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떠나보낸 김종필…마지막 '황혼정치'
대통령 사촌언니 박 여사의 ‘조용한 내조’
[일요서울ㅣ박형남 기자] 지난 2월 21일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갑작스런 부인상이 전해졌다. 김 전 총리 아내인 박영옥 씨는 이날 오후 8시 43분경 서울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대 서울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 사망했다. 박씨는 2014년 9월경 이 병원에 입원해 척추협착증과 요도암으로 투병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풍납동 아산병원에 빈소가 마련되자 김 전 총리가 가장 먼저 도착해 영정사진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히는 등 휠체어를 타고 조문객을 맞이했다. 5일간 거물급 정치인들 발길도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김 전 총리가 정치권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개헌 문제를 꺼내는 등 마지막 ‘황혼 정치’를 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
“수다한 물음에도 소이부답(笑而不答:웃음을 띨 뿐 답하지 않음)하던 자, 내조의 덕을 베풀어 준 영세반려(永世伴侶:끝없는 세상의 반려)와 함께 이곳에 누웠노라.”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아내 박영옥 여사를 먼저 보내면서 손수 지은 비문이다. 김 전 총리의 아내 박영옥 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셋째 형 박상희 씨의 장녀다. 박근혜 대통령과는 사촌지간이다. 박 씨는 박 전 대통령의 주선으로 김 전 총리와 결혼했고, 정치조언자로서 일생을 보낼만큼 남편사랑이 남다른 것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실제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92년, 김 전 총리가 부정축재 혐의로 연행되자 박 씨는 박 대통령을 직접 찾아가 구명을 부탁했을 정도다.
빈소 가득 채운 조화
그의 비보가 전해지면서 정치권에서는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지난달 22일 오전 빈소가 마련되자 박근혜 대통령, 전두환·노태우·김영삼·이명박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 정의화 국회의장,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 안희정 충남지사, 박원순 서울시장 등이 조화와 근조기를 보냈다. 빈소 복도를 가득 채운 조화는 화장실 앞까지 놓여졌고, 다른 조화와 겹쳐놓을 정도였다.
이날 빈소를 가장 먼저 찾은 인사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김 전 실장은 청와대 비서실장 신분으로 빈소를 찾았다. 이날 ‘포스트 JP(김종필)’로 불리는 이완구 국무총리, 이명박 전 대통령, 김효재 전 정무수석, 황우여 사회부총리, 남경필 경기도지사 등이 조문했다.
정치권에서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유승민 원내대표, 서청원·이인제 최고위원, 정몽준 전 대표, 이재오·주호영·김영우·심윤조 의원, 성완종 전 의원이 빈소를 찾았다. 야권에서는 문재인 대표, 우윤근 원내대표, 양승조 사무총장, 유인태·김영록·서영교 의원이 첫날 문상을 왔다.
23일에도 조문객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이희호 여사는 오전 11시 55분경 박지원 의원과 김대중평화재단 관계자들과 함께 나타났다. 이회창 전 총재, 고건 전 총리,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 강창희 전 의장, 윤병세 외교장관, 김한길 전 대표, 탤런트 강부자, 가수 하춘화 씨 등 200여 명의 조문객이 빈소를 찾았다.
이희호 여사는 조문 자리에서 김 전 총리에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참 여사님이 덕이 좋았는데, 몇 번 만나 뵙고 선거 때는 같이 다니기도 했고 그랬는데…”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김 전 총리는 “(이 여사가) 건강하셔야 돼요. 가신 어른(김대중 전 대통령)분 몫까지 더 오래 사셔야 돼요”라고 화답했다.
이날 오후 박근혜 대통령이 빈소를 찾으면서 취재진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대신 조문하는 형식을 취할 것으로 보였으나 박 대통령이 전격 방문했던 것. 더구나 박 대통령과 사촌형부인 김 전 총리와의 정치적 악연 때문에 두 사람의 만남은 더욱 관심을 모았다. 김 전 총리가 1987년 신민주공화당을 창당, 박 대통령에게 참여를 제의했지만 거절당했다.
이후 김 전 총리는 DJP연합을 이뤘고, 박 대통령은 한나라당에 입당,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면서 정치적 행보를 달리했다. 2007년 대선 때 김 전 총리는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기도 했다. 이런 두 사람의 관계가 회복된 것은 김 전 총리가 2012년 대선에서 박 대통령을 지지하면서부터다. 그러나 정치권 일각에서는 박 씨의 죽음으로 인해 정치적 화해를 갖는 자리가 됐다는 시각이다.
실제 박 대통령은 비공식 일정으로 조윤선 정무수석과 민경욱 대변인이 수행해 빈소를 찾았다. 박 대통령은 조문 후 김 전 총리와 딸 예리 씨와 함께 10여분간 비공개 환담을 가졌다. 환담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전해지지 않았으나 정진석 전 의원은 “박 대통령이 김 전 총리의 손을 잡고 ‘건강을 잘 챙기시라고’ 위로하자 김 전 총리가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이어 김 전 총리는 “대통령께서 와 주셔서 언니도 참 기뻐할 겁니다. 좋은 곳으로 갔을 거예요”라고 했다.
