빈, 대비, 후궁, 환관, 궁녀, 무당, 스님, 양반, 군인 등 온갖 군상이 얽히고 설켜져 벌이는 스캔들의 스토리가 무궁무진하다는 뜻이다. 신 교수에게 스캔들의 역사를 통해 후대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을 물었다.

조선시대 왕실의 스캔들에 주목한 이유는?

“최고 권력 주변의 인간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일으키는 스캔들은 당시의 역사는 물론 인간의 심층과 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인간적 동질감과 동정심을 느끼는 동시에 우리의 주변을 경계하고 자중하는 데 큰 교훈을 준다.”

스캔들을 주변부적으로 보는 역사 판단의 시각도 있다.

“그렇지 않다. <대학연의>는 유교의 사서(四書) 중 하나인 <대학>을 자세히 설명한 책인데 양반들의 필수교양 서적이었다. <대학연의>에서 제일 재미있는 대목이 스캔들이라 생각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반면교사로 스캔들만한 것은 없다.”

조선시대 스캔들을 ‘연의’의 방식으로 서술하고 싶다고 했는데.

“과거 동양에는 연의(演義) 전통이 있었다. 말 그대로 뜻을 넓혀서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연의다. 예컨대 <삼국지>를 자세히 설명한 <삼국지연의>가 대표적이다. 궁중의 온갖 인간군상이 얽혀져 벌이는 스캔들은 하나하나가 가히 <조선왕실연의(朝鮮王室衍義)>의 일부라 할만하다. 이런 왕실스캔들을 연의의 이야기 방식으로 풀어냄으로써 역사적 흥미와 더불어 인간에 대한 이해를 풍요롭게 하고 싶다. 소설과 영화 등 다양한 매체에서 콘텐트의 좋은 소재로도 활용될 것이다."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 …효종의 ‘남다른 우애’가 부른 비극

(중앙일보 2015.02.19 07:10)

인평대군의 네 아들(4福)에 대한 맹목적 사랑이 교만과 방종 불러와
권력자 측근일수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일신(一身) 보전

 

권력자의 친인척일수록 겸손과 근신을 배우게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교척속(敎戚屬)’이다. 그렇게 하지 못해서 권력자와 그 주변이 공도동망(共倒同亡)하는 경우를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효종과 현종에 이어 14세의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른 숙종이지만 46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사진은 창경궁 문정전에서 열린 조선시대 궁궐 일상 재현행사.



효종 7년(1656) 5월 12일, 승정원에 고변서가 접수됐다. 고발자는 천안군수 서변(徐?)이었다. ‘훈련대장 이완을 비롯한 몇몇 역적이 역모를 도모했다’는 소문을 홍만시로부터 들었다는 내용이었다.

고변서가 접수된 당일, 관행대로 궁궐 안에 추국청(推鞫廳)이 설치됐다. 의금부 도사들은 고변서에 언급된 피의자들을 체포했다. 조사 결과 서변이 들었다는 소문은 조윤석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추국청 조사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어느 날인가 저의 매부 한정상 집에서 신부례(新婦禮)를 행했습니다. 저는 그날 풍정도감(豊呈都監)에 있다가 해 떨어진 후 그 집에 갔습니다. 그곳에는 한씨 친척 몇 명이 모여 있었지만 모두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정선흥 역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젊은이가 방으로 들어와 자기집에서 있었던 회음(會飮)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젊은이에 의하면 자신의 아버지와 허적이 함께 모여 있었는데 야심한 시각에 승지 유도삼이 와서 망발했다고 했습니다. 정선흥이 ‘무슨 망발이었습니까?’라고 묻자 젊은이는 ‘유 승지가 술에 취해 들어와 거만한 자세로 앉자 어떤 사람이 인평대군께서 여기 계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유 승지는 깜짝 놀라 일어나 절하면서 ‘소신(小臣)의 불찰’이라고 말했습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망발이라고 하자 유 승지는 ‘오랫동안 승지로 있어 말이 습관이 돼 그렇게 됐다고 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 말이 소문으로 퍼졌는데 저는 같이 앉아서 듣기만 했습니다.” [출처: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서변등옥사추안(徐?等獄事推案)>]

조윤석의 진술은 생각하기에 따라 무시무시한 파장을 불러올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유 승지가 인평대군에게 ‘소신’이라 한 말이 문제였다. 조선시대에 승지가 ‘소신’이라 자칭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국왕과 왕비뿐이었다. 그런데 승지 유도삼은 인평대군에게 소신이라 자칭했다. 술에 취해 그랬다고는 해도 충분히 대역부도로 몰릴 만한 발언이었다.

장소와 참석자들도 문제였다. 위의 젊은이가 언급한 자기 집이란 오정일의 집이었다. 오정일이 누구인가? 바로 인평대군의 큰처남이었다. 오정일이 자신의 집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매부인 인평대군을 초청했는데, 그 자리에 허적, 유도삼 등이 참여했던 것이다.

당시 허적은 형조판서로서 남인의 핵심인물이었고, 유도삼은 현직 승지였다. 왜 이들이 인평대군과 오정일의 술자리에 참여했을까? 또 왜 현직 승지는 인평대군에게 소신이라 자칭했을까? 의심하는 눈으로 보면 모든 상황이 의혹을 낳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당시 최정예 부대인 훈련도감을 장악한 이완까지 연루되었다면 단순한 의심을 넘어 역모를 의심하기에도 충분했다.

더구나 오정일의 아들이 왜 그런 사실을 조윤석을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일부러 소문을 냈을까 하고 의심하면 온갖 추측도 가능했다. 혹 유도삼의 망발은 단순한 망발이 아니라 어떤 음모 때문에 나왔고, 그 음모를 물타기 위한 역(逆)선전 또는 사람들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술책이 아닐까 하는 추측, 나아가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닌 조윤석이 있는 자리에서 그런 소문을 퍼뜨린 저의 역시 음모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했다.

