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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 미/여행정보

호주의 ‘파리’, 멜버른의 속살을 보다 (주간조선 [2287호] 2013.12.23)

호주의 ‘파리’, 멜버른의 속살을 보다

 

▲ ‘그레이트 오션 로드’의 예수 ‘12사도상’. 비와 바람, 파도의 끊임없는 침식을 받아 지금은 8개만 남아 있다.

 

호주 멜버른 도심 한복판에서 6인승 헬기에 몸을 실었다. 헬기는 굉음을 남기고 야라 강변을 떠났다. 인근의 높은 빌딩을 하나둘 제치더니 10분 만에 멜버른 도심을 벗어났다. 멜버른의 서쪽, 243㎞의 해안가를 따라 펼쳐지는 ‘그레이트 오션 로드’로 향하는 중이다. 헬기는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게 날았다. 구름과 땅의 중간, 새가 되어 땅을 굽어보는 기분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그레이트 오션 로드’는 경이로웠다. 구불거리는 해안선 모양을 따라 만든 자동차길은 그마저 자연의 일부처럼 보였다. 융단같이 펼쳐진 파란 바다, 부서지는 하얀 파도, 금빛 모래와 황토색 해식절벽, 땅 위 초록 나무의 조화는 가슴 뭉클할 만큼 아름다웠다. 명칭대로 ‘와! 그레이트(great)’ 감탄사를 불러냈다. 출발 직후에는 세찬 비바람이 불더니 이내 쨍쨍한 햇살을 드러냈다. 초겨울에서 한여름 날씨로 훌쩍 건너뛴다. 이게 멜버른이다. ‘one day four season’. 하루에 사계절이 존재하는 곳. 변화무쌍한 날씨에 따라 표정을 달리하는 그레이트 오션 로드는 꿈틀거리는 유기체처럼 보였다. 바람과 물과 시간이 빚어낸 대자연의 아득한 장관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언어화하기 힘들었다.
   
   50분 후 헬기는 ‘12사도상(12 apostles·바다 위에 솟아오른 12개의 바위가 예수의 12제자와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부근에 착륙했다. 바닷가에 띄엄띄엄 서 있는 황토색 바위 기둥은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다. 12사도상은 자연의 공격과 유구한 시간을 견뎌낸 결정체다. 사방에서 파도와 비, 바람의 침식을 받아 깎이고 또 깎인 후 남은 앙상한 바위 기둥. 원래 12개의 바위 기둥이 있었으나 하나둘 무너져 내려 현재 8개만 남아 있다. 쉼 없는 침식을 견뎌낸 시루떡 같은 퇴적층의 바위 기둥 8개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12사도상 부근에서 자동차로 10분 정도 달려 ‘로크 아드 고지(Loch ard gorge)’에 내렸다. 이 협곡에는 사랑하는 연인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1878년 이 부근을 지나던 ‘로크 아드’라는 배가 난파됐는데, 그중 젊은 두 연인만 살아남았다. 이름은 에바와 톰. 게시판 사진으로 볼 때 둘 다 선남선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두 사람은 필사적으로 헤엄쳐 나왔고, 협곡 사이 작은 동굴에서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버텼다. 절벽 아래로 내려가는 나무 계단이 있어서 바닷가 모래사장까지 내려갈 수 있다. 설탕보다 가는 모래는 밟을 때마다 발이 푹푹 빠졌다. 30m 높이의 퇴적층 해식절벽 위에는 낮은 활엽수가 빽빽하다. 바닷가 평평한 바위 위에는 에바와 톰처럼 죽음을 이겨낸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낙서로 빼곡하다.
   

▲ 하늘에서 내려다본 그레이트 오션 로드.


   이번 멜버른 방문은 호주정부관광청에서 개최하는 ‘드림타임’ 행사를 위해서였다. ‘드림타임’은 호주정부관광청에서 2년마다 개최하는 인센티브 이벤트로, 이번에는 한국, 미국, 인도, 캐나다,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 전 세계 12개국 22명의 미디어 관계자와 80여명의 바이어들이 초청됐다. 이번 개최지는 멜버른인데, 개최지는 경합을 통해 결정된다. 멜버른에 모여 공통행사를 한 후 국적별로 흩어져 호주 각 지역의 주요 명소와 숙박업소를 탐방하는 일정으로 이어진다. 한국 미디어 관계자는 주간조선이 유일했으며 롯데관광, 하나투어 비즈니스, 세중여행사, BCD트레블, 레드캡투어의 법인영업 담당자들이 바이어로 초청됐다. ‘드림타임’은 멀고 먼 옛날 호주에 원주민들이 평화롭게 살던 시대를 의미한다. 호주에서는 어딜 가든 원주민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흔적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멜버른은 어떤 도시일까. 시드니 하면 하버브리지나 오페라하우스가 떠오르지만, 멜버른 하면 딱 떠오르는 상징물이 없다. 호주를 좀 안다 싶은 사람들에게 물었을 때에도 같은 반응이었다. 커피, 와인, 문화, F1(포뮬러1 월드챔피언십), 12사도상, 야라밸리 등 다양한 키워드가 쏟아져 나왔지만 공통된 답은 거의 없었다. 12월 9일 행사 때 만난 멜버른 컨벤션뷰로의 카렌 볼링어(Karen Bolinger) 대표에게 “멜버른의 특징을 딱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에지 있는 도시”라고 표현했다. 이어서 “에클레틱(ecletic) 시티”라고 덧붙였다. 다양한 것을 포용해 녹여낸 도시. 문화와 자연이 녹아 있고, 원주민과 이주민이 녹아 있고, 예술과 스포츠가 녹아든 도시가 바로 멜버른이다.
   

