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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중 국

[중국 칭다오 신세대 견문록①] 내가 알던 중국학생은 어디에 (오마이뉴스 14.08.21 12:03l)

[중국 칭다오 신세대 견문록①] 내가 알던 중국학생은 어디에

"한국제품, 싸니까 써요"... 중국인이 달라졌다

 

나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중국 칭다오 이공대학에서 중국 학생들을 가르쳤다. 칭다오라는 지역성, 건축이라는 전문성, 교수와 대학생이라는 계층성, 한국인과 중국인이라는 민족성… 언뜻 보면 좀 특이한 소재이지 싶다. 하지만 이 소재들이 엮어내는 이야기는 중국에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이며 작고 밀도 있는 이야기들이다. 중국의 대국굴기를 대표할 만한 잘난 사람이 아닌, 고만고만한 약력을 가진 한국인 선생과 함께 지지고 볶던 고만고만한 중국 대학생들과 이웃의 울퉁불퉁한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를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 - 기자말

땀 냄새 풀풀 풍기며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 중국 유학생.
중고지만 때깔 나는 일본차로 쌩쌩 달리면? 한국 유학생.

빈티 나는 옷을 줄창 입고 있으면? 중국 유학생.
화장하고 파마나 염색을 했으면? 한국 유학생.

미국 유학 시절 학생들 사이에서 이런 우스갯소리가 돌았다. 캠퍼스를 오고가는 학생들을 언뜻 봐도 과장되긴 했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덕에 나도 종종 중국인으로 오해를 받았다. 선크림도 바르지 않은 얼굴, 새치가 드문드문 섞인 커트 머리, 꾸깃꾸깃한 티셔츠, 월마트에서 산 100달러짜리 자전거, 내 행색이 그랬다.

그 후 나도 차를 끌고 다니게 되었는데, 친구들은 여전히 나를 '유사 중국인'이니 '중국인 같은 한국인'이니 농담을 했다. 나의 소중한 애마를 '똥차'라고 부르면서 말이다. 내가 미국을 떠날 때 그 차를 사겠다는 사람은 단 한 명, 중국 유학생이었다.

그로부터 8년 후 나는 중국 대륙에서 중국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시작될 무렵, 나는 중국 산동성 칭다오 이공대학교와 한국 광운대학교 합작 프로그램 교수로 선발되었다.

솔직히, 나는 그때까지 칭다오가 어디쯤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중국을 몰랐다. 관심조차 없었다. 건축 전공자인 내가 줄곧 배우고 만나온 대상은 미국, 유럽, 일본의 건축이었고 문화였다. 간혹 건축잡지에 중국 특집 기사가 나와도 가볍게 지나쳤다.

나는 중국 건축을 껍데기만 남은 유물이거나 값싼 공산품과 '짝퉁'의 이미지쯤으로 여겼다. 이미 중국의 대도시에 들어선 세계적인 건축가의 작품도 개별 건축가의 작품성으로만 보았다. 중국의 현대건축이라는 인식은 하지 못했다. 그랬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중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곳에 내가 알던 중국 학생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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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근무했던 국제학원(국제대학) 건축학과 건물. 칭다오 이공대학교 캠퍼스에서 가장 역사적인 건물로, 1950년대 유행했던 소련식 건축이다.
ⓒ 칭다오 이공대학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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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학생들을 만나기 전, 나는 예전의 아릿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 시절의 나를 닮은 중국학생들을 그려보았다. 추억의 명화를 다시 볼 때의 설렘이랄까. 나는 그 기분을 안고 첫 수업 설계실에 들어섰다.

그러나 그곳에는 내가 알던 중국 학생은 없었다. 화장기 없는 말간 얼굴에 긴 생머리의 여학생, 짤막한 깍두기 머리 모양의 남학생은 예전에 보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다들 빈티가 아니라 반짝반짝 윤기가 났다. 잘 먹고 잘 자란 티가 났다. 학생들은 나보다 더 좋은 핸드폰과 노트북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의 모나미 플러스 펜을 한 다스로 사서 쓰는 학생도 있었다.

어느 여학생에게 온 택배 상자 속에는 한글이 깨알 같이 적힌 화장품이 들어 있었다. 한국 제품이 가격 대비 품질이 좋고 예뻐서 산다고 했다. 가격 대비? 싸다는 말인가? 중국에서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좀 묘했다. 듣자 하니 어떤 학생은 중국에서 비싸다던 삼성 노트북으로 도면을 그리고, 인터넷으로 상하이 화방에 수입 모형 재료를 주문하고, 완성된 모형은 캐논 DSLR 카메라로 찍는단다. 학비가 많이 드는 5년제 건축학과라서 그런지, 돈 때문에 바들바들 떨 것 같은 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리란(李兰)이 생각났다. 리란은 미국에서 나와 같은 건축대학원을 다녔다. 하얼빈에서 온 그녀는 영어든 건축이든 막힘이 없었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해결했고 생활비는 학교 조교를 해서 벌었다. 점심시간이면 리란의 남편이 집에서 만든 도시락을 가지고 설계실에 나타났다.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서였다.

리란의 남편은 학생이 아니라 전업주부였다. 그는 집에서 살림을 도맡아 하며 아내를 뒷바라지했다. 중국에서 캠퍼스 커플이었던 두 사람은 원래 같이 유학준비를 했는데 리란만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이다. 리란이 대학원을 졸업하고 취직할 무렵 남편이 공부를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은 중국인 유학생을 모두 고학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때가 2000년이었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한 지도 이미 20년이 넘은 시기였다. 2000년이면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이미 1조 달러에 달했고 인구는 13억이 넘었다. 일인당 국민소득은 세계 하위에 속하지만, 고속 경제 성장 덕에 신흥 부자들이 많이 생겼고 계층 분화도 일어났다.

2000~2001년에 유학을 간 중국 학생 8만5천 명 중 70% 이상이 미국으로 갔다. 내가 미국에서 목격한 중국 유학생은 일부에 불과했던 것이다. 학비와 물가가 싼 텍사스의 주립대학교가 아닌, 뉴욕이나 보스턴의 사립대학으로 간 공산당 고위 간부, 국영기업의 임원, 기업체 사장의 자녀들은 차원이 다른 유학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중국인에 대한 이미지는 왜 그렇게 싸구려로 비춰졌을까?