왜냐하면 조윤석은 자의대비 조씨의 친정 큰오빠인데, 만약 그가 이런 소문을 듣고 자의대비에게 알릴 경우, 자의대비의 반응에 따라 다음 단계를 음모하려는 술책이라고 의심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의심들은 특히 서인 사이에 횡행했다. 그때 서인들 사이에는 남인이 서인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인평대군과 자의대비를 이용하려 한다는 의심, 아예 남인이 인평대군을 추대하려 한다는 의심 등이 횡행했다. 무엇보다도 인평대군의 처가인 동복 오씨가 남인의 대표가문일 뿐만 아니라 동복 오씨의 중심인물인 오정일이 인평대군, 허적과도 빈번히 접촉했기에 이런 의심들을 불러왔다.

효종의 공평하지 못했던 사건 처리

서변의 고변은 사실상 위와 같은 서인의 의심에서 비롯됐다. 이런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인평대군, 오정일 그리고 허적을 체포해 조사해야 했다. 조선시대 관행으로 한다면 추국청 조사에서 언급된 연루자는 무조건 조사해야 했기에 조윤석의 진술에 언급된 그들을 조사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이들을 체포하자는 추국청의 요청에 대해 효종은 예상외로 거부의사를 표시했다. 왕은 승지 유도삼이 술기운에 소신이라 자칭한 것은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도리어 왕은 누군가가 서변을 사주해 고변했다고 의심했다. 인평대군을 해치고 남인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고변했다고 의심한 것이었다.

하지만 서변의 고변이 서인 일반의 의심을 대변했다면 효종의 의심은 국왕 개인의 의심일 뿐이었다. 따라서 공평한 조사가 되기 위해서는 서변의 무고 가능성은 물론 인평대군과 오정일의 역모 가능성도 함께 조사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왕은 그렇게 하지않았다. 왕은 서변의 고변을 무고라 단정하고 그 배후를 캐기 위해 직접 추국청에 참여해 누가 사주했는지 집요하게 추궁했다. 연이은 고문에 시달리던 서변은 매를 맞다가 죽었다. 서변에게 소문을 전한 홍만시 역시 매를 맞다가 죽었다. 그 결과 서변의 고변은 무고로 확정됐다.

그렇다면 서변의 고변은 정말 무고였을까? 현재 상황에서 무고인지 아닌지 확인할 증거는 없다. 무고일 가능성도 있고 아닐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 확정하기 위해서는 인평대군과 오정일도 조사했어야 하는데 효종은 독단으로 이들을 조사에 포함 시키지 않았다.

만약 당시에 인평대군을 조사했다면 그는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역적들에게 추대됐다는 혐의만으로도 생사를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인평대군은 물론 왕 자신에게도 큰 부담이었다. 바로 이 점을 우려해 효종은 일방적으로 서변을 무고자로 몰았다.

여기에 반발한 대사간 유철이 추가 조사를 요구하자 오히려 왕은 그를 서변의 배후자로 지목해 국문하라 명령했다. 이에 신하들이 거세게 반발하자 효종은 “오늘날의 나랏일은 내가 알 바 아니니 그대들 마음대로 해라. 내게는 단지 동생 하나가 있을 뿐인데 기어코 죽이고자 하니, 어찌 이처럼 간악하고 음흉한 자가 있단 말인가?”라며 울부짖기까지 했다.

극단적으로 나오는 왕의 위력에 신하들은 입을 다물었다. 대사간 유철은 곤장을 맞은 후 귀양에 처해졌고, 서변의 고변은 무고로 마무리됐다. 인평대군을 살리기 위한 효종의 우애가 불러온 결과였다.

부주의한 행동으로 단명 재촉한 인평대군

경기 여주군에 있는 효종대왕릉. 소박하면서도 간결하고 짜임새 있게 조성됐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서변의 고변은 무엇보다도 인평대군의 부주의가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그가 큰처남 오정일을 비롯해 허적, 유도삼 등을 자주 만났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관행에 의하면 대군이 관료를 만나는 것은 금기시됐다. 예컨대 어느 왕자가 이언적을 사모해 찾아오자 이언적은 그날로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다는 이야기가 미담으로 전해지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인평대군은 현직 관료인 허적, 유도삼 등을 스스럼없이 만났던 것이다. 이것이 많은 의심과 소문을 양산했다.

당시 효종이 좀 더 객관적이었더라면 인평대군은 몰라도 최소한 오정일과 허적은 조사해야 마땅했다. 서인의 의심을 조금이라도 풀기 위해 또 인평대군과 남인에게 최소한의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효종은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을 권력으로 찍어 누르고 탄압했다. 당연히 서인의 불만은 커졌고 인평대군의 불안 역시 커졌다. 이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서변의 고변이 있은 지 2년 후에 인평대군은 37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고변 때문에 인평대군이 제명에 죽지 못했다고 생각한 효종은 직접 제문을 짓고 글씨까지 썼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아아! 역적 서변의 변괴는 말하고자 하면 참혹해 사람으로 하여금 기가 막히게 한다. 간악한 정상이 탄로났기에 극형에 처해 그 원한을 통쾌하게 풀었지만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라 생각이나 했으리요. 지금까지도 분노한 마음이 그때와 같이 삭아들지 않는구나. (…) 의지할 곳 없는 너의 아이들과 슬픔에 젖은 너의 처는 내가 모두 길러줄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 너는 항상 가득 차는 것을 두려워해 매번 겸허한 덕을 삼갔는데 어찌 이다지도 보답을 받지 못한단 말인가? 하늘의 도가 무상하니 창천을 우러러 길게 부르짖는다. 저승으로 갈 날이 닥쳐오는데 너는 어찌하여 내 꿈에 들어와 평생의 지극한 회포를 풀어주지 않는단 말이냐? 마치 낭랑한 너의 웃음 소리를 듣는 듯하고, 네가 문득 눈앞에 있는 듯도 하니 내 어찌 잠시라도 너를 잊을 수 있겠느냐? 세월이 흘러도 애통함을 누르기 어렵구나. 세상에 남겨진 너의 아이들은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고, 나 또한 실의에 차서 이 세상일에 즐거움이 없으니 비로소 만가지 인연이 이에 허사가 되었음을 알겠구나.” [<효종 어제어필, 이요치제문(李?致祭文)> 중에서]

인평대군이 세상을 떠났을 당시 슬하에 4남2녀가 있었다. 4남 중 첫째 복녕군이 스무 살, 둘째 복창군이 열여덟 살, 셋째 복선군이 열두 살 그리고 막내 복평군이 열한 살 이었다. 이들은 복자 돌림이기에 통칭해 제복(諸福) 또는 4복(四福)이라 했다. 복녕군과 복창군은 이미 혼인했고, 복선군과 복평군은 혼전이었다.

