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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 미/여행정보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든 예술품 (광주매일 2014. 01.10. 00:00)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든 예술품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 진안 고원길 (고개 너머 백운길)

사라져가는 것, 잊혀져 가는 것, 그 아련한 기억의 흔적을 따라
느림의 여백에서 삶의 소중한 행복을 배우며 나만의 길을 걷다

 


닥실고개에서 신전마을까지의 완만한 경사지. 눈 덮인 고랭지 채소밭을 걷다보니 마치 동화속 풍경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북에 개마고원이 있다면, 남에는 진안고원이 있다. 산 많고, 물 맑은 진안은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고, 비교적 현대문명의 손때가 덜 묻은 소박한 마을이 아직도 남아있다. 여기에 마을과 고개, 마을과 들을 이어주는 구불구불한 길이 있다. 진안의 마을과 마을, 고개와 고개를 잇는 길을 ‘진안 고원길’로 연결하여 사람들이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진안 고원길 1구간인 진안군 백운면의 마을길과 고갯길을 걸을 참이다. 진안군 백운면에 들어서니 눈 쌓인 고원분지가 별천지처럼 다가온다. 백운면소재지를 지나 평장리에서 노촌리 방향으로 1차선 도로를 따라가니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영모정이 도로 아래로 내려보인다. 하얗게 눈 덮인 영모정은 느티나무·서어나무·상수리나무 같은 활엽수림 가운데에서 묵언정진 중이다. 영모정은 미계 신의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69년에 세워진 정자로 1984년 전북 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영모정 지붕은 이 지역에서 나는 너새(돌기와)를 얹었다.

영모정에서 도로를 따라 300m 정도 올라가니 역시 미재천변에 미룡정(美龍亭)이라는 편액이 붙은 또 하나의 정자가 둥지를 틀고 있다. 미룡정은 1990년 거창 신씨 종중에서 세운 팔각지붕을 한 정자다. 신광재에서 발원한 미재천 물줄기는 노촌호에서 머물렀다가 미룡정과 영모정 앞을 적시며 흐른 후 평장리를 지나 섬진강에 합류된다.

돌 너와지붕으로 만든 ‘영모정’. 효자 신의연의 효행을 기리고 본받기 위해 고종6년(1869년)에 세워졌다. 정면 4칸의 팔각지붕을 이루고 있으며, 너와를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미룡정 뒤 밭길을 돌아가니 인삼밭이 나온다. 진안지역에서는 일찍부터 인삼이 재배되었다. 기록상으로도 370여 년 전 지금의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에서 어느 도인이 인삼을 재배한 후부터 심기 시작하였다는 전설이 한국인삼사(1980년 발행)에 기록되어 있다. 1974년에는 진안에 전북삼업조합이 설립되고, 1997년에는 진안인삼종합처리공장까지 갖추게 되었다.

밭길을 지나 닥실고개로 오르는 산길로 접어든다. 간밤에 내린 눈으로 나무에는 하얀 눈꽃이 청순하게 피어 있다. 잔가지에 핀 눈꽃은 섬세하고 우아하다. 아름다운 눈꽃은 터널을 이루어 환상적이기까지 하다. 하얀 눈꽃에다가 길을 걷는 사람들의 울긋불긋한 옷차림이 또 하나의 그림이 된다.

닥실고개에 오르니 넓고 넓은 밭이 펼쳐진다. 닥실고개에서 신전마을까지의 완만한 경사지에서는 무·배추 같은 고랭지채소가 재배된다. 눈 덮인 고랭지채소밭을 걷고 있노라니 대관령길을 걷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고랭지채소밭 뒤로는 멀리 선각산이 고개를 내민다. 이곳은 고랭지채소가 탐스럽게 자라는 여름이나 가을에도 운치가 있겠지만, 오늘처럼 눈 쌓인 고원의 풍경은 동화 속 나라 같다. 천진난만하게 눈길을 걷는 사람들의 모습은 동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일 터.

신전마을에 가까워지자 오른쪽 멀리 내동산이 듬직하게 서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신전마을은 속세에 물들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 신전마을에 들어서자 100년 이상 마을과 함께 해온 소나무가 운치를 더하고, 마을 어귀에는 키 25m 둘레 2.1m에 달하는 300년 된 당산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서 있다.

신전마을에서 배고개로 가는 길은 구불구불 곡선을 그리며 이어진다. 곡선이 가져다주는 정겨움을 보듬고 배고개를 넘는다. 배고개는 신전마을과 상백운 사람들이 수도 없이 오가면서 즐거움과 애환을 나누었을 것이다.

배고개를 넘어 밭길을 따라 걷다보니 상백암마을이다. 상백암마을 처마에 매달려 있는 고드름이 고원지대 진안의 겨울풍경을 대변해준다. 상백암마을을 감싸고 있는 선각산과 덕태산이 백운계곡을 가운데 두고 나란히 서 있다. 마을 앞으로는 텅 빈 들판이 펼쳐지고, 들판 너머로 내동산이 안산을 이룬다.

상백암마을에서 은암마을로 가는 곡선 길은 외갓집 가는 길처럼 정답고 소박하다. 부드러운 산줄기와 사람들이 일군 밭 사이를 지렁이가 기어가듯이 구불구불 이어가는 길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든 예술품이다. 빨리 가는 편리함이 아니라 느리게 가는 불편함에서 마음의 여백이 생기고, 그 여백에 행복이 깃든다는 사실도 이 길을 걸으며 깨닫게 된다.

은안마을에 도착하니 직사각형 모양으로 지상에 떠 있는 창고가 눈길을 끈다. 둑집이라 불리는 창고인데, 옛날에는 둑집에 나락을 저장해 두고 그날 하루 가족이 먹을 만큼만 내다가 절구질을 한 후 챙이(키)로 겨를 걸러내고 나서 밥을 해 먹었다고 한다. 흙두고개로 가면서 은안마을을 돌아보니 마을 뒤의 부드러운 산줄기는 집이 되고, 마을 앞 논에 하얗게 쌓인 눈은 이불이 된 것처럼 포근하다.

원반송마을은 데미샘에서 발원하여 신암리를 거쳐 내려오는 섬진강 최상류에 있다. 아직은 강이라 하기에는 멋쩍은 이곳 섬진강변 원반송마을에는 500년 가까이 자란 느티나무들이 천변 숲을 이루고 있다. 원반송마을은 고려말 충신인 만육 최양선생의 후손이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후손들은 마을 앞 섬진강가에 최양선생 유허비를 세우고 그 위에 구남각이라는 비각을 건립하였다. 구남각 옆에는 1896년에 건립되고 이후 수차례 중수된 개안정(開岸亭)과 1927년에 세운 학남정(鶴南亭) 등 두 개의 정자가 섬진강변 느티나무 아래에서 마을 사람들의 쉼터역할을 하고 있다.

섬진강은 울창하게 서 있는 느티나무 숲을 지나 유유히 흘러가고, 고원길은 내동산을 바라보며 너른 백운들판 곁의 농로를 따라서간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백운들판 곳곳에도 인삼밭이 많아 인삼 고장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들판 너머로는 백운면소재지도 바라보이고, 멀리 산줄기 너머로 마이산의 두 봉우리가 말귀처럼 솟아있다.

점점 내동산에 가까워지면서 다시 섬진강을 만난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밭길 뒤 원덕현마을이 내동산 남동쪽 자락에 둥지를 틀었다. 사람이 살지 않아 쓰러져가는 빈 집에서는 우리 농촌의 현주소를 보는 듯하여 가슴이 아프다. 15가구가 살고 있다는 원덕현마을 회관 앞에 도착하니 마을회관에서 할머니 몇 분이 나오셔서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준다.

“어디서 오셨수. 노인네 밖에 없는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북적이니 반갑네유.”



※여행쪽지
▲진안 고원길 1구간 ‘고개 너머 백운길’은 10.2㎞ 로 쉬엄쉬엄 걸어도 3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네 개의 고개를 넘지만 마을과의 고도 차이가 별로 없어 힘들지 않고 걸을 수 있다.
▲진안군 백운면소재지에서 하루 세 번(08:50, 13:10, 18:20) 다니는 노촌리행 군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영모정에 내리면 된다.
▲백운면소재지 농협 옆의 백운회관(063-432-4552)에서 오리주물럭(10,000원)이나 백반을 먹을 수 있다. 주변에 생산되는 채소반찬이 정갈하다.

 

 

역사의 애환을 함께 해온 성곽에서 평화를 염원하다 
 (광주매일 2014. 01.24. 00:00)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 담양 금성산성길


병풍처럼 둘러진 절벽들…임진왜란 의병 거점으로
첩첩 푸른 산자락 굽이굽이 파란 물길 한폭 산수화

 

지렁이처럼 길쭉하게 뻗어나간 외성 끝에 병사를 지휘하는 장수처럼 우뚝 서 있는 보국문을 보며 내 안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를 염원한다.

 

금성산성 주차장에서 임도를 따라 산성으로 향한다. 임도 주변에는 송림이 울창하고 잠시 담양의 상징인 대나무밭을 지나기도 한다. 푸른 적송 숲은 삭막한 겨울 분위기를 청신하게 해준다. 완만한 임도를 따라 걷다보면 눈 쌓인 산들이 의젓하게 다가오고, 주변의 나무들이 슬며시 말을 걸어온다.
나목 상태의 활엽수로 이루어진 호젓한 산길을 따라 올라가니 금성산성 남문이다. 남문은 외문(外門)인 보국문(輔國門)과 내문(內門)인 충용문(忠勇門)으로 되어있다. 보국문은 높은 성벽에 문을 내고 2층에 누각을 설치하여 사방을 감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

문루에 올라서니 가깝게는 담양들판과 담양호·병풍산·추월산이, 멀리는 무등산과 광주·화순을 둘러싸고 있는 첩첩한 산들이 그림처럼 다가온다. 내남문인 충용문에서 100m 정도 돌출되어 외남문을 설치한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금성산성의 확실한 축조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쌓은 성으로 추정된다. 장성 입암산성, 무주 적상산성과 함께 호남 3대 산성 중의 하나인 금성산성은 운대봉·시루봉·노적봉·철마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외성과 내성으로 성벽을 쌓았다. 1895년 제작된 금성진도(金城鎭圖)를 보면 내성에는 동헌, 대장청, 내아 등 관청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수평을 이룬 호수와 하늘을 향해 높아지려는 산이 만나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 이렇게 담양호와 추월산, 병풍산이 한 폭의 산수화가 된다.

주변이 절벽이라 접근하기 어려운 지리적 특성 때문에 임진왜란 때는 의병의 거점이 되었으며,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는 이곳에서 혈전이 벌어져 각종 시설이 불타고 동·서·남·북문의 터만 남게 되었다. 한국전쟁까지 겪으면서 폐성이 되다시피 한 금성산성은 1994년부터 성곽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현재는 외성 6천486m 내성 859m 총 7천345m에 이르는 산성이 완성되었다.

충용문에서 내려다본 보국문은 우리의 발걸음을 쉽게 떼지 못하게 한다. 충용문에서 좁고 길게 뻗어나간 성벽 위에 우뚝 서 있는 보국문은 뒤편의 병풍산·추월산 등과 어울려 한 폭의 수묵화가 된다. 외침을 막기 위해 설치했던 산성과 문루겠지만 평화로운 시기에 보는 풍경은 절경 중의 절경이다.

충용문 안쪽은 경사가 완만한 분지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서 골짜기로 내려서면 보국사터를 거쳐 서문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보국사터 방향으로 내려가지 않고 동문으로 향한다. 울창한 활엽수림과 아름드리 적송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숲길을 따라 가다보면 내성(內城)을 지나기도 한다. 내성을 지나 산허리를 돌아 동문으로 가는 길은 울창한 숲과 포근한 흙길이 고요하고 적막하다.

동문에 도착하니 시루를 엎어 놓은 듯 우뚝 서 있는 시루봉이 지척이다. 강천산에서 북문을 거쳐 연대봉과 운대봉을 지난 호남정맥은 시루봉에서 광덕산으로 뻗어나간다. 동문에서 운대봉·연대봉을 지나 북문까지는 원래의 성곽이 남아 있어 정감이 넘친다.

