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경의 마이웨이] 돈 버는 맛보다 깨닫는 맛 … 공부하는 백수 택한 CEO
<4> 나이 오십에 새 길 찾은 최유미씨
나이 오십에 새 길 찾은 최유미씨
50세를 넘으면서 우리는 두 번째 선택 앞에 놓인다. 은퇴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 어렵고도 두려운 질문이다. 20대 때처럼 선택의 폭이 넓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골프에 자신의 50대를 맡겨 버린다.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인생을 중간정산 해보고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든 채우려든다. 그것이 돈이든 명예든. 오십을 넘긴 나에게도 이건 엄청난 인생의 숙제다. 답을 찾는 중이지만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누구나 말하는 뻔한 길 외에 다른 길은 없을까. 노후에도 꿈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제3의 길’은 정말 없는 것일까.
그런데 얼마 전, 나는 가장 새겨들을 만한 해답을 찾은 분을 만났다. 카이스트 박사에 전직 IT기업 CEO 출신. 스펙부터 예사롭지 않은 그녀는 알고 보니 인터넷 역사의 산증인이었다. 인터넷이 초창기 ‘아르파넷(ARPAnet)’이라는 미국의 군사 시험네트워크망이던 시절, 그녀는 몇 안 되는 국내 테스트 유저(User) 중의 한 명이었다. 벤처 붐이 일기 전부터 ‘아이캐시’라는 전자화폐를 직접 개발했고 전자상거래 표준을 만들었다. 인터넷 보안 프로토콜과 암호도 그녀의 손을 통해 탄생했다. 급기야 2004년 자신의 회사를 창업해 10여 년 간 튼튼하게 키웠다. 그야말로 잘 나가는 커리어 우먼의 행로를 걸어온 셈이다. 그런데 나이 오십을 목전에 두고 그녀는 삶의 방향을 완전히 틀었다. 회사를 매각한 뒤 자칭 ‘백수’가 된 것이다. 그것도 뒤늦게 공부에 빠져버린 백수. 바로 오늘의 주인공 최유미(51)씨다.
“회사를 10년 가까이 해보니까 내가 미친 호랑이 등에 올라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 번 시작하면 도무지 멈출 수가 없으니까. 어떨 때는 월급 줄 돈도 부족해서 은행을 몇 군데나 돌고 들어왔는데 직원들은 내 맘 같이 움직이지 않고 있었죠. 그 간극 때문인지 그리 행복하진 않았어요. 백수로 지내면서 공부하는 지금이 더 풍요롭고 자유로운 것 같아요.”
그녀는 일주일의 사나흘을 ‘남산강학원’이라는 공부배움터에서 지낸다. 강좌를 들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럿이 모여 발제하고 토론하는 세미나에 참가한다. 함께 공부하는 이들 중에는 그녀 또래의 주부들을 비롯해 고등학교를 중퇴한 열아홉 소년도 있다. 나이도 관심사도 가방끈의 길이도 서로 다른 이들이 모여 대체 어떤 공부를 하는 것일까.
“작년에 스피노자를 일 년 동안 공부했고, 올해는 들뢰즈를 읽고 있어요. 파이어벤트라는 문제적 철학자의 책도 재미있게 봤고, 괴델에 대해서도 다시 공부하는 중이에요. 그 전까지는 괴델이 수학의 논리적 한계를 보여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공부해보니 그가 결국 수학을 자유롭게 해줬다는 걸 알게 됐죠. 그걸 알아가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어요.”
그녀의 공부는 경계가 없다. 스피노자를 읽었다가 갈릴레오를 읽고, 과학철학을 공부했다가 요즘엔 머리도 식힐 겸 심청전·숙영낭자전 등의 고전소설을 읽는다. 심청전 같은 뻔한 스토리에 뭐가 있을까 싶지만 뒤틀어서 보면 또 다른 재미가 있단다.
