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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에서 용 나게 한 조선시대 과거제는 왕조 500년 이끈 힘 (서울시문 2014-01-21 21면)

개천에서 용 나게 한 조선시대 과거제는 왕조 500년 이끈 힘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과거, 출세의 사다리’ 4권 완간

 

한영우(76) 서울대 명예교수는 조선시대 과거제도에 대해 “개천에서 용을 낼 수 있는 최고의 기회”라고 주장해 왔다. 조선은 능력을 존중하는 시험제도인 과거로 부단하게 계층의 순환을 이어 갔고, 문벌 독점과 횡포를 견제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500년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한 교수는 그 근거랄 수 있는 ‘과거, 출세의 사다리’(지식산업사)를 최근 완간했다.

▲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4권으로 낸 책은 한 교수가 지난 5년간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만 4615명을 분석하고, 200자 원고지 1만 2000여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원고로 추려 내놓은 역작이다. 1권은 태조~선조, 2권은 광해군부터 영조, 3권은 정조~철종, 4권은 고종 시대를 조명한다.

한 교수는 “통계적 수치를 제시하지 않은 가운데 근거가 박약한 자료를 가지고 양반 특권층이 세습했다고 주장하거나, 최근 전산화된 급제자 명단인 ‘방목’만을 이용해 통계를 제시하면서 조선 사회의 폐쇄성과 경직성을 증명했다”고 꼬집었다.

‘방목’에는 급제자의 이름, 전력, 벼슬, 내외 4대조(직계 3대조와 외조), 성관(본관)이 적혀 있다. 급제자의 일부만 기록한 데다 이마저도 자세히 적은 것이 아니라 자료로서 한계가 크다. 보통 본관에 따라 양반과 중인, 평민을 구분하기도 하지만, 이를 급제자의 출신으로 적용하기에는 위험하다. 고관대작에 올랐다가도 왕대가 바뀌면서 평민으로 전락하기도 하고, 중인 가문에서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경우 스스로를 양반이라고 자처했기 때문이다.

한 교수는 급제자들을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하기 위해 ‘실록’과 ‘족보’, 서얼의 역사를 기록한 ‘규사’, 향리 역사를 담은 ‘연조귀감’,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청구씨보’와 ‘만성대동보’,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낸 ‘전주이씨과거급제자총람’까지 살폈다.

연구 결과 조선 초기만 해도 신분이 낮은 급제자의 비율이 전체의 40~50%에 이르렀다. 16세기 후반 이후부터 양반의 벼슬 세습이 굳어졌지만, 18세기 중반 이후 양반 이외 출신들의 급제 비율이 다시 높아져 정조 53.02%, 순조 54.05%, 헌종 50.98%, 철종 48.19%를 보였다. 고종 대에는 이 비율이 58.61%에 달했다. 양반이라는 특권층이 권력과 부를 세습적으로 독점하고 평민과 노비를 지배했다는 통념을 뒤집는 자료다.

“조선 사회는 폐쇄성과 탄력성, 개방성이 교차하는 이중적인 사회였고, 이는 과거제도로 가능했다”는 한 교수는 “과거제도는 공부만 열심히 하면 정승과 판서에 오를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던졌다”고 평가했다. 노학자의 공력은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옛말이 돼 버린 때에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영조 이후 문과 급제자, 한양 다음 평안도 많아

 (동아일보 2014-01-24 03:00:00)

한영우 교수 완간 ‘과거, 출세의 사다리’서 나타난 과거 급제자 데이터

 


 

조선 시대 1차 과거 시험인 초시(初試)는 8도의 인구 비율에 따라 합격자를 지역별로 배분했다. 하지만 2차시험인 복시(覆試)에서는 지역 구분 없이 실력으로만 급제자를 선발했다. 조선 시대 과거 응시장 풍경을 그린 그림

 

 

조선시대 과거시험에 급제하는 것은 개인으로서 ‘입신(立身)’의 출발점이었다. 임금에게 합격증인 홍패를 받은 급제자는 임금이 축하의 의미로 하사한 종이꽃 어사화(御賜花)를 머리에 꽂고 악대와 광대를 앞세워 시가행진을 벌였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이런 영광을 누린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됐을까.

최근 완간된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국사학·사진)의 ‘과거, 출세의 사다리’(지식산업사) 속에 답이 있다. 과거는 고종 31년(1894년) 갑오경장으로 폐지될 때까지 무려 503년 동안 이어져온 관리 선발제도였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문과(文科)로 급제자는 모두 1만4615명이었다. 매년 평균 29명만이 이런 ‘가문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셈이다.

지역별로는 역시 도성인 한양 출신 합격자가 급제자 3명 중 1명꼴로 가장 많았다. 한양에서 치르는 과거 시험이 많아 지방 출신에게는 원천적으로 불리한 구조였다.

