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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전략] 협력 지나치면 담합 … 내부고발이 확실한 파괴 무기 (중앙일보 2015년02월15일(일) 오전 2:57)

[세상을 바꾼 전략] 협력 지나치면 담합 … 내부고발이 확실한 파괴 무기

⑪ 협력과 담합 사이

 

2014년 2월 15일 소치 겨울올림픽 쇼트트랙 1000m 결선에서 1위로 들어온 뒤 러시아 국기를 두르고 있는 빅토르 안(안현수) 선수. 러시아로 귀화한 안 선수의 활약 후 빙상경기연맹은 대표선수 선발과 관련해 국민의 지탄을 받았다. 국가적 기준에서는 부당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중앙포토]

 

인간은 협력에 목말라한다. 협력하면 서로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해 답답해한다. 지구온난화도 세계 각국이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하면 해결될 문제다.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인 2005년 2월 16일 지구온난화라는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교토의정서가 발효됐다. 세계 대부분 국가들이 지구온난화 방지에 공감하고 합의했다는 점에서 교토의정서는 세상을 바꿨다는 평가도 있다. 과연 지구온난화 문제가 해결됐을까.

교토의정서가 효과 못 본 이유
설명의 편의상 이 세상에 두 나라만 있고 온실가스 배출을 계속할지, 아니면 감축할지를 각자 결정한다고 하자.

두 나라 모두 자국 경제 침체 대신 성장을 원하고 지구환경 또한 훼손되지 않기를 원한다. 두 국가의 선택에 따라 네 가지 결과가 나오는데, 그 결과에 대해 각국이 좋아하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A국: 중간A > 양호 > 훼손 > 중간B
B국: 중간B > 양호 > 훼손 > 중간A

B국이 기존 배출량을 유지할 때 A국도 유지하면 지구환경이 훼손되고, 이와 반대로 A국만 감축하면 지구환경은 별로 좋아지지 않으면서 A국 경제는 침체된다. 즉 B국이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하지 않을 때는 A국도 감축하지 않는 것이 자국에 나은 선택이다.

다음 B국이 배출량을 감축할 때를 살펴보자. A국도 감축하면 지구환경이 양호해지지만 A국이 감축하지 않는다면 성장이라는 자국에 최선인 결과를 얻게 된다. 즉 B국이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하더라도 A국은 감축하지 않는 것이 자국에 나은 선택이다.

B국이 어떤 선택을 하든 A국은 배출량을 감축하지 않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한 전략이다. B국도 동일한 전략적 계산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실제 결과는 쌍방이 배출량을 줄이지 않아 지구환경은 훼손된다. 양국 모두 훼손된 지구환경보다 양호한 지구환경을 더 선호함에도 말이다.

이는 각자 자기 이익에 맞게 행동했지만 모두에게 손해인 결과다. 그래서 이를 딜레마로 부른다. 죄수 딜레마 게임이 그런 딜레마의 전형적 스토리다. 노벨 수상자를 포함해 수많은 연구자들이 수십 년 동안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연구해왔다.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먼저 협력한 후 ‘눈에는 눈, 이에는 이(tit-for-tat)’ 혹은 보상·보복을 하는 전략이 상호 협력을 유도한다는 게 밝혀졌다. 예컨대 A국은 일단 먼저 감축하되 그 이후엔 B국의 선택 그대로 따르는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그렇다면 B국은 자신이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하면 A와 B 모두가 감축해 양호한 지구환경이 되고, 자신이 감축하지 않으면 A와 B 모두의 비협력으로 지구환경이 훼손된다는 걸 알게 된다. 쌍방의 비협력에 의한 ‘훼손’보다 상호 협력에 의한 ‘양호’를 더 선호하는 B국이 온실가스 배출 감축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전략적 사고가 지구온난화 방지에 기여한다.

