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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향 청정골 화순

만세의 사표… 서포 김만중(上) (화순군민신문 2010. 12.23. 16:35)

만세의 사표… 서포 김만중(上)
지극했던 효심으로 세상을 울리다
입력시간 : 2010. 12.23. 16:35


어린 날 나의 조부(鶴松 李道卿)께서는 사랑방에 독서제를 차려놓고 멀리서 서당선생을 모시어 큰집 형과 원근의 학동들을 모아 한학을 가르쳤다. 큰댁 형(李英在)을 독서당까지 차리고 많은 돈을 들여 공부를 시키자 유명 한학자들과 선생들이 동네 사랑방과 우리 집 사랑방에서 기거를 하며 교류를 가졌다.

선친(仁堂 李振燮)은 어린 나에게 한학을 가르쳐 잃어져 가는 학문을 위하고 집안과 문중에 큰 대들보로 쓰려 했다. 한학을 차근차근 기초부터 닦기를 원했던 아버님은 ‘천자문’부터 가르치려고 한 반면 조부님은 ‘명심보감’부터 바로 입문하라는 주장을 펴셨다.

결국 조부님의 가르침대로 ‘명심보감’을 배우게 되었는데 나는 이 한학을 공부한 연유로 고등학교 때 상업시간(천유복 선생)과 고문시간(허경회 선생)에는 단연 실력을 인정받아 선생님들로부터 칭찬을 듣곤 했었다. 청소년 시절 한학의 오묘하고 깊은 진리를 일찍 깨우친 탓에 몸을 단정히 하고 마음을 정결히 하는 습관을 들이게도 되었고 철도 얼른 들었다.

오늘날 격세지감이 드는 것은 불과 얼마 전까지 한글에 떠밀려 힘을 못 펴던 한문이 최근 들어 다시 열풍에 휩싸이는 것을 보면서다. 이런걸 보면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새삼 들곤 한다.

그 시절 서당에서 마음속에 담아 놓은 명심보감의 ‘효도편’에 나오는 다음 글귀를 보고 오늘날 청소년들이나 어른들이 다시 한 번 마음에 되새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孝順은 還生孝順子요, 五逆은 還生五逆子라. 不信커든 但看詹頭水 하라.
효순은 환생효순자요, 오역은 환생오역자라. 불신커든 단간첩두수 하라.
點點적적 不差 이니라.
점점적적 불차 이니라.
효도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다시 효도하고 순종하는 자식을 낳게 되는 것이고 부모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은 다시 부모의 뜻을 거스르는 자식을 낳게 된다. 이를 믿지 못하거든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보라. 한 방울 한 방울 제자리에 떨어지는 것이 조금도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출생부터가 파란만장했던 서포 김만중
배 위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김만중이 귀양살이를 하다 삶의 막을 내린 마지막 유배지는 경남 남해군 이동면 양아리 벽련 마을 앞 속칭 앵강 바다에 떠 있는 노도(櫓島)라는 ‘삿갓 섬’이다. 그가 외롭고 쓸쓸한 귀양살이 끝에 이승을 등진 유배소는 지금은 잡초 무성한 폐허로 남았지만 섬 들머리에 그의 위대한 문학정신과 풍류정신 그리고 지극한 효성을 기리는 유허비가 세워져 찾는 이들을 쓸쓸히 반기고 있다.

이렇듯 서포 김만중의 생애는 바다에서 시작되어 섬에서 끝을 맺었다. 배위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사실부터가 이미 파란만장하고 중첩한 그의 생애를 예고하는 듯 했다. 그가 태어난 것은 1637년(인조15) 음력 2월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였다. 광산김씨 명문 가문의 자손임에도 불구하고 피난중인 배위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사연은 바로 병자호란이 때문이었다.
김만중의 구운몽(좌)과 사씨남정기(우)

1636년 12월9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넌 청태종(靑太宗) 홍타시의 12만 대군은 당시의 명장 임경업(林慶業)이 지키는 의주의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질풍같이 남하, 10일에 안주 13일에 평양 14일에 개성을 짓밟고 서울로 육박했다.