그렇다면 한양 외에 조선 8도에서는 어느 지역이 합격자를 가장 많이 배출했을까. 유림(儒林)의 고향으로 불리는 경상도, 도성인 한양에 가까운 경기 지역이 아니었다. 정답은 바로 평안도. 과거 급제자의 출신지 기록이 남아 있는 영조 이후 합격자 5191명 가운데 829명(16%)을 배출했다. 당시 8도 중 인구가 가장 많았던 경상도를 제친 것은 놀랍다. 이에 대해 한 교수는 “평안도가 중국과의 무역로상에 위치해 부를 축적한 계층이 늘면서 과거를 준비할 여력이 있는 사람이 많아졌고, 경상도를 기반으로 삼은 남인 세력이 조선 후기 몰락한 영향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특이한 것은 평안도 출신 급제자 10명 중 무려 9.5명꼴로 ‘신분이 낮은’ 인물들이었다는 점. 여기서 신분이 낮다는 것은 오늘날 전해지는 족보에 급제자의 이름이나 가계에 대한 기록이 없거나 자기 씨족 중 유일한 급제자인 경우가 해당된다. 또 조선왕조실록에 신분이 ‘미천하다’ ‘비천하다’ ‘서출이다’는 기록이 있거나, 가까운 조상 중 벼슬아치가 없는 몰락 가문 출신도 포함된다.

이런 사정 때문에 평안도 출신은 급제 이후에도 실제 관직을 받는 비율이 8도 급제자 중 가장 낮았고 요직에 진출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한 교수는 “서북민 차별에 항거해 일어난 홍경래의 난도 상대적 박탈감, 즉 경제력도 있고 과거 급제자도 많은데 조정의 주요 직책에서 배제된 것에 대한 불만을 한 원인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전체를 살펴보면 평균 3명 중 1명꼴로 신분이 낮았다. 전체 급제자 가운데 신분이 낮은 급제자의 비율은 건국 초기였던 15세기(태조∼성종)에는 32.9%로 비교적 높았다가 양반들의 기득권이 강해지는 16세기(연산군∼선조)와 17세기 중후반(광해군∼현종)에는 각각 18.7%와 19.8%로 낮아졌다.

반면 조선 후기로 접어드는 숙종∼정조 대에는 37.6%, 순조∼고종 대에는 55.1%로 급증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분 낮은 급제자의 비율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높아져 조선 왕조 전체적으로는 V자 모양을 나타냈다.

한 교수는 “조선 왕조의 500년 넘는 ‘장수’ 비결은 지배 엘리트인 관료를 세습하지 않고 능력 본위의 시험제도인 과거 제도를 통해 하층사회에서 끊임없이 충원했다는 데 있다”며 “기득권 세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탄력적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지성이 답한다]조선시대 과거 응시엔 빈부귀천 차등이 없었다

(동아일보 2013-01-30 03:00:00)

 

《 Q: 최근 출간된 연구서 ‘과거, 출세의 사다리’는 조선시대에 신분이 낮은 사람들도 과거시험에 대거 합격해 조선이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였음을 통계로 보여주었다(본보 23일자 A21면 참조). 다른 전근대 국가들과 비교하면 조선사회의 신분적 개방성은 어느 정도 수준이었나? 또 당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신분이 높은 사람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공부에 몰두하기 어려운 여건이었을 텐데 어떻게 과거에 합격했을까? 》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서울대 명예교수

 

근대 이전에 정치엘리트인 관원을 과거시험을 통해 선발한 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교 국가뿐이었다. 여기에 해당하는 나라는 한국 중국 베트남뿐이다. 유교 국가가 아닌 일본에는 과거제도가 없었다. 세 나라 가운데 베트남은 중국이나 한국처럼 지속적으로 과거가 시행되지 못했다,

유교 국가에서 과거제도를 실시한 데는 폭력적인 무인정치를 공익과 도덕을 지향하는 문인정치로 바꾸려는 목적이 담겼다. 그래서 시험에서 평가하는 내용도 정치의 공익과 도덕을 강조하는 유교 경전의 정신이 중심을 이뤘다. 물론 직업적 전문성을 요구하는 기술직 관원, 예를 들면 의관 역관 천문관 화원 등의 시험은 전문 지식이나 기술을 테스트했다.

미국에서 활발하게 연구된 중국의 과거제도는 평민의 신분 상승을 활발히 촉진시킨 것으로 밝혀졌다. 일찍이 사회학자 막스 베버도 과거제도에 주목하여 평민이 문인(literati)으로 상승하고 문인이 관원으로 상승하는 사회임을 인정했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통계적 연구가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과거제도에 대한 연구는 이상하게도 신분사회의 폐쇄성을 주장하는 시각에서 진행되어 왔다. 인구가 많은 대성(大姓)에서 급제자가 많이 배출된 사실을 가지고 소수의 성관(姓貫·성씨와 본관)이 관직을 독점한 것처럼 오해했고, 시험 준비에 필요한 경제력을 지나치게 의식한 것이다. 특히 응시자의 경제력에 대한 관심은 오늘날의 엄청난 교육비를 염두에 두고 바라본 것이다. 옛날과 지금은 사정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응시자는 대부분 향교를 비롯한 학교에서 일정한 교육을 받은 학생이었지만, 학생들은 농번기에 방학하여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 교육을 받아 농사와 글공부를 병행할 수 있었다. 관립학교는 학비가 없었고, 서원도 학비를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계(契)를 통한 상부상조의 재원은 흔히 있었다.

