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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테크/부 동 산

재력가 宋씨, 재산관리인에서 소송 통해 땅주인 돼...3000억대 재산 형성 과정 추적해보니 (조선일보 2014.07.19 13:40)

재력가 宋씨, 재산관리인에서 소송 통해 땅주인 돼...3000억대 재산 형성 과정 추적해보니

生前 송씨는 주변에 “나는 무엇이든 모조리 적어 놓는다. 치부책에 돈 준 사람들 다 적혀 있다. 법에서 내가 절대 질 수 없고, 누구든 내 말 들을 수밖에 없다”고 얘기하고 다녔다고 한다.

⊙ 1967년 재일교포 이순봉, 발산동의 밭 3100여 평 구입… 1995년 長女에게 넘겨
⊙ 2002년 宋씨 부부, 순봉산업 명의 全 부동산을 부부 소유로 해놔
⊙ 宋씨, 발산동 부동산 사기혐의로 1심에서 8년형… 2심·3심 거치며 無罪
⊙ 재일교포 原주인 “宋씨 부부와 일면식도 없다. 매매·증여한 적도 없어. 한국 정부 엄단하라”
⊙ 宋씨 관련 사건에 등장하는 K高·서울법대·사시 출신의 동기동창 법조인들
⊙ 1986년과 1991년 宋씨 관련 두 건의 소송, 한 건은 판사인 친척이 재판 맡고 다른 한 건은 판사 친구가 맡아

 

지난 3월 3일 새벽 1시경, 서울 강서구 발산동의 재력가 송(宋)모씨가 5호선 발산역 인근 순봉빌딩 3층에서 둔기에 맞아 피살(被殺)됐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직후, 기자는 유력한 용의자로 한 인물을 떠올렸다. 순봉빌딩 바로 옆 건물에서 만추웨딩홀을 운영했던 이호영 사장이었다. 그는 10년 동안 송씨와 법적 다툼을 벌여 왔다. 이후 경찰의 수사 발표에 계속 귀를 기울였다.

3개월 뒤, 지난 6월 범인(犯人) 팽씨가 붙잡혔다는 보도가 나왔다. 연이어 새정치민주연합 강서갑 지역구 신기남(辛基南)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인 서울시의원 김형식씨가 살인교사 혐의로 구속되고, 송씨가 작성한 치부책 <매일기록부> 일부가 공개되면서 머지않아 새로운 국면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피살된 송씨 소유의 서울 강서구 발산역 일대 빌딩들/ 주간조선DB
피살된 송씨 소유의 서울 강서구 발산역 일대 빌딩들/ 주간조선DB

 

1990년대 초반부터 <매일기록부>를 써 온 송씨는 2010년 이후 김형식씨에게 준 돈을 꼼꼼히 기록했다. 기자가 입수한 <매일기록부>의 일부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송씨의 행동패턴을 알 수 있다.

<1996년 4월 23일 ○○과 점심, 5월 14일 서초동 ○○○ 변호사 만남, 5월 15일 ○변호사 1000만원 입금, 5월 28일 강서경찰서 택시비 2200원, 7월 4일 ○건축 술 2만4000원, 10월 종이컵 1만원…>

결론부터 말하면, 송씨가 작성한 ‘판도라의 상자’ <매일기록부> 전체가 공개되면 그가 3000억원대에 달하는 재산을 어떻게 형성했는지, 이 과정에서 누구의 도움을 받았는지의 전모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김형식의 차용증과 송씨의 영수증

최근 검찰은 송씨가 작성한 <매일기록부>에 수도권 한 지검에 재직 중인 모(某) 부부장검사의 이름과 수백만 원의 금액이 나란히 적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사실관계를 조사 중이다. 문제의 검사는 2005년부터 수년 동안 송씨와 만났다고 한다.

생전(生前) 송씨는 주변 인물에게 “나는 무엇이든 모조리 다 적어 놓는다. 치부책에 돈 준 사람들이 다 적혀 있다. 법에서도 내가 절대 질 수 없고, 누구든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고 공공연하게 얘기하고 다녔다고 한다.

법정기록에 따르면, 송씨는 오래 전부터 경찰서, 세무서, 검찰청, 법원을 드나들었다. 그는 20년 넘게 소송더미 속에 살아 온 것이다. 소송과 부동산은 그의 인생 대부분을 차지한 듯 보였다.

그는 문제의 발산동 부동산과 관련해 사기·사문서 위조·특경가법 혐의로 10년간 검찰조사와 법원재판을 받아 왔다. 2009년 11월, 그는 형사사건 1심에서 징역 8년형을 선고 받고 법정구속됐다. 그러나 7개월 뒤인 2010년 6월, 2심 재판에서 무죄로 풀려 났다. 자유의 몸이 된 그는 자신 소유 부지(敷地)의 용도변경에 주력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12년 운동시설인 강변스포렉스도 인수했다. 피살되기 3개월 전에는 오피스빌딩도 인수했다고 한다. 수사당국은 이들 부동산의 용도변경을 위해 서울시의원 김형식씨에게 여러 차례 부탁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김형식 전 서울시의원은 송씨에게 돈 5억원만 빌렸을 뿐 그를 살인교사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근 일련의 사건전개 과정에서 재미있는 대목을 발견했다. 김형식씨가 죽은 송씨에게 5억원을 빌리며 써 줬다는 차용증(2011년 12월 20일자)의 필체(筆體)가, 죽은 송씨가 쓴 제3의 서류 필체와 유사하다는 점이다. 기자는 김형식-송씨 간 차용증과 이호영-송씨 간 영수증을 비교·분석했다. 영수증은 2003년 5월 29일, 당시 송씨 건물에서 예식장을 운영했던 이호영 사장과 송씨 사이에 오간 영수증이다. 이 영수증은 죽은 송씨가 썼다.


	2003년 5월 이호영 만추웨딩홀 사장과 송씨 간 영수증(왼쪽). 이 영수증은 송씨가 미리 썼고 이호영 사장은 나중에 서명만 했다. 김형식이 썼다는 차용증도 이런식으로 작성됐을 가능성이 크다. 영수증에 적혀있는 ‘영수함’의 ‘함’과 ‘영수인’의 ‘인’의 필체가 차용증에 있는 ‘차용함’ ‘차용인’의 그것과 같다.
2003년 5월 이호영 만추웨딩홀 사장과 송씨 간 영수증(왼쪽). 이 영수증은 송씨가 미리 썼고 이호영 사장은 나중에 서명만 했다. 김형식이 썼다는 차용증도 이런식으로 작성됐을 가능성이 크다. 영수증에 적혀있는 ‘영수함’의 ‘함’과 ‘영수인’의 ‘인’의 필체가 차용증에 있는 ‘차용함’ ‘차용인’의 그것과 같다.
김씨가 썼다는 차용증과 송씨가 쓴 영수증의 주요 글자의 필체가 같다는 것은 육안으로도 확인된다. 다만 김형식씨가 썼다는 차용증 글씨 중 ‘김형식’이라 쓴 부분과 ‘확인하고 인정함’ 대목은 김씨의 필체로 보인다. 이는 송씨가 차용증을 미리 쓴 후 나중에 김씨에게 들이밀며 서명하라고 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살인교사 혐의로 구속된 김씨는 처음에는 “돈을 빌린 적이 없다”고 했다가 나중에 “빌렸다”며 차용증도 자신이 써 줬다고 진술을 바꿨다.

