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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박물관(上海博物館)에서 본 중화(中華) 내셔널리즘 (월간조선 2013.04)

상하이박물관(上海博物館)에서 본 중화(中華) 내셔널리즘

 

淸나라 때인 1905년 중국 장쑤성(江蘇省) 난퉁(南通)에 중국 최초의 박물관인 난퉁박물원(南通博物苑)이 세워진 이래 100여년이 지난 지금 중국 전역에는 2천 400개가 넘는 박물관이 설립됐다. 이 중에 90% 이상이 국가박물관이다. 2008년부터 중국의 모든 국가박물관에서는 박물관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무료입장을 실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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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중심부 린민(人民)광장에 자리 잡은 상하이박물관.


보다 많은 중국 국민들에게 중국의 다원일체(多元一體)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고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한 눈에 보고 알 수 있게 했다.

중국의 관문인 상하이에는 중국의 다원일체론(多元一體論)과 중화(中華) 내셔널리즘의 표상인 상하이박물관이 있다. 베이징, 난징, 시안박물관과 함께 중국 4대 박물관의 하나인 상하이박물관에는 12만 3천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하이박물관의 대표적인 소장품은 주로 강남의 몇 몇 수집가들의 소장품과 1930년대 이후 발굴된 청동기(靑銅器)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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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중엽 경덕진요(景德鎭窯)에서 제작된 청화운용문(靑花雲龍紋)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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遼(서기 916-1125) 치펭요(赤峰窯) 백지흑채획화목단문관(白地黑彩劃花牡丹紋罐-항아리).


 

2003년 8월 상하이박물관은 미국의 한 개인 수집상이 소장하고 있는 北宋朝시대(서기 960-서기 1127)의 서예 목판책 4권을 450만 덜러(53억 2천만원)를 주고 되사들었다. 이 목판책은 지난 992년 103명의 서예가들이 대추나무 목판에 새긴 420권 분량의 작품으로 1800년대에 사라진 이후 1890년대 홍콩의 한 경매장에서 일부가 나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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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나라 때부터 淸나라(618-1191) 때까지의 유명한 서예가들의 작품 80여점을 전시 하고 있는 서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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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년 前 商나라 때의 갑골문자부터 오늘날 까지 서체의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서법관. 고대 금석문, 죽간(竹簡), 갑골 문자 등을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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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나라 때부터 淸나라 때까지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 120여점을 둘러볼 수 있는 회화관.


상하이박물관은 중국의 해외반출 문화재 반환과 환수에 매진하고 있다. 작년 말 중국 대표단 8명이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중국 유실 문화재를 찾기 위해 방문을 했다.
淸나라 황제의 여름별궁인 원명원(圓明園)에서 약 150년 전에 약탈되어 해외로 유출된 문화재에 대한 첫 조사에 나섰던 것이다. 중국의 해외 문화재 찾기는 미국의 10여개 기관을 20일간 돌아다녔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들은 금년 初에 영국, 프랑스, 일본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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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된 작품의 보존 기능과 전시 관람이 잘 어우러진 회화관內 淸나라 때 문인화가들의 작품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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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중국의 도장 500여점을 전시하고 있는 새인관(璽印館).


 

신장된 국력을 배경으로 전 세계에 흩어진 귀중한 문화재를 사 모우는 중국과 달리 우리는 20개국에 뿔뿔이 흩어진 7만 6000여점의 우리 문화재는 다시 찾아오기 위해 어떤 대책을 세워 놓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중에 70%를 미국과 일본이 소장하고 있다. 그 동안 4800여점을 환수 했으나 민간 소장자들이 기증한 것들이 대부 분이였다. 정부가 나서 협상을 통해 찾아 온 것은 34%밖에 되질 않았다. 우리나라 국보급 문화재가 경매장에 나왔다면 우리도 사올 수밖에 없다. 문화가 곧 돈이라는 것을 실감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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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소수민족 공예관의 의상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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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박물관 소수민족공예관 책임자인 판민산(范明三)선생으로부터 소수민족 의상에 관해 설명을 듣고 있는 최병식박사(가운데)와 김성희박사.


