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조선] 판사와 작가의 이중생활
정재민 작가의 본업은 판사다. 주중엔 판사로, 주말엔 작가로 글을 써온 그가 올해 세계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수상작 <보헤미안 랩소디>는 그가 고인이 된 어머니에게 바치는 송가다.
정유정, 김별아, 백영옥을 배출한 세계문학상이 올해 두 명의 공동수상자를 발표했다. 이 중 <보헤미안 랩소디>로 수상을 거머쥔 정재민 작가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현직 대구가정법원 판사로, 글쟁이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음 직한 그는 어쩌다 작가가 되었나.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주말부부의 삶을 살고 있는 그를 만났다.
판사와 작가, 두 개의 페르소나
소설 <보헤미안 랩소디>의 주인공은 하지환이다. 그의 직업은 판사. 3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사기 진료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피의자로 의심되는 의사를 사기죄로 고소하며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병원과 언론, 검사와 의사의 끈끈한 유착은 진실을 은폐하기 바쁘다. 소설은 이 같은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는가 싶더니 이내 정신분석으로 방향을 튼다. 무너질 줄 모르는 견고한 벽 앞에 정신과 상담을 받는 주인공은 무의식에 몸을 숨긴 또 다른 나를 발견한다. 이 소설은 작가가 십여 년 전 세상을 뜬 어머니의 일기장을 토대로 개작한 작품이다.
“(멋쩍어하며) 제가 글 쓰는 데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쓰고 싶을 때 쓰고 아닐 때 안 쓰면서 조금씩 써왔어요. 이 작품은 10년 전 세계문학상에 한 번 출품한 적이 있어요. 그때 떨어지고 한동안 묵혀놨다가 이후 정신분석도 받고 사기꾼 의사도 만나면서 내용을 보완해 다시 출품하게 됐어요.”
세계문학상 1회 때 출품했다가 보기 좋게 떨어진 작품을 몇 년 만에 다시 손봐 내놓은 것이 꼭 10년 만. 판사로, 작가로 이중생활을 해온 그는 드디어 어머니의 글을 세상 앞에 내놓는 데 성공했다.
인생의 8할을 소위 엘리트의 길을 걸어온 정재민 작가는 서울대 법대 재학 중에 사시에 합격했고 사법연수원 생활을 마친 뒤 판사로 임용됐다. 그런 그가 본업에 충실하기도 모자랄 시간에 소설을 쓰겠다고 하니 주변의 반응은 냉담했다.
“주변에서 다 말렸어요. 뭐 하는 짓이냐, 본업에 더 충실해서 판사로 성공하고 출세할 생각을 하라고요. 심지어 우리 집사람은 ‘당신은 글 쓰는 데 타고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고까지 했으니까요.”(웃음)
수상작 <보헤미안 랩소디>에 대해 소설가 구효서는 ‘무엇보다 정신분석학을 이야기에 끌어들였다는 점이 이 소설의 인상을 강렬하게 한다. … 이 판사 작가에게 이제는 죄와 벌, 역사와 사회에 대한 베른하르트 슐링크적인 전문성을 기대해도 좋겠다’라고 평했다. 그가 가장 인상적으로 꼽는 평 이기도 하다.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누군가 찾아봤어요. 알고 보니까 제가 정말 좋아하는 책인 <책 읽어주는 남자>(The Reader)를 쓴 작가더라고요. 딸, 아내와 불화를 빚는 남자가 주인공으로 나와요. 그 남자는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자신의 과거 때문에 누구와도 깊게 소통을 하지 못하죠. 소설은 정신분석을 통해 주인공 남자가 치유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요. 독일 작가 소설로는 최초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를 했다고 해요. 39개국에 번역이 되었을 정도로 아주 히트를 했고요. 근데 그 작가가 판사였대요. 물론 그 사람의 글은 제 글보다 수천 배 좋겠지만 (비교를 해주니) 기분은 좋더라고요.”(웃음)
이미 눈치챘겠지만 소설 <보헤미안 랩소디>에는 정신분석이 주요하게 작용한다. 작가는 자신의 정신분석 상담 경험을 소설에 무리 없이 녹여냈다.
“언젠가 집사람이 심리학 전문서적들을 읽고 있길래 저도 한번 봤어요. 근데 재밌더라고요. 정신분석학이 100년 전에 탄생한 짧은 학문이고 그만큼 논란도 많지만, 어쨌든 문학이나 의학 등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봐요. 어느새 ‘나도 한번 상담을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싸지만 내친김에 해보자 해서 했죠.”