당장 대형마트만 가도 알 수 있었다. 가장 싼 생활용품은 '메이드 인 차이나'였다. 한국식으로 치면 1000냥 하우스인 원 달러 숍 물건도 죄다 중국산이었다. 한국 제품은 전자 코너에 있었다. 최고급으로 쳐주던 일본 제품에 비하면 가격은 좀 낮았지만 품질이 좋다고 인기가 많았다.

사람들은 마트 매장의 서열에 따라 국가를 인식했다. 일본은 특별한 동양이었고, 한국은 일본보다는 못하지만 이제 제법 사는 나라, 중국은 아직 갈 길이 먼 나라쯤으로 구별을 했다. 그 구별법이 다시 국민의 이미지를 결정했고 사람에 대한 대우도 달랐다. 아이러니한 것은 당사자인 우리가 그것을 잘도 받아들이고 심지어 재생산하기까지 했다는 점이다. 자전거와 자동차로 중국 유학생과 한국 유학생을 구분했던 것처럼. 내 머리 속에 저장된 중국인의 이미지가 획일적인 것도 그 탓이었다.

'소황제'로 자란 중국 '바링허우'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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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이 열린 8월 8일 저녁 주경기장인 궈자티위창에서 꿈의 고리가 빛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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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칭다오 이공대 설계실에서 만난 중국 학생들은 그 획일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났다. 더 이상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리던 나라의 학생이 아니었다. 2000년 1조 달러였던 GDP가 2005년에는 2조 1000억 달러로 경제 규모가 세계 4위였고, 2010년에 이르면 5조 878억 달러로 미국과 더불어 'G2'가 되었다. 무서운 속도로 성장을 해오고 있었다.

첫 날 설계실 문을 열기 전 내 머릿속의 중국은, 자신의 피를 팔아 카메라를 장만했던 장이머우(张艺谋)의 토속적이고 거친 색감의 초창기 영화였다. 설계실 문을 열고나서 내가 목격한 중국은, 세계적인 거장이 된 장이머우가 연출한 스펙터클한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이었다.

그 개막식을 느긋하게 즐기는 세대가 바로 1980년대에 태어난 '바링허우(八零后)'이다. 내가 가르쳤던 중국 학생들은 1980년대 말에 태어났다. 중국의 신세대 바링허우의 끝자락이다. 바링허우 다음엔 더 자유분방한 1990년대 출생의 '지우링허우(九零后)' 세대가 있다. 하지만 중국 신세대의 대명사는 역시 바링허우이다. 지우링허우는 바링허우를 이어받는 세대이지만 바링허우는 구세대에서 떨어져 나온 세대이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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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7월 4일 오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글로벌공학교육센터에서 강연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중국인 유학생들이 환호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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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링허우가 시작되는 1980년은 중국 현대사를 양분하는 전환기였다. 마오쩌둥 시대에서 덩샤오핑 시대로, 폐쇄적인 계획경제에서 개혁개방으로 바뀌는 기점이었다. 하지만 시작은 초라했다. 그 직전까지 참혹한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6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정치적인 숙청이 끊이지 않았다.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대약진운동이 실패하면서 농업과 공업 모두 주저앉았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는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중국을 휩쓸었다. 그렇게 누적된 핍진한 상황에서도 인구는 1979년에 이미 10억이었다.

덩샤오핑은 후진국에서 벗어나기 위한 개혁개방과 산아제한을 동일시했다. 적게 낳아야 양질의 교육이 가능하고 생활수준도 올라간다는 논리였다. 그래서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은 개혁개방을 선언했고, 1979년부터 거국적으로 '계획생육정책(计划生育政策, 한 자녀 낳기 정책)'을 실시했다.

바링허우는 개혁개방과 한 자녀 정책의 최초 수혜자였다. 중국은 개혁개방 후 '세계의 공장'이 되면서 별의별 자영업자가 생겨났다. 누구나 가난했던 사회가 누구든 기회만 잡으면 자수성가할 수 있는 사회로 변했다. 바링허우의 부모 세대는 초고속의 공업화와 산업화 속에서 능력껏 부를 축적했고, 그 열매는 단 한 명의 자녀인 바링허우에게 떨어졌다.

부모와 조부모는 귀하디귀한 바링허우를 소황제(小皇帝)로 떠받들어 키웠다. 손만 내밀면 쉽사리 얻을 수 있었던 소황제는 돈의 구애를 받지 않았고, 어려서부터 개방된 서구 문화에 익숙했다. 바링허우는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가장 덜 받은 세대이고, 소비지향적이고 자유분방하며 개인주의적이다. 그들은 부모 세대와 다른 정신세계를 가지고 새로운 문화산업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그들이 바로 내 눈 앞에 있었다. 문화대혁명 후반기에 태어난 리란과 10년 이상의 차이가 난다. 다시 10년 후면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중국 건축계에서 제 역할을 하기 시작할 때이다. 나는 당장 머릿속에서 추억의 명화극장을 지웠다. 빛바랜 사진첩을 나른하게 뒤적일 때가 아니었다. 8년 만의 격세지감, 그 속도는 점점 빨라질 테니까. 이제 그 현장에 서 있는 나는 편견 없는 맨눈으로 맨얼굴의 중국과 중국인이 보고 싶어졌다.

 

 

[중국 칭다오 신세대 견문록②] 타임머신같은 대학 기숙사

한겨울엔 '보온병' 세안... 여기는 중국 여대생 기숙사

 

나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중국 칭다오 이공대학에서 중국 학생들을 가르쳤다. 칭다오라는 지역성, 건축이라는 전문성, 교수와 대학생이라는 계층성, 한국인과 중국인이라는 민족성… 언뜻 보면 좀 특이한 소재이지 싶다. 하지만 이 소재들이 엮어내는 이야기는 중국에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이며 작고 밀도 있는 이야기들이다. 중국의 대국굴기를 대표할 만한 잘난 사람이 아닌, 고만고만한 약력을 가진 한국인 선생과 함께 지지고 볶던 고만고만한 중국 대학생들과 이웃의 울퉁불퉁한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를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 - 기자말

오전 8시가 다가오면 학교 앞은 새카맣게 몰려드는 학생들로 넘쳐났다. 기숙사에서 빠져나와 강의실로 향하는 거대한 물결이었다. 나는 중국인들이 말하는 런타이두어(人太多, 사람이 너무 많다)를 실감하며 연구실로 향했다. 연구실에 갈 때마다 지나치는 건물이 있었다. 바로 여학생 기숙사, 1950년대 소련풍으로 지어진 2층짜리 벽돌건물이었다.