이제 본격적으로 성곽 위를 걷는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는 있는 그대로 성이 되고, 바위가 없는 능선에는 돌을 쌓아 산성을 만들었다. 산성이 지나는 연대봉·운대봉·시루봉 같은 봉우리는 천애절벽을 이루고 있지만, 산성 안쪽으로는 완만하고 포근한 골짜기를 이루고 있다. 성터로서는 천혜의 입지조건이다.

북바위와 운대봉을 거쳐 산성길을 걷다보면 사방에서 붕긋붕긋한 산봉우리들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담양의 불태산·병풍산·추월산은 물론 광주 무등산과 화순 백아산·모후산, 순천 조계산, 곡성 동악산, 남원 문덕봉·고리봉 같은 산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옅은 운무에 휩싸여 환상적인 풍경화를 그려낸다. 바로 아래의 강천산과 광덕산 사이에 형성된 강천사계곡은 깊고도 깊다. 산줄기를 따라 둥그렇게 원을 그린 금성산성의 모습도 한눈에 볼 수 있다. 성곽을 밟으며 세상의 평화를 염원한다. 지구촌 곳곳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강대국이 경제력으로 약소국을 지배하는 현상은 이미 보편화된 현실이다. 자연이 그대로 살아있는 산길을 걸으며 평화는 산속의 동·식물처럼 서로 의지하며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에 있음을 상기한다.

정상인 연대봉(603m)에 서서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산성을 바라본다. 산줄기를 따라 돌을 쌓아 만든 산성의 부드러운 곡선미가 미적 감각을 고조시킨다. 외부의 침략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지만 후대에 보는 산성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다.

사방에서 다가오는 산봉우리들은 산 공화국을 보는 듯하다. 산에 의지해서 마을이 형성되고, 산에서 내려온 물로 농경지를 이루어 먹을거리를 생산해서 살아온 인간의 삶을 생각하면 산은 어머니와 같다. 어머니 같은 산의 품속에 깃들어 있으니 포근하고 아늑하다. 잎을 떨어뜨리고 추운 겨울을 나고 있는 나무들의 모습은 의연하다. 모진 눈보라를 견딘 뒤라야 새싹이 나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생명은 눈물겹도록 간절하다.

북문에 도착한다. 성문터만 남아 있던 곳에 문루를 복원해 놓으니 성문으로서의 격조가 한결 높아졌다. 북문에 서 있으니 추월산과 담양호가 손에 잡힐 듯 가깝고 병풍산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손짓한다. 복원된 산성과 추월산·담양호가 어울린 모습에 한참동안 넋을 잃는다.

담양호를 발아래 두고 복원된 성곽을 따라 서문터로 향한다. 급경사를 내려가면서 서문터 건너편의 철마봉과 험한 비탈을 따라 이어지는 산성을 정겹게 바라본다. 서문터에 내려서니 바로 아래로 보국사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이 흐른다.

철마봉으로 연결되는 산성길을 걷는데 산성산과 추월산 사이의 골짜기를 막아 만든 담양호가 산줄기를 굽이돌면서 검푸른 색상을 띤다. 수평을 이룬 호수와 하늘을 향해 높아지려는 산이 만나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 이렇게 담양호와 추월산, 병풍산이 한 폭의 산수화가 된다.

철마봉에 오르니 다시 담양들판과 무등산이 가슴에 안겨온다. 철마봉에서 노적봉, 남문으로 가는 능선은 옛 성곽이 구불구불 이어지며 곡선미를 자랑한다. 산성길을 따라 걷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머니의 품속에 깃든 아기처럼 편안해 보인다. 금성산성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보국문에 선다. 지렁이처럼 길쭉하게 뻗어나간 외성 끝에 병사를 지휘하는 장수처럼 우뚝 서 있는 보국문을 보며 내 안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를 염원한다.


여행쪽지

▲금성산성길은 주차장에서 남문-동문-북문-서문-철마봉-남문을 거쳐 주차장까지 10.9㎞로 4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담양읍과 담양리조트 근처에는 식당이 많다. 그중에서 담양읍에 있는 금송정(061-382-9009)의 죽순떡갈비정식(1만5천원)을 추천한다. 음식은 떡갈비와 함께 퓨전정식형태로 정갈하고 먹음직스럽게 나온다.

 

 

 감귤밭길과 숲길 지나면 해변 바위길이 나오고

 (광주매일 2014. 02.14. 00:00)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 제주올레 5코스 (남원포구-쇠소깍)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 산책로로 꼽히는 큰엉 경승지 산책길에서 만난 코발트빛 바다.

 

남원포구에 도착하니 바다가 춤을 추고, 현무암 돌담이 길안내를 한다. 외로움에 지친 바다는 올레꾼들이 마냥 반갑기만 한 듯 밀려오고 부서지곤 하면서 말을 걸어온다. 바다가 말을 걸어올 때면 바람도 숨죽여 조심스럽게 지나간다. 바다와 정답게 얘기하고 싶은 아낙은 어느새 파도를 맞으러 해변으로 향했다. 낚시 하는 마을 청년도 해안 바위에서 이미 바다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 산책로로 꼽히는 큰엉 경승지 산책길로 접어든다. 동백나무, 후박나무 같은 아열대식물이 숲을 이룬 산책길은 겨울이지만 삭막하지 않고 산뜻하다. 길에 깔아놓은 현무암 판석은 짜 맞춘 모양이 마치 우리의 옛 여인들이 천 조각을 모아 만든 조각보처럼 아기자기하다.

큰엉 산책로에서 잠시 해변으로 내려선다.

화산이 폭발하면서 흘러내리던 용암이 바닷물을 만나 갑자기 굳어지면서 형성된 바위들의 모양이 그대로 드러난다. 구멍이 뻥뻥 뚫려있는가 하면 용암이 흐르던 형태가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완만한 경사를 이루다가도, 가파른 절벽이 된다.

산책로 아래 절벽에는 큰엉이 줄줄이 입을 벌리고 있다. 큰엉은 큰 바위가 바다를 집어삼킬 듯이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언덕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절벽에 있는 큰 바위동굴을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2㎞에 이르는 큰엉 산책로가 끝나는 지점에 가장 규모가 큰 큰엉이 있다. 20여m에 이르는 절벽 아래에 크게 뚫린 동굴이 있고, 동굴 속으로 바닷물이 끊임없이 들락거린다.



전통 초가집, 현무암 돌담 향토색 물씬



지나온 큰엉 해안을 바라보니 용암이 굳은 현무암들이 절벽을 이루기도 하고 게발처럼 바다로 다리를 뻗기도 하면서 아름다운 해안풍경을 이루었다.

해안 숲길을 지나서 만난 돌담을 빨갛게 물들인 동백꽃이 처연한 듯 아름답다. 붉게 핀 동백과 돌담, 그리고 곡선을 그린 골목이 우리의 마음을 유연하게 해준다.

신그물이라고 하는 특이한 이름의 마을을 지난다. 바다를 접한 웃고망과 알고망 두 곳에서 민물이 솟아나는 신그물은 단물이 나와 물이 싱겁다는 뜻에서 그렇게 불려졌다. 수량이 풍부하고 깨끗해 마을에 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는 식수로도 사용되었다.

바다는 잔잔하고 해변바위에는 바다갈매기들이 한가롭게 노닐고 있다. 서귀포 앞에 떠 있는 섶섬과 문섬도 점점 가까워지고, 낮은 평지를 이루고 있는 지귀도가 수평선 위에서 고개를 내민다. 이러한 모습을 한라산이 말없이 지켜보고 서 있다. 올망졸망한 해변은 육중한 한라산에 의지하고, 한라산은 재롱을 피우는 해안가의 풍경을 보며 즐거워한다.

감귤밭과 제주도 전통 초가집, 돌담이 어울린 모습에서는 제주도의 향토색이 물씬 풍겨 나온다. 바닷바람을 막아 감귤이 잘 자라도록 하기 위해 밭가에는 동백나무, 후박나무 같은 나무로 방풍림을 조성해 놓았거나 현무암 담장을 쌓았다. 제주도만의 고유한 묘지도 만난다. 무덤을 가운데 두고, 네모로 낮게 돌담을 쌓은 모양은 육지에서는 볼 수 없는 제주도만의 독특한 묘지양식이다.



한폭의 그림처럼 다가온 영화속 그 곳



간간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감귤을 볼 때면 내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밭길과 숲길을 지나면 해안길이 나오고, 해안길을 지나면 마을길이 나온다. 위미 해변마을 앞을 지나는데 할머니 두 분이 미역 같이 생긴 해조류를 다듬고 있어 물어보니 감태란다. 해변에서 제주도 전통가옥 한 채가 지붕이 챙챙 묶인 채 바닷바람을 이겨내고 있다. 위미해변 도로를 따라가다 보니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보았던 ‘카페 서연의 집’이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있다.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가슴높이의 돌담길이 새록새록 정이 든다. 돌담길을 걷다보니 우리는 어느새 해안 자갈길에 닿아 있다. 넙빌레를 지나 공천포에서 오늘 처음으로 모래사장을 만난다. 검은 모래와 작은 자갈이 섞여 있는 공천포 해변은 수많은 세월이 지나면서 파도에 바위가 부서져 자갈이 되고, 자갈은 다시 모래가 되는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타원형 해변에 옹기종기 민가들이 자리를 잡고, 마을 앞으로 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다. 망망대해에는 멀리 지귀도가 떠 있다. 마을에는 2층의 팔각정자가 있어 잠시 쉬면서 주변 풍경에 취하기에 안성맞춤이다.

해변길을 벗어나 내륙 쪽으로 한라산을 바라보며 걷는다. 한라산과 수많은 오름들이 부드러운 곡선미를 보여준다. 길 주변은 감귤밭이 이어진다. 비닐하우스가 있는 밭에는 한라봉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기도 하다.



저마다의 이름을 간직한 기암괴석 쇠소깍

효돈천 상류에서 본 쇠소깍 전경. /문화재청 제공




감귤밭을 벗어나 효돈천을 만난다.

효돈천은 한라산 백록담 남벽과 서벽에서 발원하여 효돈해안에 이르는 대규모 하천이지만 계곡 바닥을 제외한 대부분은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이다. 오랜 기간 하식 풍화작용을 통해 V자형 계곡이 되었다.

효돈천은 바다와 만나기 전에 쇠소깍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뽐낼 수 있는 최고의 멋을 드러내준다. 쇠소깍은 10여 m 높이의 기암절벽이 하천을 감싸고 300m 정도의 길이로 굽이굽이 이어지면서 그 아래에 깊고 긴 소(沼)를 이루어 천하절경이 되었다.

기암절벽은 생김새도 특이하여 사람들은 장군바위, 큰바위 얼굴, 사랑바위, 독수리바위, 사자바위, 기원바위, 부엉이바위, 코끼리바위 같은 이름을 붙여주었다. 쇠소깍은 바다와 만나기 전 작은 모래언덕을 만들어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굽이돌아 드넓은 바다에 합류한다. 모래언덕 옆으로는 모래사장이 펼쳐져 염포해수욕장을 이룬다.

쇠소깍은 마을 이름인 효돈의 옛 표현인 쇠돈의 ‘쇠’와 연못이라는 의미의 ‘소(沼)’, 끝을 나타내는 옛말 ‘깍’이 합쳐진 제주도 방언이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쇠소깍은 내려갈수록 에메랄드빛으로 바뀌어 회색빛 바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쇠소깍에서는 카약과 제주의 전통 통나무배 테우를 타는 사람들이 많다.

올레 5코스를 마치고 해변 의자에 앉아 드넓은 바다를 바라본다. 푸른 바다에서는 파도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고 하얀 포말을 이루며 밀려왔다 밀려가는 바닷물이 한없이 정겹다.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결이 살갑다.


여행 쪽지

-제주올레 5코스(남원포구-쇠소깍)는 14.7㎞로 5시간 정도 걸린다.
-제주시와 서귀포시에서 동회선일주버스 700번을 타고 남원포구 입구 정류소에서 내려서 바닷가 방향으로 250m 정도 내려가면 태평양횟집 맞은편에 시작점이 있다.
-종점인 쇠소깍에서 버스를 타려면 한라산 방향으로 15분 정도 올라와서 만나는 일주도로에서 우회전하면 서귀포 방향과 제주시 방향의 버스정류장이 있다.
-중간에 식사할 수 있는 곳으로 위미에 있는 신팔도강산(064-764-0168)을 권하고 싶다. 점심만 하는 식당인데, 7,000원 받는 정식에 돼지두루치기와 옥돔구이를 비롯하여 푸짐한 밑반찬이 나온다.