“소설에서 심청이 빠져 죽는 장면을 보면 심청이 끝없이 넋두리를 하는 모습이 나와요. 오죽하면 뱃사공이 그만 좀 하고 가라고 할 정도였죠. 심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지고지순한 효녀가 아니었어요. 무식할 정도로 효를 지켜버리면서 역설적으로 이런 게 정말 효도냐고 물었던 시대의 반항아였죠.”
심청전을 읽으면서 기존의 질서에 반란을 꾀하는 새로운 심청을 만나고, 생물학을 공부하면서 내 몸이 수조개의 세포와 박테리아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녀에게 공부는 그런 소중한 ‘만남’이다. 지식과 정보를 얻기 위해 공부할 때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이분법으로 책장을 넘겼다. 돈이 되는 공부, 스펙을 위한 지식이 전부였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뭐가 되려고’ 하는 공부가 아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는 오히려 ‘지양’한다. 하고 싶은 모든 공부를 종횡무진 넘나들면서 생각하고 깨닫는 과정 자체가 즐거움이다. 그 모든 것들이 엮여 나가면서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삶도 조금씩 바뀌어나간다.
최유미 씨는 이를 ‘매혹’이라고 표현했다. 사랑에 빠졌을 때 그가 왜 좋은 지 말 못하는 것처럼 공부 그 자체가 그저 좋단다. 표정을 보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스무 살 연애하던 시절처럼, 얼굴이 설레임과 기쁨으로 빛이 난다. 정말 공부가 그렇게나 좋을까.
물론 잘 나가는 CEO에서 하루아침에 공부하는 백수로 적응하는 게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회사를 정리하면서 우연히 남산강학원의 세미나 모집 공고를 보고 찾아간 첫 수업에서 그녀는 무참히 깨졌다. 나름 ‘가방끈 길다’는 자부심으로 살아왔는데 ‘발제를 이 따위로 해올 거면 그만두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게다가 자신은 이곳에 수업료를 낸 ‘고객’인데 스탭들은 전혀 친절하지 않았다. 이런 이상한 곳에서 자존심까지 구겨가며 공부해야 하나. 한동안 망설였지만 결국 오기로 버텼다. 그 곳의 다른 이들처럼 그녀도 몸을 써가면서 함께 밥을 짓고 책상을 닦았다. 동시에 공부의 재미에도 점차 눈을 뜨게 됐다. 그러자 그녀의 말마따나 ‘뉴런(신경)의 배선’이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변화는 소비가 대폭 줄어든 것이다. 늘 책상 앞에 앉아있다 보니 원피스나 자켓 같은 불편한 옷은 안 입게 된다. 옷을 살 일이 아예 없어진 것이다. 예전에는 중소기업 사장일수록 없어 보이면 안된다는 생각에 꼬박꼬박 피부 관리도 받았는데 지금은 화장도 안 한다. 친정엄마가 “콩나물 장사같이 새카맣게 탔다”고 할 정도다. 늘 타고 다니던 차도 불편해 요즘은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 자신이 그런 생활을 전혀 가난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포만감을 나도 알 것 같다. 나 역시 돈 버는 일 대신, 한 두 시간이라도 공부하면 내 문제를 내가 해석했다는 만족감 덕분에 부자가 된 느낌이 제대로 든다. 바쁘게 돈 벌면서 살다 보면 내 직장·회사·가족 등 남의 문제를 풀어주느라 정작 내 안에 50년간 쌓인 문제를 제대로 풀 수 없다. 지난 50년간 내가 왜 이토록 열심히 살았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 지 모르는 채 80세까지 산다는 건 힘든 일이다. 그걸 알려면 공부해야 한다. 지식의 습득이 아닌, 내 삶의 문제를 풀어주는 진짜 공부. 그 오래된 숙제를 풀고 있는 사람은 그녀처럼 얼굴에서 광채가 날 수밖에 없다. 그 빛을 가장 가까운 가족이 몰라봤을 리 없다. 지난해 힙합을 한다고 공부는 뒷전이던 대학생 아들이 친구 녀석들과 함께 찾아왔다.
