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해제 MB5년]<19>김태호, 빗나간 PK發 세대교체
“金지사, 나이가?” 물었던 MB, 48세 총리 지명했지만…
2012년 7월 20일 새누리당 대선 경선 주자들이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국민공감경선 실천 서약식’에 참석해 서로 손을 엇갈려 맞잡고 있다. 왼쪽부터 김태호 의원, 박근혜 의원,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 경남지사 시절인 2009년 12월 낙동강 살리기 기공식에서 당시 이명박 대통령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 김태호는 이듬해인 2010년 8월 국무총리 후보로 전격 발탁됐지만 인사청문회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김태호는 올해 이 전 대통령 퇴임 후 와인을 들고 자택을 찾아가 인사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지사는 나이가 어떻게 되지?”
2010년 6월 18일 김영삼 전 대통령(YS) 기록전시관 준공식 참석을 위해 경남 거제로 향하는 마이크로버스 안. 이명박 대통령(MB)이 통로를 사이에 두고 옆 좌석에 앉아 있던 김태호 경남지사에게 뜬금없이 나이를 물었다. MB 정권의 중간평가 격이었던 6·2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패배한 직후였다.
김태호는 1962년생, 48세였다. 김태호가 나이를 얘기하자 MB는 또 이렇게 말했다. “김 지사도 실제로는 나이를 많이 먹은 거야.”
김태호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대신 속으로 생각했다. ‘세계적인 정치변화 속에서 내가 젊은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겠구나.’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1961년생,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1966년생이다.
두 달 뒤 MB는 48세의 김태호에게 내각을 맡기는 파격 인사(8·8 개각)를 전격 단행했다. 1971년 제3공화국 시절 당시 45세였던 김종필 민주공화당 부총재가 총리로 기용된 이후 39년 만에 40대 국무총리가 탄생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친박(親朴·친박근혜)계는 들끓기 시작했다. 박근혜 전 대표의 ‘대항마’를 키우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며 흥분했다. 한마디로 ‘박근혜 죽이기’라는 것이다. 김태호는 박근혜보다 열 살 적었다. 2012년 대선 때는 50세로, 차세대 주자로 내놓은 카드라고 의심할 만했다.
내심 김태호도 욕심이 생겼다. 2002년 최연소 기초단체장(경남 거창군수)에서 2006년 최연소 광역단체장(경남지사)으로 직행한 김태호였다. 총리만 제대로 해내면 2년 뒤 곧바로 대권에 도전할 수도 있겠다는 계산이 섰다.
하지만 정작 MB는 별 다른 설명이 없었다. 설명할 일도 아니었지만, 김태호도 물어보지 않았다.
다만 떠오르는 장면은 있었다. 8·8 개각 7개월 전인 그해 1월 6일, 김태호는 MB를 독대했다. 6·2 지방선거가 다가오고 있어 자신의 거취를 표명해야 했다.
김태호=“저, 3선 출마는 안 합니다.”
MB=“도지사 두 번 하고 그만두는 게 어디 있어!”
김태호=“도지사 두 번 했더니 머리가 텅 비어서 공부 좀 해야겠습니다.”
MB=“그래? (잠시 고민한 뒤) 잘 생각했어.”
김태호=“그나저나, 태호 출세했는데요.”
MB=“갑자기 또 무슨 얘기야?”
김태호=“소장수 아들이 대통령하고 독대까지 했으면 출세한 거죠. 하하하.”
MB=“끝까지 마무리 잘해. 근데 우리(정치)도 하여튼 바뀌어야 해.”
하지만 김태호는 MB의 의중을 제대로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아, 뭔가 나에게 기대를 갖고 있구나!’ 하는 정도로만 느꼈다.
도지사 임기가 끝난 그해 7월 4일, 이번에는 MB가 직접 전화를 걸었다. 북중미 3개국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뒤 곧바로 연락을 넣은 것이다.
MB=“청와대로 한 번 올라와.”
김태호=“죄송합니다. 빨리는 못 갑니다. 부모님, 장모님 모시고 백두산 가기로 일정이 잡혀 있습니다.”
MB=“(잠시 말이 없다가) 그럼 갔다 와서 전화해.”
김태호는 부랴부랴 백두산을 다녀온 뒤 그달 12일 청와대를 다시 찾았다. 이날도 MB는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기억에 남는 MB의 메시지는 하나였다. “준비 잘해!”
임태희 대통령실장도 MB가 김태호를 총리로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8·8개각 6일 전, 임태희는 김태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임태희=“대통령이 (여름)휴가를 가면서 ‘잘 챙기라’고 했는데, 어느 부처에 갈 거야?”
김태호=“형님,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대통령께서 어느 부처에서 일하라고 하시면 최선을 다하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임태희=“….”
임태희는 당황했다. MB가 김태호에게 입각 언질을 주면서 정부 부처를 말하지 않았다면 도대체 어떤 자리를 맡긴다는 것인가. 임태희는 부랴부랴 MB의 의중을 알아봤다. 그러곤 3일 뒤 김태호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로 급하게 불러냈다.
임태희=“대통령께서 총리를 하라고 하시는데….”
김태호=“(제 능력으로는) 하기 힘듭니다.”
임태희=“이 사람아, 못 한다고 하면 어떻게 해.”
김태호=“그러면, 형님이 총리라고 생각하고 저를 전폭적으로 도와준다고 약속해 주세요.”
임태희=“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당시 여권은 두 달 전 6·2지방선거에서의 사실상 참패로 말 그대로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텃밭인 경남에서 무소속 김두관 후보가 당선되는 등 민심이반이 뚜렷했다. 한나라당 정몽준 대표와 정정길 대통령실장이 사퇴했고, 6월 국회에서 세종시 수정안이 부결되자 정운찬 총리까지 사의를 표명한 상황이었다.
박형준 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의 기억. “대통령은 지방선거에서 패배한 뒤 젊은 세대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젊은 리더그룹을 발탁하는 것이 좋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김 지사는 젊고 행정경험도 있고, 정치적 감각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대통령이 (7월 12일) 따로 면담을 한 것이다.”
한마디로 ‘세대교체’를 염두에 뒀다는 얘기였다. 비슷한 시기 청와대 개편에서도 54세 동갑내기인 임태희 고용노동부 장관과 백용호 국세청장이 각각 대통령실장과 정책실장으로 발탁됐고, 한나라당에선 46세의 원희룡 의원이 사무총장으로 기용됐다. MB는 김태호를 총리로 지명함으로써 당정청의 세대교체 그림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임태희는 이렇게 설명했다. “나도 김 지사의 (총리) 발탁을 미리 알지 못했다. 그런데 나중에 대통령이 나에게 했던 말이 있다. 대선 때 틀림없이 민주당에서 부산·경남(PK) 출신의 후보가 나올 텐데, 그렇게 되면 (대구·경북 출신인) 박근혜 전 대표가 당의 대선후보가 되더라도 PK가 돌아설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래에 (PK의) 기대를 모을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 줘야 PK가 갈라지는 것에 대응할 수 있지 않느냐고 했다.”
MB에게 김태호는 ‘박근혜 대항마’라기보다는 세대교체를 이룰 수 있는 ‘PK발(發) 기대주’라는 것이다.
MB정부 초대 대통령실장을 지낸 류우익의 증언도 일치한다. 류우익은 주중대사 시절 김태호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김태호가 총리 후보자를 사퇴하고 중국에 머물며 심신을 달래고 있을 때였다. 류우익은 MB의 의중을 이렇게 전했다. “대통령은 김 지사가 총리로 거론되기 전부터 세대교체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한국 정치가 이대로 가면 한 발짝도 변화를 가져올 수 없고, 세대교체로 미래에 대한 변화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임기 내내 말이 많았던 MB의 ‘탈(脫)여의도’도 사실 정치 자체에 대한 혐오감의 표현이라기보다 새 정치에 대한 갈망, 그리고 그런 갈망이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데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MB는 퇴임을 앞둔 2013년 2월 14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도 속내를 털어놨다. “정치 혐오 그런 것은 아니고, 나는 정치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가 호남을 대표하는 민주당, 영남을 대표하는 여당 이런 게 얽혀서….”
MB는 ‘YS식 세대교체 바람’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1995년 10월, YS는 일본의 니혼게이자이신문과 인터뷰를 하면서 “(차기 대선에서는) 깜짝 놀랄 만한 세대교체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YS의 이 한마디로 정가의 시선은 온통 47세의 이인제 당시 경기지사에게 쏠렸다. MB도 그때 초선의원이었다. 그 역시 야망을 품고 정계에 입문했던 터라 YS의 ‘깜짝 놀랄 만한 젊은 후보’ 발언과 그 파장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YS의 세대교체 발언도 집권 3년차, 그러니까 임기가 반환점을 돌 무렵 터져 나왔고 MB의 ‘김태호 카드’도 비슷한 시기에 불거져 나왔다.
