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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년 역사 동춘서커스 박세환 단장 (주간조선 2009.12.28)

84년 역사 동춘서커스 박세환 단장

photo 이상선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이봉조·허장강·배삼룡·이주일… 연예인 사관학교
“다 떠날 때 왜 남았냐고? 누군가는 지켜야지”

<이 기사는 주간조선 2087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40대 이상의 한국인은 서커스와 관련된 아련한 추억을 갖고 있다. 한국이 원조물자에 의지한 채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던 시절, 한국인의 유일한 오락거리는 서커스와 영화였다.

영화는 나이 제한이 있었지만 서커스는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추석이나 설 때 서커스단이 시장 공터에 들어서면 그때부터 마을은 왁자해졌고 이내 돈이 돌았다. 공중곡예, 접시돌리기, 통굴리기, 허리 뒤로 꺾어 입으로 접시 올리기 등…. 상상할 수 없는 묘기의 향연.

코흘리개 꼬마들은 서울 가야 볼 수 있다는 코끼리를 직접 본다는 즐거움에 가슴이 콩닥거렸고, 10대 소녀들은 잘생긴 사회자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몇번을 봐도 또 보고 싶은 게 서커스였다. 동네 꼬마들은 으레 천막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벌어진 틈을 노리곤 했다. 천막만 들추고 들어서면 그곳엔 언제나 놀라운 꿈이 펼쳐지고 있었기에.

최근 동춘서커스가 언론의 관심을 받고 있다. 동춘서커스단 박세환 단장이 지난 10월 “11월 청량리 공연을 끝으로 문을 닫는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84년 역사의 동춘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는다고 하자 네티즌들은 정부 당국의 처사를 거세게 비판했다. 아고라 토론방에는 ‘동춘이 문 닫으면 유인촌은 무인촌 된다’ ‘4대강 파기 전에 동춘부터 살려내라’ 등의 게시물이 올라왔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체육관광부와 노동부가 맺은 ‘사회적 일자리 창출 업무 협약’이 동춘서커스에 희소식을 전했다. 이렇게 되면 동춘서커스 단원 15명은 노동부로부터 1인당 84만원을 지원받게 된다. 회생의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동춘서커스는 지난 9월 17일부터 12월 15일까지 서울 청량리에서 공연했다. 2010년 1월 12일부터 3월 15일까지 수원에서 공연한다. 지난 12월 7일 오후 청량리 수산물시장 공터 동춘서커스 빅탑. 천막도, 무대도, 객석의 의자도 옛날 그대로다. 남루하다.

문득 한수산의 소설 ‘부초’에 나오는 주인공 명수가 생각났다. 소설이 나온 1977년 분위기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박경애가 부른 노래 ‘곡예사의 첫사랑’의 전주(前奏)가 귓전에 울리는 듯했다.

매표소 겸 사무실로 쓰는 컨테이너에서 박세환(65) 단장과 마주 앉았다. 좁은 공간의 벽면에는 서커스 공연에 필요한 각종 공문서 원본이 붙어 있었고 그 틈 사이로 오래된 포스터가 보였다. 바닥에는 전열기와 음료수 상자, 티켓 상자 등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서커스를 처음 본 게 언제였나. “1959년 동춘서커스가 경주에 왔다. 내가 경주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마침 나는 학교 악대부에 가입해 트럼펫을 배우고 있었다. 그때 사회자는 까만색 양복에 하얀 마후라(머플러)를 걸치고 있었다. 잘생긴 이 사회자는 관객들을 들었다 놓았다 할 정도로 말을 잘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할아버지가 세상에서 말을 가장 잘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 사람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그의 조부는 당시 경주 지역에서 유지로 통하던 박화준씨. 종갓집의 종손이었던 세환의 가슴에 동춘서커스단의 화려한 무대가 강렬하게 박혔다. 1962년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그는 무작정 동춘서커스를 찾아갔다.

어디서 동춘서커스에 입단했나. “동춘서커스단이 수원 지동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나는 노래를 잘하니까 가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바로 입단하지 못하고 3개월 동안 (연습생으로) 대기시켰다. 가수와 연기자들이 자는 방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3개월동안 기다렸다.”

그때 동춘서커스에 있던 연예인 중 나중에 유명해진 사람은 누구인가. “그때는 심철호, 남철, 남성남, 장항선 등이 있었다.”