김씨는 왜 말을 번복했을까. 돈을 빌린 적이 없는데 돈이 건네졌다면 청탁성 뇌물이 될 수 있다. 그럴 경우 문제는 복잡해진다. 대신 빌렸다고 하면 법적으로 문제가 될 게 없다. 현재 수사당국은 송씨가 청탁 착수금으로 김씨에게 돈을 여러 차례 준 뒤 부탁대로 안 되니까 돈을 돌려달라고 했을 가능성이 있는 걸로 보고 정확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있다. 그래야 살인교사도 설명이 가능하다.

2005년 여름에 만난 웨딩홀 사장

그렇다면 송씨를 상당한 자산가(資産家)로 만든 발산동 부동산은 어떤 과정을 통해 송씨에게 넘어갔을까.

정확히 9년 전, 2005년 여름 어느 날이었다. 노무현(盧武鉉) 정권이 임기 중반을 달릴 때였다. 지인(知人)의 소개로 송씨의 건물에서 예식장을 운영하던 이호영 만추웨딩홀 사장을 만났다. 당시 그는 “수십억 원짜리 예식장을 뺏길 처지에 있다. 현 정권 유력 인사까지 관련된 것 같다. 도와달라”고 했다.

이호영 사장 부부(夫婦)가 경영하는 만추웨딩홀은 강서구에서 꽤 큰 규모였다. 당시 이 사장은 이런 요지로 말했다.

“1995년 발산동 땅의 원주인(原主人) 이순봉 할아버지를 일본 오사카에 직접 가 만났습니다. 그의 땅 일부에 예식장을 지어 운영한다는 계약을 맺었어요. 그 이후 수년간 아무런 변화가 없었는데 2003년부터 송씨가 자기 것이라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등기부등본을 확인해 보니 2002년 9월 17일자로 순봉산업 명의의 발산동 부동산이 송씨 부부에게로 전부 넘어갔어요. 발산동 땅과 건물은 송씨 소유가 절대 아닙니다. 재일교포 이순봉(1917년생·2004년 亡) 할아버지와 그의 장녀 이초지(72세)씨가 주인입니다. ‘순봉빌딩’이라는 이름도 이순봉 할아버지의 이름에서 딸 정도로 그들은 부동산에 애착이 강했습니다. 관리인에 불과한 송씨가 이순봉 부녀(父女) 도장과 위임장 등을 위조해 명의를 이전한 후 지금 나더러 ‘나가라’ 하고 있어요. 송씨 부인이 이순봉씨와 먼 친척이라고는 하지만 송씨 부인도 관리인에 불과합니다.”

문제의 발산동 부동산은 대지 3100여 평(4필지)에 순봉빌딩(지하1층·지상3층), 만추웨딩홀(지하1층·지상4층), 상가아파트(지하1층·지상5층), 골프연습장 및 주차장 빌딩(지상3층)의 건물로 이뤄져 있었다. 이들 건물은 1995년에서 1997년 사이에 지어졌다.

등기부등본을 확인한 결과, 발산동 부지는 재일교포 이순봉씨가 1967년 자신이 설립한 순봉산업 명의로 구입했다. 당시 이 일대는 전부 밭이었다.

흥미롭게도 해당 발산동 땅을 두고 1993~94년 사이에 토지사기 사건이 발생했다. 1994년 11월 20일자 《세계일보》의 사회면 기사다.

<서울지검 형사2부 임태성 검사는 11월 19일 유모씨 등 4명을 사기 혐의로 구속하고 이모씨를 같은 혐의로 수배했다. 검찰에 따르면, 유씨 등은 지난해 6월 등기서류 등을 위조, 재일교포 이모씨가 대표로 있는 S유한회사의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 652 대지 3천2백평(시가 1백60억원상당)을 모호텔 사장 정씨에게 팔아 넘기려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유씨 등은 고령인 이씨가 주로 가족들과 오사카에 거주, 국내 부동산 관리가 허술하다는 점을 알고 S유한회사 사원총회 의사록 등을 위조해 사기극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기사에 등장하는 재일교포 이모씨가 바로 이순봉 할아버지이고, S유한회사가 순봉산업이다. 사건이 발생하자, 이순봉씨는 1995년 노구(老軀)를 이끌고 서울을 방문, 법적으로 재정리했다. 그해 11월 13일자로 자신의 큰딸 이초지씨가 순봉산업 대표이사가 됐다. 다시 말해 1995년 11월 13일부터 발산동 부동산의 주인은 순봉산업 대표 이초지였다. 이순봉 할아버지는 8촌 손녀 뻘인 송씨 부인 이○○를 순봉산업 이사로 임명한 후 부동산을 관리하도록 했다. 그러나 먼 친척이라는 이유로 발산동 부동산을 증여했거나 매매(賣買)한 적은 절대 없다고 순봉산업 대표 이초지씨는 2005년 국제사법공조 수사과정에서 증언했다. 법적 소유권자인 이초지씨는 송씨 부부를 단 한 차례도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

일제 식민시대의 뼈아픈 기억

자신이 순봉산업 대표가 된 것과 관련해 이초지씨는 2009년 일본 오사카를 방문한 박○○ 통역사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통역사가 전한 이초지씨의 얘기다.

“아버지는 일제 식민시대에 대한 뼈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언젠가 일본에서 한국인들은 쫓겨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한국에 땅을 미리 사 뒀습니다. 아버지는 그 땅에 병원을 짓고 운영하면 자식들이 오랫동안 먹고살 수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남동생 셋이 모두 의사인 것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입니다. 1967년경 한국에 땅을 사러 간다고 했을 때 가족은 반대했지만 아버지는 서울 종로구, 김포(지금의 발산동 땅), 수원 등지에 땅을 샀습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나와 상의했습니다. 여자 이름으로 돼 있으면 일본 정부가 성가시게 하지 않을 것이라며 장녀인 나로 하여금 재산을 맡도록 했습니다. 일본 재산도 그렇고 한국 재산도 내 이름으로 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발산동 부동산의 주인 이초지씨가 관리인 송씨 부부와는 일면식도 없다고 했음에도 해당 부동산이 송씨 부부에게 넘어간 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연유일까.

