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한강의 기적' 이끌었던 남덕우 前총리
수출 100억弗·1인당 국민소득 1천弗 돌파 이끌어 선진화포럼 이사장 등 최근까지 한국경제에 조언
"돌이켜 보면 나는 성공한 정책가도 아니고 성공한 경제학자도 아니었다. 경제전문가로서 자기의 주견이 있었으나,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정치적·행정적 수완이 모자라 주위 환경과 타협하는 정부 관료에 불과했다. 다만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정책 의지를 시장경제 이론의 틀 안에서 소화하려고 안간힘을 다한 것은 사실이다."
19일 89세의 일기로 영면에 든 남덕우 전 국무총리는 2009년 회고록 '경제 개발의 길목에서'에서 자신을 이처럼 낮춰 표현했다.
박 전 대통령의 그늘에서 그의 생각을 실현한 관료에 불과하다고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수식어는 그리 간단치 않다. 한강 기적의 주역, 1970년대 경제개발 1세대, 한국경제 현대화의 산 증인, 서강학파의 대두 등 표현이 그를 둘러싸고 있다.
그를 박 전 대통령의 보좌진이 아니라 한국 경제의 성장기를 연 주역 중 1명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남 전 총리는 1969년 박정희 대통령 재임 당시 재무부장관에 발탁되며 정계에 진출했다.
박 전 대통령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평가단 회의에서 남 전 총리의 소신 있는 발언을 눈여겨보고 실무 경험이 없었던 그를 재무부장관에 임명하는 파격 인사를 단행했다.
남 전 총리는 박 전 대통령이 임명장을 주고서 "남 교수, 그동안 정부가 하는 일에 비판을 많이 하던데, 이제 맛 좀 봐"라는 말을 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14년 동안 이어진 정부 관료 생활은 박 전 대통령이 발언이 현실화되는 과정이었다고 설명했다.
임기가 끝나면 대학강단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했던 그는 이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거쳐 국무총리까지 올랐다.
3·4·5 공화국 시절 14년간 한국 경제의 산업화가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8·3 긴급조치, 수출 100억 달러 및 1인당 국민소득 1천달러 돌파, 부가가치세 도입 등 한국 경제에 획을 그은 큰 사건들은 그의 손에서 나왔다. 증권시장 개혁, 중화학공업 육성 등 남 전 총리가 없었으면 이뤄지기 어려웠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박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경제대통령은 남덕우"라고 말할 정도로 그를 특별히 신임했다.
박 전 대통령이 남 전 총리가 대통령경제특보로 있던 1979년 어느 날 "내가 봐도 유신헌법의 대통령 선출방법은 엉터리"라면서 "헌법을 개정하고 나는 물러나겠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그의 입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남 전 총리는 영면에 든 19일까지 현역으로 활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무역협회장 등을 거쳐, IBC포럼 이사장, 한국선진화포럼 이사장으로 최근까지도 활발하게 활동해왔다.
1970년에는 한국 경제를 이끄는 주역으로 활동했지만 은퇴한 이후에는 현역보다 더 현역 같은 조언을 후배들에게 제공해왔다.
선진국 진입과 동시에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함께 저성장의 늪에 빠진 한국 경제 상황을 그는 누구보다 안타까워했고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
생전 남 전 총리는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용계수가 높은 중소기업이 살아나야 고용도 늘어나고 근로자 간 소득격차도 줄어든다는 논리였다.
경제 민주화와 관련해서도 그는 명확한 개념을 갖고 있었다.
남 전 총리는 경제 민주화가 재벌 때리기로 변질했다면서 재벌이 잘못된 것은 고쳐야 하지만 집중해야 하는 문제는 양극화 해소, 가계부채 해결, 일자리 창출 등이라고 지적했다.
남 전 총리는 외국에서 경제 민주화는 의사결정의 저변을 확대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며 주주만이 아니라 여러 이해관계자를 고려하는 것이고 경제적 약자를 돕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올해 초에는 불황기일수록 정부 지출이 중요하다고 조언하기로 했다. 사회 보장 확대와 같은 정부 소비가 민간 소비를 진작시키므로 공공투자가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남 전 총리는 박근혜 대통령과도 남다른 인연을 맺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후원회장 역할을 한 바 있고 2007년 대선 때 경제고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올해 3월에 박 대통령이 청와대에 원로단을 초청했을 때 바로 옆자리로 남 전 총리를 배정했을 만큼 의미를 둔 인사다.
