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근혜의 입’ 왜 이정현인가
선거의 여왕’ 정무엔 자신감, 돌려막기 비판 무릅쓰고 홍보수석 임명
“대통령 참모가 이정현밖에 없나?”
이정현 전 대통령 정무수석비서관이 6월 2일 홍보수석비서관으로 수평 이동하자 친박(친박근혜)계 진영에서조차 터져 나온 하소연이다. 정무수석과 홍보수석 모두 대통령의 핵심 참모인데 취임 100일 만에 이 수석이 두 자리를 혼자 잇달아 차지하자 터져 나온 불만이다. 대통령과 주변 인사들도 이정현 홍보수석을 임명하면서 이런 지적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돌고 돌아 이 수석을 꼭 시켜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박근혜 대통령은 방미 기간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논란 사건 초반만 해도 이남기 전 홍보수석의 교체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다. 박 대통령은 당시 본인의 방미 일정이 워낙 빡빡했던 데다 진상을 정확히 파악한 뒤 알리려 했던 점을 참작해 이 전 수석이 사건 발생 하루 뒤 보고한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한다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척하면 알아듣는 수준
그러나 윤 전 대변인의 미국 행적이 점차 알려지면서 성추행 논란이 더 커지고, 사건 발생 이후 윤 전 대변인의 귀국 종용과 관련해 이 전 수석과 윤 전 대변인이 진실공방까지 벌였다. 이에 박 대통령은 이 전 수석의 교체가 불가피하다고 여긴 것으로 전해졌다.
박 대통령은 이 전 수석이 사의를 표명한 지 12일이 지난 후에야 사표를 수리했지만, 이미 그전부터 차기 홍보수석 인선에 들어간 상태였다. 다만 자연스럽게 후임 수석을 발표하면서 이 전 수석의 사표를 수리하는 형식으로 배려하려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이 전 수석이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며 하루빨리 사의를 수용해달라고 허태열 대통령비서실장에게 요청하면서 후임 홍보수석이 확정되기 전 사표가 수리됐다.
박 대통령의 마음속에는 이미 차기 홍보수석으로 이정현 정무수석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 주변에서 ‘돌려막기’라는 비판을 의식해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는 건의가 많이 올라온 것으로 전해졌다. 이 수석 본인도 홍보수석 이동보다 정무수석 잔류를 원했다는 후문이다. 청와대 서열상 정무수석이 홍보수석 위인 데다 사실상 홍보수석 구실도 하는 상황에서 굳이 홍보 업무에 한정될 필요는 없는 상황이었다.
박 대통령은 주변으로부터 새로운 인물을 추천받았으나 적임자를 찾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남기 전 수석 같은 방송 출신은 정무적 판단이 느리고, 신문사 간부 출신은 다른 언론사들과의 관계 설정이 애매하며, 당 출신은 언론계의 반발을 살 수 있는 등 안 될 만한 이유만 많았다.
결국 박 대통령은 돌고 돌아 이 수석의 수평 이동을 6월 3일 결정해 발표했다. 그 배경에는 이 수석이 정무수석보다 홍보수석에 적합하고, 그보다 더 나은 정무수석을 찾아보겠다는 취지도 담겼다. 홍보와 달리 국민, 국회를 상대하는 정무는 ‘선거의 여왕’으로 불려온 박 대통령에게는 더 자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굳이 대통령 뜻을 모르는 사람이 오더라도 본인이 신임 정무수석과 커뮤니케이션하면서 컨트롤할 수 있는 분야라는 생각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은 언론에 나가는 본인 메시지에 아주 민감하다. 대통령선거(대선) 때는 물론 당선인 시절에도 대변인이 자신의 메시지를 대신 전달할 경우 문구 하나하나까지 챙겼다. 대통령은 자신의 말이 여러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모호한 어법을 즐겨하지 않는다. 혼선 없이 자신의 발언 그대로 국민에게 정확하게 전달되는 스타일을 선호한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의 뜻을 언론과 국민에게 명확히 전달할 수 있는 홍보라인이 필요하다. 척하면 알아들을 정도가 돼야 하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정치인 특유의 싸움꾼 기질이 있다. 선거를 비롯해 전투를 시작하면 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스타일이다. 그 최전선 전사가 대변인이다. 박 대통령은 상대가 부당하게 공격한다고 판단될 때는 타협하지 않고 온몸으로 이에 맞서 국민적 지지를 얻어낼 수 있는 대변인을 선호한다. 예를 들어 정부 출범 후 정부조직법 개편이 야당 반대로 통과가 늦어질 때 박 대통령은 “야당도 대선 때 공약으로 미래창조과학부 설립을 내걸고 이제 와서 이를 반대하는 것은 정략적”이라고 여겼다. 그 순간부터 박 대통령은 정치적 타협이 아닌 옳고 그름의 논리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뜻에 따라 여론전을 펼치려면 대변인은 강한 충성심이 필요하다.
