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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 육/취업전쟁

[송희영 칼럼] `老後`가 차지해버린 청년의 자리 (조선닷컴 2010.02.19)

[송희영 칼럼] '老後'가 차지해버린 청년의 자리

입력 : 2010.02.19 23:17 / 수정 : 2010.02.20 02:02

송희영·논설실장

40~50대 베이비 붐 세대의 은퇴 후를 더 걱정해 주며
아빠 세대가 자리 붙잡고 아들딸 앞길 막는 상황…
20~30대가 가난해진 지 벌써 10여년이 흘렀다

한 사회 초년병이 내로라하는 글로벌 회사에 취직했다. 부서 배치를 받은 첫날부터 깜짝 놀랐다. 이사와 부장 2명, 차장 1명, 비정규직 여직원 1명뿐이었다. 최하위인 차장은 입사 16년째였고, 평사원은 아무도 없었다.

평사원이 없거나 신참보다 고참이 더 많은 부서 얘기는 대기업에서 종종 듣는다. 인사철마다 인력 구조조정에 열중해온 결과다. 부서별로 성과급을 달리 주는 회사일수록 이런 경향은 심하다. 숫자가 많으면 자기 몫이 줄어들므로 소수화하려는 인사 관리에 쉽게 동의한다.

10년 후 쓸 인재를 키우는 투자보다는 보너스 기준이 되는 오늘 우리 부서의 실적이 중요할 뿐이다. 신입 사원을 거부하는 부서는 그래서 나온다.

밑바닥을 지탱해 줄 하부구조의 부실화는 이 회사만의 고민이 아니다. 한국 사회 전체가 가늘어진 하체(下體)에 덩치 큰 몸을 맡기는 기형으로 변하고 있다.

청년 실업률은 아빠 연령층보다 2배 높다. 고교 졸업생 9명 중 1명은 평생 단 한번도 알바·인턴조차 경험하지 못한다. 취직했다는 고졸 청년 9명 중 1명은 최저 임금(시간당 4000원) 이하 수입으로 살고 있다.

며칠 전 나온
한국고용정보원 자료를 보니 이번 금융위기에서 피해를 가장 많이 본 연령층이 20대와 30대다. 해고가 많았던 데다 취직할 만한 일자리마저 사라져버렸다. 아시아 외환위기 때는 아빠가 최대 피해자였다면 이번엔 아들딸에게 폭탄이 터졌다.

한국은 이미 알바 왕국, 인턴 천국(天國)으로 변했다. 글로벌 시대에 개막한 새 왕국의 주인공은 청년 빈곤층이다. 뛰어난 몇몇 20대 스타의 금메달로는 그 세대의 허기와 절망을 도무지 감추지 못하는 것이 한국 경제의 비극적 운명이다.

피부 세포가 민감한 가수들은 벌써 노래한다. '희망은 멀리 사라졌네…스무살의 꿈은 사라지고… 잠만 자네(
윤도현).' '내일로 가는 마지막 기차를 놓칠 것만 같아요'라고 불안에 떠는 가수(장기하)는 '이 세상은 지옥, 지옥이다'라고 외친다. 세계 1등짜리를 속속 배출하는 세대가 왜 내일의 꿈을 잃었다며 지옥의 고통을 호소하는지 엄마 아빠들은 알지 못한다.

공기업인 한전은 올 들어 정년을 2년 연장했다. 임금 피크제를 도입해 월급을 낮추면서 직장을 확보했다고 은퇴 앞둔 사원들은 만세를 불렀겠지만, 이 때문에 신규 채용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언론도 40대 후반과 50대 베이비 붐 세대의 노후를 더 걱정해준다. 등짝을 따뜻하게 덥혀주는 곳에 줄창 누워, 사회의 문을 열고 막 들어서려는 신참자를 가로막아도 좋다는 분위기인가.

서울시 일자리지원센터에서 어느 곳보다 활기찬 조직은 고령자 전용센터다. 확실한 표가 거기 있어 예산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장애인·여성 전용 고용지원조직까지는 있어도 청년 전용 창구는 없다.

청와대에서 매달 고용전략회의를 한다지만 그 세대에게 가는 떡고물은 보잘것없다. 무엇 하나 건지는 게 없어도 그저 '너의 시뻘건 거짓말(윤도현)'이라고만 비판한다. 빈 좌석을 양보하지 않는 쪽을 향해 '내 몫을 왜 내놓지 않느냐'고 분노하지 않는 게 신기할 뿐이다.

가난한 청년층이 만들 끔찍한 미래를 아빠세대는 외면한다. 국민연금을 생각해보자. 많은 가입자가 내가 적립한 돈을 국가가 부동산·주식에 잘 운용해 은퇴 후 연금이 두둑해질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연금이 제대로 굴러가려면 무엇보다도 젊은 인구가 늘고, 그 계층의 수입이 두툼해져야 한다. 애초부터 후계자 집단이 은퇴자를 부양하는 식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후손이 가난해지면 국민연금제는 신입 회원을 확보하지 못해 와르르 무너지는 다단계 판매 사기극과 엇비슷한 스캔들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세대간 양보론에는 '따뜻한 밥 먹여 키워 놨더니 이제는…' '나의 노후는 어떡하라고'라는 반발이 없을 수 없다. 그렇더라도 고도성장 시대에 누려온 혜택과 자리를 하나 둘 넘겨주지 않으면 기업도, 나라도 붕괴의 길로 달려간다.

곧 40세 이하 알바들이 뭉쳐 청년노조를 결성한다고 한다. 노조로 등록이 될 턱은 없다. 하지만 1970년 22살 청년 전태일이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며 분신 자살한 후 17년 만에 죽창·화염병으로 무장한 과격 노동운동이 불타 올랐다. 20대, 30대가 가난해지기 시작한 지 벌써 10여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