법원 재판기록과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송씨 부부는 2002년 순봉산업으로부터 발산동 땅을 20억원에 산 것으로 되어 있다. 전체 부동산의 70%는 송씨 명의로, 30%는 부인 명의로 했다. 송씨는 생전에 검찰과 법원에서 여러 차례 다음과 같은 요지로 말했다.

“처(妻)가 이순봉 할아버지의 8촌 손녀입니다. 그래서 1995년 11월 한국을 방문한 할아버지가 ‘재산을 잘 관리해서 나중에 가져가라’며 저의 처와 딸을 순봉산업 이사, 감사로 등재했습니다. 그런 후 1998년 제가 일본에 직접 건너가 이순봉 할아버지를 만나 부동산에 대한 모든 권한을 위임한다는 위임장을 받아 온 것입니다. 이초지 고모와 이○○(이초지의 여동생) 고모를 만나서도 같은 입장을 확인했습니다. 순봉빌딩을 짓는 데 20여억원이 들어갔기 때문에 남은 건축비용 등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명의를 이전 받은 것입니다.”

송씨의 주장대로 모든 권한을 위임 받았다면 재판을 통하지 않고 순조롭게 명의를 바꿨을 것이다. 그런데 송씨는 2002년 순봉산업(대표 이초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승소(勝訴)한 후 매매(賣買)라는 형식으로 소유권을 차지했다.

‘건축비 20억원’에 대해서도 이초지씨는 “건물 지을 당시 건축비용으로 40억원을 준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송씨 관련 두 사건 맡은 A변호사

만추웨딩홀 이호영 사장과 죽은 송씨와의 법적 다툼은 2004년, 이 사장이 송씨를 사기 혐의로 검찰에 고소하면서 시작됐다. 소송 직전까지 이호영 사장은 발산동 부동산이 송씨 부부에게 넘어간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기자는 2005년 당시 이호영씨가 거론한 정권의 유력 인사가 이 사건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여러 곳을 통해 확인했지만 딱 떨어지는 연결고리를 찾지 못했다. 다만, 노무현 정부 때 장관을 지낸 A변호사가 이순봉 명의의 서울 종로구 장사동에 있는 토지와 경기도 수원시 소재 땅에 대한 두 건의 소송을 수임, ‘주된 담당변호사’로 활동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첫 번째 소송은 1999년 양도소득세부과처분 취소소송이었다. 원고는 이순봉 할아버지였다. 다시 말해, 이순봉 할아버지가 A변호사를 소송대리인으로 지명한 셈이다. 법정자료에 따르면, 이 소송은 송씨가 1999년경 A변호사에게 의뢰했다. 1심 소송에서 원고는 패소했으나(2000년 11월), 2심에서 승소했다(2001년 9월). 대법원은 2003년 4월 2심 판결을 그대로 인정했다.

참고로, 이순봉 할아버지는 1996년 4월 한국을 방문한 후 2004년 10월 사망할 때까지 더 이상 한국에 오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것은 1996년 4월 29일이었다. 그는 이튿날 곧바로 떠났는데, 김포공항 현장에서 한 괴한에게 ‘부동산을 포기하지 않으면 가만히 안 놔두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한다.

A변호사가 맡은 또 다른 한 사건은 2000년 10월, 재일교포 이순봉씨 소유의 종로구 장사동 땅을 큰딸이 대표로 있는 순봉산업에 넘기라는 소유권 이전 소송이었다. 즉, 딸이 아버지를 상대로 땅을 넘기라고 한 소송이었다. 이 소송에서 A변호사는 원고 순봉산업 대표 이초지의 소송대리인이었다. 다시 정리하면, A변호사는 1999년에는 이순봉의 변호사로, 2000년에는 큰딸 이초지의 소송대리인이었다. 양쪽을 왔다갔다한 것이다. 두 번째 소송도 실제로는 송씨가 의뢰했다. 소송 결과, 이순봉 소유의 장사동 땅이 순봉산업으로 넘어갔다.

이후 2002년 9월, 순봉산업 소유의 땅 전부가 송씨 부부에게 이전됐다. 이 소송에 대해 이초지씨는 2005년 국제사법공조 수사에서 “아버지와 나는 그런 소송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고 증언했다.

A변호사가 수임한 두 차례 소송대리는 법적으로 문제 없다. 당시 기자는 A변호사가 장관을 하기 전이었으니 이런저런 사건을 맡을 수 있다고 봤다. 그렇다면 송씨와 A변호사를 연결한 사람은 누구일까. 송씨와 A변호사 사이에 송씨의 친척인 L변호사가 있었다.

L변호사는 A변호사와 사법시험 ○○회(사법연수원 ○○기) 동기이다. 나이는 A변호사가 두 살 더 많다.

1959년생인 L변호사는 K고, 서울법대를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제○○회 사시(司試)에 합격했다. L변호사는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로 있다가 2006년 2월 사직, A변호사가 대표변호사로 있던 로펌에 곧바로 들어갔다. 그 무렵(2006년 2월), 송씨가 사기·사문서위조 혐의로 기소되면서 L변호사는 송씨 변호를 맡기 시작했다. 그는 송씨 형사사건이 끝날 때까지 변호를 계속했다. L변호사는 2006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송씨와는 친척 관계”라고 밝혔다. 송씨 주변인물들은 송씨와 L변호사가 이종사촌 또는 고종사촌으로 알고 있었다.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우연인지 필연인지 송씨 관련 재판에는 K고, 서울법대, 사시 ○○회 출신의 법조인 여럿이 직간접적으로 등장한다.

“알아먹게 이야기하시오”

다시 송씨의 형사사건으로 돌아가 보자.

만추웨딩홀 이호영 사장은 2004년 송씨를 사기 혐의로 검찰에 고소함과 동시에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송씨도 검찰조사를 적극적으로 받으면서 발산동 부동산이 자기 소유라고 강하게 항변했다.

2004년 검찰의 초기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당시 수사를 맡았던 검사는 그 해 말 옷을 벗었다. 해당 검사는 노무현 정권 때 실시됐던 법무부의 ‘검사적격심사’에서 집중심사 대상에 포함돼 그해 말 사표를 냈다. 2005년 들어 수사는 속도를 냈다.

다음은 수사기록 중 일부다.

<검사: 98년 7월에 작성한 것이 맞습니까? 99년에 소급하여 작성한 것이 맞습니까?
송: 기억이….

검: 기억이 안 나면 안 난다고 말하시오.
송: 예.

검: 오늘 진술한 것도 다르게 진술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송: 잘 기억이 안 나서.

(중략)

검: 이순봉에게 왜 연락을 안 했습니까?
송: 이순봉씨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연락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검: 이초지에게 중요한 일이니까 연락해야 되지 않습니까?
송: 할아버지가 먼저는 연락하지 말라고 해서요. 이초지 고모가 말했습니다. ‘너 다 줄 테니 일본에 돈 가지러 오지 말라’고요.

