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정 기자의 窓(창)] 서울대 출신 공무원서 골퍼로 변신 박경호 트리니티 골프장 총지배인
골프때문에 돈 날리고 유서까지… 그래도 날 일으켜 세운 건 골프
美유학 갔다 골프에 반해 할아버지·아들·손자가 함께 라운딩하는 모습에 완전히 마음을 뺏겼죠…
서울대·행시 출신의 위력 1년 만에 30타 줄이고 美 골프아카데미 우등 졸업…
귀국하자마자 소문 쫙~골프 프로그램 MC에 금융사 VIP 코치도 맡아…
당황했던 가족들 "좋은 머리를 왜 골프에…"아버지, 생전에 늘 불만…
아내도 "당신 철부지야?"사업실패 후 찾아온 고통 한때 자살도 생각했지만…
가족 때문에 마음 돌려 지나간 샷은 지나간 샷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죠…
"유서(遺書) 써놓고 골프를 한다"고 하면 미쳤다고 할 것이다. 경기도 여주의 '트리니티' 골프장이 작년 12월 초대 총지배인으로 영입한 박경호(朴京鎬·43)가 그런 사람이었다.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후 행정고시 합격, 1998년 농림부 사무관 임용, 2000년 보스턴컨설팅그룹(BCG) 이사…. 그러다 돌연 골프에 뛰어든 10년 전 '모험'과, 럭셔리 골프장 총지배인이 된 오늘의 '성공'만을 딱 잘라 비교해 보니, '서울대 출신은 분식점을 해도 잘된다'는 속설이 떠올랐다. 3년 전 벼랑 끝에서 쓴 유서를 그가 지금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그랬다.
◇아내의 반응, "당신 철부지야?"
박경호는 경남 진주의 수재였다. "항상 공부를 잘했느냐"는 질문에 "재수 없게 들리겠지만, 그랬다"며 웃었다. 서울대를 들어가자 주위 반응은 "경호가 당연히 갈 곳을 갔다"는 것이었다. 대학 졸업 후엔 여자 친구(지금 아내)와 함께 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고시 커플은 보통 여자가 합격하고 남자가 떨어지면서 깨지기 마련인데, 우리는 같은 해에 나란히 합격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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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리니티 골프장의 초대 총지배인으로 영입된 박경호씨는 농림부 사무관, BCG 컨설턴트 자리를 버리고 골프에 미쳐 여기까지 왔다. 골프를 사랑한 만큼 골프의 쓴맛도 제대로 느꼈다. 트리니티 지배인 영입을 그는“정규분포 상위 1%의 행운을 잡았다”고 말했다. / 이명원 기자
"할아버지랑, 아버지랑, 아들이랑 3대가 함께 라운드하는 모습을 보고 '아, 저게 인생이구나!' 느꼈지요." 골프에 마음을 빼앗긴 그는 2003년 마지막 날 명분을 찾았다. "대한민국 많은 사람이 그런 인생을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골프 대중화'에 인생을 바치겠다는 결의였다. 2004년 1월 1일 아내에게 '결의'를 얘기하자 돌아온 말은 "당신 철부지야?"였다. 행정고시에 합격했을 때 동네잔치를 열고 노래를 부르셨던 아버지는 그 일로 병까지 깊어졌다. "'똑똑한 머리를 나라를 위해 써야지…'라며 돌아가실 때까지 못마땅해하셨어요."