박 대통령의 홍보라인에서 또 하나 중요한 역량은 언론과의 스킨십이다. 박 대통령은 언론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많지 않은 편이다. 정치인이 흔히 갖는 비공식 기자 티타임이나 간담회가 없을 뿐 아니라, 기자회견이나 인터뷰 같은 공식 언론 접촉도 적다. 게다가 대통령이 확정되지 않은 정책이나 인사에 대한 ‘보안’을 강조하기 때문에 측근들도 입이 무거워 언론인의 불만이 많은 편이다. 박 대통령의 홍보라인은 이런 언론인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언론인과 스킨십이 많아야 하고, 또 언론인에게 어느 정도 배경 설명도 해줘야 한다.
이 수석 메시지가 곧 대통령 메시지
그런 관점에서 보면 청와대 첫 번째 홍보라인은 상당히 허약한 체질이었다. 이남기 전 수석은 박 대통령과 인연이 없는 데다 방송사 PD 출신으로 기자들과의 접촉면이 더더욱 없었다. 이 전 수석은 주로 박 대통령의 공식행사에 동행하면서 대통령의 스타일을 익히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정작 취재를 위한 기자들의 전화는 받지 않아 기자 사이에서 ‘정무수석보다 통화하기가 어려운 홍보수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전 수석뿐 아니라 윤창중 전 대변인, 김행 대변인을 포함해 홍보라인은 대통령과 인연이 적은 ‘신입’으로 채워졌다. 백기승 국정홍보비서관과 최상화 춘추관장 정도가 예외라고 할 만하다. 그러다 보니 홍보라인이 자신감을 갖지 못해 기자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대통령도 여러 차례 공식적으로 “국민이 모르는 정책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홍보라인의 분발을 촉구할 정도로 답답함을 느꼈다.
박 대통령이 선호하는 위와 같은 홍보수장의 조건을 감안하면 이 수석만한 적임자가 없다. 돌이켜보면 박 대통령은 위기 때마다 이 수석을 앞세워 위기를 돌파했다. 이 수석은 2004년 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일 때 수석부대변인으로 활동을 시작해 2007년 대선 경선 때는 공보특보, 2008년 총선 때는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후 박 대통령의 대변인격으로 대통령의 ‘입’ 구실을 해왔다.
이 수석이 본격적으로 진가를 발휘한 건 2010년 세종시 수정안 정국에서였다. 당시 친박 진영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세종시 수정안 드라이브를 ‘박근혜 압살 정책’이라고 여길 만큼 위기감이 컸다. 이 수석은 당시 대변인격으로 언론과 논리 대결을 벌이며 온몸으로 박 대통령을 지켜냈다.
이 수석은 지난해 1월부터 총선에 출마하려고 8년 만에 대통령 곁을 잠시 떠났다. 그러나 경선 승리 이후 9월 들어 과거사 발언, 정준길 전 공보위원의 안철수 불출마 협박 건 등으로 위기에 빠지자 박 대통령은 이 수석을 공보단장으로 긴급 투입했다.