학업의 성취가 경제력과 비례하는지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시험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인재를 선발할수록 오히려 가난하거나 학력이 없는 사람은 희망을 잃게 될 것이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는 학교를 다니지 않고 독학한 사람도 응시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고, 학력이나 나이에도 전혀 제한을 두지 않았다.

양반만이 부유하여 응시가 가능하고, 평민은 모두 가난하여 응시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증거가 없는 억측이다. 양반이라고 다 부유한 것도 아니고, 평민이라고 모두 가난하지도 않았다. 실제로 급제자들 가운데에는 가난하고 신분이 천하다고 알려진 인물이 무수히 많았고, 장원급제자 중에도 신분이 낮은 자가 적지 않았다.

과거제도를 시행한 한국과 중국은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신분이동이 매우 역동적인 사회였고, 그 전통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서울대 명예교수

 

 

과거급제 36% 상민 출신, 조선은 역동·개방적 사회

(중앙일보 2014.01.23 00:30)

『과거, 출세의 사다리』 4권 완간 한영우 교수

 

 

“조선 왕조 정치 이념의 핵심은 민본(民本)사상이었습니다. 백성들을 중앙 정치무대로 끌어들이려 했는데 과거제도는 그 통로였습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도 얼마든지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어요.”

 한영우(76) 서울대 명예교수가 200자 원고지 1만2000쪽을 4권으로 묶은 역작 『과거, 출세의 사다리』(지식산업사)를 최근 완간했다. 조선 왕조가 통념과 달리 관직이 세습되는 양반 중심의 폐쇄 사회가 아니었다는 주장을 담았다. 서자·중인·평민 등이 신분 상승의 사다리였던 과거 제도를 통해 관직에 진출함으로써 조선사회의 역동성과 개방성이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22일 “조선 왕조의 500년 이상 장수 비밀을 캐다 보니 이 책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됐다”고 밝혔다. 양반·상민의 구별이 철저했던 조선시대를 상상하는 사람들에게 한 교수의 주장은 낯설다. 하지만 그는 “실증적인 자료”라며 신분 낮은 급제자 비율을 제시한다. 조선시대 전체 문과 급제자 1만4615명 중 5221명, 즉 35.7%가 낮은 신분 출신이었다는 내용이다. 한 교수는 족보를 활용했다. 문과 급제자 명단을 수록한 『방목(榜目)』만으로는 출신성분을 명확히 확인할 수 없어서다. 6권짜리 『청구씨보(靑邱氏譜)』, 3권짜리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 등 방대한 족보와 대조작업을 벌였다. 이 작업에만 5년이 걸렸다.

 한 교수는 “조선시대 신분제도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건 40년 전”이라고 소개했다. 이번 책이 40년 관심의 결과물이라는 얘기다. 또 “무거운 족보 책을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씩 서가에서 꺼내보다 보니 오른팔이 마비될 정도였다”고 했다.

 한 교수는 전주이씨·안동권씨 등 199개 성관(姓貫·성씨와 본관)에서 급제자의 90%가 나왔다는 점을 근거로 조선이 불평등 사회였다고 보는 기존 학설도 반박한다. 전주이씨 등의 숫자가 많아 급제자가 많이 나온 것 뿐이지 성씨별 인구 수를 감안하면 공평하다는 얘기다.

한 교수는 “조선을 개방사회로 볼 것이냐 폐쇄사회로 볼 것이냐는 전혀 다른 얘기”라며 “조선에 대한 시각 자체가 달라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책과 삶]조선의 과거제는 하층민에게도 활짝 열린 신분상승 제도

 (경향신문 2014-01-24 22:32:11)

▲ 과거, 출세의 사다리(4권)…한영우 지음 | 지식산업사 | 460쪽 | 각권 3만~3만5000원

 

원로 역사학자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의 <과거, 출세의 사다리>가 이번에 고종 시기를 다룬 4권이 나오면서 완간됐다. 1권 ‘태조-선조대’가 출간된 지 꼬박 1년 만이다. 책은 5년간 과거 급제자 1만5000명을 조사분석한 결과물로 원고지 1만2000장 분량이다.

 

 

한 교수가 밝힌 사실은 조선시대가 통념과 달리 신분이동이 자유로운 사회였다는 점이다. 신분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한 것은 과거 제도로, 이를 통해 신분이 낮은 과거 급제자가 대거 신분상승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조선은 하층사회에서도 인재를 등용하는 개방적 관료 임용제도로 과거를 운영함으로써 명석한 젊은이들이 관료로 등용돼 신분 상승이 가능한 탄력적 사회를 유지하려 했다는 게 책의 골자다. 한마디로 조선시대는 개천에서 용 나는 경우가 흔했다는 의미다. 한 교수는 이 같은 탄력적 사회 지향을 조선왕조가 500년 동안 장수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꼽는다.

