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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시장’ 르포…펄펄 끓는 현대사의 용광로에서 팥죽 한 그릇 (한겨레2015.01.04 13:50)

‘국제시장’ 르포…펄펄 끓는 현대사의 용광로에서 팥죽 한 그릇

 

우유가 귀하던 시절에 먹던 가루우유가 지금도 국제시장 좌판에서 팔린다. 좌판 뒤로 미제와 일제 식료품 등을 파는 가게가 보인다. 사진 박유리 기자

[토요판] 새해특집 커버스토리

1945년생은 여섯살에 한국전쟁, 열일곱살에 5·16 쿠데타, 스무살에 베트남전 파병을 겪으며 격동의 시대를 살아냈다. 해방둥이 세대 아버지들의 삶을 담은 영화 <국제시장>이 흥행 중인 가운데 국제시장을 비롯해 한국전쟁부터 민주화운동까지 근현대사가 빼곡히 남아 있는 부산시 중구 일대를 돌아봤다.

“와(왜) 입을 쪼장거려샀노. 카메라 때문에 장사를 못하겠다 해사코. 사진 찍으러 오는 사람을 우째 막을 낀데. 우째 막을 낀데?”

장삿집 여자는 분을 참지 못하고 해가 뉘엿뉘엿 진 시장 바닥에서 소리를 높였다. 2014년 12월30일 오후 6시. 추운 겨울 저녁, 상점들은 불을 밝혔지만 부산 신창동 국제시장 ‘꽃분이네’만은 일찍 문을 닫았다. 화를 내는 여자는 꽃분이네 가게 여주인의 언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주인공 덕수(배우 황정민) 가족의 터전이자 영화 촬영 장소인 꽃분이네에 사진 찍는 관광객들이 몰리자 이 가게 맞은편 상점 주인이 볼멘소리를 했던 모양이다. 꽃분이네 가게 여주인의 언니가 분을 참지 못하고 화를 내자 근처 이불가게 아저씨가 다독였다. “영화 덕분에 시장 알리고 좋지. 상인들 다 좋아한다 아이가. 그만 참으소.”

여자가 큰소리를 내자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발길을 멈추고 서서 구경을 하거나 지나가며 고개를 돌렸다. 꽃분이네 앞에서 서 있으니 친구 팔짱을 끼고 시장 골목을 걷고 있던 한 여자가 처음 보는 내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묻는다. “와? 싸웠나?”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인 듯 코를 찡끗 웃으며 지나갔다. 씩씩대는 여주인의 언니를 옆에 두고 꽃분이네 가게를 찾은 관광객들은 그래도 스마트폰을 꺼내 카메라 버튼을 눌러댔다.

맞은편 가게를 향해 큰 소리를 내던 꽃분이네 여주인의 언니는 이내 시장 골목길로 사라졌다. 그는 꽃분이네 근처에서 따로 자신의 가게를 운영한다. 다시 국제시장 골목길은 발걸음을 옮기는 행인과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뒤섞이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시장 여자들이 벌이는 싸움이나, 남의 싸움에 관심을 갖는 구경꾼이나, “무슨 일 있냐”며 고개를 들이밀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반말로 묻는 행인이나. 국제시장의 풍경이었다. 길거리 좌판에 앉아 이쑤시개를 이빨 사이로 집어넣고 입을 웅얼거리는 상인이나, 장사를 하다 길거리에 앉아 국수 한 그릇 말아먹는 상인이나. 계층이나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분절되거나 격리되지 않은 국제시장에서는 일상의 풍경이 길거리에서 쉽게 노출된다.

