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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치

[비밀해제 MB5년]<10>‘원 포인트’ 국무총리 (동아일보 2013-06-01 15:17:21)

[비밀해제 MB5년]<10>‘원 포인트’ 국무총리

MB찾은 정운찬 “朴대표에 세종시-대권 빅딜 제안하시죠”

정운찬 국무총리(왼쪽)와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오른쪽)가 2010년 1월 21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충청향우회 중앙회 정기총회 및 신년교례회에 참석해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다. 정종택 충청향우회 총재(가운데)의 권유로 억지로 손을 잡았지만 정운찬의 세종시 수정 드라이브에 반대해 온 이회창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가득하다

 

 “어디 있나?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좀 찾아서 정 실장에게 모시고 가.”

2009년 9월 1일 밤. 곽승준 대통령직속 미래기획위원장은 이명박 대통령(MB)의 전화를 받는다. 좀 급한 목소리였다. 곽승준은 ‘본업’인 미래기획 외에 핵심 측근으로서 MB의 ‘하명 임무’도 종종 수행했다. MB는 보스이기 전에 부친(곽삼영 전 고려산업개발 회장)의 현대건설 직장 상사. 학생 시절엔 ‘이명박 아저씨’가 “공부 열심히 하라”며 용돈도 줬다.

곽승준은 수소문 끝에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음식점에 있던 정운찬을 찾아 자기 승용차에 태웠다. 곽승준은 그 전에도 몇 차례 정운찬을 만나 ‘MB가 함께 일하고 싶어한다’는 뜻을 전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정정길 대통령실장 관저까지는 30여 분. 이 자리에서 ‘차기 국무총리를 맡아 달라’는 MB의 메시지가 전달됐다. 사실 MB는 한승수 총리 후임으로 충남지사를 지낸 심대평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목표는 하나. 심대평을 활용해 충청권 민심을 돌려 세종시 계획을 수정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심대평 카드가 무산되면서 고민 끝에 같은 충청권 출신인 정운찬을 골랐다. 세종시 수정에다 2009년부터 내세운 ‘친서민 중도실용’ 노선에도 적합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정정길은 관저에서 정운찬에게 세종시와 4대강 사업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정운찬은 ‘세종시 계획은 효율적이지 않다’는 취지로 답했고, 곧 정정길은 MB의 뜻이라며 총리직을 공식 제안했다. 정운찬은 이틀 뒤인 9월 3일 MB와 만난 뒤 총리 후보자로 지명된다.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였던 정운찬은 그날 오후 자신이 맡고 있던 ‘경제학연습2’의 마지막 강의를 하러 학교를 찾았다. 떠나기 전 박형준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 등 청와대 참모들을 만났다.

정운찬=“학교 가면 기자들이 와 있을 텐데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참모들=“사진 찍고 질문 한두 개 받으시죠.”

청와대 참모들의 조언대로 정운찬은 마지막 수업 후 기자회견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세종시에 대한 질문이 나왔고 정운찬은 그냥 편하게 정정길에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행정복합도시는 경제학자인 내 눈에 효율적 계획은 아니다. 원점으로 돌리기는 어렵겠지만 원안대로 다 한다고 하는 것도 쉽지 않다.”

정운찬의 회견을 TV로 지켜보던 청와대는 ‘정운찬, 세종시 수정안 추진’이라는 속보가 뜨자 아연실색했다. 은밀하고 긴 호흡으로 추진해도 될까 말까한 사안인데, 정운찬이 너무 일찍 터뜨린 것이다. 일종의 천기누설이었다. 당시 특임장관인 주호영 새누리당 의원의 회고. “세종시 수정이 정운찬의 핵심 미션 중 하나였던 건 맞다. 그런데 이를 너무 일찍 공개하면서 일이 꼬이게 됐다. 무엇보다 정운찬 자신을 ‘세종시 총리’로 가두어버린 결과로 이어졌다.”

특히 세종시와 충청권이란 중원(中原)을 발판으로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나서려던 한나라당 내 친박(친박근혜)들의 반발이 거셌다. 친박의 눈에는 누가 봐도 정운찬을 활용한 MB의 ‘박근혜 흔들기’였다. 하지만 어차피 알려진 거, 청와대도 세종시 수정안 추진을 부인할 생각이 없었다. 친박들 사이에선 MB가 세종시 수정을 고리로 정운찬을 박근혜 대항마로 키우려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터져 나왔다. 총리 내정 발표 전 이동관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이 기자들에게 총리 후보들 중엔 대선 후보감이 있다는 취지의 말을 한 것도 친박들을 자극했다.