이 수석이 홍보수장이 되면서 청와대의 홍보라인은 파워가 세졌다. 이 수석이 정무수석일 때도 매일 두 차례 열리는 홍보대책회의에서 주요 언론 대응 기조를 정하는 건 그의 몫이었다. 대변인들도 브리핑 전에는 주로 이 수석과 상의했다. 이제 정무라인을 거치지 않고 홍보라인에서 곧바로 언론 대응 기조를 정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만큼 이 수석의 부담감은 커졌다. 홍보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 곧바로 화살이 본인에게 향하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청와대뿐 아니라 기자 사이에서도 이 수석의 메시지를 대통령의 메시지로 판단할 정도로 그의 입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가 무너질 경우 대체 홍보수석을 찾지 못한 박 대통령의 고민은 더 커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향후 행보가 대통령의 행보와도 직결될 것이 확실하다.
[주간조선] 낡은 ‘수석 노트’의 비밀? 대통령 발언·접촉 인사 관련 비밀의 책
(조선일보 2013.06.23 11:24)
이정현(56) 청와대 홍보수석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늘 한 권의 책자를 끼고 다닌다. 자신의 사무실은 물론이고 이동하는 차량에서도 이 책자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고 한다. 청와대 내 각종 회의에 참석할 때도 그의 손에는 이 ‘의문의 책자’가 들려있는 때가 많다. 그가 신줏단지 모시듯 소지하고 다니는 이 책자는 손때가 많이 묻어 일부는 해질 대로 해진 상태다.
정책 이슈가 불거질 때면 이 수석이 이 책자를 보는 시간은 더 길어진다. 이른바 ‘수석의 노트’에 대해 처음에는 청와대 직원들도 궁금해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이 풀렸다. 이 책자는 일종의 발언록이었다.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부대변인 시절부터 박근혜 대통령을 보좌해온 이 수석이 대통령의 과거 발언을 정리해 놓은 책자였다. 이 수석이 박 대통령의 발언을 워드프로세스로 정리한 뒤 책자 형태로 제본을 한 것이다.
책자에는 남북관계, 경제민주화, 부동산대책, 의료보험 등 주요 사안에 대해 그동안 박 대통령이 언급했던 발언들이 정리돼 있고 박 대통령이 당대표, 대선후보 시절 접촉했던 인사에 대한 촌평도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수석은 이 노트를 외부는 물론이고 청와대 수석급 인사들에게도 공개하지 않는다고 한다.
익명을 요구한 청와대 한 고위 관계자의 말이다. “어록 책자에 대해서는 나도 청와대에 들어온 뒤 알게 됐다. 얼마나 자주 읽었던지, 이 수석의 책은 많이 해져 있었다. 대통령의 과거 발언이 정리된 이 노트를 토대로 대통령의 의중을 정확하게 읽어 내고 일관성 있는 언론 대응을 하는 것 같다. 이 수석은 2004년 당의 상근 부대변인 시절부터 늘 이런 자세로 대통령을 모셔왔다.”
박 대통령의 의중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이 수석은 수석급 또는 비서관급 회의에서 이슈에 대해 ‘가르마’를 타는 역할을 한다. 국정기획, 정무, 홍보수석실 비서관들이 매일 모이는 11인 회의의 경우 그의 판단이 결론을 도출하는 잣대가 되는 경우가 많다.
지난 6월 14일 오전 7시 청와대 위민3관 1층 홍보수석실. 소회의실에 유민봉 국정기획수석, 이정현 홍보수석, 김선동 정무비서관(정무수석 대리)이 모였다. 세 명의 수석과 함께 홍남기 국정기획비서관 등 3개 수석실에서 온 8명의 비서관급 인사들이 모두 자리에 앉은 후 회의실 문은 닫혔다. 매일 아침 열리는 이 회의에는, 11명의 비서관급 이상 청와대 인사들이 모여 PI(President Identity·대통령 이미지 통합관리)에 대한 ‘모든 것’을 논의한다.