1997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기후변화협약 3차 당사국총회. 이곳에서 합의된 교토의정서는 2005년 2월 16일 발효됐다. [중앙포토]
교토의정서 발효 후 지난 10년을 돌이켜 봤을 때 지구온난화 방지의 실제 성과는 미미하다. 교토의정서는 강제적 의무가 없고 미사여구로 가득한 문서라 많은 국가가 동의한 것뿐이다. 말로는 어느 나라나 지구온난화 방지를 강조한다. 문제는 말뿐이고 실천이 별로 없다는 데 있다. 교토의정서는 상호 관계가 지속되도록 만들지도 못했고 또 상대방 행동에 따라 보상하거나 보복할 수 있게 만들지도 못했기 때문에 상호 협력이라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협력을 구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개인주의를 전제로 하는 미국과 유럽 사회의 오래된 문제의식이었다면, 동아시아에서는 거꾸로 왜 특정 집단의 협력(담합)이 지속되고 또 어떻게 담합을 깰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중요한 화두다. 사회에 나쁜 범죄를 저질렀지만 서로 협력(공모)해 처벌받지 않는다면 사회적으론 바람직하지 않다. 범죄자가 서로 배반해 적절한 처벌을 받고 그래서 범죄가 덜 발생하도록 만드는 것이 공익이다.

‘의리’ 붙은 최근 유행어 모두 부정적 의미
협력이나 담합은 일회성 접촉에서 잘 이뤄지지 않고 지속적 접촉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의리는 그런 지속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협력이고 말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사회정의가 이 사람 저 사람 차별하지 않는 탈(脫)공간적 협력 가치라면, 집단 의리는 이 사람 저 사람을 차별해 배타적이고 대신에 특정 시기에 국한되지 않는 탈(脫)시간적 협력 가치다. 지속적인 관계에서는 배반보다 의리가 더 보편적인 현상이다.

의리라는 수식어가 붙은 최근의 복합어는 모두 부정적이다. 의리 축구, 의리 야구, 의리 쇼트트랙, 의리 산악회, 의리 인사…. 모두 부정적 어감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발달로 한국 사회가 더 투명해졌고, 집단 의리를 사회정의보다 우선시하는 경향도 약해졌다고 볼 수 있다.

꼭 1년 전인 2014년 2월 15일 소치 겨울올림픽 쇼트트랙 1000m 결선에서 러시아 대표 빅토르 안(안현수)이 금메달을 땄다. 안현수는 500m와 5000m계주에서도 금메달을 러시아에 안겨줬다. 이에 비해 한국 남자대표팀은 노메달이었다. 안현수가 러시아 대표로 한국 선수와 레이스를 펼칠 때 적지 않은 한국인이 안현수를 응원했다. 귀화한 동아시아 선수들을 출신국 사람들이 비난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당시 여론은 안현수가 한국 대표 선발전 시기와 방식을 포함해 불공정한 과정의 피해자라는 것이었다. 이런 여론에 정부도 가세해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슬로건하에 스포츠계 개혁을 추진했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열린 월드컵 쇼트트랙에서 남자대표팀은 과거 실력을 되찾았다.

안현수는 파벌에 의존한 선수가 아니었다. 안현수는 내부 고발성 글을 사이버공간에 올리기도 했다. 안현수 부친도 내부 고발을 여러 차례 시도했다. 소속팀 성남시청 빙상팀이 해체되고 국가대표로 선발되지 못한 안현수는 러시아 귀화를 선택했다. 한국에 계속 있더라도 앞으로 국가대표로 선발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판단한 안현수의 선택이었다. 한국 빙상계를 내부 고발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러시아 귀화는 일종의 내부 고발로 작동했다.

내부 고발자 불이익 줄이는 장치 필요
내부 고발이 배반으로 낙인찍히지 않고 정의로운 행동으로 인정받으려면 수혜자가 아닌 피해자였고 집단의 내부 절차가 부당함을 증빙해야 한다. 소치 올림픽은 결과적으로 3관왕 선수 대신에 노메달 선수들을 한국 대표로 선발한 절차가 부당했음을 증명했다.

의리 체육계 내에서야 병역 특혜 같은 여러 혜택을 고루 나누기 위해 대표 선수를 선발했다고 스스로 정당화하겠지만 이는 국가적 기준에서는 부당한 행위다. 현행 법령은 체육 병역혜택의 근거로 국위 선양을 들고 있는데, 군필자나 미필자를 구분하지 않고 최우수 선수들로 국가 대표를 구성한 후 국위 선양의 성적을 내면 미필자에게 그 특기를 활용해 병역 의무를 수행하게 한다는 취지다. 실력 있는 군필자보다 실력 없는 미필자를 우선 선발하는 행위는 군필자를 차별하는 동시에 국위 선양에도 맞지 않다.

