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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왕따' 임금 정종의 하소연 (경향신문 2014-01-14 15:08:36)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왕따' 임금 정종의 하소연

 

‘조선왕릉’은 유네스코가 인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2009년 조선을 다스린 왕과 왕비 등 44기 가운데 40기가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빠진 4기는 폐위된 연산군(10대)·광해군(15대)묘와 북한에 있는 제릉(태조 이성계의 정비 신의왕후릉)과 후릉(2대 정종과 정안왕후) 등이다. 그러니까 조선을 다스린 27대 왕 가운데는 폐위된 연산군·광해군 등 두 사람을 빼고 2대 정종(부인인 정안왕후까지) 만이 세계유산에서 제외된 것이다.

물론 ‘북한 땅에 묻혀있기에 빠졌다는 것’이니 설득력이 있겠다. 하지만 역사를 들춰보면 ‘왕따’의 짙은 향기를 느낄 수 있으니 어쩌랴. 한마디로 조선의 2대 국왕인 정종이 ‘왕따’를 당했다는 얘기다.

‘왕따’ 당한 정종의 그 구슬프고도 딱한 사연을 한번 들어보자.

■정종 후손의 피맺힌 상소 “청컨대 공정왕의 묘호를 추상하게 하소서.”

조선의 임금 가운데 유일하게 개성에 떨어져있는 정종과 그 부인 정안왕후릉인 후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서도 빠져있다.

1481년(성종 12년), 신종군 이효백이 한맺힌 상소를 올린다. 이효백은 공정왕의 10번째 아들인 덕천군의 장남이었다. 공정왕의 손자였던 이효백이 올린 상소의 내용은 무엇인가.

‘공정왕’은 조선의 2대 왕인 ‘정종(定宗·재위 1398~1400년)’을 말한다. 하지만 1417년(세종 원년) 승하한 후 무려 164년 동안 묘호(죽은 뒤에 나라가 내리는 이름)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1681년(숙종 7년)이 돼서야 겨우 ‘정종’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지 못한 채 명나라가 내린 사시(賜諡), 즉 공정왕(恭靖王)이라는 이름만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명나라가 인정하는 ‘대외직함(공정)’만 부를 뿐, 조선 내부에서는 정식 임금의 대접을 받지 못한 ‘임금 대우’에 머물렀던 것이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이었을까. 차근차근 살펴보자.

■비극의 씨앗

비극은 조선 개국부터 싹 텄다고 할 수 있다.

이성계의 차남이던 공정왕(이방과)은 고려 말에 왜구 토벌에 나름의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조선 왕조 창업에는 참여하지 않아 태조 이성계의 꾸지람을 들었다. 정몽주를 죽이고 창업의 디듬돌을 놓은 다섯째 이방원과 사뭇 다른 행보였다. 사실 차남이었기에 왕위와도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애주가였던 장남(이방우)이 소주를 지나치게 마시는 바람에 술병으로 죽고 말았다. 원래부터 왕위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맏이가 된 것이다.

1681년(숙종 7년) 262년만에 정종의 묘호를 받은 정종의 가상시호 단자. 당시 수종은 “위대한 공과 성대한 공이 있는 공정왕의 묘호가 빠진 것은 국가의 큰 잘못”이라며 묘호를 올렸다.

1398년(태조 7년) 정안군 이방원(태종)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 때는 황급하게 성을 넘어 독음 마을에 숨어버렸다고 한다. 난이 수습되고, 세자 책봉문제가 불거지자 이방과는 “조선왕조가 개국하기 까지는 모두 정안군(5남 이방원)의 공이 크며 나는 세자가 될 수 없다”고 버텼다. 하지만 이방원이 굳이 사양하자 어쩔 수 없이 세자가 됐다. 결국 태조 이성계의 양위로 임금이 됐지만(1398년), 진정한 지존의 위엄을 누릴 수 없었다. 어린 이복형제인 방석(세자)와 방번을 무참하게 살해한 동생이 아니던가.