파란 하늘 아래 기숙사 창문마다 형형색색의 여성 속옷이 만국기처럼 펄럭였다. 햇볕이 좋은 날에는 기숙사 앞 공터에 이불이 널려 있었다. 화장기 없는 여학생이 묵직한 가방을 메고 기숙사를 나섰다. 잠이 덜 깨어 부스스한 여학생은 양 손에 커다란 보온병 두 개를 들고 기숙사 안으로 사라졌다. 모자를 푹 눌러 쓴 채 기숙사를 나온 여학생은 목욕통을 들고 어디론가 후다닥 뛰어갔다. 색 바랜 벽돌건물, 황토의 공터, 구식 보온병, 낡은 인민복을 입은 청소부, 그리고 아침 안개까지 끼는 날이면... 마치 오래된 흑백사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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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다오 이공대 여학생 기숙사 기숙사 창문에 걸린 옷가지들
ⓒ 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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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 1실이 6인 1실보다 '재미 없어서' 싫다는 아이들

2학년 수업시간에 '최소한의 공간 설계'를 할 때였다. 학기 초, 워밍업삼아 기숙사 방을 설계해 보기로 했다. 먼저 현재 살고 있는 기숙사 평면을 그린 후 그 공간을 분석하고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제시하라고 과제를 냈다. 학생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저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설마 프라이버시 문제로 생각하고 기분 나빠하는 건가? 그 생각을 했을 때, 반장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기숙사에 아무 것도 없는데, 뭘 해야 할지..."
"아무것도 없다니, 그럼 어떻게 생활해?"

내가 묻자, 학생들은 돌아가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음, 그냥 방만 있어요. 방에는 이층 침대가 3개 있고요. 방 하나에 여섯 명이 지내거든요."
"세수하고 빨래하는 곳은 1층에 있어요. 그런데 더운 물이 안 나와요."
"샤워는 학교 공중목욕탕에서 해요. 거기도 더운 물은 아침과 저녁에 두 시간씩, 딱 두 번만 나와요."
"날씨가 춥거나 머리를 감을 때는 식당 근처 급탕실에 가서 뜨거운 물을 사 와요. 보온병 두 통이면 돼요."

아, 이제야 알겠다. 목욕통과 보온병의 정체를...

"밥은 학교 식당에서, 공부는 도서관이나 설계실에서 해요."
"빨래는 창문 밖에 널어요. 방 안이 비좁거든요. 이불은 공터에 널면 금방 보송보송해져요."

그 말에 나는 픽 웃음이 나왔다. 여학생 기숙사는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교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비오는 날이 아니면 언제나 알록달록한 속옷이 보란 듯이 창문에서 휘날린다. 그걸 보고 민망해하는 사람은 외국인뿐이다. 아무래도 이곳 사람들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나 보다.

"겉옷이나 두꺼운 옷은 그냥 세탁소에 맡겨요. 돈이 아깝긴 하지만, 빨래하기도 힘들고 시간도 없어서...."
"새로 지은 기숙사는 나아요. 안에 식당도 있고, 공간도 좀 더 넓고....."
"에이, 거긴 학교 밖에 있으니까 그렇지. 하지만 난방이 안 되잖아."
"난방이 무슨 필요가 있어. 여섯 명이 있으면 체온 때문에 춥지도 않은 걸."
"아주 추운 날에는 기숙사 방에 있는 냉난방기를 틀면 돼요. 여름에는 에어컨으로 겨울에는 히터로 사용할 수 있어요."
"대신 오래 틀면 안 돼요. 방안이 너무 건조해져서 감기에 걸리기 쉬워요. 한 명이 감기에 걸리면 결국 여섯 명이 다 걸리고 말아요."

듣다 보니 그들의 기숙사가 내 머리 속에 빤히 그려졌다. 다양한 활동이 일어나는 생활공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따지고 보면 기숙사에 있을 것은 얼추 다 있었다. 철제 이층침대와 책상, 화장실, 세탁실... 문제는 공간의 배치였다. 그래서 기숙사 안에서 벌어질 광경이 밖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보온병과 목욕통을 들고 교정을 돌아다니는 학생처럼...

학생들이 기숙사에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짜로 아무 것도 없어서가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이 있을만한 곳에 없어서 불편했기 때문이다.

"여러분에게 기숙사는 뭐 하는 공간이지?"
"잠자는 공간이요."

내가 묻자 학생들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잠만 자는 공간과 잠도 자는 공간은 의미가 다르다. 그러고 보니 4층짜리 학생식당 건물도 1층부터 4층까지 식당만 있다. 국제학원 건물 안에도 교실, 사무실, 화장실만 있다. 매점이나 복사집도 없고 휴게실이나 잠시 쉴 수 있는 개방된 공간도 없다. 다른 건물들도 대개 하나의 기능에 충실할 뿐이다. 이런 건물의 내부는 모든 층이 같은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평면도 1장만 그리면 설계는 끝난다. 그만큼 건물 내외부에서 일어나는 사람의 행위는 획일적이고 공간의 성격은 심심해진다. 대신 아주 '경제적'이다.

20여 년 전 내가 살았던 대학교 기숙사를 생각했다. 여학생 전용 기숙사였는데, 지금처럼 고층형이 아니라 지면에 넓게 퍼진 제법 규모가 큰 양옥집 형태였고 마당도 있었다. 나는 중국 학생들에게 그 기숙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당시 기숙사 1층에는 출입구 왼편에 사무실이 있고 햇빛이 잘 들어오는 오른편에는 작은 도서실이 있었다. 그 사이 안쪽에 식당이 있었는데 다목적이었다. 배식구 쪽에 식탁이 있고 정원이 보이는 창가에는 텔레비전과 소파가 있었다. 우리는 식당에서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수다도 떨고 드라마도 보았다. 학교 축제 기간에 여학생 기숙사가 개방되는 날이면 식당은 청춘남녀들이 모인 파티장소가 되었다. 기숙사 방은 2층과 3층에 있었고, 층마다 샤워실과 화장실이 있었다. 4층에는 자동세탁기가 있는 세탁실이 있고 그 옆으로 빨래를 널 수 있는 옥상이 연결되어 있었다.