“엄마, 우린 너무 무식한 거 같아요. 우리도 우리만의 관점을 갖고 싶어요. 공부 좀 시켜주세요.”
고등학생 때는 100만원 짜리 수학 과외를 시켜줘도 공부 안 하던 아들이었다. 왜 공부 안하느냐고 물으면 “열심히 공부한 엄마가 사는 걸 보니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아서”라고 대꾸하던 녀석이었다. 그런 아들이 지금은 제 발로 찾아와 함께 니체를 읽고, 글도 쓴다. 덕분에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힘들어하던 아이들도 조금씩 자신만의 해답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공부가 주는 가장 큰 힘은 세상이 던지는 질문 자체를 바꾸게 하는 데 있어요. 세상은 ‘성적 잘 받을래? 아니면 굶을래?’로 묻지만 그 사이에는 무수한 선택지가 있어요. 그 안에 새로운 길을 낼 수 있는 힘, 세상의 질문을 거부하고 스스로 질문을 만드는 배짱이야말로 공부만이 가진 힘이죠. 그 힘을 아이들도 느꼈으면 좋겠어요.”
[김미경의 마이웨이] 문제 풀기 전 이야기 보따리 풀었다 … ‘수포자’가 변했다
(중앙일보 20140720)
<3> ‘수학 힐링’ 장우석 숙명여고 교사
대학 입시에서 불문율로 통하는 말이 있다. 영어를 잘하면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갈 수 있고, 수학을 잘하면 대학을 고를 수 있다고.
하지만 현실에선 수포자(수학 포기자)가 늘어만 간다. 이유는 하나,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중학교 때 일찌감치 수포자가 됐다. x와 y가 어쩌고, 로그가 어쩌고, 함수가 어쩌고…. 새로운 공식이 등장할 때마다 해석 불가능한 외계어를 보는 것 같았다. 열심히 풀면 15점, 한 번호로 찍으면 25점이 나왔는데, 노력할수록 떨어지는 수학 점수를 보면서 상처를 넘어선 혐오감을 느꼈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더는 마주칠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악연은 생각보다 질겼다. 아들딸이 나와 비슷한 수학 성적을 받아오면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수학을 알아야 논리적 사고가 가능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혹시 내 강의에 논리적 맹점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되고 불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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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나 문학은 왜 공부해야 하냐고 묻지 않아요. 들으면 이해가 되고 많이 알수록 교양으로 쌓이니까요. 그런데 수학은 반드시 질문하게 만들어요. 미분·적분을 왜 배워야 하느냐, 행렬을 왜 배워야 하느냐, 안 배워도 살아가는데 아무 문제없지 않느냐고 말이에요. 학생들 입장에선 당연한 물음인데 답을 주기가 쉽지 않아요. 수학사와 수학철학을 공부하는 건 그래서예요.”
올해로 16년째 숙명여고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있는 장우석(45·사진) 선생님은 다른 수학교사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 유명한 수학자의 일화부터 공식 뒤에 숨겨진 역사까지, 수학사와 수학철학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줄줄이 꿰고 있다. 수업 중 학생들이 지친 표정을 보일 때면 그는 어김없이 이야기보따리를 하나둘씩 풀어놓는다.
“로그(log)가 얼마나 아름다운 공식인 줄 아니? 16세기 유럽의 대항해 시대 때 배에 실을 수 있는 식량은 한계가 있었고, 항해 기간을 맞추지 못하면 꼼짝없이 굶어죽어야 했거든. 이걸 막기 위해서 두 명의 수학자가 만든 공식이 바로 로그야. 이 공식 덕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었지.”
