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취 미/연 예 가

[톱클래스] 흔들림 없이 운명 속으로… 배우의 향기, 전지현 (조선일보 2015.08.23 07:28)

[톱클래스] 흔들림 없이 운명 속으로… 배우의 향기, 전지현

“소년의 눈빛과 여인의 향기가 동시에 느껴졌다.” 열일곱 전지현을 캐스팅했던 소속사 대표의 말이다. 다시 열일곱 해가 지나 서른넷이 된 전지현에게서는 ‘스타의 눈빛과 배우의 향기가 동시에 느껴졌다.’

 


“언제는 내가 제일 좋다고, 제일 예쁘다고 하더니. 지금은 껌 씹듯이 사람을 씹고….” 〈별에서 온 그대〉의 천송이(전지현 분)의 대사다. 전지현은 대중의 이런 변덕을 지난 17년간 겪어왔다. 10대에 데뷔해 20대의 눈부신 스타시절을 지나 30대에 배우로 우뚝 선 전지현, 이 한 문장 안에는 작품 하나에 널을 뛰던 대중의 평가도 담겨 있다. 〈엽기적인 그녀〉(1999)의 성공으로 로맨틱 코미디의 한 획을 긋고 해외에서도 못지않은 호평을 받아 아시아의 별이 되었을 때 전지현은 대체 불가한 배우로 보였다. 한국영화 시나리오의 70%는 전지현에게 간다는 소문이 있었고, 박신양과 〈4인용 식탁〉(2003)을, 장혁과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2004)를, 정우성과 〈데이지〉(2006)를, 황정민과 〈슈퍼맨이었던 사나이〉(2008)를 찍었다. 홍콩・일본・프랑스・아르헨티나 합작으로 〈블러드〉(2009)를 찍었고 휴 잭맨, 리빙빙과 함께 〈설화와 비밀의 부채〉(2011)를 찍었다. 〈엽기적인 그녀〉의 대박신화는 전지현을 세계로 날아오르게 한 동시에 이후 그의 모든 작품을 〈엽기적인 그녀〉의 아류작이라고 찍어 누르는 단서가 되었다. 최근 몇 년간 전지현이 맡은 〈도둑들〉(2012)의 예니콜, 〈베를린〉(2013)의 련정희, 〈별에서 온 그대〉(2014)의 천송이가 연달아 잭팟을 터뜨렸을 때 많은 이들은 “전지현의 부활”이라고 했다. 전지현은 오히려 담담했다. 〈블러드〉 이후 생긴 새벽운동 습관은 그를 ‘몸 쓸 줄 아는 배우’로 만들어주었고, 할리우드 진출 경험은 영화를 보는 시야를 넓혀주었다. 그사이 그는 대중이 원하는 전지현과 자신을 분리해 생각할 줄 알게 되었다. 그 예가 ‘긴 생머리’다. 영화 〈암살〉을 찍기 위해 그가 긴 생머리를 단발로 잘랐다는 이야기는 영화만큼 화제가 됐다. 정작 전지현은 “긴 생머리를 고수한 적도 없고, 심지어 중간중간 자르기도 했다”고 했다. 다만 당시 작품이 잘되지 않아 화제가 덜 되었을 뿐.


 

 

“저는 고집하는 스타일이 없어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저의 이미지가 있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하나에 목숨 거는 타입이 아니에요. 그저 이번 작품에서는 긴머리의 여자가 머리를 찰랑거리면서 총을 쏘는 게 어울리지 않았어요. 머리는 금방 자라니까 신경을 안 썼죠. 그전에도 머리는 여러 번 잘랐어요. 앞머리를 자른 적도 있고요. 아무래도 작품이 화제가 되면 여러 가지가 화제가 되는 것 같아요.”

전지현은 〈암살〉에 나오는 출연진 중 가장 무겁고 긴 총을 들었다. 만주 이청천 독립군 부대의 저격수인 안옥윤(전지현 분)은 영화의 문을 열고 닫는 역할이다. 〈도둑들〉 이후 전지현에게 차기작도 함께 하자고 제안한 최동훈 감독은 “〈암살〉은 결국 집을 떠난 한 여인이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라고 했다. 전지현은 시나리오도 보지 않고 제안을 수락했다. 〈도둑들〉을 하기 전부터 최동훈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나와 잘 맞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의 영화는 캐릭터가 강하고 모두가 살아서 움직인다. 전지현은 이제 스스로에게 맞는 옷을 알고 있다. 드러내고 표현하는 ‘강한’ 캐릭터다. 짧은 순간 강한 임팩트를 줘야 하는 CF에서 그가 독보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건 그 때문이다. ‘강하지만 쎄 보이지 않는(〈도둑들〉 예니콜)’, ‘망가지지만 추하지 않은(〈별에서 온 그대〉 천송이)’ 미묘한 균형을 그는 본능적으로 안다.