게다가 즉위 직후 남재가 감히 대궐 뜰에 나타나 큰소리로 “속히 정안군을 세자로 정해야 한다”고 겁박하는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임금을 우습게 보는 작태가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1400년(정종 2년), 남재가 대궐 뜰에서 큰소리쳤다. ‘지금 마땅히 정안공(이방원)을 세자로 삼아야 합니다.’ 정안공이 듣고 크게 노해 꾸짖었다. 그러나 임금(공정왕)이 적자가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마음 속으로 정안공이 세자가 되리라 생각하였다.”

■“빨리 옥좌를 내놓으소서”

게다가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직후 정안공의 책사인 하륜 또한 “빨리 후사를 정안공으로 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륜이 임금에게 청했다. ‘정안공이 없었다면 정몽주의 난과 정도전의 난을 어찌 막았겠습니까. 또 어제의 일(2차 왕자의 난·1400년 1월27~28일)을 보더라도 하늘의 뜻과 백성의 뜻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속히 정안공을 태자로 세우소서.’”

이복동생 둘에 이어 넷째 형(방간)까지 제거한 동생이 아닌가. 게다가 이제는 동생의 심복들까지 ‘천심과 민심이 모두 정안공에게 돌아갔으니 빨리 옥좌를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있으니….

정종의 신위는 제사 때도 철저히 무시됐다. 정종의 신위는 성종 때 강녕전의 협실로 쫓겨났다.

가뜩이나 후궁과의 사이에서 낳은 왕자 15명을 모두 출가시키면서까지 ‘아무런 욕심이 없음’을 선언했고…. 동생인 정안군과 마주 앉으면 차마 눈조차 마주치지 못한 공정왕이었는데…. 보다못한 부인(정안왕후)이 안타까움에 이렇게 절규했다지 않은가.

“전하께서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십니까. 하루빨리 양위하시어 마음 편히 살도록 하세요.”

또 하나 쟁점이 있었다. 동생을 후사로 옹립하는 것이니, 왕세제가 옳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실제로 1400년 2월4일, 정종이 정안군을 ‘왕세자’로 삼자 일부 대신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예부터 제왕이 친형제를 세울 때는 모두 황태제로 봉했고, 세자를 삼은 일은 없었습니다. 청컨대 왕세제로 삼으소서.”(<태종실록>)

그러나 정종은 “지금 이 순간 과인은 이 아우를 아들로 삼겠다”고 선언하고 ‘왕세자’로 책립했다,

정종으로서는 동생을 세제가 아닌 세자로 삼아, 즉 양자로 삼아 대를 잇게 한 것이다. 아마도 정안군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다. 정안군으로서는 두 차례의 골육상쟁에 이어 형의 왕위까지 찬탈했다는 혐의를 받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따라서 정안군은 태조로부터 직접 왕통을 승계한 것으로 종통을 꾸몄던 것이다.

■세종 임금의 속마음

결국 공정왕은 그 해 11월(1400년) 동생 정안군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상왕으로서의 삶은 외려 행복했다. 격구와 사냥, 온천, 연회 등을 즐기면서 19년 간이나 살다가 1419년(세종 1년) 승하했다.

그 때 미묘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세종의 말을 들어보자.

“과인의 생각으로는 사시(賜諡·명나라가 내려주는 묘호)만이 허락될 뿐, 사시(私諡·조선 조정이 올리는 묘호)는 올릴 수 없을 것 같다.”

그 때문에 ‘대행상왕(죽은 직후 아직 묘호와 시호 등이 결정되지 않은 상왕·정종을 뜻함)’은 묘호를 받지 못했다. 대신 명나라가 내려준 사시(賜諡)인 ‘공정왕’이라는 이름만 인정됐다.

세종의 ‘말씀’은 과연 무슨 뜻인가. 한마디로 큰아버지인 정종을 조선의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세종의 속내는 어머니(태종의 정비·원경왕후 민씨)가 승하한 직후 능의 조성을 두고 논의를 벌이면서 드러난다.

“1420년(세종 2년) 임금이 말하기를 부왕(태종)의 만세 후에는 마땅히 태종이 되실 것인즉….”

