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취 미/여행정보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에 ♬ [한겨레 21 /2009.07.13 제768호]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에 ♬ [2009.07.13 제768호]
[레드 기획] 느림과 낭만이 남아 있는 시골의 작은 기차역 여행…
레일바이크와 펜션열차 등 놀거리·숙박 시설도 다채

간이역엔 느림과 낭만이 있다. 소박하지만 정겨움이 묻어난다. 이런 간이역이 열차가 서지 않아서, 이용객이 적어서 사라지고 있다. 그렇게 간이역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운 이들은 기차를 탄다. 카메라와 수첩으로 간이역사를 기록하고, 무궁화호의 거북이 속도를 즐긴다. 기차에 얽힌 추억을 떠올리며 간이역에서 삶의 쉼표를 찍고 쉬어간다.

» 경북선 용궁역 전경.

경북 예천군 용궁면에 위치한 용궁역은 철도 마니아들이 많이 찾는 간이역이다. 경북선인 용궁역은 사람 나이로 치면 82살이다. 1970년대만 해도 동대구행 비둘기호를 타려는 이들로 북적였던 이곳은 이제 역무원도 없는 무인역으로 남아 드문드문 서는 열차를 맞는다. 영주와 강릉행 상행선과 부산행 하행선을 합쳐 하루 6번 정차하는 무궁화호가 이곳에 머무르는 시각은 불과 2~3분. 지난 6월29일 낮에도 부산행 열차에 오른 사람은 3명뿐, 내리는 사람도 없었다. 시댁이 있는 부산에 간다는 마을 아주머니는 “이용객이 줄어든 것, 무인역이라 역사를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지저분해진 것만 빼면 역사는 어릴 때와 달라진 게 없다”고 말한다.

“안녕, 용궁역. 여전히 멋진 모습이구나”

이런 용궁역에 최근 변화가 생겼다. 지난 6월5일 코레일이 전국 32개 무인역에 명예역장을 두면서 용궁역도 사람 손을 타기 시작했다. 용궁면 마을 주민으로 용궁역의 첫 명예역장이 된 임정녀씨 덕분이다. 임씨는 “기차가 좋아 무보수 명예직이라도 즐겁게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느리게 쉬어가는 간이역은 버틸 재간이 없다. 열차가 속도를 더해갈수록 간이역도 빠르게 사라진다.

용궁역은 조용하고 소박한 전형적인 간이역사 모습을 띠고 있어, 찾아오는 철도 마니아들이 많다. 역사 한쪽 벽엔 얼마 전 이곳을 찾아온 이가 종이로 접은 물고기와 쪽지를 남겨두고 갔다. ‘용궁’이란 역명에 맞춘 선물이다. “안녕, 용궁역. 오랜만에 왔는데 여전히 멋진 모습이구나. 널 지켜줄 역장님이 계셔서 다행이야. 오늘은 물고기랑 왔지만 다음엔 토끼랑 자라를 데리고 올게. 다음에 다시 올 때까지 안녕. 2009. 6.23.”

아담하고 소박한 용궁역 구경을 끝내고 차로 10분 거리인 비룡산 회룡대에 올랐다. 이곳은 전국에서 손꼽히는 ‘육지 속 섬마을’인 회룡포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정자다. 회룡포는 산과 연결된 끝자락을 끊으면 섬이 되어버릴 것 같은 물도리 마을로, 백사장이 넓어 캠핑도 가능하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엔 드라마 <가을동화>에도 나왔던 ‘뿅뿅다리’를 건너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회룡대에서 내려다보는 마을 풍경은 한없이 고요하고 평화롭다. 회룡대에 오르느라 흘린 땀이 아깝지 않은 비경이다.

#. 여행 팁

회룡대와 회룡포는 용궁역 앞에서 택시를 타고 찾아가면 빠르다. 용궁역 앞에서 ‘향석/개포면’이라고 적힌 예천여객 시내버스를 타고 향석1리에서 내려 걸어가는 방법도 있다. 마을 입구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면 회룡포와 뿅뿅다리를, 오른쪽으로 가면 회룡대와 장안사로 빠진다. 뿅뿅다리는 회룡포에 들어가기 전에 놓인 공사장에서 쓰는 구멍 뚫린 강판 다리다. 걸을 때 ‘뿅뿅’ 소리가 나고 흔들린다. 드라마로 알려졌지만 막상 보면 좀 싱겁다.

