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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산업 투자활성화 대책]영종·제주 4개 카지노 전폭 지원 (경향신문 2014-08-12 21:55:07)

[서비스산업 투자활성화 대책]영종·제주 4개 카지노 전폭 지원

ㆍ“900년 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서울… 개경(개성)~남경(서울)의 두 길서 찾다”

 

1. 서울은 언제, 어떻게 시작됐을까? 우리는 인구 1000만이 넘는 거대도시 서울을 매일 보며 살고 있지만 그 시·공간적 출발점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강북은 600년의 연륜을 자랑하는 역사도시이고, 강남은 전 세계에 ‘강남 스타일’로 소개된 지역이지만 전체로서의 서울의 정체성은 아직 불분명하다. 과거와 현재가 명확하지 않다 보니 서울의 미래상 역시 분명하게 그릴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서울이 도시로서 모습을 갖추고 역사 무대에 등장하던 시점의 모습과 그 주변 상황을 살피는 것은 오늘과 내일 서울에 살거나 서울을 찾는 사람들에게 흥미진진한 사고연습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서울의 원형(prototype)을 찾는 시·공간적 여행에 나서보자.

일제강점기인 1929년과 그로부터 꼭 80년 뒤인 2009년 똑같은 장소인 서대문 안산 자락의 경기대 뒷산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찍은 서울의 전경. 사진 왼쪽에 봉우리는 보이지 않은 채 능선만 흘러내리는 산이 인왕산이며, 능선 너머 뾰쪽하게 솟은 봉우리가 북악산, 오른쪽에 펑퍼짐하게 앉은 봉우리가 남산이다. 위 사진은 한국 사진의 선구자인 민충식 선생이 찍었으며 아래는 서울역사박물관 최인호 작가가 민 선생의 촬영 장소를 추적해 같은 앵글로 찍은 것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여기를 누르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성계 조선 1394년 ‘한양 천도’ ‘한성’ 개명 후 1945년 ‘서울’로
분단이 개성과 서울 갈라놔… 문헌·답사 통해 ‘옛길’ 추정
서울의 시각·심리 경계 재발견… 고양·파주 등 공존 방법 찾아야

2. 우리는 보통 서울의 나이를 600년 남짓으로 계산한다. 1392년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그로부터 2년 뒤 개경(지금의 개성)에서 ‘한양(漢陽)’으로 수도를 옮긴 데에 따른 것이다. 이때 도시의 이름은 ‘한성(漢城)’으로 바뀌었고, 그것이 다시 1945년 해방 직후 ‘서울’이 되었다. 이성계의 천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 존재하는 모든 왕조 또는 정권에서 서울은 수도의 역할을 잃은 적이 없으니 지구상에 현존하는 수도들 중에서 가장 긴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도시 중 하나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계산법이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이성계는 한양의 허허벌판에 한성이라는 새 도시를 건설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서울 구도심 지역 중에서 청계천 북쪽 지역에는 고려시대 후기에 이미 민가가 가득 들어차 있었고, 고려 왕조는 1067년 이 한양부(漢陽府)의 서북쪽 일부를 잘라내 이곳을 남경(南京)으로 삼았다. 전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지방 3대 거점인 삼경(三京)으로 평양(서경), 개성(중경)과 함께 한양을 꼽은 것이었다.

한 도시가 이렇게 지역거점이 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행궁이 건설됐다. 그것은 왕이 빈번히 행차할 때 머물 임시궁궐로서 그 지역의 중심지였다. 그 남경 행궁이 지금 경복궁의 서북쪽 모퉁이에 1104년 완공됐다.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안쪽에 있는 작은 언덕 자리였다. 궁궐 내에 있던 누각의 숫자나 이름은 확실히 알 수 없다. 고려사에 나타난 내용을 참조하자면 남명문(南明門), 연흥전(延興殿), 천수전(天壽殿), 북녕문(北寧門) 등이 있었고 누각(樓閣)과 원림(園林)은 현재 청와대 자리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양부의 객사와 향교는 지명으로 보아 현재 운현궁과 교동초등학교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 한양부의 관아였던 치소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한양부의 중심 영역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동으로는 현 동대문 자리가 경계이며 서쪽으로는 삼청동에서 내려오는 대봉의 제일 서쪽 줄기가 경계로 보인다. 남북으로는 명확하게 면악(북악산)과 목멱산(남산)이 각각 남과 북의 경계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의 지역거점과 조선의 수도는 당연히 규모가 같을 리 없었다. 궁궐터가 넓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한성은 고려의 남경과 한양부의 모든 영역을 포괄했다. 지금 우리가 4대문 안 지역이라고 부르는 영역은 이때 확정된 것이다.