개성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급보를 받고 당황하던 조정은 우선 종묘사직의 신주와 세자빈 강씨 제2왕자 봉림대군 제3왕자 인평대군 부부를 강화도로 피난시켰다. 이 일행은 전임대신 尹昉과 金尙容이 모시고 갔는데 그때 강화도로 건너간 일행 가운데는 서포의 부친 김익겸(金益兼)도 있었다.

그날 임금과 대신들도 서울을 버리고 구리개를 거쳐 수구문을 빠져나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이듬해 1월 22일 강화성이 청군에게 함락될 때 김상용은 대세가 기울자 성문위에서 화약으로 자폭 순절했는데 그때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 선비 김익겸도 같은 길을 택했다. 인조 13년에 생원시에 장원급제한 김익겸은 병자호란 직전 청태종이 사신을 보내 군신의 禮를 강요하고 왕자들을 인질로 보내라고 하자 당장 사신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상소할 만큼 기개 있는 소장 척화파(斥和派)였다.

자식 교육에 열을 다했던 서포의 어머니
김익겸의 조부는 栗谷의 제자로서 禮學의 最高峰으로 꼽히던 동방16현의 沙溪 金長生이요 부친은 이조참판을 지낸 金盤(김반)이였다. 당시 김익겸의 부인 해평 윤씨는 21세로 다섯 살짜리 만기 외에 뱃속에 또 한 아들이 있었으니 바로 만중이었다. 만삭의 윤씨 부인이 출산을 한 것은 남편이 강화성에서 순절한 다음 달인 음력 2월 10일 피난 중인 배위에서였다.

서포 김만중은 그렇게 바다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김만중의 자는 重叔, 아호는 西浦인데 강화도 서쪽 포구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함경도 선천에 유배당해 머물던 지명을 딴 것이라는 설도 있는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남편의 순절 소식을 듣고 기절했다가 깨어난 윤씨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내 마땅히 지아비를 따라 죽는 것이 통쾌하겠으나 이 불쌍한 고아들을 두고 간다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낭군을 뵐 수 있으랴.” 난리가 치욕스러운 항복으로 끝난 뒤 윤씨 부인은 만기, 만중 두 아들을 데리고 친정부모의 슬하에서 자식들을 기르기 시작했다.

윤씨 부인이 비록 명문가 후예였으나 이런 가문도 전란 직후라 가세가 곤궁하였으므로 몸소 길쌈하고 수를 놓아 노부모를 봉양하고 자식들을 길러야 했다. 어머니는 두 아들에게 늘 이렇게 타일렀다고 뒷날 서포는〈정경부인 해평 윤씨행장〉에서 회고했다.

“너희들은 다른 사람과는 같지 않으나 반드시 남보다 재주가 한 등 높아야만 겨우 같은 대열에 들게 되리라. 사람들은 행실 없는 자를 두고 꾸짖을 때 과부의 자식이라 하나니 너희들은 이점을 뼈저리게 생각하라“

그때는 병자호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책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서포의 어머니는 곡식이나 손수 짠 명주를 주고 책을 사기도 하고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홍문관의 책들을 빌려다 몸소 베꼈는데 자획이 정묘하고 섬세하기가 마치 구슬을 꿴 듯 흐트러짐이 없이 아름다워 매우 보기가 좋았다고 한다.
서포 김만중이 유배생활을 했던 경남 남해군 노도 유배지


만세의 사표가 된 효심
지아비를 여의고 어렵게 두 아들을 키우던 윤씨 부인은 평생토록 소박한 차림에 검소한 음식으로 지냈다. 아들들이 생신잔치를 베풀어 드리려고 해도 듣지 않던 어머니였으나 과거에 급제했을 때만큼은 이렇게 말하며 잔치와 풍악을 허락하였다.