무의식 속의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하는 과정은 작가로 하여금 몰랐던 자신을, 타자를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 그의 말마따나 “작가든 판사든 결국 인간의 심리를 이해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빛바랜 오랜 일기는, 이렇게 아들의 경험과 상상이 보태어진 끝에 세상에 공개됐다.
“쓰면서 (어머니) 생각도 많이 났고 눈물도 흘렸죠. 근데 이제는 떠나보내야겠다 싶어요. 어머니로부터 완전히 독립할 때가 된 것 같아요. 정신분석학적으로 인간은 부모의 영향에서 굉장히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해요.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프로이트조차 50대가 넘어서 아버지가 죽고 난 뒤에야 자신이 아직까지 아버지의 영향에서 못 벗어났다는 걸 깨달아요. 저 역시 그랬지만 이제는 많이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고 독립한 것 같아요. 이제야말로 홀가분한 느낌이에요.”
서울대 법대 사법연수생, 글쓰기로 결심하다
그에게 어머니의 존재가 유달리 컸던 데는 이유가 있다. 포항 촌구석에서 자란 그는 동네에서 손에 꼽는 대학 졸업자였다. 게다가 그 대학은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서울대 법대. 암으로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한 어머니의 ‘거부할 수 없는’ 바람이기도 했다.
“제가 중학생 때 어머니가 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시작하셨어요. 그래서인지 집이 편하진 않았어요. 집에 가면 늘 아픈 엄마, 그래서 더더욱 예민한 엄마가 있었으니까요. 어머니는 책에도 나오다시피 병에 걸리셨을 때부터 ‘너는 공부 열심히 해서 서울대 법대를 가 판검사 돼서 나의 한을 풀어달라’고 하셨어요. 그 말이 귀에 메아리치듯이 큰 강박을 주었던 것 같아요. 내 맘대로 하고 싶어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아픈 엄마를 보면 그럴 수가 없었어요.”
“결국 고등학교도 엄마가 원하는 학교로 갔어야 했어요. 대학도 경제학과나 미학과에 가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바람으로) 별 뜻도 없는 법학과에 가게 됐고요. 법학은 너무 답답하고 재미없을 것 같았거든요.(웃음) 그러면서 답답하니까 소설을 조금씩 쓰기 시작했어요.”
그때가 대학교 3학년 무렵이다. 독문과 수업 중 교수가 건넨 한마디는 소설을 대하는 그의 시각 자체를 바꾸어버렸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를 읽었어요. 그때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나중에 대학 가서 독문과 교수님 수업을 듣다가 생각이 나 물어봤더니, 그게 바로 소설이래요. 헤르만 헤세는 소설지상주의자인데, 그 이유는 소설에는 모든 사상문학, 사상, 예술, 철학, 음악, 종교가 다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요.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부끄럽지만 소설은 그냥 재미로 읽는 거라고만 생각했지 그 이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근데 가만 생각해보니까 정말 소설에는 다 들어갈 수 있더라고요. 나도 한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조금씩 쓰기 시작하게 됐죠.”
그러던 차에 사법연수생 시절 쓴 단편이 첫 호응을 얻었다.
“사법연수원에 들어갔는데 마침 행정자치부 문예대전이 생겼어요. 그때 장려상을 받았어요. 날아갈듯이 좋더라고요. 맨날 남들이 좋다는 것, 시키는 것만 하다가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서 얻은 결과니까요. 비록 장려상이지만 인정을 받았다는 게 정말 좋았어요. 그때 기분은 하… 사법시험 붙었을 때보다 더 좋았어요.”(웃음)
이후 “끔찍했던” 사법연수원 시절을 바탕으로 쓴 장편 <사법연수생의 짜장면 비비는 법>이 KBS 라디오극장 극화로 1달간 방송되기도 했다.
“‘흑역사’라고 하죠.(웃음) 그 책에도 표현했지만, 지우고 싶은 과거예요. 고시 공부는 나 혼자 내가 하고 싶을 때 하면 되거든요. 근데 연수원은 맨날 숙제 내주고 시험 치고 한 반에 60명씩 모아놓고 서로가 서로를 관찰하면서 경쟁해요. 등수도 1등부터 800등까지 매겨버리니까 매일이 경쟁이에요.”
