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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인물열전

`흔들어만 봐도 시계 어디가 고장난 줄 알아` (조선닷컴 2010.05.29 22:20)

"흔들어만 봐도 시계 어디가 고장난 줄 알아"

입력 : 2010.05.29 03:15 / 수정 : 2010.05.29 22:20

시계 명장 남재원

60초를 1분이라 정의하고 60분을 1시간이라 정의하고 1시간이 24개 모이면 그걸 하루라고 규정하고서 인간은 그 규정에 얽매여 자유를 만끽한다. 남재원(61)은 그 시계를 수리하는 사람이다. 나이 열일곱에 시계를 만져 44년이 흘렀다. 군대 3년을 제외하고는 1초도 시간의 세계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사내다. 이 땅에 여섯 명뿐인 시계수리 명장(名匠)은 "흔들어보면 어디가 고장인지 안다"고 했다

■가난

1949년 11월 4일
전남 순천에서 남재원이 태어났을 때 위로 다섯 형, 누나가 있었다. 아버지는 한량이었다. 시조 읊기 좋아하고 돈 된다는 주위 말에 물려받은 전답(田畓) 팔아 주정공장, 기와공장을 하다가 몽땅 말아먹었다.

평생을 시계만 바라보고 살아온 끝에 남재원은 명장(名匠) 칭호를 받고, 어릴 적 꿈대로 부자가 되었다.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앞만 바라보고 산 인생이었다.
세 살 터울인 누나가 태어날 무렵 집에는 돌밭 한 뙈기도 없었다. 자식들 공부는 넷째에서 그쳤다. 누나와 그는 재건학교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고등공민학교에 들어갔다.

"형들처럼 공부를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그저 하루라도 안 굶었으면 하던 세월이었으니…." 전쟁이 끝나고 대한민국 모두가 힘들 때였지만, 그가 살던 순천 땅은 더 심했다.

빨치산 잔당이 지리산벌에 남아 주민들을 괴롭혔다. 남재원은 "굶지 않는 날이면 말린 고구마를 갈아서 죽 끓여 먹었다"고 했다. 남재원은 고등공민학교를 중퇴하고 순천 읍내에 있던 시계방에 취직했다. 1966년이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내가 손재주가 있었다. 전신주를 지지하는 철사를 잘라서 스케이트를 만들기도 했고, 발동기를 분해한 적도 있었다. 형님 시계 뜯었다가 얻어맞기도 했다."

시계가 귀하던 시절이라 벽시계 있는 집에 이웃들이 와서 시계 구경도 하고 시간을 묻곤 하던 시대였다. "그래서 내 손재주로 부자들만 찰 수 있는 시계 고치는 기술만 익히면 부자 되겠다는 생각으로 시계방을 찾았다"고 했다.

친척에게 소개를 받은 삼성당 시계방 주인 조치호는 열일곱 소년을 보조원으로 받아줬다. 남재원은 "워낙 기계 만지는 취미가 있었던지라 그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했다.

■인연

기술을 배우고 나니 순천 읍내에는 시계 수리를 맡기는 부자들이 드물었다. 무엇보다 고급시계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3년 도제 생활을 마친 뒤 그는 "부자를 찾아, 부자들이 차다가 고장난 시계를 찾아서" 서울로 올라갔다.

스무 살 때인 1969년이었다. 주머니에는 지인이 써준 추천서 한 장밖에 없었다. 지금 서울 소공로 한진빌딩 자리에는 당시에 시대백화점이 있었다. 남재원은 이 백화점에 입점해 있던 시계점 사장 김명수를 찾아갔다.

40년 세월이 흘렀지만, 남재원은 그를 평생의 은인으로 기억한다. "1·4 후퇴 때 피란 내려온 함경도 출신이었다. 내가 전라도 사람인데 그때는 전라도 출신이라고 하면 신원조회다 뭐다 핑계를 대면서 쉽게 일자리를 주지 않던 때였다. 더군다나 시계처럼 고가품을 만지는 가게라면…."

그런데 그는 "아는 사람이 추천했으니 일해라"며 무조건 자리를 줬다고 했다. "그때 사회 분위기를 타고 나를 거절했다면 난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명장 좋아하네, 그날로 식당 '뽀이'로 갔겠지. 내 은인이다."

남재원은 지금도 아흔이 넘은 스승 김명수에게 문안인사를 올린다고 했다. 4년을 시대백화점 시계부에서 일했다. "물청소 못하거나 부품 하나 잃어버리면 망치로 맞으며 배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술자리에서 "재원이 저놈 싹수가 보인다"는 선배들 덕담에 웃기도 많이 웃었다고 했다. 1976년 군대를 다녀와 새로나백화점 시계부에 들어갔다. "저 자한테 맡기면 어떤 시계든 다 고친다."