이들 4복을 키운 여성은 윤 상궁이었다. <숙종실록>에 의하면 윤 상궁은 인조 때 궁녀였는데 당시 궁중실세 조 귀인에게 미움을 받아 인평대군방으로 쫓겨났다. 인평대군은 바로 이 윤 상궁에게 아이들 양육을 맡겼다. 윤 상궁이 궁녀였음에도 불구하고 한자와 역사에 통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4복을 양육하던 윤 상궁이 어느 날 궁중에 들어왔다. 그때 세자였던 효종이 인조에게 수라를 올렸는데, 조 귀인이 은 첨자(籤子)를 뽑아 생선탕에 꽂았고 색이 변했다. 조 귀인은 “색이 변하다니 몹시 괴이합니다”라고 했다. 탕에 독약이 들었다는 뜻이었고, 세자가 인조를 독살하려 한다는 뜻이었다. 세자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때 마침 옆에 있던 윤 상궁이 “뜨거운 생선탕에 은을 담그면 색이 변합니다. 다른 생선탕으로 시험 해보소서”라고 했다. 시험 결과 과연 그랬다. 인조의 의심이 풀려 세자는 살아날 수 있었다. 이후 세자는 윤 상궁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겼고 왕이 되자마자 지밀상궁으로 입궁시켰다.

인평대군이 죽자 효종은 “의지할 곳 없는 네 아이들을 내가 모두 길러줄 것”이라 공언한 그대로 복선군과 복평군을 궁중에 들여 키웠다. 이들을 딱하게 여긴 효종은 윤 상궁에게 양육을 맡겼다. 그렇지 않아도 불쌍한 복선군과 복평군을 엄한 남자선생님에게 맡기기가 안쓰러웠던 것이다. 윤 상궁은 이들을 마치 아들처럼 아끼고 돌보며 철없이 키웠다.

효종은 세자에게도 4복을 친형제처럼 대우해야 한다고 누누이 가르쳤다. 당시 세자는 훗날의 현종으로 복창군과 동갑인 열여덟 살이었다. 친형제가 없어 외로웠던 세자는 4복 중에서도 특히 복창군과 친하게 어울렸다. 복창군은 동생들을 만나기 위해 또 세자를 만나기 위해 수시로 입궁했다.

복창군과 세자는 나이와 혈연 이외에도 인연이 깊었다. 세자는 김육의 손녀사위였고 복창군은 김육의 외손녀사위였다. 즉 세자는 효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김육의 아들인 김우명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복창군은 김육의 딸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복창군과 세자는 나이로는 동갑, 혈연으로는 4촌 그리고 혼인으로는 청풍 김씨 김육 가문의 사위였던 것이다.

복창군이 수시로 궁에 드나들고 나아가 복선군과 복평군이 궁 안에서 철없이 자라면서 무수한 소문과 의심이 난무했다. 그러나 효종이 생존한 상황에서 이런 소문과 의심은 겉으로 드러나지 못했다. 이런 문제를 언급하기만 해도 효종은 극단적인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효종의 절대적인 동정과 보호 속에서 4복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며 살았다.

하늘 높은 줄 몰랐던 ‘4복’의 방자함

사약(賜藥)은 고관대작이나 왕실의 지친 등이 대역죄를 지었을 때 내려진 벌이었다.



인평대군이 죽고 1년 만에 효종이 승하했다. 당장 서인 측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효종 승하 후 2개월 만에 송준길은 상소문을 올려 4복으로 인해 제기되는 각종 의혹과 불만을 공개했다. 송준길은 세종 때 광평대군의 어린 아들 영순군을 궁에 들여 양육하다가 문종이 즉위하자마자 출궁시킨 전례를 들어 복선군과 복평군을 속히 출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학덕이 뛰어난 사람을 골라 복선군과 복평군 및 복녕군과 복창군 등을 훈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종은 선왕인 효종의 유지를 들어 거절했다. 효종의 왕비 장씨 역시 선왕의 뜻이라며 4복을 감싸고돌았다. 이런 상황을 더욱 부채질한 사람은 대비 장씨의 측근으로 있던 윤 상궁이었다. 그녀는 4복을 아들처럼 생각하며 무조건 보호하려고만 했다.

그 결과 4복은 효종 때보다도 더 강력한 동정과 보호를 받게 됐고 여전히 세상 무서운 줄 모르며 살았다. 그들은 국법을 어기고 경기 각처를 돌아다니며 사냥과 유흥에 빠져 지냈다. 심지어는 사냥개의 먹이까지도 가난한 백성들에게 마련하도록 책임을 지워 도처에서 분란이 생겼다.

이를 보다 못한 송시열이 현종 9년(1668)에 상소를 올려 4복을 단속하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송시열과 송준길도 어쩌지 못하는 4복의 교만은 더더욱 기승을 부렸다. 현종 11년(1670)에 복녕군이 죽었지만 나머지 3복의 교만은 더욱 높아졌다. 간혹 삼사가 3복 문제를 제기했지만 그때마다 무시됐다. 현종의 지극한 우애가 불러온 결과였다.

칼을 빼든 숙종의 모후 김씨

그러던 와중인 현종 15년(1674) 2월 23일에 왕대비 장씨가 세상을 떠났다. 효종의 왕비였던 장씨는 남편의 뜻을 받들어 평상시 3복을 아들처럼 대우했다. 이런 왕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3복은 모두 입궁해 장례에 참여했다. 3복 중의 맏이인 복창군은 대전관(代奠官)에 임명됐다. 현종 대신 왕대비의 영전에 전(奠)을 올리는 임무였다.