무슨 말이냐면 세종은 만약 부왕이 돌아가시면 그 묘호를 ‘태종’으로 정하겠다는 뜻을 확고하게 밝힌 것이다. 사실 이 대목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예로부터 창업군주에게는 ‘태조’의 묘호를 붙였고, ‘태조’를 계승한 이는 ‘태종’이라 했다. 중국 송나라-요나라-금나라-원나라가 줄줄이 2대 황제를 태종이라 했다. ‘태종’은 태조의 적통인 제1대 종자(宗子)에게 올리는 묘호였던 것이다. 그런 예법이라면 태조 이성계의 뒤를 이은 2대 국왕은 당연히 ‘태종’이어야 했다. 하지만 이방과는 ‘태종’은 커녕 묘호 조차 받지 못한채 ‘공정왕’의 이름을 얻는데 그쳤다.

세종의 발언은 곧 “조선의 적통은 ‘태조-정종-태종’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태조-태종’으로 곧장 이어진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신숙주·정인지의 반론

그 후 50년이 흐른 1469년(예종 1년), 억울한 정종을 위해 나선 이가 있었으니 바로 예종이었다.

예종은 종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쓴 축문에 공정왕(정종)의 묘호만 없음을 깨달아 대신들에게 물었다.

“공정대왕은 대통(大統)을 이은 임금인데, 까닭없이 묘호가 없구나. 이제는 칭종(稱宗)하는 것이 어떠냐.”

그러자 신숙주와 정인지 등이 나서 의미심장한 반론을 제기한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의심하자면 태종께서는 선위(禪位)를 받고도, 세종께서는 예가 갖춰졌는데도 공정왕의 묘호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신 등은 그 까닭을 모르겠지만, 당시에 반론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반드시 뜻이 있을 겁니다.”

예종은 대신들의 신중론에도 공정왕에게 ‘희종(熙宗)’의 묘호를 내리도록 결정했다.(1469년) 그러나 예종이 급서하는 바람에 시행되지 못했다.

■“반드시 깊은 뜻이 있었을 겁니다.”

다시 세월이 흘러 1481년(성종 12년), 이 문제가 또 불거졌다.

앞어 언급했듯 신종군 이효백이 “공정왕의 묘호를 추상하게 해달라”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이효백인 공정왕의 11번째 아들인 덕천군의 장남이었다. 그러자 대신들은 태종과 세종이 공정왕의 묘호를 올리지 않은 것에는 “반드시 그 깊은 뜻이 있었을 것(此必有深意)”이라고 입을 모아 신중론을 제기했다. 이 자리에서 이파와 어세겸 등은 태종과 세종의 ‘깊은 뜻(深意)’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왕자의 난 이후) 나라는 태종의 소유였는데, 다만 형제의 차례 때문에 공정왕에게 양보했습니다. 공정은 즉위 3년 만에 태종에게 도로 양위했는데….”

원래 태종의 나라였는데, 나이 때문에 잠시 형(공정)에게 맡겼을 뿐이고, 그 맡긴 나라를 3년만에 되찾았을 뿐이라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공정왕의 나라는 원래부터 없었다는 것이다.

이파와 어세겸의 말이 이어진다.

“원래 태종은 그 아들·딸들에게는 대군(大君) 혹은 군(君), 공주 혹은 옹주라 칭하고, 사위에게 모두 봉군(封君)했습니다. 그러나 공정왕의 아들들에게는 정윤(正尹)·원윤(元尹)이라 칭하고, 딸에게는 칭호가 없었으며, 사위에게는 군직(軍職)을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태종은 처음부터 형을 ‘적통으로서의 임금’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파 등은 이어 “(그것이 바로) 태종은 물론 세종-문종-세조에 이르기까지 공정왕의 묘호를 언급하지 않은 이유가 된다”고 못박았다.

■제사 때도 무시당한 정종

어디 이 뿐인가.

공정왕은 살아서는 물론이요, 죽은 뒤에도 대대로 온갖 홀대받은 불행한 임금이었다.

명나라 때 손능부가 지은 ‘시법찬(諡法纂)’을 보면 조선 태조 이하의 임금들에게 ‘조선국왕(朝鮮國王) 성(姓) 휘(諱)’라 기록했지만, 유독 공정왕에게만 ‘조선국 권서국사(權署國事) 성 휘’라고 했다.

‘권서국사’는 명나라의 고명(誥命·중국 황제의 임명장)을 받기 전에 국사를 대신해서 처리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까 공정왕은 정식국왕이 아닌 권서국사로 재위한 ‘허울좋은 임금’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제사 때도 무시 당했다.

