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어제 서거했다. 숱한 고초와 시련을 넘어 대통령에 오르고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5전6기 부도옹도 자연의 섭리를 피하진 못했다.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의 민주주의와 민족화해에 큰 족적을 남겼지만 현 정부 들어 오히려 퇴보하는 민주주의와 남북관계 경색을 안타까워하며 86년의 삶을 마감했다. 한국 정치사의 영욕을 담은 이른바 ‘3김 시대’도 고인의 서거와 함께 저물었다. 시대의 지도자이자 스승인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접한 온 국민은 깊은 애도 속에 옷깃을 여미고 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고인의 삶은 그 자체가 한국 현대사의 질곡과 부침을 대변한다. 그는 엄혹한 독재 시절에 40대 기수론으로 박정희 정권에 맞서다가 납치당해 현해탄에 수장될 뻔했다.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등장한 전두환 정권에서는 사형선고, 투옥 6년, 망명 10년, 가택연금 55차례 등 숱한 고초를 겪었다. 정통성 없는 5공 정권은 그의 이름 석자 자체를 금기(禁忌)시했지만 그럴수록 ‘김대중’은 ‘김영삼’과 더불어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국민들에게 각인됐다.
6·10 민주항쟁 이후 10년 만인 97년,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됐다. 50년 만의 헌정사에 처음 나온 수평적 정권교체로 한국 민주주의의 절차적 완성이라 일컬을 만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10년은 갈등과 곡절에도 불구하고 한국정치의 새 시대를 연 역사적 전환기였다. 고인은 인권투사의 상징이기도 했다. 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약 30년간 역대 군사정권하에서 온갖 박해와 탄압을 받은 그는 스스로 “겨울을 견디고 초여름에 꽃을 피우는 인동초와 같은” 시간이었다고 토로했다. 그래서 ‘인동초’라는 별칭을 얻었고, 국제사회에서는 ‘한국의 넬슨 만델라’로 불리기도 했다.
고인의 삶과 정치역정을 관통하는 정신은 ‘행동하는 양심’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 감각’ 등 평소 즐겨쓴 자신의 표현에서 엿볼 수 있다. “두렵다고, 겁이 난다고 주저앉아만 있으면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두렵지만, 나서는 것이 참된 용기입니다.”(1993년,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갈구는 불굴의 신앙으로 굳어졌고, 87년 체제 출범의 밑거름이 됐다. “정치는 살아 꿈틀거리는 생물과도 같다”는 말로 한국 정치사의 역동성을 표현한 고인은 “정치는 국민의 손을 잡고 반 발 앞으로 가야 한다”며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정치의 중요한 덕목으로 삼았다.
민주, 민생, 평화 고인의 신념 계승해야
민족화해에 대한 고인의 집념은 냉전체제를 극복하고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71년 대통령 선거 때부터 남북 간 교류와 4대국 한반도 평화 보장 등을 주장한 그는 80년대 ‘3원칙 3단계 공화국연합체’ 통일론으로 한반도의 미래상을 그려냈고, 그 구상은 햇볕정책으로 발아했다. 4차례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된 뒤 지론인 남북 평화·협력 정책, 즉 햇볕정책을 펼쳤고, 분단 반세기가 훌쩍 넘은 2000년 6월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일궈냈다. 국제사회는 한국과 동아시아의 민주화와 인권, 남북화해 정책에 대한 고인의 공로를 인정해 노벨평화상을 수여했다.
정작 고인을 둘러싼 정치적 토양은 척박했다. 군사독재정권 때부터 ‘좌파’ ‘빨갱이’ 등 색깔론에 시달려온 고인은 대통령 재임 이후에도 끊임없이 수구 기득권 세력의 도전에 직면했다.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은 최근까지도 그 역사적 의미와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도외시한 세력에 의해 뒷돈 거래로 북의 핵개발을 도왔다는 식으로 매도됐다. 특히 남북 화해와 평화의 상징인 햇볕정책 역시 일방적 대북 퍼주기라는 비난 속에 존폐의 기로에 섰고, 그 결과 남북관계는 과거로 뒷걸음질했다. 심지어 노벨평화상까지도 로비의 결과로 폄훼당하기도 했다. 누가 무슨 일을 하든 호남과 영남을 비롯해 친북과 반북, 진보와 보수, 주류와 비주류 등으로 분열된 우리 사회의 굴레가 그의 발목을 잡는 일이 허다했다.
고인의 정치 역정에 흠결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6·10 항쟁의 결실로 16년 만에 직선으로 치러진 8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김영삼 두 야권 후보의 단일화 실패와 민주화 세력의 분열은 이후 한국 정치의 질곡과 갈등 구도를 낳는 단초가 됐다. 대통령 재임 시절 발생한 이른바 ‘홍3 게이트’는 ‘아버지 김대중’의 한계를 드러냈고, 그간 쌓아온 업적에 누를 끼쳤다. 97년 외환 위기 때 신자유주의 정책을 과도하게 수용한 것도 과(過)로 지적된다. 국가부도 위기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선택의 폭은 넓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국부의 유출과 양극화의 원년이 되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 현대사의 질곡 담은 ‘인동초’ 삶
김 전 대통령은 떠났지만 어록은 우리의 곁을 맴돌 것이다. 69년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 시도 때 “공산 좌익 독재뿐만 아니라 우익독재도 민주주의의 똑같은 적”이라며 독재타도의 선봉에 섰다. 82년 청주교도소에선 “내게도 올 것인가 자유의 기쁜 날”이라고 군사정권의 폭압에 절규했고, 93년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에선 “국민은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지막 승리자는 국민입니다”라고 부르짖었다. 97년 대통령 당선자 회견에서 “이 땅에 차별로 인한 대립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천명했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 대 국민 보고에선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이제 가능성을 보고 왔다는 것뿐이다”라며 멀고 긴 통일의 여정을 얘기했다.
고인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행동하는 양심이고자 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정치와 거리를 유지하던 고인은 ‘잃어버린 10년’ 비판에 대해 “50년 동안 잃어버렸던 우리의 민주주의를 ‘되찾은 10년’이다”라고 일갈했다. ‘평생 민주화 동지’라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선 “내 몸의 절반이 무너져내린 것 같은 심정”이라며 후퇴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억울함과 분함’을 토로했다. 그리고 “독재정권, 보수정권 50여년 끝에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가 10년 동안 이제 좀 민주주의를 해보려고 했는데 어느 새 돌아가고 있다”는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추천사를 남겼다. 이 추천사는 우리에게 앞으로 무엇을 해나가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고인을 보내며 새삼 우리를 되돌아 본다. 고인이 평생 염원했던 민주주의와 민족화해가 다시 퇴보하고 있음을 목도한다.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민생은 허우적거리며, 남북관계는 얼어붙었다. 그중에서도 사회 곳곳에 드리운 공안정국은 20~30년 전의 데자뷔로 다가온다. 오늘 김 전 대통령을 진정 애도하는 사람은 고인의 뜻을 되새겨야 한다. 고인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 서민에 대한 사랑, 평화적 남북관계에 대한 신념을 오롯이 계승해야 한다. 고인의 숭고한 뜻을 국민화합과 남북평화로 승화시켜야 한다. “우리가 좋은 나라를 이룩하려면 무조건 행동하는 양심을 지녀야 한다”(남북정상회담 개최 9주년 기념 강연)던 고인의 외침이 지금도 우리의 귀에 쟁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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