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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철의 표해록 (제주문화원)

장한철의 표해록

 

1770/10/01 1차 조난

경인년 10월에 나, 장한철이 향시(鄕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자 마을 어른들이 모두 서울에 가서 과거보기를 권하고, 또 삼읍{제주(濟州)·정의(旌義)·대정(大靜)}의 관가에선 노자를 도와주면서까지 예조에서 보는 회시(會試)에 응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김서일과 같이 과거를 보러 서울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1770/10/26 1차 조난

북풍이 심히 급하게 부니, 배는 쏜살같이 달려간다. 외연도로 갈 가능성이 없어지자 나는 사람들에게 이 바람대로만 간다면 유구()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김서일은 이 상황을 두고 음릉(陰陵)에 빠진 항우와 같다고 사공을 나무랐지만, 나는 반식재상(伴食宰相)이나 건괵장군(巾幗將軍) 사마의가 되기 싫으면 열심히 하라고 놀려주었다. 배 안은 금세 화기애애해지니 나는 유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한편 뱃멀미에서 깬 김서일은 나와 같이 배를 탄 것을 후회한다며 화를 내고 이윽고 통곡을 하였다.

오후가 되니 한라산도 시야에서 사져버렸다. 바람은 점점 사나워지고, 파도도 다시 날뛰기 시작하였다. 나는 긴장을 풀기 위해 밥을 짓자고 하였고, 밥은 아주 잘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앞으로 길할 징조라고 좋아하였다. 때마침 배 안에 물이 떨어졌는데, 사람들이 내가 어제 물을 저장해 둔 안목에 탄복하였다.

 

나는 일찍이 남쪽 바다에 깔려 있는 여러 나라의 지도에 대해서 쓴 많은 책을 열심히 훑어본 적이 있다. 무릇 탐라의 한란산은 큰 바다 가운데 있어서 오직 북으로 조선과 통할 뿐인데, 그 수로(水路)980리 남짓하다. 동·서·남의 삼면은 바다가 있을 분 땅이 없는데, 넓고 넓어 끝이 없다. 일본의 대마도는 한라산의 동북쪽에 있고, 일기도(一岐島)는 정동(正東)에 있으며 여인국(人國)은 동남에 있다. 한라산의 정남(正南)에는 크고 작은 유구의 섬이 있으며 서남에는 안남(安南)·섬라(暹羅)·점성(占城)·만랄가(萬剌加) 등의 나라가 있다. 정서(正西)는 곧 옛날의 민중(閔中), 지금의 복건로(福建路). 복건의 북쪽은 서주(徐州)와 양주(揚州)의 지역이다. 옛날 송이 고려와 교통할 때에는 명주(明州)에서 배를 띄워 바다를 건넌다. 명주는 양자강의 남쪽에 있는 l방이다. 청주(靑州)·충주(茺州)는 한라산의 서북에 있는데, 이상 여러 나라는 모두 탐라와는 바다로 막혀서 몹시 먼데 그 거리가 몇 천만 리가 되는지도 모른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 곳에 있는 것은 동해에 있는 벽랑국(壁浪國)으로서 일본의 동쪽에 있다.

 

거인도(巨人島)는 일기도의 동남에 있는데, 인적이 두절되고 백성들에게는 정교(政敎)가 미치지 못해서 이 세상과는 완전히 딴판인 곳이다. 옛날 송 천성(天聖) 기사년(己巳年, 송 인종 7, 서기 1,029)에 탐라인인 정일(貞一) 등이 표류하여 거인국(巨人國)에 도착하였는데, 섬사람들에게 붙잡혀 배 타고 도망하여 살아온 자는 겨우 일곱 사람이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동사(東史)에 적혀있다. 이 배가 만약 유구에 도착하지 못하면 반드시 여인국이나 일기도에 가게 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혹시 나인국(人國)으로 표류해가는 것이 아닐까. 혹은 흑치(黑齒)란 종족이 사는 곳에 흘러들어가지나 않을까.

 

한편 뱃사람들이 서북풍에서 서풍으로 바뀐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마침 알아차렸다는 듯이, 광해조 신해년간(辛亥年間, 광해군 3, 서기 1611)에 유구의 태자가 탄 배가 바람 부는 대로 흘러 제주(濟州)에 닿았는데, 그때 목사(牧使)가 조정에 노략질하러 온 도적이라 속이고는 화공(火攻)으로 죽이고 재화와 보배를 빼앗았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해주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서 지금의 풍향을 확인하고는, 서풍이라는 사실을 알고 안도하였다.

 

1770/12/25 1차 조난

본선사공(本船沙工) 이창성(昌成), 船夫 유창도(兪昌道)·김순기(順起)·김차걸(次傑)·고득성(高得成)·정보래(鄭寶來)·유일춘(一春)·이성빈(星彬)·김수기(壽起)·이강일(福日), 商人 강방유(姜方裕)·김방완(方完)·양윤하(允夏)·이도원(道元)·박항원(朴恒元)·김복삼(福三)·이득춘(得春)·고복태(高福泰)·양윤득(允得)·이우성(友成)·이춘삼(春三)·이대방(大方)·김필만(必萬)·김순태(順泰)·장원기(張元起), 백사렴(白士廉)·김칠백(七白) 그리고 나, 김서일(瑞一)까지 모두 스물아홉사람이 한 배에 같이 탔다.

바다를 건너는데, 돌연 날씨가 흐려지더니, 비라도 한바탕 쏟아지려는지 비올 기색이 하늘을 덮었는데, 배는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물결을 따라 흐를 뿐 하늘은 높고 바다는 넓어 망망하여 끝이 없다. 따라서 취사부가 밥을 짓고 북을 치며 수신(水神)에게 치성을 드리고 나서, 배에 탄 사람도 나누어 먹게 하였다.

 

저녁에 하늘을 바라보니, 붉은 해가 잠깐 구름을 벗어나자 구름인지 연기인지 허연 기운이 물결 사이로 일어난다. 구름이 가리기도 하고 햇빛이 반짝거리기도 하여 한참 명멸하며 꿈틀거리더니, 돌연 구름은 오색찬란한 무늬를 이루어 반공(半空)에 나란히 떠 있다. 구름 아래로는 마치 무엇인지 우뚝 높이 솟아 있는 것 같고, 어떻게 보면 마치 층루누각(層樓) 같으나 멀어서 분별할 수가 없다.

 

이윽고 사람들이 고래를 발견하였다. 고래와 배가 너무 가까워서 배가 요동치니 뱃사람들이 모두 흙빛이 되어 뱃바닥에 꿇어 엎드리고서는 관음보살만 외우기를 그치지 않는다. 이윽고 고래는 사라졌다. 하지만 한 사공이 신기루가 뜨고, 고래가 나타나고, 비바람이 칠 징조가 보이는 등 천기가 아무래도 수상하다고 하고, 배에 탄 사람 모두 잠시라도 마음을 놓지 말라고 말하였다.

날이 저물기 전에 북륙(北陸)과는 70리가 되는 소안도(所安島)의 서쪽에 있는 노어도(魚島)에 도착하였다. 사공은 손을 부지런히 놀려서 닻을 내려 배를 이 섬에다 머무르게 하려고 하나 이 배의 닻에는 돌만 있고 삼지(三枝)가 없어 삽착(揷着)이 되지 않아 끝내 배를 해안에 대지 못하고 말았다.

 

이러는 동안 동풍이 크게 불어 배는 바람에 몰리어 서쪽 바다 밖으로 떠내려 나갔다. 노도()를 돌이켜 보는 것도 잠깐뿐, 다시 푸르고 끝없는 바다가 눈앞에 전개된다. 사나운 바람, 성난 파도, 외로운 배는 솟았다 가라앉았다 하는데, 높이 솟을 적엔 마치 하늘 위로 오른 듯 하고, 내려갈 딴 밑도 끝도 없는 물속으로 빠져들어 가는듯하였다.

 

밤은 이미 캄캄하여 동서를 분별할 수가 없는데 바람은 까불어대고 비는 마구 퍼붓고 배는 풍랑에 들볶인다. 배 밑으로는 사정없이 물이 새어들고, 배 위엔 억수같이 비가 쏟아진다. 배 안에 고인 물은 이미 허리까지 찼는데, 사람들은 어차피 죽으려니 생각하고 배에 고인 물을 퍼내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한테 동풍이 부는 대로 흘러가면 소안도(所安島) 서쪽 1,300에 있는 외연도(外烟島)에 도착할 것이라고 하고 사람들에게 배에 차오르는 물을 퍼낼 것을 독려하였다. 내가 사람들에게 전해준 내용들은 야화에서 얻어들은 이야기로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용기를 북돋아주고자 한 말이다. 밤이 이슥하니 바람은 차차 기세가 꺾이고 비도 멎었지만, 배는 뱃줄도 삿대도 잃어버렸다. 게다가 배는 기울어 엎어져 버릴 위험도 있었다.