용궁역을 나와 들른 곳은 이웃역인 점촌역이다. 경북선과 문경선이 만나는 점촌역은 점촌 시내에 있어 역사가 크지만 시골역다운 아기자기한 맛이 있어 철도 마니아들이 문경 일대를 찾을 때 빠뜨리지 않는 곳이다. 동화 속 마을처럼 꾸며진 역사는 그 자체로 관광지다. 쓰지 않는 녹슨 철로를 이용한 꽃밭과 토끼 사육장이 있고, 커다란 바람개비가 바람 따라 쉬지 않고 돌아간다. 기차역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해 인근 유치원생들이 체험학습장으로 놀러오는 곳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2000년부터 운행을 중지한 증기기관차를 역내에 들여 볼거리를 늘렸다. 아이들을 위한 철도자전거도 있다.

녹슨 철로엔 꽃밭과 토끼 사육장이

점촌역은 시골 역사치고 꽤 유명하다. 국내 최초로 강아지를 명예역장으로 둔 덕분이다. 지난해 8월부터 점촌역에서 살고 있는 ‘아롱이’와 ‘다롱이’는 모자·명찰·명함까지 가진 어엿한 명예역장이다. 매년 이용객이 줄어들고 있던 점촌역은 아롱이와 다롱이 덕분에 지난해 이용객이 3천 명이나 늘었다. 지난 3월에는 아롱이가 강아지 6마리를 낳아 이 중 2마리가 2대 역장직을 물려받기도 했다. “강아지들이랑 놀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점촌역에 들른다”는 마을 꼬마에게 점촌역은 기차역이 아닌 놀이터다.

점촌역이 유명해진 건 농사꾼, 레크리에이션 강사 노릇을 마다하지 않은 역무원들의 노력 덕분이다. 점촌역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이름 모를 간이역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기차역이 되기 위해 인터넷 카페(cafe.daum.net/555-7788)도 운영 중이다. 이곳에 가면 토끼 먹이를 뺏어먹는 강아지 6마리의 사진부터 각종 기차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 등이 소개돼 있다. 점촌역 원대희 역장은 “경북선을 활성화하기 위해 경북순환관광열차를 준비 중인 만큼 앞으로 점촌역을 찾는 이들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볼거리·놀거리 많은 점촌역에서 아롱이·다롱이와 이별 인사를 나누고 찾아간 곳은 그 옆 문경선 불정역이다. 이곳은 등록문화재 326호로 지정돼 기차가 다니지 않는 역사다. 서울에서 자가용을 이용하면 2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에 있다. 인근 강의 돌을 이용해 외벽을 쌓아올린 역사는 다른 간이역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외관을 자랑한다. 철거 위기까지 처했으나 역사의 희소성을 인정받아 보존 중이다. 이렇게 문화재로 관리되는 기차역은 불정역을 포함해 23곳(사적으로 규정된 서울역 구역사 제외)이다.

기차가 다니지 않는 불정역은 열차 이용객 대신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레일바이크와 불정역 철로변에 만들어진 기차 펜션 ‘불정역 테마펜션열차’를 이용하기 위해서다. 이날도 관광버스에서 내린 중국인들이 진남역 방면으로 움직이는 레일바이크를 탔다. 햇볕이 쨍쨍한 날에도 철도 위를 구르는 자전거 여행이 신기한 듯 관광객들의 표정은 밝았다. 무궁화호 객차를 펜션으로 꾸민 열차는 지난해 말 개장 이후 이용객이 꾸준히 늘고 있다. 펜션열차를 관리하는 아주머니는 “문경시가 드라마 촬영장, 오미자 같은 각종 농특산물 축제 등을 늘려가면서 관광객도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차 대신 찾아오는 건 여행객들

불정역 근처는 체험관광 상품들이 많아 레포츠를 즐기기에 좋다. 문경새재를 따라 걷는 3시간여의 산책 코스, 불정역과 진남역을 잇는 레일바이크 시설, 사격장과 래프팅 코스 등을 이용할 수 있다. 불정역 근처 10분 거리에 있는 불정자연휴양림에서는 숙박과 함께 특별한 레포츠 체험이 가능하다. 이미 미국과 유럽에서 일반화됐지만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시설이 만들어졌다는 짚라인이다. 짚라인은 와이어를 이용해서 하늘을 나는 레포츠로, 정글 지역의 원주민들이 나무와 나무, 계곡과 계곡 사이를 지나던 이동 수단에서 발전했다. 돈 주고 하는 아찔한 원시 체험이다.