하지만 MB식 세대교체 실험은 채 한 달을 버티지 못했다. 김태호는 48세의 패기를 앞세웠지만 국회 인사청문회의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21일 만에 손을 들고 말았다. 너무 무모한 실험이었던 것일까.
김태호 자신도 비슷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최근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당시 우기면서 고(Go) 했으면 할 수도 있었겠지만 돌이켜보니 민폐를 많이 끼쳤을 것 같다. 그리고 공중에 붕 떠서 정치가다운 역할도 못하고 그만뒀을 수 있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고 털어놨다.
김태호는 자진사퇴하기 며칠 전 서울 삼청동 인근에서 임태희를 만났다. “이번 토요일(8월 29일)에 사퇴할 겁니다. 지금 이후로는 어른(MB) 전화도 받지 않겠습니다.”
MB도 김태호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MB는 며칠 전 박근혜와 청와대 오찬 회동을 하고 ‘이명박 정부의 성공과 정권 재창출’에 합의한 상태였다.
[비밀해제 MB5년]<18>TK에 告함!
(동아일보 2013-08-03 08:03:43)
주류TK와 서먹한 MB “대구는 분지라 폐쇄적인게 문제”
2009년 9월 경북 포항시 죽도시장을 방문해 어릴 적 아이스케키 장사의 추억을 떠올리는 이명박 대통령. 가난해서 아이스케키를 팔아야 했고, 상고 야간부를 다녀야 했던 MB가 자신을 ‘TK’라고 생각했을까? 1987년 김진현 동아일보 논설위원실장이 처음 사용한 ‘TK’라는 말은 단지 대구·경북의 영문 이니셜이 아니었다. 그건 ‘끼리끼리 문화’의 약자였다.
《한나라당 홍준표 최고위원, “부산이 지역구인 서병수 의원이 과학벨트가 충천권에 가야 한다고 세게 발언하던데 좀 이상하지 않나? 박근혜 대표가 시킨 것 아니겠느냐. 대구도 과학벨트를 노리지만 대구는 어차피 자기를 찍을 테니까 충청권 표를 얻기 위해 서병수를 시켜 떠들게 했을 가능성이 많다.”(2011년 1월 한나라당 출입기자 정보보고)》
“이명박(MB) 대통령의 몸에는 대구·경북(TK)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이상득(SD) 의원은 2011년 4월 8일 대구·경북 지역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런 말까지 했다. 일주일쯤 전 정부가 ‘동남권 신공항’ 건설 방침을 백지화한 이후 TK 지역 언론이 연일 ‘배신’ 운운하며 들끓자 답답해서 내뱉은 말이었다.
“이 대통령의 약점은 대구·경북 사람들이 대통령을 고향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동생이기는 하지만 불쌍하고 가련할 때가 많다.”
며칠 뒤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로부터 “대통령에게는 대한민국의 피가 흘러야 한다”는 핀잔을 듣긴 했지만 SD는 동생을 위해 동정표라도 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답답하기로 치자면 MB가 더했다.
1년쯤 전인 2010년 3월 1일. 이날 아침 청와대에 배달된 경북일보엔 ‘靑, 세종시 관련 대구·경북 언론논조 불만 많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런데 이 기사는 다음 날부터 이동관 홍보수석비서관의 ‘TK 놈들’ 발언 파문으로 비화됐다. 기사 내용 중에 이동관이 전날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대화 도중 “TK 놈들, 정말 문제 많다. 이건 기사로 써도 좋다”고 말했다는 대목이 들어 있었다. 이동관이 “대구·경북 지역에서 ‘역차별’ 운운하며 다른 지역보다 (대통령의 세종시 정책에) 더 반대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대통령이 대구·경북에 대해 얼마나 신경을 쓰는데 그렇게 하느냐”며 그런 막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동관은 또 “(대구) 첨단의료복합단지 같은 경우도 이 대통령이 챙겨주지 않았으면 선정되지 못했을 프로젝트”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일찍부터 의료기기 클러스터를 준비해온 강원 원주시까지 제치고 대구가 첨단의료복합단지에 선정됐을 때부터 특혜 논란이 많았는데, 이동관이 그걸 확인해준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동관의 ‘입’이 정국에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있던 때였다.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MB가 ‘(국민투표 같은) 중대 결심’을 할 수도 있다고 발언해 여야가 발칵 뒤집힌 것도 바로 그때였다.
‘TK 놈들, 정말 문제 많다’는 보도는,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도 ‘S라인(MB의 서울시 인맥)’도 아닌 이동관을 코너로 몰았다. 이동관은 이동관대로 “(TK 놈들이라는 보도는) 명백한 오보”라며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예민한 문제였다.
경북 영일 출신으로 MB와 동향일 뿐 아니라 포항 동지상고 후배인 한나라당 이병석 의원(현 국회부의장)과 경북 울진 출신인 주호영 특임장관(현 새누리당 의원)이 이동관에게 전화를 걸어 “(너무 강경하게 나가지 말고) 좋게 넘어가라”고 조언했다. 두 사람만 해도 경북고 중심의 이른바 ‘TK 주류’는 아니었지만 지역구 의원에게 지역 언론은 ‘갑(甲)’이었다. 하지만 한 번 치솟은 불길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강재섭이 빠진 대구에서 ‘TK 좌장’을 꿈꾸던 친박(친박근혜)계 이한구 의원은 라디오에 출연해 “머슴이 주인을 욕한 격”이라며 이동관의 즉각 사퇴를 주장했다. 표면적으로는 “주인인 국민을 욕하고 덤벼들었다”는 말이었지만 뉘앙스는 좀 묘했다. ‘MB 정권의 주인은 TK’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 듯한 어투였다. 그사이 이동관의 ‘TK 놈들’ 발언은 사실처럼 굳어져 갔다.
이한구와 마찬가지로 경북고 출신의 TK인 권재진 민정수석비서관까지 나서 “(그런 표현을 쓴 것이) 사실 아니냐?”고 되물었다. 의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동관은 급기야 술자리에서 권재진에게 “내가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지만 정말 TK들은 안 되겠군요”라고 말할 만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동관의 증언. “발언 당시 기자가 20명쯤 있었는데 경북일보 기자는 멀리 앉아 있었다. 그날은 정말 마음먹고 대구·경북 지역 언론보도의 논조를 지적하려고 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생각을 가다듬어 가면서 얘기해 나갔다. 그런 상황이었는데 내가 ‘TK 놈들’이라는 표현을 썼겠느냐? 누군가가 ‘TK 언론’이라는 말을 잘못 들은 거다.”(*기자도 경상도 출신인데, 그와 당시 얘기를 나누던 중 어느 순간엔 이동관의 ‘TK 언론’이라는 발음이 ‘TK 놈들’이란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이동관은 경북일보를 상대로 5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경북일보 사장이 찾아왔으나 이동관은 “대통령의 고향 신문이라고 제멋대로 쓰는 건 못 참는다”며 강경한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야당은 이동관의 소송까지 문제 삼았다.
정작 MB의 반응은 한나라당의 TK 의원들이나 청와대 TK 참모들과 달랐다. 처음엔 MB도 경북일보 보도를 ‘사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MB=“(웃으며) 내가 이 수석을 몰라? TK 놈들이라고 했겠지 뭐….”
이동관=“(정색을 하고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그런데 제가 TK 놈들이라고 했겠습니까?”
MB=“알았어. 그러게 뭐 하러 (하필이면 TK 언론에) 그런 얘기를 해. 여하튼 TK는 조심해!”
사실 MB는 굳이 비유하자면 ‘변방 TK’였다.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노태우 대통령 때까지 30년간 권력을 향유한 소위 ‘TK 주류’에 비하면 TK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비주류였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 때 TK가 선택한 후보도 MB가 아니라 박근혜였다.
특히 대구 지역 당원 및 대의원 투표에서 MB는 2305표를 얻어 박근혜(5072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대선 본선에선 물론 압도적인 득표를 했지만 전북 출신에 ‘헌정 사상 최약체 여당 후보’였던 정동영과의 대결이었기 때문에 그건 별 의미가 없었다. PK(부산·경남) 출신의 한 친이(친이명박) 핵심 인사는 “경선 때 MB는 대구에서 철저히 비주류로 취급받았다. 그게 쉽게 잊히겠느냐”고 회고했다.
지역 언론의 시선도 비슷했다.
“제대로 된 TK 출신이 아닌 이명박 대통령이 TK를 너무 홀대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 대통령은 자신을 TK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대구·경북) 시도민은 수도권과 더 정서적 친밀감이 있다고 여긴다. 정치권에서도 TK 정권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란이 있을 정도다. 이한구 의원은 ‘현 정권을 TK 정권으로 볼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2010년 7월 16일 경북일보)
‘이 대통령은 자신을 TK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이라는 전제가 맞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MB에 대해 ‘수도권과 더 정서적 친밀감이 있다고 여긴다’고 분석한 대목은 비교적 정확해 보인다.
