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간관계/인물열전

성완종은 누구인가…10원짜리 몇 장 들고 상경해 기업 일궈(조선일보 2015.04.09 17:54)

성완종은 누구인가…10원짜리 몇 장 들고 상경해 기업 일궈

 

자원외교 비리 의혹에 연루돼 사전 구속영장이 청구된 성완종(64) 전 경남기업 회장이 9일 북한산 형제봉 매표소에서 300여m 떨어진 지점에서 나무에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기자는 성 전 회장이 국회에 입성하기 전인 2010년 12월 그의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했다. 당시 그는 자신이 걸어왔던, 결코 평탄치 않았던 인생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냈다. 초등학교 중퇴 학력이 전부였던 그는 자수성가해 한 그룹 회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가난은 나의 재산”이라며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했었다.

그랬던 그가 230억원대의 회사 자금을 횡령하고, 460여억원의 정부 융자금을 사기 대출 받았으며, 이 대출 등을 위해 9000억원대의 분식회계를 한 혐의로 검찰에 의해 사전 구속영장이 청구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자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속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성 전 회장은 “자신은 MB맨이 아니라 MB 정부의 피해자”라고 주장했었다. 결국 그는 9일 오후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결백하다면 재판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렸으면 될 것을….’ 그가 유죄인지 무죄인지 기자는 알지 못한다. 다만 온갖 역경을 헤치고 우뚝 일어섰던 그가 왜 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안타깝고 또 궁금했다. 과거 인터뷰 기록을 찾아 성 전 회장의 삶의 궤적을 되짚어봤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

◇10원짜리 몇 장 들고 상경
1963년 12월 눈발이 흩날리던 밤. 고향 충남 서산을 나와 무작정 기차를 타고 엄마를 찾아 서울 영등포역에 도착한 12세 소년은 추위와 배고픔에 떨었다. 가진 것이라곤 외삼촌이 쥐어준 10원짜리 지폐 몇 장과 아빠에게 버림받은 엄마가 식모살이를 한다는 집 주소뿐이었다.

그때 얼굴도 본 적 없는 삼륜 용달차 운전기사가 떨고 있던 소년을 데려가 기사들이 머무는 좁은 방 한구석을 내줬다. 기사는 다음날 아침 따끈한 국밥을 사줬고, 어머니가 있는 집에 데려다 줬다. 소년이 기억하는 것은 그 사내의 성이 박씨라는 것과 얼굴이 얽었다는 것뿐이었다. 매출 2조원의 건설회사인 경남기업을 일궜던 성완종 전 회장의 52년 전 모습이다.

그는 서울 영등포의 교회에 머물며 신문팔이와 약국 심부름 등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억척스럽게 돈을 모았다. 밤에는 교회 야학에 다니며 초등학교 중퇴의 한을 달랬다. 성 전 회장은 "언젠가 나도 낯선 이들에게서 받은 도움을 갚겠다고 다짐하며 돈을 벌었다"고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도 "네가 어려운 시절 받았던 도움을 잊지 말고 꼭 다른 사람을 도와라"고 자주 당부했다고 한다.

◇장학재단 설립
성 전 회장은 7년 뒤인 1970년 어머니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당시 돈 1000원으로 화물운송업을 시작했다. 조금씩 돈이 모였고, 20대 중반이던 1970년대엔 서산토건 지분을 인수해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회사가 성장하고 안정되자 그는 1991년 12월 15일 사재(私財) 31억원을 출연해 서산장학재단을 설립했다. 서산장학재단은 수백억원의 기금을 조성해 장학과 학술·교육사업, 문화 및 사회복지사업을 벌여왔다. 그는 국내 장학사업을 넘어 해외 장학사업까지 나눔의 영역을 넓혔다. 2007년부터 6·25전쟁 참전국인 에티오피아 대학생 120명에게 장학금을 수여했고, 러시아 사할린 교포신문인 '새고려신문사'에도 매년 1만달러(약 1150만원)를 지원했다.

성 전 회장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디든 달려갔다. 2000년 12월 31일 충남 안면도에서 굴 따러 나간 어선이 전복돼 어민 9명이 숨지자, 그날 밤 눈길을 뚫고 달려가 희생자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가 위로했다.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로 고아가 된 엄수미양 3남매 소식을 들었을 땐 대구로 가 3남매에게 대학까지의 학자금을 약속했다. 2007년 12월 태안 기름 유출사고가 일어났을 때도 장학재단 회원들과 달려가 1주일간 기름 제거작업을 했고, 조선일보사를 통해 10억원의 성금을 보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식들에게는 국민주택 규모 아파트 한 채씩만 주고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겁니다. 저보다 어려운 사람이 많았을 텐데도 전 늘 도움을 받았습니다. 늘 선택받았고,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죠. 이젠 제가 받았던 도움을 사회에 돌려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국회 입성과 몰락
성 전 회장은 2012년 자유선진당 소속으로 충남 서산·태안 지역구에서 19대 국회의원에 출마했다. 선거 초반 열세 전망을 뒤집고 42.6%를 득표해 2위인 새누리당 유상곤 후보를 1만2000여표 차이로 따돌리고 당선됐다. 그 뒤 자유선진당이 새누리당과 합당하면서 새누리당 소속이 됐다.

