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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뉴스/세계가 놀란 한국

My Korea 그러나 그들은 강인했다 (주간조선 2009.05.31)

My Korea, 1951


참혹한 폐허·가난…그러나 그들은 강인했다


516. 한국전쟁 동안 목숨을 잃은 캐나다 군인의 수이다. 캐나다 병사는 연인원 2만7000여명이 한국전에 참전했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동양의 작은 나라 코리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한반도에서 사선(死線)을 넘나든 홍안의 청년들은 지금 호호백발이 되었다.

매년 4월이 되면 캐나다 한국전 참전용사들은 재향군인회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다. 참전용사들이 한국 체류 기간 동안 보내는 일정은 거의 비슷하다. 용산 전쟁박물관과 부산 유엔묘지와 가평 전투 기념비를 참배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필수 코스. 참전용사들은 이와 함께 포항제철, 현대중공업 등 산업시설을 둘러보며 한국의 발전상을 눈으로 확인한다.

한카협회(회장 김항경·강남대 석좌교수)는 매년 이들을 위해 서울의 유명 호텔에서 따뜻한 환영만찬을 열어왔다. 2009년에도 30여명의 캐나다 참전용사들이 한국을 찾았다. 한카협회는 지난 4월 20일 서울 장충동 소피텔 앰배서더호텔에서 이들을 위한 환영만찬을 열었다. 이날 환영만찬에는 강남대 캐나다학과 재학생 12명이 참석했는데, 3학년생 엄보람양이 학생 대표로 감사말을 했다. 이에 캐나다 참전용사를 대표해 머레이 에드워드(Murray Edwards)씨가 답사를 했고, 김항경 회장은 에드워드씨에게 감사의 선물을 전달했다. 그리고 참전용사들은 다시 캐나다로 돌아갔다.

보름여가 흐른 5월 중순, 김항경 회장은 뜻밖의 우편물을 받았다. 발신인은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빅토리아시의 머레이 에드워드(89)씨. 김 회장은 우편물을 개봉하면서 깜짝 놀랐다. 그 안에는 한카협회에 기증하는 2000달러짜리 수표와 에드워드씨가 1951년에 찍은 사진 14점이 동봉해 있었다. 에드워드씨는 김 회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잊을 수 없는 한국 방문에 대한 감사 표시로 작은 돈을 보낸다”고 썼다. 그는 또 “참전 당시 한국이 오랜 기간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게 거의 없었지만 한국에 머물면서 특별한 호감을 갖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김항경 회장은 “에드워드씨에게서 이런 귀중한 선물을 받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에드워드씨는 1950년 12월, 중부전선의 캐나다 PPCLI 보급담당관으로 한국땅을 밟았다. 한국에 대해 호기심이 많았던 에드워드씨는 연락장교 김용조(Yong Jo Kim) 중위의 안내를 받으며 서울과 경기도 지역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에드워드씨는 캐나다 군용 지프를 타고 서울과 그 주변 지역을 돌아다니며 시골마을에서 벌어지는 결혼식과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에드워드씨가 보낸 사진에는 ‘My Korea: 1951’이라는 제목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글이 달려 있다.

‘내 눈에 비친 오래전 한국의 모습이 흥미를 불러일으킬 것으로 생각합니다.(I thought it might interest you to see Korea as seen through my eyes those long years ago.)’

에드워드씨는 각각의 사진에 직접 설명을 붙였다. 일부 사진에는 당시 사진을 찍을 때의 상황을 소상하게 설명하기도 했다. 평범한 캐나다 군인의 카메라 렌즈에 비친 ‘1951년 코리아’로 시간여행을 떠나본다.

경기도 양주 북방의 어느 마을에서 만난 소녀들. 전쟁에 찌든 시골소녀들 답잖게 해맑다.
내가 타고 있던 지프에 소년소녀들이 모여들었다. 지프 왼쪽에 캐나다 마크가 선명하다.
내가 아이들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자 사람들은 모두 사내 아이만 안고 포즈를 취했다.
내가 사진을 찍기 전 이 어머니는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배경이 잘 나오게 하기 위해 흰 천을 볏짚단 위에 걸쳤다.
내가 소속된 대대의 1951년 초 모습. 우리 부대는 현지 한국 남자의 안내를 받아 이동했다. 이 사진은 한국전쟁박물관에도 전시되어 있다.
짚방석에 앉아 맷돌을 돌리는 여인들.
한국의 전형적인 험한 산길. 내가 타고 있는 지프는 미군 2.5t 트럭을 만나자 후진해서 길을 비켜주었다.
이 사진은, 내게 있어, 서울의 상징적 모습이었다. 전쟁과 폐허에도 불구하고 이 젊은 여인은 사진 찍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노천시장은 의지가 강한 사람들에게 좌절하지 말고 계속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듯했다.
오른쪽 사진들에는 하나의 스토리가 있다. 젊은 청년은 어느날 전선에서 만난 사람으로, 우리 부대는 그를 장교 중 한 사람인 파울드스(Foulds) 대위에 소속시켰다. 우리는 폭격으로 폐허가 된 그의 집과 마을을 재건했다. 우리들이 한국 근무를 마치고 캐나다로 돌아갔을 때 파울드스 대위는 이 청년을 캐나다로 초청했고 그가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에 다니도록 후원했다. 나중에 그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지난 4월 20일 한카협회 주최 환영만찬에 참석한 에드워드씨.

사진을 보내온 머레이 에드워드

1920년 1월 16일생. 서른 살이던 1950년 12월, PPCLI 2대대 중위로 한국땅을 밟았고 이후 유명한 가평 전투에 참전했다. 1년간 보급 담당 장교로 한국전쟁을 겪었다. 복무를 마치고 1951년 12월 캐나다로 돌아가, 이후 소령으로 예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