박 대통령의 동선과 일정, 발언 등을 총괄 관리하는 이 11인 회의는 지난 3월 중순부터 시작됐다. 박 대통령이 외부행사에 참가할 때마다 굳은 표정의 경호원에 둘러싸인 경직된 사진이 언론에 보도되거나, 일반 시민과 괴리된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되는 걸 개선하자는 취지에서 출발했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도 이 PI 시스템을 통해 지도자들의 이미지가 보완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 만든 회의체다.
11인 회의는 청와대 관제상 유민봉 국정기획수석이 회의를 주재하지만, 중요한 결정은 이정현 수석의 입을 거쳐야 한다. 정무수석일 때도 그랬지만 지난 6월 4일 홍보수석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중요 사안에 대해 청와대의 입장을 최종 결정할 때면 언제나 이 수석이 나선다. 회의석상에서 이 수석이 직접 박근혜 대통령과 통화를 해 방향을 결정하는 일도 있다. 회의의 마무리 발언 역시 대부분 이 수석이 맡는다.
11인 회의는 보통 1시간가량 진행되는데 특별한 사안이 생길 경우 하루에 두 차례 열릴 때도 있다. 1시간 내에 정책·정무·홍보 등에 관한 사안을 담당 비서관이 설명한 뒤 조율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회의 분위기는 상당히 빠르고 역동적이라고 한다. 익명의 청와대 관계자는 “11인 회의는 정무적 판단력이 뛰어나고 대통령의 의중을 잘 파악하고 있는 이 수석이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견이 있거나 쉽게 답을 구할 수 없는 사안은 이 수석이 직접 갈무리하는 경우가 많다. 이슈의 맥을 짚는데, 이 수석만 한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대통령 이미지 통합관리’가 이 회의의 목적이지만 회의 안건은 국정 전반을 망라하고 있다. 진주의료원 폐업 사태와 같은 정책 현안은 물론이고 박 대통령이 당일 발언할 내용과 일정까지 조율한다. 지난 5월 28일 박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최종 확정된 140여개 국정과제를 다듬는 역할도 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취임 100일을 맞은 6월 초 청와대가 별다른 홍보기획안을 내놓지 않은 것도 11인 회의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정부조직법안 처리 지연으로 지각 출범했고 인사 논란 및 ‘윤창중 사건’이 겹쳐 정권 초기 이렇다할 성과물을 내놓지 못했다. 대북 문제도 좀처럼 실타래가 풀리지 않고 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11인 회의에서 ‘취임 100일’은 일종의 금기어로 여겨져 왔다는 게 청와대 관계자의 말이다. 홍보수석실 주도로 박 대통령의 취임 이후 어록을 하드카피본으로 만들어 출입기자에게 제공한 게 취임 100일을 기념한 청와대의 유일한 서비스였다.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이 11인 회의와 관련해서는 일각에서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11인 회의가 국정의 본질보다 대통령 개인의 정치행위에만 초점을 맞춰 움직이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대통령 지지율이나 이미지가 현안보다 우위에 놓일 경우 국정이 뒷전으로 밀릴 수 있다는 우려감의 표시다.
박근혜 대통령은 ‘2인자’를 두지 않는 용인술로 정평이 나있다. 당 대표, 대통령 후보를 거쳐 지난 2월 18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지금까지 2인자를 철저하게 배제해 왔다. 박 대통령의 스타일을 잘 아는 청와대 참모들은 ‘튀는’ 행동을 최대한 자제한다. 지위 고하를 떠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잡음 없이 소임을 다하는 게 청와대 직원들의 전형이 됐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이 출범한 지 100일이 지나면서 청와대 내 이른바 ‘실세’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물론 본인들 스스로는 ‘실세’라고 인정하지 않고 그렇게 불리기도 꺼리지만 권력의 속성상 자연스레 힘이 쏠리는 참모들이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 인물이 이정현 수석이다. 정치권에서는 이 수석이 현 정권의 실세라는 데 이견이 없다. 청와대 내부에서도 “실세 수석”으로 지칭하는 이들이 있다.