(중략)

검: 이것 보면 도장이 다릅니다. 도급계약서와 임대계약서 인감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틀리죠? 육안으로도 틀리잖아?
송: 아닙니다.

검: 순(편집자 注·이순봉의 順을 말함) 자가 삐쳐 있다. 봐요. 순 자가 틀리지 않냐고요?
송: 네.

검: 다르다고 인정하시오.
송: 모르겠습니다. 저하고는 상관이 없어서.

(중략)

검: 결론만 이야기하시오.
송: 증여한 것입니다. 건축비 20억을 제한 나머지는 증여한 것입니다.

검: 당신이 건축비 얼마 부담했다고 했죠?
송: 19억 얼마요.

(중략)

검: 98년 3월 7일 이초지를 만난 사실이 있습니까?
송: 이순봉만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검: 그때 이초지는 어디에서 살고 있었습니까?
송: 모릅니다.

검: 모르면 모른다고만 해요?
송: 옛날 집에 가 본 적은 있으나 주소가 기억이 안 납니다.

검: 오로지 나이 먹은 이순봉하고만 했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송: 그때는 모르겠습니다.

검: 알아먹게 이야기하시오.>

7개월 만에 깨진 예식장 사장의 꿈

검찰 조사에서도 알 수 있듯 송씨를 수사한 검찰은 수사에 상당히 애를 먹었다.

고소가 있은 지 2년 뒤인 2006년 2월, 마침내 검찰은 송씨를 사기, 사문서 위조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재일교포 이초지씨가 국제사법공조 차원에서 실시된 일본 오사카경찰청 조사에서 “어느 누구한테도 한국 부동산을 매매하거나 증여한 적이 없으며, 저는 한국에 가 본 적도 없고, 송씨 부부를 만난 적도 없다”고 진술한 기록이 한국 검찰에 도착한 것이다.

검찰에서는 속도가 났지만, 이번에는 법원에서 속도가 나질 않았다. 1심 판결이 언제 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 사이 2008년 10월, 만추웨딩홀 이호영 사장은 송씨 건물에서 쫓겨났다. 송씨가 이 사장을 상대로 제기한 건물명도 소송에서 이 사장이 패소한 것이다. 명도 소송이란 쉽게 말해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나가라는 소송이다.

한편, 송씨의 형사재판 1심 선고는 재판부가 몇 번 바뀐 다음, 2009년 11월 13일에야 났다. 기소에서 1심 판결까지 3년 7개월이 걸렸다. 송씨는 징역 8년 실형을 선고 받고 법정구속됐다. 그의 부인도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 받았다. 만추웨딩홀 이호영 사장은 형사재판 결과를 토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해 뺏긴 재산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7개월 만에 깨졌다. 2010년 6월 25일, 형사재판 2심 항소심에서 송씨가 무죄를 받은 것이다. 그의 부인도 무죄였다.

그리고 2012년 말 성탄절 이틀 뒤인 12월 27일, 대법원은 검찰·피고인의 상고를 모두 기각했다. 송씨 부부가 무죄를 받은 2심 판결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다만 1심 재판부가 공소 기각한 부분에 대해 ‘서울중앙지법 합의부가 다시 심리하라’며 일부 파기 환송했다.

파기 환송의 핵심내용은 송씨가 검찰조사 및 형사재판 과정에서 제출한 여러 증거자료 중 ‘1996년 5월 25일자 위임장’과 같은 해 ‘11월 25일자 각서’의 위조 여부를 다시 따져 보라는 것이었다. 문제의 위임장과 각서는 송씨가 재일교포 이순봉에게서 부동산 관리 및 처분에 관한 법적 권한을 위임 받았다며 검찰과 법원에 제출한 여러 물증 중 일부였다.

검찰과 1심 재판부는 송씨가 제출한 위임장과 각서를 위조로 판단했다. 위임장과 각서에 찍힌 재일교포 이순봉 할아버지의 자필 서명과 개인 인감도장, 이순봉 장녀 이초지가 대표로 있는 순봉산업 법인 인감도장 등을 가짜라고 본 것이다. 한글 타자기로 작성한 위임장 자체를 허위증거로 평가했다. 다음은 1심 판결문의 일부다.


	서울 발산동 부동산의 원주인 순봉산업 대표 이초지씨. 그는 2004년 5월경 일본에 직접 찾아간 이호영 사장에게 동영상 촬영을 허용하고 영상 증언을 하면서 “송씨 부부에게 매매·증여한 적이 없다. 그들의 얼굴조차 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동영상 캡처
서울 발산동 부동산의 원주인 순봉산업 대표 이초지씨. 그는 2004년 5월경 일본에 직접 찾아간 이호영 사장에게 동영상 촬영을 허용하고 영상 증언을 하면서 “송씨 부부에게 매매·증여한 적이 없다. 그들의 얼굴조차 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동영상 캡처
<이순봉은 평소 서명, 날인하는 것에 신중하여 처분문서 등 중요한 서류에는 항상 한자로 자필서명을 한 후 인감도장을 날인하여 왔는데 1996년 9월 12일자 위임장이 처분문서임에도 이순봉의 자필서명이 없을 뿐만 아니라 위임장에 날인된 인영(편집자注·찍힌 도장의 모양)도 순봉산업의 법인 인감도장과 이순봉의 인감도장에 의해 날인된 것이 아닌 점, (중략) 1996년 9월 12일자 위임장은 사후에 이순봉의 허락 없이 임의로 작성된 것으로 봄이 상당하다. (중략) 80세의 고령으로서 병원에 입원 중이었던 이순봉이 일본에서 한글 전동타자기를 사용하여 위 서류를 작성하였다는 것은 쉽게 믿기 어려운 점, 1998년 3월 7일자 위임장에 기재된 이순봉 개인 서명은 이순봉의 자필서명이 아니며, 위 매매계약서 중 매도인, 매수인란에 기재된 글씨 역시 이순봉의 글씨가 아닌 점…>

대부분의 문서가 위조됐다고 본 1심 재판부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의 감정결과를 중요한 근거로 채택했다. 송씨는 2004년 검찰조사를 받으며 두 건의 위임장을 낸다(96년 9월 위임장과 98년 3월 위임장). 그런데 2년 뒤 2006년 1심 형사재판 때는 검찰에 제출한 위임장보다 더 앞서 작성됐다는 위임장(96년 5월 위임장?96년 11월 각서)을 낸다.

이들 증거물의 활자를 정밀감정한 국과수는 2004년 검찰에 낸 두 건의 문서와 2006년 형사 법정에 낸 두 건의 서류가 동일한 활자 크기?모양으로 작성됐다는 의견을 냈다. 쉽게 말하면, 타이핑한 문서의 날짜가 각각 4개월, 15개월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활자 크기?모양이 같다는 것이다. 즉, 문서가 위조됐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통상 타자기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타자기 할자가 마모돼 크기?모양이 달라진다.