지난달 30일 영화 <국제시장>의 촬영 장소인 가게 ‘꽃분이네’를 관광객들이 둘러보고 있다. 영화 속 덕수 가족이 장사를 하는 이 가게는 <국제시장>이 개봉을 하자 원래 이름인 ‘영신상회’ 대신 ‘꽃분이네’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사진 박유리 기자

“사진 찍으러 오는 사람을 우째 막을 낀데”

국제시장 일대는 당면국수, 씨앗호떡, 팥죽 같은 길거리 음식으로도 유명하다. 시장을 싸돌아다니다가 배가 고파졌다. 국제시장과 부평동시장은 사실상 이어져 있기 때문에 부산 사람들은 둘을 구분하지 않는다. 국제시장을 지나 부평동시장 입구에서 누빔옷을 입은 할머니와 젊은 여자가 길거리에서 팥죽을 팔았다. 3000원을 내니 할머니가 콩고물떡이 얹혀진 팥죽을 꽃무늬 사기 그릇에 담아준다. 얼굴 모르는 사람들은 추운 겨울 좌판을 빙 둘러싸고 서서 뜨끈한 팥죽을 한입 넣는다. 뜨거운 기운을 넘기다가 맞은편에 선, 모르는 사람과 눈이 마주친다. 한입 떠 먹으며 한마디씩 하는 옆 사람들의 말을 듣는다. “이 집 할머니 팥이 제일 좋데이.” “여기까지 찾아온다 아이가. 팥 색깔 봐라. 이 일대에서 색깔이 제일 좋다.”

할머니가 팥죽을 한 국자 떠서 더 준다. “더 드실래예?” 팥죽을 다 먹으면 종이컵에 식혜를 담아 건넨다. “입가심하이소.” 한 그릇 더 먹거나 후식을 먹는다고 돈을 더 낼 필요는 없다. 국제시장에선 모르는 이들과 둥그렇게 서서 평등하게 한 그릇씩 입에 넣어도 어색하지 않다. 낯선 사람과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는 ‘원테이블 레스토랑’, 혼자 사는 사람들이 밥을 먹으며 관계를 맺는 ‘소셜 다이닝’ 같은 개념이 생기기 전에도 국제시장 좌판에선 낯선 이들이 함께 한끼를 먹었다.

국제시장, 자갈치시장, 산동네로 대표되는 서민성, 그리고 항만과 물류 중심지로서의 유동성, 일제시대의 잔재가 남아 있는 왜색성. 부산발전연구원이 펴낸 <부산 도시 이미지>를 보면 부산의 풍경은 이렇게 요약된다. 일제시대에는 항만 하역 노동자들이, 해방 뒤에는 일본에 강제징용됐다가 돌아온 재일조선인들이, 한국전쟁 당시에는 피난민들이, 산업화 시대에는 탈농촌 노동자들이 부산에 유입됐다. 부산은 한국 근현대사의 ‘멜팅팟’(용광로)이었다. 전쟁이 나자 정부는 1950년 8월18일 수도를 부산으로 옮겼고, 부산 문화극장에서는 9월1일 국회가 개원했다. 정부의 각종 기관과 서울의 주요 대학도 부산으로 내려왔다. 전쟁 속에 물밀듯이 밀려온 피난민들은 산 중턱에 무허가 판잣집을 지었다.

“전쟁의 막다른 골목에서 출신 지역과 빈부의 구별을 넘어 피난의 용광로에서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살았다. 전쟁 이전의 사회적 지위나 위계를 떠나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난리 가운데 돕고 살아남는 것이 지상과제였다. 이런 의미에서 부산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평등한 서민 공동체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부산발전연구원, <사건과 기록으로 본 부산의 어제와 오늘> 187쪽)

부산에는 한국전쟁 피난민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범일동, 수정동, 초량, 영주동으로 이어지는 산복도로(산 중턱을 지나는 도로)와 산비탈에 몸 하나 누일 땅을 차지한 판잣집. 살 곳을 찾아 떠난 피난민들은 무덤이 있는 우암동 산189번지와 문현동 돌산마을로도 파고들었다. 태풍이 불면 날아갈 법한 집들 사이로 지금도 무덤이 남아 있다.

국제시장 또한 피난민들이 깃든 곳이다. 국제시장과 이어진 부평동시장은 일제강점기 때인 1910년 조선에 세워진 최초의 공설시장이다. 해방 전 일제는 조선 전통 재래시장과 달리 일정 설치 조건을 갖춘 공설시장을 만들어 일본인에게 운영권을 줬다. 부평동시장에선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위한 물품이 거래됐다. 지금 국제시장 자리는 태평양전쟁 때 연합군의 공세에 대비하여 일제가 주택가와 상가를 강제 철거한 공터였다. 해방 이후 일본에 강제징용됐다가 돌아온 동포, 한국전쟁 피난민 등이 이 자리에 흘러들어오면서 국제시장이 형성됐다.

