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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꿈꿨던 해양실크로드 ‘원대한 야망’ (광주매일 2014. 02.05. 00:00)

조선이 꿈꿨던 해양실크로드 ‘원대한 야망’

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강리도[疆理圖]에 나타난 ‘동·서양 해양문화교류(상)’

1402년(태종2년) 제작된 최초의 세계지도 ‘강리도’
인도·아라비아반도·아프리카 남부지역까지 뚜렷

 

1402년 제작돼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지도인 강리도의 사본. 태종 2년 의정부 좌정승 김사형 등이 제작한 이 지도는 아시아대륙은 물론 인도 아라비아반도, 아프리카 남부지역까지 뚜렷하게 기록돼 있어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이 지도의 원본은 현재 일본의 한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해양은 물류와 교류의 보고다.
해양의 확장성과 연결을 상징적인 ‘해양 실크로드’는 단순한 물류의 지름길을 넘어 문화를 형성하고 새로운 도시를 형성하는 거점 역할을 했다. 전 세계적으로 동쪽 한반도에서 시작해 중국 취안저우(또는 광조우)를 거쳐 서쪽 베니스(또는 알렉산드리아) 등으로 연결된 교역로와 교역항을 잇는 이른바 점과 선이 대표적이다. 이 해양 실크로드를 통해 방대한 양의 차, 생사, 도자기 등이 중국에서 유럽으로 전래됐다. 또 각종 문화 교류의 장으로 활용되면서 세계해양문화를 선도했다. 이에 본지에서는 역사적 고찰과 탐방을 통해 경주에서 중국을 경유해 이스탄불까지 이어지는 신 해양실크로드의 역사와 의미 및 다양한 문화를 소개한다./편집자 주


일찍이 동양의 해양교역로 주인공들은 다양한 무역과 이민네트워크를 통해 이미 알고 있는 세계 즉 ‘기지(旣知)의 세계’를 무대로 했다. 이는 중국 정화의 ‘서양원정(1405-1433년 7차례에 걸친 원정)’에도 잘 묘사돼 있다.

즉 서양의 대항해가 이른바 ‘미지(未知)의 세계’의 개척이라는 사명으로 정의 내릴 수 있는데 반해, 정화의 대항해는 이미 알고 있는 ‘기지(旣知)의 세계’였던 것으로, 상호 대응적으로 구별되었다. 그 배경에는 광역 아시아 해양교역의 역사적인 축적이 있었다.

이번 호에는 바다 실크로드의 새로운 동쪽 출발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우리나라로부터 시작했고, 그 서막으로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강리도’란 고지도에 대해 기술하고자 한다.




‘강리도’란…
600여년 전 조선에서 한 장의 세계지도가 탄생했다.

1402년에 제작된 이 지도는 아프리카 대륙이 온전한 형태로 그려진 최초의 세계지도다. 당시 유럽인들도 희망봉을 발견한 후에야 지도에 아프리카 대륙을 그려 넣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보다 100여년 앞서 조선에서 그려 넣었던 것이다.

너비 1m가 넘는 커다란 비단에 화려하게 그려진 이 세계지도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地圖]’ 또는 일명 ‘강리도’로 불린다. 비단에 그려진 이 지도는 158×168㎝ 규모로 제법 크다. ‘혼일’(混一)이란 차별 없이 모두가 혼연일체가 된다는 뜻이고 ‘강리’(疆理)는 변강의 역사·지리적인 생태를 잘 살펴 알아서 합리적으로 다스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402(태종 2)년에 그린 지도로 현존하는 동양 최고(最古)의 세계지도이다. 지도 제작 참여자는 의정부 좌정승 김사형(金士衡), 우정승 이무(李茂), 검상(檢詳) 이회, 참찬(參贊) 권근(權近) 등이었다. 조선 초기 국가 최고의 의결기관인 의정부의 최고위급 관원들의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이 지도의 원본은 현재 한국에는 없고 일본에서 2종을 보관하고 있다. 원본은 임란 중에 가토 가요마사가 일본으로 가져가 자신의 개인사찰인 혼묘지에 보관했고, 후일 류코쿠 대학에서 기증 받아 보관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다른 한 종은 에도시대 혼코지에서 이를 복사한 것으로 현재 텐리대학에 보관 중이다. 다만, 서울대 지리학과 이찬 교수가 모사본을 규장각에 보관시켜 놨을 뿐이다.

600여년 전에 이미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까지 아우른 세계지도를 작성했다는 데에서 그리고 유럽이 아닌 동쪽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표현된 지도라는데 큰 의미가 있다. 이 지도의 가치는 매우 높다. 그 당시 아메리카 대륙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지도에는 없었고, 호주대륙도 없다. 당시로서는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세계를 그린 것이다.




왜 만들었나…

이 지도 상단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라고 쓰여 있고, 그 아래에는 역대 제왕의 국도와 도성이 세로로 기록돼 있다. 지도 하단에는 권근의 발문이 있는데, 지도제작 이유, 과정, 제작을 마치고 난 소감 등이 적혀 있다.

조선 초기 나라의 기틀을 다지면서 국토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고, 또한 대외적으로 불안정한 북방영토, 잦은 왜구침입 등에 대비가 필요했던 것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선은 세계지도를 만들기 위해 사신을 통해 다른 나라의 지도를 수집했고, 조정의 대신들이 직접 참여한 것으로 보아 당시 국가적 중요한 사업으로 추진했던 것이다.




어떻게 만들었나…

권근의 발문에 의하면, 중국 이택민이 그린 ‘성교광피도’에서 ‘아랍지역’을, 청준의 ‘혼일강리도’에서 ‘중국’을, 조선의 이회가 그린 ‘팔도지도’, 그리고 ‘행기도’에 나타난 일본지역을 합쳐서 편찬했다고 한다. 즉 중국에서 들여온 혼일강리도와 성교광피도를 하나로 합치고, 여기에 조선과 일본을 첨가해 세계지도를 완성시켰던 것이다.

전체적인 지도 모습을 보면, 가운데에 중국이 있고, 중국 오른쪽에 조선과 일본, 왼편에는 아프리카와 유럽이 자리 잡고 있다.

몽골제국의 확대를 반영해 동서를 관통하는 광대한 지역이 나타나 있고, 아래의 반에는 해역이 뻣어 있다. 이는 몽골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중국지도를 참고했다는 것을 반영한다.

중국과 조선은 매우 정확하며, 하천과 도서를 자세히 기입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강은 매우 자세히 표현돼 있어 중국 남부 지역은 마치 수 많은 섬처럼 보인다. 그 중에서도 중국의 황하는 다른 강들과 달리 노란색으로 표현됐으며 만리장성도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이 지도의 가장 큰 특징은 한반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크게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부터 백두대간을 비롯한 정맥들의 산줄기와 낙동강 한강 등 강이 비교적 자세히 표현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놀랍게도 해안선이 현재 모습과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한반도 정남쪽 해상에 일본이 90도 기울어진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비록 방위는 틀리지만 혼슈, 시코쿠, 큐슈의 형태가 비교적 정확하게 표시돼 있다. 또 인도와 아라비아반도는 물론 아프리카 남부지역까지 뚜렷하게 포함돼 있다. 또 100여개의 유럽 지명과 35개의 아프리카 지명이 기재돼 당시 동양 사람들에게 유럽의 많은 부분이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프리카와 아라비아반도는 실제보다 훨씬 작게 그려져 있지만 모양은 비슷하다.

특히 아프리카의 가운데에는 사하라사막이 그려져 있고, 북쪽으로 흐르는 나일강도 나타나 있다. 그러나 지중해는 바다가 아닌 강으로 표현되었다.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은 남쪽 바다 위의 섬들로 표현돼 있고, 해안선의 윤곽이 실제보다 단순하게 그려져 있지만, 필리핀·태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범국(버마) 등 주요 동남아 국가들의 위치만은 분명하게 표시돼 있다. 월상·교지·임읍 등으로 기록된 곳은 베트남이며, 태국은 섬으로 표기됐다. ‘지봉유설’에도 태국은 섬라국으로 표기돼 있다.

축국(竺國)으로 표기된 인도의 경우는 중국 서쪽, 반도가 아닌 대륙의 일부인 것처럼 윤곽이 그려져 있는데, 이도 역시 톨레미 지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문병채 박사는…


필자는 문화지리학에 관심을 갖고 꾸준하게 연구활동을 하고 있는 대표적인 지리정보 전문가다. 그 동안 ‘섬과 바다’, ‘해로와 포구’, ‘다도해 사람들’ 등 해양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저서와 ‘디지털 지도제작’, ‘지리정보분석기법’ 등 지리정보 관련 서적, 그리고 해양과 섬에 관한 50여 편에 달하는 각종 논문과 연구보고서를 발표했다.

전남대 지리학과를 졸업한 후 지역개발학과 대학원에서 ‘컴퓨터를 이용한 지리정보 해석기법 연구(GIS분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목포대 연구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국토정보기술단 등 ‘나라그룹’의 CEO와 전남대 지리교육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지역정책연구회 회장, 광주-U대회 명예홍보대사, 광주 국제친선교류협회 코스타리카 회장 등을 맡아 국제교류에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연구와 장학재단 설립 등 지역사회 봉사도 열정적으로 참여해 2013년에는 ‘자랑스런 전남대인 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문병채 (주)국토정보기술단 단장·전남대 지리교육과 겸임교수

 

 

 

2천년전에 그려진 톨레미의 세계지도 

 (광주매일 2014. 02.18. 18:48)

 

 

톨레미(Ptolemy)는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다. 2세기 중기에 활동하면서 천동설을 주장했다. 톨레미는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os, Claudios)’의 영어 이름이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는 2천년 전에 톨레미가 그린 이 세계지도를 손에 들고 갔다고 한다.
당시 톨레미의 세계지도에는 당시 아무도 보지 못했던 아프리카는 물론이고,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일본), 중국까지 그리고 있다. 고대 인류의 지리학이 집대성된 ‘전설의 지도’였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어떻게 이 위대한 세계지도를 탄생시킬 수 있었을까? 현재의 많은 학자들은 그 비밀의 열쇄를 ‘해상교역’에서 찾고 있다. 불가사의 하게 지금부터 2천년 아니 그 이전부터 동서 해양교역이 이뤄졌다는 증거다.

그 결과 15세기에 이르러 콜롬버스가 이 톨레미의 세계지도 한 장을 손에 들고서 신대륙을 발견하게 했고, 동양인들에게는 서양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했다. 톨레미가 당시 대단한 학자였음을 반증한 것이다.

 

 

세계에 자랑할 만한 위대한 문화유산 ‘강리도’ 

(광주매일 2014. 02.18. 18:48)

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강리도[疆理圖]에 나타난 ‘동·서양 해양문화교류(하)’

 

 

600여년 전,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미 아프리카와 유럽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1402년에 제작된 조선에서 만들어진 동양 최초의 세계지도인 강리도(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이를 말해 준다.

이 지도는 아프리카 대륙이 온전한 형태로 그려진 최초의 세계지도다. 당시 유럽인들도 희망봉을 발견한 후에야 지도에 아프리카 대륙을 그려 넣을 수 있었다. 유럽보다 100년이나 더 빨랐던 것이다. 개방적이고 과학적인 조선 창업기의 문화적 배경 아래에서 만들어진 이 지도에는 많은 의미 있는 사실들을 담고 있다.

유럽과 아프리카에 대한 해박한 지식

600여년 전 조선 사람들은 아프리카에 대해 놀랄만한 많은 지식을 알고 있었다. 인도와 아라비아반도, 아프리카 남부까지 뚜렷하게 해안선이 표시되어 있다. 또한 100여개의 유럽 지명과 35개의 아프리카 지명이 기재돼 있다는 사실에 놀랄 뿐이다.

아프리카에 대해 얼마나 자세히 알고 있었는지는 지도에 표기 된 ‘달의 산’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에게도 귀에 익은 나라인 우간다는 아프리카에서는 드물게 만년설로 뒤덮인 산이 하나가 있다. 정식 명칭인 르웬조리산. 그곳 사람들은 산의 정상 부근에 쌓여 있는 눈으로 인해 마치 달처럼 빛난다 해 ‘달의 산’이라 부른다.

100여년 전 영국인 탐험대에 의해 나일강의 발원지로 증명된 이 산이 어떻게 아프리카의 동쪽 끝 ‘조선’에서 만든 지도에 표시돼 있는 것일까? 그 답은 문명의 교류에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활발한 대상무역을 통해 아프리카와 교역을 했고 그들은 아프리카 사람들로부터 달의 산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이 이슬람 상인을 통해 중국으로 전해지고 그것이 조선으로 다시 넘어와서 하나의 지도로 완성된 것이다.

당시 조선 사람들의 세계관이 얼마나 광범위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아프리카 지역에 위치한 빅토리아 호나 킬리만자로 산, 나일강 같은 주요 지역들도 지도는 표기하고 있다. 또한 지금은 없어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등대까지 표시될 만큼 정확도가 높다.



아랍(이슬람) 상인과의 활발한 교류

이 ‘강리도’에는 이슬람 상인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권근이 지도 제작에 참조했다고 한 ‘성교광피도’는 이슬람 계통의 세계지도로 추정된다. 드문드문 아랍어 지명이 보이고, 아랍의 지도 제작기법인 선명한 칼라색체, 녹색의 바다, 청색의 하천 표기가 그것이다.

