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조선] 청도 촌놈, 한국인 최초 첫 공채 교수 된 드라마
- 김종민박사./주간조선
그는 왼손 가운뎃 손가락 한 마디가 없다. 미국 유학 첫해 생선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잘렸다. 1984년의 일이었다. 그때까지 그의 인생은 암흑이었다.
2012년 3월. 그는 한국인 최초로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공채로 뽑은 정교수가 됐다. 68세 정년보장, 교수 2명 추천권. 80만파운드(14억원) 연구비 지원 등 정교수 최고 대우였다.
삼성종합기술원 전무에서 옥스퍼드대 전자공학 교수가 된 김종민(56) 박사이다. 옥스퍼드대 신문은 2012년 ‘삼성의 나노테크놀러지 전문가가 옥스퍼드대로 온다’는 제목으로 그를 소개했다. 1년 만인 지난 3월 31일 한국에 온 그는 앤드루 해밀턴 옥스퍼드대 총장을 동반했다. 해밀턴 총장은 일주일 일정 동안 연세대에서 명예 이학박사 학위를 받고 연세대, 카이스트, 한국에너지연구원과 양해각서(MOU)를 맺었다. 최순홍 청와대 미래전략수석비서관, 윤종록 미래창조과학부 2차관, 권오현 삼성 부회장 등 정부 부처와 기업, 학계 인사들도 쉴 새 없이 만나고 돌아갔다.
해밀턴 총장의 이번 방문은 한국과 옥스퍼드대 간 교류의 물꼬를 트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의 만남을 주선하고 메신저 역할을 한 이는 김종민 교수이다. 해밀턴 총장을 먼저 영국으로 보내고 한국에 남은 김 교수를 지난 4월 10일 서울 광화문의 한 커피점에서 만났다.
“지난 두 달 동안 일정 만들고 조정하느라 정신없었습니다. 한국과 이메일을 주고받다 보니 시차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잤습니다. 다행히 해밀턴 총장이 대단히 만족스러워하고 돌아갔습니다. 옥스퍼드대가 그동안 한국과는 교류가 거의 없었는데 영국에 가서 보니 한국과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았습니다. 영국은 기초과학이 뛰어나고 한국은 응용과학이 뛰어나니 과학자나 학생 교류, 연구 교류를 하기엔 더없이 좋은 조건입니다. 누구라도 통로 역할을 해야겠다 싶었습니다. 해야 할 일이 보이는데 안 나설 수가 없지요.”
그는 연구실만 지키고 앉아 있을 성격은 아닌 것 같았다. 변화구보다 직구 스타일, 생각이 꽂히면 앞뒤 안 보고 밀어붙이는 ‘무데뽀형’으로 보였다. “제가 좀 급합니다. ‘빨리 빨리’라면 따라올 사람이 없지요.” 그의 말처럼 질문을 하기 바쁘게 대답이 쏟아져 나왔다. 성격처럼 그의 삶은 ‘성공 다큐’보다는 ‘액션 영화’가 어울릴 만큼 다이내믹했다. 인터뷰하는 두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흥미진진’이었다.
그는 옥스퍼드대에 가기 전까지 삼성 종합기술원 FED(탄소나노튜브 전계방출디스플레이)프로젝트 팀장(전무)이었다. 삼성그룹 공개경쟁을 통해 선발된 첫 펠로(선임연구원·2003년)이다. 현재 삼성 내 펠로는 10여명에 불과하다. 2002년에는 미국 D&A 하이테크 인포메이션이 선정한 ‘나노테크놀러지를 선도하는 인물 100인’에 노벨상 수상자와 같이 이름을 올렸다.
그가 가진 특허만 253개(해외 153개, 국내 100여개)이다. 2008년 잡지 사이언스의 ‘베스트 논문 상’, 2009년 정부의 나노코리아 특별상, 2012년 지식경제부 장관 공로상에 세계 최고 권위의 과학잡지인 네이처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카본 나노 튜브, 양자점 LED(돌돌 말 수 있는 디스플레이) 등 세계 최초로 개발한 기술도 한 손으로 꼽기 어렵다.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지만 그를 만나기 전 기자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는 경북 청도 출신에 철도고와 홍익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청도에서부터 옥스퍼드대까지 만만치 않았을 인생스토리가 그려졌다. 또 하나는 삼성 펠로 출신이 옥스퍼드대 정교수로 갔다고 하면 국내 언론에 비중 있게 오르내렸을 법한데 어디에서도 관련 기사를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삼성 펠로라서 삼성을 나오는 것이 더 어려웠습니다. 포지션에 대한 책임이 큰 만큼 삼성에도 알려져서 좋은 일은 아니었습니다. 언론에 오르내리지 않고 조용히 가기를 바랐습니다. 옥스퍼드대 공채에 지원한 후 2011년 8월 말에 정교수 채용이 확정되고 9월에 나오려고 했는데 외부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정기적인 명예퇴직자들 명단에 묻어 나오느라 2012년 1월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는 삼성에서 옥스퍼드대로 옮기느라고 연봉이 몇 토막으로 깎였다. 그는 “연봉조건은 비밀이라 말할 수 없지만 옥스퍼드대 최고대우임에도 불구하고 삼성의 연봉에는 비교할 수 없이 적다”라고 말했다. 그가 돈을 포기하고 옥스퍼드행을 택한 이유는 아들 때문이라고 말했다.