 

 

 화산이 만든 비경 속에 제주의 아픔이 스며있고 
 (광주매일 2014. 02.27. 18:52)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 제주올레 10코스 (화순-모슬포)

 

 

짙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해안절벽위를 걷는 짜릿한 경험은 제주올레 10코스만이 간직한 색다른 추억이다.

 

화순금모래해변에 도착하자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할 올레가 한눈에 바라보인다. 널찍한 화순금모래해변과 드넓게 펼쳐지는 망망대해, 아기자기한 해안절벽과 범접하기 힘든 위엄이 느껴지는 산방산이 근경을 이루고, 용머리해안과 송악산이 원경을 이루면서 빼어난 풍경화 한 폭이 된다. 모래해변이 끝나는 지점에서 길은 해안 바위지대로 들어선다. 썩은다리오름 아랫도리에 해당하는 이곳 바위는 퇴적암으로, 화산재의 결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곳 바위들은 수중화산폭발로 흘러내린 마그마가 강력하게 뿜어져 나온 화산재와 함께 옆으로 빠르게 퍼져 나가면서 주변의 모래나 돌멩이들이 같이 굳어진 것이다. 이러한 화산폭발이 연속적으로 일어나 겹겹이 화산재층을 이루어 퇴적암이 되었다. 신기한 퇴적암을 바라보며 우리는 수 만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는 시간여행을 한다.

송악산에 오르며 바라본 산방산은 바다위에 떠있는 배 같다. 보는 시선에 따라 달라지는 느낌이 새롭다.


수만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시간여행

퇴적암 지대를 지나니 산방산 턱 밑에 소금막해변이라 불리는 타원형 모래사장이 나타난다. 모래해변 위에는 얕은 모래언덕이 있는데, 여기에 막을 짓고 주변 모래밭에서 소금을 만들었다고 해서 소금막해변이라 부른다.

소금막해변에서 주상절리 쪽으로 작은 언덕을 올라가니 은밀하게 숨겨놓은 비밀병기처럼 환상적인 풍경이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준다. 5-10m 높이의 검은색 주상절리는 바다로 뻗어나가면서 타원형의 작은 만(灣)를 만들고, 그 안에 에메랄드빛 바닷물이 들락거리게 했다. 주상절리는 또 다른 만을 이루어 황금빛 모래사장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주상절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비경인데, 에메랄드빛 바다와 황금색 모래사장까지 가세하여 매혹적인 채색화가 되었다. 주상절리대의 빼어난 용모에 반한 산방산은 용머리해안·송악산·가파도·마라도·형제섬까지 끌어들여 풍경미의 극치를 이룬다.

주상절리지대를 지나 산방산 바로 아래의 항만대 모래해변을 걷는다. 항만대 해변 옆에서는 용머리해안이 바다를 향하는 용처럼 길게 뻗어간다. 용머리는 한라산의 화산활동보다 훨씬 이전인 약 100만 년 전에 남해 대륙붕에서 일어난 수성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주로 현무암질 응회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절벽은 오랜 기간 퇴적과 침식에 의해 마치 용이 머리를 틀고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용머리해안이라 했다.

산방연대에 올라선다. 연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통신수단으로 봉수대와 기능면에서는 차이가 없다. 연대는 주로 구릉이나 해변지역에, 봉수대는 산 정상에 설치되었다.

가파른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산방산(395m)은 분화구가 없는 휴화산이다. 전설에 따르면 산방산은 빨래를 하던 설문대할망이 어쩌다 방망이를 잘못 놀려 그 센 힘으로 한라산을 치는 바람에 한라산 봉우리가 날아와 떨어진 것이라고 한다. 산방산의 솟은 모양과 백록담의 움푹 파인 분화구의 크기가 비슷할 뿐 아니라 자생식물도 일치하여 산방산의 전설이 그럴 듯해 보인다.

제주올레 10코스는 내내 산방산과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는 최고의 길이다.


인공동굴이 말해주는 전쟁의 상흔

사계포구를 벗어나면 송악산까지는 완만한 경사를 지닌 해변이 길게 이어진다. 사계해변은 부드러운 백사장이 이어지다가 차츰 바위지대로 바뀐다. 바위에는 사람발자국과 동물발자국 모양으로 패어 있다. 동물발자국은 코끼리를 비롯하여 새, 게 등 그 모양도 다양하다.

그동안 하나의 섬으로 보였던 형제섬이 사계해변에서부터는 그 이름에 걸맞게 두 개의 섬으로 보인다. 현무암 자갈지대를 지나니 송악산이 지척이다. 송악산 해안절벽의 인공동굴에 시선이 멈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제주사람들을 동원해 뚫어놓은 것으로 해안에 16개, 절벽 위쪽에 1개가 있다. 이 굴들은 일본군이 소형 특수 잠수정을 숨겨두었다가 연합군 함정이 접근해오면 어뢰를 싣고 돌진해서 자폭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송악산으로 오르면서 바라본 산방산은 푸른 바다에 떠 있는 배 같다. 산방산 뒤로 붕긋붕긋 솟은 오름들이 한없이 부드럽다. 사계해안에서 서귀포 쪽으로 이어지는 해안선이 아스라하다. 해안절벽 위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에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길을 걷는 사람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송악산은 해발고도가 104m 밖에 되지 않는 낮은 오름이지만 세 면이 바다에 닿아 있을뿐더러 10-14m에 이르는 절벽이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여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송악산 정상에는 둘레 600m 깊이 69m에 이르는 제2분화구가 있고, 주봉 너머에는 이 보다는 넓으나 깊이가 얕은 제1분화구가 있다. 송악산은 수중분화와 육상분화라는 2중 폭발을 거친 화산으로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이중분화구를 가졌다. 송악산 남쪽으로 가파도와 우리나라 최남단의 섬 마라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동족상잔’ 가슴아픈 역사의 현장들

올레는 둔덕 같은 동알오름을 지나 섯알오름에 도착한다. 섯알오름에는 일제가 만든 고사포진지가 있다. 일본은 중일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인 1931년부터 제주도를 중국본토 공격을 위한 전진기지로 삼기 위해 제주도민을 강제 동원하여 4개의 비행장을 건설했다. 그중의 하나가 알뜨르비행장인데, 비행장 주변에는 격납고·지하벙커·고사포진지·지하호·탄약고·레이더기지·발전시설 등 다양한 군사시설이 들어섰다.

섯알오름에서 내려오니 ‘섯알오름 희생자 추모비’가 서 있다. 이곳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모슬포 경찰관내에서 344명이 예비 검속되어 252명이 당시 계엄군에 의해 집단학살을 당한 후 암매장 되었던 곳이다.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에 서 있으니 나도 모르게 옷깃이 여민다.

추모비 가까운 곳에는 모슬포 알뜨르비행장이 있었던 곳이라는 의미로 비행기 모형의 조각품이 전시되어 있다. 일제는 모슬포 주변의 드넓은 평지를 군사용 비행장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밭으로 이용되는 비행장터 곳곳에는 전투기 격납고가 그대로 남아 있다.

당시 사용했던 관제탑도 마늘밭 가운데에 서서 역사의 아픔을 대변해 주고 있다. 관제탑을 지나면 잔디가 깔린 활주로가 나온다. 활주로 주변에 띄엄띄엄 서 있는 키 작은 소나무들이 역사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

대정읍으로 들어서는데, 근래에 만든 돌하르방 3기가 길손을 맞이한다. 대정읍에서는 대정읍성 동·서·남문에 각각 4기씩 12기의 옛 돌하르방이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다. 뒤돌아보니 가파도와 마라도가 손짓을 한다. 오늘 내내 우리의 시야를 떠나지 않았던 산방산과도 아쉽게 작별을 한다.


여행쪽지

▲제주올레 10코스는 화순금모래해변에서 모슬포(하모체육공원)까지 14.8㎞로 5시간 정도 걸린다.
▲점심식사를 하려면 중간지점인 사계포구가 적당한데, 포구주변에는 해물뚝배기와 갈치조림을 하는 식당이 여럿 있다. 색다른 음식으로 아주방(064-792-2684)의 해물칼국수 맛이 일품이다. 전복해물칼국수(9,000원), 해물칼국수·보말칼국수(각 7,000원) 등이 있다.

 

 

 시간을 거슬러 아주 먼 옛날로 떠나는 여행 
 (광주매일 2014. 03.13. 19:24)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 고창 고인돌길, 복분자·풍천장어길

 

운곡서원 가는 길에 위치한 동양 최대 고인돌 공원.

 

서해안고속도로 고창나들목을 빠져나와 선운사 가는 방향으로 접어들자 금방 고인돌박물관이 나타난다. 2008년 9월 25에 개관한 고창고인돌박물관은 여러 개의 전시실을 갖추고 주변에 선사마을, 선사마당, 체험마당을 조성하여 고인돌공원을 꾸몄다.


람사르사이트에 등록된 운곡습지
고인돌공원은 고창읍 상갑리의 민가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마을 옆으로 고창천이 흐르고 고창천 뒤로 높지 않은 산과 지석묘라고도 불리는 고인돌군(群)이 넓게 자리를 잡고 있다. 고창고인돌유적지는 화순, 강화 고인돌유적지와 함께 2000년 12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무덤유적이다.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고인돌은 집단 공동체 생활이 가능해진 청동기시대의 상징적 문화유산이다.

화순이나 강화고인돌유적지에 비해서 고창고인돌유적지는 500여기에 이르는 고인돌이 조밀하게 분포되어 있고, 그 규모도 세계에서 가장 크고 넓다. 남향을 한 부드러운 산자락에 자리를 잡은 고창고인돌군은 정면으로 넓은 들판이 펼쳐지고, 하천도 굽이굽이 흘러간다.

매산재에서 구불구불 나 있는 임도를 따라가는 숲길이 호젓하다. 이어 운곡습지를 만난다.

인천강변 푸른 소나무에 둘러싸여 우뚝 선 병바위.

운곡습지는 산지형 저층습지로 생물다양성이 풍부하고 생태적으로 우수한 자연환경이 보존된 지역이다. 과거 계단식 논으로 개간되어 경작되다가 1980년 운곡저수지가 생기면서 이곳까지 경작금지 구역이 되면서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운곡습지는 습지보전을 위한 국제협약인 람사르협약에 따라 2011년 람사르사이트에 등록되었다.

길은 철 지난 억새밭을 지나 드넓은 운곡저수지 옆으로 구불구불 이어진다.

운곡저수지가 생기기 전 이곳은 오베이골이라 불렀다. 다섯 방향으로 흩어진다고 해서 오방골이라고도 불렀는데, 그 다섯 방향에 매산재·행정재·호암재·백운재·굴치재가 있다. 옛날의 오베이골은 다섯 고개를 연결해주는 요충지였다. 저수지 건너편으로는 잠시 후 만나게 될 푸른 지붕의 운곡서원도 바라보인다.

운곡서원 가는 길에서 200m 쯤 떨어진 곳에 동양최대의 고인돌이 있다. 자그마치 300톤에 이르는 이 고인돌은 한 면을 성인 네 사람이 양손을 벌려야 겨우 감쌀 수 있을 정도다. 이 정도의 크기로 고인돌 무덤을 쓸 정도라면 최소한 부족장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싶다.

운곡서원 근처에는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수몰된 마을을 그리워하며 쓸쓸하게 서 있다. 운곡서원은 백안 김제, 농암 김주, 강호 김숙자, 점필재 김종직 등 네 명의 선산김씨를 모시기 위해 창건되었다. 1766년 고창읍 모양성 당산에 세운 건물을 1843년 선산김씨 자손들이 거주하는 이곳으로 옮기면서 주자의 위패까지 모셨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 사우가 헐리고 강당만 남아 있다가 1900년에야 복원되었다.


발길 닿는 곳마다 전설이 품어낸 풍광
장살비재에 도착하여 점심식사를 한다. 구암리·반암리 사람들이 고창장에 가기 위해서는 이곳 장살비재를 넘어 오베이골과 매산재를 넘어야 했다. 장살비재에 얽힌 전설이 재미있다. 이 재에 살던 큰 부자에게 어느 날 스님이 와서 시주를 청하자 그는 소똥을 주어 돌려보낸다. 며느리가 쫓아가 사죄하자, 스님은 “지금 등에 업은 아이와 함께 뒤를 돌아보지 말고 따라오라” 한다. 뒤따라가던 며느리는 아쉬운 마음에 뒤돌아보자 며느리는 바위로 굳어 바위가 되고, 집은 땅 아래로 푹 꺼져 연못이 되었다고 한다.