아랍(이슬람) 인들은 고대 그리스 인들의 지리지식을 받아들였다. 아랍인들은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였던 톨레미(‘프톨레마이오스’의 영어 이름)가 그린 세계지도를 들고 아시아까지 왕래하며 상업 활동을 했던 것이다. 톨레미가 그린 아프리카, 아라비아반도, 인도 등의 해안선이 동쪽 그쪽에 있는 한반도의 조선에서 그대로 통용되었던 것이다.

당시 해양비단길의 시작점이었던 중국 광주와 천주 등에는 실제 이슬람 거주지가 있었고, 수많은 이슬람인들이 왕래하고 있었다.

2천년 전에 그려진 톨레미 지도의 영향을 받아 아랍지도(‘이드리시’가 만든 세계지도)가 만들어지고, 이 아랍지도가 이슬람상인들의 손에 의해 중국에 전해지고, 이를 참고로 삼아 중국에서 ‘이택민’이란 사람이 그린 ‘성교광피도’가 우리나라에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강리도에 나오는 유럽, 아프리카, 서남아시아 지명은 중세 이슬람의 지리학자 ‘이드리시’가 만든 세계지도에 나오는 지명이 한자로 번역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인들의 지리적 사고의 이해

당시 아시아인들은 해양 지리정보가 생각보다 많이 축적되어 있었고, 수준 또한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동남아 연해 또는 해양의 여러 섬들에 관한 지명이 상당히 많이 확인되고 있는 것에서 ‘연해정보’ 및 ‘도서해양정보’ 축적 정도와 수준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축적된 지리지식은 명나라 정화(鄭和, 1371-1434)의 해양 대원정이나 1492년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의 역사적 원동력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이 강리도에 담긴 풍부한 해양에 대한 풍부한 지리정보는 동·서양간의 문화교류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추측컨대, 아시아인들이 대항해를 개시한 1405년 이전에 이미 해양 및 서방 지식은 이미 알려진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강리도는 당시 사람들의 지리적 사고를 보여준다. 이 지도에는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4배정도 크게 그려져 있고, 심지어 아프리카보다도 크게 그려져 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이 지도의 가운데에 놓여 세계 육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거리는 매우 가깝게 그린 반면, 일본과는 거리가 매우 멀게 표현했고, 방향도 남쪽에 그려 놓았다.

하지만 실제 교류가 활발했던 유구국(오키나와)은 실제보다 크게 그려져 있다. 즉 우리나라에 중요하고 지향하는 중국은 크고 가깝게, 그리고 중요하지 않고 관심도 적은 일본은 멀고 작게 나타낸 것이다. 현대인들도 이와 같은 지리적 사고를 종종한다.

이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이 유추할수 있다.

인간이 오늘날과 같은 문명을 일궈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안주하며 만족하지 않고 끝없는 지적 호기심을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에 과감히 도전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호기심이 있는 곳을 향해 두려움을 이겨내고 과감히 떠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항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를 낳고 이질적인 문명을 하나로 접합시켜서 더욱 숙성된 새로운 문명을 탄생시켰다.

또한 수없이 제작 되어진 많은 지도들도 이러한 문명교류의 기억들이 하나로 융합된 것이고 우리가 만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다르지 않다. 뒷사람에게 낯설음의 공포를 없애주고 더 먼 곳으로 힘차게 나아갈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였던 지도는 인간의 위대성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하나의 징표인 것이다.

우리 선조도 아시아 여러 나라 더 나아가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진취적인 기상이 있었던 때가 가끔은 있었다.

이 지도가 만들어질 때도 그 중의 한 시기였지 않나 생각한다. 당시 이 지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당시에 그려진 세계지도 가운데 가장 뛰어난 지도임에 틀림없다. 이는 15세기 조선의 지리 인식에 대해 살필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며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가 들어오기 전까지 가장 정확한 세계지도였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국가적 차원에서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여 만든 이 지도는 당시에 가장 뛰어난 세계지도였으며, 현재에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지도 제작의 전통이 이후 계승되지 못해 참으로 안타깝다.

 

 

‘쿠쉬나메’가 쓰여 질 당시의 신라 상황

 (광주매일 2014. 03.04. 19:29)

 

쿠쉬나메(Kush Nama)

페르시아의 서사시로 501년-504년, 1108년-1111년 사이에 이란의 하킴 이란샨 아불 카이에의해 쓰여진 신화, 역사의 일부. /출처=wikipedia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651년)할 당시 신라는 삼국통일 준비 중으로, 당과 왕래가 잦은 때이며, 9년 뒤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어서 8년 뒤 668년 고구려마저 멸망시키고 삼국통일 완수로 이어지는 시기이다.

삼국통일을 준비하고 있는 신라로서는 페르시아 왕자 일행의 당시 ‘로얄테크노지식(군사기술, 브레인)’을 유용(신라 삼국통일에 어느 정도 기여)하게 쓸 수 있어서 환대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와비틴’을 신라왕이 받아주고 ‘프라랑’이라는 공주와 결혼하게 해 주었으며, 20-30년간 신라에서 살다 아버지의 유언과 함께 고토회복의 사명을 갖고 다시 바그다드로 돌아갔다는 것은 사실일 수 있다.

 


 

1,300년전 신라 공주와 페르시아 왕자의 사랑이야기

 (광주매일 2014. 03.04. 19:29)

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페르시아의 서사시 ‘쿠쉬나메’ (상) 당시

 

황금대총에서 발굴된 서아시아 교역품
사산 왕조 페르시아는 동서 교류에 앞장서 이들의 문화가 우리나라와 일본에까지 전해졌는데, 유리 공예기술은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했다. ① 유리병: 유리병(국보193호),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것으로 페르시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손잡이가 떨어지자 금실로 감아 놓은 것으로 보아 금보다 중요했던 것 같음. ② 황금보금 : 동유럽 트라키아 지역에서 로마 기법으로 제작된 보검. ③ 유리잔 : 신라와 페리시아가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보여주는 로마양식의 유리그릇. ④ 은잔 : 큰 눈과 높은 코를 가진 서역인의 모습이 새겨져 있음. ⑤ 은그릇 :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직경 20㎝쯤 되는 은그릇. 이란 고고학자들이 조사한 후 페르시아 신화에 나오는 ‘아나이타’ 여신이라고 함. ⑥ 은그릇 : 왼편 신라출토 은그릇의 조각은 오른편 이란 박물관 은호의 조각과 거의 같음.

 

오늘날까지 이란 지역에서는 재미있는 한 영웅의 서사시 ‘쿠쉬나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인 7세기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 ‘신라’가 주 무대로 설정됐다는 것이다. 설화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아랍어, 페르시아어 사료보다 훨씬 풍성하고 세세한 내용을 담고 있고, 사산조 페르시아와 신라와의 관계는 물론, 신라에 대한 가장 방대한 자료를 배경으로 해 한반도 바깥의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와비틴’의 신라에서의 영웅담이 구전되다 글로 남겨진 책이 ‘쿠쉬나메’이며, 사본이 대영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총 800쪽 중에 절반 이상이 신라가 배경이고 신라에 관한 내용(신라의 지리, 군대, 궁정생활 등과 함께 왕자 와비틴의 대화내용, 서신내용 등)이다.

당시 이란지역에는 페르시아가 BC 330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한 후 알렉산더 제국이 건설되고, 이후 파르티아(BC 250-226년)가 존속됐으나, 곧 이어서 BC 226년 서산조 페르시아(BC 226-AD651)가 건국되었다. 그러나 AD 651년 사산조페르시아는 이슬람제국에 의해 멸망당한다.

당시 아랍은 이슬람(무술림)을 앞세우고 ‘칼리파 우마르’ 지휘 하에 동방정벌에 나섰다. 이슬람의 ‘와카스’ 장군은 서산조 페르시아 ‘루스탐’ 장군이 이끄는 대군을 637년 ‘카디시아’에서 격퇴하고, 이어 642년 ‘네하완드’전투에서 ‘아즈데기르드 3세’가 이끄는 군대마저 패퇴시킨다. 아즈데기르드 3세의 아들인 ‘피루즈(와비틴)’가 끝까지 아시아 내륙에서 항쟁을 했으나, 결국 그 마저도 패퇴했다. 결국 피루즈는 중국(당)으로 망명해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 당시 당과 서산조 페르시아는 적국(敵國)이었으나 위급함에는 어쩔 수 없었다. <중국의 사서인 ‘구당서 서역전’에 651년 8월 25일 아람국가에서 중국에 사절단을 보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피루즈(와비틴)는 당 고종을 공식 알현하고, 아랍-이슬람 세력의 확산과 무력 침공에 대해 언급하면서 원병 파견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중국(당나라) 조정은 아랍 제국의 실체를 완전히 파악한 상태가 아니었고, 아랍이 중국에 직접적인 위협 요소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사산조 페르시아의 원병 요청을 원거리 파병 불가를 구실로 거절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당은 오히려 아랍제국 ‘칼리파 오스만’에게 개인 사절을 파견해 아랍과 당의 우호증진을 꾀하는 한편, 아랍 내부의 실상과 국력을 살피게 했다. 이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칼리파 오스만’의 사절이 장안에 당도하기도 했다.<당시 중국 사서를 보면, 651~798년 사이 147년간 39회 이상 아랍 사절이 중국에 내왕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랍-중국 간에 얼마나 교류가 빈번했는지를 알 수 있다.> 마침 당은 떠오르는 이슬람제국과 외교관계가 이루어진다.

중국 내부의 정치적 변화로 더 이상 페리시아인의 안전과 장래가 보장되지 못하자, 피루즈(와비틴) 일행은 숲속 깊은 곳으로 숨어들어 간다. 그리고 망명의 기회를 엿본다.

여기서부터 설화(쿠쉬나메)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희수 교수가 쓴 ‘이슬람과 한국문화 105-108’을 인용해 이야기를 재미있게 구성했다.


어느 날 ‘마친국(마한 ‘백제’) 상인’들이 산 속에서 지내고 있는 파루즈 일행의 거주지 앞을 지나가자, ‘피루즈’는 그들을 잘 대접하고, 그들을 통해 주변 정세를 듣고 난 후, 페르시아인들의 급박하고 어려운 사정을 ‘마친왕’에게 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상인들은 그들의 왕(마친 왕)에게 페르시아 인들의 딱한 사정을 담은 서신을 보냈다. 이 편지를 읽어 본 마친왕 ‘바하크’는 폭압자인 바그다드의 무슬림 자하크와 중국에 와 있는 쿠쉬의 만행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와비틴과 페르시아인에게 동정과 도움을 표한다. 그러나 마친왕은 페르시아인을 받아들일 경우 중국의 보복이 두려워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대신 이웃의 신라왕인 ‘타이후르’를 추천한다.

그러면서 신라는 천국과 같은 살기 좋은 곳이며, 아직 타국의 침략을 받지 않는 나라라고 일러 주었다. 게다가 신라까지 안전하게 가는 자세한 경로도 알려 주었다.

우선 산을 가로 질러 마친에 도착하면, 그 곳에서 제2의 마친으로 가고, 제2의 마친에서 배를 타고 해로를 통해 신라로 갈 수 있다고 조언하였다. 그러면서 신라 왕에게 보내는 비밀 추천 편지를 써 주었다.

이에 고무된 페르시아인들은 와비틴의 인솔 하에 마침내 도착했고, 마친왕의 따뜻한 영접과 서물을 받고 마친왕이 마련해 준 배를 타고 신라로 향했다.



험한 파도를 헤치고 신라에 도착한 이들은 먼저 그곳 관리를 통해 마친왕의 편지를 신라왕에게 전하자, 신라왕은 크게 기뻐하며 극진히 환영하고 두 아들을 항고로 보내 영접했다.

이 대목에서 ‘쿠쉬나메’의 저자는 천국에 버금가는 신라 도시의 아름다움, 궁전, 도로와 골목 풍경, 정원과 새, 도시 주변 모습, 신라 왕의 환대 등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후, 와비틴은 신라왕의 보호 아래 함께 사냥을 다니기도 하고, 국정에 대한 조언자로 활동하면서 신라-이란 간의 굳건한 연대를 다져 나갔다. 때로는 폴로경기를 함께 즐기기도 했다.

국제 정세가 급변해 신라 안보를 위해 페르시아인들을 중국으로 돌려보낼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표하자, 신라왕은 신라는 오랜 기간 독립국으로 친구를 배신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그러면서 신라왕은 오래 전부터 바다를 통해 페르시아와 무역과 거래가 있었다고 강조한다.

신라-페르시아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중국의 쿠쉬가 신라를 침공해왔다. 이 때 와비틴이 이끄는 페르시아군이 신라를 도와 쿠쉬군을 물리쳐 큰 공을 세웠다.

해가 감에 따라 신뢰가 더욱 더 두터워지자, 드디어 와비틴은 신라 공주 ‘프라랑’과 결혼을 요청하자 신라왕은 고민 끝에 허락한다.

