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주 발광정과 조정암 |
입력시간 : 2004. 02.19. 10:00 |
능주면 남정리에서 4㎞쯤 서쪽으로 가노라면 도곡면 대곡리에 이른다.
도곡과 능주의 경계를 이룬 산이 바로 비봉산인데 해발 256m 이다.
이 비봉산 밑에 발광정이란 지명이 있는데 이 지명은 기묘사화에 몰려 억울하게 돌아간 조광조(趙光祖) 와 관계가 깊다.
조광조의 호는 정암(靜庵) 으로서 서기 1482년에 출생하여 이십팔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삼십삼세에 알성시에 급지하였던 성리학자였다.
그는 젊은 나이로 당당 성리학의 대가가 되어 젊은 선비들의 지도자가 되더니 삼십팔세의 젊은 나이로 대사헌에 올랐으니 파격적인 출세를 하였던 것이다.
과거에 급제한지 오년만에 종이품인 대사헌에 이른 조광조와 그를 따르던 젊은 선비들은 급진적인 정책을 폈다.
조정으로부터 녹을 먹고 귀족으로 대접을 받던 가문을 소인으로 경시 취급한 나머지 이들로 부터 힐란과 질시를 받았었다.
기성 정치인들이 받은 중종반정의 공신 시호를 박탈해 크게 원한을 사게 되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반대파 홍경주(洪景舟), 심정(沈貞), 이행(李行) 등은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 이라 글씨를 써 벌레로 하여금 갉아 먹게 하여 이 나무 잎을 따가지고 상감 앞에 나아가,
「 요사이 항간에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고 궁중에 있는 나뭇잎은 조가 왕이 된다는 글자가 새겨서 상서롭지 못한 괴변이옵니다. 이는 필시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예시로써 조광조를 살려 두었다가는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 것이 분명하니 잡아 가두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하였다.
일당들은 이렇게 하여 혁명을 일으켰다.
급진정책을 썼던 탓으로 모함에 걸려든 조광조 일파 8명은 모두 각지로 귀양길에 올랐다가 몇달만에 모두 사약을 마시고 한많은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때 조정암께서 귀양 온 곳이 능주고을이었는데 서기 1519년 11월 15일 능주에 도착했다.
그는 찬바람 몰아치며 적막하고 쓸쓸한 황야를 거처로 정하고 한을 가슴에 안은 채 나날을 보내다가 12월 20일로 한 생애를 마쳤다.
그러나 죽은 집터에 세워진 유허비에는 만 20일만에 돌아가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광조가 이 쓸쓸한 남정리 초막에서 날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하루는 비봉산밑을 거니는데 한 늙은 노파가, 손자가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고 몸부림치며 대성통곡을 하는것이었다.
조정암이 귀양 오던 그해에는 시변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옆에 있는 사람이 정암에게 말하기를
「 이 늙은이는 아들을 일찍 잃고 단 하나 남은 손자를 기르며 살고 있던 중 그 손자가 조금 전에 죽으니 저렇듯 발광하게 되었읍니다. 」했다.
정암은 딱한 얘기를
듣고 조용히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더니
「 너 이놈 역신도 정이 있어야 하거늘 이처럼 딱한 사람까지 잡아가느냐?」
하고 호통을 쳤다.
역신이 이르기를
「 대감께서 이 고을에 오신지라 이제 물러 가려고 하는 길인데 짐을 싣고 갈 나귀가 없어 이 아이를 짐꾼으로 데려갑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정암은 다시 말하기를
「 그렇다면 내가 타고 온 나귀가 있으니 이 나귀를 이용하고 그 아이를 되돌려 주어라.」
하고 당부 하였다.
역신이 이 뜻을 받아 들여 아이를 되살려 주고 나귀를 빌려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나귀가 3일간이나 전혀 먹지 않고, 눈을 뜨지 않으며, 신음만 하고 있다가 4일째 되던 날부터 다시 먹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후 인근 사람들이 병을 얻으면 조정암의 처소를 찾아가 사람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여 부적을 얻어 문에 붙여두면 모두 병이 나았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비봉산 아래에 있는 그 지명을 발광정이라 하였다.
지금은 소나무 사이에 잡초만 무성하고 차들이 날리는 먼지뿐 전설마저 아는 이 없다.