처음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을 때 어땠나. “경주 콩쿠르대회에 나가면 1등을 했는데 유료관중이 있는 무대에 서니까 전혀 달랐다. 그때 내가 부른 노래가 ‘청춘의 꿈’이었다. 너무 떨려서 박자가 엉망이 되었다. 폴카곡이 트로트곡이 되어 버렸다. 첫 무대는 실패였다. 한동안 무대에 서지 못하다가 손님이 없는 공연에만 무대에 섰다. 그렇게 연습을 한 끝에 1년 만에 앙코르를 받는 가수로 인정받았다. 예명도 박원영(朴元永)이라고 지었다. 스타로 영원하고 싶다는 뜻을 담았다.”

서커스단 소속 연예인들은 돈은 어떻게 벌었나. “당시 모든 서커스단 연예인들은 일당제였다. 월급제가 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모든 공연단은 일당제로 돈을 받는 게 룰(rule)이었다. 일당이 4만원이라고 치면 손님이 많으면 온일당(4만원)을 받고 손님이 없으면 반일당 2만원을 받는 식이었다.”

동춘서커스단의 곡예 공연.

당시 서커스 연예인은 사회도 보고 배우도 하지 않았나. “얼마쯤 지났을 때 쇼 사회자가 나가 버려 자리가 비었다. 사회자는 귀공자 타입이 마이크를 잡는 게 관행이었다. 나는 사회를 공부했다. 아는 게 많아야 하니 소설책도 많이 읽었다. 사회는 윤일경(훗날 남철)에게서 배웠다. 사회자는 펑크가 나면 원맨쇼도 해야 했고 배우도 해야 했다. 내가 연극 주연을 할 때 장항선이 형사 역할을 맡았다. ‘물레방아 도는 내력’에서는 남철이 마당쇠를 맡았다. ‘원한 맺힌 두 남매’ ‘어머니 울지 마세요’ ‘홍도야 울지 마라’ ‘안개 낀 목포항’ 등에 출연했다.”

동춘서커스단은 전성기 때 단원이 어느 정도 됐나. “내가 입단했을 때는 150명이 넘었다. 무용수만 7~8명이 되었다. 무용수들은 오프닝과 피날레 때 춤을 췄고 중간중간에 캉캉춤이나 차차차를 췄다. 가수도 6~7명이 되었다. 여기에 10인조 악단이 있었다. 곡예팀, 연극팀, 국악팀도 있었다. 여기에 설비·시설팀도 있었다.”

서커스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일제강점기 때인 1913년. 일본 고사쿠라 서커스단이 부산에 들어와 서커스 공연을 시작했다. 서커스 열풍이 시작됐다. 동춘서커스단은 1925년에 목포에서 창설되었다. 일본 서커스단에서 활동하던 박동수(호 동춘)가 독립해 30여명의 조선인을 모아 만들었다. 1930년대 한반도에는 동춘서커스단 등 한국인이 운영하는 서커스단 10여개를 포함해 30여개의 서커스단이 전국을 누볐다.

가수, 코미디, 배우 등 예능에 재질이 있는 청춘들은 모두 서커스단으로 몰려들었다. 광복 이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서커스 열풍을 선도하고 있던 공연단이 동춘서커스였다. 그가 동춘에 입단했을 때 이미 허장강, 서영춘, 배삼룡, 이주일, 이봉조 등이 동춘을 거쳐간 뒤였다. 당시 동춘서커스단에는 코끼리, 사자, 호랑이 등 동물이 창경원 다음으로 많았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승승장구하던 국내 서커스단이 첫 번째로 충격을 받은 것은 텔레비전의 출현이었다. 1963~1964년에 개국한 방송국들은 서커스단에서 키워놓은 우수 인력을 빨아들였다. 배우, 사회자, 연주자 등 A급 단원들은 수입이 불안정한 서커스단을 떠나 안정적인 방송국을 택했다. 그럼에도 서커스단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서커스단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예비 연예인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왜 방송국으로 옮길 생각을 하지 않았나. “당시는 한번 주연배우는 줄곧 주연배우 대접을 받았다. 이쪽 바닥은 주연 빼놓고는 다 대우가 형편없다. 나도 MBC 2기 탤런트 오디션에 합격했지만 가지 않았다. 나는 이미 그때 동춘에서 주연배우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나가서 주연이 못될 바에야 동춘에 있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또 동춘이 마음도 편했고, 내가 빠지면 동춘서커스가 지장을 받는다고 생각했다.(웃음) 그때 날 보러오는 여성팬들도 있었다.”

서커스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는 언제였다고 보나. “1972년 4월 12일부터 TBC에서 드라마 ‘여로’가 시작되었다. 태현실과 장욱제가 나오는 드라마였는데 이 드라마가 인기가 있으니까 저녁에 식사하고 서커스구경 오던 사람들이 TV 있는 집으로 몰려갔다. 그때부터 공연예술 극단이 TV에 밀리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인기를 끌었던 국극단도 이때를 전후해 사라졌다.”