사실 친박들의 의구심이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MB가 오래전부터 정운찬을 눈여겨보고 있다는 건 여권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실제로 MB는 서울시장으로 당선된 2002년부터 정운찬에게 최소 5차례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2006년 오세훈 대신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라고 한 것을 시작으로 2007년 대선 경선에선 선거대책위원회에 합류하라고 제안했다. 대통령 당선 후엔 2008년 대통령직인수위 멤버로 합류하라고, 18대 총선에선 한나라당 간판으로 출마하라고 설득하기도 했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를 비교적 빨리 극복하며 지지율을 회복한 MB는 세종시 문제에 자신이 있었다. 정운찬을 전면에 내세워 충청권 민심을 돌리면 박근혜도 어쩔 수 없이 세종시 수정에 찬성할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그런 MB는 정운찬 주호영 박형준 등을 수시로 충청권으로 보내 여론전을 펴고, 동시에 세종시에 대기업 투자를 추진했다. 대기업 접촉은 박재완 대통령국정기획수석비서관이 주로 맡았다. 특히 삼성이 관건이었다. 박재완은 학생 시절 하숙을 같이 했던 장충기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차장(사장)을 채널 삼아 삼성의 대대적인 투자를 이끌어내려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박근혜도 세종시 문제만큼은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결국 2009년 10월 23일엔 정부의 세종시 수정 추진에 반대 의사를 공식 표명하며 MB에 정면 대응키로 한다. 박근혜의 ‘세종시 원안 사수 투쟁’이 충청권 여론에 미치는 영향은 청와대의 예상보다 컸다. MB가 그해 11월 27일 TV로 생중계된 ‘국민과의 대화’에서 세종시 원안 파기를 사과하면서까지 수정 의사를 밝혔지만 박근혜가 가세한 충청권 민심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당황한 MB 정부는 충청권 민심을 사기 위해 이례적으로 심리전까지 벌였다. 주호영이 이끄는 특임장관실은 연세대 황상민 심리학과 교수에게 세종시 문제에 대한 충청권의 민심을 분석해 달라고 의뢰했다. 황 교수 연구팀은 충청권 성인 남녀 60명을 심층 조사한 끝에 세종시 문제에 대해 이들이 ‘몰락한 양반 심리’를 갖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집안이 몰락해 변변한 살림은 없지만 자존심 하나는 세다. 그런데 집 앞에 MB가 ‘세종시 수정안’이라는 선물을 놓고 갔다. 하지만 양반 체면에 이를 냉큼 받을 수는 없는 법. 대신 누군가 선물을 집 안으로 밀어 넣어주길 내심 기대하고 있다는 게 황 교수팀의 분석 결과였다.

이에 고무된 청와대는 해를 넘겨도 세종시 수정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2010년 1월에 나온 게 정부 부처를 대거 옮기는 대신 삼성그룹의 2조500억 원을 비롯해 모두 4조5000억 원 규모의 기업 투자를 유치하겠다는 내용의 세종시 수정안이었다. 그러나 충청권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정운찬을 앞세워→경제적 유인책으로 충청권 민심을 움직이면→박근혜도 흔들리고→자연스레 세종시 수정을 추진할 수 있다는 청와대의 시나리오가 통째로 흔들린 것이다.

2012년 1월 4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중소기업인 신년인사회’에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김황식 총리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왼쪽의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이 복잡한 표정으로 박 위원장을 쳐다보고 있다. 동아일보DB

 

MB와 청와대 참모들은 결국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하려면 박근혜를 직접 움직여야 한다는 현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처음에도 그런 얘기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현실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2010년 1월 말. MB는 집무실로 참모 몇 명을 불렀다.

“안 되겠다. 박(근혜) 대표를 누가 좀 직접 만나야겠다.”

MB는 핵심 참모 B 씨를 박근혜에게 직접 보냈다.

B 씨=“대표님. 대통령님께서 세종시 문제로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박근혜=“세종시 문제라면 별로 대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느 때보다 싸늘한 답변이었다. 더 말을 이어가기도 어려웠다. B 씨는 박근혜에게 “세종시 문제가 아니라도 좋으니 양측의 핫라인이라도 만들자”고 요청했고, 박근혜는 한나라당 대표 시절 자신의 비서실장을 지낸 유정복(현 안전행정부 장관)을 대리인으로 지명했다. 하지만 이 핫라인도 개설 후 제대로 작동할 기회조차 없었다.

