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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 미/여행정보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 (광주매일 2013. 08.23. 00:00)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 지리산 둘레길 ‘덕산-위태’

 

작은 계곡에서 티없이 흘러내린 맑은 물들이 모여 내를 이루고, 산 줄기 줄기 그 내들은 넉넉한 지리산의 품을 안고 휘돌아 정갈한 여백을 만들며 江의 길로 유유히 흘러간다.

 

 

덕산에 들어서자 어느새 지리산의 넓고 깊은 품안에 들어온 것 같다. 지리산 천왕봉이 고고한 품세를 드러내고, 서쪽에서는 써리봉에서 뻗어 나온 황금능선과 구곡산이, 동쪽에서는 웅석봉에서 이어온 지리산의 마지막 줄기인 이방산·수양산·백운산이 덕산을 감싸고 있다. 지리산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은 지리산에서 약초며 산나물을 채취한다. 지리산에서 나오는 산야초와 산나물은 주로 덕산에서 거래된다. 그래서 덕산에 약초시장이 선다.



시천면소재지를 벗어나자 덕천강이 덕산을 감싸고 유유하게 흘러가고 있다. 덕천강은 덕산에서 대원사 쪽에서 내려오는 강물과 중산리계곡에서 내려오는 시천천이 합류하여 강폭을 넓힌다.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이 내려 보고 지리산의 맑은 물줄기가 만든 덕천강이 감싸고도는 덕산은 지리산의 고고한 기운과 덕천강의 청정한 기운이 넘쳐흐른다.

덕산중·고등학교 옆 구곡산 자락에는 덕천서원이 있다. 입구에는 남명선생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400년이 넘은 커다란 은행나무가 수문장처럼 서 있다. 시정문(時靜門)이라 쓰인 외삼문을 들어서니 정면에 덕천서원(德川書院)이 단아하게 앉아있고, 넓은 마당 사이로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있다.

덕천서원은 남명이 타계하고 5년 뒤인 선조9년(1576)에 선생의 학문과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제자들이 세웠으며, 광해군 1년(1609)에 사액을 받았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없어져 1920년에 중건되었다. 산천재가 그렇듯이 덕천서원도 청빈하고 기개가 곧은 남명선생의 삶처럼 화려하거나 거창하지 않고 단아하고 소박하다.

 

덕천서원 앞 덕천강가에는 세심정(洗心亭)라고 하는 사각정자가 혼탁한 마음을 씻어주듯 고요히 앉아 있다. 지금의 정자는 근래에 중건된 것이지만 세심정도 남명 선생 생전부터 있었다고 전해진다.

덕천강변길을 따라 걷는다. 뒤로는 구곡산이 우뚝 서 있다. 강 건너로 덕산의 건물들이 바라보인다. 남명선생이 제자를 길렀던 산천재도 덕천강변에서 유구한 세월을 보내고 있다. 제8구간 때 걸었던 마근담계곡도 바라보이고, 백운산·수양산 같은 봉우리들도 강 건너에서 손짓을 한다.

강물은 깔끔한 자갈 위로 흘러가면서 스스로를 정화하고, 강가의 자갈밭은 정갈한 여백을 만들어 강의 품격을 높여준다. 수양산에서 내려오는 지리산 끝줄기와 중태마을을 감싸고 있는 두방산 줄기가 만나려다가 줄기를 잇지 못하고 덕천강으로 빠져든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

덕천강과 헤어지기 전에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지리산 연봉들과 작별 인사를 한다. 덕천강을 등지고 중태마을로 가는 도로를 따라 걷는다. 주변의 밭은 온통 감나무 일색이다. 늦가을 빨간 감이 주렁주렁 매달릴 이곳 풍경은 상상만 해도 풍요롭다. 산청군 시천면은 경상북도 상주, 충청북도 영동과 함께 우리나라 곶감의 주생산지이다.

시천곶감은 적색보다는 황색이 강하며 당도가 높아 조선시대에는 고종황제에게 진상되었고, 1999년 방한한 영국 엘리자베스여왕에게 선물하여 극찬을 받기도 했다. 시천곶감은 지리산의 차가운 공기가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서 일교차를 크게 발생시켜 당도가 뛰어나다. 주변에 오염원이 전혀 없는 청정지역이라서 자연 상태로 건조하기 때문에 곶감의 신선도도 높다.

 

중태마을을 품고 있는 두방산(494m) 골짜기로 깊숙이 빠져든다. 중태마을에는 길 가운데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고, 그 옆에 ‘지리산둘레길 중태안내소’가 있다. 오가는 탐방객들이 스스로 책임여행과 공정여행을 다짐하는 기록을 남기는 장소다. 이 안내소에는 둘레꾼들에 의한 농가의 피해를 줄이면서 마을이 자율적으로 지리산둘레길 안내를 담당하겠다는 소망이 담겨있다.

‘지리산둘레길 중태안내소’를 지나자 1차선 시멘트길이다. 길옆의 작은 계곡에서는 티없이 맑은 물이 흘러간다. 산비탈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작은 밭도 감나무 일색이다. 이런 깊은 산골에 사람이 살까 싶지만 가끔 민가도 나타나고, 작은 마을도 있다. 골짜기는 점점 깊어지고 물줄기는 가늘어져 실개천으로 바뀐다. 아내와 함께 길을 걷다가 땀이 나면 물가에 앉아 세수도 하고 탁족도 하는 여유를 즐긴다.

깊은 골짜기가 끝나갈 무렵, 또 하나의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유점마을이다. 유점마을에서는 이름 그대로 옛날에 놋그릇(유기)을 만들었다고 한다. 유점마을은 덕천강가에서 좁은 골짜기를 통하여 6㎞ 이상 들어와야 만날 수 있는 마을이라 바깥세상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별천지다. 텃밭에서 채소를 가꾸고 있는 할머니 한 분을 만난다.

“할머니, 이 마을에는 몇 가구나 사세요?”

“일곱 가구야. 토박이는 하나도 없고 전부 외지에서 좋은 자연 찾아온 사람들이야.”

도시에서 귀촌한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그런지 모든 집이 근래에 지은 현대식 가옥들이다. 골짜기가 워낙 깊고 좁아 열려 있는 곳이라곤 하늘밖에 없다. 좁은 하늘을 바라보며 때 묻지 않은 원초적 심성으로 걸어 들어간다. 아름드리 네 그루 서어나무가 고요를 즐기고 있다. 유점마을 당산이다. 서어나무 당산 아래에 앉아서 고요가 가져다주는 행복을 즐긴다. 깊은 골짜기가 끝나자 임도를 벗어나 호젓한 산길로 이어진다.

잠시 후 갈치재에 닿는다. 갈치재는 산청군 시천면과 하동군 옥종면을 이어주는 고개로 중태재라고도 불린다. 갈치재는 예전 등짐장수들이 소금·미역·김·건어물 등을 짊어지고 산청과 하동을 넘어 다니던 장삿길이었다.

갈치재에서 호젓한 숲길을 내려오니 하늘 높이 솟은 대나무 숲이 장관이다. 왕대 사이를 걷고 있으니 댓잎이 사각거리면서 세속의 떼를 벗겨준다. 세속의 속박에서 벗어나자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진다. 아름다운 대숲 아래 조그마한 소류지 너머로 지리산 영신봉에서 뻗어 나와 김해까지 이어가는 낙남정맥 줄기가 다가온다. 곧이어 만난 위태마을이 소박하다.



여행쪽지

-지리산둘레길 덕산-위태 구간은 10.3km로 4시간 정도 걸린다.
-진주에서 원지를 거쳐 대원사나 중산리 가는 버스를 타고 덕산에서 내린다. 원지터미널에서 덕산행 버스가 첫차 06:35, 매시간 25분, 막차 21:35에 있고 30분 정도 걸린다.
(원지시외버스터미널:055-973-0547, 진주시외버스터미널:055-741-6039)
-위태마을에서는 옥종-진주행 버스가 08:10, 12:55, 18:50에 있다. 시간이 맞지 않으면 택시를 이용할 수 있다(옥종택시 055-882-8094)
-위태리에는 식당이 없다. 근처 옥종면소재지에 있는 영화식당(055-882-4210)은 주인의 손맛과 인심이 좋아 백반 등으로 간단하게 요기할 때 좋다. 미리 주문하면 필요한 재료를 구입해서 특별식을 마련해주기도 한다.



 

유유한 섬진강은 아름다운 풍경화가 되고
(광주매일 2013. 09.06. 00:00)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 지리산 둘레길 ‘하동읍-서당-대축’

굽이굽이 강물 적신 대지엔 가을 풍요로움 가득
비탈진 언덕에 ‘갓논’ 억척스런 삶의 애환으로

걸음걸음 풍경에 취하고 푸근한 인심에 반하고
토지의 무대 ‘평사리’·‘문암송’…길마다 사연이

 

세월을 품고, 사람을 품고 도도히 흘러가는 저 강물이 여행자에게 말을 건다 “생각에 얽매이지마, 느낀데로 발길 닿는데로 가는 거야…그것이 인생이라고.”