그는 정치적 보폭을 넓히려던 중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하며 정치 인생을 마감했다. 총선 전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던 서산장학재단을 통해 지역주민을 지원한 것이 문제가 됐고, 결국 지난해 6월 대법원에서 벌금 500만원이 확정돼 의원직을 상실했다.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 성완종은 전쟁 통에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창녕 성씨 종갓집 중 맏이로서, 가산이 기울자 일찍부터 지난한 삶을 스스로 열어가야 했다. 초등학교 졸업식을 앞두고 어머니를 찾아 서울로 올라간 그는 낮에는 약국 심부름을 하고 밤에는 교회 부설학교에서 공부하며 억척 인생을 꾸려간다. 7년 가까운 서울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날 동생들과 함께 했던 저녁을 지금도 평생 가장 맛있었던 식사로 기억하고 있다. 단돈 1천 원을 밑천으로 사업이라는 거친 바다에 뛰어든 것도 이 무렵이다. 끈질긴 노력과 세상의 흐름을 읽는 안목 그리고 성실하게 가꾼 인맥을 바탕으로 1977년 건설업계에 뛰어들어, 현재 연매출 2조 원을 넘나드는 대아그룹-경남기업의 오너이자 최고경영자가 됐다.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미국 퍼시픽웨스턴대학에 등록, 5년만인 1991년 경영학사 학위를 취득한 데 이어, 한양대 경영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목원대학교에서 경영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어려웠던 시절에 받았던 도움을 사회에 되돌려주라”고 당부하던 모친의 유훈을 실천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훨씬 전부터 장학재단을 통해 200억 원 이상의 기금을 조성하여 7천여 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왔다.

남의 집 헛간에서 자고, 신문을 돌리며 휴지를 모아 팔고, 등짐을 져서 생계를 꾸렸지만, 그는 국민주택 규모의 집 한 채씩만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공익법인에 3백억 원을 출연하겠다는 다부진 꿈을 가진 기업인이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목차

희망의 불씨를 찾아

제1부 새벽어둠이 걷히면 해가 솟는다

1장 하늘이 내게 준 선물, 가난
낯선 우리 집
아버지의 선택
어머니, 나의 어머니
눈물 젖은 밥

2장 희망으로 가는 티켓
길 없는 길
겹쳐오는 행운
마침내 고향으로
추위를 견딘 매화는 향이 맑으니

3장 광활한 세상 속으로
사업이란 거친 바다
문제 안에서 해결책을 찾다
정도는 신뢰의 기본
아들 같은 보스

제2부 어제보다 나은 오늘

4장 가장 곧은길이 가장 빠른 길
나가자, 중앙무대로
‘당신은 된 사람 같소’
더 큰 꿈을 향해
세상의 반, 여성의 힘

5장 200만원으로 일군 건설 신화
또 한 번의 도약
아이디어로 승부하다
기업이란 사람이 하는 것
현재라는 소중한 선물

6장 시작을 잊지 않는 기업인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진다
첫 마음 그대로
사람이 재산
더불어 나누는 삶

* 따뜻함이 차가움을 이기듯이

[예스24 제공]

출판사 서평

금세 맹수라도 나올 것 같은 충청도 서산의 험준한 산골. 새벽어둠 속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는 한 아이가 있었다. 돈을 벌려고 객지로 떠나는 어머니를 쫓아가다 호랑이고개에서 종적을 놓쳐버린 아이였다. 그것은 그러나 새어머니의 모진 학대와 아버지의 냉대에 비하면 그리 큰 설움도 아니었다.
초등학교 졸업을 코앞에 둔 그 이듬해 겨울. 세 동생들을 건사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돈을 버는 것뿐이라고 생각한 아이는 어머니를 찾아 무작정 상경한다. 그 아이가 영등포 행 완행열차에 앉아 밤하늘을 보며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을 때, 안주머니 속에는 외삼촌이 준 10원짜리 지폐 몇 장이 고이 접혀 있었다. 청년이 된 뒤 고향에 돌아와 화물 중개업으로 사업이라는 험난한 세계에 투신할 때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것이라고는 단돈 1천 원이 전부였다. 그리고 30여 년 뒤, 그가 이끌고 있는 기업체들의 매출을 합치면 한 해 2조 원이 넘는다.
이 책은 경남기업을 비롯하여 11개 계열사를 거느린 대아그룹의 회장 성완종이 어린 몸으로 나뭇짐을 지고 한겨울에 남의 집 헛간을 전전하던 기억부터, 서울에 올라와 신문을 돌리고 약국 심부름을 하며 한푼 두푼 돈을 모아가는 이야기, 밑바닥 인생의 경험을 살려 기업을 일구어 가는 과정들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 자서전이다.
우연한 기회에 건설업계에 입문한 뒤, 몸에 밴 근면과 성실, 그리고 세상의 흐름을 읽는 냉철한 안목으로 무섭게 커나가는 성공 스토리지만, 그 자신이 진솔하게 들려주고 싶어 하는 것은 오히려 불우한 시절을 극복해가는 강인한 의지의 힘이다. 이것이 다른 기업인의 자서전과 궤를 달리하는 『새벽빛』의 특징이다.
“… 나는 인생이라는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동안 우리에게 크나큰 용기를 주는 희망의 힘과 신념의 가능성을 온몸으로 실증하고 싶다. 밤하늘이 어두울수록 희망의 별은 더욱 뚜렷한 빛을 발하고, 파도가 거칠수록 신념의 돛대는 더욱 강건해진다는 사실을 나는 기록으로 보여주고 싶다.”