능주의 붉은 한 정암 조광조(上) |
정치 개혁의 선구자, 꽃잎되어 떨어지다 |
입력시간 : 2010. 09.02. 14:49 |
|
대학시절 한때 학연·지연·혈연에 얽혀 고향 친구, 선후배들과 함께 정치인들과 어울리며 마치 세상을 손에 쥐고 천하를 다 알듯 날 뛰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 날 한학에 밝은 조부님께서 사랑방으로 불러내 꿇어 앉히고는 “집안을 하루아침에 말아 먹고 싶으면 정치를 하고, 서서히 망치고 싶거든 송사를 하는 것이다”라는 훈계를 하며 조정암을 예로 들며 말씀 하신 적이 있어 정치에 손을 땐 적이 있다.
개혁의 정치가 정암 조광조가 능주에서 사약을 받으며 마지막 남긴 시 한수를 가슴에 떠올리며 능주의 유허지로 떠나보자.
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네/
하늘이 이 땅을 굽어보시니/ 내 일편단심 충성을 밝게 밝게 비추리.
도학정치가(道學政治家) 조광조
정암 조광조(1482∼1519 / 성종13년∼중종 14년)는 조선 전기의 학자·정치가로서 중종 때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주창하며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시행했으나, 훈구(勳舊) 세력의 반발을 사서 결국 죽음을 당했다. 본관은 한양(漢陽)이며 자는 효직(孝直)이고, 호는 정암(靜庵)이다.
조선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감찰 원강(元綱)이다.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희천에 유배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때부터 시문은 물론 성리학의 연구에 힘을 쏟았고, <소학 小學><근사록 近思錄> 등을 토대로 하여 이를 경전에 응용하는 등, 20세 때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가장 촉망받는 청년학자로서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조광조는 15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라는 관직에 초임되었고, 이어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전적·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하면서 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는 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입시(入侍)할 때마다 도학정치를 역설했다. 당시는 연산군이 정치와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직후로 정치적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시대적 추세였고, 중종은 조광조의 정치사상을 바탕으로 이상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조광조의 정치관은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왕도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왕도정치(王道政治)의 구체적 실현방법으로 왕이나 관직에 있는 자들이 몸소 도학을 실천궁행(實踐躬行)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을 지치주의(至治主義)·도학정치라고 했다. 그는 지치(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다스림의 근본인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며, 군주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정체(政體)가 의지하여 설 수 없고 교화가 행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
죽음을 무릅쓰고 바른 말을 고하다
오직 바른 말을 하는 것이 임무인 ‘언관(言官)’이라는 관리가 있었다. 나라의 언로(言路)를 트는 역할을 한 이들은 왕에게도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기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역사속의 대표적인 언관들을 통해 오늘날 언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가늠하게 한다.
사헌부와 사간원은 임금에게 ‘바른 소리’, 즉 간(諫)을 하는 역할과, 관리의 비행을 조사하여 그 책임을 규탄하는 일을 맡은 기관이었다. 물론 요즘처럼 언론기관이 존재하진 않았지만, 국가 체제유지에 필요한 긴장감이 유지되도록 자체적으로 비판하고 감시하는 기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언관들은 왕과 고위 관료들이 유교적 가르침에 충실하도록 감시하고 이끄는 파수꾼이라는 의식과, 사대부 계층의 공론(公論)을 대변한다는 사명감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조광조는 언관으로서 부여된 소명에 최선을 다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유교 국가인 조선왕조가 유교적 가르침대로 실천하기만 하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광조는 평생 이러한 원칙을 지키려고 무던히 노력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말에는 힘이 담겨져 있었으며, 중종을 비롯한 당시의 지배자들은 속으로는 그를 싫어했을지 몰라도 그의 올바른 뜻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왕조의 도덕적 교사로서 존경을 받았으며, 그럴수록 인심이 그에게 쏠렸다.
