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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 미/여행정보

서촌마을 숨겨진 한옥서 만난 진하고 씁쓸한 맛 (조선일보 2015.03.22 06:00)

서촌마을 숨겨진 한옥서 만난 진하고 씁쓸한 맛

[크래프트 비어펍을 찾아서] 서울 통의동 합스카치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회사 인근에 자신만의 공간이 있기를 꿈꾼다. 번잡하지 않은 곳에 비밀스럽게 자리 잡은 펍(pub·서양식 술집)에서 일과를 마치고 시원하게 맥주 한 잔을 들이켜는 상상은 하루를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한다.

고층 빌딩이 즐비한 광화문에서 10여분만 걸어가면 이런 꿈을 현실로 만들어 줄 크래프트 비어펍이 나타난다. 경복궁 옆 서촌, 높은 건물 한 채 없는 이 지역 골목을 몇 차례 헤매다 보면 어느 한옥 대문에 걸린 문양이 하나 보인다. 작은 사각형 5개가 그려진 조그만 표지판뿐, 간판도 글귀도 없다.

서촌마을 숨겨진 한옥서 만난 진하고 씁쓸한 맛

▲광화문 인근 크래프트 맥주펍 ‘합스카치’는 골목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어 좀처럼 찾기기 쉽지 않다. 이 곳은 통인동의 한옥을 서양식으로 개조해 만들어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진한 기자

‘여긴 뭐 하는 곳이지’ 싶어 문을 열고 들어가 봐도 안뜰에는 테이블만 몇 개 놓여 있다. 안채로 들어서야 미국식 바에서나 볼 법한 푹신한 소파와 긴 바 테이블, 술병이 잔뜩 늘어선 찬장이 눈에 띈다. 그제야 ‘아, 이곳이 술을 파는 곳이구나’ 눈치 챌 수 있다. 아는 사람들만 찾아올 수 있는 ‘광화문 아지트’로 삼기에 꼭 맞다. 서울 서촌마을 통의동 모퉁이에 있는 이곳의 이름은 ‘합스카치(Hopscotch)’다.

“누구나 다 찾아오는 펍은 많으니까, 조금 한적하고 비밀스러운 곳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숨바꼭질하는 느낌으로요.”

12일 만난 도정한(40) 합스카치 대표가 말했다. 합스카치는 맥주의 재료 ‘홉(hop)’에 스카치위스키를 뜻하는 ‘스카치(Scotch)’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름 그대로 이곳에선 직접 만든 크래프트 맥주와 스카치위스키가 중심이다. 합스카치는 영어로 ‘사방치기’라는 놀이를 뜻하기도 한다. 한옥 입구에 걸린 정체불명의 사각형 문양은 사방치기판을 재배열해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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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정한 합스카치 대표는 경기도 남양주에 맥주 양조장을 직접 운영하고 있다. 이날 인터뷰도 양조를 마친 직후 이뤄졌다. 도정한 대표가 입고 있는 옷이 ‘더 핸드 앤 몰트 브루잉 컴퍼니(The Hand and Malt Brewing Company)’의 공식 복장이다. /이진한 기자

한옥과 크래프트 맥주라는 좀처럼 어울리기 어려운 단어들은 이곳에서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익숙한 한옥에서 색다른 크래프트 맥주를 마시는 경험은 편안함과 두근거림을 동시에 선사한다. 도정한 대표가 직접 만든 크래프트 맥주와 싱글몰트 위스키가 메뉴에 즐비하다.

도정한 대표는 맛있는 맥주를 만들기 위해 지난해 9월 경기도 남양주에 맥주 양조장 ‘더 핸드 앤 몰트 브루잉 컴퍼니(The Hand and Malt Brewing Company)’를 설립했다.

그는 “그동안 다른 소규모 양조장에 위탁해서 만든 크래프트 맥주를 팔곤 했는데, 항상 같은 품질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며 “언제 마셔도 똑같은 맥주를 만들기 위해 그동안 모았던 돈을 전부 털었다”고 말했다.

도정한 대표가 원래 맥주업계에 몸을 담았던 사람은 아니다. 그는 2013년까지만 해도 한국마이크로소프트(MS)에서 오피스(Office) 제품군 소비자 부문을 총괄하는 임원으로 일했다. 37살부터 임원을 시작했으니, 자리를 지키면 승승장구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맛있는 맥주’에 대한 욕구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터졌다. 도정한 대표는 “전직 이코노미스트지 기자 다니엘 튜더씨가 ‘한국 맥주는 대동강 맥주보다 맛이 없다’고 말하는 걸 듣는 순간 ‘어디 한 번 두고 보자’ 싶은 생각이 들었다”며 “맥주는 오래전부터 좋아했지만, 스스로 MS 임원 자리를 박차고 나와 펍을 운영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회사에 ‘퇴사하겠다’고 통보한 다음 합스카치를 낼 곳을 준비하던 때, 명함이 MS에서 쓰던 것밖에 없었어요. 부동산을 돌아 다니면서 그 명함을 내밀었더니 만나는 사람마다 ‘그 좋은 자리를 왜 포기하고 나오느냐’고 물었지요. 심지어 미쳤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서촌마을 숨겨진 한옥서 만난 진하고 씁쓸한 맛