B 씨로부터 박근혜와의 면담 보고를 받은 MB는 불쾌했다. MB는 그 직후 이런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2010년 2월 9일 충청북도의 업무보고를 받던 중 “잘되는 집안은 강도가 오면 싸우다가도 멈추고 강도를 물리치고 다시 싸운다. 강도가 왔는데도 너 죽고 나 죽자 하면 둘 다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에 박근혜는 다음 날 기자들에게 “집 안에 있는 한 사람이 마음이 변해가지고 갑자기 강도로 돌변하면 그때는 어떻게 하느냐”고 반박했다. 듣기에 따라선 대선 공약인 세종시 원안을 파기한 MB가 강도라는 논리였다. 이에 흥분한 이동관은 기자들 앞에서 평소 붙여주던 ‘(전)대표’라는 호칭을 뗀 채 “박근혜 의원은 최소한 대통령에 대한 기본 예의를 지켜야 한다”며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보다 못한 정운찬이 MB를 찾아갔다.

정운찬=“친박 의원들에게 일일이 전화해서 도와달라고 하시면 돌아서지 않겠습니까?”

MB=“나는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은 안 합니다, 못 합니다.”

정운찬=“박근혜 대표를 직접 만나서 도와달라고 하시죠.”

MB=“아니, 저렇게 반대하는데 어떻게 도와달라고 해요.”

정운찬=“(세종시 수정안 도와주면) 차기 대통령 되는 데 도와준다고 하시면 어떻습니까?”

MB는 이 말을 듣고 꽤 ‘심각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운찬 본인은 여전히 이 대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하기 어렵다”며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다만 주변에선 MB가 정운찬에게 서운한 감정을 내비쳤거나 그를 심하게 질책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당시 청와대 참모 C 씨. “MB가 정운찬을 총리로 고른 것은 세종시 수정 외에 차기 대선 구도도 감안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런데 정운찬이 MB에게 ‘박근혜에게 차기를 도와주겠다고 해라’고 했으니 나 같아도 심경이 복잡했을 것이다.”

결국 정운찬을 앞세워 세종시 원안 수정을 추진하려던 MB의 계획은 결과적으로 ‘헛다리 짚는 격’이 되고 말았다. 정운찬은 그해 6·2지방선거에서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동시 실시하자고 주장했지만 정부 내에서도 소수론에 그쳤다. 정운찬도 막판에는 주변에 “국민투표를 했다가 충청권만 고립되면 내가 매향노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다”고 토로하며 고집을 접었다.

박근혜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한 세종시 수정안은 2010년 6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예상대로 부결됐다. 정운찬은 이날 국회 본회의장에서 박근혜가 수정안에 반대표를 던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정운찬의 증언.

“사실 (정치인으로서) 박근혜 대표의 양심을 믿었다. 설마 수정안 표결할 때 반대할까 생각했다. 나중에 보니 내가 순진했다. (표결에 들어가기 전 MB와) 타협이 이뤄질 거로 생각했다….”

고심 끝에 MB와 한 배를 탔던 정운찬은 자신의 의도와 달리 ‘세종시 총리’라는 실패한 꼬리표만 단 채 그해 8월 11일 총리직에서 물러나며 급속히 MB와 멀어져갔다. 그런 정운찬은 2012년 대선에선 문재인을 지지했다.

떠나간 정운찬 대신 MB에겐 레임덕의 그림자가 서서히 몰려오고 있었다. 한나라당도 ‘친박 당’으로 변신해가기 시작했다. MB는 이후 세종시를 한 번도 찾지 않다가 퇴임 직전인 2013년 1월 15일 세종시를 쓱 둘러보고 왔다.

 

 

[비밀해제 MB5년]<11>MB의 박근혜 연락장교

 (동아일보 2013-06-08 08:58:33)

정진석 “임무가 뭡니까”… 한달 뒤 MB-朴8·21회동 성사

 

2010년 8월 21일 이명박(MB)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의 단독 오찬 회동. MB가 ‘대통령의 양심’이라고까지 토로한 세종시 수정안이 부결된 지 한 달 20일 만에 마련된 자리였다. 배석자 없이 1시간 35분 동안 이뤄진 이날 만남 이후 여권 내에서는 ‘박근혜를 통한 정권재창출’로 권력게임의 가닥이 잡혀갔다.

 

박재완 국정기획수석비서관은 눈물을 흘렸다. “대과(大過)를 남기고 떠나게 돼 죄송하다. 역사의 죄인이다.”