연산군을 퇴위시킨 중종반정 직후의 정국은 매우 불안정했다. 연산군을 퇴위시키긴 했지만, 연산군의 폭정에 대한 책임논쟁이 잠복되어 있었던 것이다. 연산군을 몰아낸 그 주역들은 중종을 새 왕으로 옹립하고 자신들을 정국공신에 책봉하면서 많은 부와 특권을 차지했다. 공포를 자아낼 정도로 전제적 왕권을 휘둘렀던 연산군을 몰아 낸 이들은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진정한 충신은 ‘목숨을 빼앗기더라도 왕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을 지적하고 언행을 바로 잡도록 간언(諫言)하는 것’ 이었다. 공신들은 바로 연산군 때에 고위 관직에 있던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은 그런 간언을 올린 사람들이 아니었다.
당시 사대부들은 연산군 퇴위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로 인정했으나, 연산군 대에 군주를 잘못 섬긴 사람들이 자신들의 왕을 내쫓고 모든 특권을 당연한 듯 누리는 것은 인정할 수 없었다.
조광조는 대사헌이 되자 이러한 여망에 따라 그릇된 관료들에 대한 과감한 탄핵활동에 나서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고 조광조는 그런 책임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거듭 대사헌의 자리를 사양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쏠린 주변의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
|
좌절된 미완의 개혁정치
그가 대사헌이 되자 먼저 과거제도 개혁을 주장했다. 그는 새로운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인재가 필요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천거(薦擧)제(과거를 통하지 않고 추천을 통해 관리를 뽑는 제도)를 실시하자고 건의했다.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가 대사헌이 된지 약 6개월 후인 1519년 4월 조선왕조에서 첫 천거제가 실시되어 28명의 급제자를 배출했다.
그가 인재 등용제도 개혁에 앞장 선 것은 정국공신들을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의도와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는 정국공신들이 이끄는 파행적인 정치구조로는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가 없다고 믿었다. 천거제 실시는 그 첫 단계였으며 그의 정적들도 그 점을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정국공신들은 조광조가 천거제로 새로운 인재를 뽑은 다음 정국공신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차지하려 한다는 불만을 토로했다. 이 같은 내용의 편지를 화살에 매어 궁궐에 쏘는 일도 공공연히 벌어졌다. 이것은 분명한 위협이었지만 조광조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섬기던 군주를 죽음으로 내몬 것을 공로라 생각하고, 어떻게 공신의 지위를 향유할 수 있는가 하고 공신들을 공격했다. 이러한 비판은 너무도 정곡을 찌른 것이기에 정국공신들은 조광조를 반박할 논리를 찾을 도리가 없었으며, 압력을 가한들 물러날 조광조도 아니었다. 그래서 공신들은 중종에게 조광조를 제거하라고 위협을 가했다.
중종은 결국 정국공신들의 압력에 굴복했다. 이렇게 해서 1519년(중종14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게 되었으며, 조광조는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았다. 그 스스로도 자신의 목표가 순조롭게 달성되리라고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미 언관의 수장이 되기로 한 이상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죽음으로 그의 소망이 모두 물거품이 된 것 같았지만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들 대부분은 10여년이 지나면서 서로 분열하고 죽이는 분쟁에 휩싸였다. 기묘사화 이후 20여년 이상 왕위에 있었던 중종은 신뢰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신하도 곁에 둘 수 없었으며 왕으로서 권위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반면에 조광조는 조선왕조의 도덕적 파수꾼으로 역사에 길이 남는 존재가 되었다.
능주의 붉은 한 정암 조광조(下) |
정치 개혁의 선구자, 꽃잎되어 떨어지다 |
입력시간 : 2010. 09.14. 10:11 |
|
개혁의 심장 능주에서 멈추다
파란의 개혁자는 그를 키웠던 왕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서른여덟의 나이로 유배지 능주에서 창백한 생애를 마감했다. 단순하게 설명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일종의 배신이었다. 왕은 오직 자신을 위해 사림을 키웠고, 역시 스스로의 권력을 위해 사림을 버렸다. 가치의 좋고 나쁨은 중요하지 않다. 권력에 도움 되는 자가 곁에 필요할 뿐이다.
1519년에 일어났던 기묘사화(己卯士禍)는 곧았던 선비 8명의 목숨을 가져갔다. 10명은 유배됐고, 31명이 삭탈관직 됐다. 사림의 몰락이었다. 피바람의 중심에 조광조가 서 있었다. 그들에겐 어떤 죄도 없었다. 일종의 모함이었다. 사화를 일으킨 중종은 국문도 하지 않은 채 그들을 모두 죽이려 했다. 중종은 조광조의 얼굴을 대면할 자신이 없었다. 조광조 일파의 목숨을 거둘 법조항은 ‘경국대전’에도 없었다.