건물을 단면으로 보면 층별로 먹고 자고 공부하고 쉬는 기능으로 구분된 생활공간이었다. 내 이야기를 듣던 중국 학생들은 기숙사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에 "오~"하며 탄성을 질렀다.

나는 내친 김에 그 기숙사는 2인 1실이었다고 말했다. 기숙사 생활을 하다보면 가장 가깝고도 먼 존재가 바로 룸메이트이다. 코드가 안 맞거나 생활 습관이 정반대이면, 일상의 사소한 일로 관계가 틀어지고 감정의 골이 생기기 쉽다. 한 명은 불면증이 있는데 한 명은 코를 골거나 이를 간다면? 한 명은 온갖 깔끔을 떠는데 다른 한 명은 청소의 개념조차 모른다면?

우리의 이성은 생리적인 욕구나 나만 손해를 보는 상황 앞에서 그리 단단하지 못하다. 중국학생들이 6인 1실이라고 말했을 때 바로 떠오른 생각은 이랬다. '그 좁은 방, 아래위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침대에서 잠이나 잘 수 있을까? 냄새는? 청소는?' 당연히 학생들은 더 큰 소리로 감탄을 하리라.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두 명? 에이, 재미없겠네요."

재미없다니? 타인과 살면서 일어나는 세밀한 감정사를 싹둑 잘라 버리고, 그저 두 명은 여섯 명보다 적으니 재미없단다. 왜 그럴까? 단체생활에 길들여져서 그런가? 이유가 궁금했다.

"기숙사에 두 명만 있으면 집처럼 심심하잖아요."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 저만 보고 있어요. 집은 불편하고 심심한 곳이에요."

그러고 보니 학생들은 모두 '한 자녀 낳기' 정책 이후에 태어난 외동이었다. 가족의 관심을 독차지하며 소황제로 자라난 아이들은 풍요를 누렸지만 외로웠나 보다. 어른들만 있는 집을 벗어나 기숙사에서 또래와 생활하는 즐거움이 일상의 불편함을 넘어선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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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숙사 출입구에 놓인 구식 보온병 더운 물이 나오는 시간을 놓친 학생들은 보온병을 들고 급탕실에 가서 뜨거운 물을 사기도 한다.
ⓒ 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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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에 익숙해진 '바링허우' 세대

2인 1실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학생들은, 내가 기숙사에 추첨으로 들어갔다고 하자 아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기숙사 시설은 턱없이 부족했다. 추첨에서 떨어진 학생은 하숙이나 자취를 했다. 운이 좋아 기숙사에 들어가더라도 3학년이 되면 나와야 했다. 빈자리는 신입생으로 채워졌다.

기숙사는 방학 때마다 문을 닫았는데, 그때마다 모든 짐을 싸서 창고에 보관해야 했다. 우리는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짐을 쌀 박스를 구하러 동네 슈퍼를 돌아다녔고 개학을 하면 싼 짐을 다시 풀고 정리하느라 입이 한 주먹이나 튀어나왔다. 고향으로 가지 않는 학생들은 단기 하숙이라도 구해야 했다. 어떤 학생들은 싼 게 비지떡이라며 불평을 해댔지만, 사실 기숙사비가 그리 싼 것도 아니었다.

중국학생들은 기숙사 시설이 나쁜 것은 이해해도 기숙사 자체가 부족한 것을 이해하기 힘든 듯했다. 그들은 입학과 동시에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한다. 집이 학교에서 가까워도 기숙사에 들어온다. 의무사항은 아니라고 한다. 시간을 절약하고 학교생활 하기에 편리하다는 장점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에서는 1교시가 아침 8시에 시작된다. 칭다오 이공대의 점심시간은 12시부터 2시까지 두 시간이다. 1교시에 맞춰 일어나고 등굣길에 중국식 두유인 더우쟝(豆浆)을 마시면서 교실로 간다. 오전 수업이 끝나면 학생 식당에서 후다닥 점심을 해결하고 곧바로 기숙사로 가서 낮잠을 잔다. 낮잠은 유치원 때부터 몸에 밴 습관이다. 당연히 학생들은 기숙사와 교실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좋아한다. 그런데 그들의 기숙사비는 얼마일까?

"오래된 기숙사는 1년에 800위안이고 새로 지은 기숙사는 1년에 1000위안이에요."
"파마 두 번 할 수 있는 돈이에요."

파마 두 번 하는 금액으로 1년 동안 기숙사에서 살 수 있다니. 더운 물도, 난방도, 샤워시설도 없을 만하다. 평면도 1장으로 설계를 끝낼 만도 하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가장 경제적인 건물을 지어야 했을 테니까. 질보다 양이 급선무인 상황에서 건축미학을 살린 설계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만든 기숙사에서 학부생은 4인실이나 6인실을 쓰고 대학원생은 2인실을 쓰며 하루에 단 두 번 더운 물이 나오는 시간에 맞춰 샤워를 한다. 내 연구실 근처에 있는 저학년 여학생 기숙사는 밤 10시 30분이면 소등을 한다. 건강한 신체와 절약을 위해서라고 한다. 그런데 이를 단순히 절약의 문제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중국인은 사회주의 집단생활을 했다. 농민은 공동생산과 공동분배를 하는 집단농장에서 일을 했고, 공동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탁아소와 양로원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인민공사'가 감독했고 심지어 호적과 혼인까지 담당했다. 도시민은 소속된 직장을 의미하는 '단웨이(单位)'가 양육, 교육, 의료, 관혼상제, 가족계획까지 관리했다. 모든 인민은 인민공사와 단웨이에서 생활 전반을 보장 받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집단과 단체가 있을 뿐 개인은 없었다. 최소한의 사적인 공간과 최대한의 공적인 공간으로 조직된 장소는 경제적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인민공사와 단웨이는 개혁개방 이후 시장경제가 도입되고 부동산 시장이 형성되면서 해체됐다. 그동안 중국은 초고속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중국 학생들은 그 성장의 단물을 마음껏 먹고 자란 '바링허우(80后, 80년대생)'이다.