 

1770/12/27 1차 조난

날이 저물어지려 하는데, 갑자기 이상한 새가 울며 날아 지나갔다. 사공이 저녁 때 물새의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주변에 모래섬(洲渚)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자 모두 기뻐하였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아침부터 끼인 바다안개(海霧)가 걷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밤이 되니 하늘이 맑게 개고, 하늘에는 은하(銀河)가 씻은 듯이 밝게 걸려 있다. 나는 남극노인성(南極人星)을 보고 사람들에게 이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김서일이 이에 대해 남극노인성은 중국의 형악(衡岳)이나 조선의 한라산 같은 높은 곳에서만 보이는 별자리라고 하였지만, 나는 위의 산들이 남쪽에 있어서 노인성이 보이는 것이지 산이 높아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지금은 남쪽바다에 있으니까 보이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밤이 깊어졌지만 나는 고아인 나를 길러 준 중부(仲父), 쌍오당(雙梧堂)이 내가 바다에 빠져 죽은 줄 알고 통곡하고 울부짖는 모습을 생각하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호산도

 

1770/12/28 호산도

북풍이 불더니 조그마한 섬에 닿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해안가에 들어섰다. 섬을 둘러보니, 사슴은 발견하였지만 고기잡이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 섬은 근처에 샘이 있고, 면적은 30리 정도 되는 무인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배에 남은 양식을 확인해 보니 스물아홉사람이 수삼일 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가자, 언덕에 의지하여 장막을 치고 밤을 지낼 곳을 마련하였다.

 

1770/12/29 호산도

섬의 높은 곳에 올라가 주변을 살펴보니 이 섬의 길이는 남북으로 20리가량, 동서로는 5리가량이다. 섬에 가득 찬 것은 나무들로서 푸른빛, 초록빛을 내뿜는 듯 무성함을 자랑한다. 아가위·소나무·잣나무가 많고, 그 밖에도 잡초가 많은데 때는 아직 봄이 아니건만 새잎이 돋아나고 있어 봄의 모습을 나타내니, 마치 우리나라의 이삼월 기후 같다. 바위나 골짜기 사이에는 대가 많은데 큰 것은 서까래만하다. 또 산약(山藥)을 파내니 큰 뿌리는 팔뚝만하다. 쥐가 큰 것은 고양이 만한데 맥없이 암혈(巖穴) 사이를 출몰한다. 갯가에는 전복이 많고, 노루와 사슴 같은 산짐승은 떼를 지어 다닌다. 물새·들새는 그 이름을 모르는 것이 많다. 갈가마귀는 수풀을 둘러싸고 갈매기·해오라기는 섬에 가득하다. 한줄기 원천(源泉)이 가운데 봉우리 아래에서부터 나오는데, 그 끝물은 기다란 시냇물을 이루어 굽이굽이 돌아 흘러 한참 어정거리다가 동쪽으로 해서 바다로 빠져든다.

 

막사에 돌아와서는 대를 베어 막대기를 만들고 여기에 옷을 찢어 기()를 만들어서 높은 봉우리에 세우게 하였다. 또 봉우리 꼭대기에 장작을 쌓아 불사르게 하여 연기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게 하였다.

 

1770/12/30 호산도

아침에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오후가 되니 퍼붓듯이 내렸다. 사람들은 모두 막() 속으로 들어가므로 나들이 할 수 없었다. 비는 상()마다 새어 마른 곳을 찾아 앉을 수도 없었다. 몰골들이 수참(愁慘)하기가 마치 물이 새는 배 위에 있는 것 같았다. 날이 개자 사람들은 포구(浦口)에 가서 전복을 뜯기도 하고, 혹은 산에 올라가서 마()를 캐기도 했다. 날이 저물어 사람들이 죄다 모였을 때는 산나물이 결에 그득하고, 해산물이 대광주리에 철철 넘쳤다. 강재유가 따 온 전복에서 까마귀 알만한 쌍주(雙珠)가 발견되었다. 그러자 상인 백사렴이 돌아가면 50금으로 구슬을 사겠다고 하면서, 실랑이를 벌였다. 나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익을 탐하는 장사치의 중리(重利)가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있을까 생각했다. 한편 사공이 지금 물이 잠잠하니 배를 띄우면 어떻겠냐고 했지만 배위에서 상황이 변할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왜구

 

1771/01/01 왜구

사람들은 만리나 떨어진 먼 지역에서 해를 맞이하는 슬픔을 누르기 어려워 서로 마주보고 울었다.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윷놀이를 시켜서 이긴 사람은 바위에 높이 앉게 하고, 진 사람은 발가벗은 채 그 아래에서 절을 하게 하여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다.

 

대낮에 한 점 돛대가 동쪽바다 너머에서부터 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여 불을 불고, 섶을 더 집어넣었다. 법석대며 연기와 불빛을 일어나게 하고, 높은 언덕에서 죽기(竹旗)를 휘두르고 모두들 목소리를 높여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날이 저물려 하자, 그 배는 점점 우리가 있는 섬으로 다가왔다. 배 위에는 머리를 푸른 수건으로 동여매고, 아래는 아무것도 가린 것이 위에 검은 장의(長衣)를 꿰어 입은 왜인이 보였다. 그 배에서 조그만 배가 내려 우리가 있는 섬으로 왔다. 장정 10여명이 섬에 올라오는데, 허리에는 모두 길고 짧은 검을 차고 있었다. 필담으로 구해달라고 하였지만, 그들은 보물에만 관심이 있었다. 결국 칼로 우리를 위협하고 옷을 발가벗겨 나무 위에 거꾸로 매단 채, 생복을 가지고 떠나가 버렸다.

 

결박을 푼 사람들이 나를 구해주었다. 나는 왜놈이 이 세상에서 가장 백해무익한 존재라고 되뇌었다. 일본 해적의 약탈로 사람들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들은 봉우리 위에 둔 깃대와 연화(煙火)를 없애서 다시는 수적(水賊)을 부르지 말자고 하였다. 하지만 내가 근처에 왕래하는 배가 모두 수적은 아닐 거라고 하여 반대하였다. 어떤 사람은 북풍을 타고 3일이면 유구에 도착할 것 같으니 배를 띄우자고 했으나 이 역시 바다의 상황은 자주 변하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게 좋겠다고 하였다. 다만 뱃줄과 삿대를 잃어버렸으므로 나무를 배어 노를 만들고, 삼지정(三枝碇)도 갖추게 하였다.

 

안남산성

 

1771/01/02 안남 상선

아침에 서남풍이 사납게 불기 시작한다. 그런데 서남쪽을 바라보니 멀리 돛대가 시야에 들어온다. 저녁때가 될 무렵, 배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는데, 그 크기가 하늘을 가리는 산과 같다. 그 배는 동북쪽으로 직향하고 지나가 버렸다. 앞선 배가 지나쳐 가버리니 뒤따라오던 배도 역시 지나가버린다. 아무리 기를 휘두르고, 연기를 올리고, 부르짖어도 그 배는 덤덤히 바라보기만 하고 구해주려 하지 않았다. 이는 바다 위에서 배를 타고 갈 때, 표류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처치하기 곤란하므로 못 본 체해버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한 배는 아직도 뒤떨어져 있어서 있는 힘을 다해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다행히 그 배는 갑자기 노를 돌려 우리를 향해 와서는 닻을 내리고 배를 세웠다.

다섯 사람이 작은 배를 타고 내려왔다. 타고 온 사람들은 모두 붉은 빛 바탕의 화포(畵布)로 머리를 싸고, 몸에는 소매가 좁은 초록빛 비단옷을 걸치고 있었다. 필담을 통해 그들이 명나라 유민으로 이제는 안남(安南)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과 그들은 일본에 콩을 팔러 가는 중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필담으로 지금 우리들의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결국 이들의 배에 의해 구조될 수 있었다. 이들의 배에 탄 뒤 그들은 먼저 차반()을 먹게 하고, 다시 백소주(白燒酒)를 주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죽()도 주었다.

 

1771/01/03 안남 상선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니 문득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육지에 도착한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배 안에서 닭과 개를 기르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임준()이라는 원건을 쓴 사람에게, 뱃사람 중에 머리를 깎지 않고 건()을 쓴 사람이 있는 반면, 머리를 깎고 머리를 싸맨 사람이 있는데 무슨 차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임준은 안남에는 명()나라가 청()에 망하자 이곳으로 피해 온 사람이 많다고 하며, 건을 쓰고 머리를 깎지 않은 사람은 모두 명의 유민이라고 하였다. 또한 우리가 머물렀던 무인도의 이름이 호산도(虎山島)였음을 알려줬다.