신분이 낮은 급제자 비율은 시대에 따라 들쭉날쭉했다. 태종 연간에는 50%였다가 세종대에 33%대로 떨어지며 광해군 시기 가장 낮은 14%대를 기록했다. 이후 17~18세기 중반 신분이 낮은 급제자는 16~37%에 머물렀는데 이때가 문벌 양반이 득세한 시기다. 한 교수는 조선이 폐쇄적 신분사회라는 학계의 통설이 통계적으로 들어맞는 경우는 조선 중엽에 국한된다고 본다. 18세기 이후 신분이 낮은 급제자의 비율은 가파르게 상승한다. 고종 연간에는 그 비율이 58%에 이르며 정점을 찍었다.

고종 연간 급제자 통계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평안도 출신 평민의 약진이다. 이 시기에 평안도는 급제자 269명을 배출했는데 이 중 신분이 낮은 사람이 265명에 달했다. 이는 전국 평균보다 40%가량 많은 수치로 고종의 북진정책 강화가 한몫했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사실이다.

한 교수는 많은 역사학자들이 문과 급제자 명단인 ‘방목’만 분석해 조선이 폐쇄적 신분사회라는 결론을 끌어냈다고 지적한다. ‘방목’만으로는 평안도 평민의 약진을 포착할 수 없을뿐더러 조선시대 신분이 낮은 급제자의 규모를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족보를 비롯해 <실록> <규사> 등 사료는 물론 인터넷을 뒤져가며 종합적으로 접근해 과거 급제자 통계를 한층 보완했다. 또한 급제자 연구를 바탕으로 한 기존 학설들의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그러면서 조선시대를 보는 시야를 넓히고 조선시대가 신분적으로 ‘열린 사회’였다는 점을 밝혔다.

실학자들이 권력 독점을 비판하고 문벌 타파를 부르짖은 이유는 17~18세기에 문벌사회가 고착화됐기 때문인데, 문벌사회는 조선시대의 일반적 경향이 아니라 일종의 경로 이탈 혹은 부작용이라는 게 한 교수의 시각이다. 저자에 따르면 조선은 인재 등용의 문을 활짝 열어 사회통합, 정치통합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과거, 출세의 사다리>는 조선시대 읽기 코드를 ‘폐쇄적 신분사회’에서 ‘사회통합 지향적 사회’로 대체한 노작이다.

 

 

조선시대 과거시험 합격 10대 명문가는?

 (아시아경제 2013.06.16 12:15)

 

최근 '외무고시'. '사법고시', '행정고시' 등 이른바 '3대 고시'가 다양한 경력ㆍ능력ㆍ인성을 갖춘 인재를 뽑기 위해 외교관 후보자 시험ㆍ로스쿨ㆍ5급 공무원 공채 등 다른 제도로 대치되는 등 고위 관료 선출 제도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조선시대의 '과거 급제'와 마찬가지로 요즘 고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그야 말로 '가문의 영광'이다. 그렇다면 실제 조선시대의 과거제도에서 합격의 영광을 가장 많이 경험한 가문은 어디일까?

15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을 검색한 결과 조선시대 600년간 문과ㆍ무과를 통틀어 과거 급제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성씨는 왕권을 잡고 있던 전주 이씨였다. 전주 이씨는 무과에만 1361명의 급제자를 냈고, 문과에서도 871명을 합격시켜 모두 2232명의 합격자를 배출했다.

이어 2위를 차지한 것은 김해 김씨였다. 김해 김씨는 무과에만 1364명을 합격시켜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만 문과에서 131명을 합격시키는데 그쳐 2위를 차지했다.

뒤를 이어 3위는 밀양 박씨다. 역시 모두 1342명이 과거급제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어 경주 김씨가 835명으로 4위, 청주 한씨가 753명으로 5위, 남양 홍씨가 677명으로 6위, 파평 윤씨가 634명으로 7위, 진주 강씨가 595명으로 8위, 안동 권씨가 588명으로 9위, 안동 김씨(신+구)가 541명으로 10위를 각각 차지했다. 이어 경주 이씨가 538명, 광산 김씨가 519명 등으로 뒤를 이었다.

문과ㆍ무과 별로는 문과의 경우 전주이씨 871명, 안동 권씨 368명, 파평 윤씨 347명, 남양 홍씨 334명, 안동 김씨(신+구) 321명, 청주 한씨 290명, 밀양 박씨 267명, 광산 김씨 265명, 연안 이씨 253명, 여흥 민씨 242명 등이 10위 안에 꼽혔다.

무과는 김해 김씨 1364명, 전주 이씨 1361명, 밀양 박씨 1075명, 경주 김씨 624명, 청주 한씨 463명, 진주 강씨 367명, 경주 이씨 360명, 남양 홍씨 343명, 파평 윤씨 287명, 평산 신씨 277명 등이 10위 안에 들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25대의 왕이 재임하는 동안 문과의 경우 804회의 각종 시험이 치러져 급제자 1만5150명이 나왔다. 무과는 798회 급제자 2만6287명이었다.

