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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작품 그 도시] 만화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도쿄 (조선일보 2014.04.05 03:01)

[그 작품 그 도시] 만화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도쿄

무엇 하나 실패하지 않은 새로운 하루, 내일

 

우울할 때 일본 만화가 마스다 미리의 작품을 읽는다. 딱히 잘 그렸다고도, 대단하다고도 생각되지 않는 그림과 글. 아마도 '보통의 존재'란 말을 떠올릴 때 나는 그녀의 만화를 떠올리는 것 같다. 말하자면 온종일 마감 때문에 삼각김밥과 컵라면으로 점심과 저녁을 때운 날, 자기 전 따뜻하게 데운 우유 한잔이 마시고 싶다거나, 냉장고에서 막 꺼낸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마스다 미리의 만화를 읽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녀의 만화에 등장하는 음식에도 눈길이 간다. 양갱과 초콜릿, 카레가락국수나 커틀릿, 초밥과 가락국수. 역시 보통 음식들이다.

나만의 솔(soul) 푸드가 있다. 갓 지은 밥에 달걀 노른자와 간장, 참기름을 넣어 비벼 먹는 것이다. 그 위에 깨를 뿌리기도 하지만 보통은 뿌리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겨울엔 흰 쌀밥에 뜨거운 보리차를 부어 김을 얹어 먹는 것. 여름엔 차가운 보리차를 부어 꽈리고추를 넣어 볶은 멸치나 시원한 오이지와 함께 먹기도 한다. 입안에서 돌 같은 게 서걱이는 것처럼 입맛이 없을 때 대개 이런 음식을 먹고 나면 기운이 좀 난다. 이런 기억 때문에 영화 '카모메 식당'이나 드라마 '심야 식당'을 좋아하는 건지도 모른다. 거기에 나오는 음식들 역시 주먹밥이거나 고양이밥, 문어 모양으로 볶은 비엔나소시지 같은 가정식 백반이니까 말이다.


	도쿄 밤거리를 사람들이 걷고 있다.
상점 간판이 뿜어내는 빛으로 가득 찬 일본 도쿄 밤거리를 사람들이 걷고 있다. 일본 작가 마스다 미리의 만화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의 주인공인 서점 직원 쓰치다는 우리가 일상에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처럼 평범한 남자다. /블룸버그
봄밤, 마스다 미리의 만화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를 읽었다. 그녀의 히트작이기도 한 '수짱 시리즈'와는 달리 주인공이 남자이며 서점 직원인 '쓰치다'다. '쓰치다'의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면 한국어 동사 '스치다'를 떠올려도 좋겠다. 대부분 스쳐 지나갈 만큼 평범하고 특별하지 않은 보통 남자이기도 하니까.

2000년대 초반 나는 인터넷 서점 직원이었다. 인터넷 서점이라지만 오프라인 매장도 함께 가지고 있던 회사라 가끔 서점에 나가기도 했다. 파주의 물류센터에 파견을 나가 책 포장을 하는 등 배송하는 일에 직접 투입되기도 했다. 그 시절 인터넷 서점 초창기에 겪었던 다양한 에피소드를 작가가 된 이후 첫 번째 단편 소재로 삼았을 정도로 그 시절의 일들은 내게 굉장한 경험이었다.

서점 직원이 하는 일은 어디서나 크게 다르지 않다. 책을 정리하고, 책을 소개하고, 책을 파는 것. 서점 직원 '쓰치다'가 어린이 그림책 코너에 책상을 놓거나 '책 읽어주는 코너'를 만들고 싶어 점장에게 제안하는 모습은 서점 직원 시절, 매주 회의에서 '테마북'을 어떻게 정하고, '오늘의 책'은 어떤 것으로 선정할 것인지 논의하던 것과 비슷하다. 더구나 내가 서점에 다니던 2000년대 초반은 인터넷 서점 규모가 지금처럼 크지 않았다. 그저 감동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무명 출판사 작품이 '오늘의 책'에 걸려 있기도 했다. 지금은 꽤 유명해진 앤서니 보뎅의 '키친 컨피덴셜'은 그 책의 박력에 매혹당한 (당시 '가정 요리' 부문 담당 편집자였던) 내가 그렇게 소개한 책이었다.

서점 직원이 주인공인 소설이나 영화는 언제나 보게 된다. 국어사전을 만드는 남자가 주인공인 미우라 시온의 소설 '배를 엮다'나 서점 직원이 주인공인 '연애시대' 같은 이야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는 것은 내 청춘의 어느 지점의 풍경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쓰치다'와 서점의 여자 동료가 점심을 먹으며 '빨강머리 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같은 거.

"앤이 했던 말에 몇 번이나 위안을 받았어. 내일이 아직 무엇 하나 실패하지 않은 새로운 하루라고 생각하면 기쁘지 않아? 실패할 때마다 베란다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어."

음식에 솔 푸드가 있듯 이야기에도 '솔 스토리'가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나는 주인공 '쓰치다'가 '산타클로스는 정말 있을까' 같은 어린아이들의 질문에 관심을 갖는 장면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1897년 미국의 한 신문사로 온 여덟 살짜리 여자아이의 편지 한 통으로 시작된 이 이야기는 신문 사설에 그 질문에 대한 답장을 실으라는 지시를 받은 '처치'라는 기자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쓴 사설의 원문이 '산타클로스는 있을까요'라는 그림책이 되었기 때문이다.

처치의 사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사랑과 신뢰 그리고 배려와 정성과 산타클로스는 모두 같은 것이라고 말이다. 처치는 아이에게 확실하게 대답한다. 산타클로스는 분명히 있단다.

서점이 사라지는 풍경은 이젠 익숙함을 넘어서 내겐 서글픈 상처다. 한때 헌책방을 돌아다닌 기억이 많은 나조차도 이젠 동네에 새로 들어온 대형 중고 서점에서 책을 산다. 헌책방 안을 부유하던 희미한 먼지 더미, 활자가 삭아가며 내던 특유의 퀴퀴한 냄새들은 이제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누군가에게 유기견처럼 버려진 책들의 무덤에서 되는 것 없던 내 청춘의 한때를 읽던 기억도 아득하다. 물론 이제 내가 추억을 얘기할 만한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 가장 서글프긴 하지만.


	[Why] [그 작품 그 도시] 만화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도쿄
봄밤, 나만의 솔 푸드를 먹으며 주인공 '쓰치다'의 독백을 읽다가 밑줄을 긋는다. "인생이 끝없이 이어진다면 인간은 책 따위 안 읽지 않을까? 아무것도 찾을 필요가 없다. 알 필요가 없다. 언제라도 할 수 있는 것은 언제까지든 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비슷하다. 내가 나의 집으로 계속해서 돌아가는 것은 하룻밤을 자고 다시 나의 인생을 살기 위한 것이 아닐까."

오직 인간만이 자신이 죽는다는 걸 아는 동물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공포를 이기기 위해 인간이 발명해낸 여러 가지 중 유머가 가장 필요한 무엇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나는 여기에 나만의 무엇을 하나 추가하겠다. 한 권의 책. 그리고 비 오는 어느 날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보는 만화책. 사소하지만 보통의 나에겐 필요한 무엇이다. 소풍엔 김밥이 필요한 것처럼, 청춘엔 여드름이, 외국 드라마엔 자막이, 나에겐 네가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마스다 미리의 만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