어느 날 현종은 왕대비의 유산을 처분하게 됐다. 그 자리에 왕대비의 아들인 현종, 딸들인 공주 그리고 아들처럼 대우받던 복창군 등도 참여했다. 왕대비의 궁녀들도 참여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참여한 복창군과 왕대비의 궁녀 중 한 명인 상업(常業)의 관계가 심상치 않았다. 야릇한 눈빛이 오가고 행동이 수상했던 것이다. 현종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지만 드러내놓고 말할 수도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궁궐의 치부를 드러낼 수도 있었고 복창군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현종은 왕비 김씨에게 말해 둘이 어떤 관계인지 은밀하게 알아보게 했다. 확인 결과 복창군은 궁궐에 들어올 때마다 간절하게 상업을 찾았다. 이미 궁녀들 사이에는 상업이 임신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3복 중의 막내인 복평군과 귀례(貴禮)라고 하는 궁녀와의 추문도 퍼질 만큼 퍼져 있었다. 복창군과 복평군 형제의 추문은 조선시대 종친이 일으킨 추문 중에서는 최고의 추문이라 할만 했다. 상황을 전해들은 현종은 “남녀의 욕정이란 사람이 억제하기 어려운데 지금 복창군의 기색을 보니 큰 환난을 일으키겠구나”라고 근심했다.

하지만 현종은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이런 사실을 공개할 경우 복창군과 복평군의 목숨이 위험하고, 방치하자니 궁궐 기강이 엉망이 되기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고민하던 현종은 왕대비 장씨가 세상을 떠난 지 6개월 후에 홀연 승하했다.

뒤이어 숙종이 14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분개하고 불안해진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현종의 왕비이자 숙종의 모후인 김씨 였다. 대비가 된 김씨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복창군과 복평군은 은혜를 원수로 갚은 불한당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효종과 현종의 지극한 동정과 보호에 힘입어 세상 편히 살았다. 그런 그들이 궁녀를 건드려 임신까지 시켰고, 그 때문에 고민하던 남편 현종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했다.

더구나 아들 숙종은 겨우 열네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숙종의 삼촌인 복창군은 서른다섯 살이었다. 단종과 수양대군 때와 유사한 상황이었다. 혹시라도 복창군 또는 그 동생인 복선군이나 복평군이 딴 마음을 품으면 어찌할 것인가? 3복 뒤에는 동복 오씨와 남인이 있었다. 궁궐 안에는 수십 년에 걸쳐 3복과 인연을 맺은 환관과 궁녀가 무수히 많았다. 이들이 합세하는 날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대비 김씨가 이런 의심을 한 것은 무엇보다도 3복의 처신 때문이었다. 친형제처럼 지낸 현종을 배신하고 궁녀를 건드리는 복창군과 복평군이라면, 조카인 숙종에게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불안에 빠진 대비 김씨는 친정아버지인 김우명을 설득해 3복의 비리를 고발하게 했다. 김우명은 이런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 복평군 형제가 효종께 친아들과 같은 은혜를 받았고, 선왕으로부터도 친형제와 같은 은혜를 입은 것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 궁녀를 임신 시키기까지 한 사람을 금지하지 못한다면, 전하의 가법(家法)이 손상되는 것이 어떠할 것이며, 또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은혜를 미루어 법을 베푸시고 일찍 결단하여 적당히 처치하소서.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마음을 경동하여 욕심을 참고 행실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진다면 궁궐 안이 맑아질 것이고 국가도 크게 다행일 것입니다.” [<숙종실록> 권3, 1년(1675) 3월 12일]

끝내 화(禍)를 피하지 못한 3복

숙종의 어필(御筆) ‘경이직내 의이방외’.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는 뜻.

 

숙종은 의금부로 하여금 복창군과 상업 그리고 복평군과 귀례를 체포해 조사하게 했다. 그들은 늘 그렇듯 처음에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자 의금부에서는 형신(刑訊) 즉 고문을 요청했다. 당시로서는 당연한 요청이었다. 그런데 숙종은 “남의 말을 믿고 골육 지친을 헤아릴 수 없는 처지에 빠지게 하였으니 나는 매우 부끄러워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난다. (…) 이렇게 억울하고 애매한 사람을 잠시도 감옥에 가둘 수 없다. 즉시 석방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매우 이례적인 판결이었다.

관행대로라면 형신이 당연한데 오히려 석방 판결이 났기 때문이다. <숙종실록>에서는 이 판결에 대해 “주상이 이미 엄폐됐기에 이렇게 처분했으며, 또 처분이 꼭 주상에게서 나왔는지도 알 수 없다”고 논평했다. 누군가가 어린 숙종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석방 판결을 끌어냈다는 의미이다. 아마도 그 누군가는 윤 상궁 같은 궁녀 또는 3복에 밀착된 환관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숙종의 판결에 언급된 ‘남의 말’은 다름 아닌 김우명의 말이었다. 김우명은 대비 김씨의 친정아버지이자 숙종의 외할아버지였다. 분개한 대비 김씨는 다음날 숙종과 조정중신들의 회의장에 무단 참여해 울부짖으며 김우명의 고발이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남인은 대비가 국정에 간여한다고 크게 반발했다. 대비 김씨는 자기의 말을 믿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협박했다. 3복 문제로 왕과 생모, 종친과 외척, 서인과 남인이 서로 비난하며 치고 받는 소동이 전개 됐다. 파국을 피하기 위해 숙종은 복창군과 복평군을 일단 유배에 처했다가 곧 석방했다. 대비 김씨의 입장 그리고 3복의 입장을 두루 반영한 처분이었다.

이런 소동이 벌어진 것은 무엇보다도 3복의 철없는 행동에서 비롯됐다. 그들이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하지만 3복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나마 궁녀 간통 사건에서 자유로웠던 복선군이 외삼촌 오정창 그리고 허적의 아들 허견 등과 어울렸던 것이다. 당연히 이들이 역모를 도모한다는 고변이 뒤따랐다. 이것은 효종 때 인평대군이 큰처남 오정일 그리고 허적과 어울리다가 고변을 당했던 사건의 판박이였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사실이 있었다. 인평대군은 전과가 없었지만 3복에게는 ‘전과’가 있었다. 숙종은 복선군과 허견의 역모를 사실로 인정해 이들을 사사했다. 이 와중에 복창군도 사사당하고, 복평군은 유배에 처해졌으며 남인은 모조리 쫓겨났다. 이 사건이 숙종 6년(1680)에 있었던 이른바 ‘경신대출척’이었다.