2010년 7월 16일, 박재완을 비롯한 이명박(MB) 대통령실의 2기 참모들은 그렇게 떠나갔다. ‘대과’는 보름여 전 국회 본회의에서 최종 사망 선고를 받은 세종시 수정안이었다. 정식 안건 명칭은 ‘신행정수도 후속대책을 위한 연기·공주 지역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 전부 개정안’. 법안 이름만큼이나 길고, 복잡다단했던 세종시 수정안 파동이었다. 자리(국정기획수석)도 그랬지만, 세종시 수정안에 관한 한 박재완은 정운찬 국무총리 못지않게 ‘전사(戰士)’를 자임했었다.

MB도 잠자리에 들었다가 한밤중에 혼자 일어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는 참모들에게 세종시 원안 수정을 ‘대통령의 양심’에 관한 문제라고 토로했다. 당시 메시지 기획관을 맡고 있던 김두우는 “대통령을 모시는 동안 그런 표현을 사용하며 고민을 토로한 건 세종시 수정안 파동 때뿐이었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임기는 반환점을 돌고 있었다. 먼저 정정길 대통령실장 체제의 청와대 참모들을 교체했다. 신임 임태희 실장을 불렀다.

MB=“정무수석은 누가 좋겠어?”

임태희=“정진석 의원이 어떻습니까?”

MB=“정진석은 박근혜 (전) 대표와 가까운 것 아냐?”

임태희=“지금으로선 정진석이 제일 낫습니다. 충청도 출신(충남 공주)이고, 세종시 수정안에도 반대표를 던져 앞으로 친박(친박근혜) 의원들을 접촉하는 데도 적임입니다.”

MB=“박근혜 대표와 상의해봐.”

임태희=“지금 당정청(黨政靑)이 서로 어려운 건 박근혜 대표와의 관계 때문입니다. 정권재창출을 위해서는 두 분이 협력하셔야 합니다. (대통령의) 의중을 그쪽에 전해줘야 합니다. 그런 얘기를 박 대표에게 전해도 되겠습니까?”

MB=“그렇게 해.”

세종시 수정안 파동을 전후해 친이(친이명박)와 친박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친이 내부에서는 갈라서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었다.

임태희는 곧바로 박근혜를 찾아갔다.

임태희=“대통령께서 정무수석 자리에 누굴 앉힐지 고심하고 계십니다. 대표님께서 적임자를 한 명 천거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박근혜=“그건 대통령의 고유권한이지 않습니까?”

임태희=“(박근혜의 대답을 예상했다는 듯 곧바로) 정진석 의원이 어떻겠습니까?”

박근혜=“정 의원님이 (수락)하시겠어요?”

임태희=“지금으로선 당내 문제를 수습할 수 있는 적임자입니다. 설득을 해서라도 맡아 달라고 하겠습니다.”

박근혜=“그러면 저야 좋죠….”

이야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MB는 7월 13일 정책실장(백용호) 사회통합수석(박인주) 대변인(김희정)과 함께 정진석을 정무수석비서관으로 내정한다.

며칠 뒤 정무수석 내정자로 MB를 면담하는 날, 정진석은 단도직입적으로 “내 임무가 뭐냐”고 물었다. MB로부터 내심 기대하는 대답이 있었고, 다짐을 받고 싶은 얘기도 있었다.

정진석=“이 시점에서 저에게 정무수석 자리를 맡기는 뜻을 직접 듣고 싶습니다.”

MB=“당신은 아버지(정석모 전 민정당 사무총장·내무장관) 때부터 정치를 봐왔잖아. 그리고 지금 3선이고…. 정권재창출이 중요해서 당신한테 맡아 달라고 한 거야.”

정진석=“그럼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겠습니다. 그런데 저도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표를 던진 사람입니다만, 지금 당내 사정이 너무 복잡합니다. 당이 쪼개질 수 있습니다. 이건 실제 상황입니다. 박근혜 대표를 만나야 합니다. 세종시 문제를 둘러싼 갈등도 두 분이 만나서 해결해야 마침표를 찍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MB=“….”

MB는 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분당(分黨) 위기까지 거론되는 당내 상황을 수습하고 정권을 재창출하기 위해서는 박근혜와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건 안다. 하지만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았다. 정진석은 “박 대표에 대한 MB의 거부감은 진짜 컸다. 폐쇄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 강했다”고 기억했다. 그래서 단둘이 만나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선뜻 답을 주지 못한 것이다.

정진석은 그래도 틈만 나면 박근혜를 만나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던 어느 날, MB로부터 사인이 왔다. “어떻게 하면 돼?”

정진석은 콜롬비아 대통령 취임식 특사안(案)을 준비했다. 박근혜는 2008년 1월에는 이명박 당선인의 특사로 중국을 다녀왔고, 2009년 9월엔 대통령 특사로 유럽연합(EU)과 헝가리, 덴마크를 순방하고 돌아와 MB를 만난 적이 있었다. 콜롬비아 특사단의 출국일은 8월 6, 7일경으로 잡혔다.