2008년 취임 직후 치러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수도권(서울, 인천, 경기) 지역구 111곳 중 81곳에서 승리를 거두자 MB는 “이제 한나라당은 (영남당이 아니라) 수도권 정당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선언했다. 엔도르핀이 솟는 표정이었다. 서울에서는 전체 48개 지역구 중 40곳을 차지하는 대역전이었다. 전통적으로 야당이 강세를 보여온 수도권에서 한나라당이 압승을 거둔 배경엔 분명 ‘MB 효과’가 있었다.
경북일보의 ‘이동관, TK 놈들 발언’ 보도가 나온 지 며칠 뒤 MB는 대구를 방문했다. 대구시청과 경북도청의 2010 업무보고 자리였다.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서두는 그렇게 꺼냈지만 MB는 작심한 듯 TK를 질타했다. “근래에 세종시가 되면 대구·경북이 어려워진다, 손해를 본다는 말이 있다. 대구·경북이 지난 10년, 15년 동안 불이익을 당했다고 할지 모르지만 머릿속에 정치적 계산은 버리고 오로지 어떻게 지역을 발전시킬 것인가만 생각해라. 대구가 분지(盆地) 생각에 제한돼 있고, 그 안에서 네 편, 내 편 가르면 어떻게 발전하겠느냐. 내 이야기를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말아 달라.”
분지적 사고(盆地的 思考). MB는 TK가 화제에 오를 때마다 이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퇴임 직전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하는 자리에서도 MB는 “대구 이런 곳은 분지잖아요? 닫혀 있어서 외부 문물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부산이나 인천에 비해 느릴 수밖에 없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분지나 내륙 도시의 폐쇄성, 보수성에 관한 일반적인 지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더구나 MB처럼 젊을 때부터 세계를 무대로 뛰어다닌 사람들 중엔 이런 유(類)의 ‘지리적 특질고(特質考)’를 인용하는 경우가 그리 드물지는 않다. MB 스스로도 ‘정치적 해석’을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정말 그뿐이었을까?
앞서 인용한 PK 출신 친이 핵심 인사의 증언은 좀 다르다. “사실 MB가 분지적 사고를 언급한 것은 TK뿐만 아니라 (계파 정치와 대선 득표 전략에 매몰돼 세종시 문제 같은 국가적 과제조차 편 가르기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한 답답함도 깔려 있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만 해도 MB는 박 전 대표를 지지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 생각의 끝에서 나온 카드일까. MB는 석 달여 뒤 세종시 수정안이 결국 좌절되자 PK 출신의 40대 국무총리를 깜짝 발탁한다.
[비밀해제 MB5년]<17>MB와 중동 형제들
(동아일보 2013-08-03 08:04:13)
“그대 눈 안에 머물고 싶으니” MB가 시를 읊조리자…
이명박 대통령(MB)이 2010년 5월 25일 청와대를 방문한 아랍에미리트(UAE)의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나하얀 아부다비 왕세자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현대건설 시절 만들어진 MB의 ‘중동 DNA’는 UAE 원전과 유전 사업을 만나면서 다시 깨어났다.
‘그대 눈 안에 머물고 싶으니 눈물을 흘리지 마오./그러면 내가 머물 수 없으니….’
2009년 11월 초 청와대 본관 집무실. 이명박 대통령(MB)은 시구가 적힌 노트를 다시 꺼내 들었다. 아랍에미리트(UAE)의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나하얀 아부다비 왕세자가 젊은 시절 썼다는 시다. 서울시장 시절, 왕세자의 호감을 사 아부다비와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아랍어 전문가에게 번역하도록 한 것이다. 당시 왕세자는 “내가 시인 지망생이었던 사실을 어떻게 알았느냐”며 MB에게 왕실 가족들을 소개시킬 정도로 감동했다고 한다.
MB가 이 시구를 다시 떠올린 건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의 보고를 받은 직후였다. MB는 임기 초부터 아부다비의 실권자인 무함마드 왕세자가 총괄하는 UAE 바라카 원자력발전소 건설 프로젝트를 유심히 지켜봤다. 유명환에게 입찰 상황을 수시로 보고토록 했다. 하지만 유명환이 보고해온 무함마드 왕세자의 말은 “프랑스에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중동만큼은 현대건설 시절부터 양고기와 ‘모래밥’을 먹어가며 잔뼈가 굵은 곳이었다. 당장 왕세자에게 전화를 넣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왕세자는 받지 않았다. 두 차례 더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청와대 참모들은 급기야 MB를 말렸다.
참모 A 씨=“대통령님. 이렇게 여러 번 전화를 거시는 건 외교 프로토콜(의전)에 맞지 않습니다.”
MB=“이 사람아. 지금 수십 년 먹을거리가 날아갈 판인데 프로토콜이 뭐가 대수야. 계속 전화 돌려!”
청와대 참모들이 전화통에 매달린 지 이틀 만에 왕세자와 전화가 연결됐다. 왕세자의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MB=“외교통상부 장관의 보고를 받아서 상황은 알고 있습니다. 프랑스로 결정하시더라도 우리 실무진을 한번 만나줄 수 없겠습니까?”
왕세자=“원전 사업은 이미 결론이 났는데요.”
MB=“한국은 진심으로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왕세자=“정 그러시다면 일단 사람들을 보내 보세요.”
한숨 돌린 MB는 참모들을 긴급 소집했다. 그동안 뭐가 문제였는지, UAE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를 알아야 했다, MB가 밤늦게까지 참모들을 ‘조사’한 결과, UAE가 원전 사업을 넘어 형제국으로서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원하고 있었는데 우리 측이 이에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MB는 당장 참모들에게 원전 사업을 고리로 국방, 의료, 정보기술(IT) 등 주요 분야에서 포괄적인 경제협력 방안을 마련할 것을 지시한다. 동시에 MB는 비공식적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중동 특유의 정서를 파고들었다. 무함마드 왕세자가 미국 밴더빌트대에서 머문 적이 있다는 점에 착안해 당시 정부 고위 관료 중 밴더빌트대 출신을 급히 모았다. 밴더빌트대 경제학 박사인 이용걸 당시 국방부 차관(현 방위사업청장)이 MB 특사로 UAE를 방문한 데에도 이런 배경이 있었다.
MB는 이용걸로부터 ‘무함마드 왕세자가 생각을 바꿀 수도 있다’는 보고를 받고 그야말로 전방위 압박에 들어갔다. 한승수 전 국무총리, 최경환 지식경제부 장관(현 새누리당 원내대표), 현오석 한국개발연구원장(현 경제부총리) 등으로 특사단을 꾸려 그해 11월 18일 비밀리에 UAE에 보냈다. 그야말로 특급팀이었다. 특사단은 왕세자에게 “원전 사업은 100년을 가는 만큼 한국이 사업자로 선정되면 수십 개 분야에서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MB의 메시지를 거듭 전했다.
MB와 한국 정부의 압박에 무함마드 왕세자도 서서히 움직였다. MB는 몇 차례 더 전화를 한 끝에 그해 12월 중순 왕세자의 전화를 받는다.
“UAE를 직접 방문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MB는 즉각 참모들에게 UAE 출장 준비를 지시한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2009년 12월 26일 MB는 1박 2일짜리 ‘원 포인트’ 외유에 나섰다. 처음에는 전화도 받지 않던 무함마드 왕세자는 직접 공항에 마중을 나오더니 MB를 자신의 전용차에 태웠다.
왕세자=“내일 저녁에 (선친을 모신) ‘그랜드 모스크’에 가시지 않겠습니까?”
MB=“그럼요. 그리고 포괄적 협력 방안과 관련해 우리 특전사를 보내 아부다비 왕실 경호원들을 훈련시켜 드리겠습니다.”
왕세자=“정말입니까?”
UAE를 비롯해 카타르, 쿠웨이트는 걸프 만 지역의 강국 이란에 대해 오랫동안 경계를 해왔다. 바로 그 점을 파고든 ‘히든카드’였다. 그러면서 왕세자도 기억이 가물가물했을, 청년 시절에 썼던 그 시를 다시 인용했다.
UAE는 왕정 국가. MB에게 마음이 끌린 무함마드 왕세자의 아부다비는 다음 날인 2009년 12월 27일 UAE 원자력공사(ENEC)를 통해 한국전력 컨소시엄을 400억 달러 규모의 바라카 원전 건설의 최종 사업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아부다비 현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국운이 따랐다”며 기뻐하던 MB는 원전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중동은 MB의 ‘기업가 DNA’를 다시 일깨웠다.
2010년 1월 초, MB는 핵심 측근인 곽승준 대통령직속미래기획위원장을 불렀다.
MB=“UAE와 포괄적으로 사업을 하기로 했잖아. 다음엔 유전이다.”
곽승준=“아니 대통령님, 원전은 우리가 기술이라도 있지만 유전은 채굴 기술도 없는데요.”
MB=“UAE에 매장된 석유만 1000억 배럴이야. 세계 6위라고. 그게 대부분 아부다비에 있어. 빨리 태스크포스(TF) 꾸려서 검토 들어가.”