 

이윽고 이들의 인도로 선내를 구경할 수 있었다. 배의 크기는 가히 100걸음 남짓하고 그 길이는 배()가 될 것 같다. 배 한구석에는 파와 채소를 심어둔 밭이 있다. 닭과 오리도 있는데 사람이 가까이 가도 놀라서 날아다니는 일이 없었다. 한구석에는 땔감을 많이 쌓아두었고, 혹은 그릇 등의 것을 잡다하게 쌓아두었다. 또한 어떠한 물건이 있는데, 그 크기는 열섬들이 항아리 같으며 위는 둥글고 아래는 모가 나 있었다.

 

옆에는 구멍이 하나 뚫려있는데, 연보다 큰, 붉게 칠한 나무못으로 그 구멍을 막았다. 그 못을 빼면 물이 솟구치듯 뻗쳐 나온다. 그 위에는 전자(篆字)로 된 작은 명문(銘文)이 있는데 그 뜻은 알 수가 없다. 임준이 말하기를 이것은 물그릇인데 여기에 물을 채워두면 써도 다 마르지 않고, 물을 더 부어도 넘치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어느 한 켠에는 양·염소·개·돼지 등 가축을 많이 기르고 있는데, 떼를 지어 놀고 있다.

 

대저 배의 제도는 모두 4층으로 되었는데 사람은 상층에서 거처하게 되어 방옥(房屋))이 서로 연이어 있다. 그 밑 3층에는 간가(間架)가 연달아 있고, 백물(百物)이 고루 저축되어 있으며 기명(器皿)이 질서 있게 정돈되어 있어서 무엇을 하든 한 가지도 불편한 점이 없게 되어있다. 배의 밑바닥에는 두 개의 작은 배가 들어있는데, 그 중 하나는 호산도에 정박했던 우리들의 배이다. 배의 바닥에는 물을 넣어두어서 작은 배가 뜨도록 되어있으며, 또 널판문이 달려 있어, 바다와 통하게 되어있다. 널판문을 열고 닫고 할 때, 바닷물이 그 문을 통하여 배 밑바닥으로 들어와서는 목통(木桶)속을 거쳐 바깥으로 흘러내리는데, 그 광경이 마치 높이 내리 떨어지는 폭포 같다. 그 밖의 장치들도 모두 극히 기교하게 만들어져 있으나 그 규구(規矩)를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오후가 되니 서남풍이 크게 일어난다. 파도는 산더미처럼 밀려들었지만, 그들은 하나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백포(白布)로 된 돛을 높이 펴니, 배는 나는 듯이 달린다.

 

1771/01/04 안남 상선

저녁때가 되어가니, 바람이 차차 잠잠해지고, 안개가 사방을 가렸다. 안남인 방유립(方有立)이 나에게 향사도(香瀉島)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청려국(靑黎國)의 향사도는 광동(廣東)의 남해 밖에 있다. 청나라 세상을 피해 명나라 사람들이 많이 이곳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이 섬에는 조선촌(朝鮮村)이 있고 김대곤(大坤)이라는 명망가가 있었다. 그의 4대조는 옛날 조선에서 청나라의 포로로 잡혀 남경(南京)에 갔다. 그 때 명나라 사람들을 따라 이 섬(향사도)으로 왔다. 그리고 아내를 맞아들여 자손을 낳고 정착하였다. 그러나 고향이 그리워 높은 산에다 대()를 쌓아 멀리 고국(故國)을 바라보면서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그 대의 이름을 망향대(望鄕臺)라고 불렸다. 이러한 얘기를 한 후 임준 등은 나에게 조선의 풍속·인물·의관(衣冠) 및 산천·지방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나는 조선이 기자(箕子)가 남긴 문화를 이어받아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이학(異學)을 배척하였다. 그리하여 나라에선 예악()·형정(刑政)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백성들은 효제(孝悌)·충신(忠信)을 행동의 근본으로 삼아 나라가 일어난지 400(조선 건국부터 영조 때까지)이 지났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이들이 나에게 글로써 물을 때에는 ‘너희나라(爾國)’라 하지 않고, ‘귀국(貴國)’이라 칭하고, ‘너희들(爾們)’이라 하지 않고 ‘상공(相公)’이라 하였다.

 

1771/01/05 안남 상선

해뜰 무렵에 동북쪽에 한라산이 보였다. 표류하던 우리 일행은 한라산을 보고는 기쁨이 지나쳐 저도 모르게 목을 놓아 울었다. 어떤 일행은 지금 우리 배를 띄어 제주도로 향하자고 하였다. 안남인 임준이 이 상황을 보고 물어보자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이윽고 안남인들이 서로 떠들썩하게 지껄이더니 싸움이라도 벌어지려고 하였다. 원건을 쓴 임준 등 수십여 인은 한쪽 구석에 둘러서 있고, 또한 머리를 깎은 사람 80인도 나누어져 한 구석에 둘러섰다. 머리를 깎은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성난 눈초리로 으르렁거리면서 금방이라도 임준 무리와 싸울 것 같은 기세였다. 임준이 모두를 천천히 달래는 기색이었다.

 

한나절 후 임준이 이러한 사단이 일어난 까닭을 설명해 주었다. 이유인즉슨, 옛날 탐라왕이 안남 세자를 죽였으므로 안남인들이 우리가 탐라인이란 사실을 알고 우리일행 모두를 배를 갈라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였으나, 임준 등 중국인들이 만방으로 달래 그 마음을 돌렸다고 한다. 즉 예전에 제주목사가 죽였다는 유구태자가 실은 유구태자가 아니라 안남세자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원수끼리 같은 배를 탈 수 없으므로, 지금 당장 길을 나누어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원래의 우리 배를 내려 주고 안남선은 쏜살같이 가버렸다. 밤이 되니 바람이 급히 불어 배는 몹시 빨리 달렸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다.

 

2차 조난

 

1771/01/06 2차 조난

해뜰 무렵에 보니 배는 한라산의 서북쪽에 와 있는데, 남풍에 몰리어 흑산도(黑山島)의 큰 바다를 향해 떠나가고 있었다. 오시(午時)에 비가내리고, 서남풍이 불다가 멎었다가 한다. 하지만 배에는 돛대가 없어 뜻대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윽고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서풍이 불었다. 황혼이 깃들 무렵, 배는 노어도의 서북쪽에 닿았다. 바로 처음 폭풍을 만나 표류하던 곳이다. 저문 뒤에 서북풍이 크게 일어나고 비와 눈이 번갈아 내렸다. 큰 물결일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치고, 회오리바람은 바다를 체질하듯 들까불어댄다.

 

사람들이 살아날 가능성이 없을 것 같아 울기 시작하였다. 나는 호산도에서 점을 쳐보니 먼저 흉()한뒤 길()하다는 이야기를 해주며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사공이 울면서 대답하기를, 노도의 북쪽은 모두 난서()와 험안(險岸)으로 그곳의 바윗돌이 마치 칼날 같고 파도가 몹시 험악하므로 바람이 불지 않는 날도 배가 부서져 빠지기도 하는데, 지금 바람이 미친 듯이 불고 성난 파도가 몰아치니 죽지 않고 어찌 배기겠냐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까무러쳐버렸다. 기절한 동안 일찍이 기축년(己丑年)에 죽은 동네 사람이 보이는가 하면, 별별 괴상한 도깨비 형상이 눈에 어른거렸다. 그리고 비몽사몽간에 문득 한 미녀(美女)가 소복을 입고 나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기도 하였다. 그 후 겨우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바람은 세게 불고, 사공은 키를 놓고 엉엉 울고만 있었다. 키를 잡으려던 사람들이 바람에 휩쓸려서 물에 빠져 죽기도 하였다. 결국 배가 부서져 버렸다. 사람들은 속절없이 죽겠구나 생각하여 서로를 찾으며 울고만 있었다.

 

다행히 배가 부서진 정도를 살펴본 결과 크게 부서지지는 않았다. 배에 찬 물도 생각보다 많지 않아 나는 사람들에게 살 수 있을 거란 용기를 주었다. 그리하여 강진(康鎭)의 뱃사람(船人) 김칠백에게 배가 나아가는 방향을 살펴보게 하였다. 그러나 전방에 보이는 뾰족한 돌섬은 출렁이는 물결 위로 성난 짐승의 이빨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대로 흘러가면 파선(破船)은 불 보듯 뻔하였다. 그러나 배는 다행히 물결을 따라 흘러가 부딪치는 것을 모면했다. 배는 소안도(所安島)를 지나 크고 작은 모도(茅島)사이를 20여리 가량 지나갔다. 지나가면서 돌섬들에 부딪치려는 것을 네 번이나 모면했다.