JP의 ‘조문정치’
거물급 정치인들의 조문 행렬이 이어지면서 김 전 총리의 발언에도 관심이 쏠렸다. 조문을 하는 과정에서 김 전 총리가 정치인들에게 뼈 있는 충고를 건네며, 훈수 정치와 함께 마지막 황혼정치를 하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이러한 추측에 대해 정치권 일각에선 수긍하는 분위기다. 김 전 총리가 민감한 정치적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특히 개헌 부분이 눈길을 끈다. ‘내각제 개헌론자’인 김 전 총리는 1990년 3당 합당 당시 내각제 합의가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 집권 후 파기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 전 총리는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구성 등 개헌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상황에서 ‘내각제 개헌’을 역설했다.
김 전 총리는 새정치연합 문재인 대표에게 “내각책임제를 잘하면 17년도(2017년 정권 교체를 지칭),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도 “(우리나라는) 5년 대통령 단임제를 하지만 5년 동안 뭘 하느냐. 시간이 모자란다”며 “대처(전 영국 총리)가 영국에서 데모하고 파업하는 것을 12년 (재임)하면서 고쳤다”고 강조했다. 김 전 총리가 개헌에 대해 언급하면서 내각제 필요성을 마지막으로 설파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한편, 김 전 총리는 부인 박 여사의 장례식을 마친 이후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부인의 영정사진만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측근인 정진석 전 의원은 지난달 26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오전 내내 서울 청구동 자택에서 부인의 영정을 바라보는 김 전 총리의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헛되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만 알아주면 돼"
(중앙일보 2015.03.02.01:22:07)
현대사 증언 연재, JP 소회
지난달 25일 부인의 장례를 치른 김종필 전 국무총리. 그는 서울 신당동 자택 1층에 마련한 고인의 빈소에서 매일 아침과 저녁 상식(上食·제사상에 올리는 음식)을 올린다. 부인의 영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술을 한잔 올리기도 한다. 겨울바람이 매서웠던 지난달 27일엔 삼우제를 위해 부여를 직접 찾았다.
2008년 12월 침상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졌던 김 전 총리가 이 정도로 건강을 회복한 건 꾸준한 운동 덕분이다. 7년째 매일 서울 아산병원에서 재활운동을 해 왔다. 조금이라도 나아져 주변의 걱정을 덜어 주겠다는 의지다. 오른팔과 오른 다리의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를 타지만 목소리는 정정하다. 상가에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미운 사람 죽는 거 보고 오래 사는 게 승리자야. 그런데 졸수(卒壽·90세)가 되고 보니 미워할 사람이 없어.”
그는 지난해 10월부터 본지와 현대사 증언을 위한 인터뷰를 했다. 50~60년 전 일을 성우처럼 드라마틱하게 이야기해 주고 “어때, 재미있는 얘기지?”라며 껄껄 웃는다.
김 전 총리는 자신의 증언록을 어떤 사람들이 읽기를 바랄까. 질문하자 이렇게 답한다. “누가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어. 읽는 사람이 읽고서 ‘헛되이 움직이지는 않았다’ 이것만 이해해 주면 돼.”
그가 쓴 자비명(自碑銘)은 이렇게 시작한다. “思無邪(사무사)를 人生(인생)의 道理(도리)로 삼고 한평생 어기지 않았으며 無恒産而無恒心(무항산이무항심)을 治國(치국)의 根本(근본)으로 삼아 國利民福(국리민복)과 國泰民安(국태민안)을 具現(구현)하기 위하여 獻身盡力(헌신진력)하였거늘.”
"나폴레옹 혁명·사랑 배우려 했지" … 5·16으로 세상 뒤집어 '박정희의 진실'에 가장 다가섰고 그 진실 합작했다
(중앙일보 2015,03.02.01:25:42)
현대사 연출가 JP … 5·16에서 자비명(自碑銘)까지
정치 9단? 권모술수에 능한 거지 … 풍운아는 '불꽃'이야
후세 위해 '역사의 비곡' 육성증언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지난해 10월부터 `김종필 증언록`을 위한 인터뷰를 했다. 그의 기억력은 녹슬지 않았다. 반세기 먼 세월이 어제 같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오른손이 불편하다. 왼손으로 커피잔을 들었다. [조문규 기자]
지난달 25일 부인 박영옥 여사의 유골함을 바라보는 김종필 전 총리. 오른쪽은 아들 김진. [전영기 기자]
JP(김종필)는 휠체어에 앉아 있다. 유골함이 무덤에 들어간다. 외아들(김진)이 멈추게 한다. JP는 한쪽 손으로 유골함을 어루만진다. 눈물이 뺨을 적신다. 포근한 겨울. 그의 안경 너머는 언덕 위다. 백로가 날갯짓을 한다. 지난달 25일 부인 박영옥 여사의 하관식이다.
유택(幽宅, 묘소)은 지난해 JP가 마련했다. “내가 먼저 가려고 준비했는데···.” 그 언덕에 다섯 형제들도 잠들어 있다. 고향인 충남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 그 선산에 꾸민 가족묘원이다.