이정현 수석은 요즘 아침 출근길에 연무단 지하 목욕탕을 자주 찾는다. 연무단은 청와대 경호처가 관리하는 서울 종로구 창성동 소재 청와대 외곽 건물이다. 이 수석은 지난 6월 4일 정무수석에서 홍보수석으로 수평이동한 후 출입기자들을 만나 “춘추관 지하 목욕탕에서 매일 기자들과 만나 ‘목욕탕 토크’를 하겠다”고 제안한 바 있다. 그러나 청와대를 출입하는 여기자들이 난색을 표해 그의 첫 번째 ‘소통 퍼포먼스’는 물거품이 됐다. 이 수석은 춘추관 지하 목욕탕 대신 올 초부터 애용해온 연무단 목욕탕에서 아침 일정을 시작하는 날이 많다. 이 수석은 연무단 목욕탕에 들렀다가 오전 6시30분경 사무실로 출근한다.
이 수석은 2004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시절 수석부대변인을 맡으며 박 대통령의 참모가 됐다. 2007년 대선 경선 때는 캠프 공보단에 합류했고, 지난해 대선에서 공보단장이라는 중임을 맡았다. 두 차례 대선을 거치며 박 대통령은 이 수석의 성실함과 정무적 능력을 인정했다. 박 대통령은 “내가 하지 않은 말을 한 번도 (기자들에게) 한 적이 없다”면서 이 수석의 대언론 활동에 대해 높은 점수를 주기도 했다.
박 대통령의 신임을 얻은 이 수석은 줄곧 요직에 기용됐다. 당선자 시절 비서실 정무팀장으로 조각(組閣)에 관여했고 정부 출범에 맞춰 정무수석으로 임명됐다. 지난 5월 15일 이남기 전 홍보수석이 ‘윤창중 대변인 성추행 사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홍보수석으로 자리를 옮겨 ‘대통령의 입’으로 복귀했다. 이 수석은 박 대통령과의 두터운 신뢰관계를 기반으로 주요 현안에 대해 직접 보고하는 일이 잦다. 또 유선상으로 박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전달받아 각종 회의 때 대통령의 의중을 전달하는 역할도 맡는다.
이 수석은 또 청와대 인사위원회 멤버로 활동하며 인사 결정 과정에 입김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정부 들어 구성된 청와대 인사위원회는 허태열 비서실장과 유민봉·이정현 수석, 곽상도 민정수석, 그리고 안전행정부에서 파견된 인사비서관 등을 포함해 모두 6명으로 구성돼 있다. 인사와 관련된 최종 결정은 박 대통령이 하지만 후보를 추천하거나 평판을 확인하는 업무는 인사위원회의 몫이다. 윤창중 사건으로 경질된 이남기 전 홍보수석의 경우 이 수석이 추천했다는 게 정설이다. 두 사람은 광주 살레시오고교 동문이다.
지난 4월 중순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은 돌아가면서 매주 일요일 춘추관에 출근하는 기자들과 점심을 하기로 했었다. 관제상 상급자인 유민봉 수석이 첫 오찬 주관자였지만 유 수석 대신 이 수석(당시 정무수석)이 먼저 자리를 마련했다. 그 다음으로 유민봉 수석과 곽상도 민정수석이 출입기자들과 식사를 했다. 5월 둘째 주 주말 이남기 홍보수석 또는 주철기 외교안보수석이 기자단 오찬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윤창중 사건으로 무기한 연기됐고 지금도 중단된 상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청와대 관계자는 “다른 수석들은 기자 40여명과 같이 식사하는 걸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대통령의 철학이나 정치권 움직임, 현안 등을 놓고 1시간 이상 기자들을 상대하기가 버겁기 때문이다. 이런 업무는 이 수석이 먼저 물꼬를 트고 분위기를 잡는다”고 말했다. 이정현 수석은 이 순번제 식사 당번 말고도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식사 자리를 자주 갖는다. 정무수석 시절에도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가장 먼저 챙겼다고 한다. 익명을 전제로 말한, 한 청와대 비서관은 “기자들 입장에서는 기자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이정현 수석을 만난 게 행운”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다른 청와대 관계자는 “이 수석이 언론 관계에서 윤활유 역할을 맡은 게 청와대 내 입지를 공고하게 한 주요 원인”이라며 “정무수석 시절부터 ‘이 수석의 역할은 정무 그 이상’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했다.