 

해시(亥時)무렵, 사람이 살 정도의 은연(隱然)히 큰 산이 보였다. 뱃사람들은 헤엄에 능하므로 섬에 도달하고자 너도나도 물속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나는 헤엄을 잘 치지 못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는 사이 배는 점점 뒤로 물러나니 별 수 없이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물 속의 석맥(石脈)에 발이 닿아 얼굴을 물 밖으로 드러낼 수 있었다. 그리고 석맥을 따라 물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섬에 닿아 평평한 곳에 있으니 헤엄 친 사람들이 하나 둘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파도가 높아 모두 다 헤엄쳐 올 수는 없었다. 한 뱃사람이 내가 헤엄을 못 치는 것을 알고 죽었으려니 하면서 슬피 울었다. 주변이 깜깜하여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살아있음을 알리자 모두들 기쁜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사람 수를 세어보니 뭍에 올라온 사람들이 나까지 전부 열 사람이었다. 뭍으로 올라온 사람들도 추위와 피로함에 빨리 만가를 찾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길이 험하여 사람들은 낭떠러지를 붙들며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절벽에서 미끄러져 하마터면 바다에 빠질 뻔 했으나 다행히 굴러 떨어짐을 면하였다. 다시 언덕을 부여잡고 평탄한 땅에 다다랐지만, 앞서간 사람들은 벌써 멀리 가버려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들 인가(人家)를 찾아 가버린듯 했다.

 

나는 퉁퉁 부은 발로 수없이 넘어지면서 밭두덕과 산비탈을 걸었는데,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쪽에서 불빛이 보여 그곳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10리나 걸어도 불에 가까워지지 않았고 그 불은 이내 사라져 버렸다. 도깨비불(鬼火)이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아버렸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는 마을을 찾아야 됐다. 다행히 개 짖는 소리가 들리니 마을이 멀지 않은 것 같았다. 이윽고 먼저 마을에 도착한 사공 이창성이 섬사람 10명과 함께 다른 사람을 찾으러 나온 사람들과 만났다.

 

이 섬은 청산도(靑山島)라고 한다. 도깨비불을 따라가지 않았던들 이들과 만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행을 살펴보니 두 사람이 안보였다. 아마 절벽에서 떨어져버린 것 같다.

 

사랑과 귀향

 

1771/01/07 사랑과 귀향

대낮에 가까워져서 비로소 의식이 들었다. 섬사람들이 모두 찾아와서는 온갖 죽을 고생을 하고 간신히 살아나온 놀란 마음을 달래주었다. 이 섬에 사는 김만련(萬鍊)·김하택(夏澤)·곽순창(郭順昌) 등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돌보아주었다. 일행을 점검해보니 이창성·유창도·김순기·김칠백·김재완·양윤하 그리고 나와 김서일은 이승으로 살아 돌아왔으며, 강재유 등 21명은 저승사람이 되었다. 뱃사람들이 해변에서 박항원·이도원의 시체를 수습하였는데, 시체가 찢어지고 부서진 것이 그 모습이 말이 아니었다. 이들을 장사지내게 하고, 내가 다친 곳을 치료하였다.

 

1771/01/08 사랑과 귀향

이 섬은 바다 가운데 있는데 신지도진(新智島鎭)에 예속되어있다. 북으로 본진(本鎭)과의 거리가 수로로 100여리가 되며, 서남쪽으로는 탐라(耽羅)와의 거리가 700리나 된다. 섬의 넓이는 30리이며 이 섬에 있는 민가는 몇 백 집에 달한다. 논은 비옥하고 해산물 역시 풍부하다. 부유한 사람은 바다에만 의존한다고 한다. 초옥(草屋)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으며 남자가 적은 데 비해 여자의 수가 더 많다. 고깃배들은 쉴 새 없이 드나드는데,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온다. 이 섬엔 둔장(屯長) 한사람, 검찰(檢察) 한사람이 있어서 이들이 이 섬을 맡아 다스린다.

 

1771/01/09 사랑과 귀향

나는 둔장에게 부탁해서 아침밥을 스물한 상을 차려서 바닷가 언덕머리에 벌여놓고, 바다 쪽으로 각자의 지방(紙榜)을 만들어서 물에 빠져 죽은 스물한 사람의 혼을 제사지냈다. 내가 친히 제문(祭文)을 읽었는데, 한 구절 한 구절마다 눈물이 흐르고, 하도 슬퍼서 목이 멘다. 또 모두들 소리를 같이하여 울었다.

 

이날 나는 해구(海口)의 형세를 두루 돌아보았다. 험한 해안과 여기에 부딪쳐 일어나는 물결, 거기에 한 가닥 마을로 들어오는 섬의 길이 암벽 사이로 꼬불꼬불 연이어 있다. 그날 밤 부여잡고 오르던 곳이 바로 이 길인데, 어찌나 험난한지 한 발자국도 허술히 내디딜 수가 없을 정도다. 저녁 썰물 때에는 석서(石嶼)를 보았다. 그 길이가 100걸음 남짓한데, 바다 속에 한 가닥 돌길을 이루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이 용왕당(王堂)에서 용신()께 빌러 가는 것을 따라갔는데, 거기서 제사를 끝낸 후 술대접을 받았다. 소복(素服)한 미녀(美女)에게 시켜 나에게 먹을 것을 올리게 하며, 술 항아리를 기울여서 또한 술마시기를 권하게 하였다. 소복한 여인을 바라보니, 왠지 낯이 익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바다에서 풍파(風波)를 만나 까무러쳐 정신을 잃었을 때 나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준 바로 그 여인이었다. 그 여인은 청산도에 있고 나는 제주도에 살면서 머나먼 바다로 가로막혀 평생에 단 한번도 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지난날에는 꿈속에서 나에게 먹을 것을 주고, 이제는 사당 아래에서 마주 대하게 되었으니 전생(前生)에 연분이 없었다면 어찌 이럴 수 있으리오. 알고 보니 그 여인은 조씨(趙氏)의 딸로 스무 살의 과부란다.

 

1771/01/10 사랑과 귀향

절벽에 떨어져 죽은 이도원과 박항원을 당촌의 서쪽에 장사지냈다. 저녁 때 돌연 떠들어대며 다투는 소리가 길거리에서 들려왔다. 이유인즉슨, 이 섬이 육지에 멀리 떨어져 있어서 왕화(王化)를 입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북륙(北陸)에 사는 사람들이 이 섬에 들어와 작폐(作弊)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방금 이진진(津鎭)의 아전 하나가 신은(新恩) 한 사람을 거느리고 주식(酒食)을 달라 하고, 남자 광대의 전재(錢財)를 마구 빼앗고, 사람들의 농우(農牛)를 빼앗는 등 행패를 부린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소를 빼앗김에도 불구하고 송사(訟事)가 벌어지면 더욱 괴롭힘을 당할 생각을 하니 어쩌질 못하고 있었다.

 

1771/01/11 사랑과 귀향

섬사람 정재운(丁載雲)과 문식에 대해 이야기하였으나, 청산도의 사람들이 제주도 사람들보다 글을 덜 배웠음을 알게 되었다. 한편 어젯밤 뱃사람들이 포구(浦口)에서 가죽으로 만든 행담(行擔)을 주워왔다. 이 안에 내가 호산도에 있을 때 써둔 표해일록(漂海日錄)을 넣어두었는데, 지금 꺼내보니 떨어져 달아나고 젖어 뭉개지고 해서 대부분 그 내용을 알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뜻을 더듬어 생각해 올라가니, 어느 정도 그 대강을 알 수 있었다.

저녁때, 김만련이 조씨의 집으로 팔려간 자신의 옛 계집종 매월(梅月)과 함께, 내가 담을 넘어 조씨의 집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일을 꾸며주었다. 그리하여 그날 밤 나는 조씨의 딸과 운우(雲雨)의 정()을 나눌 수 있었다. 이 후 조씨의 딸은 나에게 마음이 있어 나한테 재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나는 슬프게도 이미 결혼한 상태라 그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씨의 딸은 슬퍼하며 5년간 나를 기다리다가 그래도 오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재가하겠다고 말했다.

 

1771/01/12 사랑과 귀향

섬사람들이 이 섬과 강진(康鎭)의 남당포(南塘浦)와의 사이는 그 길이 몹시 멀다는 말을 들었다. 또 이 섬에 제일 가까운 신지도(新智島)만으로 수로(水路)로 겨우 100리 남짓인데, 여기서 나루 둘을 건너면 곧 편안히 육지로 나갈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강진으로 가려 했지만 몹시 데었기 때문에 먼 바닷길을 건너는 것은 딱 질색이므로 지도를 거쳐 육지로 나가려고 하였다.

 

1771/01/13 사랑과 귀향

선주(船主)가 오늘이 순풍(順風)이니 오늘 떠나지 않으면 시일이 지체된다고 하여, 배를 타고 지도로 갔다. 해가 저물어가 지도에 있는 당촌의 마을에서 잤다.

 

1771/01/14 사랑과 귀향

당촌에서 10리를 가서 나루를 건너니 고금도(古今島)에 닿았다. 고금도에서 20리를 가서 나루를 건너니 마두진(馬頭鎭)에 도달했다. 진 밑의 객점(客店)에서 잤다.