군필자에 대한 차별보다 더 추악한 담합도 있다. 실제로 집단의 비윤리적 가치관과 행동에 동참하지 않아 따돌림을 당할 때도 있다. 왕따를 당하면 심리적 충격을 받는다. 그런데 콤플렉스는 남을 따돌리는 사람들의 것이 더 크다. 혼자서 남을 지배할 수 없으니 나쁜 짓을 해서라도 무리에 기대어 그 콤플렉스를 해결한다.

양심선언과 내부 고발처럼 조직에 대한 배반이 사회적으론 오히려 긍정적인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지속적인 담합 구도에서 이득을 얻는 자가 이탈할 동기는 크지 않다. 대신 담합으로 피해를 본 자의 고발이 훨씬 더 현실적이다. 고발이 외부에 알려질 때 담합에서 오는 혜택 또한 줄기 때문에 그 담합은 대부분 와해된다.

소집단의 이익 때문에 전체 이익이 훼손되지 않게 하려면 내부 고발자를 제도적으로 보호해서 내부 고발의 불이익을 줄여야 한다. 담합 사실을 스스로 신고하면 과징금을 면제해 주는 리니언시, 그리고 사건 규명과 범인 체포에 기여한 공범에게 형량을 감면하거나 기소하지 않는 플리바기닝도 그런 제도다.

지구온난화 방지처럼 모두가 참가하는 것이 좋은 협력도 있고, 또 패거리처럼 다수에게 피해를 줘 와해돼야 할 담합도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죄수 딜레마 상황에서의 상호 협력을 유도하는 전략이고, 내부 고발은 담합을 와해시키는 전략 가운데 하나다.

 

 

[세상을 바꾼 전략] 푸이 내세운 만주국 건설은 일제의 ‘차시환혼’ 책략

(중앙일보 2015년03월01일(일) 오전 2:32)

⑫ 괴뢰정부와 완장 효과

 

1935년 일본을 방문해 일왕 히로히토와 함께 무개차에 탄 푸이(앞줄 오른쪽). [중앙포토]

 

최근 북한 여러 매체가 대한민국 정부 및 당국자를 ‘괴뢰’로 호칭하며 비난하고 있다. 남이 조종하는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를 의미하는 괴뢰는 최근뿐 아니라 분단 70년 내내 남북한관계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다.

괴뢰는 어떤 전략적 의미를 갖고 있을까. 괴뢰정부의 효능은 근대 이후에 더 커졌다. 근대 이전에는 조공관계처럼 다른 나라 내정에 직접 개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굳이 괴뢰정부를 세울 필요가 없었다. 이에 비해 내정불간섭의 근대국가 체제에서는 역설적으로 타국 내정에 간섭하기 위해 괴뢰정부의 필요성을 더 느끼게 된다.

근·현대 국가는 독립국을 전제로 한다. 그렇지만 외세의 관여는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특정 정권이 괴뢰정권인지 아닌지는 늘 논란의 대상이다. 예컨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프랑스 침공 후 수립된 프랑스 비시정권은 괴뢰정부라는 견해가 많지만 온건한 민주정부였다는 평가도 있다.

이에 비해 논란의 여지없이 괴뢰국으로 받아들여지는 나라도 있다. 지금으로부터 꼭 83년 전인 1932년 3월 1일 건국한 만주국이 그렇다. 만주국이 괴뢰국으로 공인되는 이유는 국제연맹의 유권해석 때문이다. 중국 제소로 발족된 국제연맹 리튼위원회는 만주국이 일본의 괴뢰국이며 만주국 지역은 중국의 주권관할 지역이라고 1932년에 보고했다. 이에 일본은 이듬해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滿鐵)가 1934년 3월 1일 푸이의 만주국 황제즉위를 기념하여 발행한 그림엽서. 즉위 연도를 1933년으로 잘못 인쇄하여 1934년으로 정정하는 스티커가 붙어있다. 그만큼 즉위시점이 불명확했다. 만주국-일본-미국 항로와 함께 만주국이 오래전부터 있었던 왕조였음을 강조하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다.

 

Manchuria Daily News 1934년 3월 1일자 만주제국 황제즉위 기념호.
잃을 것 없는 푸이에겐 ‘치명적 유혹’
만주국은 오족협화(五族協和)와 왕도낙토(王道樂土)를 내세웠다. 5족(만주족·한족·몽골족·조선족·일본족) 공생 국가를 표방하여 아시아판 미국을 지향했다. 또 공화정 대신 왕정제, 그 가운데서도 패도가 아닌 왕도를 표방했다. 만주국 경제는 일본 지원으로 급속히 성장했고 인구도 가파르게 증가했다. 관동군 개입을 비판하고 만주국 독립을 주장하던 일본 내 목소리도 있었다. 만주국은 1945년 패망할 때까지 독일과 이탈리아를 포함한 여러 나라로부터 국가승인을 받았다.