1심 재판부는 순봉산업 이초지씨에 대한 일본 오사카경찰청의 수사기록도 중요한 근거로 봤다. 2005년 2월 8일, 일본 오사카경찰청 형사부 국제수사과 수사관은 이초지 사무실에서 그녀를 상대로 조사했다. 이씨는 수사관의 질문에 답하며 “한국의 부동산은 순봉산업의 대표인 나의 소유이며 부동산 매각이나 증여 등과 관련해 어떠한 서류나 법인 인감을 타인에게 준 적도 없다”고 밝혔다. 그는 조사 말미에 “한국에 있는 부동산들에 대해 나를 속이고 빼앗으려 한국에서 암약하는 악(惡)한 자들을 한국 정부가 엄하게 단속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1심 재판부는 발산동 부동산의 법적 소유권자인 이초지 대표의 증언을 중요하게 받아들였다.

“당치도 않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느냐”

그러나 2심 재판부는 완전히 다른 판단을 내렸다. 송씨 부인이 부동산 원주인 이순봉과 8촌 관계이고 고령(高齡)의 이순봉이 일본 가족들 몰래 친척인 송씨 부인에게 부동산을 줬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울러 송씨가 제출한 위임장 등 여러 문서들도 위조됐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2심 판결문의 일부를 인용한다.

<이순봉이 한글 서류 작성을 대행해 주는 업체 등에 의뢰하여 위임장을 작성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어 (중략) 이순봉의 허락 없이 임의로 위 위임장을 작성하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중략) 1996년 5월 25일 서울지방법원 상업등기소에서 발급된 순봉산업의 법인 인감증명서가 첨부되어 있으며, 감정 결과 위 위임장의 인영과 법인 인감증명서의 인영이 동일한 것으로 밝혀졌고, (중략) 96월 5월 25일자 위임장과 96년 11월 25일자 각서에 날인된 인영이 다른 것은 이순봉이 96년 5월 25일경 법인 인감도장을 소지하고 있어 이를 이용하여 96년 5월 25일자 위임장을 작성한 반면, 병원에 입원하기 직전인 96년 11월 25일에는 법인 인감도장이 이○○에 의해 보관되어 있기 때문인 점, 자신이 소지하고 있던 이 사건 법인도장과 이순봉 도장을 이용하여 위 각 문서들을 작성하였을 가능성이 있고…>

2심 판결이 나고 4개월 뒤인 2010년 10월 4일, 이초지씨는 일본 오사카지방재판소 706호 법정에 출두해 재판관의 질문에 이렇게 증언했다(국제사법공조 재판). 그의 증언은 2005년 오사카경찰청 조사 당시 진술한 내용보다 더 구체적이었다.

<증인(이초지)은 한국에 있는 이순봉(2004년 10월 亡)과 순봉산업 소유의 토지와 건물들의 소유권이 2002년 9월 모두 송○○와 그의 부인 ○○○에게 이전되었다는 사실을 2002년에 알았고 이순봉에게 알려주었다고 증언한 적이 있지요.
“네.”

알려준 때는 몇 년도인가요.
“제가 2002년 2월부터 10월까지 병원에 입원해 있었기 때문에 그 후에 알려주었습니다.”

그때 이순봉의 반응은 ‘당치도 않다’고 말하였다고 하는데요.
“맞습니다.”

당시 이순봉은 요통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었지만 정신 능력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지요.
“네, 그렇습니다.”

이순봉이 ‘당치도 않다’고 말한 것 외에 더 구체적으로 증인에게 한 말이 없었는가요.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느냐고 물으셨지요.”

증인은 원상복구를 위한 조치를 취하라고 이순봉에게 권했나요.
“순봉산업의 대표이사는 저이지, 아버지가 아니므로 제가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버지와는 그 사실에 대해 말을 나누었지만 아버지가 ‘그럴 리가 없다’고 말씀하셔서 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이순봉에게 권하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권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는, (제가) 실제 인감을 갖고 있었고, 서류도 전부 (제가)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권하지 않은 이유는 방금 언급한 대로, 증인이 결정할 사항이었기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벌떼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어

만일 누군가가 이순봉의 재산을 부정한 방법으로 가로채 갈 경우, 이순봉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사람인가요.
“아닙니다.” (중략)

이순봉이나 증인이 1998년 3월 이후에도, 이 사건 부동산에 대하여 실질적 권리를 갖고 있다면 임대료 수입만으로도 매달 약 1억원 이상이 되는데 왜 그렇게 오랫동안 아무런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나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가 입원하자마자, 확실히 말하자면, 벌떼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이들이 모든 일에 대해 본인들이 일임을 받았다거나 권리가 있다고 하고, 설상가상 일본에 있는 오사카 총영사와 부영사까지 나서 도움을 드리겠다며 전화를 별도로 걸어 왔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자꾸 겹치다 보니 그 사람이 누군지, 그것이 사실인지도 확인하기 어려워서, 저는 누구에게도 도장을 찍어 주거나 위탁한 적도 없습니다.”

증인은 2002년 송○○과 그의 부인 ○○○이 관련 서류를 위조하여 한국에 있는 부동산의 소유권을 이전한 사실을 알았다고 하면서도 이후 그들에게 확인해 본 적이 전혀 없지요.
“네.”

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나요.
“저는 한글도 읽을 수가 없지만 (어떤 조치를 했을 때) 일본에 있는 (저의) 회사에 그 불똥이 튀고, 일본에 있는 것들을 지키기에도 벅차 한국에 있는 것들은, 저는 한글도 못 읽고 게다가 그쪽 사람 중에 신뢰할 만한 사람도 없었으므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집에 찾아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였고, 전화도 계속 울렸기 때문에 그래서 아무 것도 안 했습니다.”

통역을 고용하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통역을 신용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지요.”

증인이 일본에서의 상황만으로도 벅차다고 말한 것은, 당시 증인이 2006년 상속세(2004년·父 이순봉 사망에 따른) 탈세 문제로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던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전에 얼마든지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지 않았나요.
“불가능했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겠다고 산만한 서류들을 가져왔는데, 어머니에게 일본어로 된 서류와 한글로 된 서류를 가져왔지만, 어머니가 읽어 보면 내용이 서로 다릅니다. 일본어로 된 것과 한글로 된 서류 내용이 미묘하게 달랐습니다. 그런 일이 계속되자 저는 그것을 그대로 보류해 버렸습니다.”

증인이 어렵다면, 증인의 남동생들이 대신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지 않았나요.
“동생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랐고, 저야 할머니가 계셨던 덕분에 중간중간 약간은 알아들었지만 동생들은 완전히 까막눈이었습니다.”

