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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치

[민심은 왜 야당을 버렸나]눈앞의 이해만 좇아 이합집산… 계파 싸움 ‘고질병’으로 (경향신문 2014-08-01 23:27:28)

[민심은 왜 야당을 버렸나]눈앞의 이해만 좇아 이합집산… 계파 싸움 ‘고질병’으로

 

(2) 계파 갈등·노선 충돌

18대 대선에서 패한 민주통합당은 4개월여 뒤인 2013년 4월 대선평가위원회를 통해 <18대 대선 평가보고서>를 내놨다. 당시 평가위는 대선 패배 원인 중 하나로 “당 분열이 계속되고 계파 갈등이 심화되면서 국민 신뢰가 현저히 하락했다”고 진단했다. 설문·면담조사에 응한 당 안팎 인사들은 ‘계파 갈등’을 대선 패인의 첫 번째로 지목했다.

1년여 뒤 7·30 재·보궐선거에서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든 새정치민주연합의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대선 패배 후 계파주의 청산 얘기가 ‘반짝’ 나왔을 뿐 ‘계파 갈등’ 고질병은 치유하지 못했다. 오히려 지난 3월 안철수 전 공동대표 측 인사들과 통합 이후 갈등은 더 심해졌다.



▲ 야 위기마다 수혈·합당 세 불려 노선 혼선… 대안·정책정당 막아
선거 패배 후 ‘환골탈태’ 외치며 계파 간 당권 교체뿐 변화 없어
재·보선 패인 ‘공천 파동’ 이면엔‘내 계파 챙기기’… 개혁공천 실종

 

현재 새정치연합 내에는 6~7개 계파가 존재한다. 친노무현계, 정세균계, 김한길계, 구민주계, 민평련계, 486계, 손학규계 등이다. 하지만 친노계만 해도 문재인계와 정세균계, 범친노계 등으로 세분화되는 등 특정 입장과 이해 관계에 따른 이합집산이 이뤄진다.

이번 재·보선 참패 원인으로 지목되는 ‘공천 파동’ 이면에도 계파 갈등이 숨어있었다는 분석이 많다. ‘내 계파 챙기기’라는 명제 앞에선 ‘개혁 공천’ 같은 명분과 과제는 끼어들 틈이 없었다. 당 지도부의 ‘사천 논란’에 비해 비당권파들 행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486 의원들은 안철수 전 대표 측근인 금태섭 전 의원의 서울 동작을 공천을 견제하기 위해 허동준 전 지역위원장 공천을 주장하다 기동민 전 후보가 전략 공천되자 입장이 갈렸다. 당 지도부는 내려꽂기 공천이 논란을 빚자 이를 486 의원 등 비당권파들의 흔들기 탓으로만 돌렸다.

계파주의 문제는 ‘대안 없이 투쟁만 하는 정당’ 논란 등 노선 갈등으로도 번졌다. 당이 정책정당, 대안정당으로 거듭나려고 해도 계파주의 논리에 막혀 길을 헤맨다는 것이다. 일단 ‘계파’라는 색안경으로 논쟁을 벌이기 시작하면 어떤 사안이든 토론은 불가능했다.

이 같은 계파 갈등 문제는 그간 야권이 분열과 통합을 거듭해온 데 따른 산물이다. 야권은 불리할 때마다 외부세력 수혈이나 합당으로 몸을 불려왔다. 새정치연합은 2000년 들어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대통합민주신당→통합민주당→민주당→민주통합당→민주당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계파들이 나뉘고, 이들의 화학적 결합은 늘 숙제로만 남았다. ‘떴다방’ 수준으로 당이 만들어지다보니 노선도 오락가락했다. 당권이 바뀔 때마다 ‘선명 진보’ ‘중도 강화’ 등 노선 갈등이 불거지면서 정당으로서 자산인 ‘신뢰’만 잃었다.

문제는 계파 갈등이 고질병으로 항상 지적되지만, 계파 청산 논의는 잠시뿐이란 점이다. 툭하면 ‘재창당 수준의 환골탈태’라는 말을 했지만 계파 문제는 건드리지 못했다. 제1야당의 역사는 ‘계파 투쟁의 흑역사’라고 할 만하다. ‘특정 계파의 당권 장악→공천 파동→선거 패배→비상대책위원회 구성→조기 전당대회→다른 계파의 당권 장악’이라는 공식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됐다. 당권을 잡는 계파 얼굴만 바뀌었을 뿐이다.