▲합스카치 광화문의 내부는 전형적인 서양식 ‘개스트로 펍’ 형태로 꾸며졌다. 그러나 외부는 한옥 형태를 그대로 유지했다. 서까래를 살린 건축 구조와 천정에 창호를 이용한 자연채광이 돋보인다. /이진한 기자

도정한 대표는 ‘제일 좋은 맥주는 제일 좋은 재료를 가지고, 제일 뛰어난 사람이 만들 때 나온다’고 믿었다. 주재료인 맥아는 영국산 마리스 오터(Maris Otter)를 독점계약을 맺고 들여온다. 마리스 오터는 독특한 견과류 풍미를 가지고 있어 맥주업계에서 고급 맥아로 취급된다. 그러나 생산량이 많지 않아 가격은 일반 맥아보다 최소 30% 이상 비싸다. 양조 설비는 20년 넘게 전 세계 양조장 설비를 설계해온 필립 케흠(Phillip Kelm)이 맡았다.

합스카치에서 내놓는 ‘오리지널탭(자신만의 레시피로 만든 맥주)’은 브루마스터인 브랜든 페너(Brandon Fenner)와 도정한 대표가 책임진다. 페너는 미국 마우이 브루잉과 버몬트 매직햇 브루어리에서 양조 총 책임자를 맡았던 맥주 전문가다.

도정한 대표는 “인맥을 총동원해 미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맥주를 만든 전문가를 초빙했다”며 “페너는 지금도 남양주 양조장 숙소에서 먹고 자면서 더 핸드 앤 몰트 브루잉 컴퍼니만의 맥주 만들기에 전념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합스카치에선 도정한 대표가 자체 레시피로 만든 맥주를 총 5개 정도 맛볼 수 있다. 부드러운 밀 맥주는 ‘저먼 위트’와 ‘벨지엄 위트’가 있다. 진하고 씁쓸한 느낌을 선호한다면 ‘엑스트라 스페셜 에일’과 ‘모카 스타우트’, ‘라이 페일 에일’을 찾으면 된다.

도정한 대표는 “개인적으로 엑스트라 스페셜 에일을 제일 좋아한다”며 “‘매일 마시고 싶은 맥주, 매일 생각나는 맥주를 만들겠다’는 각오로 만든 맥주”라고 말했다. 다만 모든 맥주가 종류별로 항상 준비돼 있진 않다. 이날은 매장에 라이 페일 에일만 준비돼 있었다.

서촌마을 숨겨진 한옥서 만난 진하고 씁쓸한 맛

▲ 도정한 대표가 합스카치에서 판매되는 맥주를 들고 자세를 취했다. /이진한 기자

이 곳에선 맥주에 맞춘 일류 주방장의 요리도 맛볼 수 있다. 합스카치 광화문의 공동 대표이자 주방을 책임지는 데이비드 조 주방장은 현대적인 느낌의 미국 음식을 선보인다. 구운 쇠고기 삼각살을 멕시코 스타일 살사 소스와 먹는 ‘합 스테이크’나 오리기름에 두 번 튀긴 감자튀김 등 신선한 메뉴가 입맛을 돋운다.

데이비드 조 주방장은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일대에서 ‘프레시 퀴진(fresh cuisine)’으로 이름을 알린 유명 요리사다. 도정한 대표와 데이비드 조 주방장은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같은 고등학교에 다닌 친구 사이다.

합스카치에는 다양한 병맥주나 싱글몰트 위스키도 수십 여 종 준비돼 있다. 리스트가 꽤 두꺼워 한참을 읽어야 할 정도다. 도정한 대표에게 이 중 가장 맛있는 맥주를 꼽아 달라고 하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답이 돌아왔다.

“당연히 우리 맥주지요. 남양주에서 제가 만든 맥주가 가장 맛있습니다. 품질(quality)과 항상성(consistency)을 동시에 유지하는 게 가장 어렵지만, 우리는 그걸 하고 있어요. 만약 오늘 손님이 와서 어제 마신 맥주를 주문하면 저는 두 맥주 맛이 똑같다고 보장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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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스카치 광화문은 토속촌 건너편 섬마을 횟집 주차장 골목으로 들어가면 나온다. 형설출판사 건물 앞에서 좌회전해 골목을 들어오면 된다. 전화는 02-722-0145, 주소는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27이다. 일요일은 쉰다. /유진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