1년 회비 64만원짜리 나인 홀 골프장에서 그는 "밥 먹고 애들 학교까지 차 태워다 주는" 일 외에 모든 시간을 골프에 바쳤다. 당시 그의 실력은 평균 126타. 1년 뒤 핸디캡 18(90타)까지 실력을 끌어올려 샌디에이고골프아카데미(SDGA)에 입학했다. "2004년엔 BCG에서 번 돈을 썼어요. 2005년부터는 주택 담보대출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어요." "얼마를 투자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허허, 그냥 '억대'라고 생각하라"고 말했다.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
2006년 4월 SDGA를 우등(핸디캡 2언더파 70타)으로 졸업하고 귀국한 '서울대·행시 출신 골퍼'를 반겨주는 곳은 많았다. 그의 이력을 안 방송사가 골프 프로그램 MC 자리를 줬고, 이듬해 신한은행이 그를 영입해 VIP 고객들의 골프 교육을 그에게 맡겼다. 고객 만족도를 평가하면 그는 항상 일등을 했다. 인기를 끌자 다른 금융회사도 잇따라 은퇴한 여자 골퍼를 VIP 코치로 영입했다. "세상에 없던 일자리를 내가 만든 거예요. 30개, 40개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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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프 스쿨을 운영한 박경호 총지배인은 지금까지초보자 200명을 교육했다.“ 프로 테스트를 통과한 직장인도 3명”이라고 말했다.
사업이 잘되자 투자 제의가 들어왔다. 그는 서둘렀다. "당연히 돈을 받을 거라고 생각해서 일을 크게 벌렸죠. 그런데 그 돈이 딱 중단됐어요. 돈이 들어오기 전까지 돈이 있다고 믿으면 안 됐는데…. 무너지기 시작했지요." 그는 "비즈니스 세계에서 금기인 세 가지 실수를 한 번에 범했다"고 했다. "금전 문제 외에도 사업을 확대하면서 철학이 다른 사람들을 뽑은 조직 문화 문제, 어려워지기 시작했을 때 사업을 과감히 정리하지 못한 의사 결정 문제." 가장 어려울 때 가장 반대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새벽 아침 꿈에서 아버님을 뵀어요. 흰색 남방에 체크 바지를 입고 환하게 웃으시는 거예요. 30분 뒤 전화가 왔어요. '돌아가셨다'고. 용서하고 돌아가셨다고 생각했어요."
그해 말 직원 16명에게 "나가라"고 통보했다. 빚이 10억원을 넘길 때였다. 한 해가 저물어가던 2010년 어느 날, 그는 유서를 썼다. "유서를 앞에 두고 곰곰이 생각했어요. '오늘 밤 내가 죽으면?' 하고. 결론은 '어머니와 아내, 딸에게 미안한 것 이외에 없다'였어요. 어제 살았던 것과 달라질 이유를 찾지 못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오늘이 항상 '내 생애 마지막 날'이 됐어요."
◇'지나간 샷'은 '지나간 샷'이다
"골프에 빠진 걸 후회했어요?"라는 질문에 그는 "지나간 샷은 지나간 샷"이라며 "하~" 하고 웃었다. "탁 쳤는데 공이 나무 뒤로 굴러갔어요. 화를 내요. 그게 아니죠. 과거에 내가 티샷부터 잘못 쳐서 그리로 굴러간 거예요. 마음을 접고 페어웨이로 돌아가는 데 집중하면 반 타 손해로 끝나요."
"골프 때문에 유서를 쓰고도 골프를 즐길 수 있어요?"라는 질문엔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게 답"이라고 말했다. "골프학(學) 1조 1항이 뭔지 아세요? '골프는 게임이다'입니다. 게임의 본질은 즐거움이죠. 프로는 유서를 쓰고 하는 일까지 즐겨야 합니다."
홀로 남은 그는 2년 동안 1인 기업 '케빈 박 골프 스쿨'을 이끌었다. "초보자 200명의 레슨을 완성했어요. 그렇게 축적한 커리큘럼을 책으로 만들었지요.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도록. 그러면서 번 돈을 쏟아붓고, 가진 것을 팔아 빚을 거의 갚았어요."
그렇게 실패를 정리해가던 작년 11월 말 전화가 걸려왔다. "골프장 지배인에 관심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골프를 하는 사람이 골프장 지배인에 관심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라고 답했다. 전화를 건 곳은 트리니티 개장을 준비하던 신세계그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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