일단 부딪치고 보는 MB 스타일을 누구보다 잘 아는 곽승준은 더이상 설득하지 않았다. 곽승준은 비공식 접촉이 많고 부적절한 로비 논란에 휩싸일 수 있는 자원외교 특성상 TF 팀원 전원을 관료로 충원했다. 심지어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실에서 파견 근무하던 검사도 넣었다. 곽승준은 TF를 꾸린 뒤 박수민 미래위 총괄기획국장과 함께 아부다비에 유전사업을 타진했다. 그러나 몇 개월 전 원전 때와는 달랐다. 아부다비의 반응은 싸늘하다 못해 냉담했다.
곽승준의 회고. “세계 77위에 불과한 채굴 실력으로 미국 영국 등 메이저 석유 업체들만 들어와 있는 UAE 유전시장에 어떻게 발을 붙이려 하느냐는 식이었다. 처음에는 비아냥거리는 수준이었다.”
다시 MB가 나섰다. 일단 곽승준을 보내 친서를 전달했다. ‘석유 비즈니스가 아니라 전략적 협력자로서 한국을 봐 달라. 우리는 원전 사업으로 이제 형제국이 된 것 아니냐.’
하지만 무함마드 왕세자도 유전사업만큼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곽승준의 UAE행은 잦아졌고 그때마다 비슷한 내용의 친서는 끊임없이 전달됐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한 번 기회가 왔다. 2010년 5월 왕세자가 한-UAE 수교 30주년을 맞아 방한하기로 한 것. 무함마드 왕세자는 아부다비의 실력자지만 대통령은 아니었다. 그래도 MB는 왕세자를 ‘정상’으로 파격 예우했다. 청와대에서 왕세자를 위한 만찬을 열기 전 좌석을 상대방을 서로 일직선으로 마주보고 앉는 아랍식으로 배치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왕세자의 마음도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왕세자가 귀국한 뒤 아부다비 석유공사(ADNOC)는 한국석유공사 측에 아부다비 3개 주요 유전 광구에 대한 데이터를 건넸다. “채굴 능력이 있는지 한번 테스트해 보겠다”는 사인이었다. “너희가 유전을 아느냐”는 기존 반응과는 확연히 온도 차가 있었다. 곽승준은 가속페달을 밟았다. 아부다비를 방문하는 것은 물론이고 왕세자 측근들을 초청해 서울 인근에서 스키를 함께 타며 설득에 나섰다. 특히 MB는 마지막 친서에서 왕세자를 이렇게 설득한다.
“한국은 석유가 한 방울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산업화 경험이 있다. 아무것도 없이 조선, 반도체, 자동차 분야에서 세계적 노하우를 갖추고 있다. 진정한 형제국이 되면 이걸 아부다비에 전수해줄 수 있지 않겠는가?”
무함마드 왕세자가 UAE의 미래를 위해 석유사업 외에 조선, 반도체 분야 등에 오일 머니를 집중 투자하고 있다는 점을 파고든 것이다. UAE는 당시까지 이 분야의 노하우 전수를 위해 미국, 유럽 국가 기업들을 접촉했지만 핵심을 전수받는 데는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게임은 끝났다. 한국석유공사는 2010년 8월 아부다비 3개 주요 광구 독점 개발권을 따낸 데 이어 2011년 3월에는 최소 10억 배럴 이상의 원유 채굴권 계약을 할 수 있는 양해각서(MOU)도 체결했다. 도무지 열릴 것 같지 않던 중동의 유전 채굴권이 처음으로 한국에 열리는 순간이었다.
2012년 초, 무함마드 왕세자는 인사차 아부다비를 방문한 곽승준에게 이렇게 말했다.
“친구여(My Friend), 이제 우리 가족과 당신들은 형제다. 이를 미스터 프레지던트에게도 전해 달라.”
MB는 2012년 11월, 임기 중 마지막 해외순방지로 아부다비를 택했다. 다시 만난 무함마드 왕세자는 수행단과 오찬을 하려는 MB에게 “주로 우리 형제들과 먹는 것”이라며 아부다비 왕실 전용 양고기를 보내주었다. MB는 “이게 바로 중동 스타일”이라며 접시에 놓인 양고기를 싹 비웠다. ‘형제’에 대한 각자의 감사 표시였다.
[비밀해제 MB5년]<16>‘이건희 한마디’를 어찌하랴
(동아일보 2013-08-03 08:04:38)
참모들 “李낙제 발언 경고해야”… 정작 MB는 미적지근
2011년 7월 ‘2018 겨울올림픽’ 평창 유치가 확정되자 이명박 대통령(왼쪽)은 청와대에서 유치 관계자들을 격려하는 만찬을 베풀었다. 일등공신 중 한 사람인 삼성 이건희 회장(왼쪽에서 두 번째)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삼성 비자금’ 특검 수사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던 이건희는 2009년 12월 이른바 ‘원 포인트’ 특별사면을 받은 뒤 이듬해 2월 IOC 위원으로 복귀했고, 3월엔 삼성전자 회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 정운찬 전 동반성장위원장. “사실 초과이익공유제는 바로 그(이건희 회장)가 이끄는 재벌기업의 경영 기법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기업은 초과이익을 임직원에게 나눠 주는 제도를 이미 운용하고 있었다.”(저서 '미래를 위한 선택, 동반성장') 》
이명박(MB) 정부의 임기 4년차인 2011년 3월, 한나라당 부설 여의도연구소 실무자들은 냉가슴 앓듯 속만 끓이고 있었다.
4·27 재·보궐선거의 격전지인 강원도지사, 경기 성남 분당을, 경남 김해을에서 여론조사를 해 봤더니 ‘0 대 3 참패’라는 결과가 나왔다. 2010년 6·2 지방선거 패배에 이어 ‘미니 총선’이라고 불린 4·27 재·보궐선거에서까지 지고 나면 MB 정권의 레임덕은 불을 보듯 뻔했다. 충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심층 면접 조사(FGI)를 했더니 ‘한나라당은 거의 존재하지 않아야 할 정당’이라는 민심까지 드러났다. 여의도연구소는 한 달이나 보고서를 움켜쥐고 있다가 선거가 임박해서야 당 지도부에 보고했다.
사실 새해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2010년은 천안함 사건과 6·2 지방선거 패배, 세종시 수정안 부결 사태와 유럽발 재정위기가 있었지만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도 국가신용등급이 올라가고 서울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도 성공적으로 치러 내면서 ‘다시 해보자’는 열의까지 느껴졌다.
1월 24일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MB와 30대 그룹 총수 간의 간담회도 마련됐다. 간담회 직후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기자들에게 “전체적으로 산뜻한 한 해의 출발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론조사를 해 보니 수면 아래 민심의 바다에는 냉수대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무렵,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이른바 ‘낙제점 발언’이 터져 나왔다.
3월 10일 저녁 서울 남산 하얏트호텔.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호텔에 들어서던 이 회장을 향해 기자들이 질문을 쏟아 냈다.
기자=회장님, 현 정부의 경제 성적에 몇 점 정도를 주시겠습니까?
이건희=과거 10년에 비해 상당한 성장을 했으니….
기자=흡족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이건희=흡족하다기보다는 낙제는 아닌 것 같다.
이건희는 또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의 ‘초과이익 공유제’에 대해서도 한마디했다.
“사회주의에서 쓰는 말인지, 자본주의에서 쓰는 말인지, 공산주의에서 쓰는 말인지 모르겠다.”
다음 날 MB 주재 대통령수석비서관 회의. 김두우 기획관리실장이 나섰다. ‘왕실장’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MB의 신뢰를 얻고 있던 때다.
김두우=이건 그냥 넘어가면 안 됩니다. 그냥 넘어가면 앞으로 (우리가) 못 견딥니다.
임태희(대통령실장)=삼성 쪽에서 (발언의 진의가 잘못 전달됐다고) 설명을 해 왔습니다.
MB=….
김두우가 문제 삼은 건 ‘공산주의 발언’이 아니라 ‘낙제점 발언’, 더 정확히 말하면 ‘면(免) 낙제 발언’이다.
김두우는 MB에게 두 번, 세 번 ‘이건희 경고’를 주장했다. 그동안 김두우와 의견 충돌이 적지 않았던 이동관 언론특보도 ‘이건희 발언’ 건에 관한 한 경고론자의 편에 섰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MB의 반응은 이상하게도 미적지근했다. 이동관은 ‘아마 사위를 통해서 얘기가 온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삼성전자 해외법무 담당 상무로 있던 이상주(현 해외법무팀장·전무)가 MB의 큰사위였다.
김두우의 직감도 이동관과 같았다. 그는 MB에게 ‘이건희 경고’를 거듭 건의하는 한편 삼성그룹 전체의 대외 창구인 장충기 삼성 미래전략실 커뮤니케이션 팀장(사장·현 미래전략실 실차장)과 MBC 출신인 이인용 삼성전자 커뮤니케이션 팀장(부사장·현 사장)을 만났다.