이런 가운데 영국의 대영박물관에서는 마크 오렐 스타인(Mac Aurel Stein)이 돈황 막고굴에서 도굴해 간 장경(藏經) 볼 수 있고 프랑스의 퐁텐블로(Fontainbleau)에서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원명원(圓明園)에서 강탈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淸나라 궁중 유물의 대부분은 대만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에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많이 볼 수 있는 박물관은 바로이곳 상하이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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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 淸代 가구 전시관. 明나라 때부터 추앙(庄)씨 집안에 전해 내려오던 가구부터 청나라 때까지의 명품 가구들을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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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대 전폐관(錢幣館). 秦나라 때부터 明, 淸까지 중국에서 유통된 화폐들 70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전폐관에 전시된 상고시대 화폐인 반원도(半月刀)와 공소우부(空首布).


상하이박물관은 한중문화교류 15주년을 기념하여 2007년 6월부터 9월까지 상하이市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부산직할시市의 부산역사박물관에서 대여특별전을 열기도 했다. 이 때 중국 고대 청동기 유물 80여점과 옥기 15점을 선보이기도 했었다,

상하이박물관을 찾아간 날 정문에서 ‘한국의 고고학’ 발행인 최병식(崔炳植)박사와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섬유공학을 전공한 김성희(金成熺)박사, 그리고 연합뉴스 김태식 전문위원 등 취재진을 반갑게 맞이 해주신 분은 상하이박물관 중국 소수민족 공예관 책임자인 판민산(范明三)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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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폐 전시관의 동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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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관에 전시된 春秋시대(기원前 6세기 상반기-기원前476), 희존(犧尊-술 그릇), 1923년 산시(山西) 훈유안(渾源縣) 이유군(李?村)에서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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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시대 말기(기원前 6세기 상반기-기원前 476), 오왕부차감(吳王夫差鑑).


린민(人民)광장 허난난루(河南南路) 16호의 중앙은행 안에 있었던 상하이박물관이 1993년 당시 상해시장이었던 진의(陳毅)의 전폭적인 지지로 기존의 몇 개의 박물관을 통합하여 1996년에 지금의 새로 지은 건물에 들어섰다.
상하이박물관의 건축양식 자체도 특이하다. 부정한 사람이나 간신들을 알아내서 죽인다는 상상의 동물인 해치(??)와 비슷하게 생긴 동물像들이 전면에 늘어선 상하이박물관은 중국 전통의 설법인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의미를 지닌 형태를 지니고 있다. 건물 전체의 모양은 얼른 보면 고대 청동기 그릇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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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周 考王(기원前 10세기 末) 다커딩(大克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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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산시(陜西) 푸팽현(夫風縣) 파멘사(法門寺) 렌군(任村)에서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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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漢(기원前 206-8년), 팔우저구기(八牛貯具器). 1956년 운난(雲南) 진닝현(晉寧縣) 시즈하이산(石寨山) 출토.


“전시 유물들 중에는 기증을 받은 것들이 많아서 출토지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지요.”
중국의 양자강 유역과 강남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상하이박물관의 도자기는 강남의 진품도자기가 대부분이며 서화는 역시 강남의 서화가 절반을 차지한다.

죽간(竹簡)만도 1만점이 넘게 소장하고 있다는 상하이박물관의 전시실의 유물을 새로이 바꾼다는 것이 쉽지를 않아서 보통 10년 넘게 상설전시를 해오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 전역과 세계 각국에서 찾아오는 관람객로 언제나 넘쳐 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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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시대 말기(기원前 6세기 상반기-기원前 476) 오왕부차화(吳王夫差?). 오왕 부차가 사용하던 청동 술 주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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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齊(서기 550-서기 577), 높이 144cm, 石佛像(오른쪽) 등 불상을 전시한 중국 역대 조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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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魏(서기 386-서기 534) 높이 233cm, 왕용생등조불상석비(王龍生等造佛像石碑).


지상 5층, 지하 2층으로 고대 청동기 그릇 모양의 높이 29.5m, 총 건평 3.8만평의 상하이박물관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개장을 한다. 박물관內에서 사진 촬영도 허용된다. 입장 역시 무료다. 모든 관람객들은 입장할 때 검색대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언제나 길게 줄을 서야한다.