지리산둘레길 하동센터에서 길 걷기를 시작한다. 하동센터 앞을 지나 정다운 골목길을 따라 뒷동산으로 올라선다. 숲길을 걷다가 조망이 트일 때면 섬진강 하구 풍경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굽이굽이 흘러가는 강줄기와 강물이 적셔주는 주변의 들판이 한없이 평화롭다. 섬진강 뒤로는 백운산을 지나 망덕에서 바다로 빠져드는 호남정맥의 산줄기가 고도를 낮추어간다. 오백리 길을 쉬지 않고 달려온 강물에는 섬진강에 기대어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스며있다.



바람재에서 능선을 벗어나 임도를 따라 율동마을로 내려간다. 하동읍을 출발한 후 만나는 첫 마을인 율동마을은 야트막한 산이 감싸고 앞으로는 들판이 펼쳐져 포근하다. 들판너머로 하동군 적량면 소재지가 바라보인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율동마을과 관동마을을 연결하는 길이자 농사를 짓기 위해서 통행하는 농로다. 학생들은 적량면소재지에 있는 초등학교에 가기 위해 걸어야 했던 등굣길이기도 하다.

대체로 산골마을이 그렇듯이 길게 뻗어 내린 양쪽 산줄기 가운데에 논이 있고, 산자락에 관동마을·원우마을·상우마을·서당마을 등 여러 마을이 들판을 가운데 두고 마주보고 있다. 푸른 논에는 벼들이 피어 올 가을 풍년을 예고한다. 풍요로운 들판 너머로 바라보이는 마을에서 넉넉한 기운이 느껴진다.

우계저수지에서 내려오는 개천을 건너 서당마을로 가는데, 350년 된 이팝나무가 일행을 맞이한다. 높이 8.6m, 둘레 3.5m에 이르는 이팝나무는 서당마을의 당산나무 역할을 하고 있다. 이팝나무는 5월에 꽃이 피면 나무에 흰 눈이 덮인 것처럼 장관을 이룬다. 이팝나무는 꽃잎이 흰 쌀밥 같이 생겨서 이밥나무라고 부르다가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서당마을에서 우계저수지까지는 2차선 포장도로를 따른다. 우계저수지 둑길을 걷는데 두 폭의 풍경화가 가슴에 안겨온다. 둑길 아래에서 산과 푸른 들판과 소박한 마을을 담은 풍경화가 아름답게 다가오고, 위로는 검푸른 우계저수지와 저수지를 감싸고 있는 구재봉, 분지봉이 어울려 또 한 폭의 실경산수화를 보여준다.

포장도로는 우계저수지 오른쪽으로 이어지고 둘레길은 저수지 둑을 건너 반대편 산자락 밭둑길을 따른다. 우계저수지를 지나자 골짜기는 조금씩 좁아지고 농경지는 층계를 이룬다. 다랑이논의 일종인 갓논이라 불리는 작은 논들이 경사지고 비탈진 언덕에 촘촘하게 들어서 있다. 갓으로 덮어질 정도로 작은 논이라는 의미에서 갓논이라 했다. 경사지에 논을 일구면서 크기가 다른 돌을 짜 맞추어 2-5m 높이로 쌓은 돌 축대와 층계를 이룬 갓논들은 농민들의 건강한 생존의지가 만들어낸 예술품이다.

신촌마을을 지나 농로를 따르다가 임도로 접어든다. 솔숲 향기 그윽한 임도를 돌고 돌아 신촌재로 고도를 높여간다. 뜨거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걷고 또 걸으며 걷기수행을 한다. 내려 보이는 우계저수지와 논경지가 여러 마을과 어울린 풍광이 그 동안 흘린 땀방울을 보상해준다. 구재봉과 분지봉 사이에 있는 신촌재(460m)에 올라선다. 칠성봉과 구재봉을 지난 산줄기가 이곳 신촌재와 분지봉을 거쳐 하동읍까지 이어간다.

먹점마을은 온통 매화천지다. 그래서 먹점마을을 하동의 매화마을이라 부르기도 한다. 2004년부터는 먹점마을에서 매년 ‘산골매화꽃축제한마당’을 열고 있다. 먹점마을은 검은 흙이 많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구재봉 남서쪽 해발 400-500m 고지에 형성된 마을이다. 구재봉에서 양쪽으로 뻗어 나온 산줄기가 먹점마을을 감싸고, 좁게 트인 골짜기 사이로 백운산에서 억불봉까지 이어지는 백운산 능선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어느 매실농원 앞을 지나는데 주인인 노부부께서 우리 일행을 불러 시원한 매실차 한 잔씩을 대접한다. 후덕한 인심에 지친 몸에 힘이 솟아난다.

먹점재로 올라가는데 먹점마을 뒤 매실 밭에 우뚝 서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 두 그루가 고고하다. 두 그루의 소나무는 스스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 아름다움은 먹점마을의 운치를 더해준다. 사람이 사는 공동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름다울 때,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는 이치가 바로 그것이다.

먹점재(474m)를 넘어서서 임도를 따라 내려가다가 더 이상 발을 떼지 못한다. 산자락을 굽이굽이 돌면서 흘러오는 섬진강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아버린 것이다. 실타래를 풀어놓은 듯 유유히 흘러오는 섬진강은 형제봉 능선과 악양들판이 함께 어울려 강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풍경이 된다.

백운산과 지리산을 가르면서 굽이쳐 흘러온 섬진강은 하동군 화개면을 지나면서 강폭이 더욱 넓어져 강다운 위용을 갖춘다. 섬진강 뒤로 멀리 왕시리봉이 우뚝 서서 하염없이 흘러가는 섬진강을 지켜보고 있다. 아름다운 섬진강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처럼 아름다운 풍경은 시간까지도 멈추게 하는 마력이 있다.

넓은 악양들판과 악양들판을 감싸고 있는 시루봉-형제봉-고소산성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남부능선 끝자락이 정면으로 등장한다. 형제봉 자락에는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가 되었던 악양면 평사리가 포근하게 둥지를 틀고 있다.

600년 수령의 천연기념물 제491호 문암송 앞에 서니 저절로 숭엄해진다. 높이 12.6m, 둘레 3.2m에 이르는 문암송은 바위틈에서 용틀임하면서 낙락장송이 되었다. 매서운 추위와 거센 비바람을 견디며 의젓하게 서 있는 문암송은 악양들판의 부부 소나무를 굽어보고 있다. 옛날에 이 나무 아래에서 문인들이 모여 자주 시회를 열어서 문암송이라 불렀다. 소나무 앞에는 문암송과 악양들판을 바라보며 풍류를 즐길 수 있도록 문암정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문암정에서 대축마을로 내려오는데 감나무가 유난히 많다. 그래서 대축마을을 하동 악양 대봉감마을이라고도 부른다. 감나무와 어울려 있는 돌담도 정다움을 더한다. 대축마을 앞으로 펼쳐지는 악양들판이 풍요롭다.




여행쪽지

-지리산둘레길 화순읍-서당구간은 샛길(지선)구간으로 7.1㎞이고, 서당마을에서 대축마을까지는 13.4㎞로 화순읍-서당-대축 구간은 총 20.5㎞로 7시간 정도 걸린다.
-하동읍에서 서당마을 가는 버스(신촌행 버스)는 하루 세 차례(07:00, 14:00, 18:00) 운행된다. 15분 소요
-대축마을에서 하동행 버스는 06:50, 07:30, 08:10, 08:45, 09:25, 10:15, 10:40, 12:10, 13:15, 14:25, 15:25, 15:55, 17:40, 17:50, 19:10에 있고, 20여분 소요된다.
-대축마을에는 식당이 없고 악양면 평사리에 ‘토지사랑’(055-882-7111)이라는 식당을 권할 만하다. 산채비빕밥(7,000원), 재첩국(8,000원), 청국장(7,000원), 해물파전(10,000원)

 

 

 악양들판과 지리산·섬진강이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되고

 (광주매일  2013. 09.27. 00:00)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 지리산 둘레길 ‘대축-원부춘’

 

넉넉한 지리산이 품고 유유한 섬진강이 보듬어낸 악양 너른 들판. 부부송과 어우러진 황금들녘이 한폭의 풍경화처럼 장관을 이룬다.

 

지리산 영신봉에서 남쪽으로 가지를 뻗은 남부능선은 삼신봉과 상불재를 지나 시루봉 삼거리에서 두 줄기로 갈라진다. 한 줄기는 형제봉을 지나 고소산성으로, 또 한 줄기는 회남재-칠성봉-구재봉으로 고도를 낮추어가다가 섬진강으로 빠져든다. 두 산줄기 사이에는 83만평에 이르는 널따란 들판이 형성되어 있고, 들 앞으로 섬진강이 유유히 흘러간다. 이렇듯 악양 땅은 너른 들판이 있고, 마을과 들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산이 있으며, 들판을 촉촉하게 적셔 주는 강이 있어 사람들이 살기에 넉넉한 고장이다.



악양천을 가로 지르는 축지교를 건너면 둘레길은 악양천 둑길을 따라 양쪽으로 갈 수 있다. 악양천 둑길을 걷는데 형제봉 아래로 황금빛 들판이 한없이 풍요롭다. 형제봉 자락에 기대고 있는 평사리, 대촌마을, 입석리 같은 마을이 넉넉한 들판과 유연한 섬진강을 바라보며 행복해하고 있다.

