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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지붕` 페루 마추픽추 (조선닷컴 2010.05.09 06:34)

[Why] [Why?가 간다] '세계의 지붕' 페루 마추픽추

입력 : 2010.05.08 02:58 / 수정 : 2010.05.09 06:34

그곳엔 아직도비밀이 숨쉬고 있네

착륙 방송이 나온 지 5분도 안 돼 비행기가 열기구처럼 사뿐히 내려앉았다. 해발 3400m 페루 쿠스코(Cuzco)에 내린 비행기는 날아오던 고도에서 바퀴만 꺼내 땅을 밟은 듯했다. 도시는 안데스 고봉(高峰) 사이에 웅크리고 있었다.

땅을 밟은 지 10분 뒤부터 달 표면을 걷는 우주인처럼 몸을 움직여야 했다. 주변 산소를 다 빨아들일듯 헐떡였지만 머리가 지끈거렸다. 눈은 빠질듯했고 대장내시경 검사를 마친 것처럼 배 속에 가스가 가득했다. 고산병 증세다.

크리스티앙(38)은 "증세가 심하다"며 "고산병 약과 코카차를 먹으라"고 했다. 코카는 가공방법에 따라 마약이 되고, 고산병 특효약이 되기도 한다. 따뜻한 물에 코카잎을 가득 담아 마시고 잎도 쪽쪽 빨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마추픽추는 원래 도시가 세워진 산봉우리의 이름이었다. 자신의 이름마저 잃어버린 슬픈 도시, 또 그만큼의 비밀을 간직한 도시다.
잉카의 지배층들은 이렇게 높은 곳에 그들만의 신성한 도시를 건설했다. 가이드인 훌리오 이글레시오는 "지상의 천민(賤民)들과 구분될 뿐 아니라 그들이 숭배했던 태양과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워낙 높은 곳에 있어 '제국의 보물'은 지상과 달랐다. 이곳에서 가장 비싼 것은 황금이나 에메랄드가 아니라 바로 앵무새의 깃털이었다. 너무 높아 독수리 등을 제외하고 화려한 외양의 새들이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글레시오는 "왕궁은 아마존 정글에 살고 있는 앵무새 깃털로 장식했고 이 모습을 상대적으로 흔한 금과 은에 새겨 넣었다"고 말했다.

코리칸차(Qorikancha) 신전. 잉카시대엔 벽과 지붕에 황금이 입혀져 있던 곳이다. 정복자들은 태양신에게 제사 지내던 이곳을 허물고 산토도밍고 교회를 세웠다. 교회의 기초와 벽은 잉카의 신전 뼈대를 이용했다. 겉보기엔 배추 쌓아놓듯 돌담을 쌓은 것 같지만 종이 한 장 들어가지 않을 만큼 정교하게 깎여 있었다.

1950년 대지진 때
스페인 사람들이 세운 교회는 무너졌지만 잉카인들이 만든 벽과 기초는 무너지지 않았다. 이글레시오는 "현대 과학은 아직 잉카의 천문학과 건축수준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100t이 넘는 무게의 돌들은 40km나 떨어진 채석장에서 이곳까지 산 넘고 물 건너왔다. 잉카엔 철기도, 바퀴도 없었고 당시 아메리카 대륙엔 말과 당나귀도 없었다. 말은 정복자 스페인 군대와 함께 뒤늦게 들어왔다.


왕궁과 신전은 허물어져 교회와 광장이 됐다. 그래도 쿠스코는 영원한 잉카인의 고향이다.
'저 무거운 돌을 옮기고 다듬으려 도대체 얼마나 죽어야 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던 잉카는 스페인군의 침입만큼이나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군으로 급속히 허물어졌다. 쿠스코에서도 한국 해병대는 특별했다.

작년 말 해병대 수색대에서 제대했다는 양모(25)씨는 하얀 입김이 나는 고지에서도 "난 괜찮다"며 반팔·반바지 차림으로 뛰어다녔다. 기자는 양씨에게 "덕분에 서울에서 발뻗고 잘 잤다"며 저녁을 샀다.

