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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인물열전

난 은퇴를 기다린다, 요리사 꿈을 꾸며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사장 2010.01.13 23:34)

난 은퇴를 기다린다, 요리사 꿈을 꾸며
  •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사장

입력 : 2010.01.13 23:34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사장

스코틀랜드에서 고객 부부가 집을 방문했다. 불고기를 대접했다.
그후로 나의 최대 고객이 됐다.…
은퇴 후 내 꿈은 행복 주는 요리사 누가 알겠는가?
멋진 레스토랑의 주방장 겸 CEO가 될지.

은퇴를 하면, 나는 제일 먼저 요리학원에 등록할 생각이다. 그리고 요리사가 될 것이다.

아내는 20여년 전
미국 유학시절 때 딸아이를 낳았다. 물론 문화의 차이겠지만, 힘든 출산을 마친 아내에게 당시 미국의 병원에서 내온 산모 음식은 빵 조각과 수프가 전부 다였다. 장모님이 오시기로 했지만 시간이 필요했고 그때까지 계속 빵만 먹게 할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산후조리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직접 미역국과 밥을 해 병원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음식을 해 보니 의외로 재미있었다. 똑같은 재료로 똑같은 시간에 수 많은 사람이 요리를 해도 백이면 백 그 맛과 모양이 다르다. 이건 가장 창조적인 예술행위의 하나가 아닌가.

이게 내 요리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 후에
영국 런던으로 전근을 가게 됐는데, 7년 넘게 주말이면 수퍼에서 장을 보고 요리를 했다. 즐거웠다. 일요일 아침 정성껏 음식을 준비한 후 아내와 딸을 깨워 함께 식사하는 아침 시간의 풍경이야말로 내가 느껴 본 최고의 행복이었다.

좋아하는 요리는 회사의 영업에도 도움을 줬다. 마침 가족들이 잠시 한국에 들어갔을 때 스코틀랜드에서 고객 부부가 집을 방문했다.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들어가 최고의 불고기를 만들어 대접했다. 이들은 나의 최대 고객이 됐다.

그러나 10여년 전에 한국으로 돌아오고, 회사에서도 부사장·사장이라는 직위를 맡게 된 이후부터는 나는 이 좋아하는 요리를 제대로 해본 적이 별로 없다. "아빠, 1년에 한두 번 어쩌다 하는 건 취미가 아니에요"라는 딸아이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다시 자유로워질 은퇴를 기다린다.

요리를 배우게 되면 우선 상대적으로 간단하고 여러 사람이 나누어 먹기 편리한 이태리 요리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이다. 가족이나 가까운 벗들을 초대해 내가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정말 즐거운 일이다. 이들과 함께 할 나만의 공간을 따로 만들어 내가 만든 음식에 술까지 한잔 곁들인다면 세상에 무엇이 부러울까.

은퇴 후 또 다른 계획도 있다. 나만의 방법으로 전 세계를 두루 여행하는 것이다. 나는 여행을 다른 사람보다 수배 더 즐기는 방법을 알고 있다. 좋아하는 취미와 인연이 있는 여행지를 찾는 것이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나는 어릴 때부터 광적으로 영화를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했던 영화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뮤지컬영화의 대명사로 불리는 '사운드 오브 뮤직'이다. 1991년 이 영화의 배경인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를 처음 찾았을 때 느꼈던 짜릿함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촬영배경이 된 장소들을 둘러볼 때마다 영화의 장면들이 그대로 살아나는 듯한 아찔한 감흥에, 그 이후 오스트리아 인근을 지나칠 때마다 잘츠부르크를 찾았으니 벌써 일곱 번도 넘게 간 것 같다.

그 이후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해당 지역을 배경으로 찍은 영화를 미리 골라서 보고 떠나곤 했다. 요리를 취미라고 여기고 있고 스스로 미식가로 자처하는 사람으로서 각 지방 고유의 전통음식을 찾아 그에 얽힌 스토리까지 챙겨가며 먹는 것은 여행이 주는 또 다른 별미였다. 그래서 은퇴 후에는 '영화와 함께 하는 세계여행, 식도락과 함께 하는 세계여행'이라는 제목의 책도 한번 써보고 싶다.

돈이 너무 많이 드는 계획이라고? 물론 맞는 얘기다. 이런 계획들을 실천에 옮기자면 경제적인 뒷받침과 건강이 필요하다. 모든 사람들에게 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떤가? 이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즐겁지 않은가?

요즘 내 스트레스 해소법은 이렇게 신나는 노후생활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면 온몸에 엔도르핀이 절로 솟는 것을 느낀다. 상상을 통해서라도 지금의 생활이 풍요로워진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또 이런 계획을 갖고 있다는 것이 현실의 힘든 상황을 버텨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더 열심히 살 수 있는 힘이 된다면 일석이조가 아닐까.

나는 오래전부터 인생의 장기계획의 하나로 은퇴 후 인생을 설계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왔다. 앞으로 현직에 얼마나 더 있을지 몰라도 조만간 평균수명이 90을 훌쩍 넘어설 수도 있다고 하니 은퇴 후의 삶이 어쩌면 진짜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과는 다른 차원의 새로운 사회생활이나 나 자신만을 위한 시간,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추억 만들기 등 그 어느 것 하나 소중하고 신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은퇴가 기다려진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자발적으로 후계자에게 자리를 물려 주고 은퇴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자리에 연연해 하지 않는 멋진 CEO나 리더를 찾아보기 어려운 걸까.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 은퇴 후의 멋진 인생을 미리미리 준비해 두지 못해서는 아닐까 싶다. 현직에서의 부담이나 스트레스보다 더 나은 삶이 기다리고 있다면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은퇴 후의 내 꿈은 '행복을 나눠 주는 요리사'다. 그러다 혹시 누가 알겠는가? 영화를 테마로 한 레스토랑을 차리게 돼 주방장 겸 레스토랑 CEO가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