김두우는 단도직입적으로 “(삼성이) 각본을 짜고 던진 말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두 사람이 부인하자 그는 “그럼 혼네(일본말로 진심) 아니냐?”고 다그쳤다. 김두우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도 사위를 앞세워 그냥 넘어가려고 하면 좌시하지 않겠다.”
장충기와 이인용의 증언은 좀 다르다. 먼저 장충기의 기억.
“김두우는 그때 딱 한번 만났을 뿐이다. 대통령 앞에서는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한테 그렇게 얘기하지는 않았다.”
이인용도 비슷하다. “김두우와는 학번(76)도 같고 기자 시절부터 알고 지냈지만 그런 얘기를 나눌 사이는 아니다.”
장충기는 특히 “회장님은 대놓고 칭찬을 잘 안 하시는 분이다. 회장님이 만약 우리한테 ‘낙제점은 면했네…’라고 말씀하시면 삼성 사장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거다. 그 발언은 ‘100% 만족은 못하지만 웬만큼 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그럼 정작 MB는 ‘이건희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역시 증언이 좀 엇갈린다. 곽승준 전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장(장관급)은 “대통령은 별다른 반응을 안 보이셨다. 오히려 경제수석이나 경제 관료들이 난리를 쳤지…. 대통령이 아무래도 (민간기업인 현대건설 CEO라는) ‘을’의 처지에서 오래 살다 보니 그런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MB 정부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내고 대통령 직속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과 대통령경제특보를 거쳐 그즈음 KDB산은금융지주 회장으로 옮긴 강만수의 기억은 정반대다. “내가 (대통령을) 뵈었을 때는 분명히 불쾌해 하셨다.”
이동관의 분석이 설득력 있다. “방법이 없었다.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삼성이 해명을 하도록 만드는 것밖에 없었다. 평창 겨울올림픽도 걸려 있고, 삼성전자가 아니면 경제가 안 되는 판인데 어쩌겠느냐.”
권력과 재벌의 위상 변화를 새삼 느끼게 해 주는 말이다.
이건희는 김영삼(YS) 정부 때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고 발언해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YS는 분노했고, 대통령의 분노는 곧 ‘응징’으로 이어졌다. 윤증현의 증언. “내가 그때 국장이었는데 대통령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삼성에 대한 신규 대출은 즉각 중단됐고…. 하여튼 삼성이 혼이 났다.”
김두우가 이건희 발언에 대해 ‘각본’ 아니냐고 의심한 것도 그런 전력 때문인지 모른다.
여하튼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윤증현이 나섰다. 기재부 간부들은 ‘즉각 경고’를 주장했지만 그는 3월 14일 국회 답변 형식을 통해 강하게 유감을 표명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회장이) 어떻게 그런 인식을 가졌는지 안타깝고 서글프다. 과연 낙제점을 면할 정도의 경제정책을 펴는 나라에서 어떻게 글로벌 기업이 탄생할 수 있었는지 답을 해 줬으면 좋겠다.”
삼성도 ‘비공식 해명’으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삼성은 윤증현의 국회 발언 이틀 뒤인 16일 김순택 미래전략실장(부회장)이 수요 사장단 회의에서 ‘회장님의 진의’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공개 해명했다. 그래도 청와대의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자 이건희는 31일 ‘2011 스포츠 어코드’ 행사 참석차 런던으로 출국하기에 앞서 직접 해명했다. “그것 때문에 골치가 좀 아팠다. 내 뜻은 경제성장이 잘됐고, 금융위기도 다른 나라보다 빨리 극복했고 이런저런 면에서 잘했다는 뜻이었다.”
‘이건희식(式) 어법’으로 보면 이른바 ‘낙제점 발언’이 MB 정부의 경제정책을 폄훼하려는 뜻에서 나온 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권력은 어느 때나 재벌에 기대하는 게 있기 마련이고, 그 기대가 어긋나면 ‘발언의 진의’ 따위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일자리 창출에 목을 매던 MB에게는 삼성의 선도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정상회담을 하러 나갈 때도 기업 활동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총수 대신 전문경영인만 데리고 나간 MB였다.
2008년 취임 초 어느 날. SBS 보도본부 미래부장 출신의 김상협 미래비전비서관은 MB가 지나가는 말처럼 던진 한마디를 곰곰이 생각했다.
“삼성은 왜 인사(人事)를 안 하는 거야? 눈치 보지 말고 국가경제에 도움이 되게 하고 투자도 하는 게 맞는 것 아냐?”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한 말이었다. 이건희는 ‘삼성 비자금’ 특별검사에 발목이 잡혀 그룹 인사도, 투자 계획도 발표하지 못하고 있었다. MB는 이건희가 답답했다. 김상협은 좀 놀랐다. ‘오죽 답답하면 대통령이 재벌그룹의 인사 문제까지 언급할까.’
김상협은 삼성의 ‘요로’에 MB의 뜻을 전했다. 전하는 것 또한 MB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특검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투자에 나서 주십시오.”
비자금 수사의 여파로 삼성은 ‘이건희 회장-이학수 부회장의 동반 퇴진’으로까지 내몰렸지만 이듬해 말 MB는 이건희를 특별 사면한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던 이건희를 사면해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에 전력을 다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이건희 한 사람을 위한 전례 없는 ‘원 포인트’ 사면이었다.
김상협은 MB가 퇴임한 뒤 어느 날, 서울 강남구 논현동 사저를 방문한 자리에서 지나가는 말처럼 이렇게 말했다.
“기업들이 이제는 대통령님 생각이 많이 날 겁니다.”
여러 가지 뜻이 담긴 말이었다.
[비밀해제 MB5년]<15> 친이(親李)의 4·27 분당 자폭(自爆)
(동아일보 2013-07-06 08:54:36)
“강재섭 대신 정운찬 공천” 상처만 남긴 이재오의 헛발질
2008년 7월 3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MB가 대표직에서 물러나는 강재섭을 위로하고 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웃고 있는 홍준표는 당시 원내대표. ‘정권을 창출한 당 대표’였던 강재섭은 내심 국무총리를 기대했으나 MB가 내놓은 제안은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다. 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강재섭은 “차라리 시골 교장이나 하겠다”며 이후 MB에게 등을 돌렸다.
한나라당 정두언 최고위원. “정운찬이 나오지 않겠다고 하면서 강재섭으로 (공천은) 끝난 거다. 당은 아무런 대책도, 전략도 없다. 이재오가 대단하다고 하는데 사고는 딱 중학생 수준이다. 분당을 공천 안 되는 게 뻔히 보이는데 (정운찬) 밀어붙이고….”(2011년 3월 29일 한나라당 출입기자 정보보고)》
“그것 때문에 친이 쪽에서 (당신을)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어!”
2011년 초 어느 날, 이명박 대통령(MB)은 임태희 대통령실장을 걱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4월 27일로 예정된 경기 성남시 분당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의 공천 문제였다. MB 스스로 ‘친이(친이명박) 쪽’이라고 말한 건 이재오 특임장관이었다.
임태희는 강재섭 전 대표를 밀었다. 2005년 강재섭이 원내대표로 있을 때 원내수석부대표를 맡아 한때 ‘강재섭 계보’로 통하기도 했지만, 임태희는 그보다 정치 도의상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강재섭은 MB 정권 출범 이후 두 번이나 인사검증 동의서를 제출했다. 국회의원 5선에 당 대표를 지낸 강재섭에게 인사검증 동의서란 곧 ‘국무총리 후보’였다. 강재섭도 그렇게 생각했고, 임태희도 마찬가지였다. 임태희는 2010년 7월 대통령실장으로 임명된 뒤 MB에게 직접 물어보기까지 했다.
임태희=“총리도 안 시킬 거면서 인사검증 동의서까지 받은 건 좀 심했습니다.”
MB=“총리는 안 돼!”
임태희=“그러면 왜 검증을….”
MB=“임 실장이 만나서 오해를 풀어줘.”
그 얼마 후 임태희는 강재섭을 만났다. 강재섭은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지만 ‘총리의 꿈’은 이미 접고 있었다. 그 대신 다른 제안을 했다. “분당을 보궐선거에 나갈 예정이니 청와대에서 방해만 하지 말아 달라.” 임태희가 대통령실장으로 들어가면서 공석이 된 분당을 국회의원 선거에 자기가 출마하겠다는 뜻이었다.(*이 대목에 관한 강재섭의 기억은 좀 다르다. 임태희가 먼저 권유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임태희는 강재섭을 밀면서 MB에게 이런 얘기까지 했다. “방해할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총리도 안 시키는데 방해는 말이 안 됩니다. (정치인에게 그렇게) 척을 져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MB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친이계 좌장인 이재오가 움직였다.