정진석이 은밀하게 추진하던 ‘박근혜 콜롬비아 특사안’은 그즈음 동아일보 취재팀에 포착됐다. 그러나 정진석은 “동아일보 보도는 오보”라고 강하게 부인했다. 공교롭게 박근혜도 “8월엔 어머니 제사도 있고 해서 못 나간다”고 난색을 표했다. 현재 국회 사무총장으로 재직 중인 정진석은 “그 당시 박 대표의 일정 때문에 결국 콜롬비아 특사안이 무산되긴 했지만 동아일보 특종을 ‘오보’라고 부인한 건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8월 19일 박근혜로부터 갑자기 전화 연락이 왔다. 그리고 이틀 뒤 전격적으로 MB와 박근혜의 회동이 성사된다. 정진석은 국무회의 때 자주 만나는 최경환 지식경제부 장관(현 새누리당 원내대표), 유정복 농림수산식품부 장관(현 안전행정부 장관)에게도 함구했다. 유정복은 두 번이나 박근혜의 비서실장을 지낸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그래도 정진석은 박근혜와 직접 연락을 주고받았다. 박근혜의 ‘보안 의식’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2011년 4월, 박근혜 특사의 유럽순방 계획을 발표하는 정진석 정무수석. MB의 ‘박근혜 연락장교’로서 그가 맡은 마지막 임무였다. 동아일보DB

 

MB와 박근혜의 ‘8·21 회동’은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뿐 아니라 한나라당의 정권재창출 가도(街道)에서 분수령으로 칠 만한 사건이었다.

정진석은 MB에게 건의해 회동 결과 발표도 박근혜 쪽에서 하도록 했다. 발표는 역시 ‘대변인’ 역할을 해온 이정현 의원(현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의 몫이었다. 정진석은 이정현의 발표를 모니터링했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는 오늘 청와대에서 단독 오찬회동을 갖고 한나라당의 정권재창출을 위해 협력하기로….”

이정현의 발표문 첫 줄을 듣는 순간 정진석은 아차 싶었다. 급히 이정현에게 전화를 넣었다. “그건 안 된다. ‘이명박 정부의 성공과 정권재창출을 위해 협력한다’고 해야지 정권재창출만 얘기하고 이명박 정부의 성공을 위해 협력한다는 말을 빼버리면 대통령은 뭐가 되느냐?”

발표문은 현장에서 즉각 수정됐지만, 이튿날 조간신문의 헤드라인은 일제히 ‘MB-박근혜 정권재창출 함께 노력’으로 뽑혔다. 핵심은 역시 그것이었다. 물론 친박들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의원총회에서 MB를 칭송했고, 연말 예산국회도 협력모드로 임했다.

협력모드는 이듬해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2011년 초, 이정현은 정진석에게 ‘민원 아닌 민원’을 넣는다. “박 대표가 외국 나간 지 2년이 다 돼간다. 기자들도 근질근질한 모양이다.”

정진석은 한편으론 특사 구상을 하면서, 또 한편으론 MB의 기분이 좋을 때를 기다렸다. 박근혜를 꼭 만나야 할 ‘이유’가 딱히 없으니 기분 좋을 때 얘기를 꺼내자는 심산이었다.

기회가 왔다. MB는 3월 6일 임태희 대통령실장, 정진석 정무수석, 홍상표 홍보수석, 김인종 경호처장을 대동하고 수원 아주대병원을 찾아 석해균 선장을 병문안했다. MB는 ‘아덴 만의 영웅’인 석 선장의 귀국 작전을 직접 지휘하다시피 했었다. 대통령 주치의를 청와대로 불러 아덴 만 현지에서 석 선장의 총상 치료를 지켜보던 이국종 아주대 응급의학과 교수와 통화하게 한 뒤 ‘귀국 후 치료’ 결정을 내린 것도 MB였다.

병문안을 마친 MB는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남산숯불갈비나 가지!” 대선 때 참모들과 자주 들렀던 곳이었다. 마이크로버스의 대통령 뒷자리에 앉아 있던 정진석은 ‘이때다’ 싶었다.

정진석=“박근혜 대표와 회동하신 지도 오래됐는데 다시 한번 만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MB=“그러지 뭐. (방법을) 한번 알아봐.”

정진석=“특사 형식이 좋겠습니다.”

MB=“그럼 외교안보수석하고 상의해봐.”