지독한 스트레스를 해소할 길은 유일하게 글쓰기였다.
“힘들면 술 마시고 놀면서 스트레스를 풀듯이 소설을 썼어요. 그때 교수님이나 동료들이 다 말렸죠. 공부나 열심히 해서 점수 잘 받고 좋은 데 임관할 생각을 하라고요. 근데 그런 게 너무 싫더라고요.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듯이 가치관이 다르고 저마다의 매력이 있는데, 왜 사회는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성공을 바랄까. 1등이 아니면 인정해주지 않잖아요. 근데 그 1등도 몇 년 지나면 2등, 3등으로 추락해요. 돈 많고 학벌 좋은 사람은 그것만 보이겠죠. 근데 사람은 전부 다 그런 매력으로만 사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 것에 대한 반감이랄까, 나의 고유 본성을 지키고 싶은 방어랄까, 그런 게 소설(을 쓰는 이유)이기도 해요.”
연수원에서도 꽤 괜찮은 등수를 유지한 그가 일부러 지역 법관에 지원한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다.
“대학에서 고시 공부, 연수원에서 시험… 여태껏 너무 바쁘게 살아왔는데 이젠 좀 인간답게 살고 싶더라고요. 판사들이 너무 바빠요. 의사가 1분 만에 환자 보듯이 기계처럼 후다닥 판결문 찍어내는 건 하고 싶지 않았어요. 사람도 오래 보고 책도 좀 읽고 싶었거든요. 판사 1~2년 하더라도 그렇게 해보자, 그러려면 지방에 있어야 되겠다, 해서 내려왔어요.”
고향인 포항에서 판사직을 시작한 그는 현재 대구가정법원에서 근무 중이다. 바쁜 건 어쩔 수 없지만, 소신대로 여유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지속 가능한 작가질’ 할래
앞서 언급했듯이 <보헤미안 랩소디>의 주인공 이름은 하지환이다. 작가가 2009년 <독도 인 더 헤이그>라는 소설을 낼 당시 사용한 필명이기도 하다.
“저는 인간이 매우 다면적이라고 생각해요. 회사에는 동료의 모습이 있고, 집에 가면 아버지의 모습, 자식의 모습, 남편의 모습이 있죠. 인간은 여러 가지 페르소나를 갖고 살아요. 어떤 사람은 페르소나가 진정한 자기 자신과 일치해야만 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판사라면 법원에서나 집에서나 늘 도덕적이어야 한다고요. 그렇지 않으면 위선이라고 말하죠. 근데 전 판사로서 법원에 설 때만 반듯하고 실생활에서는 남들과 똑같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그게 건강한 거 아닐까요?”
그는 다시 한 번 페르소나의 의미를 짚고 넘어갔다.
“판사일 때 도덕적인 건 판사라는 페르소나에 충실한 거라고 봐요. 연기자가 연기할 때 배역에 충실하면 되지, 실생활에서도 그 배역처럼 살아야 되는 건 아니잖아요. 한쪽에는 도덕적인 페르소나, 다른 한 쪽에는 비도덕적인 페르소나가 있을 수 있고 그건 당연한 거거든요. 그래야 ‘나는 나쁜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는 자존감의 붕괴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그게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것 중 하나고요. 저 역시 글을 쓸 때는 판사와 다른 페르소나가 있어요. 그래서 하지환이라는 필명을 썼어요.”
근데 왜 이번 소설에서는 필명 대신 본명을 썼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이 압권이다.
“주변에서 자꾸 ‘왜 이러냐, 너 정재민인 거 다 아는데 유치하다’ 그래요. (좌중 폭소) 가명까지 써가며 글 쓰는 걸 잘난 척하냐고 삐딱하게 보는 사람도 많고요. (이번에 본명을 쓴 건) ‘알았다, 그럼 정면돌파할게’라는 선언이기도 해요. 이제 하지환이라는 필명을 안 쓴다는 생각에서 소설 속 주인공 이름으로 넣어버렸어요.”
앞으로도 본업인 판사에 매진하되 짬짬이 글을 쓸 거라는 그는 작가로 더 욕심낼 계획이 없다. 어떠한 강박도 마감에 대한 부담도 없이 즐기면서 취미 삼아 쓸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하고 싶어서다.