3복의 비극 그리고 경신대출척의 뿌리를 찾아보면 거기에는 효종의 남다른 우애가 자리 잡고 있다. 아름다워야 할 우애가 비극으로 끝난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3복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불쌍하리만큼 더 엄하게 훈육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3복은 평생에 걸쳐 윤 상궁의 일방적인 편애와 효종과 현종의 절대적인 동정을 받으며 자랐다. 그렇기에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실수를 되풀이하다 참혹한 최후를 맞은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모두를 비극으로 몰아넣었다. <대학연의>에서는 이런 우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교척속(敎戚屬)’을 제시한다.

친인척을 엄히 훈육해 겸손과 근신을 알게 하는것, 그것이 바로 ‘교척속’이다. 자손을 엄히 훈육하지 않아 교만과 방종에 빠지게 했다가 자손도 패가망신하고 스스로도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고금에 넘쳐나니 슬픈 일이다.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③ - 명성황후, 무당 신령군(神靈君)에게 미혹되다

(중앙일보 2015.03.21 00:01)

[월간중앙] 1948년 간행된 <개벽>, 한말 정국의 이면비사(裏面秘史) 소개… ‘진짜 수호신’ 백성의 충성심 외면한 고종 부부의 비참한 말로

 


 

고종황제와 명성 황후는 일개 무녀에 미혹돼 국고까지 탕진하는 우를 범한다. 인기리에 방영됐던 KBS 사극 <명성황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고종황제 (이진우 분)와 명성황후(이미연 분). / 사진·중앙포토



1948년 8월 1일 간행된 <개벽(開闢)> 제79호에서는 ‘한말 정국의 이면비사(裏面秘史)’를 특집으로 다뤘다. 8월 15일 정부수립을 앞둔 시점에서 구한말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자는 취지였다. 이 특집에는 ‘한말 정국과 금일의 정세’, ‘독립협회는 왜 패배했나?’, ‘한일병합과 양종의 기문(奇文)’, ‘밤의 여왕 신령군(神靈君)’, ‘한말 풍운의 일타홍, 미쓰 손탁’ 등의 글이 실렸다.

그런데 다른 글들은 제목에서 구한말의 역사적 사건들과 직결됨을 짐작할 수 있지만 ‘밤의 여왕 신령군’은 특집 취지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쉬 짐작되지 않는다. 우선 밤의 여왕이라 불린 신령군이 어떤 사람인지부터가 생소하다. 게다가 ‘나라 파는 데 한몫 본 요무(妖巫)’라는 부제에서는 구한말 망국의 책임이 신령군에게도 있음을 짐작하게 하는데 정말로 그랬을지 의구심마저 든다.

경기 여주군 능현리에 있는 명성황후 생가. / 사진·중앙포토

 

그러나 ‘밤의 여왕 신령군’에서는 그랬다고 단언한다. 이 글에서는 맨 처음에 “이조는 어찌하여 망했으며, 우리는 왜 식민지의 노예생활을 강제당하게 됐는가?”라고 자문하고, 그 대답으로 두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가 외세의 침략정책, 둘째가 부패할 대로 부패해 각성할 줄 모르는 이조 말엽의 실정이었는데 밤의 여왕 신령군이 실정을 대표한다고 했다.

문제의 인물 신령군이 밤의 여왕이 되고 나아가 이조 말엽의 실정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기까지는 사연이 많았다. 충주 출신인 신령군은 성이 박이고 이름이 창렬(昌烈)로 가난한 농사꾼의 딸이었다. 시집도 가난한 농사꾼에게 갔는데 팔자가 사나워 일찍이 남편을 여의었다.

홀로 된 박씨는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날씬했다. 젊어 남편을 잃은 박씨는 먹고 살기 위해 무당이 됐다. 몸주신은 관우 장군 즉 관왕이었다. 젊고 예쁜데다 말주변까지 뛰어난 무당 박씨는 점을 치거나 굿을 하면서 수많은 단골을 확보했다. 그들 중에는 무당 박씨의 영험한 힘에 끌린 사람도 있었지만 얼굴과 몸매에 끌린 사람도 없지 않았기에 추문이 돌기도 했다. 이런 무당 박씨에게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충주 장호원에서 명성황후를 만났던 것이다.

1882년 6월 10일 창덕궁을 습격한 구식 군병들은 명성황후를 찾아 죽이려 했다. 가마를 타고 대궐 밖으로 도망치려던 황후는 얼굴을 아는 궁녀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 궁녀가 입짓으로 황후가 탄 가마를 가리키자 군병들이 달려들어 가마의 휘장을 찢고 황후의 머리채를 잡아 땅에다 내동댕이쳤다.

황후는 난자당하기 직전이었다. 그때 군사들 틈에 끼여 있던 홍재희라는 이가 나서며 “이는 내 누이로 상궁이 된 사람이다. 오해하지 말라”고 고함쳤다. 실제로 홍재희의 누이 중에는 궁녀가 있었다. 긴가민가하며 군사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홍재희는 얼른 황후를 들쳐 없고 궁궐 밖으로 나갔다.


“8월 보름 귀경해 귀한 자리에 오른다”

임오군란을 일으킨 훈련도감 군인들의 훈련 모습. / 사진·중앙포토



이렇게 극적으로 살아난 명성황후는 처음에는 한양 관광방 화개동에 있는 윤태준의 집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한양은 위험하다고 판단해 충주 장호원에 사는 먼 친척 민응식 집으로 도망갔다. 그때가 6월 19일이었다. 장호원 서북쪽에는 해발 770m의 국망산(國望山)이 있고 이산의 남쪽 산발치에 민응식의 집이 있었다. 황후는 한양에서 온 양반규수처럼 변장하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기 힘들 때는 국망산에 올라 멀리 한양을 바라봤다.

국망산에 오른 명성황후가 한양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한양으로 되돌아갈까 열망했을 것만은 분명하다. 당시 한양은 황후의 정적인 흥선대원군이 장악했다. 대원군은 행방불명된 황후를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아예 장례식까지 치렀다. 이런 상황에서 황후가 살아서 입궁할 수 있을지는 전혀 기약할 수 없었다. 절망에 빠진 황후는 귀신의 힘에라도 의지하고 싶었을 듯하다.