 

 

“조선시대 제주인들은 어떻게 과거시험을 봤을까”

 (미디어제주 2013.08.29  11:25:37)

제주교육박물관, 「역해 탐라빈흥록」 번역해 출간

 

 
제주교육박물관이 펴낸 '역해 탐라빈흥록'

때로는 가까운 곳에 사는 백성보다 먼 곳에 사는 백성에게 더 쏠리기도 하느니라. 귤 꾸러미가 소반에 올라오면 수고스럽게 재배한 너희들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고, 말 떼가 궁궐 뜰에 오게 되면 분주하게 목축한 너희들의 고초를 상상하게 되느니라”(탐라빈흥록(耽羅賓興錄)서문 중 일부)

탐라빈흥록의 서문은 조선조 때 정조가 제주에 대한 애정을 지니게 하고 있음을 읽게 한다.

정조는 어사 심낙수를 제주에 파견하면서 과거시험 제목을 내려보내 도내 유생들에게 시험을 보도록 했다. 어사 심낙수는 시험이 끝난 뒤 그걸 수합해 서울로 올라갔고, 정조가 그 시험의 순위를 매겼다. 제주에서 먼 길을 가지 않고, 제주에서 치른 과거시험을 정조가 친히 합격자를 뽑은 것이다.

탐라빈흥록은 이처럼 조선시대 과거제도는 물론, 중앙으로부터 소외된 제주인들이 중앙에 진출할 수 있는 과거제도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탐라빈흥록은 당시 제주에서 치러진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의 글을 모아 반포한 것으로, 정조 18년인 1794년에 나왔다.

이처럼 과거시험의 소중한 내용을 담은 탐라빈흥록이 번역돼 나왔다. 제주교육박물관(관장 정순식)탐라빈흥록의 원문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주향교, 고양부삼성사재단에 소장된 용방록, 연방록, 급제선생안등의 내용을 한데 묶어 역해 탐라빈흥록이라는 이름으로 내놓았다. 번역은 전 제주대 사학과 고창석 교수가 맡았다.

또한 역해 탐라빈흥록은 제주판관을 지낸 고경준 관련 문서와 고종 당시 서울에서 생원과에 응시했던 김치용의 관련 문서 등이 부록으로 포함돼 있다.

제주교육박물관은 이 자료집을 관련기관에 배부, 교육자료 및 연구자료로 활용하도록 할 계획이다.

 

 

조선시대 제주의 '수험생'들은?...역해 탐라빈흥록

 (헤드라인제주  2013.08.29  11:33:37)

전 제주대 고창석 교수 원문 역해

 

제주교육박물관(관장 정순식)은 조선시대 제주인들의 과거시험 내용을 기록한 자료와 고문서들을 모아 번역과 해제를 덧붙여 '역해 탐라빈흥록(譯解 耽羅賓興錄) 자료집을 발간했다.

이번 발간된 자료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주향교, 고양부삼성사재단에 소장된 4권의 자료집과 제주교육박물관에 소장된 15점의 고문서, 개인 소장문서 2점 등을 선정해 전 제주대 사학과 고창석 교수가 원문을 역해해 편찬했다.

본 자료집은 1794년(정조 18) 제주에서 시행한 문.무 양과의 급제자 명단과 과문을 모아 규장각에서 간행한 탐라빈흥록, 조선시대 과거시험에 급제한 제주 사람들의 명단이 들어있는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인 용방록, 연방록, 급제선생안 등의 내용이 담겼다.

또한 제주교육박물관 소장 과거시험 답안지 등의 자료들이 번역돼 발간됐다.

   
역해 탐라빈흥록 표지. <헤드라인제주>

 

자료집은 각급학교와 관련기관에 배부해 교육자료 및 연구자료로 활용할 예정이다.

관계자는 "조선시대 과거제도는 물론 중앙으로부터 소외된 제주인들이 중앙에 진출할 수 있었던 시험제도를 담은 귀중한 자료다"라고 설명했다. <헤드라인제주> 

 

 

현대 수능과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비교

 (브레인미디어 2012년 11월 07일 (수) 16:33)

 

▲ 서울 종로구 운형궁에서 매년 열리는 과거시험 재현 행사 (사진제공=한국의 장)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은 1년 중 가장 중요한 날이라 할 수 있다. 수험생이 시험장을 가는 시간에는 군부대는 이동을 멈추고, 직장인들은 출근시간이 10시 이후로 미뤄진다. 시험장 주변 공사장, 쇼핑몰 등에서는 수능 날 만큼은 소음을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 듣기 평가가 이루어지는 시간대에는 비행기와 공군 등 모든 비행물의 이착륙, 시험장 근처에서 경적 등의 소음 원인물 사용이 금지된다. 이날만큼은 수험생이 왕이다.