증인의 상속세 탈세 문제는 어떻게 종결되었나요.
“아직도 재판 중입니다.”

송씨, 병원에서 난동 피워

증인은 자신의 건강상태도 좋지 않고 형사재판도 걸려 있어서 한국의 법정에 출석하여 증언할 수 없다고 증언한 사실도 있는데, 증인이 암이 발병한 것은 약 10년 전 일이므로, 한국에 가서 증언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지 않은가요.
“2002년에 발병했으니 8년째입니다. 지금 폐에 암이 전이되었습니다. 2003년에는 뇌경색까지 있어 치료 중입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재판소에 가고 병원에 다니고 변호사와 미팅 등으로 거의 계속 외출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형사재판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이순봉의 재산을 누군가가 사취한 것이라면 당연히 이를 되찾으려고 하여야 하지 않는가요.
“이순봉의 재산이 아닙니다. 저희 가족의 재산입니다. 거기에 대표이사는 저이지 동생들도 (이사에)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증인의 국적은 한국인가요, 아니면 일본인가요.
“한국입니다.”

이순봉이 일본에 있는 재산에 대해 유언을 남긴 사실이 있나요.
“없습니다.”

재산은 상속인들에게 어떻게 배분되었나요.
“아직 분배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증인은 송○○이 일본 항와스미요시병원을 찾아왔었다는 이야기를 누구한테 들었나요.
“저와 그리고 여동생이 사무실에 있을 때, 자택으로 찾아왔습니다. 병원에서도 연락이 와 로비에서 (송씨가) 난동을 피우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여동생이 달려갔습니다. 저는 사무실을 지켜야 했거든요. 나중에 (동생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병원에서 가서 이순봉을 만나게 해 달라고 난동을 피웠다고 하더군요.”>

이초지씨의 일본 법정진술처럼, 그는 발산동 부동산과 관련해 한국에서 온갖 사람들이 찾아와 “도와주겠다”고 벌떼처럼 달려들어 결국에는 한국인 아무도 신뢰할 수 없었다. 그는 송씨 부부를 본 적도 없으며, 무엇보다 자신이 순봉산업의 대표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함부로 자신의 부동산을 처리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명의가 넘어간 이후 별도의 대응을 하지 못한 데는 자신이 2002년 암이 발병했고, 2004년 부친(父親)이 사망한 후 상속세 탈세 문제로 일본 사법당국의 조사를 받느라 경황이 없었으며, 한국 부동산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혹시 모를 ‘불똥’이 일본에까지 미칠 것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이초지씨가 여러 차례 일본 법정에서 증언했음에도 그의 증언은 국내 형사재판에서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송씨의 형사재판은 2012년 12월 27일, 대법원의 최종 판단으로 사실상 끝이 났다. 송씨 부부는 무죄를 받으면서 발산동 부동산의 법적 주인이 됐다.

물론 뒤집을 기회가 없진 않았다. 파기환송된 사안에 대해 법원은 다시 재판을 해야 했다.

風飛雹散 난 웨딩홀 前 주인

10년간 송씨와 법적으로 다퉈 온 이호영 사장은 2009년 11월, 1심 재판부가 판결한 것처럼 ‘96년 5월 위임장’과 ‘96년 11월 각서’가 위조됐다는 판결을 기대했다. 그러나 2013년 7월 12일, 파기환송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합의부는 송씨가 제출한 이순봉씨의 위임장과 각서는 가짜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다만 송씨가 발산동 부동산의 종합소득세를 포탈하려고 문서를 위조한 데 대해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했다. 다음은 판결문의 일부이다.

<피고인(송씨)이 종합소득세 등을 포탈하고자 문서를 위조한 것은 죄질이 좋지 않기는 하나, 피고인이 7년이 넘게 진행된 사건 재판 과정에서 심적 고통도 상당하였을 것이고, 이미 7개월 남짓 구금생활도 경험하였던 점, 피고인의 연령, 성행, 환경, 건강상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피고인에게 실형보다는, 이번에 한하여 형의 집행을 유예함이 옳다고 보고서 위와 같이 형을 정하였다.>

송씨와 법적 다툼을 해 온 이호영 사장은 건강이 나빠질 대로 나빠졌고 가정은 사실상 풍비박산(風飛雹散) 났다. 판결문에는 거의 폐인(廢人)이 된 이호영씨의 입장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로부터 3개월 뒤인 2013년 10월, 파기환송 항소심도 1심과 동일했다. 원고(검사)와 피고인(송씨) 양쪽이 상고를 포기하면서 10년 재판은 모두 끝났다. 3000억원대 발산동 부동산은 송씨 부부의 것임이 법원에 의해 증명됐다.

10년 만에 송씨에게 평온이 찾아온 듯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재판 종료 5개월 뒤인 올해 3월 3일 새벽 1시경, 송씨는 팽모씨가 휘두른 둔기에 맞아 죽었다. 재판 종결과 동시에 67년의 생(生)을 마감한 것이다.

발산동 부동산의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송씨는 생전에 부동산을 담보로 400억원이 넘는 돈을 대출 받았다. 이호영 사장은 “2003년에 40여억원을 은행에서 대출 받은 후 지속적으로 돈을 빌려 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가 땅을 사고, 건물을 인수하고, 신축하는 데 들어간 총액은 얼마나 될까. 또 남은 돈은 얼마나 될까.

그는 2004년 주유소 땅을 인수해 호텔을 지었다. 소요된 비용이 100억원까지는 안 된다고 한다. 2012년 인수한 강변스포렉스는 40여억원, 올해 초 인수한 오피스빌딩도 40여억원가량 들었다고 한다. 이들을 합하면 대략 200여억원. 대출금과 지출금의 차액은 200억원 정도이다. 송씨는 웨딩홀을 직접 운영하면서 벌어들인 현금 수익도 적지 않다고 한다.

K고·서울법대

기자는 송씨의 재판 과정을 보면서 우연 치고는 묘한 ‘일치’를 찾아냈다. 송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2심 재판부의 재판장은 C판사였다. K고를 졸업한 후 서울법대에 들어가 대학 졸업과 동시에 사시에 합격했다. 현재 모 지방법원장으로 있는 그는 송씨의 친척 L변호사와 나이, 출신 고교와 대학이 같고, 사시 및 연수원도 동기이다.

송씨 사건에 등장하는 B변호사도 L, C의 고교·대학, 사시·연수원 동기생이다. 그는 2007년 서울고법 부장판사로 있을 당시 송씨가 이호영 만추웨딩홀 사장에게 건물을 비워 달라며 제기한 건물명도 소송 사건의 재판장을 맡았었다. 그러나 그는, 송씨 변호인 L변호사와 친구라는 사실을 알아낸 이호영 사장이 재판부 기피신청을 하는 바람에 교체됐다.