“장기하와 얼굴들이라는 밴드의 목표가 ‘지속 가능한 딴따라질’이에요. 저도 비슷한 생각이에요. 제가 이걸로 대단한 작가가 돼서 상을 받거나 베스트셀러가 되는 건 전혀 관심 없어요. 일단 저를 위해서 쓰는 거예요. 저의 치유와 유희를 위해서요. 저는 저한테는 글 쓰는 일이 제 고유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에요. 제가 만약 성공했다면, 그게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생각해요.”
[여성조선] 정석문·김지영 부부, 아나운서와 판사가 만나 사는 법
(조선일보 2014.08.13 15:29)
SBS 정석문 아나운서와 김지영 판사는 장거리 주말부부다. 결혼 5주년을 앞두고도 여전히 신혼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들 부부의 만남과 러브스토리를 들었다.
“아이를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열이 40도 넘게 올라서 못 왔어요.”
주말부부라 더욱 귀했을 주말을, 심지어 아이까지 떼어놓고 와야 했던 정석문 아나운서가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한다.
이날 매체를 통해 처음 얼굴을 공개하는 아내 김지영 씨는 서산에서 근무하는 판사다. 소위 말하는 엘리트에 듣던 대로 미인이기까지. 인터뷰 내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아내를 바라보는 정 아나운서가 십분 이해갈 만큼 둘은 잘 어울렸다. 미주알고주알 재미난 에피소드를 풀어놓는 ‘수다’ 과는 아니었지만 교과서처럼 반듯한, 그래서 티 하나 없어 보이는 부부의 이야기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다.
아나운서 남편과 검사 아내의 첫 만남
정석문 아나운서가 지금의 아내를 만난 건 2009년 봄, 지인의 소개팅을 통해서였다. 당시 30대 중반이었던 정 아나운서는 <모닝와이드>, <지금은 소비자 시대>, <해결 돈이 보인다> 등을 거쳐 <정석문의 섹션라디오>를 진행하던 입사 8년 차였다. 결혼을 생각할 나이였지만 대단히 급한 것도 아니었기에 그의 갑작스러운 결혼 소식은 꽤 이슈가 됐다(정 아나운서와 김지영 씨는 만난 지 4개월쯤 지난 그해 7월 18일 결혼식을 올렸다). 하객으로 자리한 지인들이 “평소 아무리 예쁜 여자 연예인들 앞에서도 시큰둥했던 정 아나운서가 늘 신부 사진을 컴퓨터 모니터에 띄워놓고 좋아하곤 했다”고 말했을 정도니, 얼마나 신부에게 푹 빠져 있던 것인지 대충 상상이 간다.
“초등학교 친구가 남편이 다닌 아나운서 아카데미를 같이 다녔어요. 그래서 서로 알게 된 다음 저를 (남편과) 소개해주었죠. 사실 저는 만나기 전부터 엄청 맘에 들었어요. 인터넷으로 찾아봤거든요. 제 주변에는 공부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일단 (상대적으로 정 아나운서의) 외모가 정말 멋졌고.(웃음) (옆에서 정 아나운서가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사람들이 욕할라” 하며 제지한다.) 이미지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실제로 만나보니까 더 좋았어요.”
만난 지 4개월 만에 결혼을 밀어붙인(?) 정 아나운서는 2살 연하의 아내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다.
“한 1주일 정도 만나니까 결혼해야겠다,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실 그 1주일도 거의 매일 만났어요.”
이들 커플에게 좀 더 눈길이 가는 데는 아내 김지영 씨의 직업 얘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대개 성공했다고 하는 직업군 1순위로 꼽는 ‘판검사’를 모두 해봤으니 말이다. 결혼 당시 경기 지역 검찰지청 검사였던 아내는 현재 판사로 충남 서산에 근무 중이다.
“저는 와이프 만나기 전까지 검사가 뭐 하는 직업인지 잘 몰랐어요. 물론 뉴스에 검사 어쩌고 하는 얘기가 맨날 나오지만, 막연하게 ‘나쁜 사람 잡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정확하게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랐거든요. (가까이에서 본 판사라는 직업은) 일단 어려운 직업인 것 같아요.(웃음) 전 아마 사법고시 봤으면 떨어졌을 거예요. 그리고 사명감 없으면 못 할 것 같고요. 현실적으로는 지방에 근무하는 게 가장 힘들어요. 법조인을 꿈꾸는 수많은 사람들이 판검사를 목표로 삼을 텐데, 물론 그 일을 통해 보람을 느낄 수 있을지 몰라도 막상 겪어보면 지방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는 게 쉽지는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 거예요. 업무량도 정말 많은 것 같고요.”