이 같은 처사(?)에도 국민 누구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건 초중고 12년 동안 얼마나 이날을 손꼽아 기다렸는지 알기 때문이다. 올해 수능은 약 67만 명이 응시한다. 자신의 인생이 걸린 이날을 67만 명이 기다린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은 어땠을까?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조선시대에는 '과거'라는 시험제도가 있었다. 조선에서는 관리가 되려면 과거 시험을 거쳐야 했다. 과거 시험은 천민을 제외하고 누구나 볼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양반들이 관직에 진출하는 통로가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인재등용에 있어서 중국과 우리나라만이 시험제도가 있었다고 하니 과거는 시험으로 인재를 뽑았다는 점에서 아주 선진적인 제도였다.

수능과 비교를 거부한다! 과거시험 경쟁률 3000:1

2013학년도 대학입시 수시모집에서 가장 높은 경쟁률을 보인 학과는 보컬학과였다. 최근 오디션 프로그램을 열풍이 그대로 반영되어 단군대 천안캠퍼스 생활음악과 보컬 전공은 3명 모집에 1,378명이 몰려 경쟁률 459대 1을 기록했다. 연세대, 고려대 등 서울 주요 10개 대학들이 지난 9월 발표한 수시지원 평균 경쟁률은 22.8대 1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높아도 조선시대 과거 앞에 수능 경쟁률은 명함도 못 내밀 듯 싶다. 총 33명을 뽑는 과거 시험의 응시자는 평균 6만 3천 명으로 약 2천 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과거 시험의 꽃이라는 대과(문과)에서는 성적순으로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 등 모두 33명을 뽑았다. 나라에서 과거 시험을 실시하면 전국에서 수천, 수만 명의 선비들이 서울로 모여들었다. 보통 5세 때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30~35세쯤 되어야 과거에 급제했다고 하니, 그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이 간다. 대과는 모두 3번의 시험을 치른다. 첫 번째 시험인 초시에서 200명을 뽑고, 그중에서 복시를 치러 최종 합격자 33명을 선발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시험 전시는 임금 앞에서 합격자의 순위를 매기는 시험으로, 임금이 최종 합격자 ‘장원급제’를 결정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일생을 걸었지만 그건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조선 시대 과거 급제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고종 때 사람인 박문규다. 그는 1887년(고종 24년) 개성 별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 83세였다. 고종도 그의 급제에 깜짝 놀라며 특별히 정3품 당상관인 병조참의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평생 과거 공부에 온힘을 쏟은 탓인지, 다음 해에 가선대부, 용양위호군에 오른 뒤 세상을 뜨고 말았다.

(사진제공=한국의 장)


수능은 골고루 잘, 과거시험은 길게 또 길게

현대의 수능에서 수험생들은 언어 영역, 수리 영역, 외국어 영역, 탐구 영역(사회/과학/직업 탐구 중 하나의 영역을 선택), 제2외국어 영역의 5개 영역 중 하나 이상을 자유롭게 골라서 응시한다.

반면 과거시험의 문제는 요즘으로 본다면 논술형이라 할 수 있다. 장원급제자들의 답안지는 평균 길이가 10m로 앞면은 물론 뒷면까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 답안지 중 가장 긴 답안지는 12m에 달했다.

명종 때 식년문과에 '하늘의 변화는 어떠한 이치에 따르는가?'라는 문제가 나왔다. 장원급제자의 답안은 이러했다. '사람의 마음은 천지의 마음이니 사람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르게 된다. 임금이 자기의 마음을 바르게 해 조정을 바로잡으면 천지의 기운도 바르게 된다' 이러한 답변을 낸 장원급제자는 바로 율곡 이이였다. 그는 과거시험 역대 최대 합격자이기도 한데 22세부터 과거시험에 9번 응시하여 9번 모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將元公) '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부정행위는 기상천외하게 이루어져

2012학년도 수능 시험 도중 한 학생이 트위터로 수능을 생중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수험생은 “시험장에 들어가서도 트위터를 계속 할 겁니다. 지켜봐 주세요”라는 글을 시작으로 “헐, 언어 듣기 나온다” “아직 반 밖에 못 풀었는데”라는 글을 연이어 게시했다. 2교시 수리영역 시간엔 “마킹은 다 하고 자겠습니다. 주관식 두 번째 답은 14”라는 글을 올렸다. 하지만 경찰 조사결과 수험생은 실제 휴대폰을 시험장에 가져오지 않고, 집에다 두고 자동예약전송 프로그램을 사용해 부정행위로 적발되지는 않았다.

지난해 수능 부정행위자 적발건수는 ▲휴대폰 소지 77명 ▲MP3 소지 10명 ▲기타 전자기기 소지 7명 ▲4교시 선택과목 미준수 62명 ▲종료령 이후 답안 작성 9명 등으로 총 171명이 시험성적 무효 처리를 받았다.