앞서 언급한 이순봉, 이초지의 소송대리인을 맡은 A변호사는 L, C, B보다 두 살 많지만 사시·연수원 동기이다.

D판사는 송씨가 서울중앙지법에서 형사재판을 받을 당시, 같은 법원 형사수석 부장판사로 재직했다. 그는 그 직전에 서울고법 판사로 있었는데, 송씨가 이호영 사장에게 제기한 건물명도 소송 사건도 맡았었다. D판사는 B, L, C의 고교 선배이자 서울법대, 사법연수원 선배이다. 그는 현재 법원 고위직에 있다.

기자는 이런 사실도 알게 됐다. 1986년과 1991년 송씨와 관련된 두 건의 재판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한 건은 당시 B판사가, 또 다른 한 건은 송씨 친척 L판사가 1심 재판을 맡았다.

1986년 12월 27일, 서울민사지법의 B판사는 송씨가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은 2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이 났고 대법원에서 기각돼 결국 송씨가 졌다.

1991년 8월 29일, 서울지법 북부지원 L판사는 송씨의 처제가 제기한 연립주택 소유권 이전등기 말소청구 소송에서 원고의 손을 들어 줬다. 이 사건은 2심에서 원고 청구 기각이 내려졌는데 최종심에서 원고 일부승소 결정이 났다. 2002년 처제 명의의 해당 부동산은 송씨에게 이전됐다.

송씨를 둘러싼 각종 소송에서 일부 법조인들이 혈연, 학연, 지연 등으로 연결돼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재판 결과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들 나름대로 사법정의(司法正義)를 염두에 두고 판결한 것이 아니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만 그것을 우연이라고만 여기기에도 기가 막힐 일 아닌가.

恨이 서린 땅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여섯 차례 이초지씨를 만난 통역사의 전언(傳言)이 기자의 머리에 맴돌았다.

“제가 일본 법정에서는 이런 말을 못했지만, 돌아가시는 날까지 아버지는, 일본에 있는 한국인들은 언젠가 쫓겨날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너희들이 돌아가 머물 한국의 땅은 반드시 잘 지켜야 한다’고 했어요. 아버지가 그 땅을 어떤 생각으로 샀는지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땅은 아버지의 한(恨)이 서려 있는 땅입니다. 한국에 있는 땅을 반드시 찾을 겁니다.”

10년 동안 송씨와 법적 다툼을 벌인 만추웨딩홀 이호영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재판 기간 내내 송씨는 나를 무고(誣告)로 고소하겠다며 협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를 고소하지 않았어요. 왜일까요? 지금이라도 그의 부인이 나를 고소했으면 좋겠어요. 세월호 사건의 원인으로 ‘관피아’가 지적됐는데 송씨 사건은 ‘법피아’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내가 운영했던 만추웨딩홀은 이미 6년 전에 바다 깊숙이 침몰했어요. 대한민국 사법부에 정의(正義)가 살아 있다면 언젠가 진실이 법정에서 드러날 것이라 믿습니다.”

살아생전에 그날그날의 행적을 꼼꼼히 기록했던 송씨. 그는 재판 과정에서 발산동 부동산을 합법적으로 넘겨받았다고 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매일기록부> 원본 전체가 세상에 공개돼 그의 말과 행동이 진실임을 다시 입증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진실기록부’는 세상에 쉽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과연 송씨의 진실기록부는 언제, 어떤 경로로 세상에 공개될까. 10년이라는 세월이 또 흘러야 할까.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재일교포 이초지씨가 재산을 찾겠다며 소송하는 것이다.



 

[TV조선] 송씨 재산 형성 과정에 전직 법무부장관도 연관

 (조선일보 2014.07.18 23:15)

 

김형식 서울시의원의 살인 교사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알려진 재력가 송모씨가 재산을 형성하는 과정에 법무부 장관까지 지낸 변호사 A씨가 연루된 정황이 드러났다고 TV조선이 보도했다. 송씨는 재일교포 이모씨의 재산 대리인으로 있다가, 이씨에게 소송을 걸어 그 재산을 가로챘는데 그 과정에 A씨가 도움을 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송씨는 과거 이씨와 이씨의 아버지 사이에 재산을 놓고 분쟁이 벌어졌을 때, 두 사람의 재산 대리인을 동시에 맡았다. 당시 이씨는 ‘무변론’ 승리를 거뒀는데, 그로부터 2년 후 송씨는 똑같은 방법으로 이씨의 재산을 가로챘다. 때문에 송씨가 두 사람의 대리인을 맡으며 재판 결과를 조작해 재산을 가로챘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또 이 과정에서 거물 변호사인 법무부 장관 출신 변호사 A씨가 이같은 사실을 알면서도 송씨에게 도움을 주고 수임료를 챙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래는 TV조선 보도 원문.


[앵커]
살해된 재력가 송모씨의 재산 형성 과정에 법무부 장관을 지낸 변호사도 연관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여러차례 재판에서 송씨 재산의 전 소유주를 변호했는데,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 많습니다.

[리포트]
지난 1998년, 한 건설회사가 재일동포 이 모 씨를 상대로 밀린 공사대금을 달라며 제기한 소송에서 이 씨의 변론을 맡은 건 전 법무부장관 출신의 변호사 A씨였습니다.

당시 이 씨는 일본에 거주한다는 이유로 국내 대리인을 내세웠는데, 바로 살해된 송 모 씨였습니다.

1년 뒤 이 씨가 아버지를 상대로 서울 종로구 재산을 넘기라며 낸 소송에서 A씨는 또다시 이 씨의 변호인으로 등장합니다.

이 씨의 대리인은 이번에도 송 모 씨, 문제는 이 씨 아버지의 재산 역시 송 씨가 대리인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인터뷰] 송씨 지인
(송00씨가 당시에 이00씨랑 이00씨 부녀를 모두 대리한 셈이 되나요?)
"그렇지, 맞죠."

그리고 아버지 이 씨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무변론으로 송 씨가 대리한 딸 이 씨가 승소해 송 씨가 대리한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넘겨받았습니다.

송 씨는 2년 뒤 같은 방식으로 딸 이 씨에게 소송을 제기했고, 역시 무변론으로 승소했습니다. 이 씨는 재판이 열린 사실조차 몰랐다고 주장합니다.

[인터뷰] 이모씨 / 이씨 딸
(송00와 이00씨는, 이00 사장님의 아버지 이00씨로부터 부동산을 샀다고 이야기 하는데, 그런 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송 씨가 이 씨 부녀를 동시에 대리하며 재판 결과를 조작해 재산을 가로챘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거물 변호사인 A씨를 선임해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A 변호사는 "이 씨의 이름은 기억하지만 오래전 일이라 대리인이 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檢, 재력가 송씨 아들 증거인멸 혐의 입건

 (조선일보  2014.07.17 14:13)

 1991~2006년 6월 금전출납장부 추가 확보…현직 국회의원 1명 적시

 

검찰이 피해자 송모(67)씨의 금전출납 장부인 '매일기록부'를 훼손한 혐의로 송씨의 아들을 입건해 조사하기로 했다.