형제봉 능선의 한산사와 고소산성도 보인다. 고소산성은 삼국시대에 쌓은 석성(石城)으로 나당연합군과 백제군이 격돌했던 곳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드넓은 악양들판에는 아름드리 두 그루의 소나무가 군계일학처럼 서 있다. ‘악양 부부송’이라 부르는 소나무다. 25m 정도 높이의 부부송을 형제봉이 감싸주고, 부부송은 황금빛 들판을 거느린다. 들판을 맴돌던 백로 두 마리가 부부송 위에 앉아 사랑을 속삭인다. 저 부부송이 허허벌판에 외롭게 서서 지금의 의연한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매서운 눈보라도 이겨내고, 뿌리까지 뒤흔드는 폭풍우도 견뎌내야 했을 것이다.

부부송을 지나면 동정호에 닿는다. 타원형 자연호수 가운데에는 인공섬도 만들고, 호수가에 악양루라고 하는 누각까지 세웠다. 누각에 앉으면 동정호는 물론 부부송과 너른 들판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호수가로는 산책할 수 있도록 산책로도 조성해놓았다.

평사리는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가 된 마을이다. 소설 ‘토지’는 만석꾼 최참판댁이 몰락하면서 홀로 남은 딸 서희가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 4대에 걸친 이야기다. 이야기는 구한말인 1897년부터 1945년 해방시기까지 48년에 걸쳐 이곳 평사리에서 시작하여 진주·통영과 서울, 중국·일본을 이동하면서 전개된다. 소설은 서희와 길상을 비롯하여 수백 명에 이르는 인물의 개인사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속에는 민족의 역사와 사회의 변화까지도 담겨 있다.

박경리는 1969년부터 1994년까지 무려 25년 동안 ‘토지’ 전권을 집필하였다. 이곳 평사리가 소설의 주요 무대임에도 작가 자신은 먼발치에서 스쳐지나갔을 뿐 정작 평사리에는 들어가 본 적이 없다고 한다. 평사리를 감싸 안은 지리산과 섬진강의 역사적 자취와 만석꾼이 나올 만한 넓은 들판이 소설의 배경이 되기에 적격이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대촌마을을 벗어나니 비탈진 밭이 이어진다. 밭에는 감나무와 매실나무가 많은데, 오늘은 주렁주렁 열린 감들이 탐스럽다. 길을 걷다가 뒤돌아보면 황금물결 출렁이는 들판과 부부송, 그리고 유유히 흘러가는 섬진강이 주변 산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온다.

밭일을 마치고 걸어 내려오는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순박한 농부의 마음을 읽는다. 경운기를 타고 내려오는 마을주민과도 인사를 나눈다. 두 사람이 팔을 벌려야 끌어안을 수 있을 정도의 서어나무 두 그루를 만난다.

서어나무 아래에는 평상과 의자가 있어 길손들이 쉬어가기에 안성맞춤이다. 서어나무 그늘이 시원하고 건너편으로는 대축마을 뒤편으로 구재봉이 조망된다.

서어나무 당산을 지나서야 오늘 처음으로 흙을 밟는다. 가파른 비탈길에는 울창한 숲이 하늘을 가린다. 소나무와 여러 종류의 활엽수들이 있지만 유난히 아름드리 서어나무가 많다. 죽은 나무줄기에서는 버섯이 기생을 한다. 나무는 살아서는 숲을 만들어주고 죽어서는 버섯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이 되어준다.

땀을 뻘뻘 흘린 후에 형제봉에서 내려오는 능선에 도착한다. 입석마을과 원부춘마을을 연결해주는 웃재다. 웃재에서 200m 쯤 가다보니 5m 높이의 바위가 있고, 그 앞에 좁새바위라 불리는 조망처가 있다. 좁새바위에 서니 섬진강이 바라보인다. 섬진강 뒤로는 백운산과 호남정맥이 유장하게 펼쳐진다. 산허리를 돌아가는 길이지만 때때로 만만찮은 오르막길도 있다.

인공적인 소리라고는 우리의 발소리뿐, 길은 고요하기 그지없다. 이런 길에서는 잡념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도달한다. 길을 걷는 것 자체가 참선이다.

7m 높이의 선돌을 만난다. 선돌에는 소나무나 물푸레나무 같은 나무도 자란다. 선돌 앞의 조망바위에 어렵사리 기어 올라가니 형제봉 줄기 너머로 악양에서 하동읍으로 굽이쳐 내려가는 섬진강 물줄기와 주변의 산봉우리들이 감동을 자아낸다. 아름다운 풍경화를 감상하느라 넋을 잃고 있는데, 아내가 빨리 내려오라고 불러댄다.

소나무 일색의 숲은 점차 참나무, 때죽나무, 산벚나무, 단풍나무 같은 낙엽활엽수로 바뀐다. 10월 하순이면 우아하게 물든 단풍과 함께 걸을 수 있는 길이다. 홍골이라고 부르는 작은 계곡에서 물소리가 청량하게 들려온다. 이른 봄 고로쇠를 채취하기 위하여 연결해 놓은 호스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잠시 물가에 앉으니 뜨거워진 가슴이 금방 시원해진다.

이윽고 시야가 터지면서 원부춘마을이 내려보인다. 마을 뒤편에는 민가를 개조한 듯한 조운사라는 작은 절도 있다. 멀리 있는 광양 백운산을 바라보면서 마을로 내려가니 깊은 골짜기 속에 별천지처럼 자리 잡은 원부춘마을이다.

원부춘 마을회관에 도착하여 세 분의 노인과 잠시 얘기를 나눈다. 현재 마을에는 40가구가 살고 있으나 30가구만이 상주한다고 한다.

이곳 원부춘마을에는 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주민들은 밤과 매실, 녹차를 재배하거나 각종 산나물을 채취해서 살아간다. 가끔 개 짓는 소리가 들릴 뿐 산골마을은 조용하다 못해 외롭기까지 하다. 마을 옆 배나무골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시원하다.]


여행쪽지

-지리산둘레길 대축-원부춘 구간은 8.6㎞(평사리 경유시 10.3㎞)로 4시간 30분(평사리 경유시 5시간) 정도 걸린다.
-하동읍에서 대축마을 가는 버스(화개행 버스)는 7:40, 8:00, 9:40, 10:10, 11:00, 12:40, 14:00, 15:20, 16:45, 18:50, 20:30에 있다. 20분 소요
-원부춘마을에서 하동행 버스는 15시 20분 하루 한 차례 있다. 20여분 소요된다.

 

 

“미역소금 어물지고 춘양장은 언제가노”
(광주매일 2013. 10.11. 00:00)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 울진 금강소나무숲길


울창한 원시림과 협곡 때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
수백년된 금강송 군락은 산양의 마지막 휴식처
옛 보부상들이 넘나들던 열두고개 그 길을 걷다

 

옛 보부상들이 넘나들던 열두고개중 일부 구간을 되살려 금강소나무숲길로 만든 생태 관광. 자연의 숲 그대로를 보전하기 위해 일일 탐방인원을 제한하는 가이드 동행 예약 탐방제로 운영된다.

 

강원도 태백에서 백두대간으로부터 분가한 낙동정맥은 높은 산줄기와 첩첩한 산군을 형성하며 동쪽 해안지역과 서쪽 내륙지역을 갈라놓았다. 조선시대의 보부상들은 산 높고 골 깊은 낙동정맥을 넘나들며 두 지역에 생필품을 조달하였다. 보부상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울진과 봉화를 오가며 넘었던 십이령길은 열 두 개의 고개를 넘는 6㎞에 달하는 길로 보통 3박4일이 걸렸다. 보부상들이 다녔던 십이령길 중 울진군 일부 구간을 되살려 금강소나무숲길을 만들었다. 금강소나무숲길 1구간 출발지인 두천리에 도착하니 우리를 안내할 숲 해설사가 기다리고 있다.


십이령가(十二嶺歌)

미역소금 어물지고 춘양장은 언제가노
대마담배 콩을지고 울진장을 언제가노
반평생을 넘던고개 이고개를 넘는구나
한양가는 선비들도 이고개를 쉬어넘고

가노가노 언제가노 열두고개 언제가노
시그라기 우는고개 내고개를 언제가노
두천리의 원래 이름은 말래마을이다. 울진에서 출발하여 봉화로 가기위해서 쇠치재를 넘어온 상인들은 이곳 두천리에서 하루를 묵어야했다. 보부상들이 숙박을 하다 보니 이곳에는 크고 작은 주막이 여러 곳 생겼고, 이를 말래주막거리라 하였다.

옛날 보부상들이 50㎏ 정도 되는 무거운 짐을 지고 넘었던 고개를 우리는 가벼운 배낭을 메고 걷는다. 보부상 길을 걷기 시작하는데, 10m 높이로 냇가에 서 있는 벼랑이 길손들을 맞이한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니 내성행상불망비(乃城行商不忘碑)가 서 있다. 1890년경 울진과 봉화를 왕래하면서 장사를 하던 보부상과 선질꾼들이 자신들로 하여금 안전하게 장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 봉화군 봉화읍 내성리 사람인 접장 정한조와 반수 권재만에 대한 은공을 기리기 위해 보부상 길의 초입에 비를 세웠다.