박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으로 떠난 지난 5월 초에도 이정현 수석은 썰렁한 청와대에 출근한 각 언론사 2~3진 출입기자들에게 앞장서서 간식을 제공하는 마음 씀씀이를 보였다. 당시 이 수석이 춘추관에 간식용 피자를 먼저 제공하자 다음 날 유민봉 수석이 치킨과 골뱅이를, 그 다음 날에는 곽상도 수석이 떡볶이를 출입기자들에게 돌렸다. 이 간식 릴레이 또한 윤창중 사건이 터지면서 중단됐다.
격주로 열리는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 회의에서도 직제와 상관없이 주요 참석자들은 이 수석의 말과 행동에 귀를 기울이곤 한다. 누구보다 박 대통령의 발언을 잘 이해하고 대응방안을 내놓기 때문에 그와 현안에 대해 논의하는 일이 잦다. 홍보수석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중요 사안에 대한 정무적 판단은 이 수석에게 의지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한다.
이 수석은 최근 일간지 정치면 기사에 가장 많이 등장한 ‘청와대 관계자’다. 이 수석은 매일 오전과 오후 한 차례씩 춘추관을 찾는다. 11인 회의를 마치고 오전 8시30분경 춘추관에서 오전 간담회를 열고 오후 4~5시경 다시 오후 간담회를 갖는다. 남북대화 재개 문제가 긴박하게 전개될 때는 하루 세 번 기자간담회를 갖기도 했다.
홍보수석실 직원들은 이 수석의 등장으로 일감이 늘었지만, 국정철학을 잘 이해하는 수석이 왔다는 점에서 내심 환호하고 있다. 기자들도 홍보수석이 수시로 간담회를 열어 현안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호평을 아끼지 않는다. 청와대를 출입하는 주간조선 김대현 기자는 주간조선에??? “이 수석은 대통합위 구성 과정에서 김경재 전 의원 등이 제외된 배경을 물으면 비보도를 전제로 성실하게 답변한다. 기자들이 궁금해 할 만한 건 본인이 팩트를 취재해 전달해 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 수석은 홍보수석이 된 건 불과 20여일 남짓이지만 기자들의 질문 공세를 피해가는 그의 답변 솜씨는 어록으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지난 6월 4일 첫 간담회에서 “공석이 된 정무는 누가 지휘하느냐”는 질문에 “1분 전까지 내가 했다”면서 즉답을 피했고, 6월 6일 오후 “(남북 대화 재개와 관련) 미리 북한에서 연락이 오지 않았느냐”고 묻자 “내 전화번호를 잘 모르는가 봐”라는 재치 있는 입담으로 웃어 넘겼다. 6월 7일 오후에는 일부 기자가 “최외출 (영남대) 교수가 지역발전위원장으로 내정됐나요?”라고 묻자 “요즘 청와대 인사팀이 여러 곳에 있는 것 같다. 신문사 인사팀이 홍보수석한테도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되받았다.