상하이 중심지인 린민따도(人民大道)에 자리 잡은 상하이박물관에는 기원前 3000년 양자강 하류 양주(良渚)문화의 옥기가 전시되어있다. 전시된 옥기들은 무덤의 부장품이나 제단의 의례 용품이었다. 벽옥(碧玉), 사람이나 동물 모양과 새문양이 있는 종(琮), 도끼와 양 끝에 마구리가 있는 것, 목걸이 등의 모양이 있다. 신석기시대에서 夏나라 때인 기원前 24-20세기 용산(龍山)문화유적지에서 출토된 도끼, 칼, 신인, 봉황 장신구 등도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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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나라(서기 655) 이세연모팽씨등조불석비(李世延母팽氏等造佛石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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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周(서기 567-서기 581) 높이 171cm, 千佛石碑 등이 전시된 중국 역대 조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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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漢(AD 25-220), 무금도용(撫琴陶俑,왼쪽)과 취소도용(吹簫陶俑).


상하이박물관은 고대 예술 박물관으로 중국 고대 청동기관, 조소관(雕塑館), 도자기관, 옥기관, 새인관(璽印館), 서법관(書法館), 전폐관(錢幣館), 회화관, 明. 淸代 가구관, 중국 소수 민족 공예관 등 10개의 전시관으로 꾸며졌다.

그중에서도 청동기와 서예, 회화, 明. 淸代 가구관이 돋보인다.

중국 殷周시대의 청동기는 중국 고대 문명의 상징이다. 1,2000m2에 달하는 중국 청동기 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청동기관에 전시된 400여점 중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데딩(德鼎), 다커딩(大克鼎), 술 그릇인 훈위안이치(渾源?器)의 징화시준(精華주尊)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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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서기 960-서기 1279), 보살칠금채회목상(菩薩漆金彩繪木像), 높이 9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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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서기 1115-서기 1234), 높이 130cm, 불금채회목조상(佛金彩繪木雕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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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시대(서기 222-서기 280), 우즈호우(?州窯) 청유퇴소인물관(靑釉堆塑人物罐-항아리), 절강(浙江) 무의현(武義縣)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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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618-907), 채색유도낙타재병기용(彩色釉陶駱駝載樂伎俑).


중국 서예의 역사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서예관에서 시대별 유명한 서예가들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왕희지(王羲之)의 상우첩(上虞帖), 회소(懷素)의 고순첩(苦筍帖), 소동파의 제황기도문(祭黃畿道文)은 중국내 어디에도 볼 수 없는 회귀한 작품이다.

긴 처마와 높은 창문, 낮은 난간을 설치하는 등 전통적인 건축 풍으로 꾸며진 1,200m2의 회화관 에는 당나라부터 근대까지 우수한 화화 작품 12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손위(孫位)의 고일도(高逸圖), 당인(唐寅)의 춘산반려도축(春山伴侶圖軸) 등은 중국 회화사에서 손꼽히는 걸작이다.

중국 고대 가구 제작의 전성기에 만들어진 상하이박물관의 明.淸代 가구관에 들어서면 명. 청대 어느 저택 안에 들어선 느낌이다.
700m2의 전시실에는 명. 청대의 우수한 가구 1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가구의 선이 부드럽고 디자인이 세련된 명. 청대 가구는 장식이 화려하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중후하고 품위가 있다.
한 때 유럽에서 유행했던 시누아즈리(Chinoiserie)라는 중국풍의 가구가 유행을 했을 만큼 明. 淸代 가구는 서양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교의(交椅)라고 불리는 明. 淸代의 홀딩 체어-접이의자는 훗날 유럽에서 안락의자로 변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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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대 도자관의 도용(陶俑)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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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대 도자관에 전시된 東漢(25-220)시대 녹유도망루(綠釉陶望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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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대 도자관의 도용(陶俑) 전시실.


무엇보다도 한 충 전부를 소수민족 공예관으로 꾸며 그들의 민속과 문화를 전시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중국 문화의 우월성과 다민족국가로서 얼마나 열심히 중국 민족의 단일성을 추구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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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부터 淸나라 때까지의 400여점의 각종 玉器들을 전시하고 있는 고대 옥기 전시관.


유럽식의 서구의 박물관들이 고민에 쌓여 있는 이때 오랜 역사만큼이나 풍부하고 다양한 유물과 유적을 보유하고 있는 중국의 모든 박물관들은 진귀한 소장품들을 새로 지은 박물관마다 특색 있게 전시하면서 다원일체의 중국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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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박물관 내부 中庭과 복도.


 

하루 종일 봐도 다 못 볼 상하이박물관을 반나절 만에 주마간산격(走馬看山格)으로 돌아보고 나와 눈부비고 뒤 돌아본 상하이박물관은 G2 국가로서 면모를 과시하는 상하이 시내 고층빌딩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