이 때문에 아예 현재의 계파 지형을 바꾸기 위해 새로운 리더십을 세워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은 “이미 형성된 지형에서 친노냐 반노냐 하는 퇴행적 접근이나 다수파가 권력을 잡는 낡은 방식으로는 안된다”며 “새로운 리더들이 새 가치와 노선으로 경쟁하면서 당 재편과 혁신이 동시에 진행되지 않으면 말짱 꽝”이라고 말했다.

 

 

[민심은 왜 야당을 버렸나]김한길·안철수, 사심 공천… 선거 전략도 없고 야권 연대엔 무책임

 (경향신문 2014-07-31 22:41:58)

(1) 무능한 리더십

 

7·30 재·보궐선거를 통해 확인한 새정치민주연합의 현주소는 참혹했다. 민심은 야당을 버렸다. 정부·여당을 견제할 제1야당 자격도, 수권 정당에 대한 기대도, 세월호 참사를 해결할 대안 세력 위상도 모두 부인했다. 뿌리인 민주당부터의 역사 이래 최대 위기다.

재·보선 하루 뒤인 31일 새정치연합은 온종일 충격파에 덮였다.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 총사퇴에 이어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새정치’를 간판으로 출발한 중도보수 성향의 김·안 동거 체제는 4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정세균계 의원 등 10여명이 조찬 회동을 하는 등 계파 간 갈등 움직임도 다시 꿈틀거렸다. 당내에선 “손을 쓸 수가 없다”는 자괴감이 쏟아졌다.

사실상 ‘존재의 이유’를 부정당한 새정치연합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그 답은 리더십 실종, 분열적 계파 갈등, 말뿐인 혁신, 보수 우위의 우리 사회 구조적 모순 등에서 찾을 수 있다.

▲ 권은희·기동민 ‘치명타’… 사람·노선·명분 다 잃어
세월호·인사 등 국정 난맥 견제 못하고 여론 눈치만
130석 가진 거대 제1야당 자멸하며 최대 위기 봉착


무엇보다 민심을 잃은 정당의 시작과 끝은 무능과 사심으로 사람도, 노선도, 명분도 다 잃은 지도부의 리더십 문제다.

김·안 체제는 선거의 출발인 공천부터 한계를 고스란히 노정했다. ‘사천(私薦)’ 논란이 대표적이다. 광주 광산을에 권은희 후보를 공천하기 위해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을 배제하고, 광산을 경선을 준비하던 기동민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서울 동작을로 올리는 등 ‘돌려막기’ 전략공천 논란은 치명타가 됐다. 동작을 경선에서 배제된 금태섭 전 당 대변인을 경기 수원정에 공천하려다 거부당하기도 했다. 차기 당권(천정배)·대권 경쟁자(박원순 서울시장)를 견제하기 위한 사천이란 비난까지 흘러나왔다. 두 대표는 공천 파동의 책임을 당내 486 세력에게 전가하는 모습도 보였다.

또 ‘무능’했다. 재·보선 내내 전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당 관계자는 “선거는 세월호로 치르려 하면서 핵심 공천은 권은희로 하니 도대체 공천 시그널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무책임’했다. 선거 막판 정의당과 야권 후보 단일화가 성사됐지만 두 대표는 그 과정에서 뒷짐만 졌다. 후보 결단으로 돌려진 단일화는 시기도 늦어졌고, 힘도 받지 못했다. 동작을의 기동민 후보를 지지한 사표 1400표는 결과적으로 승패를 바꿀 표수였다.

공천 난맥으로 당의 중요한 정치 자원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경기 수원병에서 낙선한 손학규 상임고문은 정계은퇴를 선언했고, 김포에서 고배를 든 김두관 전 경남지사도 회복 불능의 상처를 입었다.

당의 정책 노선과 전략도 정체불명으로 ‘지리멸렬’했다. 세월호 침몰, 인사 파동, 유병언 수사 난맥 등 정부의 무능이 도드라진 ‘3대 참사’를 견제하고 교정하라는 민심을 담아내지 못했다. 정대화 상지대 교수는 “국정에 대한 야당의 태도는 줄창 여론 눈치에 끌려다니는 대중추수주의였다. 무엇 하나 스스로 기획해서 주도하는 것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1990년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218석)을 상대한 야당은 71석의 평화민주당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3일간 단식투쟁으로 지방자치법을 쟁취했다.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는 79석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뤘다. 지금 새정치연합은 역대급인 130석이다. 제1야당 무능은 고스란히 국민 불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차디찬 국회의사당 바닥에서 18일째 단식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