옆에서 아내 김지영 씨가 말을 거든다.
“그런 면(업무가 많아 야근이 잦은 점)에서는 아나운서라는 직업이 참 부럽더라고요.(웃음) 사실 처음에는 TV에서 보던 사람이 실제로 제 앞에 있으니까 좀 신기했어요. 근데 그것도 익숙해지더라고요. 집에서는 일반 회사원과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진짜 그냥 회사원. 정시에 출근해서 정시에 퇴근하는 회사원이요.”
직업이 직업인 만큼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화제와 이슈, 생활 속 경제를 가장 먼저 접한다는 것도 아나운서의 장점 아닌가.
“다양한 분야에 대해서 깊이는 아니더라도 많이 알고 있어요. 방송을 하면 접할 기회가 아무래도 많잖아요. 그래서 좋은 것 같아요. 심지어 집안일까지도요.(웃음) 해본 적이 없다는데 너무 잘해요.”(웃음)
지방에서 근무하는 아내 대신 ‘서울 살림’을 책임지는 정 아나운서의 꼼꼼함도 아내의 일거리를 한시름 덜어준다.
“남편은 꼼꼼하다고 해야 하나 철저하다고 해야 하나, 뭐든 계획을 짜고 준비가 철저한 편인 것 같아요. (옆에서 정 아나운서가 “아냐, 그렇지 않아”라고 하자) 내가 보기에는 그런데 본인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웃음) 그리고 남편이 호기심이 많아요. 그래서 저 만나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대를 1년 정도 다녔어요.”
이미 고려대 시절 영문학을 전공하고 경영전문대학원까지 나온 그는 호기심 때문에 아내의 전공 분야, 법에 잠깐 발을 담그기도 했다고.
“다니다 말았어요.(웃음) 처음에는 헌법, 민법, 상법, 형법 이런 거 배우다가 몇 학기 지나니까 무슨 지적재산권, 비교법 이런 걸 가르치더라고요. 사실 헌법, 민법, 상법 같은 건 배우면서도 ‘아, 그때 뉴스에 나왔던 내용이 이거였구나!’ 하고 도움이 많이 되는데, 좀 깊이 있게 들어가니까 ‘이게 대체 나하고 무슨 관계지?’ 싶더라고요.(웃음) 내가 법조인이 될 것도 아닌데 굳이 더 할 필요는 없겠다 해서 그만뒀어요. 그냥 호기심이었죠.”
주말부부는 어려워
신혼 시절 경기도 평택에서 근무했던 아내 지영 씨는 이후 광주지검 검사를 거쳐 현재 충남 서산에서 판사로 재직 중이다. 2012년 12월부터 서산 근무를 시작했으니 판사로 임용된 지 어느덧 1년 반. 당연히 주말부부 외에는 선택권이 없다.
“처음에는 검사가 되고 싶어서 검사가 됐는데 결혼하니까 여러모로 힘든 점이 많았어요. 일단 2년마다 지방을 옮겨 다녀야 하는데 그게 결혼생활 하는 데 너무 안 좋을 것 같았죠. 그에 비해 판사는 4년 정도 지방 근무를 마치면 그다음에는 좀 더 안정적으로 이동이 가능해요. 가정생활 하는 데 훨씬 좋을 것 같아서 판사로 바꾸게 됐어요.”
부부가 처음부터 주말부부로 살았던 건 아니다.
“처음엔 남편이 (당시 제가 근무하던) 평택에서 서울로 출퇴근을 했어요. 평택엔 KTX가 없으니까 누리호를 타거나 가끔 차로 오갔죠. 그렇게 1년 반 정도 살다가 제가 광주로 발령 받으면서 주말부부 생활을 시작했어요.”
혹자는 결혼 5년 차에도 여전히 사랑스러운 눈길을 주고받는 이들을 바라보며 ‘주말부부라 가능한 것 같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역시 주말부부는 권할 만한 게 못 된다.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안 좋아요. 일단 두 집 살림을 해야 되니까 품도 두 배로 들고 교통비도 엄청나게 들어요. 아이 육아도 문제고요.”