지난해 8월 그는 유택을 찾았다. 옆에 있던 나에게 말했다. “좌청룡·우백호 그런 명당엔 해당이 안 돼. 그냥 편안히 드러누울 데 만들어 놓은 거지.” 그는 묘비명을 썼다. 그 121자는 인생관을 압축한다. “晩年(만년)에 이르러 ‘年 九十而知 八十九非’(연 구십이지 팔십구비)라고 嘆(탄)하며 數多(수다)한 물음에는 笑而不答(소이부답) 하던 者(자).”-
JP는 비문을 풀어 나에게 읽어 준다. “나이 구십 되어 돌아보니 여든아홉 해를 헛되게 살았다고 한탄하는데, 그래도 무엇을 하지 않았느냐는 많은 물음에 대해 미소를 지을 뿐 대답하지 않는 자.”- 엷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서린다. 2015년 1월 7일(1926년생) 그는 아흔 번째 생일을 맞았다.
김종필의 등장은 혜성 같았다. 54년 전 세상을 뒤집었다. 5·16에 대한 그의 자평은 명쾌하다. “구질서를 붕괴시키고 신질서를 만들었다.” 그는 현대사의 연출가였다. 국회의원 9선, 정당 총재 네 번, 두 차례 국무총리. 대통령은 못했지만 전무후무한 경력이다.
그런 삶이 89년의 헛됨을 따진다. ‘정치 허업(虛業)’을 말한다. 그것은 절제인가 회한인가. 달관인가 미련인가. 반전(反轉)의 언어다. 지독한 역설이다. 하지만 절묘함의 여운은 길다. 그 허업은 단지 정치 무상이 아니다. 그 말 속엔 “국민을 위한 정치인의 희생”(JP 표현)이 깔렸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육군 소장 박정희가 이끈 군대는 나라를 장악했다. ‘혁명 취지문’이 발표됐다.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미명(今朝未明)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궐기문의 첫 구절이다.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로 시작하는 6개 항 공약이 이어진다. 격문의 집필자는 JP다.
박보균 대기자(오른쪽)가 김종필 전 총리와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인터뷰하고 있다.[권혁재 사진전문 기자]
- 은인자중이란 단어, 거사의 극적 분위기를 넣으셨는데요.
“내가 쓴 표현이지, 그런 군부의 중심에 내가 있었다고 할 수 있지.” 당찬 호기다. 그때 그는 35세, 예비역 육군 중령이다. 석 달 전에 예편당했다. 정군(整軍)운동 때문이다. (궐기문을 읽었던 KBS 아나운서 박종세는 “그때 JP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지휘자 같았다”고 회상한다.)
- 5·16의 설계·실천자이셨는데요.
“혁명의 많은 면에 내 생각이 들어 있지. 하지만 한계가 있어. 박정희 대통령이 부족한 것을 메워서 이끌어 가고, 그리고 상부상조해서 끌고 간 거야.”
- 그때 어떤 심경이었나요.
“목숨을 걸었지.” 그의 시는 결의를 압축한다. “장미의 오월/순백의 꽃빛깔 거짓 없듯/애국의 충정을 뭉쳐/하늘에 걸던/피의 서약….”(5·16 9주년에 씀)
1971년 5월 김종필 공화당 부총재가 8대 총선 투표 후 자택에서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중앙포토]
그는 거사의 의미를 회고한다. “4·19(60년)의 역사성을 철학화해서 근대화 전기를 마련해야 하는데 민주당 정권은 그렇지 못했어. 정쟁과 누습(陋習), 극도의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지. 우리의 궐기는 부패 무능한 기성 정치인들에게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더 이상 맡길 수 없다는 거였어.”
박정희·김종필의 군 동원 규모는 작았다. 전광석화는 행운을 낚는다. 무혈(無血)로 나라를 평정했다. “국민이건 군이건 대부분이 나라의 결정적 전환을 기다리고 있었던 덕분이지.” 5·16은 반민주·쿠데타로 교과서에 규정돼 있다.
- 5·16 역사 논쟁은 그치지 않는데요.
“쿠데타면 어떻고 혁명이면 어떠냐 말이야. 5·16은 우리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서 본질적 변화를 이끌고 실적을 남겼어. 그게 바로 혁명이야.”
1960년 민주당 집권(내각제) 시절 그는 장면 총리를 찾아갔다. “군대를 정화할 사람을 국방장관에 임명해 달라고 갔지, 만나지는 못했어.”
- 그 장면은 하극상 아닙니까.
“중령이 총리를 못 만날 이유가 뭐 있어. 나폴레옹은 대위에서 영관을 거치지 않고 장군이 되고 황제(35세)가 되지 않았는가.”
나폴레옹의 ‘혁명과 사랑’-. 그것은 JP의 조숙한 감수성을 자극했다. “중학 시절에 세계 위인전을 거의 다 읽었어. 돋보이는 인물이 나폴레옹이야. 그래서 아주 좋아했지, 사랑도 흉내를 내려다가 잘 안 됐지만.” 하지만 JP식 아내 사랑은 잔잔한 감동이다.
5·16은 세상의 언어를 바꿨다. “나는 겨레의 가슴에 새로운 도전과 분발의 불꽃을 점화시키려고 했어.” 근대화, 민족중흥, 자조, 자주국방은 시대의 지배언어가 된다. 주한미군은 5·16을 저지하려 했다.
- 미국은 5·16 주연들의 정체를 의심했지요.
“혁명그룹 배후에 있는 내가 다크호스로 보였겠지. 미국은 나를 반미주의자, 급진주의자, 민족주의자로 봤을 거야.” 그는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를 만난다. ‘5·16의 당위성’을 설파한다.