 

1771/01/15 사랑과 귀향

마두진에서 떠나 50리를 가니, 강진의 남당포(南塘浦)에 도달하였다. 여기서 일행은 제주도 출신의 상인들을 만났다. 모두들 제주로 돌아가고자 했지만, 나는 과거를 보기위해 제주로 돌아가자는 이들의 제안을 뿌리쳤다. 고향에 전하는 편지를 써서 제주로 가는 김서일에게 주었다.

 

1771/01/16 사랑과 귀향

나와 같이 표류한 사람들(漂人輩)은 어제 만난 제주 상인 김중택(仲澤) 등과 함께 제주로 향하였다. 나루터에서 서로 이별하니 헤어지는 마음을 참기 어려웠다. 서로 눈물을 뿌리치며 헤어졌다. 객점에 돌아와 누우니 고향이 그리워지는 마음과 이별의 한스러움이 마음을 짓눌렀다. 술을 사서 흠뻑 마시고 취하여 쓰러져 잠들었다. 내가 서울로 간다고 한 것은 단지 핑계고 실은 지금 바람이 높기 때문에 배를 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관사(官事)로 서울로 향하는 동향인 김창현(昌賢)의 권유로 서울로 갈 결심을 하였다.

 

1771/01/19 사랑과 귀향

길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스크랩] 유구왕자 살해설/장한철과 이지환의 일본 인식/유구사람의 조선 인식

 (출처 :일본어 일본역사 공부하기 원문보기   글쓴이 : 민덕기)

 

◯ 琉球王子殺害說의 傳承


조선후기 표류와 관련한 정보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윤색․변형되어 전설화되고, 특정 지역민에게는 새로운 행동원리로 작용하는 일이 있었다. 그 예를 琉球王子殺害說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를 파악하기 위해, 1937년 제주도민 李雄植이 전설을 採錄하러 그곳에 들린 민속학자 崔常壽에게 들려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해 보자.

조선 仁祖때 琉球가 일본의 침략을 받아 그 왕이 일본으로 잡혀갔다. 그러자 왕자는 왕을 구하려고 보물을 배에 가득 싣고 일본으로 향하다가 제주도에 표착했다. 濟州牧使 李箕賓이 筆談으로 유구왕자임을 파악하고 후대하였다. 며칠 후 배에 실려있는 짐을 검사하기 위해 왕자에게 물으니 배 안에 酒泉石과 漫山帳이 있다고 답했다. 주천석은 四角의 돌로 만들어진 것으로 그 가운데 구멍이 있어 물만 넣으면 술이 된다는 보물이며, 만산장은 거미줄을 모아 물들여 짠 휘장으로 어떤 물건이라도 능히 덮을 수 있고 덮으면 빗물도 새어들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목사가 이를 탐내어 달라고 졸랐으나 거절당하자 강압적으로 이를 빼앗으려 했고, 이에 왕자는 그 두 신기한 보물을 바다에 던져버렸다. 화가 난 목사가 다른 물건들을 강탈하고 배에 탄 유구 사람들을 모두 살해하기에 이르자, 왕자는 종이와 붓을 달라하여 자신의 사연을 글로 기록하고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 그후 목사는 朝廷에 보고하여 유구 왕자가 노략질을 해 와서 죽였다고 했으나 결국 사실이 탄로나 重罪를 받게 되었다.1)

이 이야기를 통해 유구왕자살해설이 단순한 전설이 아닌 仁祖代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음을, 그리고 20세기 전반까지 제주도에 口傳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전설은 내용상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이미 18세기 중반 李重煥의 『擇里誌』―「卜居總論」에 등장하고 있고, 이후 18세기 후반 朴趾源의 『燕岩集』(卷14) 등으로 계승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전설은 조선후기 사대부층에게 거의 常識으로 광범하게 정착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2)

유구왕자살해설은 實錄에 그 起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즉 1611년(光海 君 3년) 제주도에 商船이 표착하여 牧使 李箕賓이 이를 약탈하고 승선원들을 모조리 살해했다고 하고, 다음해엔 朝廷이 이 상선에 대해 일본을 왕래하는 ‘安南船’, 또는 중국선으로 추정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1613년엔 이 상선에 중국인 외에 유구인과 일본인이 승선했다고 추정하고, 그들이 살해될 지경에 이르자 젊은 琉球使臣이 능란한 文辭로 비장한 심정을 토로했다고 적고 있다.3) 그러나 1623년 仁祖가 즉위하자, 明에 제출할 奏文 내용에 光海君代 표착한 琉球世子를 살해했다고 기술하자는 주장이 나왔고, 이에 대해 李元翼이 世子 여부가 불확실하다며 반대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 2년 뒤 사망한 李箕賓의 卒記에서는 유구 선박이 표착하여 여기에 승선해 있던 왕자가 살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4)

이처럼 실록에서 이기빈에게 해를 입은 표착민을 광해군 때엔 ‘安南人’ →중국인 →유구사신으로 추정했다가 仁祖代엔 유구왕자로 지위 상승시켜 가고 있다. 그 배경에는 仁祖 정권의 광해군에 대한 惡政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 說이 이같이 仁祖정권에 의해 왜곡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제주도 주민에게 정착되어 갔다. 그 사실은 1741년 유구에 표착했다 송환된 제주도민 金喆重 일행에 대한 「濟州漂流人別情別單」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들은 유구로 표류되면서 차고 있던 號牌와 ‘濟州’가 표기된 문서 및 錢文 40餘兩을 바다로 던져버린다. 제주도 사람임이 유구측에 발각되면 살해된다는 우려에서였다. 그후 琉球 官吏의 심문에서도 출신지역을 전라도 靈岩郡이라 답하고 있다.5)

그로부터 30년 후인 1770년 제주도민으로 유구에 표류했던 張漢喆도 같은 대응을 보이고 있다.6) 그는 표류가 시작되자 최부의 『표류록』을 상기하여 유구로 표류될 것을 확신하고 자신과 일행의 號牌를 모두 바다에 버리고 있다. 유구왕자살해설을 사실로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7) 유구의 無人島에 표착한 이들은 일본으로 향하는 베트남 商船에 구조 받는다.8) 그리고 일본으로 가는 중에 한라산이 멀리 보이게 되자 반가움에 울부짖는다. 그러자 이 광경을 보고 이들이 제주도민임을 알게 된 베트남 상인들은 이들을 작은 배로 옮겨 태워 망망대해로 내쫓는다. 옛날 ‘安南太子’가 耽羅王에게 살해되었다는 이유에서 제주도인들에게 복수를 한 것이었다. 이에 장한철은 급기야 유구왕자살해설을 否定하고 ‘安南太子殺害說’로 수정하기에 이른다.

장한철처럼 실학자 鄭東愈도 1806년 편찬한 『晝永編(上)』에서 유구왕자살해설을 부정하고 있다. 그는 유구왕자 살해로 朝․琉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俗說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와 관련하여 조선 사신이 북경에서 직접 유구 사절에게 조선을 원수처럼 생각하는가를 묻고 이를 부정하는 답을 들었다는 傳聞을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1727년 譯學 李齋聃이 제주도민 高商英으로부터 口述 받은 다음과 같은 표류 체험담을 轉載하여 이를 증명하려 하고 있다.9)

1687년 제주도민 고상영 일행 24명이 楸子島 근해에서 표류하여 베트남에 표착하였다. 이들이 필담을 통해 조선인임을 밝히자, 現地 地方官은 옛날 ‘安南太子’가 제주도에 표류하여 그곳 사람들에게 살해당했으니 복수해야겠다며 죽이려고 하였다. 이들이 놀라 울부짖자 한 貴婦人이 나타나 구원해 주었다. 그후 이들은 베트남의 首都로 移送되어 국왕을 알현하고 귀국을 허락 받았다. 이에 중국상인 朱漢源 등에 의해 조선인 1인당 쌀 30석을 보상하여 준다는 조건으로 이들이 조선에 송환되는 것은 다음해 12월이다. 실록은 이들이 송환조건을 이행할 경제적 능력이 없어 조선정부가 대신 중국상인들에게 銀으로 배상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0)

그러나 이같이 제주도민 고상영․장한철의 실제경험에 의해 주장된 ‘安南太子殺害說’은 정보로서 전승되거나 활용되지 못한다. 오히려 1828년 朴思浩의 「心田稿」에서 보듯 유구왕자살해설이 정보로서 口傳되고 제주도민의 유구 표류에 작용하고 있다. 박사호는, 유구가 유구왕자 살해에 대한 보복으로 표류해 온 제주도민을 언제나 살해하며, 제주도민은 이를 두려워하여 유구에 표착하면 타지역 출신이라 詐稱하여 위기를 모면한다고 적고 있다.11) 이같은 왜곡된 정보는 전설의 형태로 20세기까지 전승되었으니, 전술한 이웅식의 例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다.



◯이지환에게 일본은 어떤 나라였을까?