강한 캐릭터를 만나면 신이 나요

〈암살〉은 최동훈 감독과 배우 전지현이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주특기’를 내려놓고 맨몸으로 올라간 사각의 링이다. 〈장군의 아들〉 이후 성공한 적이 없다는 1930년대, 모두가 불편해하는 일제 강점기. 여기에 180억의 자금을 쏟아부어 영화를 만들었다. 최동훈 감독 특유의 말맛이나 현란한 카메라 숏, 캐릭터의 앙상블은 전작만큼 드러나지 않는다. 전지현이 맡은 안옥윤도 ‘바위 같은’ 인물이다. ‘흔들림 없이 자신의 운명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한 사람’의 이미지가 〈암살〉의 단초가 됐다. 〈도둑들〉 개봉 후 상하이에 간 최동훈 감독은 그곳에서 임시정부의 터를, 그리고 이름 없는 독립군들의 사진을 보게 됐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담담하게 하루하루를 살았던 무명의 사람들. 〈타짜〉를 끝낸 이후 줄곧 머릿속을 채우던 이야기, 하지만 너무 어려워 〈전우치〉 〈도둑들〉 이후로 미뤄둔 이야기를 더는 품고 있기 어려웠다고 했다. 감독의 어려움은 배우의 어려움이기도 했다. 전지현도 처음에는 이 흔들림 없는 인물에 다가가기 어려웠다. 더구나 1인 2역이었다.

“역사의식이나 독립운동에 대한 의식이 별로 없었어요. 안옥윤이라는 인물을 인간적으로 이해하는 건 어렵더라고요. 평소에도 나랏일에 큰 관심이 없는 저로서는, 나라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여인을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죠. 의외의 곳에 답이 있었어요. 안옥윤과 미츠코는 쌍둥이잖아요. 그런데 전혀 다른 사람이 됐어요. 어떤 상황이었기에 같은 사람이 달라졌을까. 미츠코의 입장에서 안옥윤을 보니까 이해가 되더라고요.”

실마리가 된 것은 쌍둥이였다. 한 집안에서 태어난 쌍둥이가 한 명은 친일파의 고명딸로, 한 명은 만주의 독립군으로 자란다.

“영화를 보니 아쉬워요. 안옥윤과 미츠코는 달라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냥 편안하게 표현할 걸 싶더라고요. 1인 2역에 이야기가 많은 캐릭터라 마냥 어둡게만 갈 수는 없는 것도 고민이었고요. 해답은 감독님께 있었어요. 현장의 분위기를 흡수하고, 감독님의 주문에 따르다 보면 답이 보여요. 최동훈 감독님 스타일이 그래요. 상황이 어둡고, 인물이 어두워요. 그런 인물도 기쁠 땐 기쁘고 재미있을 땐 재미있어요.”

안옥윤과 대척점에 있는 인물은 염석진이다. 독립군이었으나 밀정(일본의 이중간첩)이 된 염석진 역을 맡은 이정재는 전지현이 “부러웠다”고 했다. 영화를 찍는 내내 고민에 빠져 있던 자신과 달리 전지현은 편안해 보였다. 완성본을 보고 나서는 “너무 힘이 들어간 나와는 달리, 힘을 주어야 할 때와 빼야 할 때를 정확히 표현한 전지현을 보고 영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정재 오빠는 〈시월애〉 이후 15년 만에 〈도둑들〉에서 만났어요. 처음 만났을 때는 밀레니엄이라고 (1999년에서 2000년 넘어갈 때라) ‘세상에 종말이 오는 건 아닌가’라는 이야기를 나눴거든요. 이만큼 시간이 쌓이다 보니 친오빠 같아요. 제가 현장에서 많은 고민을 하지 말자고 결심한 계기가 있어요. 안옥윤이 100회차 중에 80회가 나와요. 배우로서는 이야기하고, 표현하고, 알리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그런데 나올 때마다 이야기를 하면, 보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숨이 막힐 것 같더라고요. 이야기를 ‘할 때만 하자’고 생각했죠. 그래야 더 듣고 싶으니까요.”