1975년 서커스를 떠났는데, 왜 동춘을 그만두었나. “경주에 계신 할아버지께서 내가 서커스단을 따라다니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호적 파낸다’ ‘쥐약 먹고 같이 죽자’ 등의 얘기를 하셨다. 나도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동춘을 나왔다. 마침 부산 국제시장 안에 있는 부산극장의 선전부장 자리가 나서 그쪽으로 옮겼다. 3년간 선전부장으로 일하면서 인정을 받아 돈을 많이 모았다. 사장님이 영화가 시작된 뒤에 들어오는 관객의 현금 입장료 수입은 전부 내가 갖게 했다. 그때 번 돈으로 부산극장 옆에 생필품 중간도매상을 차렸다. 내가 말을 잘하니까 손님이 몰려와 장사가 잘됐다. 부자가 이렇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1978년 9월, 인천 간석동에서 공연 중이던 동춘서커스 빅탑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동춘서커스단은 창단주 박동수의 아들 박영조씨가 맡고 있었다. 동춘서커스단이 매물로 나왔다는 얘기가 박세환씨에게 들렸다. 박씨는 정신이 퍼뜩했다.

“연극, 국악, 코미디 등 모든 분야의 공연예술이 동춘에 뿌리를 두었는데 우리나라에 그런 서커스단은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춘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면 안 된다는 마음에 박영조 단장을 만나러 인천으로 갔다. 그곳에는 서커스단을 사러 온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돈으로 1800만원이었다. 나는 500만원을 선금으로 주고 나머지는 벌어서 갚기로 하고 약 80명의 동춘단원을 인수했다.”

서커스단을 맡은 이후 최고의 순간은 언제였나. “1980년 8월 KBS 월요기획 다큐멘터리에 동춘서커스 얘기가 방영되었다. 그 직후에 서산에서 공연을 했는데 40일 동안 완전 매진을 기록했다. 아마도 서해안 쪽 사람들은 다 오지 않았나 싶다. 그때 단원들에게 오땅(일당의 5배)도 줘봤다. 빚도 다 갚고 완전히 일어섰다. 남은 돈으로 동물도 샀다.”

동춘을 거쳐간 스타들. (왼쪽위 부터) 배삼룡, 서영춘, 허장강, 이주일, 이봉조, 남철·남성남, 심철호, 장항선, 정훈희. photo 조선일보 DB

지자체에서 동춘을 초청하려고 경쟁한다고 들었다. “8일 동안 하는 강릉단오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안 빠졌다. 강릉시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좋은 장소를 빌려준다. 돈을 많이 벌어가라고. 2008년에는 강릉단오제가 만석을 이뤘다. 다른 지자체의 축제 때도 초청받는다. 지방 가면 입장료를 5000원으로 할인한다.”

서커스단장으로서 가장 절망적인 순간은 언제였나. “2003년 9월 12일 전남 광양 구시청 마당에서 공연할 때였다. 그날이 추석이었는데 태풍 매미가 상륙하고 있다는 기상예보가 있었다. 천막을 뜯어내면 철골구조물은 버틸 수 있다고 봤다. 문제는 그렇게 하면 추석날 공연을 할 수가 없어 그냥 강행했다. 그날 아침 바람이 심상치 않아 손님을 다 내보냈다. 11시 반부터 2시간30분 동안 태풍 매미는 빅탑, 조명, 음향기기 등을 다 쓸어가 버렸다. 그러더니 2시부터 날씨가 개기 시작했다. 태풍에 날아가버린 20억 재산 중 조금이라도 건져보려고 재해대책본부에 알아보니 가설물이라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그때 정말 눈앞이 캄캄했다.”

서커스 단장으로서 가장 잘못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마케팅 분야를 소홀히 한 것이다. 그게 흥행실패로 이어졌다. 동춘에서 시작한 모든 예술이 발전해 나갔는데, 동춘만 제자리걸음을 걸었다. 그 결과 전국에 문예예술회관이 160개가 들어섰는데 서커스만 상설극장을 마련하지 못했다.”

2009년 12월, 현재 국내 서커스단은 동춘이 유일하다. 1년 전만 해도 동춘서커스 외에 한국곡예예술단, 서울아트서커스 3개 서커스단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2개가 문을 닫았다. 국내 서커스단은 이미 오래전부터 일부 곡예사를 중국에서 수입했다. 동춘서커스 역시 ‘중국 기예단 합동공연’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중국 기예단이 없었으면 그나마 동춘서커스는 진작에 문을 닫았을지 모른다. 동춘서커스 단원 50명 중 29명이 중국인이다. 현재 동춘서커스가 지고 있는 부채는 3억8000만원.