과거 시험에서도 부정행위는 부지기수로 일어났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1447년(세종 29년) 3월 16일 의정부에서 과거시험의 부정행위에 대해 세종에게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신하들이 벼슬길에 나설 때에 먼저 속임수를 쓰면, 양심을 저버려 아무짝에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과거 시험장에서 남의 재주를 빌려 답안을 쓰거나 남을 대신하여 답안을 써 주는 사람, 중간에서 서로 통하게 하는 사람은 곤장 백 대와 징역 3년의 엄벌에 처하십시오. 그리고 시험 문제를 미리 알려 주는 등 부정행위를 돕는 관리도 똑같이 엄벌에 처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처벌을 강화해도 과거 시험장에서 부정행위는 사라지지 않았다. 남몰래 책을 들고 들어가 베껴 쓰는 사람, 옛날 사람이 지은 글을 표절하는 사람, 남의 답안지를 훔쳐보는 사람, 예상 답안을 종이에 미리 적어, 그 종이를 콧구멍이나 붓대 끝에 숨기는 사람, 글 잘 쓰는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 대신 답안을 쓰게 하는 사람, 시험 제목을 가시 울타리 밖에 알려 다른 사람에게 글을 쓰게 한 뒤, 시험장의 군졸을 매수하여 그 답안을 가져오게 하는 사람, 남의 답안지를 자기 답안지와 맞바꾸는 사람, 시험관과 짜고 자기 답안지를 시험관이 알아보도록 암호를 표시하여, 합격자 명단에 끼워 넣게 하는 사람 등등 선비들은 여러 가지 다양한 수법을 동원했다.

그러자 영조 때는 부정행위를 한 사람들의 합격을 막아 보려고 이런 방법을 쓰기까지 했다. 합격자 발표 다음 날 합격자들을 대궐에 불러들여 자기 답안지를 외우게 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 답안지를 외우지 못하면 남이 써 준 것으로 보고 합격을 취소했다.

조선 후기 북학파의 학자였던 박지원은 자신의 글 <하북린과>에서 "과거장에 들어가려니 응시한 사람만 수만 명인데 과거장에 들어갈 때부터 서로 밀치고 짓밟아 죽고 다치는사람이 많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수만 명의 답안을 서너 명의 관리가 채점하다 보니 늦게 제출하는 사람의 답안은 사실상 묻혀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과제를 빨리 확인하고 재빨리 답을 써 내기 위해 서너 명이 조를 짜서 전쟁 치르듯 과거 시험에 응했다고 한다. 먼저 하인들이 몸싸움을 불사하며 좋은 자리를 잡아내면 좋은 글귀로 글 짓는 사람이 글을 짓고 함께 온 대필가가 글씨를 써서 제출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사실상 대리 시험이 성행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과거만이 가문을 일으키고 인간다운 인간으로 대접받으며 사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기에 과거에서 부정행위가 빈번히 일어나 과거가 취소되는 일이 많았다. 결국 과거 제도는 조선 왕조 500년 동안 1만 5137명의 합격자를 배출했던 과거 시험은 848회를 채우고 1894년 갑오개혁 때 결국 폐지되었다.

 

 

김호상의 문화유산둘러보기 "제38호 조선시대 과거시험지와 SAT시험" 

 (경북방송 2013년 06월 21일)

 

조선시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오늘날에 비해 매우 엄격한 검증을 통과해야 했다. 당시의 결격사유로는 국가 관료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한 범죄자, 국가재산을 횡령한 자의 아들, 두 번 시집갔거나 행실이 나쁜 여자의 아들과 손자 등이 해당되었으며, 문과의 생원시와 진사시의 경우는 이와 더불어 서얼(庶孼) 자손 등도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또한 향시에는 본도 거주자가 아닌 사람이나 현직관료는 응시할 수 없었으며, 현직 관료는 한성시에만 응시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기준에서 본다면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는 제도로, 유교적 중심의 근대사회였다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 관찰사 배삼익 신도비각(경북 봉화군 봉화읍 석평리, 비지정문화재)
사진출처)봉화군청 문화재과 전대성

신도비(神道碑)는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을 기리는 비이다. 임연재 배삼익의 신도비는 동문 후배인 서애 류성룡이 1596년(선조 29)에 지었다. 비문에는 임연재와 서애가 함께 시험을 치면서 일어난 일을 기술하고 있다. ‘시험문제가 나오자 그는 그다지 생각하지도 않고 날이 저물기 전에 두 편 모두를 완성하고도 왕성하게 힘이 남아 있었다. 나는, 시는 완성했으나 쓰지 못하자 그가 나를 대신해 썼는데, 채점을 함에 나는 다행히 합격하였으나 그는 뜻을 펴지 못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감에 내가 다시 술을 가지고 가서 전송하면서 요행과 불행이라는 말로 작별하였다.’라 기록되어 있다.

ⓒ GBN 경북방송

과거 시험지는 시지(試紙) 또는 명지(名紙)라 하였으며, 시험지, 붓과 먹은 응시자가 마련하여야 했다. 시험지를 국가에서 주는 오늘날과는 달랐다. 그런데 서울의 문벌가문 자제들은 두껍고 좋은 자문지(咨文紙)나 창호지를 사서 쓰는 경우가 많았다. 시험지를 역서(易書 : 글씨체를 보고 채점에 영향 받을 것을 우려하여 서리가 답안 내용을 다시 베껴 쓰는 것) 하지 않고 그대로 채점하는 생원시와 진사시의 경우 시험지의 질에 따라서 부정이 생길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시험지는 최하품의 도련지를 쓰도록 제한했다. 규정을 어기고 좋은 종이를 제출하는 자는 시험 자격을 박탈하고 시험지를 불살라버렸다.