 

‘쿠쉬나메’가 쓰여 질 당시의 신라 상황

 (광주매일 2014. 03.04. 19:29)

 

쿠쉬나메(Kush Nama)
페르시아의 서사시로 501년-504년, 1108년-1111년 사이에 이란의 하킴 이란샨 아불 카이에의해 쓰여진 신화, 역사의 일부. /출처=wikipedia

 

 

사산조 페르시아가 멸망(651년)할 당시 신라는 삼국통일 준비 중으로, 당과 왕래가 잦은 때이며, 9년 뒤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어서 8년 뒤 668년 고구려마저 멸망시키고 삼국통일 완수로 이어지는 시기이다.

삼국통일을 준비하고 있는 신라로서는 페르시아 왕자 일행의 당시 ‘로얄테크노지식(군사기술, 브레인)’을 유용(신라 삼국통일에 어느 정도 기여)하게 쓸 수 있어서 환대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와비틴’을 신라왕이 받아주고 ‘프라랑’이라는 공주와 결혼하게 해 주었으며, 20-30년간 신라에서 살다 아버지의 유언과 함께 고토회복의 사명을 갖고 다시 바그다드로 돌아갔다는 것은 사실일 수 있다.

 

 

고대 한반도에 무슬림문화가 흘러 들어 왔다
(광주매일 2014. 03.18. 19:27)

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페르시아의 서사시 ‘쿠쉬나메’ (하)

 

괘릉(원성왕의 능)을 지키는 무인 석상
문병채 (주) 국토정보기술단 단장·전남대 지리교육과 겸임교수 어깨가 넓고 신장이 장대한 거구, 가지런히 다듬은 턱수염과 머리에 쓴 터번(이슬람 모자), 두건을 뒤로 묶은 전형적인 서남아 수피주의자들 형상.

 

옛일을 햇빛에 말리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말리면 ‘설화’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햇빛에 말린 것이라도 그것이 ‘아득한 옛일’이 되면 설화가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많은 사람들 마음 깊숙한 곳에 아늑히 자리 잡아 ‘영혼’이 되어 간다고 한다.

설화는 아늑한 옛날, 이 땅에 사람들이 국가를 이룰 쯤 만들어지고 전해진 역사이자 신화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고대의 설화 된 이야기는 우리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영혼으로 다가 온다.

황금의 나라 경주! 우리 민족의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곳! 지금부터 아름다운 이야기를 지난 주에 이어서 2편으로 꺼내보자.

고대 페르시아의 구전 서사시 ‘쿠쉬나메(Kush Nama)’ 발굴과 연구는 우리에게 최고의 흥미를 주고 있다. 페르시아 왕자의 신라 진출을 전해 주는 소설 같은 실화다.
경주 괘릉(원성왕능)이나 구정동 방형무덤에 가면 그 때의 분위기를 다소 느낄 수 있다.

신라에서 꿈같은 신혼생활을 즐기던 와비틴의 꿈에 신의 계시가 현현한다. “너의 아들이 자하크(아랍의 폭정자)를 처치하고 (페르시아의) 복수를 할 것”이라는….

와비틴은 공주가 임신한 상태에서 조국 이란으로 배를 타고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이들은 중국을 거쳐야 하는 위험한 육로 대신에 해로를 통해 이란으로 돌아간다. 이때 바닷길에 노련한 신라 뱃사람의 안내를 받았다.

도중에 프라랑 공주가 왕자를 낳는다. 왕자의 이름은 ‘파리둔’이다. 드디어 이란 땅에 도착한다. 그러나 와비틴이 돌아 온 것을 안 바그다드의 자하크는 모든 군사를 풀어 와비틴을 찾아내 처형한다. 아버지의 운명을 모르는 파리둔은 신하들에게서 교육을 받으며 자란다.

한편 신라에서도 타이후르의 왕자 ‘가람’이 훌륭한 장군으로 성장하여 중국의 공격을 몰아내고 신라를 완전한 독립국으로 만든다. 몇 해가 흐른 후에 타이후르는 딸 프라랑 공주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내 아들 파리둔이 훌륭한 지도자로 성장하여 바그다드의 자하크를 공격해 그를 철창에 가두고 그의 군사들을 몰살시켰습니다.”



이 편지에 신라왕은 너무나 감격해 모든 신하들과 병사들을 불러 모아 큰 잔치를 열었다.

타이후르가 나이가 들어 죽자 아들 가람이 왕위를 이어 받았다.

장성한 이란인 새 지도자 프라둔도 자하크 군대를 물리친 내용을 담은 서신을 외할아버지에게 보냈으나 그 때는 이미 사망한 이후라 새 왕 가람에게 전달되었다. 이에 가람은 너무나 기뻐하면서 사절단에게 큰 선물과 편지를 주어 보냈다. 가람과 파리둔의 우정과 친선은 대를 이어 계속되었다.

이로써 쿠쉬나메 서사시도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설화를 증명하는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

괘릉(원성왕의 능)을 지키는 무인석상은 예사롭지 않다. 어깨가 넓고 신장이 257㎝나 되는 장대한 거구, 약간 몸을 뒤로 젖힌 상태에서 오른손에 철퇴를 들고 서 있는 위엄 있는 무인의 형상이다.

가지런히 다듬은 턱수염과 머리에 쓴 터번으로 미루어 이슬람문화권에서 신라로 온 인물로 추정되나 구체적인 종족적 정체성을 밝히기 어렵다. 그렇지만 머리 부분에서 앞면은 이슬람식 예배용 모자를 쓰고 있으며, 뒤는 두건을 묶은 형태로 전형적인 서남아 수피주의자들의 터번임을 알 수 있다.

흥덕왕릉의 무인석상도 그러하지만, 구정동 방형무덤의 무인석상은 특히 아랍인 냄새가 풍긴다.

깊은 눈과 큰 코를 가진 얼굴, 상의 좌측 옷깃만을 바깥으로 접은 절금을 착용하고 가죽 장화를 신은 상태이며, 페르시아 스포츠인 ‘폴로 경기용 스틱’같은 것을 두 손에 잡고 있다.

이는 최근 발견된 페르시아 왕자의 신라 이주와 관련된 ‘쿠쉬나메’에 페르시아 이주민들이 신라 귀족들과 폴로 경기를 했다는 기록과 일치하여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외에도 삼국사기에 성골 진골 6두품까지 사용이 유행했다는 ‘모직카페트’, 페르시아 신화에 나오는 ‘아나이타’ 여신이 그려진 ‘은그릇’, 중앙아시아에서 사용되어 온 필리그리 상감기법으로 무늬가 새겨진 ‘황금보검’ 등이 그것이다.





문화란 삶의 압축이고 거울이다.

그리고 사람은 그것을 담고 있는 그릇이다. 따라서 문화는 사람의 발길과 생각을 따라 또 다른 사람이 사는 곳으로 전해진다. 그곳에서 다른 문화와 섞이면서 더러는 없어지기도 하지만, 변화된 형태로 살아남는다.

때로는 전혀 새로운 창조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한 지역의 문화는 다른 문화와 많이 접촉할수록 더욱 풍성해지고 발전해 간다.

최소한 우리 문화도 그러했다.

고대 이후로 한반도는 바깥 세상에 열려 있었고, 세계적인 문화가 스미는 창구였다.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은 당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은 물론, 페르시아의 사리프, 압바스의 바그다드, 나아가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과도 문화적 연결고리가 맞닿아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들어 우리 사료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아랍이나 페르시아 등 이슬람 원전 사료들에 나타난 것들이 알려지면서 더욱 관심을 끌고 흥미로워졌다.

런던 박물관에서 발견된 페르시아의 한 영웅을 그린 서사시 ‘쿠쉬나메’가 대표적이다.




당시 활발했던 해양 실크로드

당시 광동지역에는 7세기 초 이래 많은 아랍 및 페르시아 상인들이 본격적으로 입항해 자치공동체를 형성하며 거주하고 있었다.
승려 감진에 의하면, 당시 광동항에는 페르시아만에서 당도한 무수한 선박들이 향료 및 희귀상품을 산더미처럼 적재한 채 6-7장 거리의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들은 금은보석, 상아, 우각, 향료, 유리제품 등을 가지고 와서 비단, 도자기, 차, 종이, 한약 등을 사 갔다고 했다.
실제로 671년 당나라 승려 ‘의정(義淨)’이 페르시아 선박을 타고 구법 여행을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인과 페르시아인 간의 빈번한 접촉

당시 장안에서는 신라인과 아랍 혹은 페르시아인 간에 조우가 빈번히 있었다.
당시 신라는 한강유역을 손에 넣은 뒤, 당항포(당진)을 통해 당과 활발한 교류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신라는 매년 1회 이상의 사절단을 장안에 파견했다.

중국 사서에도 신라는 703-738년 사이에 46회 이상의 대규모 사절단을 당에 파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일본 서기 753년의 기록에 의하면, 장안의 궁중 조회 때 일본 사절 이외에도 신라와 아랍 사절이 참석했음을 전하고 있다.

신라인들이 이슬람 사절단들과 조우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절단이 아니라도 구법승, 유학생 등 민간 차원의 왕래도 잦았던 시기여서 얼마든지 조우가 가능했다.

 

 

김병모 교수의 30년 추적

(광주매일 2014. 04.01. 19:48)

 

인도 아요디아(아유타국)

 

인도의 옛 지도를 살펴 아유타국이 인도 남동쪽 ‘아요디아’로 남아 있음을 확인하고, 아요디아(코살라국) 지역이 1세기에 북방 월지족(月氏族)의 지배를 받으면서 지배층은 쫓겨나 ‘인도→미안마→운남’으로 이동해 정착했다고 한다.
이 루트는 고대 상업 통로로 차마고도 마방꾼들 장사(차와 소금)하러 다니는 길 이었다고 한다.

허황후의 능비에 ‘보주태후(普州太后) 허씨릉’이라 쓰인 데서 추적한 끝에 보주가 중국 사천(쓰촨)성 안악(안웨)현임을 알아낸 것이다. 또한, 서운향(瑞雲鄕)마을(허씨 집성촌)의 오래된 우물 ‘신정(神井)’ 암벽에 새겨진 ‘쌍어문양’과 함께 우물에 관한 글에서 ‘허황옥(許黃玉)’이라는 이름의 용모가 수려하고 지혜로운 소녀가 살았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곳에서 서기 47년에 반란을 일으켜 다시 강하(후베이) 지방 무창(우창)으로 강제 이주를 당해야 하는 상황에서 양자강을 따라 내려와 영파(닝보)에서 황해를 건너 김해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중국 안웨현

이 허황후의 이동 지역을 꿰는 문화의 공통분모로 김 교수는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는 쌍어(雙魚)신앙을 들었다.

인도 아요디아의 사원이나 풍물에 쌍어가 흔한 것을 보았고, 중국 보주에서도 확인했으며, 김해 수로왕릉의 정문에도 이 천축문화인 쌍어가 새겨져 있다. 허황후의 오라버니인 장유화상(長遊和尙)이 세웠다는 은하사(銀河寺)에서도 두 쌍의 쌍어를 찾아볼 수 있다고 했다. 언어학자로부터 가락이라는 말이 인도 고대어에서 물고기를 뜻한다는 것도 알아내, 이 허황후의 궤적을 문화적으로도 입증한 셈이다.

 

 

2,000년 전 한반도 최대의 국제무역항 ‘김해’

(광주매일 2014. 04.01. 19:48)

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한반도 실크로드의 거점 ‘김해’ <상>

 

①김수로왕릉 전경. ②김수로왕릉 쌍어문양. ③허황후 릉. ④파사석탑.

 

페르시아에서 전해져 온 ‘쌍어문양’

김해, 2000년전 한반도 실크로드의 거점! 한반도에서 가장 활력 있는 터전으로 등장한다.
지난 1월 말 설 연휴를 맞아 김해로 문화답사를 다녀왔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김수로왕 부인이 인도의 공주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내내 내 마음속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가족 여행이었다. 올해 대학에 들어가는 두 녀석들이 품에서 떠나기 전에 가고 싶어서였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해외답사에서 확인했던 것들을 현지 확인을 통해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한반도 최초의 국제항구 ‘김해’는 내가 몰랐던 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었다.
김해 ‘김수로왕릉’을 찾았다. 도심지 한 가운데 엄청난 넓이로 조성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에 최근 김해김씨가 삼부요인(입법, 사업, 행정)을 모두 접하고 있었던 시기를 기억하고 있지만 놀라웠다.

커다란 입구 문에서 부터 걸어서 마지막 세 번째 문 앞에 멈춰섰다. 문설주 위에 이상한 그림이 나무판에 부조로 새겨져 있었다. 얼굴이나 짐승 같기도 하고 구불구불한 선을 새겨놓은 추상화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조그만 물고기 두 마리가 탑 모양의 물체를 가운데 두고 머리를 마주 하고 있는 역시 나무판부조가 있었다. 언제 봐도 참 특이한 그림이다.

김병모 교수는 “이 쌍어문양(雙魚紋樣)이 페르시아에서 전해 온 신어사상(神魚思想)의 흔적”이라고 한다. 놀라울 따름이다.