또 송씨가 생전에 작성한 1991~2006년분 장부 1부도 추가 확보했다.

서울남부지검 관계자는 17일 기자들과 만나 "어제(16일)까지 참고인으로 조사했던 송씨의 아들에 대한 법리검토를 거쳐 오늘 중 증거인멸 혐의로 입건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검찰에 따르면 송씨의 아들은 경찰의 입회 하에 지난 3월4일 부친이 숨진 사무실의 책상 서랍에서 장부가 있음을 확인하고선 임의제출했다. 경찰은 당시 현장에서 장부 전체를 사본(寫本, 원본을 그대로 베껴 서류화)해 원본은 가족에게 그대로 돌려줬다.

이후 경찰은 6월19일 송씨의 아들로부터 장부를 다시 제출받아 7월2일에 반환했다.

장부에는 송씨가 수도권의 한 지검 A부부장 검사와 경찰관 5명, 살인교사 혐의를 받고 있는 김형식(44·구속) 서울시의회 의원과 현직 국회의원 1명, 법원·세무·구청 공무원 등에게 건넨 돈의 액수와 용도, 날짜 등 로비 정황이 담겨 있다.

송씨의 아들은 경찰로부터 장부를 돌려받아 검찰에 임의제출하기 직전인 7월 2~3일 사이에 화이트(수정액)으로 A검사를 비롯한 공무원의 상납 내역을 지웠다. A검사가 9차례에 등장하는 장부 끝에 붙어있던 2~3장의 별지도 찢어서 폐기했다.

송씨의 아들은 검찰 조사에서 "송씨가 생전에 친했던 A 검사를 비롯한 공무원들이 피해를 입을까봐 23회에 걸쳐 지웠다"고 진술했다.

이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피해자 유족이더라도 증거인멸한 행위에 대해서는 입건해 철저히 수사하는게 옳다고 판단했다"면서 "증거 인멸 과정에서 공모한 자가 있는지는 확인할 것"이라고 전했다.

검찰은 A 검사를 비롯한 수십명의 공무원들이 송씨의 아들에게 장부 내역을 삭제해줄 것을 부탁받았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수사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검찰은 경찰이 사건의 중요 단서인 것을 인지하고도 송씨의 아들로부터 장부를 압수하지 않은 경위에 대해서도 조사할 방침이다.

검찰 수사에 혼선을 초래한 서울경찰청과 강서경찰서간 수사 지휘과정에 문제점이 있었는지도 짚어볼 계획이다.

검찰 관계자는 "경찰이 중요 근거를 압수하지 않은 점은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다"면서 "경찰이 강력송치사건에 관한 일체 자료를 (진작에 넘겼더라면 이런 일은) 애시당초에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아울러 검찰은 지난 15일 오후 송씨의 사무실을 수색, 기존의 장부와 다른 장부 한 부도 발견·확보했다.

검찰 관계자는 "송씨 사무실 내 짐 더미 속에서 경찰이 발견하지 못한 새 장부를 찾아냈으며, 송씨의 가족 동의하에 임의제출받아 압수했다"고 말했다.

130장 분량의 이 장부는 1991년부터 2006년 7월 이전까지 송씨가 직접 볼펜으로 작성한 것으로, 기존의 장부와 같은 '매일기록부'라고 제목이 적혀있고 별지도 따로 정리돼 있다.

기존의 장부는 2006년 7월부터 살해되기 직전인 2014년 3월1일까지 기록돼 있다.

검찰 관계자는 "새 장부를 좀 더 분석해봐야 하지만 현재까지는 송씨가 가장 많은 돈 거래를 했다고 적힌 것은 김 의원(5억2000만원)이었다. 송씨와 이해관계가 많다는 것을 뜻한다"면서 "살인교사 혐의를 입증하는 정황증거는 충분히 될 수 있다"고 말했다.

TV조선 화면 캡처




 재력가 송씨 '매일기록부'에서 현직 국회의원 이름 발견…돈 거래 의심 정황도

 (조선일보  2014.07.17 14:41)

 

 피살된 재력가 송모(67)씨의 ‘매일기록부’에서 현직 국회의원 이름이 발견돼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 검찰은 송씨가 2006년 이전 작성한 또다른 장부도 확보했다.

서울남부지검은 17일 송씨의 금전출납부인 ‘매일기록부’에 현직 국회의원 A씨의 이름과 건넨 액수·용도 등으로 보이는 문구가 적혀있는 것을 발견해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장부엔 A의원의 이름과 200~300만원 대의 액수, ‘식사 대접’ 등의 용도가 적혀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외에도 이 장부엔 송씨가 2006년부터 지난 3월 숨지기 직전까지 돈을 건넨 공무원 및 정치인의 이름과 직함, 용도 등이 빼곡히 적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이 장부 뒤에 있는 별지엔 송씨에게 각각 5억여원과 2000만원 남짓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김형식 서울시의원과 B검사 등의 수수 내역이 시기별로 정리돼 있었다.

또 검찰은 해당 장부 외에도 송씨가 2006년 6월 이전에 작성한 다른 매일기록부를 추가로 발견했다고 밝혔다. 검찰에 따르면 송씨는 1991년부터 2006년 6월 전까지 이 장부에 금전 출납 내역을 작성했으며, 앞서 발견된 장부와 마찬가지로 맨 뒷 장에 별지 등도 첨부돼 있다고 검찰은 전했다. 검찰은 지난 15일 가족 입회 하에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 송씨의 사무실을 수색해 이 장부를 발견, 임의제출 형식으로 압수했다.

검찰 관계자는 “이 장부에 적힌 내용에 대해서는 공소 시효가 만료된 것도 있겠지만, 사안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에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검찰은 매일기록부의 일부 내용을 수정펜으로 지우고 별지 등을 훼손한 송씨의 아들 C씨를 증거인멸 혐의로 입건할 방침이라고 17일 밝혔다. C씨는 검찰 조사에서 장부 내용이 알려지면 아버지의 지인인 B검사 등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수정펜을 이용해 B검사 이름 등 총 23곳을 지웠다고 진술했다.

검찰 관계자는 “(장부에 이름이 있는) 공무원과 검사가 이 장부를 보면 결국 금품수수에 대한 형사 징계사건 증거로 쓰일 것이라는 걸 인식하고 훼손했다고 볼 수 있고, 본인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검찰은 C씨가 B검사 등의 이름을 지우는 과정에서 압박이 작용했는지 여부를 확인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