'재주 많은 남재원' 소문이 업계에 퍼져나갔다. 당시 공무원이던 형보다 월급이 50% 더 많았다. 롯데백화점 시계부가 더 많은 월급을 걸고 그를 스카우트했다. 1981년 12월이다.

정치는 개판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마이카에 아파트에 중산층이 급증하던 시대였다. 밀수가 됐든 정식수입품이든 수리해야 할 명품시계가 흘러넘쳤고 남재원은 눈코 뜰 새 없이 시계 밑뚜껑을 열어야 했다. 솜씨도 일취월장했다.

■반란

"그런데 어느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월급쟁이었다." 남재원이 말했다. 가난 탈출에 인생 역전을 노리던 젊은 남재원이 원했던 삶은 아니었다. 그래서 롯데백화점 생활 10년 만인 1992년 백화점 일은 계속하면서 지금 현대백화점으로 바뀐 서울 신촌 그레이스백화점에 시계 수리점을 차렸다.

책상 하나뿐인 한평 반짜리 작업실이었지만 부자들은 남재원 이름만 믿고 시계를 맡겼다. 어느덧 "흔들어보면 문제가 뭔지 대충 알 수 있다"는 경지에 이르렀다. 본인 수준도 수준이지만 수리를 하다 보면 소위 '명품'들의 수준이 더 놀랍다고 했다.

"명품은 뚜껑 열어보면 진짜 명품이다. 현미경으로 봐야 겨우 보일 가느다란 금속에 자기 브랜드를 각인해놓은 시계도 있다. 부품 하나하나가 얼마나 정교하고 잘 조립돼 있는지…."

공인된 이중생활 5년 만에 서울 보라매공원 옆에 롯데백화점 영등포점이 생겼다. 그는 그때까지 모은 돈 싹싹 털어서 창업을 했다. 이번에는 수리점과 시계소매상을 겸한 가게다. 이름은 '해시계'였다. 그리고 딱 한 달 만인 1997년 11월 빌어먹을 IMF가 터져버린 것이다.

■만회

"다 말아먹었다"고 했다. 재고 처분하고 남은 시계들을 그레이스백화점 작업실에 옮기고 나니, 사람 앉을 자리도 없었다. 백화점 자체가 부도난다는 소문이 돌면서 매장은 텅텅 비어갔다.

"옆에 있던 시계방도 사라지고 텅 비었다. 그런데 백화점측에서 나에게 그 자리를 가지라는 거였다." 며칠 생각하다가 남은 돈 쥐어짜서 1억 내고 입점했다. "남재원 또라이 됐다"는 말이 나왔다. 남재원이 말했다.

"있는 집도 망해서 나가는데, 나라도 그런 말을 했을 거 같다. 하지만 나는 내 기술을 믿었다." 7개월 뒤 현대백화점이 그레이스를 인수했다.

"IMF 1년 지나고 나니까 시계 수리 맡기는 사람, 손목시계에 벽시계 사러오는 사람이 몰려들더라. 1년 동안 잃은 돈을 순식간에 만회했다." 그 만회한 돈으로 2001년에 미아리 현대백화점에 2호점을 냈다.

빈농의 아들, 열일곱 살 총각이 35년 만에 백화점 두 군데에 매장을 가진 부자가 됐다. 2005년에는 대한민국에서 다섯 번째로 시계 명장(名匠)에 선정됐다. 고등공민학교도 채 못 다니고 인생을 살아온 쉰여섯 먹은 사내가.

■현재

지금 사내는 기분이 좋다. 살기 좋아지면서 고급시계가 더 많이 팔리는 시대가 됐으니 기분이 좋고 작년에 환갑잔치를 치렀으니 기분이 좋고 경기도 성남에 있는 동서울대학교 시계주얼리학과에서 시계수리학을 가르치며 제자들을 가르치니 기분이 좋다.

기계공학과 생물학을 전공한 두 아들 정훈(36)과 정윤(30)이 아버지를 이어서 가업을 물려받고 있으니 기분이 좋다. 불쾌한 건 한가지라고 했다.

"
중국도 무브먼트(시계를 움직이는 구동장치)를 만든다. 대한민국은 무브먼트 수입하고 시계 케이스 수입해서 조립한 다음에 자기 이름 붙여 판다. 그게 될 말인가. 그래서 대한민국 시계가 이 모양이 되었다." 시종일관 시계 수리의 세계를 이야기하던 명장의 맺음말은 대한민국 정밀산업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