이곳 장살비재에서 고인돌길이 끝나고, 복분자·풍천장어길이 시작된다. 5분 정도 산길을 내려가면 고창군 아산면 계산리의 아담한 들판이 펼쳐지고, 할매바위가 큰바위 얼굴처럼 우뚝 서 있다.

높이 60m, 폭 50m에 이르는 할매바위는 우람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할머니처럼 넉넉하고 포근하다. 논가에 서 있는 할매바위는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밑에 있는 작은 굴은 김유신장군이 당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수행을 했던 굴로 전해진다.

할매바위 옆으로 낮은 야산을 넘으니 멀지 않은 곳에서 전자바위와 아산초등학교가 손짓을 한다. 정다운 밭길을 지날 때는 복분자나무들이 많이 눈에 띈다. 고창에서는 이웃 순창과 함께 복분자가 많이 재배된다. 이곳 복분자는 술이나 음료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영모마을에 자리한 전자암.

영모마을에 도착하니 우뚝 서 있는 전자암이라 불리는 바위가 웅혼한 기상을 자랑한다. 마을사람들은 대대손손 이 바위를 보면서 마음을 다스렸을 것이다. 그러니 마을사람들에게 전자바위는 부처상이나 십자가와 같은 존재일 터. 직벽을 이룬 바위 밑에는 두암초당(斗巖草堂)이라 이름붙인 정자가 소담스럽게 앉아 있어 운치를 더한다. 그 아래로는 옆으로 살짝 비켜서서 아산초등학교가 자리를 잡고 있다.

아산초등학교 뒤로 울창한 적송 숲길을 걷고 나니 마치 병을 거꾸로 세워놓은 것 같은 병바위가 푸른 소나무에 감싸인 채 우뚝 서 있다. 병바위에는 술에 만취한 신선이 술병을 걷어차는 바람에 술병이 굴러가다가 거꾸로 박혀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자바위와 병바위는 앞으로 흐르는 인천강과 어울려 신선이 노닐 만한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풍천장어에 복분자 한 잔의 운치
인천강은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 명맥이골에서 발원하여 31㎞를 흐르다가 줄포만에서 서해바다에 합류한다. 홍수로 강이 자주 범람하자 이 고장 출신이자 이황의 제자인 변성진이 강을 잘 다스린다는 뜻에서 어질 인(仁)과 내 천(川)을 써서 인천강이라 하였다고 한다.

강변은 바닷물의 영향으로 뻘이 형성되어 있다. 뻘로 이루어진 습지에는 갈대가 숲을 이루었다. 강변에서는 낚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장어를 잡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숭어낚시 중이란다. 인천강 하류에 형성된 수변습지는 이처럼 주변의 울창한 숲과 갈대, 곡선을 그리는 강줄기가 어울려 아름다운 강변 풍경을 이루었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풍천은 장어가 많이 잡혀 풍천장어라는 이름으로 유명세를 탔으나 요즘에는 이곳에 장어가 거의 살지 않는다. 비록 풍천에서 잡은 장어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풍천장어에 복분자 한 잔 하는 운치는 빼놓을 수 없다.


여행쪽지

▲ 고창 ‘고인돌 질마재따라 100리길’은 4개 코스에 43.7㎞에 이른다.
▲ 그중 1코스 고인돌길은 고인돌박물관에서 장살비재까지 7.9㎞, 2코스 복분자·풍천장어길은 장살비재에서 풍천까지 7.8㎞로 1, 2코스를 연결하면 총 15.7㎞에 이른다. 5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 서해안고속도로 고창나들목에서 15번 지방도로를 따라 아산 방향으로 5분 정도만 가면 ‘고인돌박물관’ 안내판을 만날 수 있다.
▲선운사 입구 풍천(연기마을)과 주변에는 풍천장어를 하는 식당이 여럿 있다.

 

 

 해안절경 곳곳에 정겨운 전설이 스며있고… 
 (광주매일 2014. 03.27. 19:55)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 부안 변산마실길 (새만금홍보관-격포항)

 

오랜 세월동안 파도와 바람이 만들어낸 ‘해식애’라 불리우는 기암절벽. 10-15m 높이의 기암절벽에는 1m 깊이의 동굴이 있고, 표면은 아기자기하게 돋을새김이 되어 거대한 조각품이 되었다.

 

산과 바다가 빚어낸 천혜의 풍경과 유·무형의 문화재를 두루 갖춘 변산반도를 천천히 걸으면서 가슴으로 만날 수 있는 길이 생겼다. 변산마실길이다. 하여 오늘은 변산마실길을 걸을 참이다. 길은 주로 해변 언덕으로 나 있지만 물이 빠질 때면 언덕 아래 모래사장이나 바위를 통해서 걸을 수 있다. 썰물 때라 우리는 해안을 따라서간다. 부드러운 모래사장에 발자국을 내며 걷는데, 드넓은 바다가 음악을 제공하고 아기자기한 바위가 길안내를 해준다.

넉넉함과 자유로움… 마음의 평화를 얻다

모래사장을 지나 우리는 바다와 접해있는 바위를 넘고 넘는다. 붉은 색을 띤 바위가 있는가 하면 잿빛의 바위가 있고, 5-8m 높이로 벼랑을 이룬 바위가 있고, 완만한 너럭바위도 있다. 합구 해안암벽이라 불리는 이곳에는 하트바위, 갈매기바위, 조개바위 같은 바위들이 갖가지 모양을 하고 있어 만물상이라 부르기도 한다.

해안길을 벗어나 언덕 위로 올라서니 걷기 좋은 흙길이다. 밭길을 지나고 나면 숲길을 만나고 숲길을 지나면 또 다시 포근한 백사장이 등장하곤 한다. 백사장에는 오랜 세월 파도에 부서지고 깨어진 조개 부스러기들이 굵은 모래처럼 잘게 펼쳐져 있기도 하다.

군산대 연수원 앞 밭에는 ‘대항리 패총’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패총은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류의 껍질이 쌓인 무더기다. 1967년 처음 발견된 이곳 패총은 사방 10m 내외로 60㎝의 두께를 이룬다. 이곳에서는 빗살무늬 토기파편과 뗀석기가 발견되었으며, 이 유물들은 선사시대의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군산대연수원 앞에서 변산해수욕장까지는 2㎞에 이르는 긴 모래사장이 펼쳐진다. 백사장은 망망대해를 이룬 서해바다와 어울리고,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에 갈매기도 춤을 춘다.

드넓은 바다는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 주니 그 이름도 ‘바다’가 되었다. 거침없이 밀려왔다 미련없이 밀려가는 물결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다. 나를 초월한 넉넉함과 거침없는 자유가 만나 평화를 이룬다. 이렇게 우리는 모래 위에 평화의 발자국을 남긴다.

고요하게 들려오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모래사장을 거닐면 마음속에 평화로움이 깃든다.

드넓은 변산해수욕장 뒤로는 내변산의 산들이 솟아 수평을 이룬 해수욕장과 조화를 이룬다.

넓은 백사장 너머로 시원한 바다가 펼쳐지고, 바다에는 띄엄띄엄 하섬과 비안도 등 고군산 열도가 떠 있어 정겨움을 더한다. 변산해수욕장은 1933년 개장한 유서 깊은 해수욕장으로 대천, 만리포해수욕장과 함께 서해안 3대 해수욕장의 하나로 손꼽힌다.

변산해수욕장 남쪽 끝에 작은 포구가 있는 송포마을이 있다. 송포를 지나 야산자락을 돌아서간다. 이곳 노루목 야산에는 붉노랑상사화가 군락을 이루며 자생하고 있다. 꽃은 노랗게 피지만 직사광선이 강한 데서는 붉은빛을 띠기 때문에 붉노랑상사화라 하였다.

변산해수욕장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전망대에 서서 바다와 어울린 해수욕장 풍경에 넋을 잃는다.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여름철 해수욕장보다 사람이 없는 겨울이나 봄철 바다에서는 고요함을 즐길 수 있어서 좋다.

북쪽으로는 지금까지 지나온 해변의 아기자기한 풍경이 그림처럼 다가오고, 고사포해수욕장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전망대에 선다. 고사포해수욕장을 이루고 있는 울창한 송림과 부드럽고 넓은 백사장, 드넓은 푸른 바다와 하섬·비안도 같은 섬들이 한데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이 된다. 고사포해수욕장의 완만한 모래사장에는 파도가 느릿느릿 너울을 만든다. 300m 길이의 울창한 송림은 여느 해수욕장과 비교될 수 없는 최고의 야영지를 만들었다. 솔숲 가운데로 구불구불 나 있는 길을 따라 걷는 연인들의 발걸음이 그윽하다.


고요하게 들려오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모래사장을 거닐면 마음속에 평화로움이 깃든다.

수천년만년 세월이 빚어낸 천혜의 풍광

숲길을 벗어나니 서쪽으로 하섬이 지척이다. 고사포해수욕장 남쪽 해변에서 하섬 쪽으로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 무렵이면 2-3일 동안 길이 1㎞, 폭 20m의 바닷길이 열리는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다.

해변을 한 굽이 돌아가니 적벽강이 기암절벽을 이루고 있다. 적벽강 방향으로 가는데 해안에는 얇은 층을 이루고 있는 판석들이 암반을 이루고 있다. 암반은 깔끔하게 깎아놓은 것처럼 반듯하고 매끄럽되 20-30㎝ 높이로 층을 이루고 있다.

수천만 년 전에 형성된 퇴적암이 바닷물에 침식되고 씻겨나가 선명하게 층리가 드러나는 지금과 같은 모양이 되었다. 해변의 바닥을 이루고 있는 이 아름다운 암반 뒤로 100m 정도 돌출이 되어 기암절벽을 이룬 적벽강이 손짓을 한다.

적벽강은 오랜 세월 동안 파도와 바람이 해안 산지에 부딪쳐 생긴 해식애라 불리는 기암절벽이다. 적벽강은 중국 소동파가 놀았던 중국 황주의 적벽강처럼 절벽과 암반 그리고 해안선이 빼어나게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0-15m 높이의 기암절벽에는 1m 깊이의 동굴이 있고, 표면은 아기자기하게 돋을새김이 되어 거대한 조각품이 되었다.

적벽강 해안에서 언덕위로 올라서면 수성당이 있다. 수성당은 서해를 다스리는 바다의 신, 개양수성할미와 그의 딸 여덟을 모시는 제당으로 순조 1년(1801)에 세워졌고, 지금의 제당은 1996년에 새로 지어졌다. 전설에 따르면 개양할미는 키가 매우 커서 서해바다를 걸어 다니며 깊은 곳은 메우고 위험한 곳은 표시를 하여 어부들을 보호하고 풍랑을 다스려 고기가 잘 잡히게 해주었다. 또 수성할미는 딸 여덟을 낳아 각도에 한 명씩 시집보내고 막내딸만 데리고 살면서 서해의 수심을 재어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해 주었다고 한다. 제당 인근 주민과 어부들은 매년 음력 정초에 정성껏 제사를 지낸다.


파도가 들려주는 戀歌를 벗삼아 ‘休’

격포해수욕장으로 들어선다.