이렇게 서울의 원형이 형성된 연대를 300년 정도 끌어올리는 이유는 분명하다. 북악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남산을 주산과 마주 보는 안산(案山)으로 하는 서울의 지리적 관념이 바로 이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북과 남에서는 북악산과 남산이 마주 보고, 동과 서에서는 낙산과 인왕산이 마주 보는 조선 한성의 영역은 고려의 남경과 한양부를 합친 영역과 거의 동일했다. 그리고 그것은 조선시대 500년 내내 전혀 변함이 없었다.


3. 한번 생각해 보자. 고려 왕조가 한양부에 새로운 지역 거점으로서 남경을 설치했다면 수도인 개경에서부터 남경으로 가는 길도 새로 조성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기존의 소로가 확장됐을 수도 있겠다.

개경~남경의 옛길을 우리가 쉽게 머리에 떠올릴 수 없는 중요한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분단이 개성과 서울을 갈라놓아 지금은 그 길을 온전히 통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옛 문헌과 가능한 지역의 답사를 통해 900년 전 사람들이 다니던 개경~남경의 옛길을 추정할 수 있다. 크게 두 갈래 길이 있었다. 만약 고려 왕조의 관리가 남경에 볼일이 있어서 갈 경우, 그는 개경 바로 동쪽의 청교(靑郊)역을 지나 장단의 통파(通坡·지금의 동파)역에서 임진강을 건너 파주로 갔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두 길이 동일하다.

파주에서 용무가 바쁜 사람은 바로 남행해 혜음령(惠陰嶺)을 넘은 뒤 고양의 벽지(碧池·지금의 벽제)역과 서울 녹번동의 영서(迎曙)역을 거쳐 홍제동 유진상가 사거리에서 동쪽의 물길을 따라 세검정으로 가서 자하문 고개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남경으로 들어섰을 것이다. 지금의 청운동 지역이다. 이것은 지름길이었고, 그만큼 험한 고개를 꽤 여러 번 넘어야 했다. 말을 빨리 달리면 하루에도 올 수 있는 거리였다.

일반적으로는 보다 평탄한 길을 택했다. 걸어서 사나흘 정도 걸렸을 것이다. 파주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양주의 녹양(綠楊)역과 노원(蘆原)역을 지난 뒤 지금 동대문 밖의 남경역까지 언덕을 별로 넘지 않고 거의 평지로 올 수 있었다. 남경역에서 하룻밤 쉬며 목욕하고 의관도 정제하고 필요한 서류도 훑어본 뒤 아침 일찍 일어나 청계천을 따라 남경 행궁으로 한달음에 들어갔을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지금의 종로가 없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두 길 중의 전자는 북쪽에서 바로 서울로 들어오는 길이고, 후자는 동쪽에서 들어오는 길이다. 그렇다면 남부 지방에서 서울로 오는 사람들은 어떤 루트로 왔을까? 언제 길이 형성됐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조선 중기 이후 과천의 남태령(南泰嶺)을 넘은 뒤 사평원(沙平院·지금의 한강진)에서 한강을 건너는 노선이 확립됐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고려 또는 조선시대에 서울로 가는 사람들이 자기 눈으로 서울을 직접 볼 수 있는 지점이 북쪽에서는 혜음령, 남쪽에서는 남태령, 동쪽에서는 남경역이었다는 사실이다. 혜음령은 지금의 고양~파주, 남태령은 과천~서울 사당동 각각의 경계이며, 남경역은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의 대광고등학교가 있는 언덕 위의 자리다. 지금도 혜음령과 남태령의 고갯마루에 서면 북한산이 보인다. ‘아, 서울에 다 왔구나’ 하는 심리적 안도감이 드는 위치가 바로 여기다. 그로부터 한성부로 향하면서 망객현, 여현, 박석현, 녹번현 등의 고개를 오를 때마다 웅장한 삼각산이 여행객의 시야에 우뚝 들어선다.