옛날에는 보부상들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보부상이 퇴조한 뒤에는 선질꾼들이 걸어서 넘었던 십이령 중 두 번 째 고개인 바릿재를 넘는다. 바릿재란 소에다 물건을 바리바리 싣고 다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두 줄기의 물이 합류하는 두천천에는 산양서식지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멸종위기종 1급이자 천연기념물 제217호로 지정된 산양은 금강소나무 숲길 근처에서 서식한다.

보부상들과 주민들이 신변의 안전과 성공적인 행상을 기원하며 조령 고갯마루에 세운 조령성황사.

간간이 금강소나무 군락이 나타나면 길은 걷는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눈길이 멈춘다. 금강소나무는 일본의 식물학자 우에끼 박사가 붙인 이름으로 줄기가 곧고 나이테가 균등하고 좁으며 목리(木理)가 곧다. 금강소나무는 일반 소나무보다 나이테가 3배 이상 촘촘하여 금강석처럼 재질이 단단하다. 세포가 살아있는 줄기의 바깥부분(변재)보다 죽은 세포로 이루어진 안쪽부분(심재)에 황색 송진이 농밀하게 박혀 있어 잘 썩지 않는다. 이러한 황색 속살 때문에 황장목(黃腸木)이라 부른다. 철도가 생긴 뒤로는 울진·봉화 지역에서 벌목된 금강소나무가 봉화 춘양역에 집산되어 서울로 옮겼다고 하여 ‘춘양목’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중앙정부에서는 궁궐을 지을 목재를 확보하기 위하여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되는 봉산(封山)을 지정하였다. 질 좋은 금강송이 생산되는 소광리 인근도 봉산으로 지정되어 국가에서 특별히 관리하였다.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한 봉산의 경계표석을 조선 숙종 때 세웠는데, 그 동쪽경계를 알리는 황장봉계표석이 임도 옆 바위에 새겨져 있다.

찬물내기에서 임도를 벗어나 호젓한 산길을 걷는다. 울창한 원시림과 협곡을 이룬 골짜기를 지나자 10여 그루의 금강송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해설사에 따르면 수령 70년 정도 되었다는 이곳 금강송은 하도 예뻐 미인송이라 부른단다.

세 사람이 보듬을 수 있을 정도의 470년 된 부부송이 거친 숨을 쉬며 올라오는 길손들을 맞이한다. 부부송을 지나 잠시 조망이 트이자 멀리 안일왕산(819m)이 모습을 드러낸다. 안일왕산에는 800m 길이의 산성이 남아 있고, 수령 700년이 넘는 대왕소나무도 있단다. 샛새를 오르며 보부상들은 십이령가(十二嶺歌)를 불렀다.

샛재를 넘으니 조령성황사라는 편액이 붙은 성황당이 있다. 1819년 보부상들이 무사안녕과 소원성취를 기원하기 위해 세운 이곳 성황당에는 위패가 모셔졌기에 성황사(城隍祠)라 했다. 성황사 앞에는 우아한 자태와 웅대한 기상을 자랑하는 수백 년 된 금강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소나무는 수령 460년에 세 사람이 두 팔을 벌려도 껴안기 힘들 정도다. 거북이등 문양을 한 소나무 줄기가 고매한 품격을 드러내준다. 이곳 소나무들은 문화재보수용으로 지정이 되어 줄기 밑동에 노랑색 페인트로 줄을 그어놓았고, 그 위에 흰색으로 숫자를 적어 놓았다. 1번부터 1487번까지 번호를 매겨놓았다고 한다.

이어서 샛터주막터를 만난다. 이곳 주막에서는 큰 방 3칸 규모의 봉놋방에 40~50명의 숙박이 가능했다고 전한다. 아직도 주막터에 남아 있는 바닥이 삭아버린 무쇠 솥만이 보부상들의 애환을 알려주는 듯하다. 대광천으로 흘러가는 작은 계곡을 옆에 끼고 이어지는 평탄한 숲길이 더없이 소박하다. 계곡가에 하얗게 핀 궁궁이꽃들이 맑은 물에 꽃 그림자를 만든다. 계곡을 건널 때면 어김없이 돌다리를 건너게 된다. 돌다리를 건너는 일행들의 발걸음에는 정감이 듬뿍 서려있다.

대광천을 건너 너삼밭재로 오르는 산길로 접어든다. 너삼밭재는 이 근처에서 너삼이 많이 자생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지만 현재는 너삼을 찾아볼 수가 없다. 너삼밭재는 십이령 중 가장 고도가 낮은 고개이다.

저진터재를 넘었으니 소광리가 멀지 않았다. 소광2리에 도착하니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하늘만 빤히 보일 정도다. 옛 소광초등학교를 개조한 주차장과 금강송팬션, 십이령주막이 길손을 맞이한다.



여행쪽지

▶울진 금강소나무숲길은 5개 구간으로 계획되어 있다. 현재는 1, 2, 3구간만 개통이 되어 있고, 예약제로 운영된다. 금강소나무숲길 홈피에서 예약.
▶ 그 중 제1구간은 두천1리에서 소광2리까지 네 개의 고개를 넘는 13.5㎞에 이르는 걷기 좋은 길로 숲 해설사의 안내를 따라 쉬엄쉬엄 가는데 7시간이 소요된다.
▶ 금강소나무숲길 1구간을 걸으려면 관광버스를 이용한 단체산행이 아닌 한 두천1리에서 숙박을 하는 것이 편리하다. 두천1리에는 민박집(1일 1만원, 식비 1식 6,000원)이 있고, 금강소나무숲 홈피에서 예약이 가능하다.
▶ 도착지점인 소광2리에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운영하는 팬션과 주막이 있어 이용가능하다.

 

 

 곡선 그리는 녹차밭 아래로 화개천이 굽이치고 
 (광주매일 2013. 10.25. 00:00)

지리산 둘레길 ‘원부춘-가탄’

 

산비탈 결을 따라 굽이굽이 자리잡은 녹차밭. 천혜의 자연과 전통의 ‘덖음’ 기술이 조화를 이룬 화개녹차는 명품으로 이름이 높다.

 

남원 고리봉과 곡성 동악산 사이를 뚫고 곡성읍에 도착한 섬진강은 넓은 곡성들판을 적시고는 다시 산골짜기로 흘러든다. 산과 산을 가르며 굽이굽이 흘러가는 섬진강은 맑고 소박하다. 강은 부드러운 백사장 위로 흐르다가도 자갈이 있는 여울을 지나기도 한다. 강변에는 산에 기댄 마을이 가끔 나타나고, 자동차도로와 전라선 철로가 섬진강을 따라 나란히 달려간다. 광주에서 지리산 가는 길은 이렇게 섬진강의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며 갈 수 있어서 좋다.
이 연재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하동군 화개면소재지를 지나 섬진강변을 달리던 승용차가 골짜기를 따라 원부춘마을로 가파른 길을 올라간다. 섬진강변에서 거의 300m에 가까운 고도를 높여야하니 경사가 급할 수밖에 없다. 원부춘 마을회관 왼쪽 계곡 옆으로 난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는데 여전히 경사가 급하다. 신기천으로 불리는 계곡은 크고 깔끔한 바위와 맑은 물이 시원하게 흘러간다. 골짜기 주변에는 민가들이 띄엄띄엄 자리를 잡았다.

호젓한 산길은 ‘나’를 찾아 떠나는 수행의 길
원부춘마을과 신기천은 섬진강으로 치닫는 형제봉능선과 수박산능선 사이에 좁게 형성되어 있다. 섬진강 너머에서는 광양 백운산이 믿음직스럽게 서 있다. 길가에는 쑥부쟁이가 청초하게 꽃을 피워 가을정취를 물씬 풍긴다.

활공장으로 가는 길이 갈리고, 곧 이어 수박산능선을 만난다. 여기에는 지리산주능선이 장엄하게 펼쳐진다. 노고단에서 반야봉으로 토끼봉-명선봉-형제봉-덕평봉-영신봉으로 파도치듯 이어지는 주능선이며, 삼도봉에서 불무장등능선으로 토끼봉에서 범왕능선으로 뻗어나간 지능선이 산 공화국을 이루었다. 산 높으니 골 깊다더니 수많은 산봉우리와 능선은 깊고도 깊은 골짜기를 만들었다. 저 장엄하고 깊은 산을 바라보고 있으니 작은 것에 집착하며 살아왔던 내 자신이 초라해 보인다.

임도는 8부 능선을 따라 이어지고, 둘레길은 임도와 헤어져 완만한 산길로 내려선다. 호젓한 산길에는 참나무가 유난히 많다. 임도를 따라 걷다가 좁은 산길을 걸으니, 길은 좁을수록 좋다는 의미가 실감난다. 넓은 길일수록 나의 내면으로 가는 길은 멀어지고, 작고 소박한 길일수록 내 안으로 가는 길이 가까워진다.