타원형 모래사장을 닭이봉이 감싸고 있다. 닭이봉 아랫자락 해안절벽이 바로 채석강이다. 서쪽 멀리 위도가 아스라이 모습을 드러낸다. 고요하게 들려오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모래사장을 걷는 연인들의 발걸음에서는 애틋한 정이 새록새록 쌓여간다. 해변을 천천히 걷는 남녀들에게 파도는 감미롭게 연가를 불러준다. 천하절경을 이룬 채석강은 선(先)켐브리아대 화강암, 편마암이 기저층을 이루고, 중생대 백악기에 퇴적한 퇴적암이 바닷물의 침식에 의해 마치 수 만권의 책을 쌓아올린 것 같은 층리를 이루었다. 당나라 이태백이 즐겨 찾았던 중국의 채석강과 비슷하여 채석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여행 쪽지

▲부안 변산마실길은 13개 코스 163㎞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8개 코스는 해안길이고, 5개 코스는 내륙코스이다.
▲1코스(조개미 패총길) 새만금홍보관에서 송포까지 5㎞, 2코스(노루목 상사화길) 송포-성천 6㎞, 3코스(적벽강 노을길) 성천-격포항 7㎞로, 1~3코스는 총 18㎞에 이른다. 6시간 정도 걸린다.
▲변산마실길 셔틀버스가 운행되기 때문에 승용차를 1코스 출발지점인 ‘마실길 안내의 집’에 주차해 두고 무료 셔틀버스를 이용하여 돌아올 수 있다. 운행시간은 안내의 집(063-584-0456)에 문의

 

 

 “생각은 마땅히 담백하고, 말은 마땅히 과묵해야” 
 (광주매일 2014. 04.10. 19:03)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 다산 정약용 남도유배길 (다산수련원-영랑생가)

 

다산 정약용은 다산초당에서 10년간 머물며 학문의 꽃을 피웠다. 그 옛날 초가집 모습은 사라졌지만 다산의 숨결은 곳곳에 배어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를 오면서 걸었던 길을 연결하여 ‘다산 정약용 남도유배길’을 열었다. ‘다산 정약용 남도유배길’은 다산초당·백련사·영랑생가·무위사 등 유홍준교수가 명명한 ‘남도답사 1번지’를, 걸어서 탐방하는 길이기도 하다. 남도유배길의 첫 발을 다산유물전시관에서 떼기 시작한다.


다산유물전시관에는 목민신서·흠흠신서 같은 저작과 편지를 비롯한 유물들이 진열되어 있으며, 다산의 일생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판넬 등을 전시해 놓았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에는 소나무, 편백나무, 참나무와 대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 동백나무, 소나무 등이 울창한 숲 가운데에 다산초당이 고즈넉하게 앉아 있다.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서의 18년 유배생활 중 10년을 머문 곳이다. 다산은 여기에서 생활을 하면서 제자를 가르치고 학문에 열중하여 수많은 저작을 남겼다.

다산초당은 원래 초가였으나 1936년 노후로 붕괴되어 없어진 것을 1957년 강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중건하면서 기와를 얹었다. 현판에 판각된 다산초당(茶山草堂)이란 글씨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다.

다산선생은 다산초당 뒤편 바위에 정석(丁石)이라는 글씨를 직접 새겨놓았다. 차를 좋아했던 다산은 정석 아래의 약천이라 이름붙인 샘물에서 찻물을 받아 다조에서 차를 마셨다고 한다. 동암을 지나면 강진만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각정자 천일각(天一各)이 있다. 이곳에서 다산은 흑산도로 유배를 간 형 정약전을 그리워하며 바다를 바라다보곤 했다고 한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가는 길은 오붓한 산길이다. 오솔길을 걷다보니 숲속의 나무들이 속삭이고, 새들도 속삭인다. 이 길은 다산선생이 백련사에 주석하고 있던 선승인 혜장스님을 만나러 다녔던 길이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를 왔을때 머물렀던 주막집. 다산은 이곳 주막 뒤편 골방에서 4년을 지내며 이곳을 ‘사의재’라고 이름 지었다.

다산은 이 길을 오가면서 생각을 가다듬고,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길을 ‘사색과 명상의 다산 오솔길’이라 하였다.

백련사에 닿기 전에 먼저 동백나무숲으로 들어간다.

하늘을 가린 동백나무숲에는 진홍색의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빨간 꽃잎과 노란 꽃술로 이루어진 동백꽃의 아름다움 속에는 처연한 정서가 깃들어 있다. 동백꽃은 30% 정도 낙화한 상태에서 보았을 때 가장 아름답다. 변색하지 않고 통째로 떨어진 꽃송이들은 땅 위에다 또 하나의 꽃밭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동백꽃은 나무에서 한 번, 땅 위에서 또 한 번, 두 번 피어나는 셈이다.

동백나무 숲 속에는 부도 네 기가 숨바꼭질 하듯 숨어 있다. 강진 백련사 동백나무 숲은 1962년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백련사 주변에 군데군데 자생하고 있는 동백나무숲은 그 규모가 1.3㏊, 1천500 그루에 달한다.

동백나무 군락지를 지나 백련사로 들어선다. 백련사는 만덕산을 등지고, 구강포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백련사의 원래 이름은 만덕사로 신라 문성왕 때 무염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조선조 영조 36년(1760년)에 큰 불이 나 대부분의 전각이 불타버려 지금의 백련사는 그 후에 중창된 건물들이다.

2007년 10월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된 영랑생가.

백련사로 들어서려면 만경루를 통해야 한다. 만경루 앞에서는 커다란 배롱나무 한 그루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만경루(萬景樓)에 올라보니 그 이름이 실감난다.

만경루에 서니 배롱나무 너머로 구강포 앞 바다가 정겹게 다가온다.

만경루와 좁은 마당을 가운데 두고 대웅보전이 높은 계단 위에 당당하게 앉아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대웅보전은 1762년 중건된 건물이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는 현판은 만경루(萬景樓) 현판과 함께 조선조 3대 명필 중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백련사 만세루를 빠져나와 주차장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도 울창한 동백나무가 아름답게 꽃을 피우고 있다.

백련사주차장에서 왼쪽 산길로 접어든다. 지금까지 북적거렸던 사람들은 어디가고 한적하기 이를 데 없다. 산 아래로는 푸른 보리밭이 산뜻하고, 보리밭 너머로 강진만의 바닷물이 출렁인다.

산자락을 내려오니 길은 강진만 제방으로 길게 이어진다. 강진만은 강진군 강진읍·도암면·신전면과 칠량면·대구면·마량면 사이에 형성된 만(灣)으로 구강포라고도 부른다. 이곳 강진만에서는 겨울이면 천연기념물인 고니(백조)를 비롯하여 청둥오리·도요새·백두루미 등 각종 철새가 서식한다. 길은 자전거도로를 겸하고 있어 가끔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사람들도 볼 수 있다. 걸을수록 강진읍내가 점점 가까워진다.

강진읍내의 북동쪽 변두리에 있는 사의재로 향한다. 복원된 사의재는 초가를 얹은 본채와 문간채, 화장실로 구성되어 있다. 사의재는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를 왔을 때 최초로 4년 동안 머물렀던 주막집이다.

다산선생이 한양에서 강진까지 열흘을 걸어 짐을 푼 곳이 바로 동문주막이다. 대역죄인이라고 모두가 등을 돌릴 때 유일하게 주막집 노파가 다산에게 방을 내주었다. 선생은 이곳 주막 뒤편의 작은 골방에서 4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다산은 이 방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의(四宜)란 네 가지 마땅함을 가리키는데, “생각은 마땅히 담백해야 하고, 외모는 마땅히 장엄해야 하고, 말은 마땅히 과묵해야 하고, 동작은 마땅히 중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랑생가로 들어선다. 영랑 김윤식은 1934년 ‘시문학’ 제3호에 자신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발표한 후 모두 87편의 시를 남겼다.

영랑생가는 1948년 선생이 서울로 이사한 후 여러 차례 전매되었으나, 1985년 강진군이 매입하여 복원하였다. 1986년 전라남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07년 10월에는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되었다.

생가 입구의 조그만 광장에서 그의 대표작인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가 새겨진 시비가 방문객을 맞는다. 본채로 들어서니 정면 5칸 측면 2칸의 초가집이 영랑을 그리며 고즈넉하게 앉아 있다. 생가 곳곳에 새겨놓은 영랑의 시를 읽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다. 영랑생가 마루에 앉아 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음미한다.



여행쪽지

▲ ‘다산 정약용 남도유배길’은 강진의 다산수련원에서 영암 구림마을까지 총 61.5㎞, 4개 코스로 나누어져 있다.
▲ 그중 1코스는 다산수련원에서 다산초당-백련사-철새도래지-남포마을-사의재를 거쳐 영랑생가까지 15㎞로 5시간 정도 걸린다.
▲ 강진 목리장어는 옛날부터 유명했다. 목리장어센터(061-432-9292)는 2대째 하고 있는 장어전문식당인데, 양식장에서 1주일 전에 가져와 민물수조에서 항생제 성분을 빼내고 나서 요리를 한다. 장어양념구이와 장어소금구이 1인분에 14,000원이다. 탐진강 하구에서 잡히는 자연산 장어를 먹으려면 사전에 전화로 주문을 하여야 한다.

 

 

 벼룻길 각시바위에도 꽃이 피어 화사하고 
 (광주매일 2014. 04.24. 19:52)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 무주 ‘금강변 마실길’

 

산벚꽃 흐드러지게 핀 금강의 물길따라 걷는 길. 고요하게 흘러가는 강물에 맞춰 천천이 걷다보면 나와 강물은 어느새 하나가 된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의 차창 너머로 첩첩한 산과 산자락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정겹게 다가온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금산 방향으로 37번 국도를 따라 달리자 금강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처럼 사행천(蛇行川)을 이루고 있는 금강을 만나자 이내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자연은 인간의 원초적인 고향이라 그 품에 안기면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다.
‘금강변 마실길’ 출발지점인 도소마을은 무주군이 동쪽으로 진안군과 경계를 이룬 마지막 마을이다. 용담댐을 지난 금강의 물줄기가 굽이돌면서 강변에 흙을 퇴적시켜 농경지를 일구고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은 작은 산을 등지고 휘돌아가는 금강을 앞에 둔, 배산임수 지형을 이루고 있다.

강변길을 걷는데 하얗게 핀 조팝꽃이 싱그럽다. 조밥나무라고도 하는 이 나무는 꽃이 피어 있는 모양이 튀긴 좁쌀을 붙여놓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조팝나무라 했다. 부남면소재지인 대소마을로 들어선다.

주민자치센터가 부남초등학교·중학교를 마주보고 있고, 초등학교 정문 옆에는 소박한 방앗거리놀이 기념건물이 있다. 부남방앗거리놀이는 부남면 대소, 대티, 가정마을을 중심으로 전승되어오는 전통 민속놀이로, 춤·농악·제례의식을 통해 무병장수와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던 거리제에서 출발하였다. 길거리굿·청거리굿·짓거리굿·합거리굿·재뒷풀이굿 등 다섯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을 뒤 둔덕을 넘으니 밭에는 배꽃이 하얗게 피어 있고, 복사꽃도 우아하게 피기 시작했다. 사과밭에서는 꽃망울을 터트릴 준비를 하고 있다. 잠시 헤어졌던 금강을 다시 만나 물길과 나란히 걷는다. 금강을 감싸고 있는 산에는 산벚꽃이 화사하게 피어있다.

강변 사과밭이 끝나는 지점에서 본격적으로 벼룻길이 시작된다. ‘벼룻길’은 강가나 바닷가 벼랑으로 통하는 비탈길을 일컫는다. 강변 산자락 벼랑 아래를 돌아가는 1.5㎞에 이르는 벼룻길은 원래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일제강점기 때 만든 농수로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 길을 ‘보뚝길’이라고도 한다. 길 끝자락에 자리한 율소마을 입구에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 마을 주민들은 부남면 소재지로 학교를 가거나 장을 보러 갈 때 이 벼룻길을 걸어 다녀야 했다.

산자락 강변 옛길 하얀띠를 둘러놓는 듯 피어난 벚꽃나무 아래서 꽃비를 맞는다. 봄은 그렇게 내마음에 조용히 다가왔다.

강물은 고요하게 흘러가고, 새들은 감미롭게 노래를 한다. 천천히 흘러가는 강물처럼 우리의 발걸음은 느려지고, 새들의 노래처럼 우리의 가슴에도 선율이 흐른다. 강과 어울린 사람들도 이미 강의 일부가 되었다. 산봉우리들도 자신의 모습을 물위에 띄워 강물과 하나가 된다. 주변을 품고 굽이쳐 흘러가는 강줄기는 포근하고 유연하다.

길가에 피어 있는 금낭화를 바라보니 사랑하는 연인을 만난 것처럼 가슴이 설렌다. 여러 야생화 중에서도 금낭화는 그 모습이 아름답고 품격이 있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금낭화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다가 고개를 드니 각시바위가 손짓을 한다. 15m 정도 높이의 원뿔형으로 생긴 각시바위 아래에는 농수로를 만들기 위해 정으로 일일이 쪼아서 사람이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동굴을 만들었다.