당시 민응식의 집에 신씨라고 하는 여종이 있었다. 이 여종이 마침 무당 박씨의 단골이었다. 명성황후가 먼저 요청했는지 아니면 이 여종이 황후에게 권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여종을 통해 명성황후와 무당 박씨의 만남이 이뤄졌다. 눈치 빠른 무당 박씨는 황후를 한양에서 내려온 귀부인이라 직감했다. 당연히 무당 박씨가 황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말재주를 부렸을 것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무당 박씨는 명성황후를 쳐다보며 “귀인의 관상이 있어 장차 큰 운이 올 것”이라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봐라”는 황후의 말에 무당 박씨는 “이미 말씀 올린 바와 같이 귀인의 상을 하시었고, 지금 계신 이 댁에서 바라다보이는 저 산은 국망산이라 부르며 그 방향이 서북으로 향해 서울을 넘겨다보오니 반드시 8월 보름에 서울로 올라가 귀한 자리에 오를 것입니다”라고 예언했다. 절망에 빠져 있던 황후에게 이보다 더 달콤한 예언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예언은 국망산의 위치와 명칭을 견강부회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국망산은 황후가 머물던 집의 서북쪽에 위치했는데, 이 방향은 계절로 치면 가을에 해당하고 달로 치면 7월, 8월, 9월에 해당했다. 국망산의 ‘망’은 보름을 의미했다. 무당 박씨는 황후를 만나기 전 여종 신씨로부터 황후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음에 틀림없다.

그 이야기 중에는 황후가 자주 국망산에 올라 한양을 바라본다는 내용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황후가 한양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는 말이나 다름없을 터이다. 이런 소망을 짐작한 무당 박씨는 대략 8월 보름에는 한양에 돌아갈 수 있다고 함으로써 황후의 환심을 사려한 것이 틀림없다. 8월 보름이면 대략 두 달이 남았는데 한양에 돌아가길 소망하는 귀부인이 그 안에 왜 못 가겠는가? 혹 가지 못한다면 그럴듯한 이유를 대고 또다시 희망 섞인 예언을 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이런 점에서 무당 박씨는 점이나 굿이 영험한 것 못지않게 눈치 역시 영험한 인물이었다고 하겠다. 아무튼 무당 박씨의 영험한 예언에 반한 황후는 매일 오라고 간청했다. 만남이 거듭되면서 흉허물 없는 사이가 돼갔다.


‘예언’ 덕에 황후와 함께 서울로 입성한 무당

한양도(漢陽圖)에 드러난 북묘의 위치. / 사진·중앙포토

 

장호원에 머물던 명성황후는 은밀히 고종에게 연락을 취하며 때를 기다렸다. 변화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생겼다. 7월 8일 청나라의 오장경이 3천 명의 군병을 거느리고 남양에 상륙했던 것이다. 이어 7월 13일 흥선대원군은 한양에 입성한 청나라 군병들에게 납치돼 청나라로 끌려갔다. 그로부터 1주일 후인 7월 20일 전 현감 심의형이 오장경에게 밀서를 보냈다. 황후가 충주 장호원에 은신해 있다는 내용이었다. 보고를 받고 고종은 오장경에게 부탁해 충주로 청나라 군병을 파견해 황후를 맞이해 오게 했다.

고종은 먼저 어윤중을 충주로 보내 필요한 준비를 하게 했다. 영의정과 제학, 승지, 한림, 주서 등 핵심 요직에 있는 관리도 모두 가서 황후를 영접하라 명령했다. 경호에 필요한 청나라 군병 100명과 조선 군병 60명도 파견됐다. 어윤중이 충주 장호원에 도착한 때는 7월 27일. 곧이어 도착한 청나라 군병과 조선 군병들이 집 주변을 호위했다. 저녁 때가 되자 한양에서 파견된 관리들도 모두 도착했다.

7월 28일 명성황후는 장호원을 떠나 한양으로 향했다. 올 때는 도망길이었지만 갈 때는 위풍당당한 왕비 행차였다. 어윤중을 비롯한 고위관료들이 황후의 행차를 수행했다. 앞뒤에서는 청나라 군병과 조선 군병들이 경호했다. 29일 용인에서 숙박한 황후는 8월 1일 한양에 입성했다.

무당 박씨는 황후와 동행해 한양에 입성했다. 처음 무당 박씨는 황후가 8월 보름에 환궁한다고 예언 했지만 실제 환궁한 시점은 8월 1일이었다. 엄격히 말하자면 틀린 예언이었다. 하지만 황후의 입장에서 며칠 틀린 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환궁한다는 예언 자체가 맞았고 날짜도 얼추 맞았다. 그런 무당 박씨를 보낸 것은 하늘의 뜻이고, 또 하늘의 뜻을 전한 무당 박씨는 수호신령이 아니겠는가? 당시 황후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무당 박씨를 데려왔을 듯하다.

무당 박씨가 한양에 입성했을 때는 따로 거처가 없었다. 그래서 황후와 함께 궁궐에서 살았다. 황후는 남들에게 말 못할 온갖 근심걱정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했다. 무당 박씨가 아픈 곳을 만져주면 고통이 씻은 듯 없어지는 듯했고, 굿을 해주면 온갖 시름이 사라지는 듯했다. 이러면서 황후의 미혹은 커져만 갔다.

한동안 궁궐에 머물던 무당 박씨는 관우 사당을 지어주면 그곳에 머물겠다고 했다. 유교 국가 조선의 궁궐에 무당이 오래 머물다 보면 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동소문 안쪽에 관우 사당이 건설됐는데 공사는 1882년 연말에 시작돼 1884년 가을에 끝났다. 이 사당은 한양 북쪽에 있어서 북관왕묘 또는 북묘(北廟)라고 불렸다.

북묘는 고종이 앞장서서 공개적으로 건설했다. 고종 역시 황후를 따라 무당 박씨에게 미혹됐던 것이다. 북묘 완성 후 고종은 비문을 몸소 짓기까지 했다. 비문에서 고종은 “어느 날 관우 장군이 나의 꿈속에 현몽하고 또 왕비의 꿈에도 현몽했는데 자상하게 돌봐주는 듯해 자리를 물색해 숭교방 동북쪽 모서리에 사당을 지었다”고 해 북묘를 짓게 된 경위를 밝혔다.

그런데 1929년 간행된 <별건곤> 23호에 의하면 고종의 꿈에 관우 장군이 현몽한 시점은 임오년 봄이었다고 하며, 건장한 사람이 장검으로 고종을 해치려는 순간 관우 장군이 나타나 구해주는 꿈이었다고 한다.