그의 말대로, 이 책은 전율이 느껴질 만큼 솔직하다. 몸져누운 어머니와 철부지 동생들을 위해 엄동설한에 쌀을 얻으러 자루를 둘러메고 나가는 것이나, 경험 부족으로 공사를 잘못하여 감독관과 타협을 시도한 사실, 모함을 받고 검찰에서 조사를 받은 사실들은 여느 기업인 같으면 숨기고 싶은 혼자만의 과거였을 것이다.
성년이 된 뒤, 계속하여 어머니를 괴롭히는 새어머니의 목에 시퍼렇게 벼린 칼을 들이댔다가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본 순간 자신이 기거하던 교회의 십자가를 연상하며 처음으로 진지한 신앙으로 빠져드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자못 따스한 인간미가 느껴지는 대목도 곳곳에 있다. 새어머니와 아버지의 매질에 반항하여 집을 뛰쳐나간 그에게 동생들이 주먹밥을 뭉쳐다 주는 모습은, 이제는 부유함과 안락함 속에서 점차 스러져가는 우애를 보는 것 같아 눈물겹다.
아직도 “가난은 나의 스승, 근면은 나의 재산”이라고 말하는 기업인 성완종. 그는 자신이 거둔 성공의 토대를 행운이라고 여긴다. 역경에 부닥칠 때마다 그의 앞에는 알맞은 상황에서 알맞은 사람이 등장하여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그러나 역경을 순경으로, 불행을 행운으로 만든 것은 결국 그의 이러한 마음가짐과 생활태도였을 것이다.
그가 어린 시절의 간난신고에 감사하는 것도 그런 맥락과 일치한다. “돈 벌러 집을 나간 어머니ㆍ사정없이 매타작을 해댄 아버지ㆍ시도 때도 없이 괴롭히던 새어머니 ― 돌이켜 보면 이분들은…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은인들이었다. 평범한 집안에서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다면 다른 모습의 내가 있었을지언정, 대아그룹이나 경남기업의 회장 자리는 내 것이 아니었을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는 “어려웠던 시절에 받았던 도움을 사회에 되돌려 주라”는 어머니의 유훈을 실천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훨씬 전부터 장학재단을 만들어 200억 원 이상의 기금으로 7천여 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해왔다.
“성완종 회장은 가장 힘든 좌절의 순간, 포기 대신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고, 미지에 대한 도전을 선택한 기업인이다. 주어진 한계를 뛰어 넘어, 모든 것이 전무한 상태에서 오늘의 성공을 이끌어낸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한한 희망과 감동을 안겨 준다”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추천사가 마음에 와 닿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반 총장은 성완종 회장이 이끄는 충청포럼의 운영위원이었다는 후문이다.

[예스24 제공]

책속으로

미국을 통째로 사버릴 듯이 엔화가 맹위를 떨치던 일본 최대의 호황기 ― 이른바 ‘주식회사 일본’을 리드한 국제적 기업인이자 ‘내셔널’ 브랜드로 세계 전기전자 업계를 재편한 마쓰시다 고노스케. 94세까지 천수를 누리는 동안 570개 기업에 종업원 13만 명을 거느린 마쓰시다그룹의 창업자다. 그러나 어릴 때만해도 그는 가정형편으로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자전거포 점원이 돼, 밤이면 어머니가 그리워 눈물을 흘리던 울보였다.
1965년. 고희가 지난 뒤 총수 자리에 오르자, 한 직원이 이렇게 묻는다.
“회장님은 어떻게 해서 그처럼 엄청난 성공을 거두셨습니까?”
“나는 하늘로부터 세 가지 큰 은혜를 입고 태어났네. 가난한 것ㆍ허약한 것ㆍ못 배운 것이 그것일세.”
이어진 그분의 설명은 대강 이런 내용이다.
“가난 속에서 나는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서는 잘살 수 없다는 진리를 터득했네. 허약하게 태어난 덕에 일찍부터 몸을 아끼며 건강에 힘썼고. 초등학교도 졸업을 못했기 때문에 늘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는 데 주저하지 않았지.” --- p.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