육아를 맡고 있는 정 아나운서는 아예 SBS가 있는 목동에 살림을 차렸다. 사내 어린이집도 요긴하게 활용한다.
“저희 아나운서들은 본인 방송 스케줄에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에 일찍 나오면 일찍 퇴근하는 게 가능해요. 저 같은 경우는 오전 7시 라디오를 진행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일찍 출근해서 3∼4시쯤 퇴근하죠. 그리고 아이 픽업해 오면 그때부터는 육아예요.”(웃음)
주중에는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어머니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어쨌든 육아는 전적으로 정 아나운서의 몫이다. 이제 막 네 살 된 아이를 매일 보지 못하는 엄마 역시 힘들기는 마찬가지.
“주말부부는 장점이 없어요. 아이 못 보는 게 가장 힘들죠. 평일에는 매일 화상통화 해요. 금요일 저녁에 (서산에서 서울로) 올라갔다가 월요일 새벽에 내려오는데, 주말 재밌게 놀고 월요일 아침에 아이랑 떨어질 때가 정말 엄청난 일이에요.”
아이도 엄마가 오는 금요일을 가장 좋아한단다.
“아이가 금요일 아침 되면 오늘이 금요일이라고 좋아해요. 수요일쯤 되면 ‘오늘 금요일이야?’ 하고 물어보고요. 그런 거 보면 짠하죠.”
아직 어리기도 하지만, 이런저런 면에서 아이 교육 등 육아에 대한 대략적인 계획을 짤 엄두도 나지 않는다.
“앞날을 알 수가 없어요. 어디로 발령을 받을지 모르니까요. (옆에서 아내가 “판사는 지방 근무 마치면 그 후에는 주로 수도권이나 서울에서 오래 있을 수 있대”라고 하자) 지역법관제도 없어진대. 이번 주에 기사 났더라. 한 지역에서 10년 이상 근무 못 하게 한대.”
한 지역에서 오래 아이를 키우는 건 이미 포기한 지 오래.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새 길을 찾을 땐 또 과감해야 한다.
“남편은 아이를 시골로 보내는 게 어떻겠냐고도 해요.”(웃음)
“저희 아버지가 강원도 홍천 시골에 계시거든요. 텃밭 일구시면서요. 근데 그 지역은 선생님 숫자랑 학생 숫자랑 비슷하대요. 영어나 수학 한 자 더 배우는 것도 좋겠지만 어릴 때는 특히나 그런 게(자연에서 뛰노는 게) 좋으니까요. 모르겠어요, 어떻게 될지. 저희도 아직은 막연해요.”(웃음)
그래서 둘째를 갖는 것도 당분간 계획 무(無).
“저 혼자 애 둘을 키우기가….(웃음) 일단 같이 살아야 둘째를 낳을지 안 낳을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결혼할 때 아내가 (직업 성격상) 지방 근무를 해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그때는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 닥칠지 가늠하지 못했어요. 근데 막상 경험해보니 ‘검사 이거 너무 힘들다’ 그래요. 본인도 검사보다 판사가 적성에 더 맞지 않나 해서 겸사겸사 옮기게 됐는데, 여기(판사)도… (썩 근무 조건이 나은 것 같진 않아요).”(웃음)
주말부부라는 제약에 가로막혀 계획은커녕 그때그때 상황에 적응할 수밖에 없는 부부지만 마음 한구석에 꿈은 있다. 특히 사진 찍기와 여행을 좋아하는 정 아나운서는 더 늦기 전에 아내와 둘이 세계여행을 가고 싶단다.
“미국 월스트리트의 전설적인 투자가 짐 로저스라는 사람이 있어요. 30대에 이미 억만장자가 됐고 젊은 나이에 은퇴해서 세계여행을 떠났죠. 한번은 오토바이로 전 세계를 일주해서 기네스북에 올랐고, 그로부터 10년 뒤에는 자동차를 타고 전 세계를 일주했어요. 제가 그 사람을 굉장히 좋아해요. 그래서 아내와 처음 만난 날 그렇게 꼭 한번 여행을 하고 싶다는 얘기를 했어요. 요즘에는 농담 삼아 중학교 때 애 기숙학교 보내고 우리끼리 가자’ 그래요.(웃음) 너무 나이 들면 다니기 힘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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