그러면 열에 아홉은 눈을 반짝이며 수업에 집중한다. 어렵게만 보이던 수학 공식이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더러는 수포자의 길로 빠졌다가 이야기에 이끌려 구사일생 되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그 덕에 그는 학교에서 제법 인기 있는 교사로 손꼽힌다. 하지만 그에게도 흑역사는 있었다. 재수도 모자라 삼수를 하던 시절, 내년에는 대학생이 되려나, 이번에도 떨어지면 군대를 가야 하나, 불안과 공포가 그를 엄청나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원 수학 선생님이 던진 말이 그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수학은 신과 대화하는 학문이다. 철학의 가장 순수한 형태가 바로 수학이다.”
그 순간 수학은 그에게 전혀 새로운 무언가가 됐다. 단순한 암기 과목이 아니구나, 공식 말고 다른 뭔가가 있구나,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 먼지처럼 떠돌던 삼수생에게 그때부터 뚜렷한 목표가 생겼다. 2년간 연달아 지원했던 해양생물학과 대신 수학교육과로 진로를 바꿨고, 대학생활 대부분을 수학사와 수학철학에 관한 책들을 탐닉하면서 보냈다.
하지만 그의 지적 호기심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수학철학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 대학원 철학과에 진학했고, 탈레스와 플라톤부터 러셀과 힐베르트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시대정신을 리드한 철학자와 수학자들을 두루 섭렵했다. 같은 기간 배우고 익힌 동양철학도 그의 이론적 바탕이 됐다. 이후에도 공부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그는 현재 수학교육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중이다.
그는 그렇게 수학자의 길을 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공부가 좋아서 교사를 그만둘 수도 있었고, 책의 반응이 좋아서 학교를 뛰쳐나갔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내 길이 아닌 곳에 기웃거리지 않고 자기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차곡차곡 내실을 다지고 있다.
내가 본 그는 수학도 좋아하지만 가르치는 걸 더 좋아한다. 수학으로 사고하고 수학으로 상상력을 키우고 수학으로 힐링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싶은 열정이 많은 사람이다. 그가 2년 전 학교 밖 교실에 참여한 것도 그래서다. 학창시절 수학에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 수학을 잘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는 사람, 자녀에게 수학 못하는 유전자를 전해준 것 같아 낙심한 사람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수학하는 즐거움을 잃어버린 어른들이 모인 ‘수학에 미친 사람들’이라는 공부 모임에 강사로 참여한다.
“사실 처음엔 얼마나 모일까 했는데 대학생, 가정주부, 직장인 등 열 명 남짓한 분들이 찾아 오셨어요. 평생 안고 살아온 수학에 대한 상처와 스트레스를 이번 기회에 없애고 싶다면서요. 어려워하시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참석률도 높고 반응도 굉장히 뜨거웠어요. 끝날 즈음엔 오히려 제가 더 뿌듯하더라고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어른들을 위한 수학 힐링 모임을 계속 이어가고 싶어요.”
혹자는 다 늙어서 무슨 수학 공부냐고 타박할지 모르겠다. 이제 와서 학교에 들어갈 것도 아니고, 수학을 배운다고 해서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무슨 쓸모가 있어서 굳이 수학을 배우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이 모임의 진짜 매력을 알면 180도 달라진다.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시험 걱정이 없다. 틀릴까봐 불안해할 필요도, 상처받을 이유도 없다. 둘째, 정해진 기한 없이 이해될 때까지 충분히 들여다볼 수 있다. 셋째, 암기에 대한 부담 없이 공식에 얽힌 철학과 역사를 함께 배우면서 인문학적 사유를 즐길 수 있다. 넷째, 논리적 사고력을 키우는데 효과적이다. x, y, z나 1, 2, 3은 아무런 의미도 담고 있지 않다. 뜻이 없으니 오해할 것도 다툴 일도 없다. 그래서 수학 문제를 많이 풀다 보면 생각과 생각을 보다 정교하게 연결하고, 모순 없이 논리적으로 결론을 끌어내는 훈련이 자연스럽게 된다. 당신이 가장 여유 있고 가장 철학적이고 싶을 때 가장 먼저 시작해야 할 공부가 바로 수학인 것이다.
