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詩仙 방랑시인 김삿갓(上) |
풍자와 해학으로 어우러진 파격적 시풍의 혁명 시인 |
입력시간 : 2010. 08.18. 16: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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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과 김삿갓…
그러다 남·북 정상회담이 있던 그 다음해인 2001년 4월 <김삿갓 방랑기>로 명칭이 바뀌고 시그널 곡으로 노랫말 없이 <눈물 젖은 두만강>이 배경음악으로 깔리었다.
김삿갓 하면 평생을 해학과 풍자로 방랑하던 풍류시인이며 기인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한 점 뜬구름 같고 한줄기 바람 같았던 그의 기구했던 삶의 발자취를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가 않다.
<김삿갓의 노래비>가 영월군과 제3수원지 청풍, 적벽 등에 세워져 있다. 삼천리 방방곡곡을 두루 방랑한 그는 이양 청풍에도 분명 탁족을 하며 쉬어 갔으리라. 쌍봉사, 보림사, 대원사를 쉬엄쉬엄 걸으며 물 좋고 경치 좋은 그곳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다.
왼쪽으로 가면 장흥·해남·강진, 오른쪽은 보성·고흥·순천으로 나눠지는 주요 목인 귀미 뜰에 작은 공원을 세우고자 지역유지들이 뜻을 모으고 있는 듯 보인다. 그 길목에 용화사의 진환 스님이 김삿갓의 시비를 세우자는 뜻이 모아지고 있다니 무척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조상을 욕한 스스로를 두고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고 여겨 일생을 방랑하며 파격적인 해학시를 읊으면서 일생을 보낸 김삿갓의 마지막 종명지가 바로 화순 동복이다. 그가 떠난 지 200주년에 화순군 주관으로 행사가 있었고 전남문인협회의 문인들이 한 더위를 잊고 종명지 초분이 있었던 자리를 답사하기도 했었다.
세계 3대 혁명 시인의 기구한 운명
세계 3대 혁명 詩人으로 미국의 히트먼, 일본의 아시카와 다쿠보쿠, 한국의 김병연(김립)이 꼽히고 있을 정도인데 정작 우리는 그를 과거 속에 묶어둔 채 외면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김삿갓은 무슨 까닭이 있었기에 방랑시인으로서 고달픈 심신을 이끌고 동가숙서가식으로 이 땅을 두루 떠돌았던 것일까.
안동 김씨 족보를 보면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金炳淵)이고 1807년(순조7) 3월 13일 시조 김선평(金宣平)의 23세손 안근(安根)과 함평 이씨(咸平李氏)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다. 형은 병하 아우는 병두이고 출생지는 분명한 기록이 없지만 만년에 지은 ‘난고 평생시’에 한강 이북이라는 점만 밝혀졌는데 근래 들어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 회암리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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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제일의 세도 안동 김씨 문중에서 태어나 잘만하면 과거에 급제하고 높은 벼슬길에 오를 수도 있었으련만 죽장에 삿갓을 쓰고 삼천리 방방곡곡을 방랑하게 된 기구한 운명의 사연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미완의 혁명으로 끝난 홍경래(洪景來)의 반란에서 비롯되었다.
홍경래가 썩은 세상 갈아치우고 새 세상을 만들고자 혁명군을 일으킨 것은 1811년(순조 10) 김병연이 다섯 살 때였고 당시 조부(祖父) 김익순(金益淳)은 선천부사 겸 방어사였다. 홍경래의 혁명군이 인근 고을을 들불처럼 휩쓸고 쳐 들어왔을 때 김익순은 혁명군에게 항복하고 목숨을 구걸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더 살아보려다 영원히 욕된 이름을 남긴 것이 되었다.
이듬해 봄 난이 평정된 뒤 김익순은 모반죄로 처형당하고 그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삼족을 멸하는 화는 면했지만 역적의 자손이라 고향에서 살아갈 수가 없었다. 병하와 병연 형제는 김성수라는 종이 데리고 황해도 곡산으로 도망쳤고, 부모는 아우 병두를 데리고 경기고 광주 땅으로 도망쳐 살았다고 전한다.