“이는 진실로 우리 문중의 경사요, 내 한 몸의 기쁨에서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홀몸으로 온갖 고생을 다하여 길러준 어머니였으니 어머니에 대한 두형제의 효성이 남달리 지극했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였다. 서포의 효심이 얼마나 극진했던가는 이재(李縡)의 <삼관기>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서포 김 공은 효도가 매우 지극했다. 어머니의 사랑도 가히 없이 지극정성이였지만 또한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즐겁게 하려는 모양은 마치 병아리가 어미닭 앞에서 삐약삐약 거리며 우는 것과도 같았다. 부인은 옛 역사나 이상한 사실을 적은 책을 좋아하였으므로 서포는 많은 이야기책을 모아 밤낮으로 그것을 읽어 드리며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렸다.”

형 만기는 1653년(효종4년)에 만중은 1667년(현종8년)에 각각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때 만중은 31세였고 이미 두 살 아래인 연안 이씨 부인을 아내로 맞이한 뒤였다. 부인과의 사이에서 김만중은 아들 진화와 딸 하나를 두었는데 뒷날 진화는 진사시에 장원급제하고 서윤 벼슬을 했으며, 딸은 판중추부사에 오른 이이명에게 시집을 갔다.

서포는 과거에 올라 처음 10년간은 벼슬살이가 비교적 순탄한 편이었다. 그러나 벼슬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할 말은 묻어두지 못하는 강직한 성품인지라 계속 관운이 좋을 수는 없었다.
1673년(현종 14)에 영의정 허적을 탄핵했다가 임금의 비위를 거슬러 강원도 고성 땅 금성으로 유배당하면서 파면과 사직과 귀양살이가 되풀이 되는 가시밭길을 걷기 시작했다.

서포는 조정에 있을 때면 수시로 임금의 잘못을 바른말로 따졌기에 이른바 괘씸죄에 자주 걸렸고 또 극심한 당쟁에 휩쓸려 벼슬살이의 부침과 영욕이 거듭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당시 송시열을 비롯하여 병자호란 때 척화파의 거두인 김상헌의 손자 김수홍, 수항 형제와 더불어 서인에 속해 있었다. 때문에 서인이 정권을 잡았을 때는 영광이, 적대적인 남인이 정권을 잡았을 때에는 오욕을 당하는 식으로 명암이 수시로 교차되었던 것이다.

만세의 사표… 서포 김만중(下)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일세의 풍류남아
입력시간 : 2010. 12.30. 18:11



숙종 후궁 장희빈에 대한 충간으로 유배길에 올라


숙종 5년(1679년)에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서포도 중용되어 예조참의로 관직에 나아간 뒤 대사간, 대사성, 대사헌, 부제학, 도승지를 거쳐 숙종 9년에는 대제학에 이르고 이듬해엔 벼슬이 참찬에 이르렀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숙종 13년에 임금의 잘못을 두고 충간한 것이 또다시 괘씸죄에 걸려 함경도 선천으로 두 번째 유배를 당해야 했다. 그것은 숙종이 이른바 장희빈으로 잘 알려진 후궁 장씨에게 푹 빠져 쓸모없는 인물을 정승으로 등용한 어두운 처사에 대해 직언으로써 충간했기 때문이었다.

맏이인 만기가 먼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돼 막내마저 먼 북쪽 변방으로 귀양살이를 떠나보내야 하는 백발의 칠십 노모는 오십객 아들의 손을 잡고 타일렀다. “얘야, 귀양살이 간다는 것은 옛적 훌륭한 어른들도 오히려 면치 못하던 일이었느니라. 부디 가거들랑 스스로 몸을 돌보고 어미 걱정은 말거라”. 서포는 돌아서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전왕 현종도 그랬지만 숙종 또한 임금의 잘못을 꼭 집어 바른말만 하는 김만중을 매우 미워했다. 적당히 아부와 아첨도 하면 좋으련만 입에서 나오는 말이 모두 이렇게 하소서 저렇게 하소서, 이건 아니 되옵니다 저것도 아니 되옵니다, 하는 소리뿐이니 전혀 달가울 턱이 없었다. 특히 숙종은 서포가 인경왕후의 작은 아버지로서 자신에게는 사사로이 처숙부가 되는 데도 듣기 싫은 말을 자주해서 김만중을 몹시 미워했다.