장우석 선생님은 여느 수학교사와는 조금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존재조차 낯선 수학사와 수학철학을 20년 가까이 공부했고, 공부한 내용을 두 권의 책으로 펴냈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수학 강의를 했다. 은퇴 후 계획도 이미 세워놓은 상태다.
“수학자 힐베르트가 수학을 그만두고 시를 쓰겠다는 제자에게 이런 말을 했어요. ‘어쩌면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어차피 자네에게 수학을 할 정도의 상상력은 없었으니까 말이야’라고요. 역설적인 말이죠? 그러나 사실입니다. 수학은 현상을 보고 규칙을 상상해 내는 어마어마한 학문이니까요. 수학공부 가르치면서 제가 배운 건 바로 ‘상상력’입니다. 그 상상력을 바탕으로 은퇴 후엔 추리소설을 쓰고 싶어요.”
그는 수학을 사랑한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은 더 사랑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수학으로 생각하고 상상하는 일’이다. 아마도 그가 생의 마지막까지 써내려갈 마이웨이의 기본공식은 수학에 대한 애정이지 않을까. 그의 수학사랑이 무수한 상상으로 분화되어가는 모습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김미경의 마이웨이] 반지하서 굶으며 꿈 그리기 7년 … 세상이 그를 알아봤다
(중앙일보 20140629)
<2> 웹툰 작가 이종범
경기도 부천시 상동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작업실에서 이종범 작가가 자신의 책을 들고 웃고 있다. [사진작가 김도형] |
“좋아하는 일로 생존하고 싶었다.” 우리네 아버지들은 태어날 때부터 한 가지 길이 정해져 있었다. 사회가 원하고 집안이 허락한 유일한 길. 바로 ‘생계부양자의 길’이다. 그때는 그것만이 인정받는 남자의 선택이었고 대다수의 남자들이 묵묵히 그 길을 갔다. 물론 오십이 넘으면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회한으로 가슴 한 쪽이 허해진다. 나는 정말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아왔나. 내가 어렸을 때 꿈꾸던 모습은 이게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들은 ‘안정’을 이유로 여전히 자신의 길을 대물림한다. 꿈이라는 것이 뭔지 알아버린 요즘 아들들에게. 그러나 아버지의 지당하신 말씀을 들으며 그들은 속으로 생각한다.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는 없는 걸까. 생계를 책임지는 ‘좋은 아들’인 동시에 꿈을 이뤄 가는 드림워커가 될 수는 없을까. 그것이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청춘들의 인생숙제다.
마침, 나는 그 두 가지 사이에서 남다른 해법을 제시하는 한 사람을 찾아냈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 웹툰 작가 이종범(32)이다. 말 그대로 그는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다. 요즘에야 웹툰 작가가 인기직업으로 떠올랐지만 여전히 아버지들이 보기에는 ‘밥 굶기 딱 좋은’ 일이다. 특히나 작가 지망생과 백수는 우리 사회에서 ‘동의어’로 통한다. 그도 데뷔하기 전까지 꼬박 2년간 굶기를 밥 먹듯 했다. 연재를 하기 위해 수많은 매체의 문을 두드렸지만 번번이 거절당하곤 했다.
“물이 발목까지 차오르는 반지하 작업실에서 마감을 하고, 미숫가루로 연명하다 삼각김밥으로 곡기를 채우곤 했어요. 애초에 부모님의 도움을 받는 것은 ‘옵션’에 없었죠.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했거든요. 덕분에 일찌감치 제 한계를 테스트할 기회는 많이 얻은 셈이죠. 만약 제가 부잣집 아들이었다면 지금보다 운이 훨씬 더 좋아야 했을 거예요.”