마침 유럽엔 수교 50주년이 되는 나라들이 꽤 있었다. 정진석은 외교통상부에 “여왕이 있는 나라도 포함시켜 달라”고 당부했다. 포르투갈, 그리스와 함께 베아트릭스 여왕이 있는 네덜란드가 박근혜의 유럽 순방국에 포함됐다.

그런데 박근혜의 유럽 순방 일정이 논의되고 있던 3월 말, MB와 박근혜 사이엔 또 하나의 전선(戰線)이 형성된다. 동남권 신공항 문제였다. 동남권 신공항 건설은 MB의 대선공약 중 하나였다. 그러나 정부가 신공항 건설 백지화 방침을 발표하자 박근혜는 3월 31일 대구를 방문한 자리에서 “국민과의 약속을 어긴 것”이라며 말 그대로 ‘돌직구’를 날렸다.

다음 날인 4월 1일엔 MB의 대국민 기자회견이 잡혀 있었다. MB는 회견문 독회를 위한 참모회의에 이동관 언론특보와 박형준 사회특보까지 불렀다. 이동관은 이 자리에서 박근혜의 대구 발언에 대해 “대구 방문 시점이나 발언 내용이 누가 봐도 대통령을 비난한 것 아니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임태희는 “박 대표 쪽에서 대구 방문을 앞두고 사전에 대통령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통보가 있었고 대구 발언 직후에도 대통령을 겨냥한 발언이 아니라는 취지의 해명을 해왔다”고 보고했다. 이동관은 “물론 우리도 판을 깨서는 안 되고 정권재창출을 해야 한다. 하지만 뽕잎 떨어지면 가을 오는 것을 알아야 하듯 상황 파악을 잘해야 한다”고 거듭 불만을 표시했다. 굳은 표정으로 듣고 있던 MB도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음 날 MB는 기자회견장에서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에 대해 “신공항을 공약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지역주민들에게 죄송하다고 했다. 하지만 10조∼20조 원을 투자해서 매년 적자를 본다면 어려움이 있다. 책임은 모두 저에게 있다”고 사과했다. 기자들이 박근혜의 비판에 대한 생각을 묻자 MB는 “박 대표와의 관계를 너무 그렇게 보실 필요가 없다. 선의로 보는 게 좋다. 지역구인 고향에 내려가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입장을 이해한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는 것도 아마 이해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MB의 대답은 부드러웠다. 진심이었을까?

당시 대통령실 기획관리실장을 맡고 있던 김두우는 이렇게 말했다. “그게 본심이었겠느냐? 갈등을 더 촉발시켜서는 안 되니까 ‘(박 대표가) 대선 생각해서 그런다는 걸 안다’고 한 수 위로 대답한 것일 뿐이지….”

하긴 이동관인들 MB의 그런 속내를 몰랐겠는가. 참모들은 각자 역할이 있는 법이다. 이동관마저 면전에서 “판을 깨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면 MB는 무척 외로웠을 것이다.

전선은 확대되지 않았고, 박근혜는 4월 말 예정대로 유럽 순방길에 올랐다. 박근혜의 유럽 순방은 거의 ‘대통령급’이었다. 동행취재를 신청한 신문 방송사도 24개사나 됐다. 2009년 9월 EU 방문 때는 겨우 2개사가 따라갔을 뿐이었는데….

이제 한나라당은 명실상부한 ‘박근혜 당’이었다.

MB는 유럽 순방을 마친 박근혜와 오찬 회동을 한 직후 정진석 정무수석, 홍상표 홍보수석을 각각 김효재, 김두우로 교체한다. 박근혜에게는 “정무수석을 교체하더라도 앞으로 연락할 일이 있으면 정진석을 통해 하겠다”라고 미리 귀띔했다.

하지만 그럴 일은 더 없었다.

 

[비밀해제 MB5년]<12>박근혜의 레이저

 (동아일보  2013-06-15 09:42:31)

항의 들은 朴후보 30초 침묵… 안대희는 뒷목이 서늘했다

 

2012년 10월 9일 새누리당 국민대통합 심포지엄에 참석한 박근혜 후보(왼쪽)와 안대희 정치쇄신특별위원장. 안대희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으로 있던 2003년 한나라당의 ‘차떼기’ 대선자금 모금 실태를 밝혀낸 주역으로 ‘국민검사’라는 애칭까지 얻었으나 2012년 대법관에서 물러난 지 48일 만에 새누리당 대선캠프에 참여했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박근혜 레이저’구나!”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장을 맡은 안대희는 전화가 끊어지고 나서야 자기가 레이저를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2003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으로 대선자금을 수사하며 ‘국민 검사’라는 별명까지 얻었고, 대법관을 지낸 뒤 새누리당에 영입된 안대희였다.

