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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치

DJ-YS, 생전에 맞잡은 `화해`의 손 (YTN 2009.08.18)

DJ-YS, 생전에 맞잡은 '화해'의 손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 투쟁의 평생 동지였습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대권을 놓고 경쟁을 했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두 사람은 김대중 전 대통령 생전에 극적으로 화해했습니다.

두 사람의 오랜 애증 관계를 김주환 기자가 정리했습니다.

[리포트]

유신과 5공화국 시절 민주화의 상징이었던 양김.

1971년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신민당 전당대회 결선투표에서 김대중후보가 김영삼후보를 상대로 역전극을 펼치면서 협력과 경쟁으로 점철되는 양김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유신이 선포되면서 야당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양 김은 박정희 정권에 맞서는 동지관계로 돌아섭니다.

두 사람은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경쟁하지만 그것도 잠시, 5공 군사정권의 등장은 두 사람의 협력을 가져오게 됩니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미국망명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식, 그리고 뒤이은 두 사람의 지지자들로 구성된 민주화추진협의회의 결성을 통해 강력한 민주화 동지로 거듭 납니다.

이듬해 12대 총선에서 민추협이 모태가 된 신한민주당은 돌풍을 일으키며 제1야당으로 등장하고, 이어진 직선제 개헌 투쟁 등 민주화 장정에서 결실을 맺게 됩니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다시 경쟁관계로 돌아선 두 사람은 후보 단일화 실패와 이에따른 정권교체 좌절을 거치면서 급속도로 멀어졌습니다.

1990년 민정당과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통합을 계기로 두 사람은 야당내 경쟁자에서 여야의 정적관계로 뒤바뀝니다.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전대통령이 승리했지만 97년 대선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면서 승자가 됩니다.

이후 국민의 정부 시절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장 격렬한 비판자가 됩니다.

1999년, 부산 민주공원 개원식때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대중 당시 대통령을 면전에 두고 독재정권이라며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의 긴장관계는 계속돼 정치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날카롭게 대립했습니다.

원로들과 민주화 동지들의 끊임없는 화해 권유가 있었지만 결과는 없었습니다.

40여년동안 정치적 숙적이자 민주화의 가장 큰 동지였던 두 사람.

서로 다른 기질과 자라온 환경, 계층적, 지역적 지지기반이 때로는 시너지효과를 거두기도 하고 때로는 소모적 정쟁을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녹취: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
"두 분은 민주화 동지인 동시에 보완적 경쟁관계였습니다."

하지만 힘겨운 김대중 전 대통령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찾음으로써 극적인 화해를 했습니다.

[녹취:김영삼, 전 대통령]
"이제 화해한 것으로 봐도 됩니까?"
"이제 그렇게 봐도 좋습니다. 그럴 때가 됐습니다."

한국 정치사의 한 획을 그었던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은 생전에 이렇게 다시 손을 맞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