1963년 12월 4일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종필 공화당의장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다. [중앙포토]
김종필의 삶은 풍운(風雲)이다. 영욕(榮辱)의 교차는 가파르다. “내가 태어날 때 천둥과 벼락이 요란하게 쳤대.” 그의 호는 운정(雲庭, 구름 속 뜰)이다. 그는 서울대 사대에 다녔다. “부농의 아들이어서 어려움을 몰랐어. 아버지가 작고하신 뒤 가세가 기울어 학업을 할 수 없었어. 새 출발의 신고(辛苦)를 겪겠다고 결심했지.” 1948년 7월 그는 사병으로 자원입대한다. “야만적인 일제식 기합은 내가 바란 단련이 아니었어.” 일주일 만에 탈영. 다시 하사관으로 군에 갔다. 거기서 육사(8기)에 입교, 49년 5월 졸업(소위)한다. 우등생 JP는 육본 정보국으로 뽑혀 갔다. 박정희는 정보국의 작전정보실장이었다.
“박 대통령은 소령 시절(49년, 32세) 좌익 빨갱이로 몰려 사형 구형까지 받았어. 그 후 감형과 동시에 군복을 벗고, 문관으로 정보국에 근무하셨지.” 박정희의 과묵과 치밀함-. JP에게 매력으로 다가왔다.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거야.”
박정희와 JP 팀은 6·25 남침을 정확히 예측한다. 군 수뇌부는 그것을 묵살한다. JP는 박정희의 조카딸(박영옥)과 결혼한다(51년 2월).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딸이다. 처삼촌과 조카사위는 현대사의 장정(長征)에 동행한다. 그는 애틋한 부부애를 기억해왔다.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 사모님을 빼고 누가 가장 생각납니까.
“박정희 대통령이야. 나는 18년간 박 대통령을 요지부동하게 뒷받침해 드렸어.” JP는 ‘박정희의 진실’에 가장 다가섰던 인물이다. 많은 순간 그 진실을 합작하기도 했다. 5·16 나흘 뒤 그는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를 창설한다. 정보부장 JP는 국가 개조의 기획·실천자였다. “혁명과업을 완수, 뒷받침하기 위한 거였어.” JP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장도영(중장)을 체포한다.
- 박정희 소장에게 그 일을 사전보고하지 않았다면서요.
“혁명 초기에 박 대통령은 힘든 일이 생기면 그만두고 군대로 돌아간다고 했어. 나는 몇 번이고 그런 약한 마음을 강하게 만들려고 뒷받침했어. 장도영 체포도 그 때문이야. 독단적인 결행이었지.” 소장 박정희는 최고회의 의장을 맡는다. 현대사 전면에 등장한다.
“나 그만두고 싶다.”- 박정희의 유약한 면모는 낯설다. 유신 시절의 권력 집착에 비하면 뜻밖이다. JP의 회고는 긴박해진다.
2015년은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이다. JP는 그것을 “혁명의 연장선”이라고 정리한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어. 욕먹기 싫다는 거지. 혁명할 때 목숨을 건 마음가짐으로 내가 나섰지. 지정학적으로 한국은 대륙에 맹장처럼 매달려 있는 신세야. 국교를 정상화하고 일본을 디딤돌로 해서 태평양, 대서양으로 나가야겠다고 결심한 거야.” 역사의 악역(惡役). 그 자임과 배포는 역사 기록을 갈아치운다. ‘김종필-오히라’ 담판(1962년 11월)은 그 행적의 절정이다. 굴욕외교 논쟁도 커진다.
JP는 민주공화당을 만들었다. 창당 발기 선언문을 썼다. 대중을 격발시킬 단어를 골랐다. “이 땅의 민족은 새 질서를 요구한다. 새 질서는 새 힘의 소유자만이 이룩할 수 있다. 민족의 정기와 대의(大義)를 위해 세운 민주공화당의 깃발 아래 모이자.” JP는 “내 문장에 힘이 있었지”라고 한다.
거센 시련이 찾아왔다. 최고회의 장군들은 JP 독주에 반발했다. 5·16 주체세력은 분열, 대립했다. 워커힐·증권·빠찡꼬·새나라 자동차 등 4대 의혹사건이 터진다. 그는 억울해한다. 하지만 공격과 비난은 쏟아진다. 그는 버티지 못한다. “자의반 타의반(自意半 他意半)”으로 외국에 나간다.(1차 외유)
그 후 박정희는 “공화당 등에 올라탄다.”(JP 표현) 63년 10월 대통령에 처음 당선된다. JP는 그 직후 귀국한다. 64년 한·일 국교 반대 시위는 거셌다.(6·3 계엄령 선포) 그는 다시 후퇴한다.(2차 외유) JP는 월남 파병에 적극적이었다. “우리 군사력의 해외 진주는 전례 없었어. 우리 역사에 드문 경험이지.”- 그는 공화당 당 의장으로 복귀한다(65년 12월). 공화당 4인 체제는 JP를 견제한다. 그 핵심은 거물 민간정치인 김성곤(쌍룡그룹 창업자)이다.
- 그때도 권력 무상을 맛보셨는데요.
“김성곤은 내가 정계로 이끌었어. 그런데 나를 맹렬히 견제했지.” 4인 체제는 TK 세력의 원류다. 김종필은 다시 정계를 떠난다.