해가 바뀌어 4·27 재·보선을 앞둔 2011년 초 어느 날, 이재오는 정운찬 전 총리를 만난다. 정운찬은 2010년 7월 세종시 수정안 국회 부결에 따른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사퇴한 뒤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이재오=“분당을 선거에 출마하셔야죠!”
정운찬=“대통령의 뜻입니까?”
이재오=“그렇습니다.”
정운찬=“….”
사실 정운찬은 MB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여권에서 자신을 후보 경선 없이 전략 공천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느꼈던 것. 아니나 다를까 당 지도부는 ‘정운찬 영입’ 카드로 발칵 뒤집혔다. 홍준표 최고위원은 “(세종시 수정안 실패 때문에) 문책으로 나가신 분이다”라고 했고, 정두언 최고위원도 “당의 이미지를 높일 수 있는 분을 새로 영입해 신선한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강재섭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해 2월 7일 기자간담회를 열어 “(출마) 생각도 안 하고 있는 사람(정운찬)을 거론하고 있는데, 과거 밀실정치나 다름없다”고 반격했다. 그러면서 “나는 1996년 분당으로 이사 와 올해 15년째 살고 있다. 당선돼도 대표나 국회의장 자리에는 관심 없고 시켜 줘도 안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려가 현실이 되자 정운찬은 3월 20일 “나는 한 번도 나간다고 한 적이 없다. 나갈 생각이 없다”고 못을 박았다. 정운찬의 전언. “눈치를 보니 (대통령의 뜻이라는) 이재오의 말은 사실이 아닌 것 같더라. 당 최고위원들 중에서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거든. 결국 나가지 않기를 잘했던 거야.”
애초 정운찬 영입 카드는 이재오가 아닌 원희룡 사무총장의 아이디어였다. 안상수 의원이 당 대표로 선출된 2010년 7월 사무총장으로 임명된 원희룡은 ‘경기의 강남’ ‘천당 아래 분당’이라는 텃밭에서 패배하면 사무총장 자리뿐만 아니라 곧바로 MB정부의 위기라고 생각했다. 특히 민주당에서는 손학규 대표의 차출설이 솔솔 나오고 있었다. 민주당이 손학규 카드를 꺼내 든다면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원희룡도 처음엔 ‘정치 도의상’ 강재섭에게 기회를 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그 생각을 접고 정운찬을 택했다. 그리고 이재오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사이 참신한 신인을 찾는다며 탤런트 고현정과 박상원을 내세우는 방안까지 검토했다. 차인표의 경우는 실제 접촉까지 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
강재섭은 아군이 휘두른 칼에 내상을 입고 있었다. 홍준표는 연일 불가론을 폈다. “분당을은 강 전 대표가 다섯 번 국회의원을 한 대구만큼 쉬운 지역인데 분당을에 출마하면 공정한 사회가 아니다. 대통령도 ‘갸가 와 돌아오노’라고 했다고 하더라. 차라리 내 지역구를 내줄 테니 19대 때 서울 동대문을에 나오라 캐라(해라).”
강재섭도 강수를 뒀다. 3월 13일 아예 선거사무소 개소식을 열고 출마를 공식화했다. 그러나 우군이었던 안상수도 초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상수는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될 때 강재섭에게 진 ‘빚’이 있었지만 친이계 최대주주인 이재오가 정운찬 카드를 들이밀자 귀가 솔깃했다. 게다가 홍준표도 반대했고…. 무엇보다 분당을 보선에서 패배하면 대표직을 내놓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손학규가 민주당 후보로 출마를 선언하자 안상수와 원희룡은 다급해졌다. 야권의 유력 대선주자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제1야당 대표가 직접 후보로 뛰어들면서 분당을은 4·27 재·보선의 최대 승부처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원희룡은 비공식 라인으로 여론조사를 돌렸다. 결론은 아이러니하게도 ‘임태희 차출’. 임태희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치르는 선거에 다시 임태희를 출마시켜야 한다는, 다소 황당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었다.
안상수가 다시 이재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재오는 워싱턴 출장 중이었다.
안상수=“아무래도 임태희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재오=“지금 해외 출장 중이니 알아서 판단하십시오!”
이재오의 답변은 시큰둥했다.
4월이 시작됐다. 1일 당 대책회의가 열리자, 보다 못한 김무성 원내대표가 나섰다.
김무성=“분당을은 어떻게 할 거냐?”
원희룡=“(우물쭈물하며) 월요일에 보고드리겠습니다.”
김무성=“지금 당장 결론을 내려라. 강재섭을 (전략공천) 하려면 빨리 해야 한다. 너무 상처를 많이 받았다.”
원희룡=“….”
김무성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대통령의 성격이 그렇더라. 결정을 잘 안 내리고…. 이번에도 이재오가 강재섭이 안 되는 이유를 어그레시브하게(공격적으로) 쭉 설명한 뒤 ‘제가 책임지고 설득해서 정운찬을 출마시키겠습니다’라고 한 거지. 그리고 MB도 ‘그래? 그럼 한번 해봐’라고 하니까 ‘대통령의 뜻’이라며 총대를 메고 나선 거지. 그러다 일이 잘 안 되면 대통령도, 이재오도 쑥 빠져버리는 식인데, 이번 일도 그렇게 된 거다.”
게다가 안상수-원희룡 조가 마지막에 꺼내 든 임태희 카드는 ‘형님의 의심’을 불러왔다. 당시 대책회의에 참석했던 한 인사의 전언.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SD)이 의심을 했습니다. 이재오가 임태희를 출마시켜 청와대에서 나오게 해서 SD의 입김을 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돌고 돌아서 강재섭’으로 갈 수밖에 없었죠.”
임태희도 당시 분당을 공천파동을 권력다툼으로 인식했다. “친박(親朴·친박근혜)은 강재섭을 막지 않았다. 친이도 이재오 쪽에서만 막았지, 이상득 쪽에서는 막지 않았다. 그 연장선상에서 (재·보선 패배 이후) 나보고 물러나라는 얘기까지 나온 것이다. 결국 세력 간 권력다툼이었다.”
4월 4일 결국 공천장은 강재섭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적전 분열로 상품(후보)은 이미 선도가 급격히 떨어진 상태였다. 4·27 분당을 보궐선거의 결과는 51.0% 대 48.3%의 패배. 한나라당은 민주당 이광재 지사의 중도하차로 함께 실시된 강원지사 보궐선거에서도 패하고 말았다.
분당을 공천파동은 친이계의 자폭(自爆)이나 마찬가지였다. 친이는 본격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했다. 안상수는 대표직을 사퇴했고, 김무성의 후임을 뽑기 위해 그해 5월 치러진 당 원내대표 선거는 4·27에 이은 또 한 번의 적전 분열이었다.
MB는 임기 후반을 향해 가고 있었다.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친이계의 분열은 극에 달했다. 친이계 안경률 이병석 의원은 누구도 원내대표직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중립파와 쇄신파, 친박계의 지원을 받은 황우여 의원이 승리했다. 황우여는 이어 2012년 5월 대표까지 거머쥔다. MB정부에서 박근혜정부로 이어지는 황우여 대표 체제는 그렇게 탄생했다.
[비밀해제 MB5년]<14> MB정권의 76학번들
(동아일보 2013-06-29 09:35:57)
鄭-任-李-金 76동기의 갈등과 협력, 그 중심엔 SD가…
2010년 11월 29일 이명박(MB) 대통령의 연평도 피격사태 특별담화문 발표 회견장으로 들어가는 임태희 대통령실장과 김두우 기획관리실장. 서울대 76학번 동기인 두 사람은 이명박 정부 중기(中期)의 청와대를 이끌며 호흡을 맞췄다. 역시 MB의 ‘76학번 참모’였지만 두 사람과 불편한 관계였던 이동관 전 홍보수석비서관은 청와대를 떠나 있던 때였다.
이명박(MB) 정권의 흥미로운 특징 중 하나는 유난히 76학번들이 눈에 많이 띈다는 점이다. 특히 서울대 76학번 동기들인 정두언 전 한나라당 최고위원,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 그리고 홍보수석비서관을 차례로 지낸 이동관 김두우의 협력과 갈등은 늘 은밀한 화제였다. 묘하게도 정두언과 임태희는 서울대 상대 출신에 행시 24회 동기였고, 이동관과 김두우는 각각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출신의 정치학과 동기였다.
그들이 모신 대통령은 6·3세대였다.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 한일회담’에 반대해 궐기했던 6·3세대. 이후 민주화에 헌신한 멤버들도 있지만 다수는 산업화의 역군이 됐다. MB는 후자의 상징이었다. 초기에 부진하던 박정희식 경제개발도 1966년부터는 10% 이상 고도성장의 시대를 연다.
76학번들이 입학하던 1976년은 현대자동차가 포니의 판매를 시작한 해였다. ‘마이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76학번은 그러니까 폭압적인 유신말기체제에 신음하면서도 산업화의 혜택을 본격적으로 누리기 시작한 세대였다. 노무현의 386세대와 같이 ‘단일 혹은 이념 코드’로 설명할 수 없는 세대였다.