아버지는 평범한 샐러리맨이었고 그는 삼 남매의 둘째였다. 어렸을 때부터 만화가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그 꿈을 지원해줄 환경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일로 생존하려면 재능을 키울 ‘절대적 시간’이 필요하다. 돈 걱정 없이 오롯이 좋아하는 일에만 몰입할 시간. 그도 전업 작가로 데뷔하려고 보니 스스로를 키우는 데 최소 3년 이상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더구나 데뷔는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빈약한 실력과 더 빈약한 통장 잔액. 이런 차디찬 현실과 뜨거운 꿈의 무간지옥에 빠질 때 많은 이가 자아분열을 거듭하며 길을 잃는다.
여자 친구에게 밥 한 끼 사고 싶은 내가, 맨날 얻어먹기만 하는 나를 부끄러워한다. 멋진 스토리를 열망하는 내가, 천재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나를 조롱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것은 ‘착한 아들’인 내가 작가 지망생인 나를 무릎 꿇리고 야단치는 일이다. 그도 데뷔하기 전 명절 때마다 그의 직업을 묻는 친척들에게 난감한 표정을 짓는 부모님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내 안의 나를 괴롭히는 대신 끊임없는 화해를 모색했다. 예를 들면 추석 때 갈비 한 짝을 집에 들고 가기 위해 보험설계사 시험을 치기도 했다. 어떤 보험회사가 시험에 합격하면 갈비 한 세트를 준다는 광고를 보고 일주일 강의 듣고 공부해서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다시 가서 만화를 그렸다. 주말엔 재즈밴드 드러머로 결혼식 공연을 해 돈을 벌었다. 밤에는 영어 학원에서 영문법 강의도 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양쪽에 발을 걸친 채 오랫동안 걸어왔다. 양다리를 걸쳤다는 것은 각각 외다리를 걸친 것과 마찬가지다. 외다리로는 오래 버틸 수 없으니 양쪽 사이를 번갈아 가며 뛰어야 한다. 마치 두 여자를 동시에 사랑하듯 당연히 몸은 두 배로 바쁘고 힘들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것은 내 안의 수많은 나를 설득하는 일이다.
“수많은 나를 이해시키고 화해시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래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디테일하게 아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자기이해가 돼야 주변의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으니까요.”
모든 디지털 이미지들은 ‘픽셀’이라는 최소단위로 이뤄져 있다. 픽셀이 많아질수록 해상도는 높아지고 이미지는 선명해진다. 반대로 픽셀이 적을수록 해상도는 떨어지고 수많은 해석이 가능한 추상화처럼 보인다. 이종범 작가는 ‘나’라는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줄 ‘경험의 픽셀’이 적으면 ‘자기이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행히 그는 본능적으로 안 가본 길은 일단 가고 봤다. 그것이 성공이든 실패든 자기이해의 중요한 조각이 될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런 면에서 제게 대학생활은 신세계였죠. 교양수업으로 수화를 배우면서 소통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학교의 재즈 동아리에서는 제법 악기 다루는 데 재능이 있다는 것도, 아르바이트로 학원 강사를 하면서 무언가를 말하고 가르치는 일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았죠. 그렇게 발견하고 키워온 여러 명의 ‘나’는 지금의 저를 만든 든든한 지원군이 된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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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좋아하는 일로 생존하기’라는 우리 시대 청춘의 절대 로망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마찬가지다. 여건이 안 되니 좋아하는 일에 집중해 단시간에 빛을 보는 것은 어려웠다. 대신 오랫동안 차근히 준비했다. 힘들면 쉬었다 가고, 돌아서 가더라도 자신을 믿고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알았다. 좋아하는 일들이 서로 부딪칠 때는 어느 한쪽을 포기하거나 투명인간 취급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좋아하는 일들로 자신의 삶을 무지개처럼 채울 수 있었다. 아마 그가 아버지 나이 정도 되면 안 가본 길에 대한 미련은 훨씬 적으리라.