고대 페르시아에서 인류를 살리는 ‘영약(靈藥)’을 보호하는 ‘신어사상’이 인도 코살라국의 아이콘이 되었다가 아요디아 주민의 이동으로 중국 남부지방으로 퍼져 나갔고, 그 끝에 한반도 고대사의 한 주인공인 허황옥에게 연결됐다는 것이다. 페르시아에서 이 물고기 이름이 가라(kara)이고, 그 명칭이 한국 고대 역사에서 한 나라의 이름 ‘가락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페르시아 고대인들의 사유세계 속에 들어 있던 신어에 관한 사상이 오랜 세월에 걸친 인구의 이동과 접촉으로 한국까지 퍼지게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울 뿐이다.

이 사실을 알고 필자도 작년에 민속학자들과 인도 간다라 지역과 아요디아(코살라국) 지역을 다녀 온 적이 있다. 두 곳 모두 도시 전체가 쌍어문양이 넘쳐 흐르듯이 많았다. 건물에 차에, 옷에, 모자에 그려진 쌍어들은 이 사람들의 생활에서는 빼 놓을 수 없는 정신적 요소가 되어 있었다. 쌍어는 아요디아 시의 문장(紋章)으로 삼고 있었다.

쌍어문양이 옛 코살라국 때부터 이 지역의 상징물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까지 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인도서 건너온 것으로 알려진 ‘파사석탑’

김수로왕릉을 떠나 허황후릉으로 향했다.

김해시 북쪽 구지봉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비스듬한 경사면 위쪽으로 무덤이 있었다. 무덤 앞에 능비가 있었고, 그 앞에 돌로 만든 상석이 있었다.

능의 오른쪽으로 비각에 있고, 그 안에 ‘붉은 색 돌’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것이 보였다.

학생시절에 왔을 땐 한 쪽에 치워지듯 야적되다시피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비각 속에 잘 정돈된 석탑을 만들어 놓은 점이 달랐다.



다듬지 않는 평평한 돌로 몇 단을 쌓아 놓은 석탑이다. 일명 ‘파사(bhasa)’ 석탑이다. 이것도 허황옥이 인도에서 왔다는 하나의 증거품이다. 배의 밑바닥에 넓적 돌을 깔아 놓으면 배가 중심을 잡고 파도에도 덜 기울려 안전 항해를 할 수 있다. 이 때 쓰인 돌인 것이다.

색깔과 재질이 누가 봐도 예사롭지 않는 돌이다. 이 돌들은 우리나라에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인도 아유타 지방에서는 많다. 뿐만 아니라 탑의 모양 또한 아잔타석굴 등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을 가졌다고 한다. 이 돌이 정말 인도에서만 생산된 것이라면, 김병모 교수가 주장한 허황후가 중국에서 온 것이 아닌 인도에서 바로 한반도로 왔다고 볼 수 있는 근거이다.

돌탑 앞에 한참을 서 있는데도 자리를 뜨기 싫다. 정말 인도에서 온 돌일까? 중국 사천성 어딘가도 꼭 있지 않을까? 시간 내서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어둑해서야 집으로 향했다.

문병채 (주) 국토정보기술단 단장·전남대 지리교육과 겸임교수



김해의 지정학적 위치

김해, 2000년 전 한반도 최대의 무역항!
한반도에서 가장 활력 있는 터전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그 만한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국자(麴子) 모양의 만(灣)으로 된 포구, 낙동강을 따라 내륙 깊숙이 이어지는 물자 수송로 등이 그것이다.
지금은 간척으로 논경지화 되었으나, 당시엔 바다여서 육지 속에 내항으로 태풍으로부터 방어되고, 남해를 통해 내륙의 고구려와 해양국(왜, 유구, 제주, 중국, 동남아)과 연결되었다.
특히 고구려와 왜를 연결시키는 무역거점으로의 위치적 특성은 김해가 한반도 최초로 국제무역항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2000년 전 한반도에 스며든 ‘인도 문화’
(광주매일 2014. 04.17. 19:25)

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한반도 실크로드의 거점 ‘김해’ <하>

 

고대의 김해항
인도공주 허황옥이 이곳을 통해 김해로 들어왔고, 뒤에 보이는 산을 넘어 1㎞ 쯤 떨어져 있는 가락국왕궁으로 들어갔다고 전해지고 있다(산 너머는 현재 김해시)

 

가락국의 수도 ‘김해’는 약 2000년 전 한반도 최대의 국제무역항이었다. 중국, 일본은 물론 동남아, 인도까지 교류했다. 가라국은 강력한 왕권을 가진 큰 나라로 발전하지는 못했으나, 누구보다 화려하고 부유한 생활을 누렸다.
이 같은 사실은 오랜 역사 속에 묻혀졌으나, 유적발굴과 함께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많은 부분이 밝혀졌다.

허황옥이 배에서 내렸던 가야 포구인 ‘봉황대(벌포진)’에 들어섰다. 뒷산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에 둘러싸인 포구가 정겹게 느껴졌다. 바람이 불자 벚꽃 비가 내린다. 사계절 모두 다 매력적이지만, 벚꽃이 피는 봄이 특히 장관이다.

봉황대 길을 따라 걷다보니 유적지를 자연스레 볼 수 있다. 복원된 고대 포구마을이 보통 공원과 사뭇 달라서 좋다.

남해에서 들어온 배는 낙동강 지류로 김해로 흘러드는 해반천 수로를 통해 봉황대 선착장에 닿았다. 봉황대 남쪽은 낙동강이 나팔 모양으로 입을 벌려 남해가 되고, 서쪽은 해반천이 바다와 만나는 강어귀가 된다. 당시에 김해평야는 존재하지 않았다. 뻘밭이었다.

가야시대 주거인 ‘수혈주거지’, 창고인 ‘고상가옥’, 가야인의 ‘배’, 그리고 허황옥을 기다리던 ‘망루’ 등이 복원된 해방천(낙동강 지류)변에 넓은 잔디밭과 함께 복원돼 있다. 그리고 뒷산으로 이어지는 가벼운 등산로가 있어 산책에 안성맞춤이다. 산길을 따라 산정 망루에 서니 김해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반대편 아래로 김해패총과 궁중이 있었을 곳으로 추측되는 김해시청, 더 멀리 김수로왕능과 허황후능이 보인다. 정면으로는 낙동강 하구가 멀리 아스라이 보인다.



2000여년 전 김해 앞 바다에 호화찬란한 배 한 척이 나타났다. 인도에서 온 허황옥이 탄 배다. 저 멀리 보이는 낙동강이 구부러져 바다와 접하는 뛰어나온 곳이 아마 ‘신귀(김수로왕의 신하)’가 마중 나갔던 ‘승첩(勝捷)’이란 곳일 게다. 그리고 저 남해 바다에 육지처럼 떠 보이는 섬이 ‘유천(김수로왕의 신하)’이 마중 나갔던 ‘망산도’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들 안내와 함께 드디어 벌포진(해방천 봉황대)에 배가 닿았다. 멀리 아유타국에서 온 젊은 처녀는 일행 20여명과 함께 배에서 내렸다. AD 48년 이었다. 이름은 허황옥(許黃玉)이고, 인도 공주였다.

공주는 육지에 올라 비단치마를 벗고 땅의 신령님께 먼저 제사를 지냈다. 긴 항해로부터 무사하게 육지에 닿게 해준 토지 신에게 감사의 예를 올리는 절차를 먼저 행한 것이었다. 그리고서 마중 나온 가락국 김수로왕에게 “저는 아유타국 허황옥입니다”라고 인사했다. 이로써 가락국 임금은 멀리 인도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게 된다.



그 왕비는 김수로 왕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10명이나 낳았다. 첫째는 태자로 책봉(거등왕) 되고, 둘째와 셋째는 허씨 성을 따르게 하고, 나머지 7명은 보옥선사(허황옥의 오빠)를 따라 가야산에 들어가 도를 배우다가 방장산으로 들어가 운상원을 짓고 다년간 좌선해 모두 성각(成覺)이 되었다.

그래서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같은 조상의 자손이 되었고, 오늘날 600만명이나 되는 한국 최대 성씨의 조상이 되었다.

이 전설 같은 이야기는 여러 학자들의 고증으로 점차 역사적 사실로 들어나고 있다.

특히 고고학자인 김병모 교수의 연구는 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고 있어, 우리에게 더욱 관심을 갖게 하고 있다.

김 교수에 따르면, 김수로왕능 정문에 새겨진 ‘쌍어문양(雙魚紋樣)’의 흔적을 따라 고증한 결과, 인도 ‘아요디아(코살라국)→미안마→운남→쓰촨(안악현)→한반도’로 이동해 왔다고 설명한다.



그녀의 고향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먼 곳에서 바다를 건너온 사람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녀는 선진국의 사치스러운 생활물품인 비단, 보석, 향신료 등을 가락국에 전했고, 고대 한반도 문화를 더욱 풍부하게 했다. 그리고 당시 김해가 세계로 연린 국제 교역도시가 되게 하는 원동력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당시 가락국이 얼마나 국제 교류를 활발하게 했는가를 증거 하는 사례들은 많다. 신라 석씨의 시조인 석탈해도 바다를 건너 역시 김해에 먼저 도착했으며, 가락국왕 하지는 479년에 중국 남제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미국 언어학자 그리핀저에 의하면 한국어에는 400여개의 고대 인도어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요한 것만 보면 벼, 쌀, 풀, 알, 씨, 가래(농기구), 메뚜기(곤충) 등 농업문화 ‘키워드’ 들이 모두 드라비다어 계통의 어휘라는 것이다.

드라비다어는 힌두어가 형성되기 이전에 토착민들이 사용하던 인도어이다. 당시 드라비다족들은 벼농사 법은 아프리카 남부 마다가스카르 섬에까지 전파시켰었다.

또한 ‘가야’이라는 말이 인도 고대어에서 ‘물고기’를 뜻한다고 한다. 따라서 쌍어문양과 함께 신어사상으로 허황옥 일행에 의해서 전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국가명칭’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인도 문화에 젖어서 여태껏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아마 까무잡잡한 피부와 둥글고 큰 눈을 가진 필자도 인도인 닮았다고 늘상 듣는다. 우리나라에 나 같이 생긴 사람이 한 둘 이랴?

 

 

2000년 전 ‘김해’의 지정학적 위치

(광주매일  2014. 04.17. 19:25)

 

가락국배(사진 왼쪽)와 당시의 접안시설.

 

김해, 2000년 전 한반도 최대의 무역항! 김해는 당시 가락국의 중심지였고, 강력한 왕권을 가진 큰 나라로 발전하지는 못했으나, 일찍부터 해외무역을 통해 재물을 축적할 수 있었던 부유한 나라였다.

 김해가 한반도에서 가장 활력 있는 터전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그 만한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국자(麴子) 모양의 만(灣)으로 된 포구, 낙동강을 따라 내륙 깊숙이 이어지는 물자 수송로 등이 그것이다. 지금은 간척으로 농경지화 되었으나, 당시엔 바다여서 육지 속에 내항으로 태풍으로부터 방어되고, 남해를 통해 내륙의 고구려와 해양국(왜, 유구, 제주, 중국, 동남아)과 연결되었다.

특히, 고구려와 왜를 연결시키는 무역거점으로의 위치적 특성은 김해가 한반도 최초로 국제무역항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철’의 생산과 ‘해산물’, ‘소금’의 교역 중심이 된 것 때문이었다. 특히 철은 후한의 한사군과 왜 등지에서 대량으로 수입해 갔다.(왜는 7세기까지 철을 자체적으로 생산하지 못해 전량을 수입에 의존).

가락국은 고대 최대의 제철 국가였다. 같은 시기의 신라 백제에 비해 갑옷 출토가 많은 점은 철이 어느 곳보다 풍부했고 제작기술 또한 우수했음을 증명한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활발한 중개무역은 중국의 동전(오수전), 거울, 북방 초원의 청동솥, 각종 왜계 유물이 이를 말해 준다. 그리고 최근 발굴된 고대 창고터와 잘 정비된 도로망, 항만 접안시설, 망루 등의 유적이 이를 확인시켜 준다. 또한 2005년 창녕 비봉리에서 발굴된 통나무배는 8천 년 전으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집트 쿠푸왕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선박보다 3400년이나 앞선 것이다. 현재까지 발굴된 전 세계 선박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러한 가락국 김해의 활발한 대외무역 활동은 4세기까지 이어진다. 광개토왕 남정으로 몰락하는 계기가 되어 5세기 이후부터는 백제에 그 기능을 물려주게 된다.

 

 

‘허황옥’ 관련 문화의 산업화 노력

(광주매일 2014. 04.17. 19:25)

 

최근 세계 각국이 ‘문화콘텐츠’를 육성해 지역발전의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김해시에서는 인도의 아요디아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우위를 다지고 있다. 아요디아시 공원에 허황옥 유허비를 세워놓았다. 허황후비에는 현재 많은 한국인 참배객 등이 관광지로 삼고 있다. 후손들인 김해 김씨, 김해 허씨, 인천 이씨로 이들은 해마다 참배를 한다. 인도 주 정부도 대폭 정비계획을 세우고 기반시설을 하고 있다. 또한 2005년 김해시 국제문화축제에 인도 민속공연단과 함께 아요디아의 미시라 왕손 부처가 참석해 두 도시간에 우의를 다진 적도 있다.