1945년 일본인들이 철수하면서 이들이 비축했던 전시 통제 물자와 미군 물자도 국제시장 일대로 흘러들어갔다. 미군 부대에서 나온 깡통 식품 등이 많다는 뜻에서 부평동시장은 ‘깡통 시장’, 물건 종류가 많고 규모가 큰 국제시장은 ‘도떼기 시장’으로도 불렸다. 지금도 국제시장과 부평동시장에는 일제나 미제 물건을 파는 가게나 중고 옷가게들이 많다. 과거 우유가 귀하던 시절, 분말 형태로 만들어 먹던 우유 가루가 지금도 국제시장에서 유통된다.

판매 품목별로 1~6공구로 나뉜 국제시장은 1만2095㎡ 연면적에 1489개의 점포가 입점해 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잦은 대형 화재가 상인들의 재산과 눈물을 훔쳐간 곳도 국제시장이다. 1953년, 56년, 60년, 68년, 92년에 화재가 났다. 1953년 1월30일 발생한 화재에는 가게 1000여곳이 불탔고, 2만20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부평동시장과 이어진 국제시장
해방 뒤엔 징용서 돌아온 이들이,
전쟁 땐 피난민들이 유입돼 형성
‘도떼기시장’으로도 불리는 곳
미제물건과 중고옷가게 성업중

국제시장 속한 부산 중구는
근현대사 빼곡히 담긴 공간
동양척식주식회사서 변신한
부산미문화원은 방화사건 겪고
보수동 책방골목선 ‘부림사건’이…

국제시장과 부평동시장에는 길거리 음식이 많다. 부평동시장 좌판에서 팥죽을 파는 할머니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 팥죽을 서서 먹고 있다. 사진 박유리 기자

천막교실과 책이 몰렸던 보수동 골목

사실 국제시장이 자리한 부산 중구는 한국전쟁부터 시작해 군사정권 당시 일어난 민주화운동까지 근현대사를 빼곡히 담은 공간이다. 피난민들이 판자촌을 오르던 40계단, 1980년대 부산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던 가톨릭센터도 중구에 있다. 대청동에 자리한 부산근대역사관은 일제강점기 때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으로, 해방 이후 미국 해외공보처의 부산문화원으로 쓰인 건물이다. 1982년 고신대 등 부산 지역 대학생들이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및 독재정권 비호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물으며 불을 지른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발생한 현장이기도 하다. 이 건물은 2003년 부산근대역사관으로 탈바꿈했다.

국제시장과 부평동시장을 구경한 다음 큰길을 건너면 한국전쟁 당시 형성된 보수동 헌책방 골목이 나타난다. 1950년 이북에서 피난온 손정린 부부가 보수동 사거리 골목 안 목조건물 처마 밑에서 박스를 깔고 미군 부대에서 나온 헌 잡지, 만화, 고물상으로부터 모은 갖가지 헌책으로 노점을 연 게 보수동 책방골목의 시작이었다. 전쟁 중 보수동 뒷산에 천막 교실이 열렸고 학생들은 보수동 골목을 지나 학교에 갔다. 1950년대 부산에는 전시 연합 대학이 생겼고 대학생들이 보던 책들이 보수동에 쌓였다. 갖가지 동인지, 잡지들도 ‘전시판’이라는 이름으로 부산에서 만들어졌다.