▲ 연인 에바와 톰의 전설이 깃든 ‘로크 아드’ 협곡.


   떠나기 전 ‘빌 브라이슨의 대단한 호주 여행기’를 읽었다. 빌 브라이슨은 이 책에서 멜버른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멜버른에 가면 몹시 흥분된다.… 그곳은 전혀 딴판이었다. 나는 멜버른에서 북미보다는 유럽과 닮은 품위 있고 안정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아무런 의심이나 거리낌 없이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멜버른은 종종 시드니와 비교된다. 멜버른은 호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연방 수도가 캔버라로 이동하기 전인 1901년부터 27년간 수도로서 역할을 해 왔다. 화려한 근대문화를 이끌었던 흔적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었다. 시드니가 댄디한 미국 남성을 닮았다면, 멜버른은 격조 있는 영국 남성을 닮았다. ‘like a melbournian(멜버니언처럼)’이라는 말이 있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고 자유로우면서도 배려할 줄 아는 시민’이라는 멜버른 시민의 자부심이 담긴 말이다. 시드니라이더(시드니 사람들)는 멜버니언(멜버른 사람들)에게 ‘돈도 없으면서 잘난 척한다’고 비아냥거리고, 멜버니언은 시드니라이더를 ‘우아하지 않으면서 돈만 많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는 말도 들었다. 멜버른은 종종 ‘호주의 파리’에 비유된다. 호주에서 유일하게 트램이 다니는 곳이고, 트램을 타면 도시 곳곳의 품격 있는 골목길 문화를 누빌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 호주에서 예술가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도시가 바로 멜버른이다. 대형 오페라가 끊임없이 열리고, 뒷골목 어디에서나 라이브 재즈 공연이 열리는 곳, 연중 내내 크고 작은 축제가 끊이지 않기로도 유명하다. 12월 첫주에는 페더레이션 광장에서 독립예술가들의 수공예품 장터가 열렸다고 한다.
   

▲ 멜버른의 상징인 플린더스 스트리트역. 1854년에 지어졌다.


 

▲ 멜버른은 ‘호주의 파리’다. 골목길을 누벼야 진짜 멜버른이 보인다.

이번 일정에는 아쉽게도 걸어서 멜버른 시내 곳곳을 누빌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차에서 내다본 멜버른 시내에 대한 첫인상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멜버른은 한예슬이다.’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기만 하면 ‘그림이 되는’ 도시라는 의미다. 시상식장에서 영화배우 한예슬은 어느 각도에서 찍어도 ‘예술이다’라는 말이 카메라 기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하다. 도시 색채는 파리와 비슷했지만 절제된 차분함이 있었다. 불필요한 장식을 배제하면서 고풍스러움이 묻어났다. 이번 방문에서 24년째 멜버른에서 살고 있는 한국 동포 레이첼 리를 만났는데, 그는 한국인에게 멜버른의 매력이 덜 알려져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한국인들은 멜버른을 띄엄띄엄 알고 있다. 최근 5~10년 들어 부쩍 한국 여행객이 늘었지만 멜버른의 포장만 보고 간다. 알면 알수록 새록새록 좋아지는 곳이 바로 멜버른이다. 멜버른을 보기 위해서는 1주일도 부족하다. 2주 정도 골목 구석구석을 누벼야 멜버른의 진면목이 보인다. 멜버른은 살면서 즐기기 좋은 도시다.”
   
   멜버른은 미식가의 도시다. 멜버른 컨벤션뷰로의 관계자는 “멜버니언들은 커피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라고 말했다. 아프리카에서 그린빈을 직접 가져다가 스페셜 커피를 만드는 곳도 있고, 자기만의 노하우와 자신감을 가지고 간판도 달지 않은 채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멜버니언들은 이런 숨겨진 맛집을 보물 찾기 하듯 누비고 다닌다. 멜버른 지역 대표 일간지인 ‘디 에이지(the age)’의 요리 섹션신문인 ‘에피큐어’의 인기는 대단하다. 이 신문에서는 매년 ‘Good Food Guide’ ‘Good Bar Guide’ ‘Good Cafe Guide’를 발간한다. 레이첼 리는 “호주에서는 연예인보다 스타 셰프가 더 인기가 많다”고 말했다. 공식행사 첫째 날 호주의 국보급 요리사 가이 그로시(Guy Grossi)가 아침을 준비했는데, 그는 63℃로 익힌 계란반숙을 빵 위에 깨뜨려 먹는 요리를 선보였다. 리알토타워의 레스토랑 ‘뷔(VUE)’에서 마신 커피는 놀라웠다. 적당한 산미와 향미가 기막힌 조화를 이루었다. 호주에는 아메리카노가 없다. 에스프레소 잔에 뜨거운 물을 부은 커피를 ‘롱블랙’이라고 한다. 쇼트블랙은 에스프레소다.
   
   2014년 멜버른은 축제의 봄이다. 3월 첫주에는 푸드&와인 페스티벌이, 둘째 주에는 F1(포뮬러1)이 연이어 개최된다. 멜버른의 와인&페스티벌 담당자는 “비즈니스 이벤트로 멜버른을 찾을 경우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의 셰프를 초청해 골목길 하나를 통째로 막아놓고 진행하는 것도 가능하다”며 “기업과 단체의 많은 호응을 부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