그렇지만 만주국이 기치로 내세운 다민족 왕도정치는 전혀 실천되지 못했다. 헌법에 상응하는 조직법은 입법원을 설치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국무원 산하 총무청이 거의 모든 정책을 결정했다. 만주국은 총무장관, 총무청 차장, 관동군 헌병대사령관, 남만주철도 총재, 만주중공업개발 사장 등 이른바 2키(도조 히데키, 호시노 나오키) 3스케(기시 노부스케, 아아키와 요시스케, 마쓰오카 요스케)로 대표되는 일본인이 지배한 병참기지에 불과했다.

만주국으로 이득을 본 일제는 내몽골·난징·베트남 등에도 왕족이나 고위관리를 통해 각각 괴뢰정부를 세웠다. 이에 따라 중국 분열은 심화됐는데, 이는 일제가 의도했던 바다. 당시 국제정세는 특정 국가가 중국을 독점할 수 없도록 중국 침공을 서로 견제하던 분위기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자결과 민주주의라는 국제여론이 힘을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직접 타국을 병합하거나 압박을 가하는 것보다 괴뢰국가나 괴뢰정부를 내세우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

만주국 건설의 배경에는 식민지 한반도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당시 만주는 조선 독립운동의 배후기지로 활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만주국 건설은 일제의 한반도 장악에 도움이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한반도에서 수탈할 때 조선인을 내세웠다. 완장을 차면 완장을 채워준 자의 기대 이상으로 악랄하게 행동하는 자는 어디에나 있게 마련이다. 앞잡이를 세우든 괴뢰국을 세우든 이는 간접 통치에 해당한다. 간접 통치는 직접 통치보다 전략적이다.

종전 후 만주국을 상대로 제기한 여러 소송에서 일본은 만주국이 일본과 관계없는 독립국이라며 책임이 없다고 대응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도 일본은 만주국 황제 푸이가 중국 동북지역 침략을 주도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푸이는 자신도 일제의 피해자라고 항변했다.

푸이가 만주국 황제로 즉위한 날은 지금으로부터 81년 전인 1934년 3월 1일이다. 만주국 황제 즉위는 일제뿐 아니라 1906년생 푸이의 선택이기도 했다. 푸이는 유아 시기 2세(1908)부터 6세(1912)까지 청나라 마지막 황제로 재위했고 복벽사건으로 11세(1917)때도 잠시 재추대됐는데, 재위기간 내내 섭정이 이뤄졌다. 아무 실권도 없던 자신이 왕조 패망의 책임자로 여겨지는 상황에 불만을 가졌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푸이가 만주국 황제 자리를 받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만주국 황제 자리는 만주족과 청 왕조를 부흥시킬 수 있거나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제고시킬 수 있다는 측면에서 더 나은 대안이었다. 만주국 황제로 취임하더라도 더 나빠질 것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차도살인(借刀殺人)은 남의 칼을 빌려 다른 사람을 죽인다는 뜻이고, 차시환혼(借尸還魂)은 남의 시신을 빌려 다른 혼을 불러온다는 뜻이다. 칼(刀)을 빌린 자나 칼을 빌려준 자 모두 혜택을 보는 경우도 있고, 칼을 빌려준 자는 다치고 자기 칼 대신 남의 칼을 빌린 자만 혜택을 보는 경우도 있다. 일제가 푸이에게서 빌리고자 한 것은 칼이 아니라 정통성이었다. 푸이는 1924년까지 청나라 황제 칭호를 유지했는데, 일제는 푸이라는 청왕조의 시신(尸)을 빌려 동북부 중국을 지배하려 했다.