병연이 일곱 살 때에 아버지가 화병으로 죽자 겨우 27세에 과부가 된 어머니는 이들 삼형제를 데리고 경기도 가평을 거쳐 강원도 두메산골로 들어갔다. 이후 평창에서 살다가 다시 영월 삼옥리로 이사했다. 삼옥리는 영월댐으로 한동안 시끄럽게 논란을 벌였던 동강 기슭의 마을이다. 그동안 알려진 바에 따르면 김삿갓이 가출한 것이 바로 이 삼옥리에 살던 때라고 한다.
김병연이 20세 때인 1827년(순조27) 영월 동헌에서 과거 예비고사격인 백일장이 열렸다. 시제(詩題)는 ‘홍경래난 때 가산군수 정시(鄭蓍)의 충절사를 논하고 김익순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상을 한탄하라’는 것이었다. 이 날의 시장원은 삼옥리 사는 가난한 선비 김병연이 차지했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자랑을 했지만 기뻐할 줄 알았던 어머니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그제서야 그동안 숨겨왔던 집안의 내력을 들려주었다. 김병연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역적의 자손인 데다가 그 할아버지를 욕하는 시까지 지어 상을 탔으니 어찌 머리를 바로 들고 하늘을 쳐다보며 살수가 있었으랴.
하지만 비상한 천재였던 김병연이 나이 스물이 되도록 그처럼 치욕스러운 집안의 내력을 몰랐을리는 없었을 것이고, 또한 아무리 역적으로 능지처참을 당했다고 해도 자신의 할아버지를 ‘만번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매도했을 리도 만무하다. 그리고 방랑길에 나선 곳도 삼옥리가 아니라 묘가 있는 와석리 너머 어둔리에 살던 때라고 한다.
술 한 잔에 시 한수 털어 넣고…
김병연은 1년 연상의 장수 황씨(長水黃氏)와 결혼하고 맏아들 학균(翯均)이 태어난 직후인 나이 22세 때 가출을 단행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빼어난 재주를 타고 났지만 출신성분 때문에 구만리 같은 앞날이 막혀버린 좌절감과 울분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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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삿갓 쓰고 대 지팡이 짚고 미투리 신고 방랑길에 나선 김삿갓은 오늘은 이 마을 내일은 저 마을 이 집 저 집에서 문전걸식하고 박대를 당하며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구만리 장천 높다 해도 머리 들기 힘들고/ 삼천리 땅 넓다 해도 발 뻗기 힘들구나.(九萬長天擧頭難 三千地闊未足宣)
그가 뒷날 읊은 <자탄 (自歎)>의 한 구절인데, 그 당시의 심경을 엿볼 수 있다. 집을 버리고 길을 떠난 김삿갓의 발길은 먼저 금강산으로 향했다. 김삿갓은 22세에 집을 떠나 57세로 화순 동복에서 죽을 때 까지 35년을 떠돌아 다녔지만 특히 금강산을 좋아하여 여러 차례 올랐다고 한다.
그와 같은 시대 사람인 신석우(申錫雨 1805-1865)의 해장집<海藏集>과 황오(黃五 1816-?)의 녹차집<綠此集>에 김삿갓과 만난 기록이 나오는데 그가 봄 가을 마다 빠짐없이 찾을 만큼 금강산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현재까지 금강산에 대한 시가 7~8편이 전하는데 다음은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작품이다.
소나무와 소나무 잣나무와 잣나무/ 바위와 바위를 돌아가니/ 물에 물 산에 산/ 곳곳이 절경이로다!(松松栢栢岩岩廻 水水山山處處奇)
정해진 곳 없거니와 오라는 곳도 없이 떠난 유랑 천리 길이다 보니 행장마저 남루하기 그지없었다. 스스로 읊은 대로 빈 배처럼 죽장 짚고 괴나리봇짐 하나 짊어진 것이 전부였다. 삿갓을 노래한 그의 시<詠笠>을 보면
가난한 나의 삿갓 빈 배와 같고/ 한번 쓰니 사십 평생 다 가는 구나/ 소먹이 아이 들에 나서며 쉽게 걸치고/ 고기잡이 노인 갈매기 벗 삼는 본색이네/ 술 취하면 바라보던 꽃나무에 걸어놓고 흥 오르면 달뜬 누각에도 걸치고 오른다/ 세상사람 의관은 겉꾸밈이 한결 같지만/ 하늘가득 비바람 쳐도 홀로 걱정 없어라/
그렇게 주유천하하던 김삿갓은 2년 뒤에 잠깐 집에 돌아와 후사 없이 죽은 형 병하에게 자신의 맏이 학균을 양자로 입양을 시킨 후 둘째 아들 익균(翼均)이 태어나자 다시 방랑길로 나선다.
