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핵심소재 수출규제 1년
지난해 7월 4일. 일본은 한국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을 겨냥한 ‘핵심소재 수출규제’를 전격 단행했다. 당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LG디스플레이 등은 직격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란 부정적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거의 1년이 지난 23일 반·디와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업계의 취재를 종합하면 “걱정은 그저 걱정이었을 뿐, 오히려 국산화를 높이는 전화위복이 됐다”고 입을 모았다. 기업은 발 빠르게 소재 공급처 다변화와 소·부·장 국산화에 나섰고, 정부는 핵심소재 육성 정책으로 뒷받침한 결과라는 분석이다.
한국 ‘국산화·다변화’로 체질 개선 성공
일본은 지난해 7월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감광액), 불화 폴리이미드 등 첨단소재 3종의 수출을 묶었다. 3개 품목을 ‘포괄수출허가’에서 ‘건별 허가’ 대상으로 전환했고, 8월에는 수출허가 간소화 대상국인 ‘화이트 국가’ 목록에서 한국을 제외했다. 3개 품목은 반·디 산업의 핵심소재이지만 일본 의존도가 90%나 됐다. 일본이 한국 반·디 산업의 구조적 취약성을 날카롭게 겨냥했던 셈이다.
하지만 일본의 수출 규제는 오히려 변하지 않던 국내 기업을 변화로 이끌었다. 무엇보다 일본에 의존했던 공급처 다변화와 국산화에 빠르게 뛰어들었다. 한국 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의 박재근 회장(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은 “일본이 잠자고 있던 한국을 깨운 것”이라고 표현했다. 박 회장은 “일본의 수출규제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적극적으로 국산화와 다변화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불화수소 국산화 성공 … 100% 대체
우선 일본 수출 규제 1년 만에 소부장의 국산화 성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SK머티리얼즈는 해외 의존도가 100%였던 기체 불화수소의 국산화에 성공했다고 17일 발표했다. 이미 순도 99.999%의 양산을 시작했고, 연간 15t 규모로 시작해 앞으로 3년 안에 국산화율을 70%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불화수소는 반도체 기판인 실리콘웨이퍼에 그려진 회로도에 따라 기판을 깎아내는 식각(蝕刻·에칭) 공정에 쓰인다.
액체 불화수소는 이미 지난해 수출규제 조치 직후 솔브레인·램테크놀로지가 공장 증설을 통해 대량 생산에 성공했다.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 등 디스플레이업계는 1년 만에 일본산 액체 불화수소를 100% 국내 기업 제품으로 대체한 상태다. 반도체 분야에서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액체 불화수소는 국산 제품 사용 비중을 늘렸고, 기체 불화수소는 미국 등을 통해 수입 다변화로 대응했다.
반도체 기판 제작에 쓰이는 감광액(感光液)인 포토레지스트(PR)는 한때 일본 의존도가 92%에 달했다. 현재는 벨기에·독일 등으로 공급처가 늘었다. 국내 기업 중에도 불화아르곤(ArF) 포토레지스트를 생산하는 동진쎄미켐이 올 초 공장 증설을 확정했다. SK머티리얼즈도 ArF 포토레지스트 개발을 위해 내년까지 공장을 완공해 2022년부터 양산에 들어간다.
EUV용 PR는 미 듀폰 공장 천안에 유치
5㎚ 이하의 초미세 공정에 쓰이는 EUV(극자외선)용 포토레지스트의 경우 당장 국산화하지는 못하고 있다. 워낙 고난도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듀폰이 올 초 EUV용 포토레지스트 공장을 충남 천안에 짓기로 결정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듀폰과 협의해 투자를 유치했다. 순수 국산화까지는 못 갔지만 일본이 아닌 해외 기업 유치로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한 셈이다.
또 다른 규제 품목인 불화 폴리이미드는 국산화가 한창이다. 불화 폴리이미드는 주로 폴더블 스마트폰이나 롤러블 TV 등 ‘휘어지는’ 디스플레이에 사용한다. 국내 업체 중에는 코오롱인더스트리가 경북 구미에 생산 설비를 갖추고 지난해부터 양산에 들어갔다. SKC도 연간 100만㎡를 생산할 수 있는 대규모 설비를 충북 진천에 갖추고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다.
닛케이 “일 기업 매출·영업이익 감소”
일본 수출규제의 타격은 오히려 자국 업체들을 향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최근 “세계 불화수소 1위 업체인 스텔라케미파의 1분기 매출과 영업이익이 전 분기 대비 각각 12%, 32% 감소했다”고 보도했다. 이 회사의 고순도 불화수소 출하량은 같은 기간 30%나 감소했다.
닛케이는 “기업들은 정부에 한국 대기업에 대한 납품 물량을 원상 복귀시켜 달라고 요청 중이지만, 한국 기업들이 다시 일본산 소재를 사용하기 위해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너무 커졌다”고 진단했다. 국내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공급처를 바꾸기도 어렵지만 다시 일본제로 돌리는 일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 지원도 한몫 “민·관 협력 계속돼야”
소재 공급 안정화와 국산화가 이뤄질 수 있던 배경에는 정부의 역할도 한몫했다. 산업부는 불화 폴리이미드는 2010년, 포토레지스트는 2002년부터 기술개발 과제로 지원해왔다. 일본의 수출규제 직후 기업의 애로사항을 원스톱으로 해결하기 위한 소재부품수급대응지원센터를 운영한 것도 결정적이었다. 박동일 산업부 소재부품정책관은 “지난해 8월부터 100대 핵심 품목을 공급 안정화 대상으로 지정하는 등 소·부·장 경쟁력 강화에 집중했다”며 “동시에 대·중소기업 간 협력모델도 빠르게 구축했다”고 밝혔다.
일 수출규제의 여파는 극복했지만 민관 협력은 계속돼야 한다는 지적도 높다. 반도체용 정전척(ESC)과 히터 전문업체인 ㈜미코의 전선규 회장은 “정부나 기업의 분위기가 다시 흐지부지돼선 안 된다. 특히 소재 경쟁력을 키우려면 정부 지원이 꾸준히 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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