69년은 3선 개헌 정국이었다. “반대 의견을 말했어. 5·16 혁명한 것이 자유민주주의 하자고 한 것 아닙니까 했어. 그러니까 박 대통령이 내 손을 잡더니 나와 같이 죽자고 혁명했지, 끝까지 나 좀 도와달라고 해.” JP의 기억력은 녹슬지 않았다. 반세기 먼 세월이 어제 같다.
후임 정보부장들은 JP를 감시한다. 김재춘에 이어 김형욱은 철저했다. 이후락의 신임과 영향력은 JP를 압도한다.
- 박 대통령의 권력 관리가 노련해졌네요.
“디바이드 앤 룰(divide & rule, 분할 통치)이야. 박 대통령이 그것을 어디서 배우셨는지 묘하게 써먹으셨어.”
71년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와 김대중의 격돌이다. 대선 후 박정희는 JP를 국무총리(45세)로 임명한다. 장수총리(71년 6월~75년 12월)였다. 격랑의 세월이었다. 71년 공화당 항명 파동(김성곤·길재호 퇴장)→72년 7·4 남북 공동선언, 10월 유신→73년 윤필용 사건(군부 재편), 김대중 납치(이후락 퇴진)→74년 육영수 여사 피살(박종규 사퇴)이 이어진다. 권력 판도는 재구성됐다.
JP는 유신 작업에 소외됐다. 박정희 친정(親政) 체제가 완성됐다. 긴급조치의 유신독재는 사나웠다. 부마사태 저항에 이어 10·26. 박정희 시대는 마감한다. “김재규가 총을 꺼낸 건 충성경쟁에서 차지철에게 패배했기 때문이야. 그렇게 영민하던 박 대통령이 돌아가시기 1년 전부터 사고력이 떨어졌어.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야.” 박정희의 비극은 인사 실패에서 비롯된다. 용인술의 영민함은 흐릿해졌다. JP는 경호실장 차지철의 교만과 중정부장 김재규의 광기를 증언한다. 비서실장 김계원은 무기력했다. 18년 박정희 시대의 인물은 다양하다. 이들 3인은 지모와 지혜, 역량에서 가장 떨어졌다.
“요지부동하게 뒷받침했어”-. JP는 그 말을 반복한다. 막전과 막후가 미묘하게 갈린다. 그 말에 박정희에 대한 충정이 넘친다. 뒤쪽에는 비감이 어린다. 회한 같은 절규가 담긴 듯하다. “내가 권력을 행사한 것은 중앙정보부 만들어 혁명정부에 걸리적거리는 것 치워주고 뒷바라지했던 짧은 기간뿐이야.” 그는 여러 차례 좌절했다. 후계자로 전진하지 못했다. 하지만 불만을 항명으로 표출하지 않았다.
10·26은 권력을 공백 상태로 만들었다. 그는 공화당 총재를 맡았다.
- 전두환의 신군부(4년제 정규육사 출신)와의 관계는 어떠셨습니까.
“박 대통령은 5·16 후 처음부터 내가 군 쪽에 가까이하는 것을 싫어했어.”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 신군부는 JP의 영향권 밖이다. 그것은 JP의 권력 후계 행보에 결정적인 취약점이었다.
80년 민주화의 ‘서울의 봄’이 왔다. 그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을 말했다. 12·12는 신군부의 선제공세였다. 신군부는 JP와 김영삼(YS)·김대중(DJ)을 기습했다.(5·17) JP는 ‘부패정치인’으로 퇴출됐다. “전두환은 나의 꿈을 뺏어갔어.” 그의 얼굴에 분노가 인다.
- 신군부에 당한 건 권력 의지 부족 때문인가요.
“나는 권력의 노예가 아니었어.”
- 10·26 후 정국 대응을 할 때 이상적인 접근을 하신 건 아니신지요.
“이상주의자가 현실주의자야.”
김종필은 경제를 회상한다. 목소리에 힘이 솟는다. 그는 1차 외유 때(63년 7월) 서독에 간다. 그는 탄광 막장에 내려간다. “현장에서 박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지. 광부를 파견해야 한다고 했지.” 영화 ‘국제시장’ 덕수의 삶에 JP의 경제투혼이 있다. 5·16 무렵 1인당 국민소득은 85달러 수준. 경제발전은 눈부셨다. 산업화가 먼저 이뤄졌다. 그것은 민주화의 발판이다. 그의 자비명(自碑銘)에 적힌 ‘무항산(無恒産)·무항심(無恒心)’의 성취다.
87년 JP는 정계에 복귀했다. 그해 대선은 노태우와 3김(YS·DJ·JP)의 격돌이다. 김종필은 가장 약세였다. 그의 야망 속에 대권은 멀어졌다. “80년대 초반 노태우가 나를 찾아온 적이 있지. 2인자는 1인자 옆을 떠나지 말라고 했어.” 노태우는 정상에 올랐다.
88년 3김 시대가 열렸다. 정치 9단들은 ‘가능성의 예술’로 정치를 파악했다. 기량과 경륜은 탁월했다. 폐해도 있었다. 지역주의, 불투명한 정치자금, 제왕적 정당 운영이다. 3김은 일본 전국시대의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비교됐다. JP는 기다림의 도쿠가와를 연상시켰다. 그 무렵 그는 시심(詩心)의 정치를 말했다. 하지만 그의 젊은 시절은 달랐다. 청년 JP는 격정의 오다(織田)를 좋아했다. JP는 “오다의 불꽃같은 과단성이 맘에 들었어. 그게 풍운아야”라고 한다.