사람마다 한 가지 길을 선택하면 나머지 길은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삶의 길은 숱한 회한이 남기 마련이다. 우리들의 아버지가 다 그러했듯이. 아버지처럼 살지 않으려는 요즘 젊은 청춘들에게 이종범의 마이웨이는, 그래서 힘들지만 가보고 싶은 길이다.
[김미경의 마이웨이] 오기로 버틴 30년, 이젠 해외서 주목하는 ‘철의 여인’
(중앙일보 20140608)
경기도 안성시에 위치한 작업실 앞마당에서 변숙경 작가가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아래 작은 사진은 꽃을 형상화한 철 조각품 ‘새벽 일기’ |
대한민국에서 예술가로 산다는 건 고행의 길을 걷는 것과 같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올라섰다지만 예술 영역의 성장은 더디기만 하다. 작품을 구매하는 컬렉터 층이 늘고 있으나 벽에 거는 회화 작품에 쏠려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에 비해 크고 무겁고 고가에 속하는 조각 작품은 여전히 수요층이 드물다. 온전히 작품만으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기꺼이 이 가시밭길을 걷는 이가 있다. 조각가 변숙경(51) 작가다.
그녀는 누가 봐도 작고 아담한 체격에 소녀처럼 맑은 얼굴을 지녔다. 겉모습만 보면 수t에 달하는 대형 조형물을 다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그녀는 여성 조각가로는 드물게 흙을 빚거나 돌을 깎는 대신, 크고 두꺼운 쇠를 직접 자르고 구부리고 용접을 해서 작품을 만든다. 철을 다루는 솜씨가 근육질 남자 못지않다. 몇 마디 나눠보니 성격도 ‘철의 여인’처럼 단호한 면이 있다.
“조각으로 돈 많이 벌었느냐고요? 아마 빚이 더 많을걸요. 몇 해 전에는 차비가 없어서 집 밖에 못 나간 적도 있었어요. 그래도 단 한 번도 조각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조각 작업을 할 때 가장 행복하고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다시 태어나도 조각가로 살고 싶어요.”
그녀는 자신의 길을 일찌감치 찾았다. 학창시절 취미로 시작한 그림이 조소과 진학으로 이어졌고 이후 자연스럽게 조각가의 길을 걸었다. 10년 뒤쯤 평생의 조각 소재가 된 철을 만나고, 그로부터 몇 년 후 무한한 창조적 영감을 주는 뮤즈(muse·예술적 영감의 원천) 거미줄과 조우하면서 그녀의 길은 더욱 분명해졌다. 문제는 그 다음. 마이웨이를 찾는 것까지는 비교적 간단했는데, 지켜내기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네 친구들은 다 교수가 됐는데 너도 편히 살면 안 되는 거니?”
나이 마흔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어머니는 하소연하듯 말하곤 했다. 또래 친구들처럼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취미 정도로 하면 좋으련만, 굳이 조각가라는 고된 길을 걷는 딸을 어머니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작가로 살다 보면 한 번은 마주하게 되는 갈림길이 있다. 전업 작가로 살 것인가, 돈 버는 일을 병행할 것인가. 어느 쪽도 선뜻 택하기 어렵다. 전업 작가로 살자니 스스로 가난을 허하기 쉽지 않고, 그렇다고 경제 활동을 병행하자니 작품에 쏟는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해진다. 진퇴양난의 연속이다. 변 작가에게도 그것은 풀지 못한 숙제였다. 겉으론 “엄마, 난 창업했잖아”라고 밝은 표정을 지었지만, 마음속에선 끊임없이 갈등의 소용돌이가 일었다.
“힘들었죠. 밖에선 작가로 인정해주는데 가족들은 ‘그거 돈벌이도 안 되는데’라며 한마디 툭 던져요. 가슴이 너무 아팠죠.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더라고요. 저는 하나를 손에 쥐면 다른 건 절대 생각을 못해요. 아무리 재빨라도 작가와 직업 활동을 동시에 할 수가 없어요. 그걸 너무 잘 알아서 오히려 결정이 쉬웠어요. 전업 작가의 길을 가기로 한 거죠.”