그렇게 ‘할 때 한’ 이야기가 있다. ‘그렇게 하면 독립이 오느냐’고, 목숨을 지키는 게 나은 게 아니냐고 묻는 하와이피스톨(하정우)에게 했던 말이다.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좋은 사람이 좋은 배우가 되더라고요

〈베를린〉에 이어 〈암살〉에서도 전지현과 호흡을 맞춘 하정우는 전지현을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대중이 이렇게 오랫동안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직접 만나보지 않아도, 작품을 통해 느껴지는 좋은 기운, 좋은 사람일 것 같다는 암묵적인 동의 때문일 것”이라고. 〈베를린〉에서는 부부로, 〈암살〉에서는 동지로 만났지만 애석하게도 두 편 모두 ‘시대적 상황에 휩쓸려 제대로 된 사랑을 나누지 못한’ 공통점이 있다.

“하정우씨하고는 항상 멜로라인이 속 시원히 드러나지가 않아요. 될 듯 말 듯 애절함을 자아내거든요. 그런 느낌을 오히려 관객들이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그 애잔한 마음은 저한테도 있죠.”

발산하는 ‘강한’ 캐릭터가 아닌, 내면이 ‘강한’ 캐릭터를 만난 것 역시 배우로서의 수확이다. 그런 캐릭터를 지금 만나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작품이 연달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 때 더 좋은 작품을 하고 싶었죠. 저는 괜찮았는데 오히려 주변 반응이 아이러니했어요. 그때는 고작 20대였는데, 혹독한 잣대로 평가하더라고요. 잠시 하고 말 게 아니라 평생 할 건데, 왜 지금 연기를 가지고 단정을 짓나 싶었어요. 하지만 그때는 나이도 어렸고 부족한 면도 많았던 게 사실이라서 땅을 칠 만큼 억울하지는 않았어요(웃음).”

어떤 상황에 처하느냐에 따라 다른 삶을 살게 된 쌍둥이 안옥윤과 미츠코처럼 20대의 전지현과 30대의 전지현은 쌍둥이 같다. ‘이제 전지현의 시대는 갔다’는 이야기를 너무 일찍 들어버린 20대의 전지현은 덕분에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대중이 바라는 자신과 실제의 자신을 구분하는 법도 배웠다. 그럼에도 20대에나 30대에나 변하지 않는 믿음은 ‘지금의 이 작품이 다음에 더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게 하는 문이 되어주리라’는 것이다. 그건 흥행과 별개로 배우로서 느끼는 성장이다. 이번 영화에서 장총을 들고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총을 쏜 장면에 대해서도 여기저기에서 호평이 터져 나왔다. “눈을 감기도 했는데 편집이 된 것”이라고 웃어넘겼지만 실은 〈블러드〉 이후 생긴 액션의 감이다.

“액션 연기를 할 때 좋은 점은 몸을 쓰다 보면 내 몸에 집중을 하게 된다는 거예요.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도 많아지고요. 총을 쏘는 액션을 할 때도 손뿐 아니라 발끝도 긴장해야 하거든요. 그걸 느낄 수 있는 게 운동의 힘인 것 같아요. 현장에 가기 전에 체력을 증진시켜놓아야 해요. 매일 헬스클럽에서 유산소, 근력운동을 해서 체력은 자신 있는 편이고요.”


삶이 편안해야 작품에 집중이 돼요

 

암살〉은 개봉 14일 만에 700만 관객을 넘겼다. 올해 개봉한 한국영화로는 최고 기록이다. 인터뷰는 개봉 전 진행되었다. (당시 임신 10주였다는 소식은 인터뷰를 마치고 알았다. 영화보다 신변이 더 화제가 될까 봐 알리지 않았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도둑들〉 때도 비슷했어요. 그때의 공기와 지금의 공기가 다르지 않다 보니까 기대가 되요. 되면 좋지만, 안되더라도 실망할 건 없다고 생각해요. 영화가 개봉하고 나면 배우는 더 이상 할 게 없어요. 오히려 마음이 비워져요. 잘되면 좋고, 안되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려고요.”

전지현은 지금껏 ‘스타가 되고 싶은가, 배우가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숱하게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둘은 쌍둥이 같다. 한때는 배우로 인정받기 위해 사력을 다했지만, 지금은 ‘스타성 있는 배우’의 가치도 못지않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배우로 남고 싶으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항상 ‘전지현으로’ 잘살기 위해 노력하죠. 좋은 연기를 하려면 삶이 편안해야 하거든요. 생각이 많고 걱정이 많으면 연기에 집중이 안 돼요. 그래서 잘살려고 노력해요. 제가 좋은 역할을 하든 나쁜 역할을 하든 ‘전지현이라는 사람은 어떨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실 거예요. 저를 만나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스크린 너머의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일 거다’라고 느끼길 바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