- 정치 9단의 요체는 뭡니까.
“그거 권모술수에 능하다는 거지.” 쾌활하게 받아넘긴다.
90년 3당 합당이 있었다. 대통령 노태우와 YS·JP의 결속이다. 내각제는 JP 정치의 정체성이자 생존술이 됐다. 그는 92년 대선 때 김영삼을 밀었다. 그 다음엔 김대중을 지원했다.
- 그것이 JP식 합종연횡(合從連衡)입니까.
“DJ, YS가 박 대통령에게 당한 것, 그 시절에 고통을 받은 것들을 내가 씻어준다고 했어. 대통령이 되도록 밀어준다고 했어.” JP식 해원(解寃)이다. 반발도 컸다. DJP 제휴를 놓고 ‘변절’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는 대통령 YS와 헤어졌다. 자민련을 만들었다. 96년 국회의원 총선에서 성공했다. 김대중 정권 출범 때 그는 다시 국무총리를 맡았다. 그 후 DJ와 결별한다. 2004년 총선 때 다시 재기를 모색한다. ‘정계 은퇴’ 압력도 커졌다. 그는 “서산을 벌겋게 물들이겠다”고 응수했다. 다수 국민은 그것을 ‘노욕’이라며 외면했다. 시도는 실패했다. 43년의 정치 여정은 종료됐다. 그는 “이제 완전히 연소했고 재(災)가 됐다”고 했다.
그후 10년간 회고록 얘기가 간간이 나왔다. JP는 집필에 부정적이었다. “술회와 회고의 욕구는 누구나 있지. 밖으로 유발하는 것과 속으로 잡아매어 내밀(內謐)로 모아두는 것이 있을 거야. 나는 내밀의 성질을 더 많이 띠고 있었지.” 그의 역정은 개인사다. 하지만 한국 정치사다. 그의 회고는 후학과 후세를 위해 절실하다. 이제 그는 결심을 바꿨다. 주변의 간곡한 권유가 있었다. 그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구를 외운 적이 있다. “잠들기 전에 가야 할 길이 있다.”- JP의 육성 증언은 가야 할 남은 길로 비쳐진다.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노항장곡, 오동은 천년을 묵어도 항상 비곡을 간직한다)-. 그가 좋아하는 글귀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는 그를 우회할 수 없다. JP를 거쳐야 권력의 내면, 정치의 진수를 만난다. 거인 JP는 역사의 비곡(秘曲)을 품고 있다. 어두움과 밝음이 교차한다. 서사시적 장엄함이 있고 서정의 풍취도 있다.
박정희 좌익 의혹 씻기 위해 … 5·16 반공 국시, 내가 넣었다
(중앙일보 2015.03.02.01:34:45)
혁명의 풍운, 권력의 영욕을 거쳐 구순(九旬)을 맞은 김종필 전 국무총리. 그가 자신이 겪은 현대사의 장면들을 증언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5·16 혁명공약의 제1항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의로 삼는다’는 조항은 당시 박정희 소장에게 쏠린 좌익 의혹을 씻어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밝혔다. 1961년 5·16의 설계자로 당시 혁명공약과 포고문을 직접 작성한 김 전 총리는 “혁명공약을 쓸 때 내 머릿속에는 혁명의 지도자인 박정희 장군의 제일 아픈 데가 뭐냐. 빨갱이라고 생각하는 주위 사람들 아니냐. 이것들을 불식하려면 한마디해야겠다. 그래가지고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라는 내용을 6개 공약 가운데 첫 번째로 집어넣었다”고 중앙일보에 증언했다.
5·16의 반공 공약은 거사의 가장 중요한 명분이었으며, 당시 혁신계와 대학가에 확산된 용공적 통일 논의를 일소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기록돼 왔다. 혁명공약의 제2항은 미국과 유대 강화, 3항은 부패 일소, 4항은 민생고 해결, 5항은 국력 배양, 6항은 과업 성취 후 군 복귀를 규정하고 있다. (관련 내용은 3월 3일자 게재)
김 전 총리는 “박 장군은 자기의 사상을 미국도 의심하고, 군 내부에서도 의심하는 데다 실제로 남로당에 연루된 혐의로 사형 구형까지 받았던 경력이 있어 좌익 콤플렉스를 아주 크게 느끼고 있었다”며 “이 때문에 박 소장이 혁명 후에도 ‘나 그만두겠다’는 소리를 여러 번 했다”고 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소령 시절 좌익 혐의로 체포돼 1949년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구형받고(무기징역 선고) 감형과 함께 강제 예편됐다. 그 뒤 육군본부에서 문관으로 근무하다 6·25 발발 직후 현역으로 복귀했다.
‘현대사의 연출가’ 김종필(JP)이 입을 열었다. 5·16 이후 18년간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이뤄내고 1987년 민주화 이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의 이질적 권력들과 차례로 손을 잡았던 김종필 전 총리가 중앙일보에 그가 겪었던 격랑의 현대사를 증언한다. 중앙일보는 그의 육성 증언을 듣기 위해 지난해 10월 인터뷰를 시작했고 내일부터 연재한다.