검찰 수사와 관련한 질문에는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수사는 검찰에게 물어보라”고 말했고, 북측 대표가 서울을 방문할 경우 박 대통령을 접견할지 여부를 묻는 기자에게는 “첫선 봤으면 그 다음 데이트 장소만 생각하자. 아들 낳으면 영국(유학) 보낼까 하지 말고”라고 말해 기자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6월 14일자 조선일보에 ‘대통령 관사를 지키는 진돗개가 자주 출입하는 이 수석을 알아보고 짖지 않는다’는 기사가 실렸는데, 이 수석은 이날 오전 간담회에서 “내가 같은 종이라서 그랬다. 난 58년 개띠”라고 농을 던졌다.
때로는 당 수석부대변인이나 공보단장으로 있을 때처럼 이른바 ‘쌈닭’ 기질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회담 대표의 격(格)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산된 남북당국자 회담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자, 이 수석은 발끈하며 “저쪽에서는 차관보가 나오는데 우리는 장관이 나가야 하는 이유가 뭐냐”면서 언성을 높여 일부 기자가 말리기도 했다.
이 수석을 잘 아는 새누리당 한 관계자는 익명을 전제로 “정무수석에서 홍보수석으로 이동할 때 이 수석이 썩 내켜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지만 자리를 옮기고 나서는 온몸을 던져 일하고 있다. 원래 성격이 그런 사람이다. 정무 능력을 갖춘 최고의 홍보수석으로 평가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기관리가 철저한 이 수석은 남을 비판하는 일이 드물다. 그런 이 수석도 지난 5월 살레시오고 동문 모임에 참석했을 때 윤창중 사건에 대해 쓴소리를 내뱉었다고 한다. 이 수석은 이 자리에서 “현안을 챙기고 기자들을 상대하느라 하루 종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을 보내야 하는 대변인이 대통령을 수행해 외국에 나갔는데 술을 마시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워커홀릭’이라는 평가를 받는 그는 평소 사석에서 “청와대에 들어온 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다는 걸 느꼈다. 오늘이 청와대 생활의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사력을 다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朴어록' 5권 만든 대통령 意中 해설자… 國政 곳곳 '입김'
(조선일보 2013.07.06 03:08)
['파워 10人' 릴레이 탐구] ⑦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
- 즉시 대응 강조하는 '王수석'
24년간 당직자로 와신상담, 총리 주례보고에도 꼭 참석
- '苦言 못 한다'는 비판도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 높지만 쓴소리 할 수 있을지는 의문
지난 3일 청와대 기자실에서 오후 간담회를 하고 있던 이정현(李貞鉉·55) 홍보수석은 휴대전화에 뜬 발신번호를 보더니 말을 하다 말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남이 듣지 못하게 차 안에 들어가 전화를 받는 그를 보며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VIP(박근혜 대통령)구먼…."
◇대통령의 '意中 해설자'
이 수석은 가끔 식사를 하다가도 숟가락을 내려놓고 전화를 받으러 나간다. 그는 내색하지 않지만 태도나 말투에서 전화 상대가 박 대통령이란 사실이 드러날 때가 많다.
어떤 사안을 두고 논쟁이 생겼을 때, 이 수석이 박 대통령 의중(意中)의 해설자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다. 취임 초기 지역 현안을 논의하는 회의에서 국토교통부 고위 당국자가 동남권 신공항 문제에 미온적 태도를 보였다. 이 수석은 "신공항이 필요하다는 것은 대통령의 뜻이었다"며 그동안 박 대통령이 했던 발언을 죽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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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와대 이정현 홍보수석은 박근혜 대통령의 뜻을 잘 알고 박 대통령의 뜻을 그대로 집행하는 사람으로 통한다. 공석인 정무수석 역할도 사실상 함께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은 이 수석이 춘추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진한 기자
대선 후보 시절 박 대통령은 사석(私席)에서 이 수석에 대해 "그분은 한 번도 제가 하지 않은 말을 옮긴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수석은 2004년부터 지금까지 박 대통령이 했던 중요 발언과 연설을 A4용지에 정리한 뒤 제본해서 책처럼 만든 '박근혜 어록(語錄)'을 5권 갖고 있다. 그는 이 어록을 종잇장이 해질 만큼 자주 읽는다.