각시바위를 지나 잠시 숲길을 지나면 벼룻길이 끝나고, 복사꽃 피어 있는 밭길로 이어진다. 핑크빛 복사꽃이 우아한 모습으로 길손을 맞이한다. 상굴교 다리를 건너면서 보는 금강 또한 여전히 아름답다. 전라북도 장수 신무산 북쪽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역류하는 강이다. 완만하게 굽이치며 흐르는 모습이 비단과 같다고 해서 금강(錦江)이라 불렀다.

상굴암마을 앞을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벚꽃길이 시작된다. 2차선 도로변을 덮고 있는 벚나무는 화사하게 피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지만 지나는 차량이 별로 없어 벚꽃에 취해 걷기에는 불편함이 없다. 바람이 불어 꽃비가 내리면 사람들도 꽃잎과 함께 춤을 춘다. 꽃은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아름답게 한다.

벚꽃길과 나란히 금강이 흘러간다. 하얀 벚꽃은 강물에 비취어 또 하나의 꽃밭이 된다. 37번 국도를 지나 비포장 강변길을 걷는다. 우리가 걷는 강변 옛길은 20년 전까지만 해도 무주와 금산 사이를 오가는 37번 국도가 지나는 길이었다. 사행천을 이루어 물돌이동이 된 강 건너 잠두마을은 섬처럼 보인다. 잠두마을 양쪽 강에 두 개의 다리를 놓아 자동차길이 바뀌면서 옛길은 사람만이 다닐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 되었다.

산자락 강변 옛길에는 하얀 띠를 둘러놓은 것처럼 벚꽃이 피어 있다. 길고 구불구불한 벚꽃벨트가 하얗게 곡선을 긋는다. 푸근한 옛길은 강 쪽으로 벚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고, 안쪽 산비탈에는 복사꽃이 우아함을 더한다. 간간이 조팝꽃이 쌀밥처럼 하얗게 피어 보는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희고 붉은 꽃은 갓 피어난 연두색 신록과 어울리고, 유유히 흘러가는 강은 주변의 산봉우리들과 조화를 이룬다. 이런 풍경이 곡선을 그리며 이어져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 더군다나 평평한 흙길이라 걷기에도 더없이 편하다. 산과 강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는 자연스러운 길이었기에 이토록 예쁜 길이 되었다.

S자 모양으로 흘러오는 강줄기는 용포교에서 방향을 바꾸어 북쪽으로 향한다. 길은 다시 강변 산자락을 돌고 돌아간다. 금강은 서면마을 근처에서 덕유산에서 발원하여 무주구천동을 굽이굽이 흘러온 남대천과 합류한다. 남대천과 합류한 금강은 제법 강다운 위용을 갖추어 금산 땅으로 흘러간다. 대청호와 백제의 고도 부여를 적시고 흘러간 금강은 충청남도 서천과 전라북도 군산을 가르면서 황해로 흘러들면서 407.5㎞에 이르는 대장정을 마친다.

강 건너편으로 오늘 종점인 서면마을이 바라보인다. 세월교라 불리는 잠수교를 건너는데, 강물은 쉼 없이 흘러간다. 내 마음도 저 강물처럼 막힘없이 흘러갔으면 좋겠다. 인생은 무상(無常)하다고 했던가?



여행쪽지

▶ 금강변 마실길은 무주군 부남면 도소마을에서 대소마을-벼룻길-굴암삼거리-용포교를 거쳐 무주군 무주읍 서면마을까지 19㎞로, 걷는데 6시간 정도 걸린다.
▶ 완주가 부담스러운 분들은 대소마을에서 시작하여 벼룻길-굴암삼거리-용포교(요대마을)까지 12.8㎞로 단축할 수 있다. 이 경우 4시간이면 충분하다.
▶ 가는 길 : 대전-통영간고속도로 무주IC→37번 국도(금산방향)→굴암삼거리에서 좌회전→대티마을→부남면소재지→도소마을
▶ 무주읍에는 민물고기를 푹 고아서 쓴 어죽과 성인 검지 크기의 빙어나 피라미를 기름에 살짝 튀겨낸 후 양념장을 바르고 고추, 파, 마늘, 참깨 등을 얹어 자작하게 볶은 도리뱅뱅이가 유명하다. 어죽(6,000원)과 도리뱅뱅이(10,000원), 민물매운탕을 하는 식당으로 큰손식당(063-322-3605), 섬마을식당(063-322-2799), 강나루식당(063-324-2898)이 있다.

 

 

 “화림동 계곡에서 탁족 한번 해보는 것이 소원이라더니” 
 (광주매일 2014. 05.15. 19:38)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 함양 ‘선비문화탐방로’

 

‘ 군자정’은 조선 5현이라고 알려진 정여창 선생과 연관이 있다. 정여창 선생의 처가가 이 정자가 있는 봉전마을이었다. 그가 처가에 자주 머물렀던 곳에 전씨문중이 1802년 선생을 기리며 정자를 세웠다. 해동공자가 쉬던 곳이라하여 이름을 ‘군자정’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예로부터 경상도에서는 ‘뼈대 있는’ 고장을 말 할 때 ‘좌 안동 우 함양’이라 했다. 안동과 함양은 학문이 번성했던 선비의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남덕유산에서 발원하여 함양군 서상면과 서하면을 지나 안의면으로 흘러가는 화림동계곡은 선비문화가 잘 남아 있는 곳이다. 물 맑고 골 깊은 화림동계곡은 맑은 물줄기가 기암괴석 사이를 굽이돌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이룬다. 자연과 더불어 사색과 음풍농월을 즐기던 옛 선비들은 이곳의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지었으니, 화림동 팔담팔정(八潭八亭)이다. 옛 여덟 정자 중에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거연정과 군자정, 동호정 뿐이다.

이 지역 현감으로 부임했던 연암 박지원은 “한양 사람들이 무더운 여름날 화림동계곡에 발 담그고 탁족 한번 해보는 것이 소원이라더니 과연 화림동이구나”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함양군에서는 근래에 새로 지어진 정자들을 포함하여 화림동계곡의 정자를 잇는 길을 ‘선비문화탐방로’라 이름 짓고, 두 발로 걸으면서 선비문화의 정취를 맛볼 수 있도록 하였다.

탐방로는 거연정에서 시작된다. 거연정(居然亭)으로 내려가는데, 입구부터 예사롭지 않다. 아름드리 노송과 느티나무 같은 노거수들이 기암괴석과 어울리고, 7-8m 높이의 기암괴석을 뚫고 맑은 물이 하염없이 흘러간다. 정자는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검푸른 소(沼) 위의 무지개다리를 건너 작은 바위섬에 고즈넉하게 앉아 있다.

정자에 앉으니 거연정을 자연스럽게 휘돌아가는 물줄기가 시원스럽고, 앞으로는 주변의 산봉우리들이 시선을 편안하게 한다. 거연정은 높이가 일정치 않는 바위를 주춧돌 삼아 각자 길이가 다른 기둥을 세웠고, 추녀 네 귀에는 활주를 세워 안정감이 있도록 했다. 거연정은 1872년 건립되고, 현재의 건물은 1901년 중수되었다.

깔끔한 반석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가 다시 모여 급하게 소용돌이 친다. 화림동 계곡 최고의 절경이다 .


거연정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군자정으로 향한다. 군자정은 거연정에서 200m 정도 아래 계곡가에 자리를 잡고 있다. 평평한 암반 위에 세워진 정면 2칸 측면 3칸의 군자정은 정여창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1802년에 건립했다.

함양의 선비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정여창 선생이 찾아와 시를 읊었던 곳이라 하여 군자정(君子亭)이라 이름 지었다. 정여창 선생이 이곳에 자주 왔던 것은 봉전마을에 처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보면 아름다운 계곡과 계곡가에 서 있는 노송들이 운치를 더한다. 꼭 껴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반들반들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계곡은 아기자기하고, 경사가 급하지 않아 물은 천천히 흐른다.

징검다리를 통하여 너럭바위를 건너가면 동호정에 이른다. 80m 정도 길게 뻗은 옥녀담과 100명 이상 앉을 수 있는 너럭바위를 바라보며 2층 누각, 동호정이 앉아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동호정은 팔각지붕에 사뿐히 들어 올린 처마가 활달한 멋을 풍긴다.

경쾌한 멋을 풍기는 동호정은 거연정이나 군자정과는 달리 화려하게 단청이 되어 있다. 동호정은 화림동 계곡 정자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다. 거연정과 군자정의 분위기가 담백하고 사색적이라면, 동호정은 경쾌하고 즐기기에 좋을 듯하다. 동호정은 1890년 건립한 정자이며, 1936년 중수되었다.

천변 숲길을 걷는다. 갓 피어난 연잎은 산뜻하고 싱그럽다. 연두색을 띤 연잎들은 꽃보다 아름답다. 단풍 든 가을 산색(山色)이 화려하되 쓸쓸하다면, 연둣빛 봄 산색은 담백하고 생명력이 넘친다.

계곡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소나무 숲길을 걷다보면 연둣빛 봄 산색이 그 푸르름을 더한다.


계곡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계곡 주변에는 넓지 않은 농경지가 있어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며 살아간다. 호성마을 앞을 지나니 또 하나의 정자가 있다. 1978년에 건립된 경모정(景慕亭)으로 암반 위에서 화림동계곡의 아름다운 모습을 즐기고 있다.

고즈넉한 소나무숲길을 지나자 계곡 건너편으로 황암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황암사 뒤로는 암봉을 한 황석산이 버티고 있다. 정유재란 때 영남에서 육십령을 넘어 호남으로 진격하려던 왜구 2만7천명과 황석산성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치렀는데, 이 때 수 천 명에 이르는 병사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이에 숙종 40년(1714) 이곳에 사당을 짓고, 황암사(黃巖祠)로 사액되어 위령제를 지내왔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때 헐린 후 2001년에야 사당을 중건하여 지금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황암사에서 옷깃을 여미고 나서 서하교를 건넌다.

잠시 구 도로를 따라가면 물줄기는 산자락을 S자로 휘감아 돈다. 이제부터 화림동계곡 최고의 절경이 펼쳐진다. 계곡은 깔끔한 바위들이 반석을 이루고 있다. 반석은 평평하되 둥그스름하고, 바위 위로 흐르는 물줄기는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가 한두 군데로 모아져 급하게 소용돌이치기도 한다.

이런 곳에 정자가 없을 수 없다. 그래서 이곳에 정자를 세웠으니 농월정이다. 조선 선조 때 관찰사와 예조참판을 지낸 지족당 박명무가 정계에서 은퇴한 뒤 농월정(弄月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농월정이라는 이름 속에는 “달 밝은 고요한 밤에 암반위의 냇물에 비친 달빛은 한 잔의 술로 달을 희롱한다”는 선비들의 풍류와 멋이 담겨 있다. 그러나 화림동계곡의 대표적인 정자 농월정은 2003년 방화로 소실되어 아직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농월정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암반만 남아 있으니 무언가가 빠져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농월정을 지나 제방길을 걷는다. 제방길을 따라 가는데 길가에는 철쭉이 피어 우리 부부를 맞이한다. 관북마을을 지나자 안의면 소재지가 지척이고, 천변의 오리숲이 눈부시다. 오리숲은 남강천변 제방에 만들어진 아름드리 갯버들 숲으로 연암 박지원이 안의현감으로 있을 때 조성하였다고 한다.

오리숲 옆에는 안의현감을 지낸 분들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안의교에서는 오리숲이 한 눈에 바라보이고, 멀리 기백산이 듬직하게 서 있다. 화림동계곡을 따라 걸으면서 나를 되돌아본다. 평생을 올곧게 살았던 선비들이 나에게 근본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외형적인 길만 걷지 말고 내면으로 걸어 들어가라 한다.


※여행쪽지

▶함양선비문화탐방로는 1구간(거연정-농월정, 6㎞)과 2구간(농월정-안의, 4.1㎞)을 합하여 총 10.1㎞에 이른다. 3시간 정도면 걸을 수 있지만 아름다운 계곡과 정자를 감상하는 시간을 고려하면 4시간 정도 걸린다.
▶대전-통영간고속도로 서상IC를 빠져나와 26번 국도를 따라 안의방향으로 가다보면 거연정 안내표지판을 만날 수 있다.
▶함양 안의갈비탕은 한우 암소갈비만 사용하고 다른 뼈는 넣지 않아 국물이 맑고 개운하다. 안의원조갈비집(055-962-0666), 옛날금호식당(055-964-8041) 등이 있다.