정치쇄신특별위원장을 맡은 지 두 달쯤 지난 2012년 10월 초. 안대희는 박근혜 대선후보가 한광옥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당 국민대통합위원장에 임명한다는 소문을 전해 듣고는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DJ(김대중 전 대통령)와 함께 평생 민주화 운동을 해온 한광옥이지만 안대희에겐 어쩔 수 없는 ‘비리 전력자’였다.

한광옥이 2003년 나라종금 퇴출저지 청탁 혐의로 구속 기소됐을 때 수사를 총지휘한 대검 중수부장이 바로 안대희였다. 안대희는 자존심이 상했다. 한광옥의 영입으로 호남에서 일부 표를 얻을지는 몰라도 정치쇄신에 기대를 걸었던 표심은 이탈해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광옥과 안대희는 함께 평가받을 수 없는 가치였다.

“(두 명 중에)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전화를 걸 때만 해도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의 박근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안대희도 태연한 척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지만 내심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 연신 시계만 쳐다봤다. 무려 30초가 흐른 뒤에야 대답이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목소리는 싸늘했다.

대꾸할 틈도 없었다. 곧바로 ‘뚝’ 하고 전화가 끊어졌다.

그래도 안대희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며칠 뒤인 10월 8일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퇴도 불사하겠다는 배수진을 쳤다.

박근혜도 고심했다. 한광옥은 영호남 대화합을 위해서 버릴 수 없는 카드였고, 안대희도 정치쇄신을 위해선 놓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결국 국민대통합위 위원장은 자신이 직접 맡고, 한광옥은 수석부위원장에 앉히는 것으로 물러섰다.

안대희의 기억. “(발표 전에) 나에게는 한광옥이 ‘부위원장’이라고 말하더니 발표 내용을 보니 ‘수석’을 더 붙였더라고…. 나는 이미 당사 5층 사무실 서랍 속에 사퇴서도 써놓았던 상황이었어. 정말 그만둘 생각을 했었지.”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안대희에게도 박근혜의 레이저는 서늘한 무기였다. ‘절대 그만둘 수 없는’ 새누리당 의원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명박 대통령(MB)의 임기가 반환점을 돌면서 한나라당 내부 권력은 점차 박근혜 쪽으로 옮겨갔다. ‘정권 재창출을 위해 협력한다’는 2010년 8월 21일의 MB-박근혜 합의는 그런 권력이동의 상징적 장면이었다. 박근혜는 명실상부한 ‘미래 권력자’가 됐다.

친박(친박근혜) 의원들도 “권력자의 포스가 강해졌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자신의 뜻과 다르거나 분위기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면 말을 꺼낸 상대방을 무안하게 만들어버리는 ‘박근혜식 소통’ 스타일에도 권력자의 포스가 얹혀졌다. 바로 ‘레이저’였다.

그나마 할 말은 한다는 친박 핵심 최경환 지식경제부 장관(현 새누리당 원내대표)도 레이저를 피하지 못했다.

2010년 초순 어느 날, 김무성 의원 문제 때문이었다. 며칠 전 최경환은 새누리당 초선인 이정현(현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 구상찬(현 주상하이 총영사) 김선동 의원(현 대통령정무비서관) 등과 회동을 가졌다. 장관 취임 이후 오랜만에 친박계 의원들에게 밥을 사는 자리였다. 자연스레 5월로 예정된 차기 원내대표 경선 얘기가 화제에 올랐다.

최경환은 김무성 얘기를 꺼냈다. 박근혜와 사이가 멀어졌어도 친이(친이명박)보다는 그래도 친박 좌장 역할을 했던 김무성이 낫다는 논리였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박근혜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과천에도 일이 바쁘실 텐데, 여의도에 신경을 많이 쓰시네요!”