수박산능선을 벗어나 중촌마을로 내려서는 길은 급경사의 연속이다. 숲속에서는 수많은 식물과 야생동물이 공생하며 생태공동체를 이룬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도 거대한 자연 속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은 채 자연이 만든 공동체를 끊임없이 깨뜨려왔다.


자연과 전통이 만들어낸 명품 화개녹차


계곡의 물소리가 들려오고 녹차밭이 등장한다. 그리고 하늘호수차밭이라 이름붙인 쉼터를 만난다. 이 쉼터는 찻집 주인이 자연을 크게 거슬리지 않고 손수 소박하게 지은 집으로 오히려 정감이 넘친다. 이곳 쉼터 의자에 앉으니 정면으로 황장산과 촛대봉이 우뚝 서 있다.

하늘호수쉼터의 조망이나 소박한 분위기도 좋지만 이곳을 지키는 배윤선(58), 양진욱(57) 부부의 후덕한 인심이 들리는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그것은 얄팍한 상술차원의 친절함이 아니라 오랫동안 자연과 함께 살아오면서 몸에 배인 순수함과 사람에 대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기에 받아들이는 사람도 편하고 부담이 없다.

중촌마을에서 내려오는 길은 정면으로 황장산을 바라보며 걷게 된다. 가을이지만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제법 경쾌하다. 정금마을 쪽으로 산비탈 언덕에 오르니 운치 있는 녹차밭이 있고, 그 아래로 화개천이 굽이친다. 녹차밭 위로 올라가니 산비탈 결을 따라 곡선을 그리는 녹차이랑들이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온다. 녹차밭 아래에 서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는 이런 녹차밭의 풍경을 더욱 아름답게 한다. 녹차밭 아래로 화개천이 굽이굽이 흘러가고, 화개천 옆으로 농경지와 마을이 둥지를 틀었다. 멀리 섬진강 너머의 광양 백운산이 울타리가 되어주고, 황장산능선과 수박산능선이 골짜기를 감싸주어 화개천 주변은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다. 섬진강에 놓인 남도대교의 모습도 다가온다.

지리산 자락인 하동군 화개면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녹차를 재배한 시배지로 알려져 있다. 화개는 섬진강과 화개천을 끼고 있어서 안개 많고 습도가 높으며 차 생산 시기에는 밤낮의 기온차가 커 차나무재배에 적합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 토양은 수분이 충분하며 자갈이 많아 차나무를 재배하는데 적합하다. 화개에서는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덖음’ 기술을 활용하여 고급녹차를 생산해 오고 있다. 이런 지리적, 토양적 조건과 덖음 기술로 인해 화개녹차는 최고의 품질로 인정받는다.

산도 삶도 넉넉한 가을풍경에 잠시 멈추고


정금마을 뒤에서 둘레길은 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다시 대비마을로 올라간다. 이곳에도 곳곳에 녹차밭과 녹차를 만드는 다원이 많다. 대비마을을 지나는데 붉게 익어가는 대봉감이 풍성한 기운을 전해준다. 마당에 널어진 밤도 가을의 넉넉함을 느끼게 해준다.

둘레길은 대비암까지 가파르게 오르고 나서야 다시 산허리를 돌아가는 임도로 이어진다. 화개천이 내려다보이고, 화개천 너머로 황장산과 촛대봉이 섬진강 쪽으로 능선을 뻗어간다. 촛대봉 자락에 자리 잡고 화개천이 휘감아 도는 곳에 둥지를 튼 삼신마을이 포근하다. 다랑이논의 황금빛 벼 뒤로 보이는 지리산 주능선이 장엄하다. 촛대봉 능선 너머로는 왕시리봉이 살며시 고개를 내민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걸으라고 가파른 길을 다시 오르게 한 모양이다.

꿈처럼 짧은 인생…잠시 동안의 휴식
가탄마을로 내려서자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담은 만수정(萬壽亭)이라 쓰인 정자가 있고, 정자 옆에는 아름드리 서어나무 세 그루가 당산나무 역할을 하고 있다. 서어나무 아래에 만들어놓은 데크 위에 서니 황금빛 논과 화개천이 내려다보이고, 그 아래로 화개면 소재지도 바라보인다. 벚꽃이 피는 봄날에 이곳에 앉아 있으면 화개에서 쌍계사로 이어지는 화사한 벚꽃 띠를 아름답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가탄마을의 원래 이름은 아름다운 여울이라는 뜻의 가여울(佳灘)이었다. 마을 입구에는 ‘녹차의 고장’ ‘가탄마을’이라고 한글로 쓴 장승이 세워져 있고, 그 앞으로 화개천이 여울을 이루며 흘러간다. 가탄마을 앞으로 흘러가는 화개천의 물줄기는 맑고 청아하다.

여행쪽지


▲ 지리산둘레길 원부춘-가탄 구간은 12.6㎞로 5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 원부춘 가는 버스는 하동읍에서 06:30, 화계에서 15:05에 있다.
▲ 쌍계사에서 출발하여 가탄마을을 거쳐 화개-하동으로 가는 버스가 7:10, 8:20, 09:10, 09:55, 11:45, 12:25, 14:20, 15:00, 17:15, 18:45에 있다.
▲ 화개에는 쌍계사 입구와 화개장터에 맛집이 즐비하다. 그중에서도 쌍계사 입구에 있는 단야식당(055-883-1667)의 사찰국수(7,000원)와 산채정식(15,000원)은 전혀 조미료를 쓰지 않고 지리산에서 나오는 재료만을 사용하여 만들기 때문에 담백한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산채비빔밥(7,000원)도 먹을 만하다.

 

 

 화가가 된 가을산, 부처가 된 오색단풍

 (광주매일 2013. 11.15. 00:00)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 내장산 단풍길 ‘장성새재길’

 

낙엽을 밟으며 걷는 길은 낙엽처럼 가볍다. 그 길위에서 마음의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면 숨어 있는 오묘한 자연의 순리가 인생과 오버랩된다.

 

장성새재로 가기 위하여 남창계곡으로 접어든다. 남창계곡을 따라 들어가는데 산골풍경이 소박하다. 감나무에 걸린 빨간 감이며, 곶감을 깎아 걸어놓은 모습들은 늦가을의 정겨운 풍경이다. 산행은 전남대학교 수련원 앞에서 시작된다. 계곡가로 이어진 길은 울창한 숲으로 뒤덮여 속세와 결별을 한다. 여름 내내 진한 녹색으로 활력 넘치던 활엽수들이 붉고 노란 색깔로 변하면서 산은 우아해졌다. 입암산성을 거쳐 갓바위로 오르는 길과 장성새재 옛길이 갈린다. 장성새재로 통하는 옛길은 새재골이라 불리는 골짜기를 따라 이어진다. 길은 널찍하지만 찾는 사람이 적어 호젓하다. 계곡 주변에는 어김없이 단풍이 물들어 무뚝뚝한 나무들에 화려한 옷을 입혀놓았다. 화려한 옷을 입은 단풍들이 그 속에 깃든 사람들의 마음까지 화사하게 해준다.



장성새재 옛길은 옛 선조들이 장을 보러 가거나, 한양에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정읍으로 넘어갈 때 지름길로 이용한 고개다.

장성에서 정읍으로 가는 고개는 갈재와 새재가 있었는데, 장성지역 사람들은 삼남대로인 갈재(노령)보다도 샛길인 장성새재를 더 친근하게 이용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이 길로 통행하는 사람들이 많아 주막이 있을 정도였다.

옛길을 걷는데 계곡의 물소리 정답게 들려오고 새들의 노랫소리 감미롭다. 길은 완만하여 걷기에 더없이 편하다. 길 위에 수북하게 싸인 낙엽을 밟으며 걷는 발걸음도 낙엽처럼 가볍다. 약속이나 한 듯이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도란도란 속삭이며 걷는 모습들이 훈훈하다.

고갯마루에 가까워지면서 작은 분지가 나타나고 사람이 살았던 흔적들이 보인다.

이곳에는 1960년 말까지 열댓 가구가 살았으나 1970년대부터 주민들이 떠나 지금은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여느 고개처럼 막바지에 가파른 오르막도 없는 완만한 길을 걷다보니 장성새재에 도착한다. 먼 옛날에는 달도 숨어 안 보일 만큼 깊은 고개여서 월은치(月隱峙)라 불렀던 고개다.

내장산 일주문을 지나 다다른 우화정. 주변 단풍과 어울려 한폭의 아름다운 수채화가 된다.


만산홍엽’ 사색의 길을 따라

순창새재로 가는 길은 조용히 사색하며 걷기 좋은 길이다. 걷다보면 숲속에서 다가온 바람이 슬며시 말을 걸어오고, 평생 한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나무들은 잔잔하게 미소를 보내준다. 어느덧 마음은 고향집에 온 것처럼 포근해진다.

산비탈에는 형형색색으로 물든 단풍이 수채화를 그려놓았다. 가을이 만든 수채화는 사람들을 화가로 만들기도 하고, 시인이 되게 하기도 한다. 걷다보니 하늘이 터지면서 또 다시 작은 분지가 나타난다. 불바래기라 불리는 마을터다.