새 정부에서 경제부총리라는 보직이 부활한 것도 남 전 총리를 '롤 모델'로 둔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 바 있다.
박정희 정부 시절 재무장관 5년에 경제기획원장관을 4년이나 역임한 역대 최장수 경제부총리, 특히 그가 경제부총리를 지냈던 74~78년은 박 당선인이 퍼스트레이디로 국정을 경험했던 바로 그 시기이기도 했다.
개발 경제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냈던 그를 두고 다양한 평가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고인과 같은 인물들 덕분에 오늘의 한국이 있다는 점에는 대체로 공감하고 있다.
별세한 남덕우 前 국무총리…주요 업적은
(아시아경제 2013.05.19 01:15)
남덕우 전 총리는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정책을 이론과 실무로 뒷받침했다.
고인은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1969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재무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1974∼1978년에는 경제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냈다. 고인은 박정희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뛰어난 기획력과 추진력을 발휘했다. 사채동결, 증권시장 개혁, 중화학공업 육성 등 굵직한 정책을 진두지휘하며 한국경제의 성장을 이끌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 때인 1980~1982년에는 제14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고인은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을 주도한 '서강학파'의 리더였다. 고인이 재무부 장관으로 발탁된 이후 서강대 경제학과에 재직하던 이승윤 교수와 김만제 교수는 71년 금융통화운영위원과 한국개발연구원(KDI)초대 원장으로 등용됐다. 고인은 서강학파뿐 아니라 김재익 경제수석, 서석준 경제부총리 등을 발탁했고 이들 인재는 한국 경제가 한 단계 더 성장하는 데 주역이 됐다.
고인은 1924년 경기 광주에서 태어나 1945년 국민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경제학 석사, 미국 오클라호마주립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재무부장관으로 임명되기까지 서강대 경제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중국과의 교역을 얘기할 때도 남 전 총리를 빼놓을 수 없다. 중국과 공식수교를 맺기 전인 1979년, 국내에선 흉작으로 수급이 불안해지면서 고추파동이 일어났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후사정을 설명하며 중국에서 고추를 수입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건의한 인물이 남 전 총리다. 이전부터 중국시장 공략에 관심을 갖고 있던 그는 당시 고추를 수입하면서 국산 공산품을 중국에 수출했다.
공직을 떠난 이후에는 한국무역협회장, 산학협동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경제의 내일을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 후원회장을 맡으며 박정희 대통령에 이어 2대째 인연을 이어왔다.
지금의 서울 강남구 일대 종합무역센터도 그가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심한 작품이다. 고인은 총리를 그만둔 이듬해 부터 1991년까지 한국무역협회 회장을 세번 연임하면서 삼성동 종합무역센터 건립을 주도했다.
그는 몇해 전 내놓은 회고록에서 1984년 무협 회장으로 있을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후보로 나서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지만 "꼭 할 일이 있다"며 거절했던 일화를 공개했다. 그가 '할 일'이라며 당시 전 전 대통령에게 보고한 게 대규모 전시장과 지원기관 사무공간, 내방객 편의를 위한 호텔ㆍ백화점 등이 한데 어우러진 무역센터 건설계획이었다.
고인은 숙환을 앓으면서도 한국경제의 앞날을 고민했다. 지난해 지난해 12월 한 TV 방송에 출연해 대통령선거를 앞둔 경제민주화 바람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경제민주화는 기존에 있는 법으로도 충분하다"며 "지금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하는 사람을 보니 재벌 때리기, 반값등록금, 무상교육 이런 것을 내세우는데 이것은 원래 헌법에 정의한 경제민주화의 개념에서 벗어난다"고 말했다.
수년간 전립선암을 앓아온 남 전 총리는 최근 노환이 겹쳐 병세가 급속히 악화됐고 지난 6일 서울 강남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다. 장례는 한덕수 무협 회장, 이홍구 전 국무총리가 장례위원장을 맡아 사회장으로 진행된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이며 22일 영결식이 거행된 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최혜숙 여사와 장남 남기선 ㈜EVAN 사장, 차남 남기명 동양증권 전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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