짜 맞춰진 사림들의 죄목은 이러했다. ‘붕당을 지어 자기편은 진출시키고 다른 편은 배척하며, 주상을 모함하여 사사로이 행동하고, 젊은 것이 늙은 것을 능멸하며, 천한 것이 귀한 것을 몰라보게 했다.’ 설사 이 죄목들이 사실에 근접해 있다 해도 죽음으로 갚기엔 벌이 너무 과했다.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토지개혁을 시도한 행위와 기다릴 줄 몰랐던 조급증일 것이다.
돌아올 수 없는 강, 위훈 삭제
조선은 개국 후 공신들의 나라였다. 칼로 정권을 잡은 왕들은 훈구공신들에게 토지와 노비로 보상을 했다. 조선을 연 이성계는 혁명공신들에게, 태종과 세조는 계유정난과 즉위 공신들에게, 중종은 반정의 세력들에게 막대한 토지를 줬다. 가치 있는 땅은 모두 공신들이 가졌고, 백성은 헐벗고 굶주렸다.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세력들은 이를 타파하기위해 위훈 삭제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중종반정에서 가짜 공으로 토지를 하사받은 공신들의 위훈을 삭제해 보상해 준 토지를 다시 국가가 환수조치 하기위해서다. 실제로 중종반정 때 아무런 공 없이 위훈을 받은 사람이 많았다. 연산군을 몰아낸 주축은 10여 명에 불과한데 책봉된 공신은 117명이나 되었다.
조광조는 일곱 번이나 위훈 삭제를 요청했으나 중종이 불허하자 전원 사직으로 맞섰다. 긴 싸움에서 결국 사림은 승리했다. 중종은 어쩔 수 없이 117명의 공신 중 76명의 위훈 삭제를 허락했다. 그러나 그 승리는 파국의 시작이었다. 중종의 입장에서 보면 사림의 위훈 삭제 요청은 왕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일 수 있었다. 왕이 될 수 없었던 중종을 왕으로 앉혔던 세력이 반정 공신들이다. 그들에 대한 위훈 삭제는 역으로 왕권에 대한 부정으로 읽힐 만한 사건이었다.
위훈삭제 단행시 겪은 중종의 심리적 갈등을 간파한 조정대신들은 공격적인 자세로 전환해서, 조광조 등의 請罪를 중종에게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상황이 반전되어 중종은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김식(金湜), 김구(金絿)등이 서로 붕당을 맺어 성세(聲勢)로 서로 의지하고, 권요(權要)의 자리를 차지하여 후진을 유인하여 궤직을 일삼아 국론과 조정을 어지럽게 하였으나, 조정의 신하들은 그 세력이 치열한 것을 두려워하여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게 되었다면서 이들을 추고하라고 전교 하였다.
|
그 후 중종은 조광조를 죽이자는 청이 없어서 결단을 못 내리고 있던 차에 生員 황이옥(黃李沃), 유학(幼學), 윤세정(尹世貞), 이래(李來) 등이 조광조를 죽여서 생사여탈의 권한이 임금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기강을 확립해야 한다는 상소(上疏)가 올라오자, 즉시 전교 하여 조광조·김정·김식·김구는 사사(賜死)하고, 윤자임·기준(奇遵)·박세희(朴世熹)·박훈(朴薰)을 절도(絶島)에 安置하게 하였다.
조광조가 죽게 됨에 따라 소학 소재의 여씨향약을 향촌사회에 보급하여 성리학에 의한 질서체계를 확립하고, 현량과를 통해서 경학을 위주로 하는 새로운 인물들을 중앙 정계에 진출시켜 자파세력(自派勢力)을 강화한 후 정국공신의 위훈을 삭제하여 왕도정치를 행하려던 제반 정치개혁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역사적인 의의와 평가
조광조 등 신진사류들의 도학정치사상을 바탕으로 한 급진적 개혁 정책은 연산군 이후의 혼란을 극복하고, 요순시대(堯舜時代)와 같은 이상정치를 실현함으로써 국가의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실행방법이 그 시대에 主를 이루고 있던 훈구세력들의 정치적·경제적인 지위를 와해시키려는 일환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훈구세력의 심한 반발을 초래했다.