동춘서커스단의 빅탑 photo 이상선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동춘서커스 단원의 월급을 공개할 수 있나. “침식을 제공해주고 A급은 300만원, B급은 200만원, C급은 150만원 선이다. 사실 극단에 소속된 연극배우들보다는 동춘 단원들이 훨씬 더 잘 받는다.”

동춘서커스의 오늘을 보면서 캐나다 ‘태양의 서커스’와 러시아 ‘볼쇼이 서커스’를 말하는 사람이 많다. “왜 ‘태양의 서커스’처럼 하지 못하느냐고 말한다. 기업에서 초청비의 20%를 지원한 ‘태양의 서커스’는 10만원을 받기 때문에 강남 지역에서만 겨우 된다.

부산에 내려가면 5만원 이상을 받을 수가 없다. 그래도 손님이 안 온다. 우리도 정부나 민간 후원을 받으면 그 수준까지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

왜 국내 서커스는 빅탑(대형 천막)을 고집하나. “캐나다 ‘태양의 서커스’ 역시 텐트를 가지고 왔다. 빅탑을 고집하는 이유는 기존의 문예예술회관에서는 천장이 낮아 곡예를 보여주기가 어렵다. 또 문화 혜택에서 소외된 농어촌 지역에 가서 공연하려면 빅탑이 필요하다.”

중국을 단체여행 해보면 반드시 상설극장에서 하는 서커스 공연을 보게 되어 있다. “서커스 상설극장이 상하이에 8개가 있고 평양에도 3개나 있다. 라스베이거스에도 상설극장이 많다. 한국에만 서커스 상설극장이 없다. 서커스 없는 관광산업은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외국의 서커스단은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다. 중국 곡예사는 전부 공무원 신분이다.”

각국 서커스의 특장을 소개해줄 수 있나. “공중곡예 분야는 평양교예단이 세계 1위다. 공중곡예를 잘하려면 몸무게 60㎏ 정도가 알맞다. 결국 공중곡예는 한국인에게 맞는 서커스 분야라는 뜻이다. 러시아는 피에로 분야로 서커스의 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베이징교예단이나 평양교예단의 역사는 불과 58년밖에 안 됐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 서커스 수준이 세계 최고였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공연예술의 한 장르인 서커스가 지속·발전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먼저 서커스 상설극장이 세워져야 한다. 서울을 포함해 대도시에 3~4개는 있어야 한다. 그래야 계절을 타지 않고 공연할 수 있고 관광객을 불러모을 수 있다. 그리고 서커스아카데미가 설립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서커스 분야에 뛰어들려는 사람들을 꾸준히 키워낼 수가 있다.”

박 단장의 염원은 여러 번 실행 직전까지 갔었다. 서울시는 부지를 제공하고 문화관광부가 경비를 지원해 상설극장을 세우는 안(案)이 만들어져 실행되는 듯하다가 1998년 서울시장이 바뀌면서 없던 일이 됐다. 그에 앞서 1995년 8월 당시 강봉균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이 행정쇄신위원장이 되어 ‘동춘서커스활성화 방안 10개년 계획’을 만들었다. 서커스 엑스포를 개최하고, 곡예사를 인간문화재로 지정하고, 상설극장을 건설한다는 내용이었다.

무척 감격스러웠겠다. “강봉균 실장 앞에서 직접 이 얘기를 들었을 때 가슴에 서린 한이 풀리는 것 같아 감격해 울었다. 하지만 DJ정부로 바뀐 1999년 유야무야가 됐다. 모든 것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동춘서커스는 이름이 있어서 다른 지자체에서도 상설극장을 지어 유치할 만한데. “현재 목포시 의회에서 움직임이 있다. 동춘서커스가 목포에서 창단되었으니까 목포시에 상설극장을 짓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고 들었다. 문제는 내가 또 그것을 기다릴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감기환자와 숨 넘어가는 환자가 있다면 누굴 먼저 손을 써야 하나. 숨 넘어가는 사람(동춘)을 치료해야 하는 것 아닌가.”

박 단장은 벽면에 붙어 있는 ‘전문예술단체 지정서’를 가리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정부에서 3년만 서커스를 집중지원하면 동춘서커스를 세계적인 서커스로 만들어낼 자신이 있다. 내가 서커스에 몸담은 게 48년이다. 서커스와 관련해 나만큼 노하우를 가진 사람이 없다. 동춘이 전문예술단체로 지정받았으니 우리도 민간기업의 스폰서를 받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태양의 서커스’? 그거 아무 것도 아니다.”

그의 자신감이 허투(虛套)로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