‘혜음령’은 고려시대 3경 제도가 성립되자 개경과 남경을 가르는 경계가 되면서 이 고개에 위계를 높여 ‘령’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이 아닐까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 ‘개경과 남경’ 사이의 여러 장소에는 몇 가지 복합적인 요소가 게재되어 상징이 더욱 강화되었다. 왕사나 국사가 주석하고 있던 회암사로 왕래하는 길목, 삼각산 등허리에 산재한 절에 왕들이 참배하러 다니는 길목, 남경으로 행행(行幸)하는 길목, 임금의 명을 받들어 동~남으로 가는 관리들의 길목을 다니면서 높은 고갯마루에 올라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자고 시각적으로 경물을 경험하면서 느끼는 시감이나 감정 등에 의하여 특정한 장소에 의미가 부여되고 상징화되었던 것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면서 불교에서 유교로 국가의 통치이념이 바뀌었고, 국가의 중심인 수도 위치도 개경에서 한성부로 바뀌었다. 이것은 엄청나게 큰 충격을 동반한 변화였으나 국토의 관리 체제나 기반 시설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도로체계나 그에 따른 역원의 위치들 역시 크게 변하지 않았다. 크게 변한 것이라면 모든 군현 읍치 가까이에 있던 사찰에는 향교가 대신 들어섰고 기타 사찰들은 산속으로 이동한 점일 것이다. 한양부는 국가의 수도가 되면서 한성부로 명칭이 바뀌었고 임금이 거주하는 궁궐과 관아 등 공공 건축물들이 많이 들어섰다.

관료들을 도성 안에 정착시켜 정치를 해야 했으므로 기존에 살고 있던 백성들은 견주(見州)로 이주해야만 했다. 한성부에 살고 있는 지식인, 유가(儒家)들의 수가 크게 증가했으나 이들의 주택이 들어선 민가 주변의 물길과 기본도로는 거의 변화 없이 500년 동안 존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성 밖으로 몇몇 중요 시설, 단묘, 교량, 목장 등이 들어선 것을 제외하면 고려의 흔적은 거의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도성 밖 산속이나 한강 물가에 자리 잡았던 사찰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사라져갔다.

최종현 통의도시연구소장이 지난달 26일 서울 서초구민회관에서 열린 석학인문강좌 특별강연에서 ‘서울로 가는 길’을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4. 우리는 이렇게 해서 서울이 안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꽤나 확장했다. 여기서 확장이라고 한 것은 우리가 평소 상식으로 알고 있는 서울의 출발점, 즉 1394년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성을 새 수도로 정했을 때의 상황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시간적으로는 거기서 30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 원점을 찾아보았고, 공간적으로는 분단으로 인해 우리가 잊고 있는 옛길을 더듬어 서울의 시각적·심리적 경계를 재발견한 것이다.

혹시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런 시도는 무조건 오래된 것이면 좋다는 의고(擬古) 취향의 소산이 아니다. 억지로 서울의 기원을 올려 잡자면 BC 18년 백제가 하남위례성에 도읍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강 남쪽은, 비록 지금은 서울의 행정영역 안에 포함될지언정, 본래 고려의 남경 및 한양과 조선의 한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곳일뿐더러 백제가 475년 고구려에 밀려 수도를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옮긴 이후 1963년 서울에 편입될 때까지 거의 1500년 동안 빈 땅의 농경지로 버려져 있던 곳이었다. 여기서 서울의 기원을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공간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서울의 북쪽으로 고양의 혜음령까지가 서울의 영역일 수 있다는 말을 서울의 행정영역을 확장하자는 뜻으로 새겼다면 그건 큰 오해다. 오히려 서울 북쪽의 고양, 파주, 양주 등의 지역이 서울과의 이런 관련성 속에서 수평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900년 전부터 존속했던 개경~남경의 두 루트를 온전히 회복하는 날 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서울의 과거가 미래를 향해 던지는 시사점의 하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