결국 정국공신 위훈삭제라는 사건을 계기로 훈구세력과 대립함으로써 그들이 행하려했던 개혁 정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왕도정치를 행하려던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후세에 그의 도학정신이 계승되어 이황(李滉)·이이(李珥) 등의 유학자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사림에게는 정신적인 표상이 되었으며, 한국 유학의 기본적인 성격을 형성했다.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그의 政治理想을 실현시키는 궁극적인 목표였다 해도 좋을 것이다. 그가 행한 改革의 범주는 道德性의 회복, 異端의 배격, 民生의 安定, 鄕村의 敎化와 같은 광범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개혁활동을 통하여 그는 祖宗法일지라도 시폐(時幣)가 있는 것은 개혁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러한 그의 개혁관이 급진적이고 과격한 것이라고 평하고 있으나 오히려 그의 改革姿勢는 愼重性과 保守的인 성격도 지니고 있음을 看過해서는 안될 것이다.
|
조선 최고의 시인 박상과의 인연
無等山前曾把手 무등산전증파수
무등산 앞에서 서로 손을 붙잡았는데
牛車草草故鄕歸 우차초초고향귀
관 실은 소달구지만 바삐 고향으로 가는구나.
他年地下相逢處 타년지하상봉처
후일 저 세상에서 다시 서로 만나더라도
莫說人間謾是非 막설인간만시비
인간사 부질없는 시비 일랑 더 이상 논하지 마세나.
기묘사화가 일어난 이듬해인 1520년 봄, 능성현(지금의 화순군 능주면)에 귀양 와서 사약을 받고 죽은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시신이 경기도 용인으로 떠나간다.
눌재 박상(朴祥 1474-1530)은 그의 관이 실린 소달구지를 먼발치로 보면서 만시를 짓는다. 시 제목은 ‘逢孝直喪’(효직의 상을 당하여(효직은 조광조의 字))이다. 상여 줄을 끌면서 만가를 부르듯이 시가 매우 애절하고 장엄하다.
이 시의 첫 1구, 2구는 박상과 조광조와의 과거와 현재의 인연 이야기이다. 1519년 11월 박상은 무등산 앞 분수원(지금의 광주 남문 밖)에서 유배 내려오는 조광조를 만나 슬픔을 나누웠다. 그 때 그는 조광조에게 다음과 같은 위로의 시를 건넨다.
分水院前曾把手 분수원전증파수
분수원 앞에서 일찍이 손잡고 헤어졌을 때
愧君黃閣落朱崖 괴군황각낙주애
그대가 조정에서 일하다가 귀양살이 옴을 이상하게 여겼노라
朱崖黃閣莫分別 주애황각막분별
귀양살이와 조정에서 벼슬함을 구별하지 마소
纔到九原無等差 재도구원무등차
저승에 가면 아무런 차등이 없는 것이니.
그런데 조광조는 유배 온지 한 달도 못 되어 사약을 받았고 그의 친구 학포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이 수습한 시신은 소달구지에 실려서 바삐 고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비참하고 애달프다.
사실 능주에 유배된 것은 조광조라는 한 사람이 아니었다. 전복을 꿈꿨던 이들의 개혁이 유배된 것이었다. 조광조가 죽음으로써 그 개혁도 함께 죽었으니 이상정치를 실현해 국가의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던 그의 꿈은 설운 땅 능주에 묻히고 말았다.
'내고향 청정골 화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순~서울 우등고속버스 17일 개통 (화순군민신문 2010. 09.21. 10:59) (0) | 2010.09.25 |
---|---|
우수한약재유통 지원시설 준공 (화순예향신문 2010년 09월 16일 (목) 16:10) (0) | 2010.09.25 |
화순군, 죽청대교 재 가설 사업 ‘확정’ (0) | 2010.09.15 |
옥중출마 전완준 화순군수 ‘전횡’ 논란 (한겨레 2010.09.01 19:30) (0) | 2010.09.02 |
화순, KTR 헬스케어 연구소 기공식 (화순의소리 2010. 08.30. 20:05) (0) | 2010.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