# 여행 팁

불정역 테마펜션열차는 지금도 달릴 수 있는 무궁화호 열차를 개조해 만들었다. 주말이면 방이 없을 만큼 인기다. 예약은 홈페이지(pensiontrain.korail.com) 참조. 불정자연휴양림의 숙박료는 3만원에서 20만원까지 다양하다. 숙박 문의 054-552-9443. 짚라인은 예약하고 이용해야 한다. 짚라인 문의 1588-5219.

간이역이 역사 탐방지나 관광지로 바뀌면서 간이역 여행자들이 늘었다. 철도 마니아 임병국씨는 “간이역이 사라지고 기차여행이 불편해져도 철도 마니아들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열차사랑’ ‘네이버 철도동호회’ 등 철도정보 사이트는 회원이 각각 3천 명이 넘는다. 회원 가입을 하지 않아도 정보를 볼 수 있다. 임병국씨는 기차여행의 매력으로 “버스에 비해 운행 시간도 정확하고, 어디 서는지 다 알 수 있어 구속된 시간 안에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점”을 꼽았다. 간이역 여행자들이 올려놓은 각종 정보는 코레일에서도 제공하지 못하는 보석들이다. 기차를 타고 만나는 바닷길, 비경이 숨겨진 간이역 등은 간이역이 사라지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서둘러 찾아가봐야 할 성지로 떠오른다.

동해남부선 송정역도 이런 성지 중 하나다. 부산 해운대역 바로 옆에 있는 송정역은 바닷가에 인접한 간이역사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췄다. 송정역에 도착해 역사를 빠져나오면 살짝 당황하게 된다. 기차역인데 입구 쪽에 탁 트인 풍경 없이 바로 마을 골목이 펼쳐진다. 송정역은 바다가 가깝다. 역 앞 함흥슈퍼 골목을 빠져나가면 펼쳐지는 바다가 송정해수욕장이다. 파도도 잔잔하고 수심도 얕아 놀기에 좋다. 민박집을 겸한 함흥슈퍼 할머니는 “해운대만큼 넓고 크진 않지만 여름이면 제법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며 해수욕장을 자랑한다.

» 점촌역은 강아지 명예역장을 두면서 역 이용객이 지난해 3천 명이 늘었다.

서울에서 송정까지 무궁화호를 타고 내려오면 7시간53분이 걸리는 긴 여행이지만, 영주나 경주 같은 큰 역까지 새마을호나 KTX를 타고 내려와 무궁화호로 갈아타고 송정까지 내려오면 편하다. 기차를 환승하면 30% 할인 혜택도 받을 수 있다. 영주에서 송정까지 걸리는 시간만도 대략 4시간인 긴 기차여행도 그다지 지루하지 않다. 바깥 풍경을 감상하거나 책을 읽고 음악을 듣다 보면 금세 시간이 흐른다. 기차에서 먹는 먹을거리도 즐거움이다. 코레일유통(옛 홍익회)은 얼마 전부터 무궁화호 기차 한 량을 털어 열차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식당칸을 겸한 이곳은 간단한 음식들을 사먹을 수 있고, 오락기나 노래방 시설도 이용할 수 있다. 기차여행의 달라진 풍경이다.

한 구간 사이인 송정과 해운대역 구간은 동해남부선 노선 중 바다와 가장 근접해 달리는 구간이다. 바다 바로 옆으로 달리는 정동진보다는 못해도 수평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해운대 송정역 구간의 바다를 달리며 일출을 볼 수 있는 기회는 곧 사라진다. 동해남부선 복선 전철화로 인해 2~3년 내 이설을 앞두고 있어서다. 송정역 역시 등록문화재 302호로 등록돼 있어 역사가 사라지진 않겠지만 더 이상 기차를 이용해 이곳을 찾을 수 없게 된다.

» 불정역엔 무궁화호 열차를 개조한 테마펜션열차가 있다. 각 객차엔 수원행, 서울행 같은 행선지명이 붙어 있다.

바다 달리며 일출 볼 수 있는 송정역

철도는 시대 따라 변화가 많았다. ‘통일호-비둘기호-무궁화호-새마을호-KTX’까지 열차가 빨라질수록 철도노선표도 달라졌다. 경의선 통근열차가 다니던 지역은 현재 고속전철이 다닌다. 석탄산업의 요충지였던 문경선과 경북선은 철도 위에 자전거를 올린 레일바이크 사업으로 관광수입을 거두는 중이다. 역 활성화 정책에 따라 간이역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과거와 비교해 철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편리해지고 빨라졌지만 사람 냄새 물씬 나던 시절의 푸근한 풍경은 계속 지워지는 중이다.