며칠 후 황후 역시 똑같은 꿈을 꿨다고 한다. 이 꿈이 북묘비는 물론 <별건곤>에까지 실린 것을 보면 꽤 유명한 이야기였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이 꿈을 통해 임오군란 직전 고종과 황후가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었음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고종과 황후는 자신들이 임오군란에서 무사히 살아난 이유를 관왕의 보호 때문이라 숭신했음도 짐작해볼 수 있다.


고종 눈앞에서 척살당한 민씨 척속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의 일부 무속인 사이에서 신으로 받들어지는 관우의 사당. / 사진·중앙포토



1883년 10월 21일 고종은 북묘 완공을 축하해 참배했다. 문무백관은 물론 왕세자도 함께했다. 북묘 참배를 위해 창덕궁에서 북묘 사이에 새로 어로(御路)가 닦이기까지 했다. 고종의 북묘 참배는 <승정원일기>에 실리기까지 했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고종이 천막에 들어가고 잠시 후 통례(通禮)가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 ‘천막 밖으로 가소서’ 하였다. 고종이 군복과 갑옷으로 바꾸어 입고 천막에서 나왔다. 찬례(贊禮)가 고종을 인도하여 정문으로 들어가 판위(版位)로 가서 북향하고 서게 하였다. 왕세자도 갑옷을 갖추고 들어와 자리로 갔다. 찬의가 ‘사배(四拜)’라고 외쳤다. 고종이 사배를 행하였다. 왕세자도 사배를 행하였다. 마친 후, 찬례가 고종을 인도하여 관우 장군의 신좌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청하기를 ‘무릎을 꿇으소서’ 하였다. 고종이 무릎을 꿇었다. 도승지 이교익이 향을 받들었고, 동부승지 김낙진이 향로를 받들었다. 고종이 세 번 향을 살랐다….” [<승정원일기> 고종 20년(1883) 10월 21일]

고종의 북묘 참배는 겉으로는 관우 장군 참배였지만 실제는 무당 박씨 참배였다. 북묘의 주인이 무당 박씨였기 때문이다. 고종과 왕후는 북묘의 주인 박씨를 신령군 또는 진령군(鎭靈君)이라 불렀다. 자신들을 보호하는 수호신령 또는 수호진령이라는 뜻이다. 설상가상 신령군에 대한 왕후와 고종의 미혹은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더욱 커졌다.

1884년 양력 12월 4일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 인사들이 우정국 낙성식을 틈타 민영익 등 친청파 인사들을 일망타진하고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 당시 한양에는 일본군과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김옥균이 의지하는 일본군은 100여 명에 불과했지만 청나라 군대는 1천여 명이 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을 확실하게 장악하려면 넓은 창덕궁은 적당치 않았다.

따라서 김옥균의 첫 구상은 거사와 동시에 고종을 인천으로 파천시키는 것이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종과 함께 일본으로 가겠다는 속셈이었다. 일본에 가더라도 고종만 장악하고 있으면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다는 것이 김옥균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본 공사의 반대로 고종을 인천으로 파천시키는 대신 경우궁으로 바꿨다.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친어머니인 수빈 박씨(綬嬪朴氏)의 신주를 모신 경우궁은 규모가 작아 수비에 유리했다.

김옥균 등은 우정국 밖에서 불길이 오르면 그것을 신호로 친청파 인사들을 척살한 후 입궁하기로 계획했다. 낙성식에는 미국 공사, 영국 영사, 청나라 상무위원, 일본공사관 서기관을 비롯해 윤치호·민영익·한규직·이조연·민병석 등이 참석했다. 이들 중에서 표적은 민영익이었다.

이윽고 밖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민영익이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나가자 자객이 달려들어 칼로 쳤다. 그러나 제대로 목을 베지 못하고 귀만 잘랐다. 칼을 맞은 민영익은 안으로 도망쳐 들어와 연회장에서 쓰러졌다. 순간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그때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 등은 재빨리 자리를 빠져나와 창덕궁으로 가 곧바로 편전으로 들어갔다. 침실에 있던 고종과 황후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이곳은 불안하니 거처를 옮겨야 한다는 김옥균의 주장에 고종과 왕후는 창덕궁을 떠나 경우궁으로 갔다.

김옥균은 왕명을 위조해 민씨 척족과 친청파 인사들을 경우궁으로 오게 했다. 5일 새벽에 민태호·민영목·조영하·윤태준 등이 입궁했다가 고종이 보는 앞에서 살해당했다. 고종이 “죽이지 마라”고 명령했지만 소용없었다. 고종은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럽게 울부짖을 뿐이었다.


갑신정변 겪으며 ‘밤의 여왕’으로

경우궁으로 옮겨올 때만 해도 고종과 황후는 무슨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민태호 등이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서야 그것이 정변임을 깨달았다. 황후는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기지를 발휘했다. 5일 아침에 심상훈이 개화당 지지자로 위장하고 경우궁에 들어와 황후를 알현했다. 그때 황후는 속히 밖으로 나가 민영환에게 내부 상황을 알리도록 했다. 아울러 소식을 전할 일이 있으면 수라상 밑에 몰래 서찰을 붙여 올리면 된다고 덧붙였다.

심상훈의 연락을 받은 민영환은 수라상 밑에 밀서를 붙여 보냈다. 경우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면 일이 수월하리라는 내용이었다. 고종과 황후는 “경우궁이 불편하니 창덕궁으로 돌아가겠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일본 공사는 그 말을 듣고 창덕궁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김옥균이 듣고 항의 했지만 들은 체하지 않았다. 이미 김옥균은 믿었던 일본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하고 있었다.

6일 오후 고종과 황후는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이끄는 청나라 병력이 창덕궁을 공격했다. 이 틈에 왕후는 세자와 세자빈을 데리고 북묘로 도망했다. 왕대비, 대왕대비 등도 모두 무사히 북묘에 모였다. 왕후는 고종에게 글을 보내 속히 북묘로 올 것을 요청했다.

당시 고종은 창덕궁 뒤편의 산속에서 위험에 빠져 있었다. 총탄이 쏟아지는 와중에 고종은 김옥균과 실랑이를 벌였다. 함께 인천으로 가자는 김옥균의 요구에 고종은 “나는 결코 인천으로 가지 않겠다. 대왕대비가 가신 곳으로 가서 죽더라도 한 곳에서 죽겠다”며 버텼다.