“마흔 살에 결혼을 해서 뒤늦게 아들 하나를 얻었습니다. 그만큼 저한텐 애틋하죠. 아들이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외국어도 다양하게 배우길 바랐습니다. 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스페인으로 보냈습니다. 근데 아들이 사춘기가 되니까 옆에 있어줘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모 자식이 떨어져 살면 안 되겠더라고요. 돈보다 아들이 훨씬 소중하죠.” 이처럼 그가 삶을 선택하는 방법은 단순 명확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도 선택하면 돌진이다. 스스로도 ‘엉뚱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옆에서 보는 부인은 오죽할까. “이젠 제발 편한 길로 가자”고 말한단다.
청도에서부터 그의 삶을 풀어보자. 그는 양조장집 9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부터 ‘주류’의 세계를 맛봤다. 형, 누나 할 것 없이 돼지 밥으로 주던 술지게미를 먹고 취해 여기저기 오줌 싸느라 정신이 없었단다. 돼지도 취하기는 마찬가지. 술 취한 돼지들이 우리를 뛰쳐나가 도망가면 산으로, 얼어붙은 강으로 쫓아가 잡아오는 것이 일이었다. 이때부터 내공을 다진 주량은 전성기 때 소주 7병. 폭탄주로는 몇 잔이나 마시느냐는 물음에 돌아온 대답이다. “아휴~ 셀 수도 없죠.”
형제가 많았지만 그럭저럭 지역에선 한 가락하던 집이 그가 고등학교 가기 전에 급격히 기울었다. 아버지가 먼 친척에게 큰돈을 떼이고 양조장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당시 가난한 집 수재들이 가는 곳이 철도고였다. 학비 공짜에 졸업하면 무조건 철도공무원 보장, 서울대 등 명문대에 입학하면 장학금을 줬기 때문이다.
그의 꿈은 의사였다. 서울대반에 뽑혔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서울대는 떨어지고 졸업과 동시에 철도공무원 발령을 받았다. “차라리 배나 타자” 싶어 사표를 내고 학비가 무료인 한국해양대에 갔다. 해양대는 입학 전 한 달 동안 미리 훈련을 시켰다. 그런데 이게 장난이 아니었다. 말보다 선배들의 몽둥이가 훨씬 빨랐다. 못 참고 발끈하는 그가 집중 타깃이 된 것은 물론이다. 얼굴에 시퍼렇게 멍이 든 채 입학 이틀 전날 야반도주했다. 해양대 10년 선배였던 둘째 형은 “내 체면에 먹칠을 했다”면서 한동안 그의 얼굴을 안 봤다.
형들에게 맞아 죽을까봐 집에는 못 가고 그가 철도공무원으로 발령받았던 경북 영주로 친구들을 찾아갔다. 가보니 그의 공무원직이 살아 있었다. 학교 다닐 때 미납금 8만7000원을 안 갚은 탓에 사표가 수리 안 된 상태였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눌러앉아 매일 페인트칠하고 목재를 날랐다. 서울대 의대를 꿈꾸다 그야말로 ‘노가다’ 인생으로 전락했으니 인생이 절망이었다.
매일 하늘이 노랗도록 술을 마셔댔다. 집과도 연락을 끊은 상태에서 9월쯤 서울에 있는 누나에게 놀러갔다 입시학원에 끌려갔다. 세 달 정도 바짝 공부하니 예비고사 성적이 275점이 나왔다. 수험생 50만명 중 500등 안에 드는 성적이었다. 서울대 의대는 불안하고 치대는 무난한 점수였다. 서울대 본고사 하루 전날 전보가 도착했다.
홍익대에서 처음 시행한 특별대우장학생에 뽑혔으니 내일 면접을 보러 오라는 통보였다. 4년 장학금에 매달 생활비까지 주는 조건이었다. 아버지가 몰래 원서를 냈던 것이다. 마침 서울에 올라온 아버지가 새벽 3시까지 잠을 안 재우고 그를 설득했다. 서울대 시험은 포기하고 홍익대 면접을 가라는 것이었다.
‘잠고문’에 지쳐 두 손 들고 다음날 서울대 대신 홍익대로 갔다. 전공도 교수가 알아서 전자공학과로 적더란다. “서울대 합격이 빤한데 너무 억울했어요. 864번.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수험번호도 기억합니다. 이틀째 시험장에 갔습니다. 첫 시간은 시험을 봤는데 둘째 시간에 교수가 어제 안 왔다고 나가라고 하는 겁니다. 안 나가겠다고 버티다 결국 쫓겨났죠. 그때 시험을 봤더라면 지금쯤 이 언저리서 치과 차려놓고 있을 텐데 말입니다. 하하.”