그런데 서구문화와 개인주의에 빠졌다는 바링허우들이 어떻게 사회주의 흔적이 남아 있는 낡고 불편한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을까? 개혁개방은 중국 경제와 직결된 것이다. 하지만 정치는 여전히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이다. 집단주의 문화와 교육, 관리 시스템이 여전히 작동하는 사회이다. 그렇다면 바링허우의 신세대다움은 서구지향의 소비문화에 국한된 것일 뿐, 정신문화와는 관계가 없는 걸까? 어린 시절부터 사회주의 교육을 받아왔으니 집단적인 기숙사 생활에 잘 적응하는 것이겠지, 나는 이렇게 짐작했다.

몇 년 후, 최소한의 공간을 설계했던 2학년이 5학년이 되었다. 다시 만난 학생들은 기숙사 생활을 묻는 나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서류상으로는 한 방에 여섯 명이긴 한데, 제대로 기숙사 생활을 하는 애들은 보통 두세 명 정도밖에 안 될걸요?"
"짐만 기숙사에 놓고.... 집이 칭다오에 있으면 집과 기숙사를 왔다 갔다 하고, 그게 아니면 친구와 방을 구해 살기도 하고...."
"어휴, 여섯 명이 어떻게 한 방을 써요? 담배 냄새 때문에 공기도 텁텁하고 누가 컴퓨터 게임이라도 하면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기숙사는 도무지 사생활이 없어요. 사생활이!"

결국 나의 짐작이 틀렸다. 기숙사 생활에 잘 적응했던 것은 앳된 2학년이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머리가 굵어진 5학년에게 6인실 기숙사는 심심함을 달래는 장소가 아니라 사생활이 없는 불편한 장소였다.

"사생활? 우리땐 별로 신경 안 썼는데, 기숙사가 불편하다고 다른 데 방 구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구요. 대학교에 다니는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데... 하여간 요즘 애들이란!"

70년대생인 교직원의 말을 들으니, 역시 신세대 바링허우는 다르긴 다른 모양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바링허우도 다 같은 바링허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국 칭다오 신세대 견문록 ③] 국가가 인증한 엄청난 '스펙'... 나의 제자는 공산당원

 (오마이뉴스 14.08.31 10:16l)

 

나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중국 칭다오 이공대학에서 중국 학생들을 가르쳤다. 칭다오라는 지역성, 건축이라는 전문성, 교수와 대학생이라는 계층성, 한국인과 중국인이라는 민족성… 언뜻 보면 좀 특이한 소재이지 싶다. 하지만 이 소재들이 엮어내는 이야기는 중국에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이며 작고 밀도 있는 이야기들이다. 중국의 대국굴기를 대표할 만한 잘난 사람이 아닌, 고만고만한 약력을 가진 한국인 선생과 함께 지지고 볶던 고만고만한 중국 대학생들과 이웃의 울퉁불퉁한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를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 - 기자말

공산당 입당이 뭐길래...

국제학원 건축학과는 한 학년이 세 반으로 구성되고, 반마다 한 명의 반주런(班主任, 담임교사)과 두 명의 반장이 있었다. Y는 07학번의 반장이었다. 산만한 덩치에 쩌렁쩌렁한 목소리, 짧은 스포츠 머리, 부리부리한 눈매. 그 외모에서 풍기는 포스와 달리, Y는 사람들을 웃기고 띄우는 재주가 있었다.

과제가 너무 많거나 기말이 다가오면 학생들은 스트레스를 잔뜩 받곤 했다. 그 때 Y가 유머 한 방을 날리면 축 늘어진 분위기가 살아났다. 연예인 뺨치게 생긴 여자 친구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 마냥 납작 엎드려 야들야들해졌다. 한마디로 Y는 얼렁뚱땅 걸걸하게 사람을 잘 다루었다. 여러모로 깐깐하고 진지한 스타일의 다른 반장들과는 많이 달랐다. 아무래도 Y는 예민하고 외골수기 쉬운 건축가보다는 건설회사 CEO가 더 잘 어울릴 듯 싶었다.

어느 날 Y가 평소와 달리 수업시간 내내 딴 짓을 하고 있었다. 내 눈치를 살피면서 책상 서랍에 뭔가를 숨겨두고 슬쩍슬쩍 훔쳐보고 있었다. 쉬는 시간에 여자 친구가 쫑알거려도 코대답도 하지 않았다. 초조하고 심각한 표정이었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는 Y가 방심한 틈에 그의 등 뒤로 가서 내려다보았다. 누런 갱지 가득, 손으로 쓴 한자가 빽빽했다. 옆에 앉은 여자 친구가 Y의 허리를 쿡 찌르자, 그제야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Y는 얼마 전에 공산당 입당 지원서를 냈고, 그동안 공산당 사상 교육을 받고 시험을 쳤단다. 갱지는 Y가 곧 상부에 제출할 보고서 초안이었다. Y는 정식 당원으로 뽑히려면 아직도 멀었다며 한숨을 지었다. 도대체 입당이 뭐길래, 웬만한 일에 눈 하나 꿈쩍 안 하던 녀석을 그렇게 쪼그라들게 했을까?

언제부턴가 '그 때가 있었던가' 싶게 살았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여름방학이면 단 하나의 대형 상영관만 있던 영화관은 만화영화 '똘이 장군'을 보러 오는 아이들로 미어터졌다. 공산주의자나 간첩은 죄다 흉측하게 생긴 늑대나 불여우였고, 간첩 잡는 똘이 장군은 똘망똘망하게 생긴 대한의 용사였다.

영화가 끝나면 아이들은 훈련된 애국심에 들떠 "똘이 장군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를 불러댔다. 중학생 때에는 학교에서 툭하면 미술, 글짓기, 웅변, 표어 대회가 열렸다. 장르는 달라도 주제는 한결같이 '반공'이었다.

그렇게 청소년기를 보냈던 우리는 대학생이 되자마자 '껍데기를 벗고서'를 읽고, 떨리는 마음으로 소위 '빨간책'에 손을 댔다. 그 '빨간책'들은 이제 인터넷 서점에서도 살 수 있는 사회과학 도서가 되었다.

소련이 붕괴된 후에는 프랑스 좌파 문화이론을 기웃거리며 또 다른 통로를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 우리들 대부분은 헛헛한 마음을 간직한 채 밥벌이 전선으로 나갔다. 아주 가끔 옛 친구들이 모여 술잔이라도 기울이는 날이면, 어깨를 묵직하게 누르던 현실의 무게를 거부하지 못한 채 흘러가버린 시절을 씁쓸하게 돌이켜보곤 했다. 그 무언가에, 그 누군가에게 많이 미안해하면서.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그 때가 있었던가, 싶게 살았다.