조선조 말기에는 천주교 박해를 피해 들어온 천주교 신자들이 예배를 보는 공소도 있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찻길까지 나가려면 1시간 이상은 걸어야 하는 오지중의 오지 불바래기에는 현재 노인 부부가 밭농사와 버섯 등을 재배하며 살고 있다.

불바래기에서 순창새재로 가는 길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오르막길이다. 쭉쭉 뻗은 적송 숲이 청신하게 이어지다가 참나무를 비롯한 활엽수로 바뀐다.


자연에서 배우는 삶의 진리

순창새재는 내장산에서 백암산을 이어주는 고개로 두 산을 종주할 때 쉼터 역할을 한다. 순창새재를 넘어 골짜기를 따라 내려가면 순창군 복흥면 대기마을이 나온다. 이처럼 순창새재는 장성과 순창을 이어주는 고개다.

내장산으로 가는 길은 능선을 따르지 않고 잠시 골짜기로 내려선다. 주변은 단풍천지로 바뀐다. 숲속에서 요란하지 않게 물든 울긋불긋한 단풍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여기저기에서 “예쁘다”는 탄성이 끊이질 않는다.

나는 단풍의 우아한 모습을 볼 때마다 아름답게 늙어 가는 인생 후반을 생각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낙엽으로 떨어질 줄 알면서도 자신이 지닌 최고의 멋을 보여주는 단풍이야말로 우리가 배워야할 인간상이 아닐까?

내장산에 가까워지면서 산은 온통 가스로 뒤덮여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내장산 주능선에 도착하여 까치봉으로 향하는데, 암릉이 칼날 같다. 까치봉에 올랐지만 몇 미터 앞을 가늠하기 힘들다. 내장산은 장군봉·연자봉·신선봉·까치봉·연지봉·망해봉·불출봉·서래봉·월영봉 등 아홉 개 봉우리가 말발굽 모양의 산세를 이루고 있고, 그 가운데에 내장사가 있다. 내장산은 대체로 9부 능선 이상은 기묘한 바위가 장식하고, 그 아래로는 울창한 숲을 이루어 가을이면 아름다운 수채화가 된다.


가을이 그려낸 한폭의 수채화


내장산은 예로부터 대한 8경의 하나로 꼽혔으며, 지리산·월출산·천관산·변산과 함께 호남의 5대 명산으로 손꼽히던 곳이다.

까치봉에서 내려가는 길 역시 급경사지만 우리를 맞아주는 아름다운 단풍이 있어 힘든 줄 모른다. 간간히 병풍처럼 펼쳐지는 불출봉과 서래봉 암릉은 겨우 윤곽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우아하게 물든 단풍은 단풍에 취한 사람들의 표정까지도 우아하게 만든다. 가을 산에는 세상풍파 다 겪으며 아름답게 곰삭혀낸 원숙미가 있다. 금선계곡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계곡가에 앉아 휴식을 취한다. 계곡의 수량은 적지만 완만한 오솔길이라 고즈넉하게 걷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여기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용굴이 있는데, 용굴은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안전하게 옮겨놓았던 곳이다. 이 때 조선 태조의 영정도 함께 봉안했다.

내장사도 붉은 단풍으로 훨훨 불타고 있다.

내장사는 아홉 개의 봉우리가 마치 연꽃잎처럼 감싸고 있는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절을 감싸고 있는 오색단풍은 수많은 인파들을 자연의 세계로 인도한다. 자연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움이 세속의 묵은 떼를 벗겨주니 오색단풍은 이미 부처님이나 다름없다. 단풍은 내장사 경내로 들어서는 2층 누각도, 천왕문 안에 서 있는 사천왕상도, 천왕문 밖의 부도밭도 모두 붉게 채색을 하였다.


무한한 여운…그 풍성한 빈터

단풍나무만이 아니라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를 비롯한 여러 활엽수도 예쁘게 물이 들었다. 일주문으로 가는 길은 애기단풍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일주문을 벗어나 우화정에서 걸음을 멈춘다. 우화정은 주변을 감싸고 있는 단풍과 함께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 정자에 날개가 돋쳐 승천하였다고 하여 우화정(羽化亭)이라고 불렀다.

단풍터널은 일주문을 벗어나서도 무려 3㎞ 가까이 계속된다. 가히 최고의 단풍명소라 할만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단풍 길을 걸으며 마냥 행복해 한다. 송이바위가 배웅을 한다.



여행쪽지

-남창골 전남대학교수련원에서 장성새재-순창새재-까치봉-내장사-주차장까지 13.6㎞로 6시간 정도 걸린다.
-장성터미널에서 남창계곡 가는 버스가 08:20, 10:00, 13:50, 16:50에 있다.
-내장산 주차장에서 정읍으로 나가는 버스는 수시로 있다.

 

 

 지리산 등지고 섬진강 바라보는 명당에 서다

 (광주매일 2013. 11.29. 00:00)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 지리산 둘레길 ‘송정-오미’

 

초가지붕 삿갓형 쉼터에서 바라본 조망. 섬진강 너머 운무에 쌓인 계족산이 솟아있다. 옅은 운무로 덮인 구례땅을 내려다보며 걷는 길은 또 하나의 잊지못할 감흥을 선사한다.

 

안개 자욱한 늦가을 섬진강이 환상의 세계를 연출한다. 부드러운 면사포를 덮어놓은 것 같은 안개는 굽이굽이 흘러가는 강줄기를 따라 운해를 이루어 산봉우리들을 섬으로 만들었다. 가끔 안개가 걷힐 때면 강줄기와 강가 마을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기지개를 편다.
구례군 토지면소재지를 지나 송정마을 입구에서 섬진강을 등지고 한수내(천)를 따라 들어간다. 안한수내로 올라가는 도로에서 곧바로 산길로 접어든다. 섬진강 쪽에서는 여전히 운해가 장관을 이룬다. 부드럽고 포근한 운해와 그 위에 섬처럼 솟은 산줄기의 모습을 보며 넋을 잃는다. 경직된 마음이 어느새 유연해진다.



버려야 비로소 채워지는 것들

길 위에는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낙엽을 밟을 때마다 싸르락 싸르락 소리가 율동적으로 들려온다. 나뭇잎은 겨울이 오기 전에 미련없이 자신을 버린다. 땅에 떨어진 나뭇잎은 생명을 다하고 나서도 자신을 키워준 나무의 거름이 된다. 우리가 낙엽을 밟으며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도 이러한 낙엽의 헌신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의승재에 올라서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숲속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와 새소리가 청량하다. 의승재를 넘어서니 편백나무 숲이 그윽한 향기를 내뿜는다. 편백 숲을 지나자 활엽수림이 나오고, 아직까지 남아있는 단풍이 햇빛에 은은하게 비친다. 계곡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는 송정천을 건넌다. 이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국도변에 석주관이 있다.

석주관은 조선 선조 31년(1598) 정유재란과 병자호란 때 구례지방의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켜 이곳을 사수하다 전사한 의사(義士) 7인과 현감 이원춘을 모신 사당이다. 일곱 의사와 현감 이원춘을 모신 무덤(사적 제106호)도 석주관 건너편에 있다.


구름위를 걷는 경이로운 감동

가끔 오르막도 있지만 주로 산허리를 돌아가는 완만한 길이라 걷기에 편안하다. 산 아래로 안개가 걷혀 섬진강의 맑은 물이 햇볕에 반짝인다. 섬진강 건너로는 구례군 간전면의 하천산이 서 있다.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초가지붕의 삿갓형 그늘막 쉼터가 있다. 쉼터에서 바라보니 섬진강 너머로 운무에 감싸인 계족산이 솟아있다. 구례에서 잠시 들판을 적신 섬진강이 간전교를 지나면서 골짜기로 접어든다. 하동 방향으로 굽이굽이 흘러가는 섬진강의 물줄기가 실타래를 풀어놓은 듯 유연하다. 아내와 함께 쉼터에 앉아서 아름다운 주변 풍경을 바라보며 행복해한다. 이렇게 길을 걸으면서 우리의 부부사랑도 깊어간다.

아내와 오순도순 얘기를 하면서 걷다보니 남쪽으로 구례군 간전면의 산과 들판이 옅은 운무로 덮여 신비감을 자아낸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를 이룬 구례 땅을 내려다보며 걷는 기분이 상쾌하다. 사성암을 품고 있는 오산이 구례읍을 내려다보고 있고, 오산을 굽이돌아 섬진강이 흐른다. 구례읍 뒤로는 견두산-천마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완만하게 이어진다.

둘레길은 마을 뒤 산비탈에 형성된 논과 밭을 다니며 이용하는 농로를 따라 이어진다. 산비탈 조용한 곳에는 구례군 노인전문요양원이 있다. 구례군에서 운영하는 이 요양원은 치매와 같은 중증 노인성 질환으로 고통 받는 노인들에게 다양한 복지혜택을 주고 있다.

노고단에서 남쪽으로 뻗어 형제봉과 월령봉을 솟구치고 나서 오미리로 내려오는 능선을 바라본다. 노고단은 형제봉능선과 왕시리봉능선을 만들고, 두 능선 사이에 문수골(덕은내)을 형성하였다. 문수골 하류에 댐을 막아 커다란 저수지가 되었다.