오히려 지금이 잘됐는데 미련이 남아 있느냐 물었더니 “서울대에 대한 미련은 지금도 가슴에 큰 구멍으로 남아있다”고 했다. 그의 바로 밑 동생인 김종영(법무법인 동서남북 대표)도 그처럼 4년 장학금을 조건으로 서울대가 아닌 단국대 법대를 선택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한동안 매달 나오는 두 형제의 장학금이 가족의 생활을 책임졌다.
대학 2학년 때 난데없이 폐결핵에 걸렸다. 그때부터 대학생활은 병과의 싸움이었고 암흑 그 자체였다. 다행히 방위로 근무하면서 군 병원에서 난치성 폐결핵을 고쳤다. 금성사(LG)에 취직해 2년을 다니다 뉴욕에 사는 형에게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월급이 20만원이었는데 미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 60만원은 벌 수 있으니 ‘가지 뭐’ 했죠. 뉴저지주립대에서 장학금도 받았어요.”
단순한 계산법이었지만 그 선택은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다. 뉴저지주립대 공대에서 반도체 연구의 세계 최고 권위자인 윌리엄 카 교수를 만났다. 석좌교수로 부임한 윌리엄 카의 박사제자 1호가 된 덕분에 당시로선 최첨단인 디스플레이 반도체의 세계로 들어섰고 미 육군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때의 경험이 귀국 후 삼성에 들어와서 많은 도움이 됐다.
1994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삼성종합연구소에 자리를 잡고 반도체, 디스플레이, 나노기술, LED 연구를 이끌며 이름을 날렸다. 1997년 김도연 전 교육부 장관, 유명희 수석비서관 등과 함께 과학기술부의 ‘노벨상 과제’ 1기 멤버로 뽑혀 9년 과정으로 파격적인 지원을 받기도 했다. 이때의 연구가 카본 나노튜브 HDTV 등의 기초가 됐다. 카본 나노튜브는 그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실패’와 ‘교훈’을 안겨 주었다.
“삼성에선 제가 깡패로 통했을 겁니다.”
2001년이었다. 그가 연구실에서 나와 처음으로 카본 나노튜브 TV로 사업을 맡았다. SDI 천안공장에 박사급 연구원 150명을 데리고 내려갔다. 침대 40개를 사서 퇴근도 안 시키고 숙식을 함께하며 밀어붙였다. 그에겐 아파트가 나왔지만 혼자서 들어가 잘 수는 없었다. 2년 반을 그렇게 살았다. 그가 주로 하는 일은 불만 가득한 연구원들을 위해 냉장고 꽉꽉 채워 주며 먹을 것으로 입막음을 하는 것이었다. “어찌나 먹어대는지 회사 지원만으로 충당할 수가 없어 제 돈으로 이틀에 40만~50만원씩 먹을 것을 사다 날랐습니다.”
기술적으로는 성공이었지만 PDP, LCD TV에 밀려 사업은 엄청난 투자비만 날리고 결국 망했다. “막대한 손해를 끼쳤으니 다른 회사였다면 잘렸을 겁니다. 근데 삼성은 다른 기회를 또 주었습니다. 그때의 고마움은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실패를 통해 2% 부족했던 기술들을 계속 개발할 수 있었습니다. 실패를 용납해주는 인력운용이 삼성의 큰 장점입니다.”
현 정부의 화두인 ‘창조과학’에 대해 누구보다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다. “갑자기 창조하라고 하면 나오나요. 창조는 기초가 있어야 하고, 그 기초는 교육에서 나옵니다. 교육은 시간이 걸리니 장기와 단기로 나눠서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장기적으로 창의성을 키우도록 교육을 바꾸고 단기적으로는 산업계 중심으로 우리가 잘하는 응용과학을 키울 수 있게 지원해야 합니다. 창조가 반드시 기초과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초를 융합해서 이리저리 응용을 하다 보면 새로운 창조가 나오고 우리 것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삼성에 있을 때 후배 연구원들 석사, 박사 키워주는데 누구보다 열심이었다고 한다. 몰래 보내다 걸려서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결국 제도가 새로 생기게 만들었단다. 사람을 키우는 것이 회사를 키우는 것이고 나라를 키우는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옥스퍼드대에 한국 학생들이 150명 정도 있습니다. 그들을 한국의 중고등학생들과 연결해서 이끌어 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학생 교류든 연구 교류든 우리나라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역할을 하고 싶어요. 해야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너무너무 많이 보입니다. 연구만 하고 앉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동안 삼성에서 제가 받았던 혜택을 우리 나라를 위해 어떻게든 돌려줘야죠.”
인터뷰 중간에 전화기가 울렸다. 지자체에서 나노 관련 사업을 진행하면서 그의 자문을 구하는 전화라고 했다. 아직도 그의 옥스퍼드행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옥스퍼드대에 갔다고 하면 놀러간 줄 아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의 ‘정체’가 알려져있지 않으니 한국을 오가며 일을 진행하는 데 불편한 점도 많다고 한다. 지금 옥스퍼드대에선 융합과학의 권위자인 한국인 과학자 김종민이 영국과 한국 과학기술의 융합을 위해 ‘발광(發光)’하고 있다. 이젠 영국에서 들려오는 ‘김종민’의 소식에 귀를 기울여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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