그런 점에서는 6·3학생운동의 주역이자 산업화의 간판스타인 MB도 마찬가지였다. 6·3세대 대통령과 76학번 참모들. 특히 50대 초반의 76학번 참모들은 ‘올드 보이’들이 많은 MB 정권에서 무엇을 꿈꾸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들은 무엇을 꿈꾸기도 전에 권력투쟁의 직·간접적인 당사자가 되고 만다.
18대 총선 공천심사가 한창이던 2008년 3월, 정두언을 필두로 한 한나라당 소장파 55명이 이상득(SD) 국회부의장의 불출마를 압박하고 있던 때였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이동관 대변인에게 ‘55인 거사(擧事)’에 대한 코멘트를 요구했다.
“충정은 이해한다. 하지만 문제 제기 방식이 거칠고 적절치 않다.” 물론 이동관의 실명이 아니라 청와대 핵심관계자의 코멘트로 보도됐다.
그날 저녁. 이동관은 식사 도중 문자 한 통을 받았다.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안다. 인간이 그러면 안 된다.’ 두 사람은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뒤늦게 경선 캠프에 합류한 이동관이 인수위 대변인을 맡게 된 데는 ‘실세’ 정두언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 정두언은 서운함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이동관이 ‘(친구로서가 아니라) 대통령의 참모로서 한 얘기’라고 다독였지만 정두언은 풀지 않았다. 기획조정비서관으로 있던 SD의 심복 박영준이 “들었어요? 정두언이 요즘 기자들에게 이 선배를 ‘간신’이라고 씹는답니다”라고 귀띔해줄 정도였다. 제갈공명이 조조를 치기 위해 주유를 격분시키는, 삼국지 적벽대전의 그 격장지계(激將之計)를 연상케 하는 말이었지만 이동관도 발끈했다.
보다 못한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이 강남의 어느 카페에서 화해의 술자리를 마련했다. 한국일보 출신으로 경선 캠프인 안국포럼 메시지팀장으로 활약했던 신재민은 이동관의 정치학과 1년 후배이기도 했다.
이동관=“나를 간신이라고 욕하고 다닌다던데 그게 사실이냐?”
정두언=“욕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냐?”
이동관=“너는 정치하는 사람이고, 나는 대통령 참모 아니냐? ‘큰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이 그 정도밖에 안 되냐? 나는 대통령 모시느라 정신이 없다.”
정두언=“네가 지금 잘 모시고 있는 거냐? 바른 소리를 해야지!”
이동관=“나름대로 바른 소리 하고 있다. 네가 나 같은 사람까지 적으로 만들면서 무슨 정치를 하겠다는 거냐.”
‘MB 정권의 설계사’로 불리던 정두언은 이미 세(勢)를 잃고 있었다. ‘왕의 남자’인 이재오 의원까지 18대 총선에서 고배를 들자 MB 정권의 권력지형은 급격하게 ‘형님(SD)’ 쪽으로 기울었다.
SD는 임태희를 아꼈다. 임태희는 1980년대 중반 민정당 대표를 지낸 권익현의 사위였다. 권익현은 육사 11기로 전두환 노태우의 동기. 경남 산청 출신이지만 대구 능인고를 졸업한 ‘범(汎)TK’였다. SD도 ‘절반’은 육사 출신이다. 비록 자퇴하고 서울대 상대로 옮겼지만 그는 코오롱에 있을 때도 입교 동기생들인 육사 14기를 챙겼다.
임태희도 서울대 상대 출신이다. 그러니까 임태희는 SD가 좋아할 만한 요소를 두루 갖춘 셈이었다. 게다가 유능하고 자기 절제력이 강했을 뿐 아니라 어른을 잘 모셨다.
이방호 전 사무총장의 기억. “(2007년 경선 때) 이재오와 내가 의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정말 간곡하게 설득하고 다녔다. 그런데 임태희는 막판까지 요리조리 버티다가 (나나 이재오가 아니라) SD 쪽에 붙어서 들어왔다. 어느 날 SD한테 시급한 경선 상황을 보고하러 갔는데 안에 사람이 있다면서 안 나오더라. 비서도 평소와 달리 안에 누가 있는지 말을 안 하고…. 쪽지라도 집어넣으라고 방방 뛰니까 문을 열어 주는데 다른 사람은 없고 SD 혼자 있더라. 알고 보니 임태희를 화장실에 숨겨두고 문을 열어 준 거였다. 그 정도로 끼고 돌았다.”
막판에 합류했지만 임태희는 후보 비서실장, 당선인 비서실장, 한나라당 정책위의장, 노동부 장관, 대통령실장에 대북 특사 역할까지 MB 정권과 사실상 명운을 함께한다. 정책위의장 때부터 다듬어 온 ‘공정사회’ 구상을 MB 정부의 키워드로 만들어낸 주인공도 바로 임태희였다.
하지만 권부 내에서는 SD가 데리고 들어온 ‘범TK 데릴사위’로 비쳤다. 2010년 7월, 임태희가 제3기 청와대의 대통령실장으로 자리를 잡자 여권 인사들은 “SD계의 당청 장악이 완성됐다”고 판단했다. 한 달 전 지방선거 패배의 여파로 한나라당 사무총장까지 원희룡 의원으로 교체됐다. 원희룡은 그즈음 ‘SD 사람’으로 분류됐다.
신설된 메시지 기획관으로 있다가 이때 기획관리실장을 맡게 되는 김두우와 민정1비서관으로 있던 장다사로까지 감안하면 ‘SD계의 당청 장악’이란 얘기가 그냥 나온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김두우는 어찌됐건 TK이고, 장다사로는 세상이 다 아는 ‘(이상득) 부의장 사람’이었다. 장다사로는 임태희의 경동고 후배이기도 했다.
박영준은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차관급)으로 있던 2009년 10월 몇몇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지난번 청와대 개편으로 이동관 홍보수석에게 힘이 많이 실렸다고 하는데 꼭 그렇게 볼 수 있을까? 중요한 포인트는 김두우 메시지 기획관이다. 메시지 기획관은 대통령과 매일 만나는 자리다. 청와대에선 누가 대통령을 매일 만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SD 직계인 박영준이 김두우를 ‘우리 편’으로 생각하고 있음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말이다. 2009년 6월 정두언을 비롯한 소장파 7인이 ‘만사형통(萬事兄通) SD’의 정계 은퇴를 요구하고 나섰을 때 ‘2선 후퇴론’으로 SD를 설득한 사람은 김두우였다. 2008년 총선 때와 마찬가지로 SD는 소장파의 퇴진 요구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퇴진은 곧 정계 은퇴’라고 생각했다. 실제 소장파의 요구도 정계 은퇴 후 해외 체류였다.
메시지 기획관을 맡기 전 정무기획비서관으로 있던 김두우는 SD에게 “2선 후퇴라도 해야 정치적으로 문제를 풀어갈 수 있다”고 우회로를 제시했다. 물론 MB도 받아들인 아이디어였다.
2009년 6월 3일 아침, SD는 안국포럼 출신의 친이(親李·친이명박) 직계 의원들을 불렀다. 정두언도 당연히 초청 멤버였다.
SD=“오늘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중대결심을 밝히려고 한다. 여러분이 요구하는 2선 후퇴를 받아들이겠다.”
정두언=“그것만으로는 진정성을 보일 수 없습니다. 당정청에서 의심받는 측근들까지 모두 함께 물러나야 합니다.”
SD=“(극도로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얘기냐? 합심해서 우리가 만든 대통령을 최선을 다해 보좌하자.”
정두언=“(탁자를 내려치며) 우리라고요? 난 한 번도 우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김두우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2선 후퇴’는 소장파의 예봉을 피하면서 SD를 구명(救命)하는 카드가 됐다.
그리고 정권재창출을 위해 박근혜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한 SD의 ‘친박 본색’까지 구명하는 정치적 결과를 낳았다. 또 하나. 76학번 네 사람의 권력좌표에도 원심력으로 작용했다. 네 사람은 SD와의 관계에 따라 협력보다는 갈등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비밀해제 MB5년]<13> 형님은 親朴이었다
(동아일보 2013-06-22 14:32:09)
SD ‘朴돼야 MB퇴임후 안전’ 판단… 鄭대선후보론에 격분
MB의 정치적 멘토인 SD는 친이계 중에서 일찌감치 “다음 대선은 박근혜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SD가 2009년 1월 5일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사에서 열린 최고중진연석회의에 참석한 박근혜에게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고 있다.
“이동관, 그 친구 잘라야 하는 거 아니야?”
2009년 9월 3일 오후, 이상득(SD) 새누리당 의원은 정정길 대통령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정정길은 동생(이명박 대통령·MB)과 사적으로는 오랜 친구 사이였다. SD도 그런 정정길을 평소 편하게 대했다. 그런데 이날 SD의 목소리에는 노기(怒氣)까지 서려 있었다.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인 이동관이 이날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새 국무총리 후보자로 발표하기 직전 기자들에게 ‘일반론’임을 전제로 “(총리를 지내면) 대선후보 중 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 게 못마땅했던 것이다.