최경환은 당황했다. 그날 밥자리에서의 대화 내용이 박근혜에게 보고된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험한 어조는 아니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장관 업무나 충실히 하라는 힐난조가 분명했다. 그는 자신의 발언 배경을 설명했지만 이미 싸늘해진 분위기는 쉽게 수습이 되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최경환은 현기환 의원을 만나 서로 ‘다짐 아닌 다짐’을 한다. “이제는 더이상 김무성 얘기를 박 (전) 대표에게 꺼내지 말자!” 현기환도 무려 8차례나 김무성과의 화해를 건의하다 레이저를 맞은 전력이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상도동계 관계자 얘기를 들으면 YS도 박근혜의 레이저에 ‘수모’를 당한 적이 있다. 박근혜가 ‘커터칼 테러’를 당할 때니까 2006년 5월 무렵이다. “어른(YS)이 한때는 박 대표를 괜찮게 생각했다. (커터칼 테러 사건 때) 병문안도 다녀왔다. 그 직후 박 대표가 상도동으로 감사 전화를 걸어왔는데 말끝에 잠시 뜸을 들인 뒤 ‘일일이 감사 전화를 못 드리고 있다. 제가 전화 드린 걸 어디 가서 얘기하시지 말라’고 한 모양이다. 어른이 ‘내가 어디 가서 얘기한다고…’ 하면서 매우 어이없어 했다. 그 후에 사람을 보내기도 했지만 어른의 감정이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상도동 관계자)

그 때문이었을까. YS는 세종시 문제로 MB와 박근혜가 정면충돌하고 있던 2010년 5월, 원내대표 신임 인사차 찾아온 김무성 의원 앞에서 “쿠데타 세력이 가장 나쁜데 국민이 다 잊은 것 같다. 나는 (쿠데타 세력 중에서도) 박정희가 제일 나쁘다고 생각한다”고 독설을 쏟아냈다.

사실 박근혜가 늘 레이저만 쏘는 건 아니다. 의원들이 보고서를 만들어 안봉근 수행비서(현 대통령제2부속비서관)를 통해 전달하거나, 승용차를 탈 때 “시간이 나면 한번 읽어보시라”고 건네주면 며칠 뒤 ‘발신자 제한 표시’로 전화가 걸려온다. 친박계 손범규 전 의원의 전언. “보고서가 쓸 만하다고 생각하면 직접 전화를 걸어 ‘의견이 참 유익하네요, 저 근혜예요’라며 칭찬을 해주곤 한다.”

경선캠프 공보단장을 맡았던 재선의 윤상현 의원도 그런 스타일을 활용했다.

지난해 8월 하순 어느 날, 박근혜가 새누리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뒤 핵심 측근들과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중국집에서 오찬을 했을 때다.

윤상현=“후보님, 사실 내부적으로 5·16(군사정변)을 혁명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고, 현상 자체는 정치변형을 일으킨 쿠데타라고 얘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박근혜=“…. (윤상현이 쳐다봤지만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푹 숙임)”

윤상현=“내부적으로 토론을 해서 (빨리) 정해야 합니다!”

박근혜=“(윤상현을 쳐다보며) 식사하면서 무슨 토론회를 해요!”

윤상현=“….”

순간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썰렁해졌고, 윤상현은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대선 이슈였다. 윤상현은 대신 두 차례에 걸쳐 보고서를 만들었다. 즉답은 없었지만 한 달쯤 뒤 박근혜는 5·16과 10월 유신 등 과거사에 대한 사과 기자회견을 한다.

김태흠 의원도 그즈음 아찔한 경험을 했다. 충남 보령-서천이 지역구인 그는 선진통일당과 합당을 위한 막후 협상의 메신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박근혜에게 전화 보고를 할 때였다.

김태흠=“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도 만났는데 김종필 전 총리(JP)도 한 번 만나셔야죠?”

박근혜=“(단호한 어조로) 앞에 두 분은 전직 대통령이셨잖아요.”

김태흠=“3김이라는 단어가 왜 나왔겠습니까. 영남과 호남, 충청권을 상징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

박근혜=“….”

김태흠은 순간 아차 싶었다. 그래서 사태 수습을 위해 이렇게 얘기했다.

김태흠=“제가 직접 후보님을 뵙고 말씀을 드렸다면 대선 승리를 위해 무릎을 꿇고 간청했을 겁니다.”

박근혜=“(또다시 침묵이 흐른 뒤) 알겠습니다!”

‘알겠다’고 했지만 김태흠에게는 부정적 뉘앙스로 들렸다. 침묵의 레이저 탓이었다. 하지만 박근혜는 흘려듣지 않고, 조용히 JP의 자택 방문을 추진했다.

박근혜의 레이저. 권위주의 청와대에서 사실상 ‘퍼스트레이디’로 살아온 세월, 비극적 개인사, 그리고 권력 주변의 표리부동한 군상에 대한 깨달음과 18년간의 ‘블랙아웃’이 복합적으로 교직된 캐릭터인지 모른다. 또 하나, 정치권이 헌정 사상 처음으로 접하는 여성 리더십에 대한 몰이해가 ‘레이저’라는 충격으로 표현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건, 박근혜의 레이저는 MB 5년의 국정운영을 때로 긴장시키고, 때로 춤추게 한 주요 변수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