국정 곳곳에 입김이 미치다 보니 자연히 '왕수석'이란 말이 나오지만, 그는 이런 소리를 제일 듣기 싫어한다. "나는 졸(卒)수석"이라며 같이 일하는 행정관들에게도 "정부 부처나 외부에 완장 찬 것처럼 고압적으로 대하려면 사표 낼 각오를 하라"고 말한다.
◇총리 주례보고에도 참석
지난 6월 3일 박 대통령은 이남기 전 홍보수석의 사의 표명으로 공석(空席)이 된 홍보수석에 이정현 당시 정무수석을 수직 이동시켰다. 이 수석은 새벽 5시쯤 일어나 조간신문 등에 난 주요 기사를 점검하고, 오전 6시 20분쯤 서울 관악구 봉천3동의 집을 떠난다. 6시 40분쯤 청와대에 도착하면 경호실에 딸린 이발소에 들른다. "기자들에 대한 예의로" 머리를 정돈하고 7시쯤 바로 기자실로 출근한다.
지난 2011년 3월부터 암(癌) 투병 중인 아내가 입원 치료를 받는 기간에는 병실에 들렀다가 출근한다. 아침식사는 비서동인 위민관 구내식당에서 한다. 저녁 약속이 있어 오후 6시 30분쯤 밖에 나갔다가도, 밤 9~10시쯤 사무실로 돌아와서 보고서를 읽는 날이 많다. 퇴근 시각은 보통 11시를 넘긴다.
'현안 즉시 대응'을 강조하기 때문에 박 대통령의 모든 일정을 수행하면서도 각종 회의에 꼭 참석한다. 지난 정부까지 홍보수석이 참여한 적 없는 총리 주례보고에도 빠지지 않는다. 새벽이나 심야에도 장관이나 수석들에게 바로 전화를 거는 일이 잦다.
◇苦言 못 한다는 비판도
그의 적극성에 대해서는 호평이 많다. 민주당 김한길 대표 비서실장으로 이 수석과 자주 접했던 노웅래 의원은 "해결이 되든 안 되든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 중요한데, 야당(野黨)의 말도 일단 열심히 듣는다"고 말했다. 전남 곡성 출신인 그가 호남 일이라면 무엇이든 도와주려고 하기 때문에, 민주당 내 호남 의원들은 특히 그에게 호의적이다.
반면 친박(親朴) 내부에서조차 "박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으로는 갑(甲)인데 고언(苦言)을 못한다"는 말이 나온다. 민주당의 정성호 원내수석부대표는 "붙임성 있게 야당과 소통하려고 하지만 대통령에게 쓴소리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런 비판에 대해 그는 사석에서 "나는 항상 대장(박 대통령)께 '이런 칭찬도 있고 저런 비판도 있다'고 말씀드린다"며 "장점이 3개라면 단점도 3개 말씀드리고, 판단은 그분의 몫"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24년간 당직자로 와신상담
"복사하던 이정현이 정무수석이 됐다." 지난 2월 19일 박 대통령이 그를 정무수석에 내정하자, 새누리당 일각에선 이런 말이 나왔다. 이 수석은 1984년 민정당에 입당해, 2008년 한나라당 비례대표 의원이 되기까지 24년간 당료(黨僚) 생활을 했다. 주로 홍보 분야에서 일했던 그가 대변인실에서 자료를 복사해 주거나, 잡무(雜務)를 거들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다. 2004년 총선 직후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 대통령이 그를 수석부대변인으로 임명했을 때부터 '박근혜 맨'이 됐다.
그는 주변에 "정당 간사부터 차장, 부장, 국장, 국회의원, 최고위원까지 모든 단계를 밟아 청와대에 왔다"며 "어려운 일이 있어도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촌놈이 여기까지 왔으면 본전 이상이란 생각을 하면 힘이 난다"고 말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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