예컨대 1475년(성종 6년) 회간왕의 부묘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공정왕이 종묘의 정실에서 협실로 쫓겨나는 일이 벌어진다.

성종의 아버지이자 인수대비의 남편인 회간왕은 20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회간왕이 덕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그 신위가 종묘로 옮겨 봉안하게 됐는데, 그 때 공정왕이 우선순위에서 밀려 협실로 쫓겨난 것이다. 정식군주였는데도 추존왕에게 밀린 셈이니 얼마나 원통했겠는가.

또 있다. 1495년(연산군 1년) 승하한 성종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려 할 때도 문제가 생겼다.

성종의 신주를 종묘에 들이기 위해서는 조천(조遷), 즉 4대가 지난 신주를 종묘 내의 다른 사당인 영녕전 옮겨야 했다. 그런데 종묘 내에는 신실, 즉 신주를 모시는 방이 부족한 상태였다. 그러자 예조판서 성현 등이 나서 또 공정왕을 들먹거렸다.

“태조·태종·세종·세조는 모두 백세토록 옮기지 않은 신위입니다. 그러나 공정왕은 묘호도 올리지 않았고…. 협실로 옮길 때도 ‘임시로 협실에 갔다가 친진(제사를 지내는 4대가 다 됨) 때는 그친다’고 했으니…. 이제 공정왕의 신위를 처리하기도 어려우니 신주를 후릉(공정왕과 정안왕후의 능)을 옮겨 매장하면 어떤지….”

헌납 김일소 등의 반대로 신주가 후릉에 매장되는 주장만은 수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지긋지긋한 홀대와 설움은 필설로 다할 수 없었다.

■정종의 뜻을 받들었다?

공정왕의 한은 승하한 지 162년이 지난 숙종 7년(1681년)이 돼서야 풀렸다.

1681년(숙종 7년), 선원계보(왕실족보) 교정청이 어첩을 수정하던 중 열성조의 묘호 가운데 공정왕의 묘호가 빠진 것을 발견하고 숙종에게 보고한 것이다.

숙종은 사관과 예관들을 영의정 김수항, 영부사 송시열과 박세채 등에게 보내 자문을 받았다. 4개월 간의 긴 숙의였다.

결론은 공정왕의 묘호가 궐전(闕典), 즉 빠졌음을 인정하고 반드시 받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영중추부사 송시열의 상언이 재미있다.

“태종대왕은 조용한 곳에서 한적하게 즐기려는 공정대왕의 뜻을 이루도록 했습니다. 승하한 뒤에는 평소 공정대왕의 겸손하고 절제하는 마음을 가슴 깊이 되새겨 스스로를 높이는 묘호를 억지로 더할 수 없었습니다. 세종대왕 이후 열성조들도 태종대왕의 마음을 받들어 번거로운 의식을 추가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태종대왕이 정종대왕과 함께 종묘에 함께 오르시고도 혼자서만 아름다운 묘호를 차지하셨을 때 틀림없이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태종은 평소 조용히 살고자 하는 공정왕의 뜻을 받들어 묘호를 올리지 않았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이 아닌가.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것 같다.

어쨌든 숙종은 “위대한 공과 성대한 덕이 있는 공정왕의 묘호가 빠진 것은 국가의 큰 잘못”이라고 반성하고 “당장 묘호를 올리라”는 명을 내린다.

숙종의 결심이 나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불과 4일 후인 9월18일 2품 이상의 관각당상(홍문·예문관)들은 공정대왕의 묘호를 ‘정종(定宗)’으로 정했다.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염려했다’는 뜻이었다.

길어야 4개월, 짧게는 4일이면 될 일인데, 무려 262년의 긴 세월을 돌고 돌아 온 것이었다.

하지만 비운의 국왕인 정종과 정안왕후의 ‘완전복권’은 과연 이뤄진 것일까. 모두에 인용했듯이 정종과 정안왕후의 무덤(후릉)은 지금 북한의 개성에 뚝 떨어져 있고…. 또 폐위된 연산군묘(10대), 광해군묘(15대)와 함께 세계유산으로도 등재되지 못했으니…. 정종의 한탄이 들리는 듯 하다. 누가 왕 노릇 한다고 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