중국인에게 공산당원은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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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당원인 학생은 입당 맹세와 당원의 사명을 되새기고, 새 당원은 훌륭한 당원이 될 것을 선서한다.
ⓒ 칭다오 이공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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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당원인 학생은 입당 맹세와 당원의 사명을 되새기고, 새 당원은 훌륭한 당원이 될 것을 선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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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를 Y의 누런 갱지가 떠올렸다. 이제 나는 중공이 아닌 중국에 있고, 나의 중국 학생은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된 중국에서 공산당원이 되려고 안달이었다. 왠지 한 발에는 하이힐을, 다른 한 발에는 고무신을 신고 절뚝거리는 느낌이었다.

내 눈 앞에서 갓 스무 살을 넘긴 싱싱한 중국 청춘들은 환한 대낮에 교실에서 밝고 가볍게 공산당을 이야기했다. 쾌쾌한 냄새가 나는 동아리방, 자욱한 담배 연기, 결의에 찬 목소리, 고뇌하는 청춘,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다른 반장들도 입당 절차를 밟거나 이미 당원이었다.

그동안 장난을 치며 허물없이 지냈던 교직원들도, 한국의 어느 서민과 다를 바 없이 자식 교육문제와 재테크에 열을 올리던 교수들도 당원이었다. 내 머릿속의 공산당원은 그렇게 소박하고 일상적인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공산당원은 어떤 의미일까?

알다시피 중국은 공산당이 독재하는 국가다. 정부기관이든 행정부서든 기업이든 학교든 공산당 조직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그 힘은 어느 조직에서나 막강하다. 대학교에서는 총장보다 대학교 당서기의 서열이 더 높다. 시(市)정부에서는 시장보다 시의 당서기가, 성(省)에서는 성장(省长)보다 성의 당서기가 더 높다. 관시(关系, 연줄, 인맥)사회인 중국에서 당과 인맥이 없으면 성공하기가 힘들다. 심지어 과거 타도의 대상이었던 자본가들도 입당을 한다. 노동자와 농민의 당인 중국 공산당에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민중의 당이 엘리트주의 당으로 변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 문화대혁명이 저물 때까지 중국 공산당은 지주와 자산가, 우파 지식인을 반동분자, 반혁명분자로 몰아서 탄압과 숙청을 했다. 자본가에 대한 인식과 대우가 달라진 것은 덩샤오핑의 '사회주의 시장경제' 때문이었다.

"부자 됩시다"를 외치던 덩샤오핑 시대에 자본가는 더 이상 반동이 아니라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부를 창출하는 능력을 가진 고학력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개혁개방이 낳은 새로운 계급이었고 장차 중국을 선도할 주력군이었다. 공산당은 적극적으로 그들을 끌어안아야할 필요성이 생겼다.

2001년, 덩샤오핑의 후계자 장쩌민은 '3개 대표'를 제안하고 3개 계급의 대표들이 공산당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개 계급이란 전통적인 계급인 노동자와 농민, 선진문화를 대표하는 지식인, 선진 생산력을 대표하는 자본가를 말한다. 그렇게 공산당은 새롭게 뜨는 계급을 포섭할 수 있고, 자본가는 사업에 유리한 공산당 인맥이 생겼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가 된 셈이다.

그 결과 공산당원 수가 급증했고 계급 구성비는 역전되었다. 장쩌민의 '3개 대표' 이전에 6천 5백만 명도 안 되던 당원이 2010년 8천만 명으로 늘어났다. 1949년에 입당한 대졸자는 0.3 퍼센트에 불과했지만 2010년엔 전체 당원의 3분의 1이 넘었다. 민간 기업 대표의 3분의 1도 당원이었다.

반대로 당원 중 노동자와 농민의 비율은 40%로 떨어졌다. 이를 두고 프랑스 언론인 카롤린 퓌엘은 이렇게 꼬집는다. "민중을 위한 민중의 당"이 "엘리트주의 당"으로 변했다고(카롤린 퓌엘 지음, 이세진 옮김, <중국을 읽다 1980-2010>, 푸른숲, 2012, 326~327쪽).

당원 선발 과정 험난...'공산당원은 아무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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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원 활동실에 모여 <중국과 大國의 관계-중일편>을 보고 있는 학생들. 당원들 벽면에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의 사진이 걸려 있다.
ⓒ 칭다오 이공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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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대학이 없는 중국에서 대학교원은 공무원이나 다름없다. 변함없이 중국사회를 통치하는 집권당 입당을 주저할 이유가 없다. 명예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이익도 무시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이 더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대학생들도 마찬가지다. 대학생이 당원이 되면 공무원이 되거나 국유기업에 취직할 때 유리하다고 한다. 설령 민간기업에 취직하더라도 회사 입장에서는 공산당과 인맥이 닿는 당원을 선호한다. 입당의 현실적인 의미는 취직과 출세에 유리한 기득권을 가리킨다.

그래서 아무나 당원이 될 수 없다. 대학생이라고 해서 누구나 입당 신청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원으로 선발되는 과정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대개 간부 학생들이 당지부에 입당신청서를 낸다. 그 다음엔 당소조의 추천과 당지부 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입당후보자로 뽑혀야 한다.

입당후보자가 되어 기본 교육을 받고 다시 평가에 통과하면 중국공산당 이론과 정치생활 규칙 등 심화된 내용을 집중적으로 배운다. 이 때 학생은 '입당소개인'이라고 해서 두 명의 정식당원으로부터 지속적인 당원 교육과 지도를 받는다. 그 후 예비당원으로 승인을 받아야 비로소 상부조직의 동의를 얻어 입당지원서를 제출할 수 있다. 엄격한 심사를 거쳐 예비당원으로 뽑혀도 1년 이상의 교육과 평가 기간을 마치고 최종적으로 합격해야 정식당원이 될 수가 있다.