하지만 대왕대비가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알지 못하기에 무작정 버틸 수도 없었다. 마침 그때 북묘로 오라는 황후의 글이 도착했던 것이다. 북묘로 가려는 고종과 막으려는 김옥균 사이에 몇 차례 더 실랑이가 벌어졌다. 죽더라도 북묘로 가겠다는 고종의 고집을 꺾지 못한 김옥균은 결국 고종을 내버려두고 일본군을 따라 인천으로 갔다. 고종은 무사히 북묘에 도착해 가족들을 만났다. 황후와 고종이 자칫 죽을 수도 있는 위기상황에서 가족 모두가 무사히 북묘에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수호 신령의 도움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런 믿음을 고종은 북묘 비문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이에 앞서 임오년 여름에 군란이 일어나 역도가 대궐을 범하여 재앙의 기미가 예측할 수 없었는데 곧 그들이 해산되어 차례차례 사로잡아 국법으로 처벌했다. 그 후 갑신년 겨울에 또 역란이 일어나 나는 대왕대비, 왕대비, 왕비 등과 더불어 관우 장군 사당으로 피신하였다. 당시 역적의 세력이 커서 놀라운 일이 순간에 일어날 상황이므로 황급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이윽고 흉도는 잡히고 적병은 도망쳐 피신했던 행차가 무사히 돌아오고 종묘사직이 편안해졌다. 전후에 걸쳐 변고가 생겨 위급할 때 보이지 않게 작용하여 위태로움을 바꾸어 편안하게 하였으니 이는 누구의 힘인가? 지난날 꿈속에서 만나 장차 자상하게 돌보아줄 듯한 일이 어찌 분명하고 크게 증험된 것이 아니겠는가?”

갑신정변 이후 명성황후와 고종은 신령군의 말을 곧 관우 장군의 말로 숭신했다. 명색은 고종이 국왕이었지만 사실상 그 위에 신령군이 있었다. 신령군이 밤에 궁궐에 들어가 하는 말은 다음날 아침 고종의 왕명으로 공포됐다. 신령군에게 ‘밤의 여왕’이란 별명이 붙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신령군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그녀에게 빌붙으려는 자가 줄을 이었다. 고관대작과 건달 그리고 부인들까지 별의별 사람이 다 북묘에 드나들었다. 그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이유인이었다. 그는 경상도 사람으로 한양에서 건달 생활을 하던 중 신령군 소문을 들었다. 그는 신령군을 현혹시키기 위해 “이유인이라는 사람은 귀신을 능히 부리며 풍우도 능히 일으킨다”는 헛소문을 퍼트렸다.

무녀에게 미혹돼 국고 탕진

호기심이 발동한 신령군은 이유인을 초대해 정말 귀신을 부릴 수 있는지 증명해 보이라 했다. 그러자 이유인은 “그것은 쉬운 일이나 놀라실까 두려우니 며칠간 목욕재계하신 후 보여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그 사이 건달들을 불러 준비를 마친 이유인은 약속한 날 한밤중에 신령군을 데리고 북악산 깊은 곳으로 갔다. 이유인은 “내가 있으니 두려워 마시오”라고 말한 후 머리동이를 휘두르며 “동방청제장군(東方靑帝將軍)은 현신하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몸 전체가 청남색이고 키가 10척이나 되는 귀신이 나타났다. 뒤이어 ‘남방적제장군’을 부르니 입에서 붉은 피를 내뿜는 시뻘건 귀신이 나타나 입을 쩍 벌렸다. 혼비백산한 신령군은 귀신들을 쫓아버리라 소리쳤다. 이유인의 명령에 귀신들은 안개처럼 사라졌다.

이 귀신들은 건달들이 변장한 것인데 신령군은 진짜 귀신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이유인을 자신보다 더 영험한 무당이라 생각한 신령군은 그를 아들로 삼았다. 그리고 명성왕후에게 뛰어난 인재이자 충성심 높은 인물이라고 추천했다. 1887년 10월 14일 이유인은 고종의 특명으로 희천군수에 임명됐다. 이후 양주목사, 병조참판, 한성부 판윤,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법부대신 등 고관대작을 섭렵했다.

신령군이 추천한 인물들은 대체로 이유인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아니면 뇌물을 준 사람들이었다. 명성황후와 고종은 신령군이 추천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자들을 고관대작에 임명했다. 이들이 하는 일이란 주로 굿을 부추기는 것이었다. 예컨대 이유인은 금강산 정기를 한양으로 가져와야 나라가 태평해진다는 감언이설로 황후를 미혹시켜 금강산 1만 2천 봉에 굿을 하도록 했다. 그 결과 각 봉우리마다 쌀 1석과 돈 10냥을 바쳐 총 1만2천 석과 12만 냥이 허비됐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나라는 비정상적으로 운영됐고 국고는 고갈됐다.

결과적으로 볼 때 신령군은 명성황후의 수호신령이 아니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황후와 고종은 사실상 일본의 포로가 됐다. 그 와중에 신령군은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투옥됐다. 뿐만 아니라 1895년에 황후는 일본 낭인들에게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그렇다면 당시 황후의 진정한 수호신령은 무엇이었을까? 돌이켜보면 그것은 서구의 근대문명과 백성들의 충성심이었다. 황후가 살기 위해서는 또 고종과 조선이 살기 위해서는 서구의 근대문명을 받아들이고 백성들의 충성심을 고양해야 했다.

그러나 황후는 그보다는 신령군에게 매달리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왜 그렇게 됐을까? 그 이유를 <개벽> 제79호에 실린 ‘밤의 여왕 신령군’에서는 “자기의 살 길과 걸어갈 길을 오직 운명에만 맡겨버리는 어리석음 때문”이라 했다.

<대학연의>에서는 이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명도술(明道術)’을 제시한다. 인간과 세상의 이치를 밝히 알아 미혹되지 않는 것, 그것이 ‘명도술’이다. 세상에 그 어느 누가 ‘명도술’이 좋은 말임을 모르랴! 그러나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인간이라도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쉬 미혹되는 인간군상을 통해 ‘명도술’은 좋은 말을 넘어 어렵고도 두려운 말임을 절감해본다.

글=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