SD가 우려한 것은 친박(친박근혜)들의 반응이었다. 친박의 시선으로는 MB가 정운찬을 활용해 ‘박근혜 흔들기’에 나선 모양새였다. 실제로 당시 MB 주변에선 차기 대선 구도에 대한 여러 논의가 오가고 있었다. 이 때문에 SD의 이 같은 반응은 당시 친이(친이명박)계 내에서는 이례적이었다. 정정길은 이동관에게 SD의 반응을 전해주며 “오해를 풀어라”고 했고 그 자리에 있던 정인철 대통령기획관리비서관도 거들었다. 그러나 이동관은 그러지 않았다.
여하튼 MB는 2008년 성공적으로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면서 국정 운영의 자신감을 되찾고 있었다. 이 기세를 몰아 박근혜를 설득(또는 제압)해 세종시 수정안도 관철할 태세였다. 그런데 SD는 왜 그랬을까?
2009년 2월 21일 부산 서면 롯데호텔. SD는 김무성 허태열 서병수 등 친박계 의원들과 조찬 회동을 했다. 안경률 김정훈 등 친이계 의원들도 함께했다. SD 측은 이례적으로 언론에 회동 일정을 흘렸다. 그만큼 이 장면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SD는 식사 전 김무성 등에게 “당 밖에서는 ‘친이’다 ‘친박’이다 하며 걱정을 많이 하지만 내부적으론 다양한 견해가 있을 뿐 갈등의 소지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김무성에게 “원내대표 선거에 나서 봐라”고 제안했다.
당시 김무성이 기자들에게 한 얘기. “SD가 요즘 달라졌다. 그동안 우리 친박에 대해 반감이 많았는데, 사실 원래는 친박들 씨를 말려 죽이려고 했던 것 아니냐….” SD가 박근혜와 비밀 회동을 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 박근혜가 명예훼손 혐의로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며 반박하자 정정 보도를 내기는 했지만….
아무튼 김무성 원내대표 카드는 박근혜가 단칼에 거부하면서 없던 일이 됐지만 SD는 이후로도 친이계 내에서 유달리 박근혜와 친박계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2010년 6월 박근혜의 반대로 세종시 수정안이 무산된 이후 SD의 관심은 본격화됐다. 그러던 9월 초 어느 날. SD의 ‘정치적 양아들’로 통했던 한나라당 사무총장 원희룡에게 친박 핵심 인사 A씨가 이런 말을 전한다. 박근혜의 복심(腹心)으로 분류될 만한 사람이었다.
A=“지금 대선후보 중 MB 퇴임 후 MB와 SD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박근혜 (전) 대표뿐입니다.”
원희룡=“무슨 말씀이신지….”
A=“그럼 이렇게 말씀드릴까요. MB가 박 대표의 대선 행보를 방해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박 대표가 대선에서 진다고 해도 야당 대표는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당 대표’ 박근혜가 MB와 SD를 청문회에 세우지 말란 법도 없지 않습니까.”
MB 임기 후 문제까지 거론하며 잘 지내보자는 제안이었다. SD가 진작부터 박근혜에 공을 들인 것도 바로 이런 포인트를 염두에 두었다는 게 주변의 대체적인 해석이다. SD는 비슷한 시기 경북지역 언론인들과의 모임에서 이런 말을 한다.
“한나라당에 가장 중요한 건 정권 재창출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 (전) 대표는 한나라당의 자산이다.”
이 정도면 박근혜로의 정권 재창출 필요성을 선언한 셈이다.
비슷한 시기 단행된 청와대 참모 인선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MB는 세종시 수정안 부결 직후인 2010년 7월 신임 대통령실장에 임태희를,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에는 정진석을 임명한다. 임태희와 정진석은 각각 친이계, 친박계로 분류되지만 동시에 SD계로도 분류되는 사람들이다. 사실상 SD계가 청와대 핵심을 장악하며 박근혜와 SD, 더 나아가 MB와 박근혜의 관계 개선에 나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SD가 ‘친박’을 자처하고 나선 데는 물론 ‘대안 부재론’이 결정적이었다. 동시에 SD와 박근혜의 TK(대구·경북)라는 지역적 끈, 기업인 출신인 SD의 ‘사업적 기질’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게 주변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SD는 2004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후폭풍과 ‘대선자금 차떼기 사건’으로 한나라당이 휘청거릴 때 박근혜와 ‘찰떡 콤비’를 이뤄 천막당사 신화를 만들어 낸 적이 있다. 당시 ‘남원정’(남경필 원희룡 정병국) 등 당내 소장파가 최병렬 대표를 끌어내리고 박근혜를 새 대표로 추대할 때 당 사무총장이던 SD가 천막당사 프로젝트를 주도한 것. SD는 서울시장이던 MB를 설득해 서울시와 천막당사 용지로 사용할 땅 임차 계약을 하고, 사무실로 쓸 컨테이너도 주도적으로 마련했다. 당시 천막당사 이전을 실무 지휘한 B 씨의 회고. “SD가 박근혜 대표의 지시를 받자마자 순식간에 일 처리를 마무리해 박 대표가 꽤 흡족해했다. 천막당사 용지가 여의도공원 내에서도 요지라 임차료가 비쌌는데 금액 문제도 SD가 조율하고 나섰다.”
기업인 출신으로 꼼꼼한 스타일도 영향을 미쳤다. 2004년 여름, 한나라당 사무처는 코오롱에 당 유니폼 제작을 의뢰했다. SD가 코오롱 사장을 지낸 만큼 좀 싸게 맞출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코오롱이 제안한 단가는 한 벌에 5만8000원. 이를 보고받은 SD는 “유니폼 점퍼 하나가 뭐 이리 비싸나”라고 역정을 내더니 동대문시장 내 가내수공업 공장에 한 벌에 1만9000원씩 제작을 맡기기도 했다.
무엇보다 전통적 TK 정서가 강하게 작용했다고 한다. MB-SD 형제의 핵심 측근인 C 씨의 증언. “SD는 MB 당선 직후부터 ‘다음 대통령은 박근혜’라고 생각했다. 바뀐 일이 거의 없다. ‘TK의 정권 재창출’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PK로의 정권 재창출에 대해서는 미묘한 거부감이 있었다.”
정두언 박형준 등 여권 내 소장파 그룹에서 2010년 8월 정운찬 국무총리의 후임으로 경남지사를 지낸 김태호를 강하게 천거한 데 대해서 SD가 불만을 토로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태호의 등장으로 차기 대선 구도가 흔들릴 수 있는 점을 눈여겨본 것이다. MB가 청문회에서 상처를 입은 김태호를 계속 쓸지 고민할 때, SD와 가까운 정진석이 김태호 카드를 버리자고 강하게 설득한 것도 이와 무관치는 않은 듯하다.
하지만 박근혜와 SD는 이런 ‘연대’를 공식적으로 확인하거나 내세우지는 않았다. 아직까지 확인된 둘만의 공식 회동도 없었다. 연대가 공공연히 알려지면 2012년 대선에서 야당이 내세웠던 ‘이명박근혜’ 정권 심판론의 근거만 제공하는 꼴이 될 게 자명한 일이었다. 2009년에 이어 2011년 4월 18일에도 SD가 서울 삼성동에서 박근혜와 전격 회동했다는 기사가 보도됐으나, 박근혜의 대변인 격이었던 이정현(현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은 이례적으로 보도자료까지 내고 회동 사실을 다시 한 번 전면 부인했다.
이는 SD 쪽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물이 차면 배가 뜨는 법. MB는 어느덧 ‘박근혜 불가피론’으로 기울고 있었다.
2011년 1월 초. 신년 구상을 하던 MB가 곽승준 대통령직속 미래기획위원장 등 핵심 측근 몇 명을 청와대로 불렀다.
참모들=“일할 수 있는 시간은 올해가 사실상 마지막입니다. 저희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MB=“그래. 그리고 무엇보다 정권 재창출이 중요하다. 지금 상황에선 다음은 박(근혜) (전) 대표밖에 없는 것 아니냐….”
SD가 2010년 9월에 했다는 말과 표현도 크게 다르지 않다.
SD의 선견지명 때문이었을까. 이후 MB-SD 형제와 박근혜는 더이상 크게 삐걱대지는 않았다. MB는 1987년 민주화 이후 탈당하지 않은 채 임기를 마무리한 첫 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정작 SD는 저축은행으로부터 거액의 로비자금을 받은 혐의로 2012년 7월 전격 구속되는 추락을 맛봐야 했다. 2013년 1월 동생이 단행한 마지막 특별사면에서도 제외됐다.
어쩌면 SD의 ‘친박 행보’는, 정치를 잘 몰랐던 동생을 위해 형님이 짊어진 짐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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