이렇게 복잡한 절차와 치열한 경쟁을 뚫고 당원으로 뽑혔다는 것은 그만큼 최고의 엘리트임을 공인받는 것이다. 개인의 영광이요, 집안의 자랑거리가 된다. 그러니 때로는 당사자인 학생보다 부모가 더 입당에 열을 올린다. 세상물정을 잘 아는 부모는 관시(关系) 사회에서 "권력이 돈을 만들고 돈이 권력을 만든다(权生钱, 钱生权)"의 실상을 세세하게 알고 있다. 사회가 규정한 성공 코스에 집착하는 학생이라면 권력, 돈, 관시(关系)의 교집합인 입당을 욕심낼 만하다.

공산당원이 된다는 것은 신념보다 실리의 문제

하지만 모든 대학생들이 입당의 해바라기는 아니었다. 개방적이고 개성적인 신세대답게 자신만의 삶을 추구하는 학생도 있었다. 설계실에서 조용히 작업하는 것을 즐기는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당원이 되면 단체 활동이 많아서 피곤해요."

해외 유명 건축가 작품집을 끼고 다니는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나중에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고 싶어요. 그러니까 입당은 의미가 없어요."

외국회사에 취직하려는 학생의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입당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학생도 있었다.

"당원은 혜택보다 책임이 더 커야 해요. 그래야 부패와 비리가 없어지죠. 앞으로 정부는 부도덕한 간부와 당원을 강도 높게 처벌할 거예요."

어쨌든 21세기 중국에서 공산당원이 된다는 것은 신념보다 실리의 문제인 것 같았다. 국가가 인증한 엄청난 스펙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초창기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오늘을 본다면 뭐라고 할까? 개혁개방 전 시퍼렇게 날이 선 이데올로기 앞에서, 낙엽보다 가볍게 목숨을 잃었던 사람들은 또 뭐라고 할까?

 

 

[중국 칭다오 신세대 견문록⑤] 가을이면 우는 학생들

중국 학생들은 왜 "다시"라고 하면 울까

(오마이뉴스  14.09.06 10:30l)

 

나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중국 칭다오 이공대학에서 중국 학생들을 가르쳤다. 칭다오라는 지역성, 건축이라는 전문성, 교수와 대학생이라는 계층성, 한국인과 중국인이라는 민족성...언뜻 보면 좀 특이한 소재이지 싶다. 하지만 이 소재들이 엮어내는 이야기는 중국에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이며 작고 밀도 있는 이야기들이다. 중국의 대국굴기를 대표할 만한 잘난 사람이 아닌, 고만고만한 약력을 가진 한국인 선생과 함께 지지고 볶던 고만고만한 중국 대학생들과 이웃의 울퉁불퉁한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를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 기자말

2008년 가을, X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2009년 가을, A가 황망한 표정을 짓더니 입 언저리를 실룩거렸다.
2010년 가을, L이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였다.

한국과 달리 중국은 가을에 신학기가 시작된다. 대개 한 학년은 세 반으로 나뉘는데, 세 명의 교수가 한 반씩 맡아서 1년 동안 가르쳤다. 학년 별로 설계 주제는 공통이지만, 담당 교수마다 그 주제를 해석하는 관점부터 설계 과정, 결과물로 이어지는 방식이 다르다.

그러니 1년 수업이 시작되는 가을 학기 초반은 새로 만난 교수와 학생들이 서로에게 적응하는 기간이 된다. 수업방식뿐 아니라 한국인과 중국인의 문화 차이, 개인적인 경험과 정서 차이도 서로 밀고 당기는 적응거리가 된다. 나는 그 차이를 인지하고 미리 조심하고 배려하면 되겠지 싶었다. 그럼에도 뜻밖의 순간에 엉뚱한 일로 스파크가 튀는 일이 생겼다. 그 결과 나는 3년 동안 가을마다 학생 한 명씩은 꼭 울리고 말았다.

첫 해 가을 어느 날, 바비 인형을 닮은 X가 일 주일 동안 해온 과제를 발표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다른 학생들과 질의응답이 오갔고, 그 다음에 내 의견이 이어졌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크고 동그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지? 중국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 나는 당황했다. X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대답 없이 그저 훌쩍이기만 했다. 나는 다른 학생들을 빙 둘러보고 힌트를 얻으려고 했지만, 도무지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내 말 한마디에 닭똥같은 눈물을 흘린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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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동아시아 건축 포럼과 한중 대학생 건축설계 워크숍 참가자들의 단체사진.
ⓒ 칭다오 이공대 사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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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심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국 학생들이라서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인가, 그렇다면 같은 중국 학생인 X는 왜 울지? 체면과 자존심을 목숨처럼 여기는 중국인에게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어지러운 내 속을 그대로 드러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얼마안가 X가 눈물을 닦고 울먹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냥 답답해서 울었어요."

답답하다니, 뭐가? 내가 더 답답해졌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 챘는지 반장이 나섰다.

"진라오스(金老师, 학생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가 '다시'라고 말했잖아요."

다른 학생들도 짐짓 비죽비죽 우는 표정을 지으며 거들었다.

"그 말을 들을 때면 우리도 울고 싶다고요."

아무리 한국어를 못하는 중국 학생이라도 반드시 알아듣는 한국어가 있다. 아무리 설계가 좋아 죽는 학생이라도 질색하는 한국어가 있었다. 바로 내가 한국어로 말하는 "다시!"였다. 학생들은 내 입에서 "다시"라는 말만 나오면 소리 없는 경기를 일으켰다. X, A, L처럼 표 나게 반응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설계에 욕심이 많은 학생일수록 그랬다.

물론 나도 안다. 밤 새워 한 작업을 발표하자마자 "다시"라는 말을 들을 때 얼마나 맥이 빠지는지, 때로는 그 말을 하는 사람조차 얼마나 원망스러운지를. 그러나 나는 또 안다. 구운 도자기를 미련 없이 산산조각 내고 다시 빚는 도공처럼 '다시'하고 '다시' 한 후에 비로소 얻게 되는 진화의 희열을.

그때의 진화는 설계 실력만이 아니다. '다시'하는 창작의 담금질은 마음까지 진화 시킨다. 또 있다. '다시' 소리를 덜 듣기 위하여, 그 '다시'에 제대로 맞대응하기 위하여, 준비하다보면 초짜의 물컹하고 푸석한 논리력은 어느새 예리하고 치밀하게 다듬어진다. 생각의 우물 안에 갇혀 있던 개구리가, 설령 당장 우물 밖으로 나오지 못하더라도, 우물 밖을 상상하게 된다.