李志恒은 1696년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에 표착했던 인물로 『海舟錄』을 남기고 있다. 그는 홋카이도 남단의 마츠마에(松前)藩으로부터 들은 정보에 의거하여, 홋카이도에 거주하는 에조(蝦夷 :아이누족)는 文字나 농경을 몰라 漁撈와 수렵으로 생활하는 짐승 같은 부류이며, 그 북방에는 長身의 붉은 털을 가진 족속이 있는데 그 곳에 표착하면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고 기록하고 있다.12) 이러한 에조에 관한 정보는 그후 실학자들에게 계승된다.13) 이지환은 아이누 거주 지역으로부터 천신만고 끝에 마츠마에藩에 도착하여 만세를 외쳤다. 筆談이 통하는 漢字문화권에 진입했기 때문이며, 쌀밥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필담에 의해 조선 文人(실은 武官)으로 후한 대접을 받고 고국으로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유구사람들이 그린 조선사람

1662년 전남 務安사람 18인이었다. 그들이 유구에 표착했을 때 유구인들은 처음엔 조선인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윽고 유구인들이 북 하나를 가지고 앞에 와서 손으로 가리키며 鼓舞하는 모양을 지었고, 이에 그 뜻을 알아차린 조선인들이 노래를 부르며 북춤을 추자, 그때에서야 유구인들은 高麗人이라고 부르면서 거처와 양식을 주어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 시기 유구인들에게 조선인이 가무에 능하다는 인식이 일반화 되어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표류민들은 또한 유구에 장발한 자와 삭발한 자가 섞여있다고 보고하고 있다.14)




1) 최상수, 『한국민간전설집』(통문관, 1958년) 176~8쪽.
2) 松原孝俊, 「朝鮮における傳說生成のメカニズムについて―主に琉球王子漂着譚を中心として」(일본 『朝鮮學報』137. 1990) 120쪽.

3) 『광해군일기3년 8월 계사, 4년 2월 을해․4월 기묘, 5년 정월 병술.

4) 『인조실록元年 4월 계유, 3년 정월 정사.

5) 『備邊司謄錄』109책 英祖17년 11월 23일.

6) 張漢喆 지음 鄭炳昱 옮김, 『漂海錄』(범우사, 1979).

7) 장한철은 앞의 책에서, 유구사절의 寄港地가 順天府 昇平館이었다 하고, 광해군 3년 제주도에 표착한 유구왕자를 살해한 까닭에 이후 유구사절의 왕래가 중단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로 보아 그가 조선과 유구와의 관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구사절의 도항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 유구와의 국교단절이 유구왕자살해설에 기인한다는 그의 인식은 유구사절의 조선왕래가 임진란 이전에 이미 단절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잘못된 판단이다.

8) 장한철은 이 무인도에서 한 무리의 일본인과 遭遇하게 되고 도움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들은 해적행위를 나선 왜구들이었으며 장한철 일행은 이내 그들에게 약탈당한다. 조선후기 동아시아에서 왜구가 종식되었음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정보가 아닐 수 없다. 약탈당한 장한철은 곧 임진란을 상기하며 분개하고 있다. 18세기 조선인에게 임진란은 對日감정의 主因으로 잠복되어 상황에 따라 곧 표출되는 구조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9) 鄭東愈지음 南晩星 옮김, 『晝永編(上)』(을유문화사, 1971).

10) 『숙종실록』15년 2월 신해.

11) 朴思浩, 「心田稿」(『燕行錄選集Ⅸ』「심전고―留館雜錄 諸國」).

12) 李志恒, 『漂舟錄』(『海行摠載』Ⅲ, 민족문화추진회, 1975) 417~418쪽. 文旋奎는 같은 책 이지항의 「漂舟錄 解題」에서 그의 표류시기를 1756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趙洙翼, 「한 武人의 北海道 漂流」(소재영․김태준 편, 『여행과 체험의 문학―일본편』민족문화문고간행회, 1985) 81~83쪽, 그리고 일본측의 관련史料(池內敏, 「17世紀, 蝦夷地に漂着した朝鮮人」『近世日本と朝鮮漂流民』, 일본 臨川書店, 1998. 280쪽 註4 참고) 로 볼 때 1696년이 합당하다. 

13) 趙洙翼, 「한 武人의 北海道 漂流」(소재영․김태준 편, 『여행과 체험의 문학―일본편』민족문화문고간행회, 1985) 79쪽.

14) 『현종실록』3년 7월 기해.

 

제주도 문화재27호(장한철의 표해록 제주시)

(미탁  2012.04.01. 10:32)

 

장한철의 표해록 시도유형문화재27호(제주시)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국립제주박물관

제주시 애월읍 애월리에서 태어난 장한철(張漢喆)은 1770년 12월 25일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류쿠제도(오키나와)에 표착을 한다. 「표해록(漂海錄)」은 장한철이 류큐제도에 표착한 뒤 일본으로 가는 상선을 만나 구조된 뒤, 우역곡절 끝에 한양에 가서 과거에 응시하고 낙방한 뒤 귀향하여 쓴 책이다. 당시의 해로와 해류((海流)), 계절풍 등에 관한 해양 지리서로서 문헌적 가치가 높고, 제주도의 삼성(三姓) 신화와 관련한 이야기, 백록담과 설문대 할망의 전설, 유구 태자에 관한 전설 등 당시 제주도의 전설이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어 설화집으로서의 가치도가 높다

 

 

[스크랩] 장한철의《표해록》에서 한라산이 어디라고?

(출처 :대륙 조선사 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 최두환)

 

장한철이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 나는 잘 알 수 없다.
그런데 그에 관한《조선왕조실록》에는 <영조실록>권124의 영조51년(1775) 1월 그믐날에 과거에 합격했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실존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그런데 그가 1770년 12월 25일부터 이듬해 1월 16일까지 22일 동안의 해상에서의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 바로《표해록》을 남겼다. 모두들 해양소설이라고 한다. 이미 부분적으로 언급한 바가 있지만, 여기서는 지리적 위치의 한 가지만 설명코자 한다.
여기서는 이《표해록》에 대한 소감을 체험과 더불어 쓴 글과 연결하여 보기로 한다.

"234년 전에 쓰여진 조선 선비 장한철의 '표해록'은 늘 나를 깨어 있게 하는 죽비 같은 삶의 매뉴얼이다. 내가 이 작품에 매료된 것 은 아무래도 작자와 비슷한 나이에 외항선 항해사 생활을 한 것과 무관치는 않다. 난파 직전의 절박한 해난 체험을 솔직하게 묘사 한 대목에서는 전율을 느낀다. 현창 앞도 안 보이는 장대비, 매서운 폭풍과 난바다의 항로를 헤쳐가던 선상생활이 오버랩 된다. '삼단같이 내리쏟는 빗발로 사람들은 눈을 뜰 수 없고, 큰 물결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치는….' 이 절묘한 표현은 황천항해로 긴박했던, 나의 체험 그 자체이기도 하다."[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idetail&query=%C0%E5%C7%D1%C3%B6&from=image&ac=-1&sort=0&res_fr=0&res_to=0&merge=0&start=1&a=pho_l&f=nx&r=1&u=http%3A%2F%2Fnews.naver.com%2Fnews%2Fread.php%3Fmode%3DLSD%26office_id%3D082%26article_id%3D000005590]

이렇게 바다의 생활은 참으로 험악하고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의 현장이다. 바다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그 모든 것을 낭만으로, 로맨틱하게 시를 쓰고, 수필을 쓰고, 소설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다에서 뱃멀미를 열흘 내내 해본 사람이면 바다를 보면 소름부터 끼친다. 그럼에도 바다를 잊지 않고, 바다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그 바다에서 삶의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바다 위에서 10년을 더도 겪어왔다. 그래서 바다라고 하면 누구보다도 더 애착이 가며, 바다라고 말하면 눈에 불을 켜고 말을 끄집어내며 침을 틔기 가며 언성을 높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런 바다에서의 표류라는 말은 가장 극단적인 상황이다.

그런 장한철의 일행 29명이 제주를 출발하여 북쪽으로 갔다가 추자도·소안도·청산도를 지나면서 북풍·서북풍에 밀려 표류되어 류구 섬으로 갔다고 한다. 그것도 출발했던 그 섬 제주도도 아니고 그보다도 멀고도 먼 그 섬에 표류했다고 했다.

그런 일이 가능한가?
일단 나의 해상 경험으로는 불가능하다.
실존인물이 그렸던 그 해상이 현재의 한반도 남쪽의 바다를 가리키는 것인지 납득할 수 없는 것은 바닷 생활을 한 사람이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면 그보다 더한 잘못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위에 소개한 사람의 체험기가 옛날 력사소설에서나 있는 것과 대비시켜 그 어려움을 강조하려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경고한다.
정말《표해록》을 제대로 읽었고, 그《표해록》이 자신의 삶과 얼마나 같은 상황을 그려낼 수 있는지를 비교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내용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보자.