<숙종실록> 5년 4월조를 펼치면 이렇게 심한 욕까지 했을 정도였다. “김만중은 간사하고 부정한 무리라. 先朝에 領相을 모함하고도 罰을 면했으며 그것도 다행한 일이거늘 어쩌다 뽑혀 나라에 들어와서는 의기양양하여 조금도 뉘우침이 없을 뿐 아니라 자질구레한 일을 크게 꾸며 어진 인물을 해치려 하니 마땅히 삭탈관직 할 뿐더러 그놈의 성 金家를 지워버리고 그저 이름만 쓰도록 하라”.

하지만 김만중이 과연 그런 정도의 인물에 불과했을까. 조카 김진균의 <서포행장>에 실린 글을 보면 그의 참모습을 미루어 알 수가 있다. “그의 천품은 고명하고 온순하며 용모는 아담하고 깨끗하여 빙호추월이 한 점의 티나 가림도 없는 듯해서 대하는 사람마다 자연히 더럽고 인색한 마음이 사라지게 되었다.”

일세의 풍류남아 서포의 파란만장한 삶
그는 또한 일정한 스승을 모시고 가르침을 받지 않았음에도 학문이 정심한 경지에 이르러 유학은 물론 여러 학문에도 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언젠가는 그의 벗 이단하(李端夏)가 우암 송시열에게 서포를 가리켜 말하기를 “김만중의 천품은 자연적으로 道에 가깝다”고 했을 정도였다.

서포는 당대의 大學者요, 大文章家요, 높은 벼슬아치였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사소한 일에는 대범했던 일세의 風流男兒였다. 그는 평소 집안살림살이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서 옷이나 음식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었고 돈이나 비단 같은 재물을 보아도 돌처럼 여겼다고 한다. 또한 풍류의 아취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은 평생토록 주색을 멀리한 채 단정하고 검소한 삶을 보낸 특이한 천성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서포 김만중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남해유배문학관’


숙종 14년(1688)에 후궁 장씨가 아들을 낳자 숙종은 나라의 경사라면서 서포의 귀양을 풀어주었다. 이는 영의정에 오른 김수홍의 건의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 이듬해에 일어난 이른바 기사환국으로 세상은 다시 한 번 발칵 뒤집혔다. 임금이 방금 낳은 핏덩이를 세자로 책봉하고 생모인 후궁 장씨를 희빈으로 승진시키려고 하자 당파 간에 치열한 쟁투가 벌어졌던 것이다.

이때 끝까지 반대하던 서인은 모조리 숙청당했는데 송시열과 김수홍은 처형당하고 서포는 간신히 죽음을 면했지만 절해고도 남해로 세 번째이며 마지막이 되는 귀양살이 길을 떠나게 되었다. 아들 진화와 사위 이이명과 함께 의금부에 갇혀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가까스로 죽음을 면하고 남해에 유배형을 받은 것인데 사위와 조카 셋도 이 섬 저 섬으로 떨어져 같이 유배를 당한다.

팔십노모를 서울에 두고 다시 귀양길에 오른 서포는 비통한 감회를 이렇게 읊었다.
해마다 어머님 생신날이면 / 형제 마주서서 색동옷 입고 춤추었건만
이제 하나 명받고 곁을 떠나니 / 아아, 어머님 가슴이 얼마나 아프실까

불후의 명작 <사씨남정기>와 <구운몽>
서포가 <사씨남정기>를 쓴 까닭은 인현왕후의 폐위 소식을 듣고 숙종의 어두운 처사를 풍자로써 충간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홀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그였기에 6년 동안 폐비로서 쓰라린 고통을 당했던 불행한 한 여인에 대한 깊은 이해의 발로라고도 볼 수 있으리라.

기사환국으로 서인을 숙청한 남인은 장희빈을 등에 업고 더욱 권력을 굳히고자 어질고 착한 왕비 민씨를 쫓아냈던 것이다. 아들을 못 낳은 죄밖에 없는 중전 민씨 仁顯王后는 게다가 서인인 민유중(閔維重)의 딸이었다. 한 가정이 두 여자 때문에 겪는 風波는 왕실이나 민간이나 다를 바가 없다. <사씨남정기>는 배경만 다를 뿐 결국은 이와 똑같은 사건을 줄거리로 삼고 있다.