‘미소 지을 뿐 대답하지 않는다’ JP 정치 결산하는 상징 어휘
(중앙일보 2015.03.03.01:34:45)
왜 소이부답(笑而不答)인가
청구동(신당동)은 김종필(JP)의 정치 공간이었다. 지금도 1층 거실은 그가 하루를 여는 곳이다. JP는 TV를 켠다. 그 위에 편액(사진·130X50㎝)이 걸려 있다. ‘笑而不答’(소이부답)-. JP는 그 글씨가 걸린 유래를 들려준다.
“1960년대 중반쯤인 6대 국회 시절 박현숙(朴賢淑·1896~1980년) 의원께서 내게 가져다 주셨어. 내가 어머니처럼 따랐는데 남편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분이야.” JP의 기억은 명료하다.
“그분이 저 글씨를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 ‘내가 가보(家寶)처럼 갖고 있는 글씨인데 이제 여기에 가져다 걸어야 할 것 같아’라고 하셨어.” 그 무렵 JP는 권력 무상을 겪었다. 정치 풍파도 거칠었다.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는다.”- 정치판은 혼탁하다. 정치는 살아 숨쉬는 생물이다. 그런 속에서 정치인의 지혜는 무엇인가. 직설보다 함축, 진격보다 우회, 단정보다 은유를 주문한 듯하다. 말의 운치는 깊다. 절제의 여운은 길다.
하지만 소이부답은 거사(擧事)의 언어가 아니다. 5·16의 풍운과는 거리가 멀다. JP 측근들은 그 글씨를 추사(秋史)의 작품으로 믿고 있다. ‘笑而不答’ 왼편에 호와 낙관이 있다. ‘石邨樵老’(석촌초로·석촌에 사는 나무하는 노인)-. 최준호 옥과미술관장은 “낙관과 호로 미뤄 윤용구(尹用求)가 쓴 글씨로 추정된다”고 했다. 석촌 윤용구는 조선 말 문신이며 서화가다. 추사 전문가인 최 관장은 “추사 이래 추사의 서체에 영향을 받지 않은 문필가가 없다”고 했다.
‘소이부답’은 50년 가까이 JP와 마주하고 있다. 네 글자는 JP 정치를 결산하는 상징 어휘다. JP의 증언은 그 제목 밑에서 은근하면서 강렬하게 펼쳐진다. 정사(正史)가 있고 비록(秘錄)이 있다.
반공 국시 처음 본 박정희 "이거 나 때문에 썼겠구먼 … " 거사 전날 JP "배 속 아이, 아들일 거요" 아내의 눈물을 봤다
(중앙일보 2015.03.03.01:34:16)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1> ‘5·16 혁명공약’의 탄생
미국은 '박정희 사상'을 의심했고
미 8군 사령관은 대놓고 예편 요구
6·25 때 북한군과 맞서 싸운 박정희
그에 대한 좌익 혐의는 부당
"인생은 짧다, 시시하게 굴지 말자"
혁명의 물결 앞에 나는 섰다
둘째 임신한 아내와 비감의 이별
"아비가 헛일 안 했다고 가르치구려"
1961년 8월 최고회의 회의 모습. 앞줄 왼쪽부터 김신 공군참모총장, 박정희 의장, 박병권 국방장관(테이블 건너). 박정희 뒤는 김종필 정보부장(사복 차림), 박병권 뒤는 장성환 공군참모차장.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5·16군사혁명은 구질서를 붕괴시킨 것”이라고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의 지휘자라면 JP는 5·16의 설계자다. JP의 현대사 증언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밤이 깊어가던 1961년 5월 14일(일요일). 나는 아내에게 군복을 준비해 달라고 했다. 석 달 전 군 수뇌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하극상(下剋上) 사건’으로 강제 예편되면서 벗어뒀던 카키색 군복이다. 중령 계급장은 달려 있지 않았다. 날이 밝으면 나는 이 군복을 입고 먼 길을 나설 것이다.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이 가슴 온 구석을 채웠다. 이미 벗었던 군복을 다시 꺼내 들 정도로 나는 그해 그 봄, 그렇듯 결연(決然)했다. 사생(死生)의 각오로 덤비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절박함이 내 마음속 깊숙이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당시의 내 나이는 서른다섯. 일제 강점기를 겪고 동족상잔의 참혹했던 6·25전쟁을 군인의 신분으로 치러낸 내 생각은 영글어 있었다. 그럼에도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서른다섯의 생을 모두 접어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전날부터 꼬박 이틀 동안 무엇인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목숨을 걸어야 했던 글이었다. 이틀 동안 내가 머리를 싸매면서 썼던 선언문은 다름 아닌 ‘혁명공약’이었다. 그것은 구질서를 붕괴시키고 신질서를 만드는 일이다. 세상을 뒤집는 거사다. ‘역사는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기록해 나가는 것이다.’ 그 말이 나의 뇌리를 스쳐간다. 예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바꾸는 일, 그 혁명의 물결 앞에 서야 하는 상황이 나와 내 조국 대한민국에 닥치고 말았다.
글 솜씨가 제법 괜찮다는 평을 듣기도 했던 나였지만 그 격문만큼은 잘 써지지 않았다. 끙끙대며 썼다가 지웠다. 이틀 동안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나열했다.