시신이나 칼을 빌려준 자가 적의 괴뢰로 간주되면 시신이나 칼의 효능은 급격히 떨어진다. 중국에서는 만주국을 가짜 만주라는 뜻의 위(僞)만주국 혹은 줄여서 위만으로 부른다. 만주국이 일제 괴뢰국으로 지칭되면서 일제가 얻는 효과는 반감됐다. 특히 괴뢰로 받아들여지는 당사자는 비록 시신이더라도 채찍질을 받는, 이른바 굴묘편시(掘墓鞭屍)를 당하게 된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하자마자 만주국은 패망했고, 정치적 영향력이 없던 푸이도 소련과 중국의 수용소에서 십년 넘게 고초를 겪었다.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괴뢰라는 낙인은 치명적이다. 실제 적과 내통하지 않았더라도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다. 남북한이 체제우위를 경쟁하던 시절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상대를 괴뢰로 불렀다. 물론 남한이 북한을 더 이상 체제경쟁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북한이 주변국 압력에 불구하고 핵개발을 추진하면서 북한은 더 이상 북괴(북한괴뢰)로 불리지 않고 있다.

민주국가도 다루기 쉬운 ‘꼭두각시’ 선호
괴뢰국을 내세우는 전략은 제국주의자나 군국주의자만 구사하는 게 아니다. 민주국가도 괴뢰국 파트너를 선호한다. 괴뢰국이나 독재국가일수록 대가를 받고 외국의 정책적 요구를 수용할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만일 파트너가 국민 이익에 충실한 민주국가라면 그 파트너를 통제하기 어렵다.

민주화 지수를 이용한 통계분석은 민주국가나 유엔 개입이 현지국의 민주화에 도움 되지 않고 오히려 악화시켰음을 보여준다. 미국 개입만 현지국의 민주화 지수를 높였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실상은 미국의 개입조차 민주화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미국이 개입한 국가 다수는 민주주의 수준이 더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가장 낮은 단계의 국가들이었다. 즉 표본 편중에서 오는 착시효과다. 그런 사례를 빼고 계산하면 미국 개입도 평균적으로 민주화를 후퇴시킨 것으로 나온다.

대외원조 효과도 마찬가지다. 여러 정치통계는 대외원조를 많이 받은 나라일수록 민주화가 이뤄지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원조 공여국은 원조 수혜국의 정책적 양보를 원하기 때문에 정책적 양보가 더 용이한 독재국가들이 더 많은 원조를 받게 되며 따라서 정권연장도 독재국가가 더 쉽다. 즉 대외원조를 받음으로써 더 오래 유지되는 나쁜 정부로 인해 빈국 빈곤층의 삶은 오히려 더 피폐해지는 것이다.

만일 공여국 국민이 수혜국의 민주화 혹은 빈민구제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공여국 자신의 이익에 부합되는 정책을 수혜국 정부에 강요하기보다 수혜국의 민주화 혹은 빈민구제 진전 등 인류보편적 가치의 실현을 요구해야 한다. 민주국가 국민이라고 해서 독재국가 국민보다 더 착한 것은 아니다. 인성과 정치체제는 별개의 문제다. 정부정책에 다수 국민의 입장이 반영되면 민주주의이고, 그렇지 못하면 독재일 뿐이다.

어떤 면에서는 동맹조차 남의 힘이나 명분을 빌리는 일종의 차도살인 혹은 차시환혼이다. 민주정권이든 독재정권이든 누구나 남의 힘 혹은 명분을 빌리는 것이 필요할 때는 빌리려 한다. 괴뢰라는 확실한 친구를 만드는 것, 남의 괴뢰가 되어서라도 이득을 좇는 것, 경쟁자를 괴뢰로 낙인찍어 무력화시키는 것, 이 모두가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실존하는 전략적 행위다.

 

 

[세상을 바꾼 전략] 애송이 옥타비아누스를 황제로 만든 ‘의인물용’ 전략

(중앙일보 2015년03월15일(일) 오전 2:14)

⑬ 제휴와 배신의 이면

 

BC 44년 3월 15일 원로원 의원들에게 살해된 카이사르가 한 때 경쟁자였던 폼페이우스의 조각상 아래 쓰러져 있다. 카이사르 암살 관련 그림 가운데 가장 사실적이라고 평가받는 장 레온 제롬의 그림(1867년 작).

 

“3월 15일을 조심해라(Beware the ides of March)!” 지금으로부터 2058년전인 BC 44년 한 점술가가 카이사르(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했다는 경고다. 율리우스 달력으로 이 날 카이사르는 혼자도 아니고 수십명에 의해, 그것도 몰래, 지독히 비겁한 난도질로 암살됐다.