줄거리를 요약해 보면 유한림과 결혼한 사씨는 자식이 없어서 걱정이었다. 남편이 아직 젊으니 기다려 보자고 했지만 몇 년이 지나도 아이를 낳지 못하자 사씨는 스스로 교씨를 남편의 소실로 맞아들인다. 교씨는 용모는 아름답지만 성격이 비뚤어진 악녀였다. 마침내 아들을 하나 낳자 교씨는 음험한 본색을 드러낸다. 온갖 중상모략과 모함으로 본부인 사씨를 내 쫓고 자신이 정실자리를 차지하지만 결국엔 유한림의 뉘우침으로 쫒겨나고 사씨가 다시 들어오게 된다는 내용이다.

숙종을 유한림에 민중전을 사씨에 장희빈을 교씨에 비유 풍자한 이 소설을 숙종이 읽어 보았다는 기록은 전혀 없지만 작가 김만중이 세상을 떠난지 2년 뒤인 1694년(숙종20년)에 임금은 소설처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민중전을 복위시키고 죽을 때 까지 지극한 사랑을 쏟았다.

2010년 11월 1일 경남 남해군 남해읍 남변리의 <남해유배문학관> 개관행사에 맞춰 ‘제1회 김만중 문학상 시상식’이 열렸다.


<구운몽>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남달리 극진했던 서포가 유배지 남해에서 옛이야기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해 지은 유백문학의 걸작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또한 서포 자신이 응시 관조하고 통찰한 인생관을 나타낸 기록이기도 하다.

유배지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김만중
서포의 어머니는 맏아들을 잃은 데에 이어 작은 아들과 손자 넷까지 잇달아 절해의 고도로 귀양살이를 떠나자 노환에 상심이 겹쳐 한번 자리에 눕자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아마도 윤씨 부인은 숨을 거두기 전에 아들이 지은 구운몽을 읽어 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으로써 마지막으로 아들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던 어머니의 애절한 소망을 대신했을지도 모른다.

老母의 부음(訃音)을 들은 서포의 가슴은 미어질 듯 아팠으리라. 멀고 먼 남쪽 섬에서 유배된 몸으로 노모의 임종조차 보지 못한 불효자가 되었으니 그의 애통한 심정이 어떠했을까. 서포는 서럽게 흐르는 눈물을 애써 거두고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존경했던 어머니의 행장을 짓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 8월에 정경부인 해평윤씨 행장을 쓰고 해가 다시 두 차례나 바뀐 뒤인 1692년 4월의 마지막 날에 서포는 먼 북녘 하늘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눈을 감았으니 그때 그의 나이 56세였다.

함께 유배 온 사람들이 염습을 하여 섬 한쪽 산등성이에 임시로 묻어주었는데, 그해 9월 27일 귀양이 풀린 외아들 진화가 찾아와 운구하여 경기도 광주군 노치면 선형 만기의 묘아래 장사 지냈다. 그 뒤 서포의 묘는 그가 세상을 뜬지 20년이 지난 1711년(숙종37) 8월에 임진강 북쪽 장단 대덕산 기슭으로 다시 이장 되었다.

훗날 그에게는 文孝라는 공신의 호와 효자정려문이 내려졌지만 그의 고매한 인품과 깊은 학덕을 기리는 우리들에게는 <구운몽>과 <싸씨남정기>같은 위대한 작품을 남긴 서포의 문학정신과 풍류정신이 더욱 값지고 뜻 깊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서포의 묘가 있는 장단 땅은 지금에는 갈 수가 없지만 그가 인고의 귀양살이를 하며 <구운몽>을 짓던 남해 노도 배터 자리에는 1988년 9월에 남해군과 남해군 청년회의소가 세운 ‘서포 김만중 선생 유허비’가 묵묵히 선채 지나는 길손들을 반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