1960~70년대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는 70여개의 점포가 밀집했다. 가난한 학생, 지식인들이 책을 내다 팔고 헌책을 싸게 사들이던 이곳은 군사정권 시절 부산 민주화운동의 모태가 됐다. 보수동에 자리한 중부교회는 부산 민주화운동의 집결지였다. 중부교회 김형기 전도사의 제안으로 1978년 만들어진 양서협동조합은 누구든 출자금 1000원과 가입금 1000원만 내면 가입할 수 있었다. 군사정권은 그러나 1979년 11월19일 독서모임을 하는 양서협동조합 회원들을 부산, 마산에서 벌어진 유신반대 시위 사건인 ‘부마사태의 배후’로 몰아 강제 해산했으며 불온서적이라는 이유로 책을 압수했다. 당시 조합원 가운데 300여명이 수사 대상에 올라 조사를 받았고, 이 가운데 일부가 1981년 대표적 공안 사건인 ‘부림사건’으로 구속됐다. 2013년 개봉된 영화 <변호인>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영장도 없이 감금돼 고문당한 대학생의 변호를 맡은 사건이 부림사건이다. 부산시는 2010년 ‘보수동 책방골목 문화관’을 세우고 장소의 역사적 의미를 담은 전시회를 열고 있다. 지난달 30일, 영화 개봉을 기념하는 펼침막을 내걸고 북적이는 국제시장과 달리 보수동 책방골목 문화관 상설 전시회를 찾은 관람객은 한 명뿐이었다.

보수동 책방골목 문화관 근처에 있는 ‘우리글방’의 문을 열었다. 오래된 나무 테이블과 의자들, 실내 벽면을 채운 엘피(LP) 판들이 진열된 우리글방은 헌책방인 동시에 카페다. 가게 점원은 차를 만드느라 한적하게 생강을 썰며 말했다. “영화 <국제시장> 덕분에 보수동 책방골목에 사람들이 늘거나 하진 않아요. 원래 이곳을 찾던 손님들이 오세요.”

돌아와요 부산항에

<국제시장> 영화 속 덕수는 베트남전쟁에 기술자로 파병된다.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1964~1973년 베트남전 파병을 통해 미국에 적극 협력하면서 경제개발의 기초를 닦는다. 베트남전에서 미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폭격과 500여명의 민간인을 숨지게 한 ‘밀라이 학살’ 등으로 세계적인 비난 여론에 휩싸였다. 매해 5만여명의 군인을 파병한 한국군도 ‘민간인 학살’의 오명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부산항은 한국군의 베트남군 파병과 철수가 이뤄진 곳이다. 가수 조용필이 1972년 발표한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애절함도 이런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역대 대통령들은 국빈으로 베트남을 방문할 때 호찌민 전 국가주석의 묘가 있는 하노이의 바딘광장을 찾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호찌민 묘에 헌화하고 2001년 쩐득르엉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 때는 “베트남 국민에게 본의 아니게 고통을 준 데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2004년 호찌민 묘를 헌화, 참배하고 “우리 국민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고 미안함을 드러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9월9일 헌화만 하고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영화 <국제시장>은 한국 근현대사의 명과 암을 오롯이 담아내지 않았다. 그 시대의 ‘덕수들’이 ‘기억하는 과거’를 그렸다. 영화 속 덕수와 아내 영자가 ‘기억하는 과거’는 가난을 헤쳐나간 시간들이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통조림, 양담배 같은 양키 물건이나 미제 화장품을 팔던 아줌마들, 베트남전에 파병된 군인, 파독 광부, 국기에 대한 배례를 하던 국민. 이런 풍경들이 1950~70년대 사회상이었다. 베트남 파병이나 군사정권의 정당성보다 오늘 먹고사는 것, 내 가족을 굶기지 않는 것이 이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였다. 독재나 인권 침해 등 시대의 아픔은 이들에게 기억되지 않았다. 잘못된 역사를 평가하고 반성 없는 앞선 세대를 비판할 수 있지만 그 속에서 살아갔던 개개인의 삶을 판단할 순 없다. 영화는 그 시절 덕수와 영자들이 기억하는 분절된 역사를 가족이라는 소재로 그렸다. 오늘날의 덕수와 영자들은 주인공이 마지막 장면에서 아버지 영정을 부여잡고 “진짜 힘들었습니다”라며 우는 장면을 보며 자신들을 위로하고 추억한다.

감독은 자기 취향과 관점에 따라 영화를 만들고, 관객은 선택을 해 영화를 본다. 관람한 뒤 좋고 나쁨에 대한 입소문을 내는 것도 관객의 몫이다. 영화평론가는 자기 시각에 따라 공개적으로 평가를 한다. <국제시장>을 언급하며 애국심을 강조하는 대통령이나 정치인을 제외하면 감독, 관객, 평론가 다들 자기 자리에서 할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