“3월 15일을 조심해라”보다 더 유명한 카이사르 암살 관련 문구는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다. 카이사르가 죽으면서 했다는 말인데, 정말 그렇게 말했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셰익스피어 희곡에 등장하면서 유명해졌다. 자신이 믿었던 브루투스의 배신에 놀라 나온 말이라는 해석뿐 아니라 배신한 브루투스에 대한 저주로 뱉은 말이라는 해석도 있다.

카이사르 시해의 두 주역 카시우스(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브루투스(마르쿠스 브루투스)는 본래 카이사르의 경쟁자 폼페이우스 휘하 장수였다. 내전 후 카이사르는 그들을 사면하고 포용했다. 로마 귀족들은 카이사르에게 종신독재관직을 부여했고, 또 공화정 수호자들의 반발을 유도하려했는지 몰라도 카이사르를 왕으로 호칭하기도 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 내의 적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특히 자신의 통제 없이는 로마가 내전상태로 들어갈 것이니 원로원 의원들이 자신을 암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남을 믿는다는 것은 늘 위험이 따른다. 지난해 세월호 침몰 때 객실 안에 그대로 있으면 구조된다는 안내방송을 믿었던 승객 다수는 희생되고 말았다. 내가 믿지 않은 상대의 습격보다 내가 믿는 상대의 습격이 나에게는 훨씬 더 치명적이다. 카이사르가 원로원을 믿지 않고 경계했더라면 죽음을 피했을 수도 있다. 이처럼 사람을 쓰면 의심하지 말라는 용인물의(用人勿疑)는 간혹 치명적 결과를 초래한다.

원로원의 암살 주모자들은 자신들이 카이사르를 배신했다기보다 오히려 카이사르가 로마 공화정을 배신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자신들은 독재자를 없앤 숭고한 거사를 단행했으니 다수로부터 박수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브루투스 등 일부 주모자들은 아무런 후속계획 없이 카이사르만 제거하는 것이 순수성을 인정받는다고 주장했다. 원로원 귀족들끼리만 소통하다 보니 원로원 밖의 여론을 잘 읽지 못했고, 또 카이사르를 비판하는 것과 카이사르를 처참하게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했다.

셰익스피어 희곡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삽입된 그림(헨리 셀루스 작)에서 안토니우스(왼쪽)와 옥타비아누스(가운데)가 레피두스에게 살생부를 강요하고 있다.
안토니우스, 민심 간파하고 입장 바꿔
카이사르 암살 이후 전개된 로마 상황은 암살 주모자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카이사르파 핵심인물 안토니우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사건 직후엔 원로원에 협조적이다가 카이사르에 대한 평민들의 지지를 확인한 후에는 원로원 책임론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카이사르를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거사에 초대되지 못한 키케로는 안토니우스를 카이사르와 함께 죽이지 못한 것이 큰 실수라고 지적했다. 암살 주모자들은 정권을 잡기는커녕 살해 위협에 시달렸고 결국 자살이나 타살로 모두 생을 마감했다. 사건 후 관심은 원로원의 권력 강화나 공화제의 공고화가 아니라 누가 카이사르를 계승하느냐로 바뀌었다.

카이사르 사후 새로운 지배자 등장의 첫 무대는 카이사르의 유언 공개였다. 유언에 따라 카이사르 누이의 손자인 18세의 옥타비아누스(가이우스 옥타비우스)가 카이사르의 상속자가 됐고, 그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개명했다. 노련한 안토니우스를 경계하던 키케로는 덜 위협적인 젊은 옥타비아누스를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BC 43년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를 부관으로 합류시킨 군대로 안토니우스를 처단하려했다. 원로원 기대와 달리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 및 레피두스와 제휴해 이른바 2차 삼두정치를 결성했고, 삼두 연합은 카이사르 암살과 관련된 살생부를 작성하여 숙청을 실시했다. 특히 안토니우스 측이 키케로를 죽일 때 옥타비아누스는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BC 42년 삼두 연합은 원로원파 군대를 격파했고 카이사르 암살 주모자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자살했다.

BC 40년 옥타비아누스는 여러 원로원 의원들과 기사들을 처형했다. 그 가운데에 안토니우스의 동생도 포함됐다. BC 36년 레피두스의 군대를 매수한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를 연금시키고 삼두정치를 종식했다. BC 31년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를 격파했고, BC 30년에는 이집트를 침공하여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결국 자살로 이끌었다. 이로써 삼두정치의 파트너인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는 모두 제거됐다. BC 27년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수여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최초의 로마황제(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됐다. 카이사르 암살을 겪은 옥타비아누스는 용인물의 대신 의심스러운 자는 쓰지 않는 의인물용(疑人勿用)을 따랐다.