뿐만아니라 중국 사천(쓰촨)성 안악(안웨)현 서운향의 ‘보주 허씨 사당’을 찾는 한국인도 계속 늘고 있다. 근래에는 약삭빠른 중국 정부가 한글까지 병기(倂記)에 놓은 도로 표지판 등 관광시설을 한국인 구미에 맞게 확충하고 있다.

이제 문화가 산업화되어 가고 있다. 문화학자들 일부는 아직도 문화란 시성하고 고귀한 것이라 여기고 천박한 상품화를 반대하고 있지만, 문화로 먹고 사는 시대가 멀지 않았다. 고유문화는 그 고유한 만큼의 화폐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그것이 타국과 관계된 것이라면 그 나라의 많은 돈을 가져 올 수가 있을 것이다.

 

 

1500년 전 우리나라 최초의 인도유학생 ‘백제人 겸익’

(광주매일 2014. 05.08. 20:03)

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구법의 길 찾아 떠난 ‘겸익’ <상>

 

상가나대율사(나란다 사원), 위 큰사진은 파괴된 대학(사원) 모습이고, 작은 사진들은 불교유적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조각품들.

 

지금으로부터 1500여년 전. 인도에 간 한반도인이 있었다. 혜초보다 200년이나 더 빨랐다. 삼국이 한 치의 양보없이 다투던 역사의 혼란기! 구법의 길을 찾아 역사에 없던 길을 갔다. 용기와 신념 없이는 힘든 일이었다. 험난한 길이지만 죽지 않고 돌아왔다. 그리하여 이 땅 한반도의 수많은 중생을 구제했고 화려한 고대문화의 꽃을 피웠다.
겸익이 인도에 갔다 왔다는 것이나, 어느 길로 갔다는 것은 역사서에는 없다.


역사적 사실인가?

겸익이나 그가 번역한 율장에 관한 기록은 다른 문헌에 전혀 보이지 않으며, 단지 ‘미륵불광사사적기’에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유일한 자료인 미륵불광사사적기도 분명하지 않다. 때문에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겸익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은 그의 영웅적 이야기가 설화 속에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역사도 어쩌면 모두 진실된 기록 만이지는 않는가? 힘 있는 자가 만들어 놓은 왜곡된 부분이 적지 않다.

그리고 역사란 오래되면 신화나 설화가 된다. 겸익도 그러한 인물인지 모른다. 실제적 인물일 수도 있다는 의미다. 한편으론 사실이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만들어 낸 가공인물일지도 모른다. 이상형을 실제화시킨 인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역사적 인물이든 신화 속 인물이든 여행하는 자에겐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문화향유 측면에서 볼 때 둘 다 흥미를 주기 때문이다. 아니 때로는 규격화된 역사 보다는 신화와 설화 속에 있을 때 오히려 더 재미로울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 글은 흥미를 줄 것이다. 자 이제 천여 년을 뛰어 넘어 겸익대사를 만나러 가보자.


당시 백제의 상황

당시 백제는 455-501년에 ‘격동의 시기’를 보냈다. ‘비유왕→개로왕→문주왕→동성왕’이 차례로 살해되는 비운의 역사를 맞는다. 그러나 501년 왕위에 오른 무령왕에 의해 영토 확장으로 백제 위상은 크게 높아진다.

또한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하고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불교사상에 큰 관심을 갖게 된다. 그래서 522년 겸익과 같은 이가 멀리 인도까지 유학을 갈 수 있었다.

백제의 격동기는 비유왕이 반란군에 의해 살해된 455년 이후부터 시작된다. 이어서 약해진 국력을 틈타 아들인 개로왕 역시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475년 살해되고 수도(한성) 자체가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의 폐허의 땅으로 변해버린다. 문주왕은 할 수 없이 공주(웅진)로 수도를 옮긴다. 그러나 그마저도 477년 신하인 ‘해구’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급기야 일본으로 피신한 곤지(개로왕 아들)에 의해 가까스로 수습되어 그의 아들 동성왕이 중흥을 꾀하나, 501년 역시 신하였던 ‘백가’에 의해 살해된다.

이런 상황에서 501년 왕에 오른 무령왕은 국가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한 프로젝트를 수립했다. 첫째가 백제의 옛 땅을 되찾는 것이었고, 이어 문화 발전을 꾀하고 백성의 삶이 윤택해질 수 있는 길을 찾았다. 그는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하고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불교사상에 큰 관심을 갖게 된다.

때문에 백제 스님을 사신과 함께 양나라에 유학 보내 중국의 불교를 배워오도록 했는데, 그 첫 번째 유학승이 발정(發正)이다.(510년 중국에 들어간 발정은 30여년간 공부하고 사비(부여) 천도를 전후해서 백제로 들어왔다) 발정이 떠난 12년 뒤 522년(무령왕 22)에 겸익이 인도로 떠났다.

아마도 중국에 있는 발정과 연계가 있지 않았는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인도로 가는 길

“출가한 자가 목숨이 아까워 위험한 구도행을 포기하지 않겠다.” 겸익이 남겼다고 전해지는 말이다.

그가 인도에 다녀왔다는 것이나, 어느 길로 갔다는 것은 역사서에는 없다. 다만 당시의 지정학적 상황을 고려해 추측해 볼 수 있다.

겸익은 서해 바다를 건너 먼저 남중국에 도달한다. 그는 남중국 양나라에서 발정(發正)을 만난다.

그는 발정과 중국 스님들의 도움을 받아 광조우로 갔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광조우는 아라비아상인 거주지(광탑가)가 있을 정도로 서역과 교류가 활발했던 국제무역항이었다. 해양실크로드의 출발점이었다.

최근에 그곳 공동묘지에서 라마단이란 고려인 묘가 발견돼 화제가 된 적도 있다.

광조우에서 서역인 배를 타고 험난한 뱃길을 통해 인도 캘커타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인도 제일의 사찰로 유명한 중인도의 상가나대율사를 찾아가기 위해서이다. 겸익은 그곳 대율사에서 꾸준히 범어와 율장을 배워 나갔다. 이미 백제에서 범어를 접한 겸익의 공부는 속도를 더해 나갔다.

그러나 523년 무령왕이 서거한다.

인도에 머무르고 있던 겸익은 상인들로부터 몇 해 전에 무령왕이 서거하고 성왕이 등극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겸익은 아직 못 한 공부를 계속하느냐, 아니면 자기에게 기대를 걸었던 무령왕과 성왕을 찾아 귀국하느냐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겸익은 하던 공부를 접고 귀국길에 오르기로 마음먹는다.

친구이자 새로운 왕으로 등극해 어려움을 겪고 있을 성왕을 돕기 위함이었으리라. 백제를 떠난 지 5년만이다.

인도의 승려인 ‘배달다삼장(倍達多三藏)’과 함께 미처 정리하지 못한 산스크리트어로 된 아비담장(阿毘曇藏)과 오부율(五部律)이라는 책을 배에 싣고 인도를 떠난다. 그리고 성왕 4년(526) 웅진에 도착한다.


상가나대율사가 있는 파트나 마을의 풍경


■ 백제승 발정 (發正)

겸익이 인도로 가는 길에 중국에서 도움을 받았다는 발정. 그는 겸익보다 10년 앞선 510년경 역시 무령왕의 후원으로 중국에 유학간 백제승이다.

당시 발정은 보타도에서 법화경 독송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는 중국에서 30여년간 공부하고 겸익이 인도에서 귀국한 이후 사비 천도를 전후해 귀국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겸익과 마찬가지로 사서에 기록이 없어 실제 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중국 사서에 ‘백제승 발정이 서기 502년부터 519년 사이에 해당하는 천남(天監) 연간에 중국에 최초로 불교를 공부하러 온 백제의 스님 발정(發正)이 저장성 보타도에 관음보살이 나타났다는 소리를 듣고 그리로 갔다’는 기록이 있다.


■ 상가나대율사


상가나대율사는 오늘날 나란타(那爛陀) 대학(사원)으로 추정된다. 나란타는 팔라제국(427-1197) 시대에 불교학습의 중심지였다. 당시 인도 제일의 사찰로, 세계 최초의 대학 중 하나이다. 인도 비하르 주의 파트나에서 남동쪽 55마일 거리에 위치한다.

당시 인도 구법승은 거의 모두 중인도를 찾았다.

그 이유는 인도의 다른 지역에서는 율이 구전으로만 전해지고 있어서 원본을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6세기경에는 이미 힌두교가 인도 전역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겸익이 인도에 도착했을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겸익도 중인도의 상가나대율사를 찾아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굽타 왕조의 쿠마라굽타 1세(415-454)가 창건한 사원(대학)이다. 항상 1만여명이 모여 공부한 인도의 ‘불교종합대학’이었다. 4만6천평의 면적, 이 넓은 곳에 승원·탑·강당이 빼곡히 차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신라의 아리야발마·혜업(慧業), 현각(玄恪), 현태(玄太)스님 등이 그 옛날 여기서 수학했다고 전해진다.

 

 

“1500년 전 인도유학생 ‘겸익(謙益)’의 흔적을 찾아서 …” 

(광주매일 2014. 05.22. 20:22)

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구법의 길 찾아 떠난 ‘겸익’ <중>

 

문병채 (주) 국토정보기술단 단장·전남대 지리교육과 겸임교수 ① 황금새 전설이 있는 ‘대조사’ ② 겸익과 관련 있을것으로 추정되는 ‘석탑’ ③ 세련되지 않은 초기의 ‘석불’ ④ 대조사 뒷산에 있는 ‘고분’

 

지난 5월 초순 모처럼의 긴 휴일을 맞아 ‘겸익대사’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그가 인도에 갔다 왔다는 것에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지만 역사적 인물이든 신화 속 인물이든, 여행하는 자에겐 그리 중요하지 않다. 둘 다 나름대로 문화향유의 흥미를 주기 때문이다. 아니 때로는 규격화된 역사적 사실 보다는 신화 속 이야기가 더 재미를 준다. 그래서 나는 혜초보다 200년이나 더 일찍 인도에 간 백제 ‘겸익’을 만나는 것에 마음이 들떴다.

겸익이 세웠다고 전해오는 대조사는 충남 부여군 임천면 가림산(성흥산성)에 있다. 높지 않은 가림산(성흥산)에는 신록(新綠)이 새 생명을 움 틔우고 있었다.

비탈진 등산로는 어김없이 푸르러가는 자연의 시간을 따르고 있었다. 산의 남쪽 양지바른 중턱에 대조사가 놓여 있다.

겸익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천년고찰이다(사적기에는 527년 담혜가 세운 것으로 되어 있고, 부여읍지에는 겸익이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옛것이 그리운 사람들이 알음알음 찾는 절이다.

절은 아늑한 계곡에 자리하고 있어 고즈넉한 분위기다. 주인(겸익)이 없어서인지 유난히 한적하다.

마당에 들어서니 의외로 쓸쓸하다. 겸익이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보낸 곳이다. 이곳에 그의 인생이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이곳에서 새로운 세계를 탐색했으리라. 중생의 깨달음을 위해 고민하는 이들과 소통하고 싶은 소박한 바람이 있었을 것이다. 오직 새소리 바람소리밖에 들리지 않아 겸익이 경전을 번역하기에 더 없이 좋은 환경이다.

그리고 이 위대한 세기의 영웅 뒤에는 베일에 가려진 인물도 있었다. 함께 온 인도스님. 그 역시 엄연한 역사 속 실존인물이다. 그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 한반도에서 원했던 삶을 살았을까. 드라마틱한 혼란기 역사의 회오리 속에서 운명의 삶을 살다 가지는 않았을까. 그의 경이롭고 가슴 뛰는 삶이 가슴을 적신다.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 물음’에 답이라도 하듯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본다. 그들은 왜 고난의 길을 택했을까? 파란만장한 여정을…. 역사는 흘러도 이들의 운명적 삶은 우리를 사로잡는다.

이들이 살다간 뒤, 오래도록 역사가 이어지는 동안 수많은 중생들이 이곳을 찾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삶이 고단하거나 힘들 때 이곳에 들러 마음을 정화하고 안정을 찾았을 것이다.


절에는 겸익의 여러 징표들이 보인다. 석탑, 석상, 고분, 그리고 그가 다녔던 산길과 숲 등이 그것이다.

원통보전 앞마당에 석탑이 서 있다.

높이 약 520㎝인 3층 석탑이다. 원래 지붕틀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75년 부근에서 몸체 틀을 발견하여 복원하였다.

형태로 보아 통일신라의 탑 형식을 띄고 있다. 탑의 2층 기단 위로 3층 탑신을 올려놓은 형태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줄어드는 비율이 비교적 낮아 안정감을 주고 있다. 지붕돌의 처마는 가운데에서 수평을 이루고, 네 귀퉁이에 이르러 가볍게 위로 들려있다.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 앙화, 보륜 등이 표현되어 있는데,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고 특히 노반이 좁은 편이다.

옥개석은 화강편마암이고 나머지는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웅전 뒤의 석불과 같이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이라 전해지고 있지만 그것은 알 수 없다.

당시 중국과 고구려, 그리고 백제는 목탑을 만들던 시점이다. 그런데 겸익이 불교의 본고장이라는 인도에 가 봤더니, 무덤은 있지만 목탑은 존재하지 않았다.

온통 돌로 만들어진 사원과 스투파, 목탑과 목조 사원이 낯설 정도로 인도 사원들의 풍경은 겸익을 깜짝 놀라게 만들지 않았을까?