 

 

 서로를 그리워하는 할미할아비바위에 노을이 물들면

 (광주매일  2014. 05.29. 19:02)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 안면도 ‘노을길’

 

탁트인 서해바다를 조망하며 걷는 노을길은 3개의 전망대와 8개의 해수욕장을 이어주는 잘 정비된 탐방로와 솔숲길이 매력이다. 꽃지해변 할미할아비바위. 애틋한 전설을 품고 넓고 아름다운 해수욕장을 수문장 처럼 지키고 있다. 물이 빠지면 꽃지해변과 연결이 돼 걸어서 드나 들 수 있다. 발길 멈추는 곳 어디서든 생태체험을 할 수 있다. 어촌계에서 종패를 구입해 뿌려 누구나 쉽게 체험할 수 있게 조성해 놓았다.

 

태안반도에서 안면교 다리를 건너 안면도로 들어선다. 노을길 시작점인 백사장항에 도착하니 포구에 형성된 시장에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백사장항은 우리나라 최대 자연산 대하집산지이며, 여러 생선과 조개류를 파는 어판장이 크게 형성되어 있다.
백사장해변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2㎞ 가까운 백사장해수욕장 남쪽 끝에 기암괴석을 이룬 삼봉이 자리를 잡고 있다. 삼봉 앞에 있는 백사장전망대로 오르는 길은 솔숲 울창하고 둥글레꽃·애기나리꽃 같은 야생화도 지천으로 피어 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백사장해수욕장은 푸른 바다와 백사장, 솔숲이 어울려 장관을 이룬다. 기암괴석이 아기자기한 삼봉은 백사장해수욕장과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묵언정진 중이다.

삼봉을 지나자 백사장해변보다 훨씬 길고 넓은 모래밭이 드넓게 펼쳐진다. 삼봉해변과 기지포해변·안면해변이 5㎞ 가까이 이어져 그 끝이 아득하다. 길고 긴 모래사장 옆으로 해송 숲이 나란히 이어진다. 노을길은 해송 숲을 따라간다. 방풍림으로 조성된 소나무 숲은 바람을 막는 고유의 기능은 물론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그늘을 제공하고,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친근한 벗이 된다. 그윽한 솔숲 길은 좋아하는 사람과 다정하게 걷기에 더없이 좋다.

무뚝뚝한 고동색 소나무 줄기에 녹색 풀이 어울려 상큼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모래사장을 따라 걸을 때는 뒤쪽에서 삼봉이 어서가라 손짓하고, 앞에서는 두여전망대가 있는 낮은 산줄기가 부드럽게 춤을 춘다.

모래는 얼마나 고운지 얼굴에 문지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가는 모래는 언덕을 만들어 사구(砂丘)가 되었다. 해수욕장의 모래가 사구로 날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대나무를 엮어서 지그재그로 세워놓았다. 바람에 의해 조성된 기지포해안사구는 희귀 동식물들의 서식공간이자 자연방파제 역할을 한다.

맑디맑은 바닷물이 속세의 묵은 때를 씻어주고, 밀려왔다 밀려가면서 만들어내는 파도소리는 감미로운 음악이 된다. 바다근처 모래사장에는 잔물결처럼 추상화가 그려져 있다. 사람들은 물이 빠진 틈을 이용하여 모래 속에 숨어있는 조개를 잡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가깝게 다가오다가도 어느 새 멀어지고, 멀어지는가 싶으면 다시금 가까워지는 연인처럼 바다는 연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두여전망대에서는 삼봉해변에서 기지포해변, 안면해변에 이르는 백사장이 아득해 보인다. 물 빠진 두여와 물속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맑은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두여에서 밧개해변 사이에 형성된, 큰 물결모양으로 구불구불 뻗어나간 암반이 눈길을 끈다. 이를 두여해안습곡이라 하는데, 해안습곡은 지하 깊은 곳의 압력으로 변성과 변형작용을 받아 습곡과 단층이 이루어진 후 지각이 풍화, 침식되면서 서서히 융기되어 지금과 같은 지형이 형성되었다.

두여해안습곡 옆으로는 아담한 크기의 밧개해변이 자리를 잡고 있다. 밧개해변은 가운데에 백사장이 있기는 하지만 양쪽으로는 암반지대다. 암반갯벌로 이루어진 밧개해변에는 밀물 때 들어온 물고기가 썰물 때 독살 안에 갇혀 나가지 못하는 원리를 이용한 전통적인 어로방식인 독살이 잘 보존되어 있다.

밧개해변에서 두에기해변 방향으로 언덕을 넘어가는데, 적송 숲이 아름답다.

붉은 줄기를 한 적송 숲 사이에서는 활엽수의 연두색 신록이 싱그럽다. 안면도 소나무는 고려시대부터 국가에서 특별 관리하여 궁궐건축용 목재로 사용하였다. 안면도 소나무는 일제강점기와 해방이후까지 무분별하게 벌목이 되었으나 1965년 이후로는 관리를 잘하여 오늘날과 같은 아름다운 숲이 되었다. 특히 안면도 자연휴양림에 가면 붉은 줄기에 반듯하게 자란 품격 있는 소나무들을 만날 수 있다.

500m 길이의 방포해변 끝에 방파제가 있고, 방파제 뒤로 꽃지해변의 할미할아비바위가 고개를 내민다. 방포해수욕장 주변에는 펜션 등 숙박시설이 즐비하다. 방포해변과 꽃지해변 사이에 작은 산이 있고, 우리는 이 작은 산을 넘는다. 산길을 올라가니 방포해변이 아름답게 내려다보인다.

꽃지해수욕장을 한눈에 바라다볼 수 있는 방포전망대에 선다. 꽃지해수욕장을 바라보는 순간 모든 생각이 정지된다. 무엇보다도 눈길을 끄는 것은 할미할아비바위다. 꽃지해변 북쪽 끝 바다 가운데에 서 있는 할미할아비바위에서는 평생을 서로 의지하며 살아온 노부부의 곰삭은 부부애가 느껴진다.

할미할아비바위에는 애틋한 전설이 서려있다. 통일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한 뒤 안면도에 전진기지를 세웠는데, 이 기지의 책임자로 승언이라는 장군을 파견하였다. 장군의 부인은 미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부부사이에 금슬도 좋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출전명령이 떨어져 승언장군은 멀리 원정을 떠나게 되었다. 전선에 나간 승언장군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장군을 기다리던 부인은 결국 바위에서 죽고 말았다. 그 뒤 사람들은 이 바위를 할미바위라고 불렀다. 할미바위 옆에 어느 날 갑자기 큰 바위가 우뚝 솟아올랐으니 지금의 할아비바위다.

할미할아비바위 뒤로 타원형을 이룬 꽃지해수욕장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길이 3.2㎞ 폭 300m에 이르는 넓은 해수욕장은 솔숲이 감싸고 있고, 앞으로는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넓고 아름다운 해수욕장을 할미할아비바위가 수문장처럼 지키고 있는 셈이다.

방포전망대에서 꽃지해변 쪽으로 내려가니 방포항 근처 평지에 모감주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길이가 120m에 이르는 숲에는 2m 높이의 모감주나무 400-500그루가 자생하고 있다. 방포 모감주나무군락은 천연기념물 138호로 지정되었다. 모감주나무 열매는 스님들이 쓰는 염주의 재료로 사용된다.

할미할아비바위를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꽃다리라 불리는 무지개다리가 놓여 있다. 꽃다리에서 바라보는 할미할아비바위의 모습은 방포전망대에서 볼 때보다 서로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배어나온다. 할미할아비바위는 물이 빠지면 꽃지해변과 연결이 되어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다.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 사이로 지는 낙조는 서해안 3대 낙조로 손꼽히는데, 오늘은 날씨가 흐려 황홀한 노을을 볼 수가 없다. 저녁노을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길이라고 해서 ‘노을길’이라 했다. 물이 빠져 해수욕장과 연결이 되었던 할미할아비바위는 물이 차서 다시 섬으로 돌아갔다.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는 여전히 서로를 그리워하며 말이 없다.


※여행쪽지

▶안면도 노을길은 안면도 최북단인 백사장항에서 삼봉해변-기지포해변-두여해변-밧개해변-두에기해변-방포해변을 거쳐 꽃지해변까지의 12㎞ 거리로, 3시간 40분 정도 걸린다.
▶가는 길 : 서해안고속도로 홍성IC→(96번 지방도로를 따라)서산방조제→원청리 삼거리에서 좌회전→(77번 국도를 따라)안면교 건너 백사장항 쪽으로 우회전→백사장항
▶노을길이 끝나는 꽃지해변과 방포해변 근처에는 식당과 숙박업소가 많다.

 

 

게·짱뚱어 노니는 갯벌에 모세의 기적이 
 (광주매일 2014. 06.12. 19:19)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 증도 ‘모실길’

몸과 마음이 지친 모든이에게 ‘힐빙’(힐링+웰빙) 선사

 

한국 최초의 갯벌도립공원이며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인 생명의 섬 증도.

 

무안 해제와 지도를 건너 증도에 도착했다. 아름다운 생명의 섬 증도를 도보로 걸을 수 있는 모실길을 만나기 위해서다. 모실길 2코스 출발지점인 ‘신안해저유물발굴기념비’에 도착한다. 송·원대유물발굴은 1976년에 한 어부에 의해 발견된 도자기 한 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76년부터 1984년까지 계속된 해저 발굴에서 수만 점에 이르는 송·원대 도자기와 목제품, 금속제품, 석제품, 동전, 기타 생활용품이 발굴되었다. 30여 년 전, 송·원대유물이 발견되었던 바다를 바라보며 신안해저유물발굴기념비가 서 있다.

유물발굴기념비 아래에 설치된 낙조전망대로 내려서니 바다와 섬이 만든 풍경이 아름답다. 해질녘에 망망대해로 스며드는 낙조를 감명깊게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북쪽에 임자도가 우뚝 솟아있고, 기암절벽 뒤로 증도의 부속섬인 도덕도가 슬며시 고개를 내민다. 남쪽으로는 지척에 소단도와 대단도, 내갈도와 외갈도 같은 작은 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천혜의 자연환경 간직한 ‘亞최초 슬로시티’

아침 우리가 도착한 시각은 바닷물이 완전히 빠져 소갈도는 물론 바깥쪽의 대갈도까지 바닷길이 열려 있다. 소갈도에는 증도 앞바다에서 발견된 원나라 무역선과 같은 모양의 배 카페가 있다.

소갈도에서 북쪽으로 보이는 증도해변은 기암괴석이 아기자기하고, 남쪽해변은 모래사장과 갯벌이 펼쳐진다. 근처에는 만들독살이 있다. 석방렴으로도 불리는 만들독살은 조석간만의 차가 심한 바닷가에 쌓은 돌담이다. 밀물을 타고 독살 안으로 들어왔다가 썰물 때에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고기를 손쉽게 잡는 방식이다.

해변 곳곳에는 이국적인 펜션들이 바다와 어울려있다. 넓은 갯벌과 짱뚱어다리, 우전해수욕장이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이런 모습을 한눈에 바라보기 위해 상정봉(127m)으로 오른다. 상정봉에 오르다가 뒤돌아보면 아름다운 바다풍경이 발길을 붙잡는다. 드넓은 갯벌, 우전해수욕장의 까마득한 모래사장과 해수욕장을 감싸고 있는 소나무 숲과 함께 푸른 바다가 한편의 풍경화가 된다.

정상에 서니 이러한 증도의 절경이 실감나게 다가온다. 우전해수욕장의 검푸른 해송 숲은 마치 한반도를 닮아 신비하다. 갯벌 위에 놓인 짱뚱어다리의 모습은 소박해서 좋다.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태평염전은 140만평에 이르는, 단일염전으로는 국내 최대의 염전이다. 연간 1만6000t의 소금이 이곳에서 생산된다. 염전 주변에는 소금박물관, 염전체험장 등 다양한 체험시설도 갖추고 있다.

상정봉 정상에서 바라 본 아름다운 풍경들.

길은 갯벌해변으로 이어진다. 엄청나게 넓은 갯벌은 물이 빠져 맨 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게가 갯벌 속으로 몸을 숨겼다가 슬며시 기어 나와 잔걸음으로 갯벌 위를 기어간다. 여기에 뒤질세라 짱뚱어도 몸을 비비꼬며 춤을 춘다. 이렇게 갯벌은 게와 짱뚱어의 놀이터가 된다.