52년 4월 김종필 대위의 가족사진.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전해인 60년 4·19가 벌어졌다. 자유당 말기의 암울함이 가셨을까. 전혀 아니었다. 우유부단함의 극치를 선보였던 민주당 장면 내각은 상황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민주당 정권은 정쟁과 누습(陋習), 극도의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부의 무능과 함께 국가안보의 초석인 군(軍)은 썩고 있었다. 학생들의 시위가 잇따랐지만 정부는 어쩔 줄 몰랐다. 수수방관했다고 할 정도다.
혼돈이 점차 극을 향해 가고 있었다. 6월엔 경찰관 데모가 있었고 9월엔 초등학생들도 시위에 나섰다는 기사가 신문의 주요 면을 장식했다. 61년 3월 21일 대구에선 횃불시위가 벌어졌다. 혁신계 정당과 일부 대학생이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을 폐지하라면서 횃불을 들고 행진한 것이다. 5월 13일 서울운동장에선 남북학생회담을 촉구하는 ‘민족자주통일 궐기대회’가 열렸다.
전쟁을 치른 지 10년도 안 지난 상황이었다. 내 마음은 타들어갔다. 다수 국민도 사회 혼란을 걱정했다. 국민 대부분이 결정적인 전환을 기다리는 분위기였다. 망각의 늪에 던져버린 전쟁의 기억, 그로써 우리 대한민국이 맞이할 위험은 거세고 높은 파도처럼 우리 사회에 닥칠 기세였다. 육군사관학교 8기 동기생 1300여 명 가운데 전쟁 때 절반을 잃은 나로서는 이 혼란스러운 풍조에 종지부를 찍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부패 무능한 기성 정치인들에게 민족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는 결의였다.
거사를 앞에 두고 펜 끝으로 상념이 모아지고 있었다. 영국 명재상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금언(金言)이 떠올랐다. “인생은 짧다. 시시하게 굴지 말자.” 10대 후반 시절 내가 감명을 받았던 말이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났다. 나는 다시 문장을 다듬었다. ‘은인자중(隱忍自重)하던 군부는 금조(今朝) 미명(未明)을 기해….’ 펜은 거침이 없었다. 내 글에 제법 힘이 담겼다고 여겨졌다. 은인자중하던 군부의 중심은 나였다.
궐기취지문의 서두를 그렇게 시작했다. 이제 구체적인 공약을 썼다. ‘반공(反共)’을 먼저 꺼냈다. ‘혁명공약 제1조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의로 삼고…’ 우리 대한민국이 가야 할 방향, 그러나 놓치고 있는 곳을 먼저 향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공이 앞에 놓여야 한다. 혼돈을 정리하고 국가의 안위(安危)를 먼저 따져야 했던 것이다.
결정적인 이유는 숨겨져 있었다. 거사의 중심,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이 있는 일이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았다. 49년 그가 소령 시절 남로당에 휘말려 들어간 사건 때문이었다. 그러나 좌익의 혐의는 부당했다. 그는 잠시 길을 잃었는지는 몰라도 결국 대한민국의 군에 복귀해 공산주의 북한과 맞서 싸웠다. 누구보다 나는 그 점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사람이 그를 의심했다. 이들은 공공연히 “박정희는 빨갱이다”고 떠들 정도였다. 미국도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한국에 주둔 중인 미 8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박 소장을 예편시키라고 한국 정부에 요구했다. 따라서 나는 궐기군 지도자인 박 소장에게 걸린 그런 혐의를 불식하기 위해서도 반공을 공약 1호로 내세워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뒤에 벌어진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격이지만 궐기문을 인쇄하러 가기 전 박 소장이 이 반공 국시 조항을 읽으면서 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러면서 혼잣말 비슷하게 ‘이거 나 때문에 썼겠구먼…’이라고 말했다. 거사를 앞둔 박 소장의 마음이 매듭처럼 뭉쳐져 있던 대목이었다.
시계의 시침이 자정을 훌쩍 넘겼다. 우리가 계획한 디데이, 5월 16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15일 아침 혁명취지문과 포고문 원고를 주머니에 넣고 현관을 나섰다. 아내 박영옥(朴榮玉)이 말을 꺼냈다. 당시 아내는 첫째 예리(禮利)를 낳고 10년 만에 둘째 진(進)을 임신한 상태였다. 아들인지, 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정말 하시는 거예요?’ ‘응, 하느님이 도우시면 당신과 또 만날 수 있겠지.’ 아내는 대꾸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나는 불룩해진 아내의 배 언저리에 손을 얹었다. ‘자고로 유복자는 대개 아들이라고 하니까 설령 내가 죽더라도 그놈은 아들이 틀림없을 거요. 잘 키워서 훗날 녀석에게 이 아비가 헛일 하다가 죽지는 않았다고 가르치라고.’
비감(悲感)이라면 그때의 내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아내는 아무런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군복을 차려입은 나는 아내와 함께 문을 나섰다. 지금의 서울 청파동 숙명여대 앞에 있던 집 앞의 언덕을 내려갔다. 아내는 문밖에서 떠나는 나를 바라봤다. 조금 언덕을 내려가다가 뒤를 돌아봤다. 아내가 저만치 보였다. 역시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내 심정이 그랬을까. 장미의 5월 속 적막한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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