백제로 돌아온 겸익은 돌로 만들어진 탑을 만들었거나 제시했을 것 아닌가?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 이 석탑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이 때부터 백제에 석탑이 나타나기 시작해 대세를 이뤄나갔다는 설이 설득력 있게 들려온다.



대웅전 뒤에는 커다란 석상이 서 있다.

정식명칭은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보물(217호)이다. 직4각형의 석주 형태를 하고 있어 원래 돌의 윤곽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자연석을 다듬어 만든 것으로 보인다.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배에 대어 금속으로 된 연꽃가지를 들고 있는데 몸에 비해 작고 평면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법의는 통견에 가깝고 오른쪽 어깨부분을 둥글게 덮고 있는 옷자락선이 보이며 앞가슴이 벌어져서 속에 있는 띠 매듭이 보인다.

옷 주름 선은 양팔에 걸친 긴 소매 자락에만 보이는데 도식적인 평행선으로 처리되어 있다. 보살상 뒷면의 옷 주름은 생략되어 있다. 백호와 눈동자를 금속으로 만들어 넣었다. 얼굴은 4각형으로 넓고, 관 밑으로 머리카락이 짧게 내려져 있어 정적(靜的)이다.

신체의 비례가 맞지 않고, 세부 묘사가 단조롭고, 가공기법이 세련되지 않은 조각품이다. 양쪽 귀와 눈은 크나 코와 입이 작아서 다소 기이한 느낌마저 준다.

우리가 흔히 ‘미술’에서 기대하는 ‘미(美)’가 아니고, 감동이나 전율도 아니며, 창의성이나 개성의 표현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영원한 존재 자체가 목적일 뿐이다.

이것 역시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이라 하지만, 석탑과 마찬가지로 겸익이 들어 온 시기의 초기 불상이란 생각이 든다.

당시 인도에서는 많은 석불을 만들었는데. 우리나라엔 석불이란 존재 자체가 없었던 시기였다. 곁에 있는 노송이 품위를 더한다. 다가가 보니 천년 세월을 버티며 굽어보고 있는 보호수다.



절 담장 바깥으로 나서니, 성흥산성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솔숲이 반긴다.

낙락장송들이 사람들에게 그늘을 만들어 준다. 하늘은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200m쯤 오르니 고분이 보인다. 아마 겸익이 잠들어 있는 곳이 이곳이지 않을까! 나는 몸을 구부려 경배했다.

겸익은 그가 이제 늙어 눈이 어두워지고 기력이 쇠하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양지바른 곳에 나뭇잎 깔고 덮고 사바세계의 마지막 잠을 청하였고, 열반에 들었다.” 너무나 친 자연적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가진 것 없이 자연으로 돌아갔다. 제자들이 그이 시신을 거두어 그 자리에 고분을 만들었다.

당시 인도 고승들이 죽을 때 택한 방법이기도 하였다. 지금도 히말라야 산속 스님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 천지 만물이 하나라고 여긴 생각에서였다.



■ 대조사의 ‘황금새 전설

대조사에는 신비스러운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황금새’ 전설이다.

겸익이 인도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후 흥륜사에서 번역작업에 몰두 할 때다.

어느 날 밤 꿈에 관음보살이 나타나 불경 번역을 찬탄하고는 갑자기 큰 황금새로 변하여 임천면 가림성 위로 사라졌기에 겸익이 뒤쫓아가보니 그 새는 간 곳이 없고, 꿈에서 친견한 관음보살이 앉아 계시기에 놀라서 소리치며 꿈에서 깨어났다.

그런 꿈이 며칠 반복되자 겸익은 이 사실을 임천성의 성주에게 알렸다. 성주는 반신반의며 겸익대사와 산위에 올랐더니 전에 없는 황금 관음보살이 있었다.

이 사실을 나라에 알렸더니, 성왕이 크게 감동하였다. 마침 성왕이 협소한 웅진(공주)에서 넓은 소부리(부여)로 수도를 옮길 마음을 가졌던 터라, 그렇게 되면 가림(성흥)산성은 수도를 지키는 중요한 곳이 될 것이었다.

성왕은 그 자리에 국가안위를 비는 큰 절을 짓기로 마음먹었다. 성왕 5년 초파일을 기하여 공사를 시작하여 5년 만인 성왕 10년에 절을 지었다.

불사를 하는 동안의 밤에도 큰 황금새가 날아와 대낮같이 밝혀주어 불사를 일찍 마칠 수 있었다.

그래서 절 이름을 황금빛 큰 새가 나타났다 하여 대조사라 지었고, 관음보살이 나타난 절 뒤의 큰 바위에는 석불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1,500년 전 인도유학생 겸익(謙益)의 삶과 백제불교 

(광주매일  2014. 06.05. 20:06)

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구법의 길 찾아 떠난 ‘겸익’ <하>

 

문병채 (주) 국토정보기술단 단장·전남대 지리교육과 겸임교수 ① 당시 외국 가는 큰 배의 포구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황산포구 ② 겸익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무령왕 ③ 중국 남조의 문헌에 나오는 삼국의 사신 모습.

 

혜초 보다 200여년이나 더 일찍 인도에 간 백제의 ‘겸익’. 기록되지 않은 신화 속에 존재해 온 겸익의 행적은 눈부셨다. 인도에서 5년만의 귀국은 대대적인 환송을 받았고 많은 법어 불경의 번역과 함께 한반도의 수많은 중생을 구제와 화려한 불교문화 융성, 더 나아가 백제가 해양강국이 되게 했다.

▶ 인도에서 5년만의 귀국

겸익은 성왕 4년(526년) 웅진에 도착한다. 성왕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성문밖에 까지 나와서 마중했다. 어렸을 때 같이 컸고, 자기 아버지 무령왕의 후원으로 인도에 간 친구가 돌아 온 것이다.

겸익이 인도에서 가져올 불교경전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던 참이었다. 성왕은 새 깃으로 만든 우장을 입은 악대가 북을 치고 피리를 부는 환영행사를 벌였다. 두 사람은 5년 만에 다시 재회했고 ‘새로운 백제, 불국토의 백제’ 를 만들기 위해 의기투합했다.

성왕은 이들(겸익과 인도승려)을 흥륜사(興輪寺)에 거주하게 했고, 국내의 이름난 승려 28인을 불러 함께 가지고 온 율부(律部) 72권을 번역하게 한다. 당시 백제 고승들은 겸익을 도와 윤문(潤文-글을 윤색)과 증의(證義-링크)를 했으며, 담욱(曇旭)과 혜인(惠仁)이 이 율장에 대한 소(疏-주석) 36권을 지어 성왕에게 바쳤다.

이때 번역한 율은 ‘범본아담장오부율문(梵本阿曇藏五部律文)’ 또는 ‘비담신율(毘曇新律)’이라고 한다. 아담이나 비담은 아비달마(阿毘達磨)의 준말이지만 아비달마율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아직 모른다.



▶ 겸익이 오르내렸을 ‘성흥산성’

겸익의 친구인 ‘성왕’은 그의 율장을 기초로 백제불교는 융성기를 이룬다.

성왕이란 본래 인도의 불교에서 신화적인 왕을 지칭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에서 가져 왔다고 한다. 겸익으로 인해 백제불교는 계율 중심의 불교가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성왕은 겸익이 가져온 지리지식을 바탕으로 543년 부남(扶南-현재의 캄보디아)과 교역했다는 것과 549년 중국 남조의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사실이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겸익의 계율 중심의 불교는 일본으로 전파되어 크게 꽃피게 된다.

성왕은 552년 일본의 서부희에게 달솔, 사치계 등을 보내는 한편, 금동석가상 1구와 미륵석불, 번개, 경론, 약간 등을 함께 보냈다.

또 554년에는 담혜·도심 등 16명의 승려들을 일본에 보낸다. 554년에는 일본에 보낸 물품 중 인도에서 산출되는 양모로 만든 탑등(taptan)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겸익이 인도에서 가져 온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특히 당시 일본에는 불교뿐만 아니라 학자와 기술자들을 비롯해 의사나 음악가까지도 파견해 선진 문물을 전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겸익이 인도를 다녀 온 뒤로 인도에 다녀온 스님들이 줄을 이었다.

‘해동고승전’에 따르면 신라의 혜업, 혜륜, 현각, 현태, 고구려의 현유 등이 인도에 다녀왔다. 그리고 이들이 있었기에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 불교는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결국 한반도 삼국은 겸익 이후 해외교류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여 진다.


▶ 해양지리 지식의 축적

대조사 뒤에 있는 산성으로 발길을 옮겼다. 겸익이 수 없이 오르고 내려 다녔을 가림산에 있는 성흥산성이다. 혹시 성흥이란 말은 성왕이 사비천도 이후 이곳을 중요시한 나머지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꽃망울이 지고 있다.

봄을 즐기기엔 더 없이 좋은 산길이다. 소소한 산책을 즐기기에 딱 좋다. 20여분을 오르니 산성이 보이고 정상이 나온다. 커다란 암벽과 가파른 급경사 길이다. 높이 260m에 불과한 산이지만 오르기에 쉽지 않다.

아래에서 보면 경사가 완만하고 토산으로 보여 쉽게 공략할 수 있게 보이지만 실제는 가파른 화강암으로 둘러싸인 요새였다. 당나라 유인궤가 겁을 먹을 만 했다(662년 백제 부흥운동 당시 이곳을 공격하던 당나라 장수 ‘유인궤’가 성이 견고해 두려워했다고 전해 온다.)

정상에 서니 멀리 남부여의 너른 들판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바로 발아래 사도나루가 있다.

아마 저곳에서 겸익이 배를 타고 인도로 갔을 것이다.

한편으론 백제 멸망의 슬픈 장면을 간직한 포구다.

서해 바다도 보인다. 멀리 굽이굽이 백마강이 흐른다. 최고의 요충지다.

적당한 운동을 하고 나서 그런지, 내려올 때는 몸이 풀리고 개운했다.


‘황산포구’

백제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백마강 나루터 중의 하나다. 건너편 사도나루와 맞닿아 있다. 사도나루에서 15㎞ 정도 가면 부여가 나온다. 황산포구는 이웃하는 강경장터와 더불어 한 때 우리나라 3대 시장 중의 하나로 꼽힐 만큼 번성했던 포구다.

일본과 중국 바다를 횡단하는 큰 배는 이 곳이 선착장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곳을 지나면 암초가 많고 좁아진 강폭에 물살이 세지기 때문이다. 당나라 소정방 함대가 정박한 곳이다. (백마강은 부여 역사지구를 지나는 금강 구간 16㎞를 말한다.)

황산포구가 있는 황산리는 계백장군의 5천여 결사대가 장렬히 싸웠던 ‘황산벌’ 이기도 하다.

이곳은 웅어회가 별미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관광지로 변해 있다.

웅어회는 백제 말기 의자왕이 봄철에 입맛을 돋우기 위해 즐겨 먹었다고 전한다. 그 후 당나라 소정방이 먹고 싶어, 강에 그물을 가득쳐도 잡히지 않아 의어(義魚)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의자왕이 당나라로 잡혀갈 때 “웅웅”하고 슬프게 울었다고 전한다. 그 뒤로 웅어는 유명하게 되었고, 웅어회가 특산물이 되고 식당들이 즐비하게 들어섰다고 한다.


성흥산성과 사랑나무 (옆으로 구부러진 가지와 땅이 ‘하트모양’을 이루고 있음)

‘성흥산성’

성흥산성은 충남 부여군 임천면 가림산(260m)에 위치해 있다. 둘레 1천500m, 높이 3-4m로 산 꼭대기를 중심으로 테두리 형식으로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사적 제4호로 지정돼 있다.

산성에는 남문, 북문, 서문, 보루, 창고, 우물 등의 터가 남아 있다. 동성왕 23년(501)에 쌓은 석성이다. 백제산성 가운데 유일하게 축성연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비(부여)와 직선거리로 10㎞ 남쪽에 위치해 있고, 금강 하류 일대를 관측할 수 있는 요충지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위직인 위사좌평이 이 성을 담당했다고 한다.
이는 이 성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오랜 역사적 성답게 겸익 외에도 많은 영웅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산 정상은 넓다. 우물과 군창터가 남아 있고,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서 있다.
특이하게도 옆으로 구부러진 가지와 땅이 ‘하트모양’을 이루고 있어 ‘사랑나무’라 불리게 되었다. 이곳에서 사랑을 고백하면 이뤄진다는 소문이 퍼져있다. 서동요, 대왕세종, 바람의 화원, 천추태후, 신의 등 각종 사극 촬영지로 이용된 후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고 한다.

 

 


 ‘신라 왕자’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이 있는 중국 불교 4대 聖地 ‘구화산’

(광주매일   2014. 06.19. 20:18)

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중국에 건너가 등신불이 된 ‘신라 왕자’

 

① 구화산의 김교각 스님 등신불 위치도. ②하당마을 전경. ③지장육신보전. ④탑을 빙 둘러 등신불 모양의 자장보살 상이 놓여 있다. 이 탑 안에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이 들어 있는데, 볼 수 없었다. ⑤김교각 스님의 신발

문병채 (주) 국토정보기술단 단장·전남대 지리교육과 겸임교수

 

중국 안휘성 구화산, 중국 4대 불교 성지 중의 하나다. 소설 속에만 있는 줄 알았던 등신불이 존재한다. 등신불이란 가부좌 한 체 열반에 든 육신에 금칠을 한 것이다.