오미리 하죽마을과 오미마을은 금환락지(金環落地)의 명당이라고 하는데, 하늘에 사는 선녀가 경치 좋은 이곳에 하강 하다가 손가락에 낀 반지를 구름 위에서 잃어버렸다고 전하며, 이 반지가 묻힌 곳에 터를 잡으면 부귀영화가 뒤따른다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집터를 잡았다고 한다. 오미리에는 기품 있는 한옥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운조루는 오미리 명당에 자리잡은 대표적인 가옥으로, 1776년 무관 유이주가 지은 가옥의 사랑채 이름인데 지금은 가옥 전체를 운조루라 부르고 있다.


명당 바라보니 마음만은 부자

운조루는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와 함께 내수구(앞 도랑)와 외수구(섬진강)가 제대로 되어 있는 명당 터에 자리 잡고 있다. 집 앞의 오봉산은 신하들이 엎드려 절하는 형국이다. 운조루 앞에는 직사각형 모양의 길쭉한 연못이 있는데, 이 연못은 남쪽 오산의 산세가 불(火)의 형세를 하고 있어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운조루 터에서 거북이의 형상을 한 돌이 출토되었다 하여 금귀몰니의 명당으로 남한의 3대 길지(吉地)라고 한다. 710평의 대지에 99칸으로 지은 운조루는 현재 73칸이 남아 있다. 연못 뒤로 -자형 행랑채가 길쭉하게 자리 잡고, 행랑채 가운데에 출입문인 솟을대문이 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막돌을 균형있게 쌓은 기단 위에 ㄱ자형의 사랑채가 경쾌하게 앉아 있다. 정면이 큰 사랑채, 앞으로 튀어나온 측면이 작은 사랑채다. 큰 사랑채 왼쪽에 3면이 트인 누각이 붙어있는데, 이를 운조루라 한다. 운조루를 나와 오미리를 바라보니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줄기가 의젓하고, 앞으로는 넓은 들판과 섬진강 너머의 산들이 듬직하다. 이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부자가 된 듯하다.



■ 운조루(雲鳥樓)는…

가난한 이웃에 베푸는 삶 노블레스 오블리주 귀감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에서 머리글자만 하나씩 따온 것으로 추정되는 운조루(雲鳥樓)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안채는 사랑채 사이의 중문을 통해 들어간다. 부엌과 곡간, 대청들이 ㅁ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의 대청 위에 운조루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이 집의 주인은 뒤주의 마개에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귀를 새겨놓아 가난한 이웃 사람이 쌀을 꺼내 끼니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은덕을 베풀었다. 유이주는 한 달에 한 번씩 뒤주가 비워지면 쌀을 다시 채우라 했고, 그의 농지에서 수확되는 이백여 석의 소출 중 매년 삼십여 가마가 끼닛거리가 없는 사람들을 위한 식량으로 나갔다고 한다. 요즘 표현을 빌리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셈이다.



여행 쪽지

▶지리산둘레길 송정-오미 구간은 9.2㎞로 4시간 정도 걸린다.
▶구례에서 송정리까지 가는 버스는 매시 40분에 구례터미널에서 출발하는 피아골·연곡사행 군내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송정마을에서 내려서 한수내를 따라 15분 정도 걸어야 16구간 출발지점에 도착할 수 있다.
▶오미리에서는 국도변으로 나오면 구례터미널로 가는 군내버스가 30분 간격으로 있다.
▶오미리 근처 토지면 소재지에 있는 섬진강식당(061-781-9393)에서는 다슬기 요리가 맛깔스럽다. 다슬기수제비, 다슬기탕, 다슬기전, 다슬기무침 등이 있다.

 

 

 살기 좋은 터에서 올곧게 살았던 영혼을 만나다 
 (광주매일 2013. 12.13. 00:00)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 지리산 둘레길 ‘오미-방광’

 

하사마을 앞 느티나무. 계절의 이치에 따라 모든 잎을 떨구고 자연에 순응하는 고고한 나목의 풍모가 느껴진다.

 

구례에서 하동으로 가는 19번 국도변의 ‘행복마을 오미마을’이라는 예쁜 표지판을 지나 오미마을로 향한다. 넓은 들판 너머로 마을이 자리를 잡고, 노고단에서 형제봉과 월령봉을 거쳐 남쪽으로 뻗어 내린 월령봉능선이 마을을 부드럽게 품고 있는 모습이 한없이 정겹다.
오늘 구간은 오미마을 운조루 앞에서부터 시작된다. 오미리는 본래 오동리라 불리다가 조선 중기 운조루를 지은 유이주가 오미리로 개칭해 지금에 이른다. 오미(五美)는 다섯 가지 아름다움을 말하는데, 오미리 뒷산인 월령산,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인 방장산, 정면으로 보이는 계족산과 오봉산, 그리고 섬진강을 일컫는다.
운조루 옆 오미마을 서쪽의 은하수마을에는 최근에 조성된 한옥펜션단지가 기존 고택들과 아름답게 어울려 있다. 오미리 한옥이 그렇듯이 한옥은 우리나라의 산세와 가장 잘 어울린다. 하사마을 방향으로 산자락을 돌아가니 월령봉 서쪽 자락에 마을이 평화롭게 자리를 잡고 있다. 하사마을 앞에서 바라보는 하사저수지와 넓은 구례들판의 풍경이 정겹고 시원하다. 저수지와 들판 뒤로는 오산이 우뚝 서 있어 마을 사람들을 든든하게 해준다.

하사마을은 신라 흥덕왕 때부터 형성된 오래되고 큰 마을이다. 이곳 하사마을과 상사마을을 합하여 사도리라 한다. 홍살문 안쪽 골목으로 들어가니 효헌사라고 하는 사당이 있다. 호헌사에는 조선 2대 정종임금의 12번째 왕자인, 효성이 지극했던 도평군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마을변두리에는 ‘효자 이규익의 려(閭)’도 있다. 상사마을 앞에도 ‘효자 려’가 있는데, 기품 있는 마을은 지리적 환경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람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거친 풍상을 이겨내며 굽은 듯 곧게 서있는 소나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네들의 삶을 보는 듯하다.

하사마을 앞에 서 있는 두 채의 정자와 네 그루 느티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니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하다. 텅 빈 들판을 내려다보고 있는 느티나무는 모든 잎을 떨구고 묵언정진 중이다. 마을을 지키고 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여름철의 무성한 녹음도 좋지만 겨울의 나목(裸木)에서 섬세하면서도 고고한 풍모를 느낄 수 있어서 좋다.

둘레길은 상사마을을 통과하지 않지만 나는 상사마을로 향한다. 상사마을은 전국 최고의 장수마을이다. 상사마을이 장수촌이 되기까지는 마을에 있는 당몰샘이라는 지하수 때문이라고 한다. 당몰샘 위에 세워진 보호각에는 지존지미(至尊至味)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샘으로 달려가니 샘물이 맑고 깨끗하여 금방 마시고 싶어진다. 물맛은 신선하고 감미롭다.

당물샘 뒤편에는 쌍산재(雙山齋)라는 해주 오(吳)씨의 삼백 년 된 고택이 있다. 쌍산재는 이 집의 서당채 이름인데, 외부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가장 안쪽에 배치하고, 그것도 주변에 나무를 심어 외부를 가렸다.

돌다리를 통하여 화엄사계곡을 건너니 황전마을이다. 계곡가의 샘골쉼터에는 아름드리 참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샘골쉼터에서 도로 쪽으로 올라서면 화엄사집단시설지구다. 시설지구에서 울창한 숲으로 덮힌 화엄사계곡을 따라 20분 정도 올라가면 천년고찰 화엄사를 만날 수 있다. 화엄사 일주문을 들어서서 금강문, 천왕문을 통과하고 보제루를 돌아서면 큰 마당을 가운데에 두고 정면에 대웅전(보물 제299호), 왼쪽에 각황전(국보 제67호)이 높은 석축 위에 장대하게 버티고 있다. 석축 아래 마당에는 동오층석탑(보물 제132호)과 서오층석탑(보물 제133호)이 마주보고 서 있고, 각황전 앞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석등(국보 제12호)이 위풍당당하다.

상사마을 당몰샘. 보호각위로 ‘至尊至味’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각황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불전으로 외부는 2층이지만 내부는 통층이다.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안정된 비례와 엄격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각황전은 건물 뒤의 작은 봉우리와 어울려 한결 산뜻하고 안정감이 넘친다. 각황전 앞 석등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섬세하면서도 위엄을 느끼게 한다.

나는 화엄사에 갈 때마다 각황전 왼쪽 돌계단을 따라 효대로 올라가기를 즐긴다. 아름드리 숲속의 운치 있는 계단을 올라가면 효대가 나오고, 효대에는 아름다운 반송에 둘러싸인 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이 서 있다. 이 석탑은 다른 탑과 같이 이중기단이지만 상층기단에 네 마리의 사자를 각 귀퉁이에 앉히고, 가운데에 합장하는 스님상을 세웠다. 효대에서 특이하고 아름다운 사사자삼층석탑과 함께 화엄사를 감싸고 있는 부드러운 산줄기를 바라보면 그 느낌이 청아하면서도 포근하다.