또 시험지는 시험이 있기 열흘 전에 서울은 4관(四館: 예문관 성균관 승문관 교서관) 관원이, 지방은 입문관이 접수하여 기록사항을 검토한 다음 ‘근봉’이라는 도장을 찍어주어 시험 칠 자격검증과 함께 시험지를 검인하였다. 만일 부탁을 받아 규격 외의 시험지를 냈는데도 도장을 찍어주는 경우에는 그 관원을 파직하고 시험장에서 이를 적발해내지 못한 시험 관리관도 역시 파직하였다. 또한 응시자는 시험지 윗부분이나 끝 부분에 본인의 관직, 이름, 나이, 본관, 거주지와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의 이름과 본관을 다섯줄로 쓰고 관원들이 응시자의 이름을 알아볼 수 없도록 그 부분에 종이를 붙이거나 원통처럼 말아 올려야 했다.

이처럼 응시자의 이름을 알아 볼 수 없게 하는 방법으로 호명법(糊名法)과 봉미법(封彌法)이 사용되었다. 호명법은 이름 위에 종이를 붙여 가리는 방법인데, 종이를 들추고 이름을 볼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하여 생긴 것이 봉미법으로, 봉미법은 본인과 조상의 인적사항이 적힌 부분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말아 올려 상 중 하 3곳에 세로로 구멍을 뚫어 끈으로 묶었다.


시험보는 날 새벽 입문관(감독관)은 녹명책을 보고 응시자를 호명하여 들여보낸다. 수협관(검사관)은 문 밖에서 좌우로 갈라서서 응시자의 옷과 소지품을 검사했다. 만일 책을 가지고 들어가는 자는 금란관(禁亂官)에게 넘겨 처벌하는데 시험장 밖에서 걸리면 1식년(3년), 안에서 걸리면 2식년(6년) 동안 시험 볼 자격을 박탈당했다.


몇 년 전 우리국민들은 국가기관에서 특채하는 시험에 고위직으로서 또는 그 부하직원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악용한 부정이 개입된 사례들을 보면서 분노를 넘어 한 국가의 평범한 국민으로서 서글픈 현실을 절감해야만 했다. 부하직원이 알아서 상급직원의 자녀들에게 규정을 넘어선 시험 기회를 제공하고 채점 또한 유리하게 한 것은 물론, 한 발 더 나아가 그 상급직원은 이를 알고도 모른 척 눈 감아 주어 국가기관의 인재선발에 있어 그 근간이 되어야 하는 공신력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사건이었다. 정당하게 했더라도 합격할 수 있는 실력이라며 한편으로는 억울한 심정이 들 수도 있겠지만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끈을 고쳐 매지 마라’는 선조들의 깊은 뜻을 되새겨 보게 했다.



또 지난 주 미국 대학 입학시험인 SAT(Scholastic Assessment Test는 미국 대학 위원회와 교육평가서비스 공동주관 하에 1년에 8~10여회(한국 5회) 차례 실시되는 시험으로 미국대학에서 얼마나 성공적으로 공부를 할 수 있는 가를 예측하기 위한 학력평가 테스트이며, 대학 위원회가 대학에서 성공적으로 공부 할 수 있는 학생들을 선정 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시행되는 시험이다.) 문제가 유출되어 5월에 이어 6월에 한국에서 예정되었던 SAT시험이 취소되었다고 한다. ‘한 국가에서 전체적으로 시험이 취소된 경우는 이번이 처음’ 이라고 하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이렇듯 우리의 선조들은 과거시험에 있어 혹여 시험지의 질을 통해 알 수 있을 지도 모를 빈부, 신분의 분별마저 없애려 노력했으며, 더 나아가 혹여 그러한 부정이 저질러졌을 지도 모를 것을 대비해 이중, 삼중으로 부정이 개입되지 않도록 노력하였음을 많은 기록을 통해 살필 수 있었다. 물론 류성룡의 일화에서처럼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학의 전성시대였던 조선시대에도 시험에 부정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잘못을 인정하고 부끄러워는 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문제를 유출하고도 오히려 그로 인해 그 유출처가 단 번에 인기학원으로 등극하고, 더욱이 자식교육과 고득점 앞에서 부모들은 등록을 위해 그 학원 앞에 장사진을 치는 작태가 벌어지고 있다. 아닌 말로 누가 감히 그런 학원에서의 수강을 거절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래도 보다 높은 배움과 노력을 통해 사회 지도층이나 엘리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보다 엄격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평범한 일반인들에 준하는 도덕과 양심의 잣대를 가지고 지식과 믿음이 일치된 자신 스스로를 향한 양심선언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