서기 794년 한반도에 온 한 스님의 등신불이 모셔진 이후 불교성지가 된 것이다. 김교각 스님, 그가 신라 왕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구화산(九華山)은 중국 안후이성 츠저우시(池州市) 칭양현(靑陽縣) 하당(荷塘, lijun)마을에 있다. 구화산은 중국 불교의 4대 성지 중 하나로 지장보살의 본산이다. 불교성지답게 구화산을 찾는 사람들도 많다. 가파른 돌계단에서 ‘삼보일배’ 하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구화산은 닌징(남경)에서 영동선을 따라 열차(쾌차·快車)를 타고 동릉(銅陵)에서 하차하면 되는데, 약 4시간40분이 소요된다. 열차에서 내려 주변의 남경, 황산 등지에서 이어지는 장거리버스를 이용하면 구화산까지 갈 수 있다. 황산에서 구화산까지 버스로 약 6시간 정도 소요된다.

구화산(지우화샨)으로 가는 길은 예상 외로 잘 닦여 있었다. 밀려드는 관광객 때문인 것 같다. 올라가는 동안 흰색 건물과 노란색 건물이 많이 보였는데, 흰색은 사람이 사는 집이고, 노란색은 사찰이라고 한다. 해발 1천352m로 아흔아홉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산세가 매우 아름답고 명승고적이 많아 동남 제일의 산으로 불리는 곳이다. 한창 때는 300여개의 사찰이 있었으나, 지금은 93개의 사찰만 남아 있다.

그 중에 국가중요사찰 9개, 성급중요사찰 30개와 불상 등 중요 문화재가 있다.


구화산은 신라 성덕왕의 첫 번째 왕자인 김교각 스님이 719년 이곳에 와 수행을 하면서 사찰을 세우고 99세의 나이로 열반에 든 곳이다.

김교각 스님은 794년 음력 7월 31일 제자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가부좌 한 채 열반에 들었다. “내가 죽거든 화장하지 말고 돌함에 넣었다가 3년이 지나거든 꺼내, 썩지 않았거든 내 몸에 금칠을 하여라.” 스님이 열반에 들자 구화산엔 기이한 일들이 벌어졌다고 한다. 바위가 떨어져 산이 울리는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종을 쳐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제자들이 3년 후 함을 열었을 때 썩지 않고 열반에 든 모습 그대로 남아 있고 시신을 들자 뼈마디에서 금쇠소리가 났다. 제자들은 스님의 육신에 금칠을 해 석함에 모시고 그 위에 탑을 세워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후 구화산은 여러 스님들의 등신불이 이어져 등신불의 성지이자 지장신앙의 본산이 되었다.

이미 살아 생전에 그의 높은 도행으로 말미암아 김지장왕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죽은 후에 더욱 그러한 신앙이 굳어졌다. 그 후 지방보살로 추앙되었다.

김교각이 구화산에서 수도하던 시절 당대에 시인이었던 이태백이 구화진에서 서당을 열며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태백은 김교각을 만났고 그의 수행에 감탄하여 그를 기리는 시를 남겼다. “보살의 자비로운 힘 /끝없는 고통에서 구하나니 /하해와 같은 그 공덕 /세세손손 빛나리로다.”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이 모셔져 있는 육신보전에 다가가자 가벼운 흥분과 함께 떨림 현상이 찾아왔다.

단순히 중국 전통의 풍광 때문만은 아니었다. 떨림은 사찰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오늘날에도 옛 모습을 거의 유지하고 있었다.

중국 대륙에서 만나는 신라인의 흔적! 그 낯섦은 강렬했다. 그러나 더욱 낯선 것은 이 사찰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였다.

지금으로부터 1200여년 전, 바로 이 공간을 중심으로 한 신라인의 고뇌에 찬 수행이 있었던 곳이다.



‘김교각 스님’ 그는 누구일까

김교각과 동시대를 산 ‘비관경’이라는 사람이 쓴 구화산 ‘화성사기’에 ”지장이라 불리는 김교각은 김씨 성을 가진 신라왕자”라고 적고 있다.

또한 구화산 아래 위치한 노전오촌, 오씨 일가가 긴 역사를 이어온 마을이 있다. 구화산 입산 전 김교각 스님이 다년 간 곳으로, 이곳 오씨 선조를 기리는 사당에 김교각에 대한 기록과 함께 남아있다.

비석에는 김교각이 신라인이라고 쓰여 있으며, 김교각이 직접 쓴 시도 전해진데, 그는 시에서 “나는 본디 신라의 왕자로 수행길에 오용지를 만났으며…”하고 읊은 것이 전해 오고 있다.

당시 신라에서 당나라로 유학 간 승려만 해도 200여명이 넘었다. 일반 유학생들까지 합치면 수 백명이 넘을 것이다. 이들은 중국의 언어, 문학, 고나습 등 여러 분야를 배웠고 한국과 중국의 교류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왕자의 신분으로 유학길에 올라 보살의 지위에 오른 김교각 스님은 누구일까?
화성사기에 따르면 김교각은 696년 생이다. KBS는 역사스페셜에서 김교각이 성덕왕의 다섯 명의 아들 중 장남(김수충)이라고 추측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며, 성덕왕 13년(715) 김수충이 당나라로 유학간 이듬해 김수충의 동생인 중경이 태자 책봉 되었고, 어머니인 성덕왕이 폐출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다음부터는 김수충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역사 기록을 들고 있다.

김수충이 태자 책봉에서 밀려난 데다 어머니마저 궁궐에서 쫓겨나 신라 왕실에서 그가 설 자리가 없음을 알고 그가 선택한 것은 정치적인 암투 대신 수행의 길 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등신불이 되었고, 지옥의 마지막 중생까지 구제한다는 ‘지장보살’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김교각은 ‘경주→당항(당진)→영파→남경→무호시(남령현)→양자강 뱃길→구화산’의 경로를 따라 구화산으로 들어 갔을 것으로 보인다.



■ 육신보전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을 모신 ‘육신보전’은 가장 중요한 곳이다.

탐방객들이 가장 오래 머무르는 곳이기도 하다. 편액엔 고기 육(肉)자 대신에 달(月)로 표기됐다. 스님에 대한 존업에 대한 표현이란다

가이드에 의하면, 등신불이란 표현은 정확한 표현은 아니고, 등신불이 맞는 표현이라 한다.
육신보전 건물이 독특하게 지어져 있다.

이층 건물인데, 건물 안에 천장과 맞닿아 있는 7층 석탑이 있고, 7층 석탑 안에 3층 목탑, 그 안에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이 모셔져 있다.

문이 잠겨있어 등신불을 직접적으로 참배하진 못했다. 대신 탑 주변에 등신불과 같은 모습의 지장보살상이 들러져 있어, 이 탑을 돌면서 탑돌이를 했다.


■ 화성사

김교각 스님이 세운 구화산 최초의 사찰 화성사로 향했다. 구화산 최초의 사찰인 화성사(化城寺), 김교각이 세웠다고 전해 오는 절이다.

이곳은 현재 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박물관에는 스님의 일대기를 그린 그림이 사방으로 둘러져 있다.

김교각 스님이 신라에서 당으로 건너올 때 데리고 왔다는 ‘흰 삽살개’의 형상도 만들어져 있다.
김교각 스님은 중국에 올 때 한국에서 흰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오셨다고 한다. 볍씨와 차씨도 가지고 왔다고 한다.
김교각 스님의 유품으로는 유일하게 신발이 전시되어 있다. 40㎝에 이르는 엄청 커 보이는 짚신이다.

실제 기록에 의하면, 7척의 키에 장정 10명을 상대할 만큼 장사였다고 한다.
이 곳 외에도 고배경대(古拜經臺)가 있다. 이 곳은 김교각 스님이 고행을 하였던 곳으로 교각 스님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는 곳이다.

 

 

 700년 전 또 하나의 고려, 중국의 ‘완평현’

(광주매일  2014. 07.03. 19:40)

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해양 실크로드의 중심지 ‘베이징’

 

① 대도성이 있었던 ‘완평현의 거리’ 모습. ② 현재 사용되고 있는 주소(대고력장 78번지)에서 ‘고려촌’이었음을 알 수 있다. ③ 고려인이 완평현 지수촌에 불당을 창건했다는 기록. ④ 당시 고려인들이 들어 온 통로 ‘통조우’.

 

중국 베이징(북경)은 원·명·청시대에 이르기까지 육로 뿐만아니라 해로 실크로드의 최대 중심지였다. 당시에는 한반도 고려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현재 중국 북경에서 서쪽으로 15㎞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있는 ‘완평현’. 이곳은 700년 전 원나라 시대에 형성된 또 하나의 ‘고려(高麗)’였다. 그렇다면 이 ‘완평현’은 어떤 곳 인가? 이를 직접 보기 위해 지난 6월12일 그곳에 다녀왔다. 마침 칭화대 연수프로그램에 참여 중이어서 짬을 낼 수 있었다.


‘완평현’은 어떤 곳 이었는가? 대도는 원나라 수도였다. 즉 대도성(大都城)이 있었던 곳이다. 원나라 시대의 대도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을 뿐만아니라, 세계 각국과 교역이 이뤄지는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세계 각국에서 들어오는 각종 문물로 넘쳐났으며, 각국의 사절단과 상인들이 끊임없이 들어오는 다국적 도시였다.

이러한 명성은 그 후에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이 곳에서 동쪽으로 15㎞ 정도 떨어진 현재의 자금성((紫禁城)이 세워지고, 수도가 그곳으로 옮겨지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천안문 형성과 함께 역사 속에서 사라졌으나 이민족들의 생활은 한동안 그대로 이어져 갔다.

아직도 원나라 당시 축조했던 성곽(城郭) 흔적이 남아있다. 성곽 주변의 구시가지에는 오랜 역사의 흔적으로 느낄 만큼 고풍스러운 주택들과 도로 모습이 즐비해 있어 지금도 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고 있다.

당시 완평현에는 고려인들이 매우 많았다. 현재도 이곳에는 당시 고려인들이 모여 살았던 집단거주 흔적이 남아있다. 집단거주지는 고려와 정치적으로 가까웠던 원나라 시대에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현장기록물에 집집마다 대문 위에 붙어있는 마을 이름의 흔적이 그것이다. 원래는 고려장촌(高麗匠村) 이었으나, 명나라 때 고력장(高力匠村)으로 개명돼 현재는 고력장으로 명패가 붙어 있다.

“이 지역을 뭐라고 부르나요?” “고리장촌입니다”. “예전에는 이곳을 뭐라고 불렀나요?” “고려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이 지역을 언제부터 고려장이라 했습니까?” “정확한 유래는 모르지만, 지금도 고려장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마을이 처음 형성될 때, 아마 많은 고려인이 이곳에 거주했던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중국에서 마을명칭은 보통 어떤 종족이 많이 거주하고 또 어떤 성을 가진 사람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원나라 때 고려인들이 집단적으로 살았던 고려인촌이 이곳임에 틀림없다.

고려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문헌서원이 있다. 고려 말 대문장가 이곡과 이색의 위패를 모시는 서원이다.

얼마 전 방영된 모 방송국의 역사스페셜에서 이곡이 원나라의 관직생활을 할 때 남겨놓았던 목판 중 완평현 고려촌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발견됐다는 내용이 소개됐다. 불당을 창건했다는 것이다. 절(사찰)은 고려인들의 정신적 안식처이자 구심체 역할을 하던 곳이다. 무슨 이유로 이 곳에 절을 세우고 고려촌을 만들었을까?

드라마에서는 당시 원나라와 고려는 통혼관계고, 혼인할 때 많은 고려인들이 국왕을 따라 이곳으로 와 오랫동안 머무를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상당히 많은 고려인 2-3대가 살게 되었다고 했다. 최소한 원 간섭기인 70여년 동안은 그랬다.

원 간섭기인 70여년간 이곳에는 고려인촌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얼마 전 박 교수에 의해 알려진 우리나라 최초의 이슬람교도인 ‘라마단’도 이 때의 고려인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대도로(大都路) 완평현(宛平縣) 청현관(靑玄關)’ 사람으로, 원 황제에 의해 능력을 인정받아 현재 중국과 베트남 경계 지역의 장족자치구에 속하는 ‘광서도(廣西道) 용주(容州) 육천현(陸川縣)’이란 변방의 ‘다루가치(達魯花赤)’에 임명돼 벼슬을 지내다, 현재 광조우 이슬람 성지(淸眞先賢古墓)에 묻혀있다는 사실이 그의 비석에서 발견돼 알려졌다.

그렇다면, 완평현에 고려인들이 어떤 경로로 들어왔을까? 당시 황해로부터 들어오는 관문에 해당된 곳이 ‘통저우(通州)’였다.

통저우는 중국 대운하(항조우-베이징, 2천700㎞) 뿐만아니라 백강을 통해 황해바다로 이어지는 대도성 제1의 관문이었던 것이다.