화엄사시설지구를 지나 월등파크호텔 뒤에서 다시 산길로 접어든다. 소나무 일색의 숲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가 맑고 곱다. 굽은 듯 곧은 소나무들은 수없이 좌절하고 아파하면서도 좌절을 극복하고 아픔을 기쁨으로 승화시키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과 너무나도 닮았다.

잠시 푸른 대밭을 지나자 수한마을이다. 물이 차다하여 물한리로 불리다가 행정구역 개편을 하면서 수한마을이 되었다. 골목의 돌담이 정겹고, 돌담과 어울린 오솔길도 소박하다. 높이 15m의 520년 된 당산나무에는 잎이 일시에 피게 되면 풍년이 들고, 2-3회 나누어 피면 흉년이 든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당산에서는 매년 당산제를 지낸다.

수한마을에서 방광마을로 가는 길은 넓은 들판 가운데로 난 도로를 따른다. 추수가 끝난 들판은 텅 빈 채로 휴식을 취하고 있다. 텅 빈 들판에서는 휴식이 가져다주는 충만감이 느껴진다. 비움을 통하여 농경지는 내년 봄 새로운 농작물이 튼실하게 자랄 기운을 충당한다.

방광마을 표지석이 있는 삼거리에 도착하자 하얗게 눈이 쌓인 종석대가 바라보인다. 방광마을로 들어가는 길가에서 느티나무 한 그루가 길안내를 한다. 방광마을에 가까워지자 종석대뿐만 아니라 차일봉까지 가세하여 장중한 산 그림이 된다. 이곳 사람들은 저 장중한 산을 바라보며 군자다운 기개를 키웠을 것이다.

천년고찰 화엄사 대웅전.


방광마을에 들어서니 정미소가 있고, 돌담길도 예스럽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돌담길을 걷다보니 골목을 누비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 같다. 어느덧 방광마을회관에 도착해 있다. 골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쌀쌀하다.



여행쪽지

-지리산둘레길 오미-방광 구간은 12.2㎞로 4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화엄사는 둘레길에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들렀다가 가려면 최소한 1시간은 더 잡아야 한다.
-구례버스터미널에서 오미마을 가는 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있다. 간전, 피아골, 쌍계사 가는 버스를 타고 오미마을 입구에서 내리면 된다. 10분 소요.
-방광마을에서 구례로 나가는 버스는 30~40분 간격으로 다닌다. 20분 소요.

 

 

 포근한 산자락에서 예술가들의 예술혼이 불타고

 (광주매일 2013. 12.27. 00:00)

장갑수와 함께 걷는 길 / 지리산 둘레길 ‘방광-산동’

 

구리재에서 바라본 풍경. 너른 들판, 오산과 섬진강, 그리고 천마산 능선을 바라보고 서 있다.

 

구례읍내 곳곳에서 손님을 태운 버스는 지리산을 바라보며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간다. 창문 너머로 지리산의 모습이 장중하게 다가온다. 지리산의 높은 산줄기는 깊은 골을 만들어내고, 지리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풍족한 물은 구례의 넓은 들판을 적시며 기름진 농토를 이룬다.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는 천년고찰 천은사 아래에 자리 잡은 사하촌이다.

천은사는 828년 인도 승려인 덕운선사가 경내에 이슬처럼 맑고 차가운 샘물이 있어 감로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물이 좋아 많은 스님들이 몰려들어 한때는 천명이 넘는 스님이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중건할 때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기에 잡아 죽였더니 샘이 솟아나지 않았다고 한다. 샘이 숨었다 하여 천은사(泉隱寺)라 이름을 바꿨는데, 이름을 바꾼 뒤부터 원인 모를 화재가 잦고, 재화가 끊이지 않았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선 4대 명필의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가 ‘지리산 천은사(智異山 泉隱寺)’라는 일주문 현판을 물이 흐르는 듯한 글씨체로 써서 걸었더니 이후로는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천년 풍상 이겨낸 비로자나불의 미소

넓은 감나무밭을 지나 미륵골이라 불리는 골짜기를 건넌다. 미륵골 나무다리를 건너고 나니 밭가에 대전리석불입상이 서 있다. 1.9m 높이의 비로자나불상은 눈·코·입 등이 훼손돼 얼굴의 형태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볼은 풍만하고 소박한 풍모를 띠고 있다.

대전리석불입상. 비로자나불의 여여함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염화시중의 미소를 보내고 있다.

불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이곳에 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어디에도 절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대전리석불입상 아래로는 드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수많은 세월 동안 모진 비바람을 견디며 사람 사는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비로자나불은 오늘도 향기로운 세상을 염원하고 있다.

논길과 밭길을 지나고 마을길을 걷다보니 고향 길을 걷는 것처럼 정겹고, 초등학교 시절의 순수한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다. 생존경쟁에 시달리고, 온갖 탐욕에 찌들어 사는 도시인들에게 소박한 산길과 들길은 어머니의 품처럼 따스하고 포근하다.

자연에 동화된 예술인들의 고향

당동마을 뒤편 산자락에는 예술인마을이 아담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2012년에 문을 연 예술인마을에는 서양화, 한국화, 조소, 도자기, 천연염색 등을 전공하는 예술인 31가구가 입주하거나 입주할 예정이다. 처음에는 화가마을로 부르다가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를 모시기 위해 마을이름도 예술인마을로 바꿨다.

현대적 조형미가 물씬 풍기는 집들은 예술인들의 작업실, 전시실, 살림집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방학 중에는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예술학교를 열기도 한다. 예술인마을은 간미봉을 등지고, 앞으로는 널따란 들판과 천마산에서 깃대봉, 갈미봉으로 이어지는 견두지맥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마을 바로 아래에는 조그마한 저수지가 있어 운치를 더한다.

당동마을 소나무숲. 마을 사람들의 친근한 벗이자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 역할을 한다.

당동마을 앞길을 따라 오르다가 아름다운 소나무 숲을 만난다. 10그루에 달하는 소나무 숲은 수령이 400년에 이르고, 16m 높이에 2.6m의 둘레를 자랑한다. 당동마을과 주변의 들판을 바라보며 서 있는 이곳 소나무들은 수백 년 동안 모진 풍파를 견뎌내며 아름다운 마을 숲이 됐다. 당동마을 소나무 숲은 마을사람들이 믿고 의지하는 수호신이자 언제 찾아와도 반갑게 맞아주는 친근한 벗이다.

길은 차차 임도로 바뀌고 울창한 적송이 운치를 더한다. 종종 조망이 트일 때면 넓은 들판과 천마산 쪽 산줄기가 가슴에 안겨온다. 임도를 따라 올라가다보니 민둥산을 한 지초봉이 슬며시 고개를 내민다. 이곳은 지난 2000년 산불이 나 흉하게 변했던 곳으로 구례군에서 철쭉단지로 조성하고 있다.

산동면 탑동마을까지 이어지는 임도는 산비탈을 지그재그로 올라간다. 임도는 간미봉에서 지초봉으로 내려뻗은 산줄기 중간에 있는 구리재로 올라선다. 구리재에는 2층의 팔각 전망대가 구례읍내와 구례들판, 오산과 섬진강, 그리고 천마산 능선을 바라보며 서 있다. 구리재를 경계로 구례군 광의면과 산동면이 갈린다. 구리재를 넘으니 만복대에서 뻗어 나와 영제봉과 밤재를 넘어 견두산으로 이어지는 견두지맥이 물결친다. 산동면의 여러 마을들도 정답게 다가온다.



빨간 산수유 열매 길손을 반기고

산동면이라 밭에는 산수유나무가 많다. 빨간 산수유 열매가 무채색의 초겨울 풍경에 화려한 색상을 입힌다. 마을 가운데에 작은 동산과 느티나무 고목이 서 있는 탑동마을로 내려왔다. 마을 안에 심하게 훼손된 삼층석탑 한 기가 서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 있어 탑동마을이란 이름을 얻었고, 행정구역도 탑정리가 됐다.

지리산온천 쪽에서 내려오는 계곡 뒤로 만복대와 고리봉이 우뚝 서 있다. 효동마을 앞에서는 지초봉과 오늘 넘었던 구리재가 건너 보인다. 계곡가에도, 밭에도, 집가에도 산수유나무는 지천으로 널려있다. 산동면 소재지인 원촌마을의 골목을 굽이굽이 돌아가니 오늘 구간의 종점인 산동면사무소다. 산수유 고장답게 면사무소 앞 정원에서도 빨간 산수유 열매가 길손을 맞이한다.

여핼쪽지

-지리산둘레길 방광-산동구간은 13.1㎞로 5시간 정도 걸린다.
-구례터미널에서 방광리 가는 군내버스가 30~40분 간격으로 다닌다. 20분 소요.
-산동에서 구례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오후에는 13:00, 14:10, 15:40, 16:20, 17:20, 19:00, 19:20, 20:00에 있다.
-탑동마을에 있는 은행나무집(061-781-6006)에서는 흑염소 수육과 전골, 탕을 맛볼 수 있다. 흑염소 외에 촌닭으로 만든 닭도리탕과 백숙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