옥타비아누스뿐 아니라 그의 양부 카이사르도 최고권력자로 등극하기 전 삼두정치를 거쳤다. 카이사르는 공동통치로 로마 지배를 시작했다. BC 60년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의 제휴가 이른바 1차 삼두정치다. 1차 삼두정치 3인의 지지기반은 각각 평민·퇴역군인·돈이었다. BC 53년 크라수스의 죽음과 함께 삼두정치가 붕괴되고 카이사르의 독주가 시작됐다. 이에 폼페이우스는 귀족파와 제휴했는데, BC 49년 1월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BC 48년 카이사르를 피해 이집트로 도주한 폼페이우스는 그곳에서 살해됐다. BC 44년 2월 카이사르는 종신독재관에 추대됐고 한 달 후 암살됐다.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 모두 삼두정치 파트너를 제거해 최고권력자 자리에 올랐다. 혼자서도 로마를 지배할 수 있을 때 굳이 남과 제휴해 권력을 나눌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연합은 거느린 입이 적을수록 좋다. 승리에 불필요한 연합 구성원의 존재는 나머지 구성원에게 갈 몫을 줄인다. 전리품 분배에서 자기 몫을 극대화하려면 승리에 불필요한 구성원을 배제할 필요가 있다. 즉 거대연합 대신 최소승리연합(MWC·minimal winning coalition)을 지향한다.

토사구팽은 불필요한 인물 솎아내기
토끼를 잡은 후엔 사냥개를 잡아먹는다는 토사구팽(兎死狗烹)도 불필요한 멤버 솎아내기의 하나다. BC 473년 범려는 문종과 함께 월왕 구천을 도와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범려는 구천이 고난을 함께해도 영화는 함께할 수 없는 위인이라며 월나라를 떠났다. 범려는 “나는 새가 없으면 훌륭한 활을 넣어두고, 재빠른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아먹는다(蜚鳥盡 良弓藏, 狡兎死 走狗烹)”며 문종에게 월나라를 떠날 것을 충고했지만, 문종은 월나라를 떠나지 못하고 구천의 탄압을 받아 자결했다고 사마천의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사기』에 등장하는 또 다른 토사구팽 당사자는 한신이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은 일등공신 한신을 초왕으로 봉했으나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여 BC 201년 회음후로 격하했다. 한신은 “재빠른 토끼가 죽으면 쓸 개를 삶아먹고, 나는 새가 사라지면 괜찮은 활을 넣어두며, 적국이 망하면 훌륭한 신하도 필요없고, 천하가 평정되었으니 나도 당연히 팽 당한다(狡兎死 良狗烹, 高鳥盡 良弓藏. 敵國破 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烹)”고 말했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은 독재자를 제거해서 공화제를 지키려는 노력으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실제론 오히려 공화제를 종식시켜 최초의 로마황제를 등장시킨 사건이었다. 귀족들 다수는 사건 후 황제체제에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정치적 소신보다 철저하게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였다.

카이사르는 토지개혁 등 귀족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은 귀족의 이익을 빼앗아서 평민에게 주는 움직임에 대한 저항이었다. 카이사르가 귀족의 이익을 잘 챙겨주지 않아 귀족들에게 암살당한 반면, 옥타비아누스는 귀족 이익을 잘 챙겨서 귀족의 충성을 받아냈다. 즉 황제체제든 공화체제든 충성은 자신이 받는 혜택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 간의 권력구조 논쟁도 대의명분보다 당사자들의 이해관계로 더 잘 설명된다. 권력구조에 관한 정치적 소신도 결국 권력구조에 따른 이해관계에 불과할 때가 많다. 혜택이 있는 쪽에 가담하고, 이를 감안해서 세 규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배(승리)할 수 있는 크기의 연합 만들기는 권력 장악의 필수조건이며, 이미 권력 장악에 성공한 연합에서는 불필요한 멤버 솎아내기 또한 필연적인 현상이다. 쪼개져 있다 보면 승리를 위해 합하게 되고, 또 합해져 있다 보면 자기 몫을 늘리기 위해 쪼개지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