이런 선택의 밑바닥에는 언니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다정했던 세 살 터울 언니는 부모님 몰래 재료비를 챙겨주며 그녀의 작가 인생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이 무너졌고, 그녀는 언니를 잃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작업을 더는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몇 달 후, 그녀는 우연히 언니의 흔적을 발견했다. 사고 당일 언니가 통장에 넣어준 돈 50만원. 그 순간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숙경아, 작가로서의 인생을 절대 포기하지 마.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
이후 그녀의 작가 인생은 더욱 단단해졌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많은 돈을 버는 것보다, 천천히 가더라도 프로 작가로 살아남는 것이 나답게 생존하는 길임을 깨달은 것이다. 밤낮으로 작업에 매달렸다. 매년 수십 점 이상의 작품을 쏟아냈다. 작품 하나에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 재료비 등을 고려하면 대단한 다작이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프로 작가로의 길을 내디뎌 가던 어느 날, 그녀의 자존심에 심하게 금이 그어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작업실 인근에 골프장 시설이 들어서면서 10년간 터를 다져온 부지를 강제 수용당했다. 그 과정에서 작품 수십 점이 훼손됐다. 보상을 요구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수리비만 주겠다”는 것. 그녀의 작품을 ‘예술품’이 아니라 대량 생산이 가능한 ‘공산품’으로 취급한 것이다.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내 작품 훌륭하다, 나 이런 작가다,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전 재산 3억원을 털어 개인전을 열었죠. 그 덕분에 빈털터리가 됐지만 무모했던 오기가 뜻밖의 수확을 가져다주기도 했어요. 전시회를 계기로 제 작품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사람들을 만났거든요.”
그녀는 요즘 세계적인 조각 도시인 이탈리아 피에트라 산타(Pietra Santa)를 수시로 오가며 새로운 작품을 구상 중이다. 루카현대예술센터(Lu.C.C.A. Museum) 관장 마우리치오 바니는 자청해서 그녀의 현지 매니지먼트를 맡고 있고, 아트갤러리 페트라르테디지오니(Petrartedizioni) 대표 지오바니 보베키는 의욕적으로 그녀의 작품집을 제작 중이다. 모두 전시회가 맺어준 인연이다. 9월께는 이탈리아에서 첫 해외 개인전도 연다. 유럽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강철을 보면 미동 없이 그 자리에 멈춰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미시세계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립자들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단단하고 강한 물질일수록 그 안의 움직임은 더욱 격렬하다. 강철이 강철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격렬한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마이웨이를 지켜낸 힘도 그렇다. 단순하게 보면 남에게 지기 싫은 마음이 그녀를 지금의 자리로 이끈 것 같지만, 실은 죽을 때까지 작가답게 살고 싶다는 스스로를 향한 강한 오기가 그녀 내면에서 격렬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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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단 한 점, 유일하게 다른 제목을 가진 작품이 있다. ‘에버 크라운(ever crown)’. 의도한 게 아닌데 만들어 놓고 보니 꼭 가시 면류관 같아서 이렇게 이름 지었다 한다. 마이웨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내 꿈이 준 고통까지 한 몸에 끌어안고 기꺼이 가시밭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30년간 내적 오기와 싸우며 그녀는 무심코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60세쯤 되면 서서히 작업을 줄여나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오기로 만들어낸 유럽에서의 두 번째 전성기. 걸어온 길만큼 걸어가야 할 길을 발견한 그녀는 가슴이 뛰어서, 열정이 샘솟아서, 도저히 조각을 놓을 수가 없다. 면류관의 고통이 계속될 것임을 잘 알지만 그녀의 마이웨이는 결코 멈출 계획이 없다. 그녀의 새벽 일기는 영원히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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