이런 갯벌 위에 472m에 이르는 짱뚱어다리가 있다. 다리는 작은 철기둥 위에 나무판자를 깔아 주변의 갯벌과 어울리게 했다. 사람들이 다리를 건너면서 갯벌에서 자유롭게 놀고 있는 게와 짱뚱어를 바라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짱뚱어다리에 기대어 갯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행복해 보인다.

짱뚱어다리를 건너면 드넓은 우전해수욕장이다. 우전해변은 엘도라도리조트까지 타원형을 그리며 무려 4.2㎞에 달하는 모래사장을 이룬다. 밀가루처럼 고운 모래는 한없이 부드럽고, 끊임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는 거침이 없다.

우전해변 모래사장 옆으로는 10만 그루의 해송이 숲을 이루고 있다. 50여 년 전 거센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조성한 이 솔숲은 90㏊에 달한다. 모실길은 우전해변을 따라 조성된 한반도 모양의 해송숲길을 걷게 되어 있다. 길을 걷다보면 갯내음과 솔향이 만나고, 그윽한 숲과 장쾌한 바다가 가슴에 안겨온다. 소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상쾌하고, 바다에서 들려오는 해조음이 감미롭다.

엘도라도리조트가 점점 가까워진다. 리조트는 이러한 우전해수욕장의 아름다운 풍경을 내려다보며 해변언덕 위에 자리를 잡았다. 엘도라도리조트에 서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잃는다.

우전해변 모래사장으로 펼쳐진 10만 그루의 해송 숲길.

리조트 아래 신안갯벌센터에서 3코스가 끝나고, 4코스인 ‘갯벌공원의 길’이 시작된다. 여기에서 노두길이 놓여 있는 화도 입구까지는 차량으로 이동한다. 노두길 입구에는 ‘1004 갯벌공원’ 표지판이 서 있다.

화도는 증도에서 1.2㎞ 떨어져 있는 부속 섬인데, 이 두 섬 사이에 광활한 갯벌이 형성되어 있다. 이 갯벌은 증도 곳곳에 있는 갯벌 중에서도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한다. 증도에는 펄갯벌과 모래갯벌, 혼합갯벌 등 다양한 종류의 갯벌이 잘 보존되어 있다. 증도는 한국 최초의 갯벌도립공원이고,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이며 람사르습지이자 국가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지역이다. 증도를 중심으로 한 서남해안 갯벌은 세계 5대 습지 중 하나로 원시성이 잘 유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증도와 화도 사이를 잇는 1.2㎞에 이르는 노두길.

몸과 마음이 지친 모든이에게 ‘힐빙’(힐링+웰빙) 선사

증도와 화도 사이에도 예로부터 1.2㎞에 이르는 노두길이 있었다. 징검다리 형식으로 놓였던 노두길은 자동차 한 대 다닐 수 있을 정도의 폭으로 돌을 메워 시멘트 포장을 한 현재의 길이 되었다. 빠졌던 물이 차오르고 있는 시간이라 드넓은 갯벌을 볼 수는 없지만, 양쪽으로 바닷물이 차 있어 모세가 가른 홍해의 바닷길을 걸어가는 기분이다.

노두길을 건너니 화도다. 만조가 되면 섬이 꽃봉오리 같다하여 화도(花島)라 불렀단다. 화도가 유명해 진 것은 노두길에도 있지만 2007년에 MBC에서 방영한 ‘고맙습니다’라는 드라마 촬영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해변길을 따라 ‘고맙습니다’ 촬영지로 향한다. 촬영지는 마을 외곽의 외딴집으로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고, 집에는 당시 상영했던 영상사진들이 걸려 있다. 촬영가옥 뒤편 해변에 놓인 운치 있는 의자에 앉으니 바다와 주변의 섬들이 만든 풍경이 한없이 아름답다. 해변 길을 걷는데 파도가 감미로운 음악을 연주해준다.

노두길을 다시 건너 증도로 간다. 노두길에는 어느새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가끔 노두길까지 올라오는 바닷물을 밟으며 걸으니 바다 위를 걷는 기분이다. 잠시 후면 노두길도 물에 잠길 것이다.



여행수첩

▶증도해변과 염전을 한 바퀴 도는 증도 모실길은 총 42.7㎞에 4개 코스로 나누어져 있다.
▶가는 길 : 무안-광주고속도로 북무안IC → 24번 국도 해제·지도 방향 →해제·지도 갈림길에서 지도 방향으로 좌회전 → 지도읍소재지에서 사옥도·증도 방향으로 좌회전 → 지도대교 → 증도대교 → 증도면소재지 → 해저유물발굴기념비
▶증도에는 증도 갯벌에서 나는 짱뚱어탕이 유명하다. 면소재지에 있는 안성식당(061-271-7998), 이학식당(061-271-7800)에 가면 짱뚱어탕과 함께 백합탕도 맛볼 수 있다.

 

 

산이 굽이치니 강물도 굽이돌고, 기차도 휘돌아간다

 (광주매일 2014. 06.26. 19:11)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 곡성 섬진강 둘레길

 

전북, 전남, 경남 등 3개 도와 8개 시군에 걸쳐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은 그 너른 들판을 품고 정겨움을 더한다.

 

오랜만에 구 곡성역에 왔다. 역사 안으로 들어가 보니 철로변에 세워진 ‘곡성’역 표지판이 반갑게 맞이한다.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40여 년 전, 기차를 타기 위해 많이 들락거렸던 곳이라 감회가 새롭다. 전라선 복선화로 곡성역에서 압록역까지의 기찻길이 폐선되고, 곡성역도 신역사로 옮겨감에 따라 구 곡성역은 기차마을로 꾸며져 관광열차가 출발하는 역이 되었다.

오곡면소재지를 지나 섬진강으로 들어선다. 강가로 내려가는 길은 소박한 퐁퐁다리를 건너 고달면으로 이어진다. 소박한 퐁퐁다리가 유유히 흘러가는 섬진강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강변마을과 농경지도 섬진강과 한 식구가 되었다. 퐁퐁다리 위로는 물 흐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유속이 느린 강물과 느티나무·갈대숲이 강변습지를 이루고 있다.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데미샘에서 발원한 섬진강은 임실·순창·남원을 적신 뒤 곡성·구례·광양·하동을 지나 광양만으로 흘러든다. 길이 223.86㎞, 유역 면적 4천959.79㎢로 남한에서 네 번째로 크며 전북·전남·경남 등 3개도와 8개 시·군에 걸쳐있다.

굽이굽이 흐르는 섬진강과 그 강을 둘러싼 산줄기를 따라 레일바이크를 타고 떠나는 추억여행.

섬진강은 각 지역을 거쳐 오는 동안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다. 순창을 지나올 때는 적성강이 되었다가, 곡성과 남원 땅에서는 순자강으로 불리었다.

섬진강은 곡성 동악산과 남원 고리봉 사이를 지나면 곡성과 남원들판을 적시며 흐른다. 이곳의 섬진강이 순자강이다. 섬진강 주변의 풍부한 곡식과 강에 우글거리는 물고기, 무성한 수풀은 철새들의 낙원이 된다. 가을에 메추리가 떼를 지어 찾아온다고 하여 메추리 순(?)자를 써서 순자강이라 불렀다.

곡성 동악산과 남원 고리봉은 우뚝 서서 유유히 흘러가는 섬진강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섬진강은 산과 넓은 들판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우리는 섬진강 제방길을 따라 섬진강과 나란히 걸어간다. 들판에서 일을 하다가 휴식을 취하는 공간인 모정과 주변의 소나무들이 푸른 하늘아래에서 고요함을 즐기고 있다.

제방길이 17번 국도를 만나는 지점에서 둘레길은 도로를 건너 작은침실골로 들어선다. 여기서부터는 숲길이 이어진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유유히 흘러가는 섬진강이 내려다보이고, 멀리 동악산과 고리봉이 우뚝 솟아 있다. 곡성읍내의 건물들이 손짓하고, 곡성들판이 잔잔하다.

옛 철로와 17번 국도가 나란히 이어지는 그 길 아래로 자전거도로가 잘 조성돼 있다.

길을 걷다보면 이러한 섬진강의 아름다운 모습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전망대도 만난다. 전망대에서 섬진강을 바라보며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모습 역시 아름답다. 나무 사이로 바라보면 옛 철로와 17번 국도가 나란히 지나간다. 도로 아래로 자전거도로까지 있어 네 개의 길이 나란히 이어지는 셈이다. 숲길을 걷다가 관광열차만 다니는 철로를 따라서간다. 옛 철로를 걷다보니 증기기관차를 타고 달렸던 어린 시절 생각이 난다.

침곡역에 도착하니 주차장에 승용차들이 많이 주차되어 있다. 침곡역에서 가정역까지 5.1㎞ 구간은 레일바이크가 운행되기 때문이다.

침곡마을에서 침곡역까지 잠시 옛 철로를 걸었던 우리는 다시 숲길로 들어선다. 숲길 아래 철로를 따라 증기기관차를 개조한 관광열차가 지나간다. 관광열차를 타면 구 곡성역에서 가정역까지 섬진강변을 따라 느린 속도로 달리면서 구불구불 이어지는 섬진강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며 추억여행을 즐길 수 있다. 산이 굽이치니 강물도 굽이치고 철로와 도로도 슬며시 굽이돈다. 굽은 철로를 따라 달리는 열차도 곡선을 그리며 달려간다.

레일바이크를 타고 가는 사람들도 만난다. 굽이굽이 흘러가는 섬진강 물줄기와 섬진강을 둘러싸고 있는 부드러운 산줄기를 바라보며 레일바이크를 타고 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마냥 흐뭇하다.

하늘을 가린 숲길은 시원하고 상큼하다. 섬진강 둘레길은 숲길로 가다가 적적할 것 같으면 섬진강과 철로를 보여주고, 또 다시 고요한 숲속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한다. 곡성평야를 지난 섬진강은 산골짜기를 따라 굽이굽이 흘러간다.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도로도 달려가고, 철로도 따라서 간다. 이런 모습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철로 위에 높은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송정마을 앞 철로를 지나 편백나무 숲을 지나니 아름다운 적송숲이 이어진다. 그윽한 솔향기를 맡으며 걷다보니 어느덧 철로와 강이 가까이 와 있다. 레일바이크와 관광열차 정류장인 가정역에 도착한다. 가정역에서 섬진강을 건너는 출렁다리가 놓여 있다. 출렁다리를 건너면 청소년야영장과 섬진강천문대가 있다. 레일바이크나 관광열차를 타고 온 사람들은 출렁다리를 건너 강가에서 여유를 즐기거나 자전거를 빌려 강변 하이킹을 한다.

우리는 이정마을까지 폐철로를 따라 걷는다. 철로 주변은 푸른 숲이 싱그럽고, 아래로는 섬진강이 유유히 흘러간다. 우리는 얘기꽃을 피우며 관광열차나 레일바이크도 다니지 않는 철로를 따라 천천히 걷는다. 폐쇄된 철로를 걷다가 뒤돌아보니 섬진강과 출렁다리, 주변 산이 그린 풍경화가 천하일품이다. 산이 가지는 수직적인 느낌과 강의 수평적 분위기가 모아져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 이런 조화 속에 평화가 넘친다.

이정마을이 가까워지면서 철로변 밭에는 탱글탱글하게 열매 맺은 매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철로를 벗어나 감나무 밭을 지나니 이정마을 앞 17번 국도다. 여기서부터는 도로 아래 강변길을 걷는다. 강변길을 걷다보니 대나무가 다정하게 속삭이고, 강물이 감미롭게 노래를 한다. 강물은 자기를 낮추어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강물은 끝내 드넓은 바다가 된다. 낮은 곳으로 향했던 강물은 결국 세상의 모든 것을 포용하는 바다가 된 것이다.

오늘의 종착지인 압록오토캠핑장에 도착했다. 압록오토캠핑장은 옛날 압록초등학교가 있었던 자리다. 압록오토캠핑장 앞에서 우리가 함께 걸어 왔던 섬진강 본류는 보성 일림산에서 발원하여 순천 주암댐을 거쳐 곡성 땅으로 흘러든 보성강과 합류한다.

강물은 하염없이 흘러가고, 우리의 마음도 끊임없이 어딘가로 흘러간다. 맑고 소박한 곳으로 흘러갈 것이냐, 탐욕과 위선이 넘치는 곳으로 흘러갈 것이냐는 순전히 나에게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