학기 초면 학생들은 대지조사를 나간다. 건물이 들어설 환경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을 조사하고 그 내용을 설계에 반영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학생들이 발표하는 내용이 고작 사진 몇 장과 현황 설명이라면? 당연히 '다시'해야 한다. 대지조사는 눈에 보이는 것만 조사하는 것이 아니다. 대지의 면적, 주변 건물의 높이, 용도, 형태, 풍향, 교통 체계, 기후, 일조 등 물리적인 요소는 기본이다. 그 대지와 관련된 역사, 인구, 생활문화, 경제 상황, 앞으로의 발전 계획 등 인문 사회적인 요소도 조사하고 분석해야 한다.

거기까지 해도 학생들은 또 '다시' 소리를 듣게 된다. 정작 중요한 것이 빠졌기 때문이다. 대지 조사한 내용을 어떻게 주관적으로 해석하여 디자인에 담아낼 것인지, 자신만의 시각과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대지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곧 설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 개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지조사부터 기본적인 설계 계획이 잡힐 때까지 학생들은 매번 '생각부터 다시' 소리를 들어야 했고, 그때마다 끔찍하게 지루해하고 피곤해했다. 그런 학생들을 보는 나도 지루하고 피곤했다. 그러다가 알게 되었다. 나와 학생들이 생각하는 '다시'의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어느 날 복도에 학생들이 발 디딜 틈 없이 서 있었다. 모두들 책을 꺼내 들고 목청껏 읽고 있었다. 그 옛날 사서삼경을 읽는 선비처럼 말이다. 학생들마다 읽는 페이지가 달라서 복도는 중구난방 저마다의 소리로 요란했다. 계단 창가에 서 있는 학생도 목에 핏대를 세우고 책을 읽고 있었다.

"도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니?"

내가 학생들에게 물었다.

"시험이 있어서요. 교실 문이 잠겨 있어서 기다리는 동안 시험공부를 하는 거예요."

한 학생이 얼른 대답하고 다시 책을 줄줄 읽기 시작했다. 맙소사! 이게 시험공부라고? 복도를 꽉 채운 학생들은 한결같은 모양새로 큰소리를 내며 책을 달달 외우고 있었다. 저러고도 공부가 될까 싶었지만, 다들 오직 자신의 목소리에 몰입해 있었다.

놀라운 것은, 곧 시험을 치를 학생들의 표정이 시험이 없는 내 수업시간보다 더 편안하게 보였다는 것. '다시'를 들을 때의 불안하고 흔들리는 표정이 아니었다. 시험공부를 많이 하고 안 하고를 떠나, 공통된 하나의 정답만 찾으면 된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니 학생들이 왜 '다시'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는지 짐작이 갔다. 그 후 우리는 '다시'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았다.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많은 문제를 풀도록 훈련된 학생들에게 '다시'는 후퇴와 퇴보를 의미했다. '다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 과제를 하기 위해 밤을 새운 시간은 그대로 낭비한 것이 되고, 소중한 시간을 그렇게 낭비했다는 것은 자신이 그만큼 무능력하다는 것이며, 그래서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다.

학생과 나 사이의 간격...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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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칭다오 이공대에서 열린 동아시아 건축 포럼의 한 장면
ⓒ 칭다오 이공대 사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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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다시'라는 말을 들을 때, 그동안 쌓아올린 것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라고 했다. 학생들은 '다시' 하는 것보다, 문제가 있는 부분을 가려내어 수정해 나가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했다. 나는 그것은 설계가 아니라 '땜빵'이라고 말했다.

내게 '다시'는 그렇게 무겁고 부담스러운 의미가 아니었다. 생각의 밑바닥부터 뒤집고 흔들어대면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탐색하는 실험이고, 통찰력과 감각을 길러주는 훈련이었다. 학생들은 내가 말하는 '다시'의 의미를 머리로는 납득을 하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제안을 했다.

"나는 앞으로도 내 입장에서 '다시'를 말하겠지만, 여러분은 여러분 입장에서 '다시'할 필요가 없다면 안 해도 돼."

몇 명은 "우-"하며 반색을 했고, 다른 몇 명은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으며, 또 다른 몇 명은 '이건 또 무슨 함정일까?' 생각하는 눈치였다.

"대신 조건이 있어. '다시' 안 할 경우, 왜 다시 안 해도 되는지 그 이유를 내게 설명해야 돼."

나는 덧붙여 말했다. 몇 명은 '그 까짓것쯤이야' 자신 있는 얼굴이었고, 다른 몇 명은 어리둥절해했으며, 또 다른 몇 명은 '쳇, 그럼 그렇지!'의 표정이었다.

어쨌든 가을이 깊어갈수록 '다시' 안 하려고 애쓰는 학생들은 줄어들었다. '다시' 하는 것 보다 '다시' 안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더 어려웠을까, 아니면 '다시'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일까. 첫 해 가을을 그렇게 보낸 후, 두 번째 세 번째 가을에도 우는 학생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이런 생각을 했다.

'아, 또 가을이 왔구나. 단풍이 멋지게 들 때까지만 기다리면 돼.'

2010년 여름 방학 때 칭다오 이공대에서 동아시아 건축 포럼과 한중 대학생 건축설계 워크숍이 열렸다. 내가 가르치는 국제학원 건축학과, 중국인 교수들이 가르치는 건축학원 건축학과, 한국에서 온 건축학과 학생들이 서로 섞여 팀을 만들어 설계 경기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맡은 팀 학생들에게 '다시'를 말하게 되었다. '다시'가 일상용어인 한국 학생들과, 점점 익숙해져가는 국제학원 학생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오케이"라고 대답했지만, 건축학원의 중국 학생들은 무슨 소리냐며 기겁을 했다. 그러자 내가 가르쳐왔던 국제학원 학생 S가 펄쩍 뛰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설계를 하다 보면 '다시'는 기본이지. 우리는 이미 습관이 됐어. 진라오스(金老师)가 '다시' 말을 안 하면 우리는 더 불안해져. 우리를 포기했을까봐."

S는 나를 향해 '이만 하면 어떠냐'는 표정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한 쪽 눈을 찡긋했다. 그 옆에는 또 다른 국제학원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 순간, 그동안 학생들과 실랑이하며 쌓인 피로감이 싹 날아가 버렸다. 어느새 나와 그들 사이에 든든한 다리 하나가 생긴 듯했다. 나는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