제국 멸망 후 현지인들은 스페인인들에게 소심한 복수를 했다. 쿠스코 대성당에 그려진 '최후의 만찬'엔 빵과 포도주 대신 '치차'(옥수수 음료)와 옥수수, 파파야가 접시에 담겨있었고 중앙엔 기니피그가 통구이로 누워있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은 잉카에서 신성시하는 검은색이었고 원래 유럽에선 사자를 그려 넣는다는 성화(聖畵)엔 "원주민들이 본적이 없다"(이글레시오의 설명)는 이유로 원숭이 얼굴이 들어갔다.

여전히 쿠스코 곳곳엔 잉카의 흔적들이 가득했다. 중앙 광장 주변 상점의 1층은 잉카인들이 세운 건물의 뼈대를 그대로 쓰고 2층엔 스페인풍(風) 테라스를 얹어 놓은 곳도 많았다.

다음 날 새벽 4시 마추픽추행 '현대 그레이스 481'호를 탔다. 기자가 월면(月面) 보행으로 느릿느릿 자리에 앉자 차는 로켓처럼 산 위로 올라갔다. 은하수가 땅 아래로 내려온 듯 쿠스코 시내가 반짝였다.

구름이 흘러다니는 쿠스코 시내가 내려다보였다. 2시간 반을 달려 '현대 그레이스 481'호는 착륙 준비를 했다. 이 작은 봉고차는 비행기처럼 구름을 뚫고 내려왔다. 그렇게 도착한 기차역에선 두량(輛) 기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만년설 덮인 산을 향해 "뿌~뿌~" 기적을 울리자 계곡이 떠나갈 듯 메아리가 퍼졌다. 기차가 마추픽추로 출발했다. 마추픽추(해발 2430m)는 이름마저 잃은 슬픈 도시다. 마추픽추란 도시가 세워져 있는 산봉우리의 이름일 뿐이다.

철저하게 버려졌던 도시를 예일대 교수였던 하이람 빙엄 교수가 1911년 발견했다. 이곳에 잉카가 망하기 직전 약 100년 전부터 잉카가 망한 뒤까지 사람들이 살았다. 일부에선 잉카제국의 제사를 전담했던 신전이라고 했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쿠스코에선 땅에도 별이 뜬다. 온 도시가 별에 묻힌 밤, 잉카가 눈을 뜬다.
스페인군의 추격을 피해 피신했던 왕과 귀족들이 잠시 살았던 '임시 수도'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 주장의 진위를 확인할 순 없지만 분명한 것은 132가구 약 500~700명의 선택된 사람만이 이 산꼭대기에 지어진 신비한 도시에 살 자격이 있었다는 것이다.

도시의 절반은 계단식 논밭이지만 농부들은 산 아래에 살다가 농사를 짓기 위해 이 높은 곳까지 올라와야 했다. 일본인 2세로 영어 가이드를 하는 카를로스(27)가 기염을 토했다. "오케이 마이 프렌드, 마추픽추에 숨겨진 수많은 비밀의 증거(Evidences)를 보여주겠다!"

신전 꼭대기에는 동서남북을 정확히 표현한 사각형의 돌이 있고 카를로스는 그 위에 나침반을 놓으며 "무섭도록 정확하다"고 했다. 동지나 하지 때 신전으로 들어온 빛이 돌 위에 새겨진 퓨마의 '눈'을 빛나게 한다며 사진도 보여줬다. 마추픽추를 지은 데 쓰인 돌은 약 100km나 떨어진 쿠스코에서부터 이곳까지 백성들이 산길을 타고 운반해 온 것들이다.

많은 비밀을 간직한 마추픽추지만 빙엄 교수가 발견할 때 이곳에 사는 인간은 세금을 피해 산으로 도망쳐 농사를 짓던 농민 한 가구에 불과했다. 빙엄 교수는 단돈 1솔(약 400원)을 주고 그 집 아이에게 가이드를 부탁했다.

다시 쿠스코로 돌아오니 밤 11시30분, 호텔 직원이 "얼굴이 쿠스코 사람 같네요. 어떻게 한나절 만에 이렇게 탔어요?"라며 웃었다. 전날엔 한숨도 못 잤는데 이날은 잠이 왔다. 숨쉬기가 좀 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