"무릇 탐라의 한라산은 큰 바다 가운데 있어서 오직 북으로 조선과 통할 뿐인데, 그 수로는 980리 남짓하다. 동·서·남의 삼면은 바다가 있을 뿐 땅이 없는데, 넓고도 넓어 끝이 없다. 일본의 대마도는 한라산의 동북쪽에 있고, 일기도는 정동쪽에 있으며, 여인국은 동남에 있다. 한라산의 정남쪽에는 곧 크고 작은 류구 섬들이 있으며, 서남쪽에는 안남·섬라·점성·말라카 등의 나라가 있다. 정서쪽에는 곧 옛날의 민중, 지금의 복건로이다. 복건의 북쪽은 곧 서주·양주의 지역이다. 옛날 송이 고려와 교통할 때에는 명주에서 배를 떠나 바다를 건넌다. 명주는 양자강의 남쪽에 있는 지방이다."[정병욱 옮김, 장한철 지음『표해록』(범우사, 2006 2쇄 6판), pp.38-39]

자! 여기서 우리들의 방향감각을 살려 그 지리적 위치를 살펴보자.
한라산의 동쪽에 대마도니 일기도가 있다는 말은 마치 한반도의 남쪽 제주도에서 본 것 같이 느껴진다.
한라산의 동남쪽에 여인국이 있다는 말은 한반도에서는 납득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을 보고 나서 생각해보자.

한라산의 정서쪽에 무엇이 있는가? 복건로, 즉 복건성이 있다고 했다.
이와 반대 방향으로 보면, 복건성의 정동쪽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바로 대만(臺灣: Formosa)이다. 그것이 한라산이 있는 섬이다.

그 한라산, 즉 대만에서 서남쪽에 안남[베트남]·섬라[태국]·점성[베트남 남부]·말라카[말레이]가 있다. 그래서 그 설명이 맞아떨어진다.

명주가 있다는 지리적 설명이 양자강 하류 남쪽에 있는 것을 보면, 현재 지도에서 보는 바와 전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탐라의 한라산이란 탐라도 위에 있는 한라산이라는 설명과는 차이가 있다. 한라산은 탐라에 속했지만, 굳이 그 섬에 있어야 할 아무런 까닭이 없다. 다시 말해서 탐라는 섬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제야 알 수 있는 것은 장한철이 북쪽으로 항해해 가다가 폭풍에 표류되어 류구 섬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은 한반도 남쪽의 제주도가 아니었다는 말이며, 그 제주라는 탐라는 적어도 복건성 남쪽 지역이 되어야 가능한《표해록》이 되는 것이다.

해양소설도 소설다와야 한다. 그래야 나 같은 사람이 읽으면 리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구로시오 해류가 남지나해에서부터 동북쪽으로 흐르는데, 어떻게 하여 소안도·청산도까지 북쪽으로 항해했던 배가, 그 정도면 해안에 표류가 가능한 위치인데도 불구하고, 제주도의 정남쪽의 840㎞나 되는 류구 섬으로 표류가 가능하단 말인가?

이것은 하늘이 두 조각나도 불가능하다. 아마도 하느님이 그 배를 들어다가 옮겨놓지 않는다면.
이런 글을 읽고서 자신의 경험으로 비유하려면 그만한 지식을 쌓지 않으면 그 삶마저 거짓이 된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거짓으로 해석된 자료를 진실로 받아들이는 잘못을 짖지 말아야 할 것이다.

원문을 아직 구해보지 못했지만, 정말 구해보고 싶다. 그러면 해석이 더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한철 표해록 기적비',애월에서 제막
제주문학의 새 이정표로 자리 매김

 (2011. 10.26. 16:07:10)

 

* 장한철 선생 표해 기적비
문기선 전 제주대학교 교수가 기적비 제작 과정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사진=박우철 시민기자

애월리 출신 장한철 선생의 표해 기적비 제막 및 기증식이 25일 오전 11시 김병립 제주시장 및 지역출신 도의원, 장시 목암문화재단이사장 등 후손과 지역주민 3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애월읍 애월리 한담공원에서 열렸다.

장한철 선생은 조선후기 영조 시대의 유관으로, 호는 녹담거사鹿潭居士이며 수재로 젊어서 몇번이나 향시에 합격, 영조 46년 가을에 다시금 향시에 장원을 하게 되자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중 일행 29명을 태운 배가 풍랑을 만나 지향 없이 표류하면서 갖은 고초와 사경을 넘고 4일 만에야 겨우 유구열도(오키나와)에 표착 5일만에 안남의 상고선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구원을 받았으나 다시 본토 상륙 직전에 태풍으로 선체와 함께 21명의 동행자를 잃고 겨우 살아남기까지의 경과를 상세하게 기록한 것이 곧 이 "표해록'이다.

표해록은 당시의 표류과정과 생환과정을 통하여 해로와 물의 흐름 계절풍의 변화 등을 알 수 있게 해주어 해양지리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백록담과 설문대할망 전설

등이 풍부하게 기록되어 설화집으로서의 문헌적 가치를 높이고 있다.

또 모험담과 연애담을 함께 지닌 전형적인 중세 문학작품으로서 우리 문학사에서 찾기 드문 해양문학의 백미로 평가 받고 있다.

제주도문화재로 지정 필사본은 국립제주박물관에 위탁 보관 되어 있다.

한편 장한철 선생의 표해록 기적비는 후손들이 뜻을 모으고 표해록상징조형물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김종호)가 선생의 고향인 애월 앞바다 한담공원에 높이 6.2m, 폭 1.8m에

제주석 기단 배 모형의 기적비를 건립하여 이날 제막식을 거행했다.

후손을 대표하여 장시영 목암문화재단 이사장은 "장한철 선생의 문학적인 열정과 모험심, 삶의 지혜를 후손들이 본받고 역사적 가치를 지닌 교육자료로 활용하여 줄 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애월읍(읍장 이용화)에 조형물을 기증한다."고 밝혔다.

한편 이날 행사에는 관내 초등 중등 교장선생님과 리장단 등 노인회, 부녀회 청년회를 비롯 박규헌, 방문추, 장동훈 도의원, 송봉규 재암문화재단 이사장,

조형물건립추진위원회 김찬흡(교육의정회 이사장), 장정언(전 4,3재단 이사장), 문기선(조각가, 전 제주대학교 교수), 장주열(전 제주도 부 교육감),

 

 

[표류의 역사를 따라서-8]제주~강진 남포 뱃길 대표적 표류기 '장한철 표해록'

 (고바우/이자현 2007.12.02. 20:01)

청산도 문학 현장 쓸쓸, 강진 남포엔 찬 바람만

 

   
 

 

▲ 청산도 서쪽 절벽이 깍아질 듯 펼처져 있다. 장한철 일행 29명은 1771년 1월 어느날 밤에 저곳 어디선가 표류하다 21명이 죽고 8명이 간신히 섬에 오르게 된다.

 
 

아름다운 섬 청산도는 영화 서편제의 촬영현장과 드라마 '봄의 왈츠' 세트장이 유명하다. 관광객들이 섬에 오면 꼭 이곳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청산도가 우리나라 고전해양문학의 백미라고 일컫는 '장한철의 표해록'의 중요한 무대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장한철의 표해록'은 1770년 12월 제주의 장한철이란 사람이 서울에 과거를 보러가기 위해 제주항에서 29명의 일행과 함께 배를 타고 강진의 남당포(지금의 남포마을)마을로 항해 하다가 표류한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장한철일행의 표류는 강진과 제주사이의 뱃길에서 1770년도에 있었던 우리나라 표류사의 대사건이 있었다.

표해록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 장한철은 1770년 12월 25일 일행과 함께 제주항을 떠나 그날 오후 지금의 완도 소안도 인근에서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 서쪽으로 밀려 표류하기 시작한다. 배는 흑산도 인근까지 밀려갔다.

배는 다시 서남풍을 만나 동쪽으로 밀려갔가 표류 13일만에 다시 소안도 일대로 떠밀려 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행 29명은 모두 살아 있었다.

이 일대는 바위투성이인 작은 무인도들이 많아 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모두들 죽는다고 통곡을 했다. 승선자들의 자포자기 속에 배는 그날밤 모도를 지나 청산도의 어느 해안으로 밀려갔다.

배는 바위에 부딛쳐 산산히 부서졌다. 정월 초엿새날 한밤중이었다.

육지에 오른 사람은 겨우 10명이었다. 나머지는 배가 부서지면서 모두 실종됐다. 청산도에 오른 10명중에 두명은 산길을 따라 마을을 찾아가다 낭떨어지에 떨어져 죽고 만다. 제주에서 출발한 29명중 단지 8명만이 살아남았을 뿐이다.

구사일생으로 청산도에서 살아남은 장한철 일행 8명은 청산도 주민들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청산도에 머무르게 된다. 장한철은 청산도 주민들이 돌아가면서 자신들의 음식을 챙겨주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 청산도 당리에는 섬사람들이 대대로 제사를 지내온 사당이 있다. 장한철이 무녀의 딸을 만난 곳이 이곳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때 가장 유력한 곳이다. 영화 서편제를 촬영한 장소와 아주 가까운 곳이다.