한국의 詩仙 방랑시인 김삿갓(下) |
풍자와 해학으로 어우러진 파격적 시풍의 혁명 시인 |
입력시간 : 2010. 08.25. 15:26 |
해학과 풍자의 한국 詩仙
김삿갓은 입장이 곤란할 경우에는 자신의 이름이 김란(金鑾)이요 자는 이명(而鳴)이라고 둘러댔다. 란은 방울 란, 이명은 그럼으로써 울린다는 해학에 다름이 아니었다. 또 호를 물으면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걸치고 다닌다고 하여 지상(芷裳)이라고 했으니 이는 궁궁이 풀(구리 때) 옷이라는 뜻이다.
홀홀단신 빈털터리로 집을 떠난 김삿갓은 정해진 곳도 오라는 곳도 없이 구름 따라 바람 따라 발길 닿는 대로 조선팔도를 떠돌아 다녔다. 그런 신세를 읊은 대표적 작품 죽시(竹詩)를 보면
이대로 저대로 되어가는대로/ 바람치는대로 물결치는대로/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생기는 이대로/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붙이는 저대로/ 손님 접대는 사세대로/ 시정매매는 세월대로/ 만사가 안되네 내 마음대로/ 그렇고 그렇고 그런 세상 지나가는 대로/
김삿갓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주는 기록은 없지만 그의 시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어 풍류남아답게 키가 크고 풍채도 늠름했으리라고 짐작하게 해준다.
내 평생에 긴 허리 굽힐 생각 없는데/ 이 밤은 다리 뻗기도 힘들구나/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떠도는 인생/
세상만사 초탈하여 풍류 한마당으로 천지간을 배회하니 신선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김삿갓을 ‘한국의 시선(詩仙)’이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신선도 지상에 머무는 한 먹어야만 했으므로 때로는 마을에서 문전걸식을 했고 때로는 산사에서 공양신세를 지기도 했다.
어쩌다 운율을 아는 주인을 만나면 제법 환대도 받았다. 또 기막히게 운 좋은 날이면 풍류를 알아주는 어여뿐 기생으로부터 아래 위로 극진한 사랑을 받은 적도 있었으리라. 널리 알려진 김삿갓의 시 가운데 오만불손한 중과 선비를 골려주고 놀린 시는 풍자와 해학의 재치가 넘쳐난다.
중놈의 둥글둥글 민대가리는 땀 찬 말 불알/ 선비 놈의 뾰쪽뾰쪽 송곳머리는 앉은 개좆/ 악쓰는 소리는 구리 솥에 떨어진 구리방울/ 치든 눈깔은 흰죽에 떨어진 후추 같구나.
어느날 서당에 들러 잠시 쉬어가자니 버르장머리 없는 학동들이 남루한 모습의 김삿갓을 깔보고 놀려댔다. 김삿갓이 벽에다 시 한 수를 써 놓고 떠나며 이렇게 일러준다.
“이 시는 뜻대로 새기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나는 데로 새기느니라”
書堂內早至 先生來不謁/ 房中皆尊物 學生諸未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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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농처녀(弄處女)란 해학시를 보자면
삿갓 : 毛深內闊 必過他人 털이 깊고 속이 넓은 것을 보니/ 반드시 딴 사람이 먼저 지나갔으리.
처녀: 溪邊楊柳不雨長 後園黃栗不蜂圻 개울가 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절로 자라고/ 뒷마당의 알밤은 벌이 쏘지 않아도 잘도 벌어지더라.
정을 통한 뒤 처녀의 풍만함에 장난기가 발동하자 붓을 들어 시 한 수를 잽싸게 휘갈기니 자리에서 힐끗 넘겨다보던 처녀가 비웃으며 앙칼지게 대꾸하는 두 사람의 사랑의 시 표현 장면이다.
한번은 허씨(許氏)가 많이 산다는 길주 땅에 갔는데 하룻밤을 쉬어가려고 이집 저집을 물색 하였으나 아무도 길손을 받아주지 않았다.