현재 베이징의 동쪽 40㎞ 지점에 위치해 있다. 퉁저우에 있는 장자완은 원·명·청시대에 이르는 동안 관문역할을 수행했던 물류집결지이자 교통의 최고요지였다. 동으로는 ‘백하(白河)-발해-황해’를 통해 고려와 일본으로 바닷길이 연결되고, 남으로는 남중국해로 연결되어 있어 대도성으로 오는 모든 물자들은 이곳으로 운반되어 내륙운하로 전달됐다.

원의 대도(大都)가 건설될 때도, 후에 명의 북경(北京)이 건설될 때도 필요했던 석재와 목재, 그리고 남방물자들이 모두 이곳을 통해서 오게 되었다. 당시에 이처럼 좋은 지리적 위치의 인문환경 탓에 장자완 마을은 독특한 문화적 분위기를 지니게 되었다. 소설 홍루몽 등에서도 이곳의 분위기를 차용하기도 했다.

장자완 마을에는 그 세월만큼이나 많은 문화재가 있다. 요나라, 명나라 시대의 통운교(通運橋)와 강변에 솟아 있는 옛 성벽(古城), 600년 세월의 노거수, 대운하 물길유적, 조운거석(漕運巨石), 천근석근(千斤石權), 창고건물(루미창, 난신창, 베이신창) 등 아직도 그 때의 흔적이 남아있다.

얼마 전 이들 문화재를 ‘조운문화주제공원(通州運河公園)’으로 조성해 넓은 강변 생태공간으로 꾸며 놨다(총 면적 368만㎢에 달하는 현재 북경 동쪽에 가장 큰 도심공원).

그리고 복원된 조운부두(漕運碼頭, 차오윈마토우)에서는 얼마 전 TV드라마 ‘조운부두’의 촬영장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당시 통저우에는 세계 각국의 선박들이 정박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근접한 거리에 있던 고려 선박들이 당연이 수적으로 많았다. 특히, 원나라 시대에는 고려와 정치적으로 가까웠던 관계로 고려 선박의 왕래가 빈번했다.

원나라 이래로 많은 고려인들이 이곳에 밀집해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고려의 문화를 씨 뿌리며 살았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곳 완평현은 또 하나의 고려였던 것이다.

때문에 이곳을 방문할 때면, 곳곳에서 고려인의 채취를 느낄 수있다. 한편으로는 고려와 관련된 유적이 대량으로 묻혀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돌아오는 길에 차창 너머로 보이는 ‘항일투쟁기념관’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이곳에 건립돼 있는 이유가 예사롭지 않게 여겨졌다. 항일에 대한 우리 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 아닐까!

한·중 합작으로, 이곳에 널려 있을 고려인의 흔적을 찾아 고려인촌을 복원해 민족적 자긍심을 심고, 중국정부는 관광 수익을 얻는 공조체계를 갖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고려인 이슬람교 묘비 탁본

우리나라 최초의 이슬람교도인 ‘라마단’

14세기 한 고려인이 이슬람교에 귀의했던 사실을 보여주는 묘비가 발굴됐다.

순천향대 박현규 교수(한중문화교류사)는 지난 2002년 12월 중국 광저우시 해방북로(解放北路) 계화강(桂花崗)의 이슬람교도 묘역인 청진선현고묘(淸眞先賢古墓) 부근에서 ‘라마단’(剌馬丹)이라는 이름의 고려인 이슬람교도 묘비를 찾아냈다고 2003년 8월29일 밝혔다. 묘비 원본은 현재 광저우시에 위치한 이슬람사원 회성사(懷聖寺)에 보관돼 있으며 광저우박물관에는 복제품이 전시돼 있다. 이 라마단 묘비석은 높이 62.0㎝, 폭 42.0㎝, 두께 6.2㎝로 정면에는 이슬람 경전인 ‘코란’ 제2장 255절이 아랍어로 크게 새겨져 있다.

비석 우측면에서는 ‘대도로(大都路) 완평현(宛平縣) 청현관(靑玄關) 주인 라마단(刺馬丹)은 고려 사람이다. 나이는 38세로 지금 광서도(廣潟) 용주(容州) 육천현(陸川縣) 다루가치(達魯花赤)에 임명되었다’는 글귀가 확인됐다.

비문을 분석한 박 교수는 “고려 출신 ‘라마단’은 지정 9년(1349년) 3월23일에 사망해 그 해 8월18일에 광저우 북쪽 계화강에 묻혔다”며 “그가 다루가치가 된 것으로 보아 원에서 상당한 배경을 지닌 고려 유력 집안 출신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또 “이 자료는 고려인이 이슬람교도가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며 “기록상으로는 라마단이 한민족 최초의 이슬람 신도라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중국역사학계는 이 묘비가 중국과 이슬람의 해양실크로드 교류를 직접적으로 증명해주는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700년 전 중국 광저우서 글로벌人으로 살다 간 고려 사람 ‘라마단’
(광주매일 : 2014. 07.31. 19:09)

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중국 광저우 ‘라마단 비(碑)’

 

① 고려인 라마단 예상 이동 경로. ②고려인이 지수촌에 불당을 창건했다는 기록. ③대도성이 있었던 ‘완평현의 거리’ 모습. ④광저우에 있는 이슬람 묘역.

 

고대 해양 실크로드의 기착지 광저우. 얼마 전 이곳에서 고려인의 묘비가 발견되었다.
도시 확장공사를 하다 우연한 발굴이었다. 그 묘비에서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묘비 주인이 고려인이었던 것이다. 이 역사적 사실은 얼마 전 방송에서 역사스페셜로 반영되기도 했다. 그는 당시 중국으로 건너가 지방관으로 임명돼 베트남 국경도시에서 근무하기도 했고, ‘라마단’이란 이름으로 이슬람교를 믿는 신자가 되기도 했다.
최근 그에 대한 행적이 알려지면서 국제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불가사의한 그 삶을 더듬고자 시간을 내 그가 살았던 경로(고려→통주→완평→육천→광주)를 따라 다녀왔다.

700여년 전 한 글로벌 한국인 ‘라마단’ 흔적을 여행하기 위해 먼저 ‘통주’를 찾았다.

당시 통주는 대도성의 관문이었다. 황해를 통해 연결되는 고려와 일본은 물론, 중국 대운하 역시 통주가 종착점이었다. 따라서 당시 통주는 동으로는 고려와 일본으로 바닷길이 연결되고, 남으로는 남중국해로 연결돼 있어 대도성으로 오는 모든 물자들이 일단 이곳에 집적되었다.

완평현, 고려인 ‘라마단’이 거주했던 곳이다.

그의 묘비에 대도로 완평현 청현관 사람으로 기록돼 있다. ‘대도’는 원나라의 수도였다. 명나라가 수도를 북경(자금성)으로 옮기기 전까지 수도였다. 대도성의 흔적은 아직도 남아있었다.

당시 이곳에는 고려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학자에 의하면, 이들 고려인들은 당시 모든 고려의 국왕들은 결혼을 위해서 대도로 건너왔었는데, 국왕을 따라 온 많은 고려인들이 돌아가지 않고 장기간 머물러 있었던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고리장촌’이라 부르는 마을이 남아 있다(명나라 이전에는 고려장이라고 불렀음). 최근에 또 조그마한 ‘목판’ 하나가 발견되어 더욱 역사적 의미를 새겨주고 있다. 이색이 불당을 창건했다는 내용의 목판이 이곡과 이색의 위패를 모시는 서원인 ‘문헌서원’에서 발견된 것이다.

라마단이 완평현에 살았던 시기는 원 간섭기 70년의 막바지 무렵이었다. 이곳에서 살고 있던 중에 육천현 ‘다루가치’로 임명 받았다. 당시 다루가치라는 몽고인이나 색복인만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아, 라마단은 원나라 정부의 신뢰가 두터운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던 것 같다.





라마단이 다루가치로 근무했던 육천현. 지금은 광서장족자치구에 속한 곳이다. 시가지가 전부 새로 개발돼 옛 모습을 찾기는 힘들지만 도시 형태나 주변에 남아 있는 몇몇 건물 흔적에서 오랜 역사성을 찾을 수 있었다.

하천(육강)을 따라 100㎞를 줄 곳 내려가면 베트남 통킹만에 이른다. ‘육천’ 이란 하천을 따라 해상운송이 가능한 곳이다.

베트남과 인접한 국경지대로 전략상으로도 중요한 길목이다. 동남아시아와 길목으로 연결된 길목이다.

원나라 시대에 베트남을 견제하기 위한 이곳은 특별 관리된 중요 지역이었다. 농경지 한가운데, 당나라 토성의 옛 성터가 발견돼 도시의 긴 역사성과 함께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대변해 주고 있다. ‘라마단’은 이곳에서 국경을 지키는 병사들을 시찰하고 감독했을 것이다.





보통 무덤은 망자의 근교지나 연고지에 묻히기 마련인데 왜 광저우에 묻혔을까? 고려인 라마단에게 광저우는 어떤 곳이었을까?

광저우는 당시 해안실크로드의 최대 관문이었다. 도심에는 무슬림이 건설한 ‘회성사’가 있다.

회성사는 중국에 세워진 최초의 모스크로 알려져 있다. 바로 이 회성사 일대가 최대의 국제교류 장터였다고 한다. 당시 회성사 광탑은 광저우로 들어오는 배들의 등대 역할도 겸했다고 한다.

회성사 광탑을 보고 무역선이 들어오면 이 곳은 ‘국제박람회장’으로 바뀌었다. 이슬람 상인들이 가져 온 진귀한 물건들을 보려는 사람들이 끝없이 몰려들었고 팔려나갔다.

많은 배들이 모두 이곳으로 모여 들었고, 분명히 고려의 배도 있었을 것이다.

고려 상인들도 이곳에서 무역을 했고, 관직에 있었던 라마단은 이곳에서 고려 상인들을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의 무역선들이 싣고 온 고향이야기를 통해서 회포를 풀었을 것이다. 이웃 근처에 있는 육천현에서 관직생활을 하던 중 고려인과 교류하기 위해 광저우를 오가다가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제인으로 살았던 라마단.

그는 인류문명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고려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에 비문에 고려인으로 기록해 놓았을 것이다.

700여년 전 한 고려인의 흔적의 채취가 느껴지는 유적을 만날 때마다 또 하나의 고려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역사 이래로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해양실크로드 길목 곳곳에 머무르고 혹은 터전으로 살면서 우리 미족의 문화를 씨 뿌려 놓았을 것 같았다.

여행 중에 눈에 들어 온 모든 옛 것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라마단’ 비문


한중문화교류사를 전공한 박현규 순천향대 교수가 중국 광저우시 해방북로(解放北路) 계화강(桂花崗)의 이슬람교도 묘역인 청진선현고묘(淸眞先賢古墓) 부근에서 ‘라마단’(剌馬丹, 1312-1349)이라는 이름의 고려인 이슬람교도 묘비를 찾아냈다.

묘비 원본은 현재 광저우시에 위치한 이슬람사원 회성사(懷聖寺)에 보관돼 있으며, 광저우박물관에는 복제품이 전시돼 있다.

이 라마단 묘비석은 높이 62.0㎝, 폭 42.0㎝이고, 두께는 6.2㎝ 정도 크기이다.

이 묘비는 앞면과 좌우측 3면에 글을 새긴 소위 3면 묘비(三面墓碑)로, 정면(앞면)에는 이슬람 경전인 ‘코란’ 구절을 인용한 아랍어로 돼 있고, 좌우측 측면은 순 한문에다가 ‘라마단’의 간략한 행적을 담고 있다.



▲앞면(원문은 아랍어로 전문을 번역함): 모든 사람은 죽는다.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나니, 그분은 살아 계시어 영원하시며 모든 것을 주관 하시도다. 졸음도 잠도 그 분을 엄습하지 못하도다. 천지 모든 것이 그 분 것이니, 그 분 허락 없이 어느 누가 하나님 앞에서 중재할 수 있으랴. 그 분은 그들의 안중과 뒤에 있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그들은 그분에 대해 그분이 허락한 것 외에는 그분의 지식을 아무 것도 모르니라. 권자가 천지 위에 펼쳐져 있어 그것을 보호하는데 피곤하지 아니하시니, 그 분은 가장 위에 계시며 장엄하시노라(이상은 ‘꾸란’ 제2장 255절에서 인용한 것임). 하나님의 사자가 일찍이 말하기를 ‘타향에서 죽은 자는 이미 순교자가 되었다’고 했으니, 이 묘는 알라웃딘의 자식 라마단이 죽어 귀속한 곳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해 주고 자비를 구하여…(마멸 등으로 읽을 수없는 부분). 할렙을 여행한 아르사…(마멸 등으로 읽을 수없는 부분)…가 하나님 축복 받은 751년 7월 일에 쓴다.

▲우측 명문(한문 번역): 대도로(大都路) 완평현(宛平縣) 청현관(靑玄關) 주인인 라마단(刺馬丹)은 고려 사람이다. 나이 38세이고 지금 광서도(廣西道) 용주(容州) 육천현(陸川縣) 다루가치(達魯花赤)에 임명되었다.

▲좌측 명문(한문 번역): 지정 9년(1349) 3월23일에 몰하다. 8월18일에 광조우 성북(城北) 유화교(流花橋) 계화강(桂花崗)에 묻고, 비석을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