하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간이역은 아직 남아 있다. 기차에서 만나는 사람, 기차 하면 떠올리는 추억, 철길이 주는 낭만은 여전히 유효하다. 경춘선을 타고 떠나던 MT의 추억, 바다를 보겠다며 무작정 밤기차를 타던 그 열정을 되살려 올여름엔 느리지만 여유 있고, 불편하지만 낭만 있는 간이역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간이역이 늘어나는 중?

통계상 증가일 뿐 50여개 사라져

간이역의 사전적 정의는 ‘역무원 없이 열차가 정차하는 역’이다. 코레일에 따르면 이런 간이역은 오히려 ‘늘고 있다’. 사전적 정의의 간이역이 2005년 191개에서 매년 10여 개씩 늘더니 현재 228개가 됐다. 대신 일반역 수가 줄었다. 450개 안팎이던 게 2007년 이후 급격히 줄어 현재는 411개뿐이다. 코레일 홍보팀 김중학 과장은 “철도 이용객이 줄어들면서 일반역이 간이역으로 변해 일반역 수는 줄고 간이역 수는 늘어났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간이역이 사라지고 있다”는 말은 틀린 것일까? 아니 맞다. 간이역과 일반역을 합친 역 수가 매년 줄고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간이역은 수치에서 빠지고 있다”는 게 코레일 쪽 설명이다. 우리 마음속에 자리한 진짜 간이역은 영락없이 ‘퇴출’되고 있는 것이다. 네이버 철도동호회를 운영하는 철도마니아 임병국씨는 “2000년 이후로 간이역 50여 개가 사라졌다”고 말한다.

등록문화재로 기록돼 보존되지 않는 간이역은 쓰임이 끝나면 외양간으로, 낡은 창고로, 아무도 찾지 않는 폐허로 변해 쓰러져간다. 북적거리는 일반역도 어느 해에 찾아가면 간이역이 돼 있고, 그 뒤 또 몇 년이 지나면 기차로 찾아갈 수 없는 역이 돼 있다. 간이역이 사라지는 속도는 열차가 빨라지는 속도와 비슷하다.

불정역 관리소장 서창호씨 인터뷰

“30년 전에도 여기서 무연탄 가루 뒤집어쓰고 있었죠”

» 불정역 관리소장 서창호씨
‘나가는 곳’이란 붉은 글씨가 아직도 선명하다. 과거에 석탄화물 열차가 끊이지 않던 경북 문경시 불정역은 현재 불정역 테마펜션열차의 관리사무소로 쓰인다. 직함은 따로 없지만 관리소장 역할을 맡고 있는 서창호(62)씨와 직원 3명이 코레일에서 운영하는 펜션열차와 불정역을 함께 관리한다.

서씨는 철도공무원으로 정년퇴직한 뒤 이 일을 시작했다. 점촌·주평 등 문경선 기차역에서 주로 근무했던 그는 28살 때 불정역에서 8년간 근무했던 인연이 있다. 서씨는 그때를 “끔찍했다”고 기억한다. “불정역의 무연탄 수송량이 하루에 70량씩 됐어요. 석탄 먼지가 어찌나 날리던지 역무원이고 건물이고 다 새카맸어요. 교통이 나빠서 집에도 못 갔지. 신혼 때라 아내가 찾아왔는데 못 알아보더라고.”

그래서 역무원을 그만두고 탄광에서 일할 생각도 했단다. “당시 역무원 월급이 2만8천원이었어요. 광산에서 일하면 6만원이고. 어차피 탄 먼지 뒤집어쓰고 고생하는 것 돈이나 더 벌자 했는데 동료들이 붙잡더라고. 그래도 공무원인데 역무원이 낫지 않겠냐면서. 3년 동안 적응하느라 힘들었어요.”

힘든 기억이 있던 불정역에서 다시 일하게 된 탓인지 감회도 새롭지 않다. “하루 일당 3만원이니 노느니 일하는 거지.” 그래도 자신이 일한 불정역의 간이역사를 설명할 땐 목소리에 애정이 듬뿍 담겼다. “조만간 불정과 가은역 구간에 꼬마열차가 다닐 예정이에요. 내년 하반기쯤엔 이 역이 더 번잡스러워지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