길주길주 하지만 길한 고을 아니고/ 허가허가 많아도 허가 하지 않는구나(吉州吉州 不吉州 許哥 許哥 不許哥)
이런 저런 모진 세파에 부대끼며 제대로 얻어먹지도 못하고 다닌 그의 입에서 고상한 詩句만 나오지 않았을 것은 불문가지다. 김삿갓이 내 뱉은 욕설시 가운데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이십수하>이다. 함경도 지방의 어느 부잣집에 도착하니 마침 주인이 마루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김삿갓이 들어오자 걸인 취급을 하며 밥을 한술 주는 게 먹어보니 쉰밥이라. 냉대를 받고 나그네의 설움을 한문 수자 새김을 이용하여 표현한 시이다.
이십 나무 아래 설운 나그네/ 망할 놈의 마을에 드니 쉰밥만 주는 구나/ 인간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는고/ 집에 돌아가 설은 밥 먹느니만 못하네.(二十樹下三十客/ 四十村中五十食/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
그러나 세상의 인심이 아주 다 메마른 것은 아니어서 가난한 살림에도 따스한 마음씨로 외로운 나그네를 대접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김삿갓은 이런 무제의 시 한수를 정표삼아 남기고 떠나가기도 했다.
네다리 소나무 소반에 죽이 한 그릇/ 하늘과 구름에 함께 떠도네/ 주인장 제발 무안해하지 마소/ 물속의 청산은 나를 사랑한다오.
김삿갓, 화순 동복에서 생을 마치다
학자들에 따라 이견이 있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김삿갓의 시인으로서의 업적은 그때까지 양반문학의 주류를 이루던 전통양식의 漢詩를 다양한 어휘와 문자를 구사하여 풍자·기지·해학이 넘치는 서민문학으로 승화 시켰다는 것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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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의 모친 함평 이씨는 남편과 맏아들이 먼저 세상을 뜨고 둘째 아들도 집을 나가 방랑하자 충청도 홍성 땅 결성의 친정으로 돌아간다. 궁벽한 산골에는 김삿갓의 부인 황씨와 아들, 며느리만 남게 되었고 가장 노릇은 둘째 익균이 맡아서 했다.
양자로 간 학균 대신 대를 이은 둘째 익균이 아비를 찾아 수차 집을 나서 풍문이 들려오는 곳마다 찾아서 다녔다. 한번은 경상도 안동에서, 한번은 강원도 평강에서, 또 한번은 전라도 여산에서 김삿갓을 찾아 집으로 데려 오려 노력을 했으나 그때마다 아들을 속이고 도망치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그러다 전라도 땅 화순의 동복 구암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종명지에서 관을 수습하여 돌아와(김삿갓이 떠난지 3년 후) 영월 땅에 묻은 것이다. 철종 14년 3월 29일 57세로 한 많고 파란 많은 인생살이의 막을 내린 김삿갓은 영월군 하동면 와석 1리 노루목에서 외롭고 괴로웠던 영혼을 쉬게 되었다. 22세 때 방랑의 길을 떠난 지 35년만이었다.
노루목은 김삿갓이 선래골 집을 떠나 내려온 뒤 처음으로 방랑을 떠난 길이요, 뒷날 35년 만에 불귀의 객이 되어 시신으로 화순 동복에서 돌아온 首丘初心의 길이다. 김삿갓의 어머니와 부인 며느리 여인 3대가 눈물과 한숨을 섞어 찧었을 것이 분명한 디딜방아가 아직도 남아 있어 보는 나그네의 가슴을 몽클케 한다.
김병연은 1천여 편의 시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까지 456편의 시가 발굴됐다. 구전으로 전해오던 이야기들을, 이응수가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모으고 정리하여 그가 죽은 지 76년 만인 1939년에 김병연의 첫 시집인「김립 시집」을 발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근래에 들어 다분히 흥미 위주로 보아온 그의 시들이, 후대 학자들에 의해 문학사적으로 재평가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어 김삿갓에 대한 재조명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풍자와 해학과 기지로 어우러진 파격적 시풍에다 의표를 찌르는 기행으로 가는 곳마다 전설을 남기고 사라진 방랑의 천재 시인 김삿갓. 그는 바람처럼 구름처럼 물결처럼 이 땅의 산수와 저자 간을 마음대로 넘나든 영원한 대 자유인이며 풍류가객(風流家客)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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