 
 
어느날 장한철은 마을의 당집에 들려 그곳에서 소복을 입고 모친의 일을 거드는 무녀의 딸을 만난다. 소복입은 무녀의 딸은 몇해 전 남편을 잃은 20살의 과부였다.

그런데 그 여인은 장한철이 바다 한가운데서 풍랑을 만나 생사의 갈림길에서 의식을 잃고 있을때 꿈속에서 나타나 물을 건네주던 여인이었다.

여기서부터 이 기록이 의도적으로 설화적 요소가 가미됐다는 주장이 있지만, 어쨌든 장한철은 이 여인과 꿈같은 하룻밤을 보낸다.

학자들은 이 대목을 장한철 표해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평가한다. 청산도는 이렇듯 1770년 바다에서 동료 21명을 잃은 선비가 죽음의 사선을 넘어 육지에 도착해 현지 여인과 로멘스를 나누었던 연애소설의 무대이기도 하다. 이 정도의 가치있는 곳이 주민들 조차 모른채 방치돼 있다.

장한철은 얼마후 청산도에서 나와 신지도와 마량~칠량을 거쳐 남당포에 도착해 한양으로 올라가 당초 목표대로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그는 4년 후 다시 과거에 도전해 영조 51년 과거에 합격, 제주의 대정현감과 강원도의 취곡현령을 지낸 것으로 전해온다.

장한철의 원고는 1959년 8월 당시 서울대학교 정병욱교수가 제주도에서 학술조사를 벌일 당시 애월상업고등학교 교장이던 장응선씨란 분으로부터 원고를 입수하면서 학계에 처음 보고됐다.

이후 정교수가 1979년 번역본을 출간하면서 강진~제주 뱃길에서 일어났던 이 기구한 사연이 세상에 알려졌다. '처절한 해난사고'가 있은지 189년만의 일이다.

장한철의 '표해록'이 가지고 있는 내용의 역동성과 문학성에도 불구하고 표해록은 지금까지도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나 제주~강진뱃길에서 비롯된 이같은 사실(史實)이 해당지역에서 조차도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 해양문학사는 물론, 해당지역의 해양사(海洋史)를 다루는데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드라마 세트장을 지어놔도 관광지가 되고, 고전의 무대가 세계적인 명소가 되고 있는 현실에서 장한철의 표해록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역사의 현장이 아무 가치없이 방치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필자는 최근 청산도를 세차례 찾아갔다. 첫 번째는 강진 옹기장수들의 흔적을 찾기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장한철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였다.

세 번째는 다시한번 가보고 싶어서 갔다. '표해록' 속에 청산도는 분명히 기록돼 있다.

아쉬운 것은 자신이 도착했던 지명을 정확히 기록하지 않았다는 점과 일행이 머물렀던 마을이름을 정확히 표시하지 않은 것이지만 그 곳을 추정할 수 있는 여지는 남겨 놓았다.

우선 장한철 일행이 청산도에 도착한 지점을 따라가 보자. 장한철은 표류 열사흘 째인 1771년 음력 정월 초엿새 되던 날 '비바람이 몹시 몰아치니 파도는 산더미처럼 밀려들고 배는 정처없이 떠가는' 생사의 갈림길을 겪으며 흑산도주변에서 완도 소안도 주변을 거쳐 해시(亥時:밤 9시~11시 사이)쯤에 지금의 청산면 행정구역인 모도주변으로 떠밀려 온다.

그때 '멀리서 비바람으로 캄캄해진 하늘아래로 은연히 큰 산'이 드러났다. 청산도였다. 구글어스에서 모도와 청산도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면 8.5㎞ 정도가 나온다. 바람은 다행히 동쪽으로 계속 불고 있었다.

그럼 장한철일행이 상륙하며 18명이 사망한 지점은 어디쯤 될까. 열사흘 동안이나 표류한 끝에 보이는 육지였으나 배를 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였다. 그냥 떠밀려 가고 있었다.

배는 청산도에 닿으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사람들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장한철도 뛰어들다. 발을 내딛자 다행히 바닥에 닿았다. 바윗돌위에 몸이 걸린 것이었다. 약 50 걸음을 걸어 육지로 올라왔다.

캄캄하고 인적도 보이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장한철은 이렇게 적고 있다.

보이는 것이라곤 놀란물결이 해안을 쥐어뜯고 있는 것인데, 그소리는 천둥이 구르는 듯 하고 큰 파도는 길길이 뛰어 하늘로 치솟으니, 그림자는 설산(雪山)을 뒤집는 것 같다.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과 청산도 해변의 정황이 마치 생생한 필름처럼 우리들 곁으로 다가오는 듯 한 표현들이다.

필자는 세차례의 청산도기행을 통해 장한철 일행이 도착한 곳을 추정해 보았다. 일단 섬의 서쪽이 분명할 것 같다.

대모도와 소모대쪽에서 서풍을 타고 오면 배는 청산도의 서쪽에 닿을 것이다. 장한철은 자신의 도착지점을 정확히 기술하지 않았으나 몇가지 추정이 가능한 기술을 하고 있다.

우선 장한철이 발을 내딛인 '석서(石嶼: 바위로 된 섬)'이다. 장한철은 자신이 발을 걸친 석서가 바닷물이 들어오면 물속에 잠기고 물이 빠질때면 모습을 드러낸다고 했다. 그런 곳이 청산도의 면소재지가 있는 도청리와 가까운 곳에 있다.

   
 

 

▲ 당리 사당에서 바라본 당리마을의 모습이다.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바닥에 바짝 붙어있다.

 
 
완도에서 배를 타고 청산도 도청항으로 들어가다 보면 남쪽으로 아주 조금한 돌섬이 보인다. 납다도라고 부르는 곳이다. 마을주민들에 따르면 이 섬은 만조가 되면 보이지 않고 간조가 되면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또 육지로 석맥이 있어 물이 빠지면 이곳으로 걸어 들어갈 수도 있다고 했다. 육지와 거리도 장한철이 걸었다는 50보 정도되는 곳이다.

그러나 장한철이 섬에 도착했을 때 묘사한 부분을 보면 이곳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나도 사람들의 뒤를 따라 벽을 부여잡고 낭떨어지를 붙들며'줄줄이 올라갔다. 해안벽의 높이는 몇백길이 되는데, 그 언덕 아래는 푸른바다이고 언덕위가 곧 평평한 육지였다.

장한철 일행 10명중 2명은 낭떨어지에서 떨어져 죽고 만다. 생존자들은 해안에서 10리정도를 가서 마을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를 참고해서 납다도 주변을 보면 그 정도의 낭떨어지는 보이지 않는다. 마을로 향하는 길이 평범에 가깝다. 납다도에서 마을이 비교적 가깝고, 주변에 사람이 떨어져 죽을만한 낭떨어지도 없어 보인다.

대신, 이곳에서 조금 남쪽으로 내려가면 낭떠러지 가 많다. 납다도에서 솔무댕이를 지나 끝머리끝 사이의 해안이다. 최근에 개설된 면소재지~신흥리간 도로를 타고 차를 몰고가면 서쪽으로 비경이 펼쳐진다. 천길 낭떨어지도 많다.

산길을 꼬불꼬불 걸어갔으면 4㎞는 족히 걸었을 일이다. 장한철이 어느마을에 도착했는지 정확히 기술돼 있지 않지만 책속에 나오는 당촌등을 중심으로 마을을 측정하면 지금의 청산도 당리와의 거리가 그정도 이다.
장한철의 기록을 면밀히 분석해서 정확한 도착지점을 찾아 기념비라도 세우면 훌륭한 관광자원이 될 것도 같다.

다음으로 파악할 대목이 장한철이 청산도에서 머물렀던 마을이다. 이 부분을 부각시켜야 하는 것은 장한철이 청산도에서 스물된 과부와 꿈같은 하룻밤을 보낸 곳이다.

장한철은 바다 한가운데서 생사의 갈림길에서 정신을 잃었을 때 소복을 입은 여인이 물을 들고 나타나 자신에게 먹여준 환상을 경험한다. 장한철은 그 물을 받아마시고 정신을 차렸다.

청산도에 도착해 어느정도 몸을 추수린 장한철 일행은 몇일 후 마을 당집에 들리게 된다. 장한철은 그곳에서 자신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만난 소복입은 여인을 발견한다. 무녀의 딸이었다. 그날밤 장한철은 이 소복입은 과부와 꿈같은 하룻밤을 보낸다.

평론가들은 이 부분이 해양문학이 갖는 설화적 요소가 깊게 베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장한철 표해록이 갖는 백미는 바로 이대목이다.

바다에서 겪었던 처절함을 실감나게 설명하면서도 한여인과의 로멘스를 아름답게 삽입한 장한철의 표해록이야 말로 청산도와 강진의 남포에서 다시 살아나야할 금자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